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17일 화요일

Melodiya / Heinrich Neuhaus - Russian Piano School, Vol. 2



뛰어난 피아니스트이자 교육자(리히터, 길렐스, 라두 루푸의 스승), 러시아 피아노 스쿨의 창시자 겐리히 네이가우스는 피아노 사운드의 대가였다. 피아노에 놓인 그의 손가락들은 음색들의 다양성과 감정적인 표현성, 풍부한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네이가우스의 예술은 피아노의 위대한 가능성을 청중들에게 알게 했다. 깊은 음악적 지식, 시, 문학, 예술, 개인적 경험, 예술적인 상상력이 그의 연주를 통해 표출되었다. 네이가우스는 각각의 작곡가들의 개별적인 특성과 작품의 정수를 포착하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교사로서 너무나도 전설적인 인물이었다는 것이 피아니스트로서의 네이가우스의 명성에는 오히려 장애가 되었다. 그는 금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의 한 사람으로 로맨틱하면서도 서정적이고 또 기품 있는 연주를 들려주었던 대가 중의 대가였지만, 동시에 그의 문하에서는 금세기 후반을 장식한 수많은 명 피아니스트들이 배출되었다. 에밀 길렐스를 위시하여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야코프 자크, 알렉산더 베데르니코프, 예프게니 말리닌, 빅토르 에레스코, 라두 루푸와 또 명 피아니스트이자 명교사로 유명한 그의 아들 스타니슬라프 네이가우스 등이 모두 그의 제자였다. 이처럼 연주와 교육의 양 단면에서 모두 발군의 업적을 남겼던 인물로는 19세기의 대작곡가 프란츠 리스트를 들 수 있겠지만, 금세기의 피아니스트로는 알프레드 코르토 이외에는 달리 찾아볼 수 없다. 물론 그동안 겐리프 네이가우스의 음반이 전혀 발매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며, 오히려 구소련의 멜로디야에서는 끊임없이 재발매되었었고 그 외 구미각국에서는 이 멜로디야 녹음을 라이선스하여 수차례 발매된 일이 있었다. 러시아 현대 피아니스트들의 위대한 스승으로 추앙받는 겐리프 네이가우스(독일명 하인리히 노이하우스)는 1888년 4월 12일, 우크라이나 엘리자베트그라드(1935년 이후에는 키로프그라드로 개칭됨)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리스트가 바이마르의 그의 말년 거소로 칩거하기 전에 마지막 연주회를 개최했던 곳으로 음악애호가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곳이다. 네이가우스는 가계에는 독일의 라인저지대(Niederrhein)에서 우크라이나로 이주해왔는데, 그의 할아버지는 피아노 공장을 설립 운영하였고 그의 아버지는 쾰른 음악원을 나온 피아니스트로 한때 유명한 페르디난트 힐러(Ferdinand Hiller)를 사사한 일도 있었던 음악가였으며, 그의 어머니는 네덜란드인으로 역시 유능한 피아니스트였다. 그는 또 두 사람의 위대한 음악가와도 혈통으로 연결되었는데, 안톤 루빈스타인의 제자로 후일 호로비츠의 스승이 되었던 명 피아니스트이자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교수였으며 마린스키 가극장의 지휘자였던 펠릭스 블루멘펠트는 그의 외삼촌이었고, 폴란드 출신의 대작곡가 카롤 시마노프스키는 그의 육촌이었다.

