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18일 수요일

Melodiya / Maria Yudina - Russian Piano School, Vol. 4




마리아 유디나는 1899년 9월 10일 러시아 비쳅스크의 네벨에서 개업의사의 딸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비범한 음악적 재능을 보였던 그녀는 7살 때인 1906년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안톤 루빈스타인의 제자였던 프리다 타이텔바움 레빈존에게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13살이 되던 해에는 스승을 따라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으로 옮겨 올가 칼란타로바의 클래스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듬해가 시작되면서 레셰티츠키와 그 부인에게 배웠던 명교수 안나 에시포바의 클래스로 진급하여 프로코피에프 등과 함께 피아노 수업을 받았다. 그러나 에시포바가 1914년 타계함에 따라 유디나는 그녀의 조수였던 블라디미르 드로스도프에게서 피아노 수업을 계속 받았으며, 그 외에도 니콜라이 체레프닌에게 지휘를, 이반 간드신에게는 오르간을 배웠고, 바실리 칼라파티와 막시밀리안 스타인베르크에게서 대위법과 음악이론을 배웠다. 유디나는 음악원을 떠난 후 네이가우스의 외삼촌이자 스승이기도 했던 펠릭스 블루멘펠트에게서 피아노 수업을 더 받으면서 페트로그라드 대학에서 철학과 사학을 3년 동안 공부했다. 그러나 건강이 나빠지면서 다시 피아노 공부로 돌아와 이번에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소프로니츠키 등과 더불어 레오니드 니콜라예프의 문하에서 마지막 수업을 받았다. 1921년 유디나는 그녀의 오랜 피아노 수업을 끝내고 졸업 연주회의 프로그램으로 바흐, 베토벤, 리스트와 글라주노프를 연주했다. 이런 프로그램은 당시 러시아 풍토로 볼 때 그녀가 서방 음악에 대해서 얼마나 열린 시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잘 말해주는 일례라고 하겠다. 유디나가 소프로니츠키와 더불어 공동으로 안톤 루빈스타인 상을 수상하며 음악원을 졸업한 후 연주자로서의 활동을 막 시작하려고 할 무렵, 그녀는 동창생이었던 소프로니츠키와 더불어 이번에는 이 학교의 교수요원으로 선발되었고, 1923년부터는 정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 교수 지명에는 당시 이 음악원의 교장으로 재직했던 글라주노프의 천거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시절 유디나는 같은 음악원에 재직 중이던 소프로니츠키, 쇼스타코비치 등과 깊은 교분을 나누었고, 서방 세계의 음악가들과도 접촉하기 시작하였다. 1925년에 알게 된 명지휘자 오토 클렘페러와 1927년에 교분을 갖게 된 작곡가 파울 힌데미트와의 만남은 그녀의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26년부터 유디나는 레닌그라드 현대음악협회의 회장으로 선임되어 스탈린 수하의 문화파괴자들에 의해 새로운 법안이 입안될 때까지 짧은 기간 동안 러시아에 서방의 아방가르드 음악을 소개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1940년에는 슈베르트 리트의 러시아어 번역 사업에 착수했고, 1950년대에는 쇼스타코비치와 더불어 라이프치히의 바흐 축제에 참가했다. 또 1954년에는 폴란드를 연주 여행했고, 1960년부터는 스트라빈스키, 노노, 슈톡하우젠, 아도르노, 불레즈, 펜데레츠키, 메시앙과 그 외의 서구의 대표적인 현대 음악가들과 정열적이고 창조적인 서신 교환을 계속했다.

