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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26일 목요일
Melodiya / Edvard Syomin - Russian Piano School, Vol. 19
모든 예술 분야가 다 그렇겠지만, 음악계 역시 새로운 인물, 새로운 작품, 새로운 해석을 요구하고 기다린다. 모든 유행이 너무나도 빨리 진행되고 있는 요즘 음악시장도 예외는 아니어서 청중들의 눈과 귀는 새로운 “스타”의 탄생에 항상 쏠려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에드바르드 시요민은 멜로디야사가 재발굴(이런 표현이 가장 적당할 것 같다.)해낸 인물로서 거기에는 별다른 특이성이나 돌연한 계기도 없었다고 보인다. 게다가 우리나이로 계산해도 쉰 살이 넘은 나이에다 아직 유명해지지도 않았다. 소위 “중고신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러시아는 워낙 예외적 사건이 많은 곳이므로 한 번쯤 주의 깊게 이 “새로운” 피아니스트를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로컬한 피아니스트 중 하나로 평가받던 라자르 베르만도 카라얀과의 협연 이후 마흔이 넘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지 않았던가.
에드바르드 시요민은 1945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엔지니어의 집안에서 태어나 음악적인 환경에서 자라지 못했으나, 8살 때부터 나탈리아 모이세예바에게 피아노를 배웠고 14세 때 그네신 아카데미에 들어가 이굼노프의 제자인 올렉 보쉬냐코비치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후에 타티아나 니콜라예바를 사사하여 “수준 높은 기교적, 음악적 완성도와 함께 자유로운 자기표현의 능력을 터득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렇게 착실하게 음악학도로서의 길을 걸어가던 시요민은 장래가 촉망되던 젊은 피아니스트였으나 곧이어 커다란 난관을 만나게 된다. 바로 그가 참가하려던 영국의 리즈 콩쿠르에서 연주하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당시 입상이 확실시되었던 그는 집안상의 문제로 출국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알려졌는데 그 이유는 확실치 않다. 정치적 박해였을까? 아무튼 그 이후로도 소련 정부는 시요민이 러시아 외에 다른 나라에서 활동하는 것을 금지해버렸고, 심지어는 생계가 곤란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런 그를 구해준 것은 멜로디야(구소련의 국영 레코드 회사)였다. 그들은 시요민의 생계를 보장해주었고 그의 녹음이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함에도 그가 계속해서 피아니스트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왔다. 이 앨범은 그의 여러 가지 녹음 중의 베스트를 취한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아주 독창적인 레퍼토리의 구성이다. 어찌된 일인지 1969년부터 1976년까지의 시요민의 녹음이 모두 폐기되어 버려서 그의 초기의 연주를 들을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버라이어티가 풍부한 프로그램들이며 음질 상으로도 우수하여 무척 흥미롭다. 어떤 피아니스트의 음반을 한 장만 듣고 그 연주를 평한다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겠지만 막상 접해본 시요민은 예상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다. 잘 훈련된 손과 팔목을 갖고 일사천리로 쳐나가는 테크닉은 말할 것도 없으며 불행한 과거를 갖고 있었던 피아니스트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맑고 밝은 톤 칼라를 구사하고 있다. 또 이른바 “살아있는 녹음”이라고 느껴지는 즉흥성과 정곡을 찌르는 탄력 있는 해석과 리듬감이 너무나도 잘 어우러져 있어, 지명도가 없고 낯선 곡들을 연주할 때도 난해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장점도 갖고 있다. 시요민이 준비한 프로그램을 하나씩 살펴보자.
생전에 “피아니스트의 피아니스트”라는 최고의 호칭으로 불리며 시대를 풍미했던 폴란드의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레오폴트 고도프스키는 듣는 이를 아연하게 할 만한 테크닉과 힘을 소유했던 명연주가로 남아있지만, 자작곡의 연주와 함께 많은 선배작곡가들의 작품을 피아니스틱하게 어레인지하는 편곡자로서도 최고였다. 장 필립 라모의 작품 세 곡은 하프시코드를 위한 소품들인데 고도프스키는 리듬의 분할과 복화음의 겹치는 활용 등으로 연주 효과를 내기에 알맞게 자유로운 편곡을 꾀하고 있다. 특히 3번 트랙인 “탕부랭”이 유명하며 그 가락은 우리에게 동요로 만들어져 친숙하다. 고도프스키의 시공을 초월한 편곡이 신선하며 시요민의 연주 역시 라모와 고도프스키 사이에 서서 중용을 지키는 솜씨를 보여준다.
쇼팽이 택한 파가니니의 멜로디 가장조는 흥겹고 축제 풍의 가벼운 것이다. 쇼팽의 초기 작품답게 특유의 어두운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고 기본 반주형을 그대로 지켜나가는 소규모의 곡이지만, 반음계 진행이나 세밀한 아고긱(악보를 연주하거나 노래할 때 템포에 미묘한 변화를 줘서 다양한 느낌을 표현하는 방법)에서, 역시 쇼팽의 눈을 통해서 본 파가니니의 변형된 모습이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또한 “자장가”는 이 음반에서 유일하게 스탠더드한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시요민은 더없이 맑고 깨끗한 음색으로 시종일관 연주하여 호감을 준다. 게다가 단순한 왼손 반주에서 보이는 뉘앙스의 변화는 정말 놀라우며, 그의 공명감각도 쇼팽의 작품에서 요구되는 바로 그것이다.