양친이 모두 유능한 피아노 교사라는 이상적인 음악적 환경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이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여 9살 때는 이미 고향에서 쇼팽의 피아노곡들로 첫 독주회를 개최했다. 그리고 곧 베를린으로 가서 리스트 음악원에서 한스 폰 뷜로프의 제자였던 카를 타우지히와 카를 하인리히 바르트를 알게 되었고, 파울 유온으로부터는 작곡 수업을 받게 된다. 또 이미 독주 피아니스트로서 큰 명성을 얻은 후인 1912년에도 그의 학구열은 계속되어 다시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레오폴트 고도프스키를 사사하게 되었는데, 이때의 고도프스키의 영향은 후일 그의 연주 양식을 결정짓는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대부분의 천재 연주자들처럼 네이가우스도 역시 그의 수업과는 무관하게 매우 어린 시절부터 연주자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는데, 그의 첫 공개 연주회는 9살 때였고 14살이 되던 1902년에는 당시 인기절정에 있었던 대 바이올리니스트 미샤엘만과 함께 그의 고향에서 조인트 리사이틀을 열었을 만큼 그의 재능은 각별한 데가 있었다. 이처럼 일찍부터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했던 네이가우스는 1904년 라인 강변의 도르트문트에서 첫 해외 연주회를 개최한데 이어 곧바로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에 참가했고, 1905년에는 다시 도르트문트를 방문하여 이후 그의 지속적인 후원자가 되었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만났다. 그리고 본, 쾰른, 베를린 등과 그 외에도 많은 독일의 도시들에서 독주회를 열었고, 1906년에는 바르샤바에서, 그리고 다시 피렌체에서도 연주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14년 고향으로 돌아온 네이가우스는 러시아의 남부 지방을 여행한 후 1916년에 티플리스 음악원에서 처음으로 피아노 교수로의 길을 걷게 된다. 그 후 1918~22년까지는 키예프 음악원에서 가르쳤고(1919년부터는 정교수로), 1922년 이후로는 유서 깊은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가 되어 많은 훌륭한 제자들을 육성했다. 또 1935~37년까지는 이 학교의 교장을 지냈으며, 죽을 때까지 40여 년간 모스크바 음악원에 봉직하였다.

이 일은 네이가우스 그 자신으로 볼 때에는 연주자로서의 활동에 많은 제한이 가해지는 일이었으나 소비에트 러시아의 피아노 음악계 전체를 위해서는 찬란한 미래를 약속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계속해서 후진들을 육성하는 가운데서도 피아니스트로서의 책무를 결코 게을리 하지 않아, 이 40년 동안 그는 연주회를 통해 모스크바의 문화 활동의 가장 높고 빛나는 부분을 담당했다. 그의 레퍼토리는 1922년의 이틀 밤의 연주회를 통해서 연주되었던 스크리아빈의 10개의 소나타를 비롯해서 프로코피에프의 피아노곡집 “덧없는 환영”, 드뷔시와 쇼스타코비치의 전주곡들, 또 베토벤의 후기 피아노 소나타들과 미야스코프스키의 소나타들, 쇼팽, 슈만, 브람스 등 낭만주의 작곡가들의 작품들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방대한 분량의 것이었다. 또 그가 즐겨 연주했던 협주곡은 쇼팽과 리스트, 스크리아빈의 작품들이었으며, 그의 실내악 연주의 협연자로는 소프라노 나탈리아 로제스트벤스카야(지휘자 겐나디 로제스트벤스키의 어머니)를 비롯하여 첼리스트 아나톨리 브란두코프와 1923년 모스크바에서 창단된 베토벤 4중주단 등을 들 수 있는데, 당대 러시아 최고의 연주자들이었다. 인간으로서 예술가로서 네이가우스는 마치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나 발렌틴 아스무스처럼 대단히 박학다식한 인물이었으며,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하여 자신의 신념, “재능을 창출할 수는 없어도 문화를 창달하고 그것을 번성하게 할 수는 있다.”를 실증해 보였다.

음악을 설명하는데도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음악에 관한 많은 글을 남기고 있는데, 특히 그의 주요 저서인 “피아노 연주법”은 오늘날까지도 그의 입김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는 명저이다.

오랫동안 러시아 음악계의 발전을 위해 헌신했던 겐리프 네이가우스는 1964년 10월 10일 그가 오랫동안 거주했던 모스크바에서 76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네이가우스는 당대의 어떤 피아니스트보다도 텍스트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연주자 중의 한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연주가 단순히 텍스트의 즉물적 재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음악을 너무 주관적으로 변조시키는데에는 철저히 반대했었지만 그 음악이 지닌 내면적 의미를 찾아내는 데는 노력을 아끼지는 않았다. 또 네이가우스는 표현력을 확보하는 수단으로서 기교의 중요성을 역설했던 음악가 중의 한 사람이었으므로 그 자신이 테크닉 면에서 당대의 최고의 수준을 유지하였음은 물론이고, 그의 제자들 역시 현대의 가장 뛰어난 테크니션들이었다.