연주자로서의 유디나는 1930년대에 소련의 많은 공화국들을 연주 여행했으며, 그와 더불어 티플리스의 마스터클래스를 지도하기도 했고, 새로운 학문분야로 건축을 연구하기도 했다. 늘어나는 연주 일정 때문에 레닌그라드에서의 교수직을 포기한 유디나는 1929년 초에는 모스크바에서 피아니스트로 데뷔했고, 곧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교수직을 얻었으나 스탈린이 사망하기 2년 전인 1951년에는 스탈린 당국과의 불화로 이 자리로부터 해임되고 말았다. 그 후 유디나는 모스크바의 그네신 음악학교에서 가르치고 연주회를 열면서, 또 음악에 관한 에세이를 쓰고 음악과 철학의 강연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1962년 스트라빈스키가 수십 년간의 망명 생활 후 다시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그녀는 이 위대한 거장의 80회 생일을 기념하여 개최된 갈라 콘서트에 출연하여 기꺼이 연주했다. 유디나의 마지막 연주회는 1969년 5월에 있었는데, 그로부터 1년 6개월이 지난 1970년 11월 마리아 베냐미노프나 유디나는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얻게 된 당뇨병과 그 합병증으로 인해 7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이날은 러시아는 물론이고 전 세계가 가장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음악의 밀사 한 명을 잃어버린 날이 되고 말았다.

마리아 유디나의 예술은 그 당시에도 독창적이었지만 현재에는 더욱더 그러하다. 그것은 그녀가 뛰어난 예술적 천분을 타고난 것 외에도 철학과 사학을 비롯하여 언어학, 신지학, 건축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으로 널리 공부하였고, 또 수많은 천재들과 교류하면서 부단히 쌓아올렸던 정신적, 예술적 추구가 그 예술 속에서 독특한 결정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전인적(全人的)이며 철학적이고 다분히 학술적인 깊이를 갖춘 예술은 기능적이고 대중적이며 현대의 상업주의와 결탁한, 찬란하고 정교하지만 무미건조한 예술에 그 자리를 내어준 지 이미 오래되었기 때문에 현대인의 유디나에 대한 평가는 다분히 회의적이다. 하지만 진정한 예술적 아름다움과 정신을 추구하는 소수의 비평가들이나 음악가, 또 음악 애호가들로부터 그녀의 예술은 새롭고 참다운 의미를 부여받고 있다. 유디나의 예술은 물론 대단히 강렬하고 독특한 세계를 추구하고 있지만 그 기교는 극히 정확하며 그 음색은 매우 독창적이고 피아니스틱한 울림을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음악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대담하고 깊이 있는 세계를 표출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 당시에 유행했던, 지나치게 자의적이며 로맨틱하지만 아무런 정신적 깊이를 갖지 못한 감정과다의 왜곡된 연주와 뚜렷이 구별될 수 있는 것이다.

마리아 유디나의 레퍼토리는 보다 자유롭고 폭넓게 서방 작곡가들의 작품을 끌어들이고 재해석해냈다는 점에서 당대의 주도적인 러시아 피아니스트들과는 그 방향을 달리한다. 파인베르크가 바흐에 강렬하게 집착한 것에 비해 유디나는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부터 현대의 많은 작곡가들, 이를테면 스트라빈스키라든지 버르토크, 힌데미트, 알반 베르크나 보다 아방가르드에 속하는 작곡가들에 이르기까지 과감하고 거침없이 자신의 연주회 프로그램 속에 등장시켰다. 그리고 그 모든 연주들은 언제나 확고한 의미를 지니고 재현되었으며, 지극히 독창적이고 음악적으로 청중들에게 전달되었다.

스트라빈스키의 피아노를 위한 세레나데 A단조는 1924년에 작곡된 그의 유일한 피아노 소나타에 이어서 작곡된 것으로 신고전주의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이 세레나데는 4개의 시적인 소곡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스트라빈스키의 말처럼 18세기 밤 음악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곡은 일종의 찬가라고 할 수 있는 장엄한 서곡으로 시작하여 작곡가가 자신의 청중들을 위해 사려 깊게 마련한 선물이라고도 할 수 있는 로만차로 이어진다. 제3곡은 전통적으로 삽입되는 모데라토 템포의 춤곡으로 론돌레토라고 부기되어 있으며, 마지막 곡은 유창한 필치로 써내려간 서명과도 같이 화려하면서도 장식적인 느낌을 주는 카덴차 피날라로 되어 있다.