시요민이 찾아낸 요절한 작곡가 알렉세이 스탄친스키는 1909년 11세의 나이부터 그레차니노프, 타네예프 등과 작곡을 공부했으며 이굼노프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스탄친스키는 26년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러시아 민속음악의 연구에 힘을 기울였다고 알려졌으며, 대위법의 대가이기도 했다. 확실히 그의 프렐류드 작품에서 느껴지는 어둡고 무거운 울림은 러시아의 넓고 깊은 대지에서 빨아들인 듯하며, 동시대 러시아 작곡가들의 서구 지향적인 성향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스크리아빈이나 라흐마니노프와 마찬가지로 니콜라이 메트너 역시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졸업 시 금메달을 획득한 훌륭한 피아니스트였고 40년 이상 전 유럽을 돌면서 연주 활동을 펼쳤으며 후에는 영국 런던에서 정착했다. 스크리아빈이 피아노 포엠을 창조했고 라흐마니노프가 “음의 그림-연습곡”을 만드는 동안 메트너는 좀 더 고전적이고 러시아적인 향수가 감도는 “스카즈카”(옛 이야기)라는 장르에 힘을 쏟았다. 그가 남긴 스카즈카는 30곡 가량이 있는데 시요민이 선택한 두 곡은 작품 20으로, 최근 재조명되고 있는 메트너의 피아노곡 중 특히 유명하며 초기 작품인 만큼 선배인 라흐마니노프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진다.
올렉 에이게스는 음악가들을 여럿 배출한 음악 명문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다른 러시아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던 그는 대가인 에곤 페트리에게 피아노를 배운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다. 그의 네 번째 소나타는 1930년대 말경 쓰였으며,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토카타의 요소를 차용하여 소나타의 주제를 발전시키는 데에 사용했다는 특징이 있다. 또한 푸가 형식도 부분적으로 쓰이는 듯 복잡한 구성을 보이는데 시요민은 마치 고전파 작곡가의 소나타를 연주하듯이 쉽고 명쾌하게 요리해내고 있다.
알베니스의 두 개의 작품은, 이 작곡가의 다른 작품들이 그렇듯이 스페인적인 이디엄에 가득 차고 상당히 수준 높은 명인기를 요구하는 것들이다. 또한 라틴 음악에서 요구되는 리듬감과 탄력은 타고난 소질이 없이는 터득하기가 무척 어려운데, 시요민은 이 작곡가를 오래 탐구해온 피아니스트답게 노련한 솜씨를 보여준다.
부조니의 “카르멘 판타지아”는 오랜 세월을 두고 많은 작곡가들에게 매력적인 소재로 쓰인 이 비제의 오페라 편곡 중 매우 독창적이며 특이한 작품이다. 거침없이 펼쳐지는 카르멘의 분방함과 퇴폐적인 아름다움, 그리고 뜻하지 않은 비극적 결말. “창백한 카르멘”이랄까? 이탈리아 작곡가 치고는 드물게 염세적이고 사색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던 부조니를 다시금 생각나게 하는 걸작이다. 시요민의 테크닉이 빛을 발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마지막 곡은 요한 슈트라우스-고도프스키의 “예술가의 생애”이다. 그 기교적 어려움으로, 교향악적 스케일의 방대함으로 인해 이 곡을 제대로 쳐낼 수 있는 피아니스트는 흔치 않은데, 시요민은 마치 “손끝으로” 연주하듯이 간단하게 곡에서 요구되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넘어 보인다. 게다가 단순히 많이 연주해서 능숙해진 것뿐만이 아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야말로 “직접적인 흥분”이 담긴 즉흥적 표정의 고도프스키를 그려내는데 성공하고 있다. 이른바 19세기 말의 비르투오소들의 모습이 그대로 살아있는 멋진 연주라고 하겠다.
★ 필자 : 김주영 (피아니스트)
서울 출생. 서울 음대 기악과 졸업. 러시아 모스크바 음악원 아스피란트(박사) 과정 졸업.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사무엘 파인베르크의 제자인 지나이다 이그나체바 교수를 사사. 유학 중 모스크바 프로코피에프 콩쿠르, 파리 인터내셔널 그랜드 콩쿠르 등에서 입상.