모차르트 론도 A단조 K. 511은 그의 A단조 소나타 K. 310과 더불어 어두운 정서를 대변하고 있는 극소수의 단조 작품들이다. 이 곡의 위대함은 모든 것을 한없는 밀도로 압축시킨 그 의미와 구성의 단순명료함에 있다. 네이가우스는 이 곡의 우울하면서도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정서를 극히 순도 높은 정열과 음악성으로 표현해내고 있다.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K. 488은 모차르트가 그의 제자 요제파 폰 아우른함머와 함께 연주하기 위해 작곡한 작품으로 두 대의 피아노로 거의 오케스트라적인 효과까지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진 대단히 거장적이고 천재적인 작품이다.

드뷔시의 전주곡집인 제2집이 출판된 불과 2년 후부터 프로코피에프의 20여 곡의 “덧없는 환영”이 작곡되기 시작했다. 이 곡의 대부분은 표제적인 요소를 전혀 지니지 않은 단순한 짧은 경구로 되어 있다. 이 곡의 덧없는 환영이나 인상들은 위대한 하모니와 다양한 텍스트의 정교한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거친 낭만주의와 명확함에 대한 사려 깊은 감각, 또 때로는 소란한 리듬의 준동 사이를 오르내리며 젊은 작곡가의 전통 타파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

Track
01 Mozart Rondo in a, K. 511 / 모차르트 론도 K. 511
02 Mozart Sonata for 2 Pianos in D, K. 448: 1. Allegro con spirito (with Stanislav Neuhaus, piano) / 모차르트 2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K. 488 (아들 스타니슬라프 네이가우스와 협연)
03 Mozart Sonata for 2 Pianos in D, K. 448: 2. Andante
04 Mozart Sonata for 2 Pianos in D, K. 448: 3. Molto allegro
05 Debussy Preludes No. 1 Danseuses de Delphes / 드뷔시 프렐류드 1번 <델피의 무희들>
06 Debussy Preludes No. 9 La serenade interrompue / 드뷔시 프렐류드 9번 <끊어진 세레나데>
07 Debussy Preludes No. 15 La puerta del vino / 드뷔시 프렐류드 15번 <비노의 문>
08 Debussy Preludes No. 6 Des par sur la neige / 드뷔시 프렐류드 6번 <눈 위의 발자국>
09 Debussy Preludes No. 4 Les sons et les parfums tournent dans l'air du soir / 드뷔시 프렐류드 4번 <소리와 향기가 저녁 대기 속에 감돈다>
10 Debussy Preludes No. 5 Les collines d'Anacapri / 드뷔시 프렐류드 5번 <아나카프리의 언덕>
11 Debussy Preludes No. 17 Bruyeres / 드뷔시 프렐류드 17번 <히스가 무성한 황야>
12 Debussy Preludes No. 12 Minstrels / 드뷔시 프렐류드 12번 <음유시인>
13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1 Lentamente / 프로코피에프 <덧없는 환영>
14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2 Andante
15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3 Allegretto
16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4 Animato - Piu sostenuto
17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5 Molto giocoso
18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6 Con eleganza
19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7 Pittoresco
20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8 Commodo
21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9 Allegretto tranquillo
22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10 Ridicolosamente
23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11 Con vivacita
24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12 Assai moderato
25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13 Allegretto
26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14 Feroce
27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15 Inquieto
28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16 Dolente
29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17 Poetico
30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18 Con una dolce lentezza
31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19 Presto agitatissimo e molto accentuato
32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20 Lento irrealmente

Heinrich Gustavovich Neuhaus (1888-1964) / 겐리프 구스타보비치 네이가우스
Heinrich Neuhaus was born on 12 April (old style 31 March) 1888 in Yelizavetgrad, Ukraine (renamed Sinoyevsk in 1925 and Kirovgrad in 1935), a town that music lovers may have heard about. This is where Franz Liszt gave his last recitals before withdrawing from the concert stage and making his home in Weimar. Neuhaus's paternal grandfather, a Rhinelander, had founded a piano factory and arranged for his son to attend the Cologne Conservatory. Through his (Dutch) mother, herself a pianist, Neuhaus was related to two celebrities: his uncle Felix Blumenfeld, professor in St Petersburg, conductor at the Maryinsky Theatre and a one-time pupil of Rimski-Korsakov, and his second cousin Karol Szymanowski, the noted Polish composer.