버르토크는 1926년 그의 주요한 방법론적 작품이라 할 수 있는 미크로코스모스의 작곡에 착수하여 1939년 모두 153곡에 이르는 이 음악 전체를 완성했다. 그는 다분히 교육적인 목적을 띤 이 곡을 작곡하면서 그의 가족을 염두에 두었다고 알려지고 있는데, 모두 6권으로 묶인 이 곡들 가운데 보다 쉽게 쓰인 처음 두 권은 자신의 아들을 위해서 그리고 어려운 부분들은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이 곡집 가운데 가장 난해한 부분은 제148번에서 제153번에 이르는 6곡의 불가리아 리듬에 의한 춤곡이다.

파울 힌데미트의 소나타 제3번은 1936년의 작품으로 모두 4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악장은 소나타 형식의 악장으로 6/8박자와 9/8박자의 부드러운 선율에 붓점리듬을 지닌 시칠리아노인데, 그 서정적인 분위기는 제3악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제2악장 스케르초는 정열적인 힘찬 기운을 느끼게 하는 역동적인 악장이고, 마지막 제4악장은 당당하고 거친 에너지가 분출되고 있는 장중한 푸가 악장이다.

알반 베르크의 유일한 피아노 소나타인 단악장의 작품은 1907~8년 사이에 작곡되어 1920년 개정되었다. 이 곡은 매우 현대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바그너의 트리스탄의 강렬한 영향 아래 작곡되었음이 명백한데, 거의 무아적인 정열이 곡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에른스트 크레네크는 1900년 빈에서 태어난 현대 작곡가로 베를린 음악대학에서 배웠다. 처음에는 후기낭만파의 경향을 지녔으나 1937년 이후로 스타일이 크게 바뀌었다. 그의 초기 작품 중에 대표적인 이 소나타는 스크리아빈의 작품에서 많은 것을 섭취하고 있다.

Track
01Stravinsky Serenade in A: 1. Hymne / 스트라빈스키 세레나데 1곡 <찬가>
02 Stravinsky Serenade in A: 2. Romanza / 스트라빈스키 세레나데 2곡 <로만차>
03 Stravinsky Serenade in A: 3. Rondoletto / 스트라빈스키 세레나데 3곡 <론돌레토>
04 Stravinsky Serenade in A: 4. Cadenza finala / 스트라빈스키 세레나데 4곡 <카덴차 피날라>
05 Bartok Mikrokosmos Parts 5 & 6 No. 128 Stamping Dance. Moderato / 바르톡 미크로코스모스 5, 6권 128번 <발 구르기 춤>
06 Bartok Mikrokosmos Parts 5 & 6 No. 132 Major Seconds Broken and Together. Adagio / 바르톡 미크로코스모스 5, 6권 132번 <장2도 펼침과 모임>
07 Bartok Mikrokosmos Parts 5 & 6 No. 137 Unison. Moderato / 바르톡 미크로코스모스 5, 6권 137번 <동일한 높이의 음정>
08 Bartok Mikrokosmos Parts 5 & 6 No. 142 From the diary of a Fly. Allegro / 바르톡 미크로코스모스 5, 6권 142번 <파리의 일기에서>
09 Bartok Mikrokosmos Parts 5 & 6 No. 144 Minor Seconds, Major Seventh. Molto adagio, mesto / 바르톡 미크로코스모스 5, 6권 144번 <단2도와 장7도>
10 Bartok Mikrokosmos Parts 5 & 6 No. 145 Chromatic Invention. Allegro (Versions a & b played at the same time) / 바르톡 미크로코스모스 5, 6권 145번 <반음계적 인벤션>
11 Bartok Mikrokosmos Parts 5 & 6 No. 146 Ostinato: Vivacissimo / 바르톡 미크로코스모스 5, 6권 146번 <오스티나토>
12 Bartok Mikrokosmos Parts 5 & 6 No. 149 Dance in Bulgarian Rhythm No. 2 / 바르톡 미크로코스모스 5, 6권 149번 <불가리아 리듬에 의한 무곡 2번>
13 Hindemith Sonata No. 3 in Bb: 1. Ruhig bewegt / 힌데미트 소나타 3번
14 Hindemith Sonata No. 3 in Bb: 2. Sehr lebhaft
15 "Hindemith Sonata No. 3 in Bb: 3. Massig schnell
16 Hindemith Sonata No. 3 in Bb: 4. Fuga. Lebhaft
17 Berg Sonata in b, Op. 1 / 베르크 소나타 작품 1
18 Krenek Sonata No. 2, Op. 59: 1. Allegretto - Moderato comodo / 크레네크 소나타 2번
19 Krenek Sonata No. 2, Op. 59: 2. Alla marcia. Energico
20 Krenek Sonata No. 2, Op. 59: 3. Finale