Track
01 Rameau/Godowsky: Renaissance No. 3 Menuet in a (Allegretto grazioso) / 라모 르네상스 3번 <미뉴에트> (고도프스키 편곡)
02 Rameau/Godowsky: Renaissance No. 1 Sarabande in E (Largo, ma non troppo) / 라모 르네상스 1번 <사라방드> (고도프스키 편곡)
03 Rameau/Godowsky: Renaissance No. 6 Tambourin in e (Allegro) / 라모 르네상스 6번 <탕부랭> (고도프스키 편곡)
04 Chopin Variation in A (Souvenir de Paganini, B. 37) / 쇼팽 변주곡 <파가니니의 추억>
05 Chopin Berceuse in Db, Op. 57 / 쇼팽 자장가
06 Stanchinsky 3 Preludes No. 1 in c# (Lento) / 스탄친스키 3개의 프렐류드
07 Stanchinsky 3 Preludes No. 2 in D (Con moto)
08 Stanchinsky 3 Preludes No. 3 in e flat (Adagio)
09 Stanchinsky 5 Preludes No. 1 in c (Andante) / 스탄친스키 5개의 프렐류드
10 Stanchinsky 5 Preludes No. 2 in Ab/f (Lento espressivo)
11 Stanchinsky 5 Preludes No. 3 in b flat (Presto)
12 Stanchinsky 5 Preludes No. 4 in b (Animato)
13 Stanchinsky 5 Preludes No. 5 in c (Largo)
14 Medtner Fairy-Tales Op. 20 No. 1 in b flat / 메트너 <요정 이야기> 작품 20-1
15 Medtner Fairy-Tales Op. 20 No. 2 in b/ 메트너 <요정 이야기> 작품 20-2
16 Oleg Eiges Sonata-Toccata No. 4 in f#/E, Op. 15: 1. Garve / 올렉 에이게스 <토카타 풍의 소나타> 4번
17 Oleg Eiges Sonata-Toccata No. 4 in f#/E, Op. 15: 2. L'istesso tempo
18 Oleg Eiges Sonata-Toccata No. 4 in f#/E, Op. 15: 3. Allegro moderato
19 Albeniz 'Navarra' - Buravura fantasia (completed by Severac): Allegro non troppo / 알베니스 나바라 (세브락 완성)
20 Albeniz/Godowsky: Tango in D, Op. 165 No. 2 from Suite 'Espana' / 알베니스 탱고 (고도프스키 편곡)
21 Busoni Chamber Fantasia on Bizat's Opera 'Carmen': Allegro deciso / 부조니 <카르멘 판타지아>
22 Godowsky Kunstlerleben: Symphonic Metamorphoses on Johann Strauss' Waltz of the same name / 요한 슈트라우스 <예술가의 생애> (고도프스키 편곡)
A Dark Hose: Edvard Dmitriyevich Syomin (born 1945) / 다크호스 - 에드바르드 드미트리예비치 시요민
As yet barely known in the West, Edvard Syomin was born in Moscow on 6 February 1945, some three months before Hitler's final capitulation. His father was an engineer involved in planning and building the city's Underground, which Myaskovsky had earlier hymned in rhapsodical verses. He came from an unmusical family, and it was not until he was eight years old that he finally came to music, a discovery that he owed to his own initiative. His first teacher was Natalya Mikhailovna Moiseyeva, a pupil of Karl Avgustovich Kipp, who taught at the Moscow Conservatory and who, in turn, had studied under Paul Pabst.
서방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에드바르드 시요민은 1945년 2월 6일 모스크바에서 히틀러가 최종 항복을 하기 세 달 전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미야스코프스키가 일찍이 거창한 열정으로 찬양했던 도시의 “지하”를 계획하고 건설하는 것과 관련된 엔지니어였다. 그는 비음악적인 가정 출신이며, 8세에 그의 결단력 때문에 발견했던 음악에 마침내 나섰다. 그의 첫 스승은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가르치고 이어서 파벨 파브스트를 사사했던 카를 아브구스토비치 키프의 제자인 나탈리아 미하일로프나 모이세예바였다.
A Difficult Start in Life / 인생에서의 힘든 시작
Syomin was fourteen when he entered the Gnesin Institute (now the Russian Music Academy). On graduating, he started work as a research assistant with Oleg Dragomirovich Boshnyakovich, who had studied with Igumnov and Neuhaus, later seeking the advice of Tatiana Nikolayeva, who subsequently spoke of his "profound musical culture, virtuosity and freedom of self-expression". Such were his abilities that Syomin deserved to become far better known both at home and abroad, but adverse circumstances, including, not least, the prevailing regime, prevented him from making a career for himself as quickly as he might otherwise have done. If he had been able to take part in the Leeds International Pianoforte Competition, for example, he would undoubtedly have won a prize, but a family tragedy prevented him from participating. It was a doubly unfortunate episode in Syomin's life, since the authorities then took it as an excuse to prevent him from leaving the Soviet Union ever again.
시요민이 그네신 음악학교(현재 러시아 음악원)에 들어갔을 때에는 14세였다. 졸업하면서 그는 이굼노프와 네이가우스의 제자였던 올렉 드라고미로비치 보쉬냐코비치의 연구 조교로 일하기 시작했고, 나중에 타티아나 니콜라예바를 사사하여 “수준 높은 기교적, 음악적 완성도와 함께 자유로운 자기표현의 능력을 터득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시요민은 국내외에서 훨씬 더 잘 알려질 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만, 적어도 지배적인 체제를 포함한 불리한 환경으로 인해 그가 그렇지 않다면 했을 것이 틀림없는 만큼 빨리 경력을 쌓을 수 없었다. 예를 들어, 그가 리즈 국제피아노콩쿠르에 참가했다면 의심의 여지없이 입상할 수 있었지만, 집안상의 문제로 참가할 수 없었다. 시요민의 인생에서 갑절로 불행했던 에피소드였는데, 당국이 소련을 다시 떠나는 것을 막기 위한 구실로 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Survival Thanks to a Melodiya Recording / 멜로디야사로 인한 생존
For the majority of pianists, such an enforced break would have meant the end of their careers, but Syomin was curiously fortunate in the midst of his misfortunes: the recording company Melodiya signed him up and guaranteed his livelihood, ensuring that, in spite of his lack of official engagements and corresponding publicity, he none the less kept his hand in as a pianist. Between 1969 and 1998 he made numerous recordings for the company thanks, not least, to the encouragement of the composer Konstantin Kalinenko and the editor-in-charge of Moscow Radio, Nikolai Myasovedov. Among these recordings were many piano works that were rarely, if ever, performed in Russia. We are particularly fortunate that a recording of Chopin's "Berceuse" has survived from 1969, but Syomin's other recordings from this period have all been destroyed. From the period after 1976 there are surviving recordings of works by Liadov, Stanchinsky and Medtner, as well as others of western composers from Rameau and Strauss to Busoni and Albeniz, (The Rameau and Strauss pieces exist only in arrangements by Leopold Godowsky.)