하인리히 네이가우스는 1888년 4월 12일(구력으로는 3월 31일) 우크라이나 엘리자베트그라드(1925년 시노옙스크, 1935년 키로프그라드로 개칭)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리스트가 바이마르의 그의 말년 거소로 칩거하기 전에 마지막 연주회를 개최했던 곳으로 음악애호가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곳이다. 네이가우스의 친할아버지는 피아노 공장을 설립했고 그의 아들을 위해 쾰른 음악원 입학을 계획했다. 그의 어머니는 네덜란드인으로 역시 유능한 피아니스트였다. 그는 또 두 사람의 위대한 음악가와도 혈통으로 연결되었는데,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교수였으며 마린스키 가극장의 지휘자였던 펠릭스 블루멘펠트는 그의 외삼촌이었고, 폴란드 출신의 대작곡가 카롤 시마노프스키는 그의 육촌이었다.

Having received his first piano lessons from his father, the nine-year-old prodigy gave his first public performance in his native town, playing music by Chopin. Subsequently, his uncle took charge of him, enabling him to obtain an external degree at the Petrograd (later Leningrad) Conservatory in 1915 and thus gain the necessary qualifications for pursuing a career as a freelance artist. His subsequent journeys to Germany were a major formative influence. In 1904 he attended the Bayreuth Festival, and in 1905 he visited Dortmund, where he gave his first recital on German soil and met Richard Strauss, who would repeatedly support him afterwards. While Neuhaus was touring Europe during the following years, Germany became important to him once again. In Berlin he got in touch with the Liszt School, with Carl Tausig and Karl Heinrich Barth, a pupil of Bulow. During his stay in the German capital, letters of recommendation from Blumenfeld and Glazunov introduced him to Leopold Godowsky, the cosmopolitan pianist, who would put the finishing touches on his style. Not only did Neuhaus later visit the great virtuoso in Vienna several times, but he also adopted his basic motto: "The best player is the one who sticks closely to the text of the music". In Berlin, he took composition lessons with Paul Juon, pupil of Taneyev. Having returned to his native town in 1914, Neuhaus went on a tour of southern Russia and took up teaching, first at the Tiflis College of Music (where the Armenian composer Aram Khachaturian was born in 1903) in 1916, and then at the Kiev Conservatory from 1918 to 1922 (being named a professor in 1919). All the while, he was giving recitals, not only as a soloist, but also with the soprano Leonida Balanovskaya of the Bolshoi Theatre and the Polish violinist Pavel Kochanski. From 1922 until his death on 10 October 1964 Neuhaus held a professorship at the Moscow Conservatory, an institution which he directed from 1935 to 1937.

일찍이 아버지로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여 9세 때는 이미 고향에서 쇼팽의 피아노곡들로 첫 독주회를 개최했다. 그 후 그의 외삼촌인 펠릭스 블루멘펠트가 그를 맡아 1915년에 페트로그라드(나중에는 레닌그라드) 음악원에서 대학 외(外) (취득) 학위를 받고 프리랜서 아티스트로서의 경력을 쌓는데 필요한 자격을 취득했다. 그의 후속 독일 여행은 발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904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에 참가했고, 1905년에는 도르트문트를 방문하여 독일 땅에서 첫 리사이틀을 가졌으며 이후 그의 지속적인 후원자가 되었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만났다. 그 후 몇 년 동안 유럽 투어를 가지는 동안, 독일은 그에게 다시 한 번 중요해졌다. 베를린에서 그는 리스트 음악원에서 한스 폰 뷜로프의 제자였던 카를 타우지히와 카를 하인리히 바르트를 알게 되었다. 독일의 수도에 머무는 동안, 블루멘펠트와 글라주노프의 추천서를 통해 국제적인 피아니스트 레오폴트 고도프스키에게 소개되었는데, 그의 연주 양식을 결정짓는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네이가우스는 나중에 비엔나에서 위대한 거장을 여러 번 방문했을 뿐만 아니라 “최고의 연주자는 음악 텍스트에 밀접하게 연관된 사람”이라는 기본적인 모토를 채택했다. 베를린에서 그는 타네예프의 제자인 파울 유온으로부터 작곡 수업을 받았다. 1914년 고향으로 돌아온 네이가우스는 러시아의 남부 지방을 여행한 후 1916년에 티플리스(1903년 아르메니아 작곡가 아람 하차투리안이 태어난 트빌리시) 음악원에서 처음으로 피아노 교수로의 길을 걷게 되었고, 그 후 1918~22년까지는 키예프 음악원(1919년부터는 정교수로)에서 가르쳤다. 그동안 그는 리사이틀을 가졌고 협주곡 솔로이스트였을 뿐만 아니라 볼쇼이 극장의 소프라노 레오니다 발라노프스카야와 폴란드 바이올리니스트 파베우 코한스키와도 협연했다. 1922년부터 1964년 10월 10일 영면할 때까지 네이가우스는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였는데, 1935~37년까지 교장을 지냈다.