Maria Venyaminovna Yudina (1899-1970) / 마리아 베냐미노프나 유디나
Maria Venyaminovna Yudina was born in the Russian town of Nevel (Government of Vitebsk) on 10 September (old style 28 August) 1899 the daughter of a medical practitioner. From 1906 she took piano lessons with Frida Teitelbaum-Levinson, a former pupil of Anton Rubinstein at the St Petersburg Conservatory, which he had founded. When Yudina was 13 years old, her teacher took her to the Conservatory where she joined the piano class of Olga Kalantarova. Admitted to the advanced class of Anna Essipova at the beginning of the following year, she was allowed to make her first public appearance in December 1913. Essipova (1851-1914), a native of St Petersburg, was the grand old lady of Russian pianism. A pupil of the great Theodor Leschetizky, and his wife for over 14 years, she left her mark on a whole crop of brilliant young performers, including Sergei Prokofiev. When she died, her protege Vladimir Drosdov continued where she had left off. Maria Yudina went on to study conducting with Nikolai Cherepnin (and later in Paris), organ with Ivan Gandshin, counterpoint with Vassili Kalafati, and theory with Maximilian Steinberg (teacher of Shostakovich). Having received further instruction from Felix Blumenfeld (an uncle and teacher of Heinrich Neuhaus), she entered the University of Petrograd (as St Petersburg was known from the outbreak of World War I to Lenin's death) to attend a course in philosophy and history. After a three-year break, prompted by illness, Yudina resumed her pianistic studies in 1920, this time under the guidance of Leonid Nikolayev (1878-1942), the teacher of Sofronitsky and Shostakovich. Through Nikolayev, she inherited a pianistic tradition of legendary fame that was associated with the names of Vassili Safonov, Leschetizky and Czerny and stretched back all the way to Beethoven.