대다수의 피아니스트들에게 그러한 강요된 휴식은 그들의 직업이 끝났음을 의미했을 것이나, 그는 불행한 가운데 이상하게도 운이 좋았다. - 멜로디야 레이블은 그와 계약하고 생계를 보장해주었으며, 공식 계약과 홍보가 부족함에도 그가 계속해서 피아니스트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왔다. 1969년부터 1998년까지 그는 특히 작곡가 콘스탄틴 칼리넨코와 모스크바 라디오 담당 편집인 니콜라이 미야소베도프의 격려 덕분에 많은 음반을 발매했다. 이 녹음들 중에는 러시아에서조차 거의 연주되지 않은 피아노 작품들이 많이 있었다. 우리는 특히 쇼팽의 <뱃노래>가 1969년에 생존한 것에 대해서 다행이지만, 이 시기 시요민의 다른 녹음들은 모두 폐기되었다. 1976년 이후부터 리아도프, 스탄친스키, 메트너의 남아있는 작품들은 물론 라모와 슈트라우스부터 부조니와 알베니스까지 서구 작곡가들을 녹음한 다른 것들이 남아있다. (라모와 슈트라우스의 곡들은 레오폴트 고도프스키에 의한 편곡들로만 존재한다.)
Although the Soviet cultural authorities were able to prevent the sale of LPs, they were powerless to stop them from being broadcast on the radio. Significantly, it was an organisation with links with the West, "Spain-USSR", that sponsored the pressing of a double LP of which we shall have more to say in due course.
소비에트 문화 당국은 LP 판매를 막을 수 있었지만 라디오 방송에서 녹음을 중단시키는 것은 힘들었다. 의미심장하게도, 그것은 우리가 당연히 더 말할 것이 있는, 두 장의 LP를 제작하는 것을 후원한 서방, “스페인-소련”과 관련이 있는 조직이었다.
Small Rooms and Great Models / 작은 홀들과 위대한 모델들
Syomin still has to spend most of him time teaching, since the halls in which his admirers can hear him are small and the receipts correspondingly meagre. Leading concert agencies have no time for him. He is still regarded as a rank outsider, except by those in the know. His close circle of supporters is especially fond of his highly personal readings of Prokofiev's Seventh Sonata, Liszt's "Rhapsodie espagnole", Schubert's "Wandererfantasie" and Chopin's nocturnes, with their world of sophisticated tone-painting. The works by Busoni, Albeniz and Godowsky that he plays are not in the repertory of any other Russian pianist.
시요민은 여전히 그의 시간을 가르치는 데에 보내야 하는데, 그의 추종자들이 그를 들을 수 있는 홀들이 작고 변변찮은 수입 때문이다. 주요한 콘서트 기획자들이 그를 싫어한다. 그는 여전히 지인들을 제외하고는 완전 문외한으로 여겨진다. 그와 가까운 지지자들은 세련된 음화(音畵 : 표제 음악에서 가사나 이야기를 음악적으로 묘사하는 일)의 세계를 가진 프로코피에프 소나타 제7번, 리스트 <스페인 랩소디>, 슈베르트 <방랑자 환상곡>, 쇼팽의 녹턴들을 매우 개성적으로 연주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가 연주하는 부조니, 알베니스, 고도프스키의 작품들은 (러시아 피아노 스쿨 음반에 나오는) 다른 러시아 피아니스트들의 레퍼토리에 없다.
With his profoundly poetical touch, this astonishing chamber pianist, who has made a virtue of a necessity, also has his household gods: he swears by Anton Rubinstein, Sergei Rachmaninov, Josef Hofmann, Vladimir Horowitz and Emil Gilels - an impressive list of models.
그의 깊은 시적인 터치로, 이 놀라운 홀의 피아니스트는 부득이하게 해야 하는 일을 자신에게 도움이 되게 했으며 그의 가정의 수호신도 가지고 있다. - 그는 안톤 루빈스타인,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유제프 호프만,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에밀 길렐스를 깊이 신뢰한다. - 인상적인 모델들의 명단이다.