During this 40-year period his public performances were highlights in the cultural life of the Russian capital. His solo repertoire comprised Scriabin's 10 sonatas, which he played on two evenings in 1922, Prokofiev's "Visions fugitives", the Preludes of Debussy and Shostakovich, the last Beethoven sonatas, Myaskovsky's sonatas as well as music of the Romantic era (Chopin, Schumann and Brahms). His favourite piano concertos were those of Chopin, Liszt and Scriabin. When playing chamber music, he usually teamed up with the singer Natalya Rozhdestvenskaya (mother of the conductor Gennadi Rozhdestvensky), the cellist Anatoli Brandukov, and the Moscow Beethoven Quartet founded in 1923. On the human and artistic level, Neuhaus was a truly encyclopaedic figure, associating with writers like Boris Pasternak, painters like Robert Falk and philosophers like Valentin Asmus. He was living proof of his own motto "You can't produce talent, but you can create a culture in which it thrives". So it is hardly amazing that this man of parts also wrote a treatise entitled "The Art of Piano-Playing" (Moscow 1958) and that the "Neuhaus School" brought forth brilliant performers: Emil Gilels, Yakov Zak, Alexander Vedernikov, Lev Naumov, Sviatoslav Richter, Victor Eresco, Radu Lupu and his son Stanislav Neuhaus (1927-1980), a renowned teacher in his own right who can be heard on tracks 2-4 performing with his father.

이 40년 동안 그는 연주회를 통해 모스크바의 문화 활동의 가장 높고 빛나는 부분을 담당했다. 그의 레퍼토리는 1922년 이틀 밤 동안 연주했던 스크리아빈 10개의 소나타를 비롯해서 프로코피에프의 <덧없는 환영>, 드뷔시와 쇼스타코비치의 전주곡들, 또 베토벤의 후기 피아노 소나타들과 미야스코프스키의 소나타들, 낭만주의 작곡가들(쇼팽, 슈만, 브람스 등)의 작품들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방대한 분량의 것이었다. 또 그가 즐겨 연주했던 협주곡은 쇼팽과 리스트, 스크리아빈의 작품들이었다. 그의 실내악 협연자로는 소프라노 나탈리아 로제스트벤스카야(지휘자 겐나디 로제스트벤스키의 어머니)를 비롯하여 첼리스트 아나톨리 브란두코프, 1923년 모스크바에서 창단된 베토벤 4중주단이 있었다. 인간으로서 예술가로서 네이가우스는 마치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화가 로버트 포크, 철학자 발렌틴 아스무스처럼 대단히 박학다식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하여 자신의 신념 “재능을 창출할 수는 없어도 문화를 창달하고 그것을 번성하게 할 수는 있다”는 것을 실증해 보였다. 이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피아노 교수법>(1958년 모스크바)이란 논문을 쓰고 <네이가우스 문하>가 40명의 훌륭한 연주자들을 배출했다는 것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 에밀 길렐스, 야코프 자크, 알렉산더 베데르니코프, 레프 나우모프,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빅토르 에레스코, 라두 루푸, 명 피아니스트이자 명교사로 유명한 그의 아들로 이 음반에서 2~4번 트랙을 아버지와 협연한 스타니슬라프 네이가우스(1927~1980) 등이 모두 그의 제자였다.