마리아 베냐미노프나 유디나는 러시아 비쳅스크의 네벨에서 1899년 9월 10일(구력으로는 8월 28일) 개업의사의 딸로 태어났다. 1906년부터 안톤 루빈스타인이 창설한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안톤 루빈스타인의 제자였던 프리다 타이텔바움-레빈존에게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마리아 유디나가 13세가 되던 해에는 스승을 따라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으로 옮겨 올가 칼란타로바의 피아노 클래스에 들어갔다. 이듬해가 시작되면서 안나 에시포바의 클래스로 진급했는데, 1913년 12월에 첫 공개 연주회를 가지는 것이 허락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인 에시포바(1851~1914)는 러시안 피아니즘의 대모였다. 위대한 테오도르 레셰티츠키의 제자이자 14년 이상 그의 아내였던 그녀는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를 비롯한 훌륭한 젊은 연주자들에게 그녀의 흔적을 남겼다. 에시포바가 타계함에 따라 유디나는 그녀의 조수였던 블라디미르 드로스도프에게서 피아노 수업을 계속 받았다. 마리아 유디나는 니콜라이 체레프닌에게 (나중에 파리에서도) 지휘를, 이반 간드신에게는 오르간을 배웠고, 바실리 칼라파티와 막시밀리안 스타인베르크(쇼스타코비치의 스승)에게서 대위법과 음악이론을 배웠다. 유디나는 펠릭스 블루멘펠트(네이가우스의 외삼촌이자 스승)에게서 피아노 수업을 더 받으면서 (1차 세계대전의 발발부터 레닌의 죽음까지 알려진 것처럼) 페트로그라드 대학교에서 철학과 사학을 공부했다. 건강이 나빠지면서 3년간 휴식을 취한 후, 유디나는 1920년에 이번에는 소프로니츠키와 쇼스타코비치의 스승인 레오니드 니콜라예프(1878~1942)의 문하에서 수업을 재개했다. 니콜라예프를 통하여 그녀는 바실리 사포노프, 레셰티츠키, 체르니와 관련된 전설적인 명성의 피아니스트 전통을 물려받았고 베토벤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She completed her wide-ranging studies in 1921, furnishing proof of her openness to Western music by choosing works by Bach, Beethoven, Liszt and Glazunov for her examination programme. Glazunov, director of the Petrograd Conservatory from 1905 to 1928, the year he left for Paris, made her a member of the teaching staff while she was playing her programme in public (together with fellow student Sofronitsky), and by 1923 she had attained the rank of professor. Subsequently, her contacts with Western Europe grew more intensive. She became acquainted with the conductor Otto Klemperer in 1925, and with the composer Paul Hindemith two years later. In 1926 she was elected to the governing body of the Leningrad Society for New Music, an organization which did much to popularize the works of the West European avant-garde during the brief period before Stalin's cultural hatchetmen laid down the law. In 1940 she embarked on an edition of Schubert's lieder (in a Russian translation). Having attended the Leipzig Bach Festival with Shostakovich in 1950, she undertook a concert tour of Poland in 1954. Finally, in 1960, she began to carry on an intensive and creative correspondence with Stravinsky (whom she met in Moscow two years later), Nono, Stockhausen, Adorno, Boulez, Penderecki, Messiaen and other exponents of Western modernism.

그녀는 1921년에 그녀의 오랜 피아노 수업을 끝내고 졸업 연주회 프로그램으로 바흐, 베토벤, 리스트와 글라주노프를 연주했는데, 그녀가 서방 음악에 대해서 얼마나 열린 시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잘 말해주는 일례라고 하겠다. 1905년부터 1928년까지 페트로그라드 음악원 교장을 지냈던 글라주노프는 파리로 떠난 해에 (동창생이었던 소프로니츠키와 더불어) 연주 활동하고 있었던 그녀를 교수요원으로 선발했는데, 1923년부터 그녀는 정교수가 되었다. 그 결과 서방 세계와의 접촉이 더욱 집중적으로 증가했다. 그녀는 1925년에 지휘자 오토 클렘페러와, 2년 후에는 작곡가 파울 힌데미트와 친해졌다. 1926년부터 유디나는 레닌그라드 현대음악협회의 회장으로 선임되어 스탈린 수하의 문화파괴자들에 의해 새로운 법안이 입안될 때까지 짧은 기간 동안 러시아에 서방의 아방가르드 음악을 소개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1940년에는 슈베르트 가곡의 러시아어 번역 사업에 착수했다. 1950년에 쇼스타코비치와 더불어 라이프치히의 바흐 축제에 참가하면서 1954년에는 폴란드를 연주 여행했다. 마침내 1960년부터는 (그녀가 모스크바에서 2년 후에 만났던) 스트라빈스키, 노노, 슈톡하우젠, 아도르노, 불레즈, 펜데레츠키, 메시앙과 그 외의 서구의 대표적인 현대 음악가들과 정열적이고 창조적인 서신 교환을 계속했다.