An Indefatigable Arranger: Leopold Godowsky / 지칠 줄 모르는 편곡자 - 레오폴트 고도프스키
Of all the composers included in the present recording, pride of place must go to Leopold Godowsky: an outstanding virtuoso of Polish birth, he is entirely worthy of taking his place in the ranks of impassioned arrangers of other composers' music, a tradition that extends from Liszt to Busoni and beyond and that has its orchestral counterpart in conductors such as Stokowski, who adapted keyboard music for the orchestra. The cosmopolitan Godowsky was born in Vilna (now Vilnius), studied in Berlin and Paris (where his mentors included Saint-Saens) and taught in the United States, Vienna and Berlin. He settled in the United States in 1914 but remained a peripatetic, captivating audiences throughout the world with his playing and with his unique adaptations of great works. Our pasticcio comprises three more or less free transcriptions by Godowsky: the Rameau is a piano arrangement of music originally scored for the harpsichord; the Albeniz is a virtuoso elaboration of what was originally a piano piece; and the work by Johann Strauss is brilliant Lisztian paraphrase, the exuberant sonorities of which suggest symphonic textures on the part of a pianist-composer whose style is almost improvisatory.
현재 녹음에 포함된 모든 작곡가들 중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중요한) 자리는 레오폴트 고도프스키에게 가야 한다. 폴란드 출신의 뛰어난 비르투오소인 그는 다른 작곡가들의 음악에 대한 인상적인 편곡자들 중에서 그의 자리를 차지할 가치가 있는데, 리스트부터 부조니와 그 이후까지 확장되는 전통은 건반 음악을 오케스트라를 위해 편곡했던 스토코프스키 같은 지휘자들의 관현악적인 대응에 해당된다. 코스모폴리탄(세계인)인 고도프스키는 빌나(현재 빌뉴스)에서 태어나 베를린과 파리(그의 멘토로는 생상스를 포함)에서 공부했으며 미국, 비엔나, 베를린에서 가르쳤다. 그는 1914년 미국에 정착했으나, 연주와 위대한 작품들에 대한 자신만의 독특한 적용을 통해 전 세계의 청중들을 사로잡는 순회자로 남았다. 우리의 파스티치오(합성작품, 여기서는 편곡한 작품)는 고도프스키에 의한 3개 이상 또는 더 적은 자유로운 편곡들로 구성된다. - 라모의 작품은 원래 하프시코드를 위해 작곡된 음악의 피아노 편곡이다. - 알베니스의 작품은 원래 피아노곡이었던 것의 거장적인 완성이다. - 그리고 요한 슈트라우스의 작품은 화려한 리스티안(리스트적인) 패러프레이즈로, 거의 즉흥적인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의 일부에서 교향적인 텍스처를 제안하는 활기 넘치는 듣기 좋은 곡이다.
Chopin Seen through Paganini's Eyes / 파가니니의 시각을 통해 보이는 쇼팽
There follows another, substantially earlier paraphrase of a piece by the inventor of the cult of the star performer, the devil's violinist himself, Nicolo Paganini. That Franz Liszt fell under the spell of the Genoan violinist and was inspired to become the "Paganini of the piano" is sufficiently well known. Less familiar is the fact that Chopin - like Syomin, a withdrawn and aristocratic figure who preferred the intimate salon to the echoing concert hall - was likewise drawn to Paganini: his A major Variations were written in 1829 in the wake of the violinist's visit to Warsaw.
거기에 또 다른, 스타 연주자의 유행의 창안자로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인 니콜로 파가니니에 의한 곡에 대한 매우 초기 작품인 패러프레이즈가 이어진다. 프란츠 리스트가 제노바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의 영향을 받아 “피아노계의 파가니니”가 되는 것에 대한 영감을 받았던 것은 충분히 잘 알려져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쇼팽도 - 울려 퍼지는 콘서트홀보다 친밀한 살롱을 선호했던 내성적이고 귀족적인 시요민처럼 - 마찬가지로 파가니니에 끌렸다는 것이다. - 그의 변주곡은 바이올리니스트가 바르샤바를 방문한 결과로 1829년에 쓰였다.
A Late Lullaby / 뒤늦은 자장가
Fourteen years later the proven master wrote his only berceuse. In D flat major, it proves how few structural elements a genuine composer needs: a single-bar ostinato in the left hand extends over no fewer than 72 bars, alternating between tonic and dominant and thereby fulfilling the aims of a lullaby, relaxing, calming and inducing a feeling of drowsiness. The right hand etches in the simple melody, which is heard sixteen times in total, but which sounds different each time as a result of more and more new figurations, thereby avoiding the aesthetic danger of monotony - after all, neither the pianist nor his public is meant to fall asleep.
14년 후 입증된 마스터는 그의 유일한 자장가를 썼다. 내림D장조에서 이 곡은 진정한 작곡가가 요구하는 구조적인 요소들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한다. - 한 마디 단위의 왼손 오스티나토(고집스럽게 반복되는 음형)는 토닉(으뜸음인 Db음)과 도미넌트(딸림으로 으뜸음에서 완전 5도 위인 Ab음) 사이를 번갈아 나오게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장가의 목표를 달성하고 휴식하고 진정시키고 졸린 느낌을 유발하면서 72마디까지 확장하지 않는다. 오른손은 전체적으로 16번 들리는 단순한 멜로디로 부각시키지만, 점점 더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매번 다른 소리를 내며 따라서 단조로움의 심미적인 위험을 피한다. - 결국 피아니스트도 대중도 마찬가지로 잠들 수 있다.