Anyone who has studied in Vienna can hardly ignore Wolfgang Amadeus Mozart, whose relatively small output of works for two pianists includes - apart from minor pieces - five sonatas for piano duet and one for two pianos. In 1779, he wrote his only concerto for two pianos, K. 365, followed two years later by a work intended for performance by himself and his pupil, Josepha von Aurnhammer: the Sonata in D major, K.448, a highly virtuoso "score" drawing near-orchestral effects from the combination of two keyboards. The light-textured G major Andante, a calmly flowing movement in three-four time, makes full use of the possibilities opened up by the newly developed Hammerflugel (pianoforte). Six years later, in 1787, Mozart composed a rondo of dramatic and stylistic intricacy, choosing a key which evoked no more cheerfulness than the event which occasioned the work. In fact, the rondo was written to commemorate the "sad passing of my dear friend, Count von Hatzfeld", as the composer informed his father in a letter. Even so the A minor piece, preserved in a fine autograph (Leipzig Music Library), combines vastly different moods ranging from tender melancholy to spirited music-making, and draws both on expressive chromaticism and Bach-like contrapuntal writing.

비엔나에서 공부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를 무시할 수 없는데, 두 명의 피아니스트를 위한 상대적으로 작은 작품들로는 - 마이너 곡(많이 연주되지 않는 곡)들과 떨어져서 - 피아노 듀오(4개의 손)를 위한 5개 소나타와 2대의 피아노르 위한 소나타 한 곡이 있다. 1779년에 모차르트는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K. 488을 썼는데, 그의 제자 요제파 폰 아우른함머와 함께 연주하기 위해 작곡한 작품으로, 두 대의 피아노로 거의 오케스트라적인 효과까지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진 대단히 거장적이고 천재적인 작품이다. 가벼운 느낌의 2악장 G장조 안단테(느리게)는 3/4박자의 고요히 흐르는 악장으로, 새로 개발된 함머플뤼겔 피아노에 의해 열린 가능성들을 최대한 활용한다. 6년 후인 1787년에 모차르트는 작품을 일으킨 사건보다 더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이 떠오르게 하는 조성을 골라서 극적이고 스타일이 복잡한 론도를 작곡했다. 실제로 론도는 작곡가가 편지에 그의 아버지에게 알렸던 것처럼 “나의 친애하는 친구, 폰 하츠펠트 백작의 슬픈 죽음”을 기리기 위해 쓰였다. 그럼에도 좋은 서명(라이프치히 음악 도서관)으로 보존된 a단조인 곡은 부드러운 우울함부터 활발한 음악 만들기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른 분위기들을 결합하고, 반음계 표현과 바흐 같은 대위법적인 작곡법 모두 사용한다.

The throwback to Bach was no mere coincidence. Having been inspired by Bach's youngest son, Johann Christian, to try his hand at symphonic composition, Mozart increasingly turned his mind to the cantor of St Thomas and to the polyphonic techniques of the "good old school". In fact, during his last important musical journey in 1789 he not only called on the King of Prussia, but also visited Leipzig and the church associated with Bach's name. - Neuhaus knew "his" Bach. He was still playing the "Well-tempered Clavier" in its entirety when he was over sixty - despite a hand ailment. Of course, he was also familiar with the "aftereffects" of this universal opus: the Preludes of Chopin, Scriabin and Debussy. Anyhow, Neuhaus had a predilection for the music of France (after all, his father was a native of the nearby Rhineland), and he was the first to introduce the piano works of Ravel to Russian audiences. The latter's predecessor, Claude Debussy, may well be described as the "Monet of music" if his 24 Preludes (two books, 1910-13) are appreciated not just with the ears, but with all other senses as well (as the composer suggested in his subtly worded comments), including the olfactory sense, to say nothing of visual associations. His multifaceted "snapshots", mostly tonal watercolours and pastels drawn from nature, everyday life and art (history), have their parallels in literature, e.g. Charles Baudelaire's "Petits poemes en prose", which provided the motto for Prelude 1/4, a synaesthetic orgy for connoisseurs: "Sounds and perfumes in the evening air". The "Dancing Women of Delphi" celebrate a sublime, latently erotic ritual. In a nostalgic evocation of time and space, they walk around the oracle with measured steps, enveloped in vapours emanating from the mythical crevice. The relentless sun of the South glares down on the "Hills of Anacapri", and in the closing section the brightness even takes on a vigorously dynamic quality, emerging radiantly ("lumineux") in triple forte. "The interrupted Serenade" and "Minstrels" are two entertaining items, one with a touch of the Spanish guitar and the other with jazz-like elements drawn from the world of the music-hall, which was making its triumphant entry in Montmartre. Both pieces attest to Debussy's sense of irony and penchant for mockery. Schmaltzy tunes reminiscent of operetta are employed to "offset" the sharp rhythmic profile of an early type of break dance. "La Puerta del Vino" also exudes a Spanish flavour. But Neuhaus also gave due consideration to the "other" Debussy. "Footsteps on the Snow" and "Heaths" show the composer at his most unpretentious, dispensing with chromaticisms, yet containing some pentatonic episodes.