From 1930 Yudina gave concerts and recitals in various Soviet republics. In addition, she conducted master classes in Tiflis, Georgia, and began to explore a new field of study, architecture. After she had given up her teaching post in Leningrad because of her extensive concert appearances and made her Moscow debut in early 1929, she was named to a professorship at the Conservatory of the Soviet capital. Dismissed from her job in 1951, two years before Stalin's death, Yudina earned a living by teaching at the Gnessin Institute (a music school) in Moscow, giving recitals, writing essays and delivering lectures on music and philosophy. When Igor Stravinsky, by then a naturalized American, revisited the land of his birth in 1962 after having been ostracized there for decades, she participated in the gala concert that had been arranged to mark his 80th birthday. Maria Yudina's last performance took place in May 1969. Her death on 19 November 1970, due to the effects of a road accident that had led to diabetes and other complications, deprived Russia and the whole world of an intriguing musical personality.

1930년부터 유디나는 소련의 많은 공화국들에서 콘서트와 리사이틀을 가졌다. 그와 더불어 조지아 티플리스(트빌리시)에서 마스터클래스를 지도하기도 했고, 새로운 학문분야로 건축을 연구하기도 했다. 늘어나는 연주 일정 때문에 레닌그라드에서의 교수직을 포기한 유디나는 1929년 초에는 모스크바에서 피아니스트로 데뷔했고, 곧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교수직을 얻었다. 스탈린이 사망하기 2년 전인 1951년에는 스탈린 당국과의 불화로 이 자리로부터 해임된 유디나는 모스크바의 그네신 음악학교에서 가르치고 리사이틀을 열면서, 또 음악에 관한 에세이를 쓰고 음악과 철학에 대한 강연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1962년 스트라빈스키가 수십 년간의 망명 생활 후 다시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그녀는 이 위대한 거장의 80회 생일을 기념하여 개최된 갈라 콘서트에 출연하여 기꺼이 연주했다. 유디나의 마지막 연주회는 1969년 5월에 있었다. 1970년 11월 19일에 그녀는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얻게 된 당뇨병과 그 합병증으로 인해 생을 마감했으며, 러시아와 전 세계는 가장 개성적인 음악 인사 한 명을 잃었다.

"Needless to say, the piano has provided the basis for musical discoveries all my life. Each note I ever wrote down was first tried out on this instrument, and each interval was examined separately to be heard over and over again." This is how Igor Stravinsky summed up his views on the piano, adding: "Our fingers are not to be despised. They give us many suggestions, and when brought into contact with that sonorous instrument, they awaken ideas that lie dormant in the subconscious mind and that would otherwise remain hidden." Even so he was not a regular concert pianist - something he had in common with Tchaikovsky, who was afraid of facing an audience, whereas Stravinsky lacked the capacity to memorize music (which he did not consider essential to a valid interpretation, thus going against a trend that was then fashionable). This explains his small output for solo piano. He wrote his only sonata in 1924 and went on to perform it the following year in Donaueschingen and Venice. Subsequently, he composed a four-part Serenade in A, poetic keyboard music that fits in well with his neoclassical period. Meanwhile the composer had set himself a new stylistic framework, a practice he regarded as absolutely necessary without seeing it as restrictive in any way. "The greater the degree of control, constraint and elaboration in art, the greater the degree of freedom." He conceived the serenade "in the manner of 18th-century pieces of night music". Here is how he described the work: "It begins with a solemn introduction, a kind of hymn. There follows a solo in which the artist pays a ceremonial tribute of sorts to his guests. The third movement, in moderate tempo, is a dance number of the kind traditionally interpolated in such pieces. It closes with what may be called a signature, with numerous calligraphic flourishes."