Chopin Berceuse in Db, Op. 57 / 쇼팽 자장가에서 왼손의 오스티나토
A Promising Start but a Premature End / 조짐이 좋은 시작 그러나 예상보다 이른 종말
Among composers who died at a tragically early age - one inevitably thinks here of Schubert, Weber, Pergolesi and Mozart - few suffered a more grievous fate than Alexei Stanchinsky, who died in 1914, at the age of twenty-six, in circumstances that have never been fully explained. With its curious stylistic mixture of unusual components, his music speaks of the Russian countryside where he died and of a simple, rural life. He was eleven when he began studying composition in 1909 with Alexander Grechaninov and Sergei Taneyev, who, in turn, had studied with Tchaikovsky. His piano teachers were Konstantin Eiges (see below) and Konstantin Igumnov. He felt a strong attachment to the folk music and customs of his native Russia: of its folk music, he once said that he was "convinced that its beauty is reflected in me and in my works in a thoroughly uncanny way". At the same time, his works contain unmistakable echoes and reminiscences of Taneyev's strict counterpoint (Taneyev was regarded as an authority on fugue), Grieg's melancholy, Scriabin's harmonic refinements and the early Prokofiev's jaunty modernity.
비극적으로 일찍이 사망한 작곡가들 중에서 - 필자는 불가피하게 슈베르트, 베버, 페르골레지, 모차르트를 생각하는데 - 결코 완전히 설명된 적이 없는 상황에서, 1914년 26세에 사망한 알렉세이 스탄친스키보다 더 통탄할 운명을 겪은 사람은 없다. 특이한 구성 요소들이 별난 양식으로 혼합된 그의 음악은 그가 사망했던, 단지 전원생활을 했던 러시아의 시골을 말한다. 그가 1909년에 작곡을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는 11세였는데 알렉산더 그레차니노프와 세르게이 타네예프를 사사했으며 이어서 차이코프키를 사사했다. 그의 피아노 스승은 콘스탄틴 에이게스(아래 참고)와 콘스탄틴 이굼노프였다. 그는 조국 러시아의 민속음악과 풍습에 대해 강한 애착을 느꼈다. - 러시아의 민속음악에 대해 그는 “그것의 아름다움은 나와 내 작품들 안에서 철저하게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반영되었다는 것을 확신했다”고 말했다. 동시에 그의 작품들은 타네예프의 엄격한 대위법(타네예프는 푸가의 권위자로 여겨졌다.), 그리그의 우울함, 스크리아빈의 세련된 화성, 초기 프로코피에프의 경쾌한 근대성의 틀림없는 메아리와 추억을 함유한다.
Triumph in Exile / 망명의 성공
Others were more fortunate, even if, as a result of political developments at home, they found their fortune and a lifetime's success abroad. Nikolai Medtner continues to be acclaimed in the English-speaking world as the very epitome of romantic pianism. (He spent the last sixteen years of his life in London.) Like Scriabin and Rachmaninov, who were his elders by only a few years, Medtner was an outstanding pianist and was awarded the Moscow Conservatory's gold medal when he graduated in 1900. (Both he and his teacher, Vasily Safonov, should by rights have received a diamond medal.) He taught at the conservatory for several years and spent more than four decades giving concerts throughout the whole of Europe. A passionate admirer of Beethoven, Medtner avoided Romantic excesses in his dozen or so sonatas and in that way constitutes an understated counterpart to Scriabin, for example. Yet his work is profoundly Romantic in other ways, especially in its brooding introspection, a quality inherited from his parents, both of whom were of German extraction. While Scriabin was busy creating the piano poem and Rachmaninov the "etude-tableau", Medtner devoted himself, significantly, to a particularly nostalgic and poetic form, that of the "skazka" or fairy tale.
다른 이들은 더 운이 좋았는데, 러시아에서의 정치적인 발전의 결과로 인한 것이었지만, 그들은 해외에서 행운과 평생의 성공을 찾았다. 니콜라이 메트너는 낭만적인 피아니즘의 전형으로 영어권 세계에서 계속 찬사를 받는다. (그는 런던에서 인생의 마지막 16년을 보냈다.) 불과 몇 년 선배인 스크리아빈과 라흐마니노프와 마찬가지로, 메트너는 뛰어난 피아니스트로 1900년에 모스크바 음악원 졸업 시 금메달을 받았다. (그와 그의 스승인 바실리 사포노프 모두 이상적으로는 다이아몬드 메달을 받아야 한다.) 그는 음악원에서 몇 년 동안 가르쳤으며 유럽 전역에서 40년 이상 콘서트를 가졌다. 베토벤의 열렬한 찬미자인 메트너는 10여 개의 소나타에서 지나치게 낭만파적인 것을 피했으며 그런 식으로, 예를 들어, 스크리아빈에 대한 절제된 부분을 구성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다른 면, 특히 모두 독일 혈통인 그의 부모님에게서 유전된 성질에서 낭만파적인 것을 중시한다. 스크리아빈이 피아노 포엠을 창조했고 라흐마니노프가 “음의 그림-연습곡”을 만드는 동안 메트너는 좀 더 고전적이고 러시아적인 향수가 감도는 “스카즈카”(옛 이야기)라는 장르에 힘을 쏟았다.