바흐로의 회귀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바흐의 막내아들 요안 크리스티안에게서 영감을 얻어 교향곡 작곡을 시도하기 위해 모차르트는 성 토마스 교회 성가대장과 “전통 학파”의 대위법으로 점점 더 전념했다. 실제로 1789년에 마지막으로 중요한 음악 여행을 하면서 그는 프로이센 왕에게 부탁했을 뿐만 아니라 라이프치히에서 바흐의 이름과 관련된 교회를 방문했다. - 네이가우스는 “그의” 바흐를 알았다. 그는 손에 질환이 있음에도 60세가 넘어서도 여전히 바흐 평균율을 전부 연주하고 있었다. 물론 그는 이 보편적인 작품의 “자취”인 쇼팽, 스크리아빈, 드뷔시의 프렐류드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아무튼 네이가우스는 프랑스 음악에 애착을 가졌고(어차피 그의 아버지는 라인란트 근처 출신), 그는 처음으로 러시아 청중들에게 라벨의 피아노 작품들을 소개했다. 후자의 전신인 클로드 드뷔시는 “음악의 모네”로 표현될 수 있는데, 그의 24개 프렐류드(2권으로 구성, 1910~13)는 (작곡가가 그의 미묘하게 말한 언급들에서 암시했던 것처럼) 시각적인 연관성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이 후각을 포함하여 귀가 아니라 다른 모든 감각으로도 음미된다. 자연, 일상, 예술(역사)에서 얻은 대부분의 색조의 수채화와 파스텔 그림인 그의 다면적인 “스냅샷”(짤막한 묘사들)은 문학 작품과 유사한데, 예를 들어 샤를 보들레르의 <시적인 산문>(소산문시)은 애호가들을 위한 공감각적인 표현 <저녁 대기 속에 있는 소리와 향기>를 드뷔시 프렐류드 1권 4번에 제공했다. <델피의 무희>는 절묘하면서도 잠재적으로 에로틱한 의식을 축하한다. 시간과 공간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곳에서 그들은 신화적인 틈새에서 뿜어져 나오는 증기에 둘러싸여 발맞추어 아폴로 신전의 신탁을 돌아다닌다. 남쪽 나라의 잔인한 태양은 <아나카프리의 언덕>을 강하게 내리쬐며(lumineux가 나오는 “빛나는” 부분), 끝나는 부분에서도 포르티티시모(fff)로 빛을 드러내면서 밝기가 활발하게 역동적인 성질을 띤다. <끊어진 세레나데>와 <음유시인>은 두 개의 재미있는 곡인데, 하나는 스페인 기타의 터치이고 다른 하나는 몽마르트르 입성을 만들고 있었던 보드빌(vaudeville : 노래와 춤을 섞은 대중적인 희가극으로,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 사이에 유행) 세계에서 얻은 재즈 같은 요소들이다. 두 곡 모두 드뷔시의 아이러니에 대한 감각과 조롱에 대한 기호가 있다. 오페레타(소형 오페라)를 연상케 하는 지나치게 감상(주의)적인 곡들은 초기 브레이크 댄스 유형의 급격한 리듬의 특징을 상쇄하기 위해 쓰였다. <비노의 문> 또한 스페인적인 풍미를 자아낸다. 그러나 네이가우스는 “다른” 드뷔시에 대해서도 충분히 고려했다. <눈 위의 발자국>과 <히스가 무성한 황야>는 작곡가가 아직 5음계를 포함하지만 반음계를 생략하면서 그의 가장 수수한 모습을 보여준다.