“말할 필요도 없이, 피아노는 평생 동안 음악적인 발견을 위한 기초를 제공했다. 내가 적은 각각의 음은 이 악기에서 처음 시도되었으며, 각 간격은 거듭 반복해서 들을 수 있도록 별도로 검사되었다.” 이것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가 피아노에 대한 그의 견해를 덧붙여 요약한 것을 추가한 것이다. - “우리는 손가락을 폄하해서는 안 된다. 손가락은 우리에게 많은 제안을 해주며, 이 위풍당당한 악기와 접촉하게 되면, 잠재의식 속에 숨어있는 아이디어를 일깨워준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는 정기적인 콘서트 피아니스트가 아니었다. - 청중을 대면하는 것을 두려워했던 그는 차이코프스키와 공통점이 있었지만, 스트라빈스키는 (그가 효과적인 해석에 필수적이라고 여기지 않았으므로 유행이었던 추세에 반대하면서) 암보 능력이 부족했다. 이것은 그의 피아노 독주곡이 적다는 것을 설명한다. 그는 1924년에 유일한 소나타를 썼고 이듬해에 도나우에싱엔과 베니스에서 계속 연주했다. 그 후 그는 신고전주의 시대에 잘 어울리는 시적 피아노 음악인 4곡으로 구성된 세레나데를 작곡했다. 한편 작곡가는 그 자신을 새로운 스타일의 구조로 설정했는데, 어떤 방식으로든 제한적으로 보지 않고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간주했던 의지였다. “예술에서 통제, 제약, 정교함의 정도가 클수록 자유의 정도가 커진다.” 그는 세레나데를 “18세기 밤 음악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고 보았다. 여기 그가 이 작품을 어떻게 묘사하는지가 있다. - “일종의 찬가라고 할 수 있는 장엄한 서곡으로 시작한다. 아티스트가 자신의 청중들을 위해 사려 깊게 마련한 선물로 이어진다. 제3곡은 전통적으로 삽입되는 모데라토 템포의 춤곡이다. 마지막 곡은 유창한 필치로 써내려간 서명과도 같다.”

From 1907 Bela Bartok was head of piano studies at the Budapest Academy of Music (founded by Liszt), where he had once studied with Liszt's pupil, Istvan Thoman. In 1926, he embarked on his principal methodological work, "Mikrokosmos, Progressive pieces for pianoforte". By 1939 he had completed all 153 items of the set. The following year he emigrated to the United States. In fact, he had been concerned with educational projects even before, writing a collection of piano pieces "For children" and collaborating on a "Violin School" with E. Doflein. Initially, Bartok had his own family in mind, composing difficult pieces for his own needs and easier ones for his son, Peter (to whom the first two volumes are dedicated). He ended up filling six volumes. "Mikrokosmos" may well be the most original course in piano playing ever penned as it not only contains the usual instructions for playing the instrument, but also covers such aspects as sight-reading, aural perception, independent use of the hands (different accidentals for right and left), four hands playing, asymmetrical time patterns and even tonal reflexes (sforzando effects with keys held down but not struck). The most difficult items are the concluding "Six Dances in Bulgarian Rhythm" (Nos 148 to 153), genuine concert pieces dedicated to the English pianist Harriet Cohen (1895-1967).

벨라 버르토크는 1907년부터 (리스트에 의해 창설된) 부다페스트 음악원에서 피아노 연구의 책임자였으며, 리스트의 제자인 이스트반 토만을 사사한 적이 있었다. 버르토크는 1926년 그의 주요한 방법론적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인 피아노 교본 <미크로코스모스>의 작곡에 착수했다. 1939년 모두 153곡에 이르는 이 세트를 완성했다. 이듬해에 그는 미국으로 이주했다. 실제로, 그는 이전에도 교육 프로젝트에 관심을 가졌는데, <어린이를 위한> 피아노곡집을 쓰고 에리히 도플라인과 <바이올린 스쿨>을 공동 작업했다. 그는 다분히 교육적인 목적을 띤 이 곡을 작곡하면서 그의 가족을 염두에 두었다고 알려지고 있는데, 이 곡들 가운데 보다 쉽게 쓰인 처음 두 권은 자신의 아들 페테르를 위해서 그리고 어려운 부분들은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6권을 채웠다. <미크로코스모스>는 펜으로 쓴 것처럼 가장 독창적인 피아노 연주 과정이 될 것인데, 악기 연주에 대한 일반적인 지침뿐만 아니라 음표를 보고 바로 연주하는 것(초견), 청음, 손의 독립적인 사용(왼손과 오른손의 우연한 차이), 4개의 손으로 연주하기, 비대칭적인 박자 패턴, 음색의 반영(건반을 누르지만 때리지 않고 돌연히 악센트를 붙이는 스포르찬도 효과)을 포함한다. 이 곡집 가운데 가장 난해한 부분은 제148번에서 제153번에 이르는 <6곡의 불가리아 리듬에 의한 춤곡>으로, 천재적인 연주회용 곡들은 영국 피아니스트 해리어트 코헨(1895~1967)에게 헌정되었다.