Medtner wrote around thirty "skazki", the most popular of which are the two published as his Op. 20 in 1909. No. 1 in B flat minor (Allegro con espressione) begins lyrically but builds to a powerful and desperate climax marked triple "forte". Listeners unfamiliar with Medtner's style will suspect that it is Rachmaninov that they can hear. Certainly, the older composer recognised the essential affinity between him and his younger compatriot and took the piece into his repertory, playing it so often that it soon became its composer's best known work. Its ebullient, triple-time metre notwithstanding, No. 2 in B minor (Pesante, minaccioso) builds to a threatening climax. A number of Medtner's fairy tales have programmatical titles that help the listener to make the imaginative leap necessary to understand them. One such title is "Campanella: The Song or Fairy Tale of a Bell" (also known as "The Threatening Bell"). Similar bell-like effects were created by Rachmaninov in the first and last of his 24 Preludes and by Lyapunov in his concert study "Trezvon": in Medtner's case the listener can hear a beautiful cantilena recalling the world of Mother Russia in the instrument's middle register, while the accompaniment in both hands grows increasingly luxuriant and the pealing of a carillon of bells recalls the Russian Orthodox Church, as subsidiary voices ("podgoloski") enter freely.
메트너는 30곡 가량의 “스카즈카”를 썼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1909년에 출판된 2개의 스카즈카 Op. 20이다. 1번(빠르고 감정을 풍부하게)은 서정적으로 시작하지만 “포르테”(세게)가 3개 붙은(포르티티시모) 강력하고 극단적인 클라이맥스가 된다. 메트너의 스타일에 익숙하지 않은 청취자들은 그들이 들을 수 있는 라흐마니노프라고 의심할 것이다. 확실히, 연상의 작곡가는 그와 그의 더 어린 동포 작곡가들 사이의 본질적인 친화력을 인식했고 이 곡을 그의 레퍼토리로 가져갔으며, 종종 연주되면서 곧 작곡가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 되었다. 열광적인 3박자임에도, 2번(무겁게, 위협적으로)은 위협적인 클라이맥스가 된다. 메트너의 많은 “옛 이야기”에는 청취자들이 곡들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상상력이 도약하도록 도와준 계획에 따른 제목들이 있다. 그러한 제목 중 하나는 <캄파넬라 - 종의 노래 또는 종의 옛 이야기>이다. (<위협적인 종>으로도 알려져 있다). 유사한 종소리 효과는 라흐마니노프의 24개 프렐류드 중에서 첫 곡(Op. 3 No. 2 <모스크바의 종>)과 마지막 곡(Op. 32 No. 13), 리아푸노프의 연주회용 연습곡 Op. 11 No. 3 <트레즈본>(=카리용=편종 : 연주를 할 수 있도록 종을 늘어놓은 악기)에서 만들어졌다. - 메트너의 경우 청취자는 악기의 중간부에서 모국 러시아의 세계를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칸틸레나(서정적인 선율)를 들을 수 있는 반면, 양손의 반주는 점점 풍성해지고 편종의 소리는 부수적인 목소리들(메아리)이 자유롭게 들어오는 것처럼 러시아 정교회를 연상케 한다.
A Marginal but Rewarding Figure / 미미하지만 보람 있는 연주
For the non-Russian music lover, there are still gratifying discoveries to be made among some of the lesser known Russian composers. Oleg Konstantinovich Eiges was the son and pupil of a professor at the Moscow Conservatory, whom we have already met as one of Stanchinsky's teachers and who, in turn, had studied with Tchaikovsky's pupil, Sergei Taneyev. Eiges additionally studied the piano with Egon Petri, who numbered Busoni among his teachers. He wrote his Fourth Sonata at the end of the 1930s. A single-movement work, it combines sonata form with toccata-like elements and may be divided into three sections: an agitated introduction leads to the gloomy toccata theme, which builds in turn to an impetuous climax, before giving way to a lyrical second subject. Its often crystalline, filigree textures are suddenly rent by an implacable, irrefutable fugue subject, which is shortly joined by the toccata theme. A magnificent explosion of passion ensues. But the composer still has a further climax in store in the form of a powerful return of the lyrical cantilena. The work ends with the typically Russian sound of bells, beneath which the fugue subject loses its minatory harshness. As instantly understandable today as ever it was in the past, such a beautiful message retains its telling relevance.
비러시아 음악 애호가들을 위해, 덜 알려져 있는 러시아 작곡가들 중에는 여전히 만족스러운 발견이 있다. 올렉 콘스탄티노비치 에이게스는 우리가 이미 스탄친스키의 스승들 중의 한 명으로 만났던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의 아들이자 제자로, 이어서 차이코프스키의 제자인 세르게이 타네예프를 사사했다. 에이게스는 부조니의 제자였던 에곤 페트리와 함께 피아노도 공부했다. 그는 1930년대 말에 네 번째 소나타를 썼다. 단악장인 이 작품은 토카타의 요소를 차용하여 소나타의 주제를 발전시키는 데에 사용한 것인데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 불안한 도입부는 서정적인 두 번째 주제로 넘어가기 전, 자극적인 클라이맥스에 이르는 우울한 토카타 주제로 이끈다. 수정같이 맑은, 줄 세공 같은 구조들은 곧 토카타 주제로 합류하는 인정사정없는, 반박할 수 없는 푸가 주제로 갑자기 쪼개진다. 열정의 웅장한 폭발은 계속된다. 그러나 작곡가는 아직도 서정적인 칸틸레나의 강력한 복귀의 형태로 닥쳐올 부가적인 클라이맥스를 가지고 있다. 이 작품은 전형적인 러시아의 종소리로 끝나는데, 그 아래에서 푸가 주제가 위협적인 거친 소리를 잃는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즉시 이해할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러한 아름다운 메시지는 관련성을 말하는 것을 유지한다.