Harmonie du soir - Charles Baudelaire / 저녁의 조화 - 샤를 보들레르
Voici venir les temps où vibrant sur sa tige / 마침내 꽃이 각자 줄기 위에서 흔들리며
Chaque fleur s'évapore ainsi qu'un encensoir; / 향로(香爐)처럼 향기를 발산하는 시간이 왔구나
Les sons et les parfums tournent dans l'air du soir; / 소리와 향기는 저녁 공기 안에서 맴도네
Valse mélancolique et langoureux vertige! / 우울한 왈츠, 나른한 현기증!

Chaque fleur s'évapore ainsi qu'un encensoir; / 꽃마다 향로(香爐)처럼 그만의 향기를 발산하는구나
Le violon frémit comme un coeur qu'on afflige; / 바이올린은 비탄의 가슴처럼 떨고 있고
Valse mélancolique et langoureux vertige! / 우울한 왈츠, 나른한 현기증!
Le ciel est triste et beau comme un grand reposoir. / 하늘은 광대한 제단처럼 슬프고 아름답다.

Le violon frémit comme un coeur qu'on afflige, / 바이올린은 비탄의 가슴처럼 떨고 있고,
Un coeur tendre, qui hait le néant vaste et noir! / 암흑의 전무(全無)를 혐오하는 다정한 마음!
Le ciel est triste et beau comme un grand reposoir; / 하늘은 광대한 제단처럼 슬프고 아름답다
Le soleil s'est noyé dans son sang qui se fige. / 해는 그의 굳어지는 피에 빠져 버린다.

Un coeur tendre, qui hait le néant vaste et noir, / 암흑의 전무(全無)를 혐오하는 다정한 마음,
Du passé lumineux recueille tout vestige! / 빛나는 지난날의 모든 흔적을 모아 품는다!
Le soleil s'est noyé dans son sang qui se fige... / 해는 그의 굳어지는 피에 빠져 버리고...
Ton souvenir en moi luit comme un ostensoir! / 너의 기억은 내 안에서 성체(聖體) 현시대(顯示臺)처럼 빛나네!

Debussy Prelude No. 5 "Les collines d'Anacapri" Closing Section / 드뷔시 프렐류드 5번 <아나카프리의 언덕> 엔딩

Only two years after the last Preludes of Claude Debussy had been published, Prokofiev began composing 20 pieces called "Visions fugitives" (Mimolyotnosti in Russian), most of them aphoristic in their brevity and without a programmatic content. These "fleeting" images, impressions or "visions" are miniatures of great harmonic and textural diversity, fluctuating between a harsh Romanticism (not unlike that of the French), a deliberate sense of transparency (along the lines of Ravel) and an often tumultuous rhythmic drive reflecting the young composer's iconoclastic tendencies.

드뷔시 프렐류드 2권이 출판된 지 불과 2년 후, 프로코피에프는 20곡의 <덧없는 환영>을 작곡하기 시작했는데, 이 곡의 대부분은 표제적인 요소를 전혀 지니지 않은 단순한 짧은 경구로 되어 있다. 이 곡의 “덧없는” 이미지들, 인상들이나 “환영들”은 위대한 하모니와 다양한 텍스트의 정교한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프랑스인과 다르지 않은) 거친 낭만주의와 (라벨의 선율들을 따라) 명확함에 대한 사려 깊은 감각, 또 때로는 소란한 리듬의 준동 사이를 오르내리며 젊은 작곡가의 전통 타파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


다섯 번째로 해석하다가 다른 음반들을 보니 한글과 영어 정보에 차이가 있었다. 한글로만 읽다간 모를 뻔했다. 네이가우스와 시마노프스키가 육촌이라고 나와 있어서 육촌이 영어로 뭔지 찾아보니 second cousin. 영어 정보에는 사촌이라고 나와 있어서 구글에서 더 찾아본 다음에 영어 정보를 수정했다. 그리고 독일에서 두 번째 리사이틀을 가졌다고 한글 정보에 나와 있었는데 영어로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참가했다가 도르트문트에서 첫 리사이틀을 가졌다고 했던 걸로 봐선 도르트문트가 단독 리사이틀인 것 같다. 숫자도 몇 개가 안 맞았다. 한글 정보에는 작품 설명이 미흡한 관계로 영어 문장 해석하면서 나부터 몰라서 관련 정보들을 찾아볼 수밖에 없었다.

댓글 1개:

  1. http://uploaded.net/file/bav0r6vd/from/aa33kn

    http://uploaded.net/file/ppmdvxek/Mel.RPS02.r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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