A Spanish Hit / 스페인의 히트곡
It was the Iberian peninsula that inspired Syomin's earliest recordings: as already noted, the organisation for international cooperation, "Spain-USSR", made possible the release of a double album containing the whole of Issac Albeniz' piano cycle, "Iberia". (The set was soon sold out.) Albeniz led an eventful life: an infant prodigy, he stowed away on a ship bound for South America while only twelve, organised his own concert tours and later took lessons with d'Indy, Dukas and the elderly Liszt. Like his compatriot, Enrique Granados, he sought to write in an unambiguously Spanish idiom, while not eschewing Andalusian orientalisms. A world-famous success, his Tango from "Espana" has been the subject of every conceivable type of arrangement.
시요민의 초기 녹음에 영감을 준 것은 이베리아 반도였다. 이미 언급했듯이 국제 협력 조직인 “스페인-소련”은 이삭 알베니스의 피아노 모음곡 <이베리아> 전체를 포함하는 두 장의 앨범 발매를 가능하게 했다. (이 세트는 곧 매진되었다.) 알베니스는 다사다난한 인생을 살았다. - 신동이었던 그는 불과 12세에 남아메리카로 향하는 배를 몰래 탔고, 그의 콘서트 투어를 조직했으며 나중에 뱅상 댕디, 뒤카, 더 연장자인 리스트를 사사했다. 그의 동포 작곡가인 엔리케 그라나도스처럼, 그는 안달루시아의 동양풍을 피하지 않으면서 분명히 스페인적인 이디엄(언어)으로 쓰려고 노력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공작인 그의 <에스파냐> 중 탱고는 모든 가능한 편곡 유형의 주제의 대상이었다.
Cultivated Passion: Bizet a la Busoni / 세련된 정열 - 부조니가 편곡한 비제
Like Franz Liszt, the German-Italian composer Ferruccio Busoni was fond of taking other composers' works and themes and subjecting them to his own creative reworkings: adaptations and fantasias make up almost half of all the pieces that he wrote for the piano. Among the works that he adapted in this way are Peter Cornelius' "Der Barbier von Bagdad", Karl Goldmark's "magic opera" "Merlin", Bach chorales and Mozart's "Don Giovanni" and "Le nozze di Figaro", together with a number of the last-named composer's concerto movements. "Carmen", too, inevitably came within Busoni's sights, and it was to Bizet's final masterpiece that he devoted the last of his Six sonatinas. The piece dates from 1920, the year in which Busoni finally returned to Berlin from his six-year self-imposed exile in Zurich in order to begin a series of masterclasses at the city's Academy of Arts. As a curious footnote to the history of music, it is perhaps worth mentioning that among his pupils here was Kurt Weill, whose forays into jazz and light music in the form of "The Threepenny Opera" left the high-minded Busoni in a state of what - to put it mildly - was not inconsiderable shock.
이탈리아계 독일 작곡가인 페루치오 부조니는 리스트와 마찬가지로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과 주제를 취하여 자신이 창의적으로 재작업하는 것을 좋아했다. - 편곡과 판타지아는 그가 피아노를 위해 쓴 모든 곡의 거의 절반 가량 된다. 그가 이런 방식으로 편곡한 작품들 중에는 페터 코르넬리우스의 오페라 <바그다드의 이발사>, 카를 골트마르크의 마법사를 다룬 오페라 <멀린>, 바흐 코랄,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와 <피가로의 결혼>, 모차르트의 많은 협주곡 악장들의 편곡이 있다. <카르멘> 역시 부조니의 시야에 불가피하게 들어왔으며, 부조니가 그의 6개 소나티나 중 마지막 곡을 헌정한 것은 비제의 마지막 걸작이었다. 이 곡은 1920년에 쓴 것으로, 부조니가 마침내 취리히에서 6년간 자진해서 한 망명으로부터 베를린으로 돌아와서 베를린 음대에서 일련의 마스터클래스를 시작한 해였다. 음악사에 대해 궁금한 보충 설명으로, 여기에 있는 그의 제자들 중에 <서푼짜리 오페라>의 형식에서 재즈와 가벼운 고전음악에 진출하여 고상한 부조니를 적잖은 충격이었던 가볍게 두는 상태로 남겨두었던 쿠르트 바일이 있다는 것을 언급할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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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KEFAKTW6KVw
https://www.youtube.com/watch?v=S1t35UZ0diM
https://www.youtube.com/watch?v=JnMAZhd0x1w
https://www.youtube.com/watch?v=p7PAZZZHwgM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연주자들 중의 한 명인데, 아마존에서 찾아보니 2010년 이후에 알베니스 이베리아 모음곡 연주한 음반이 하나 더 나왔다. 에드바르드 시요민의 알베니스 음반을 검색하다가 이름의 다른 표기(Eduard Semin)을 알게 되었다. 라모의 탕부랭은 중학교 때 <우박은 춤춘다>라는 노래로 배웠다.
https://classicalpippo9.com/2017/10/24/russian-pianist-school-vol-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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