The violist Paul Hindemith is the rare example of a composer who started out as a string instrument player, but this did not prevent him from writing a fair number of intriguing piano pieces, including his arresting "Suite 1922", in which he recommends treating the piano as a percussion instrument, as well as three sonatas (all dating from 1936), the first of them inspired by Holderlin's poem "Der Main". It should be noted here that the composer was born in Hanau, a Hessian town on the banks of that river, and later entered the conservatory in Frankfurt am Main, becoming the first violin in the city's Opera Orchestra. But Hindemith was merely indulging in reminiscences by that time, for he had been appointed professor of composition at Berlin's College of Music in 1927. The two other sonatas are not programmatic in character. The third, laid out in four movements, might seem neoclassical at first sight, but as so often, appearances are deceptive. Rather than open with the usual sonata-form allegro, the first movement is marked "ruhig bewegt", featuring a kind of Italian siciliano in a gently swaying six-eight or nine-eight rhythm. This near-lyrical mood dictates the character of the central movements. The scherzo-like second movement, designated "sehr lebhaft", is full of kinetic energy while the third is conceived as a march. Energy and vigour are the hallmarks of the finale, which culminates in a fugue that is notable for the superimposition of fourths and, in turn, undergoes another mighty build-up when it is expanded into a double fugue.

비올라 연주자 파울 힌데미트는 현악기 연주자로 시작한 작곡가의 보기 드문 사례이지만, 이것은 그가 타악기 연주자로서 피아노 훈련에 추천하는 매력적인 <모음곡 1922>, (모두 1936년에 작곡한) 3개의 소나타(그 중 하나는 횔데를린의 시 <마인 강>에서 영감을 받음)를 포함하여 많은 흥미로운 피아노곡들을 작곡하지 못하게 방해하지 않았다. 작곡가가 그 강 유역에 있는 하나우의 헤시안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이후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음악원에 들어가서 시의 오페라 오케스트라 악장이 되었다고 여기 적혀있을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힌데미트는 그 당시까지 추억에 잠기지 않았는데, 1927년 베를린 음대에서 작곡과 교수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2개의 다른 소나타는 성격이 설정되어 있지 않다. 4악장으로 구성된 세 번째 소나타는 처음에는 신고전주의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종종 그렇게 자주 등장하는 것은 기만적이다. 1악장은 소나타 형식의 악장으로 6/8박자와 9/8박자의 부드러운 선율에 붓점리듬을 지닌 시칠리아노인데 “고요하고 감정있게”라고 표시되어 있다. 이 서정적인 분위기는 중간 악장들의 특징을 나타낸다. “매우 생기있게”로 명명된 스케르초 같은 2악장은 힘찬 기운을 느끼게 하는 반면 3악장은 행진곡으로 여겨진다. 4악장은 당당하고 거친 에너지가 분출되고 있는 장중한 푸가 악장으로, 4도 음정이 겹치는 것에 주목할 만하며, 차례차례로 2중 푸가로 확장될 때 또 다른 막강한 증가를 겪는다.

Alban Berg was not a pianist either. Keyboard music accounts for only a small portion of his output, which is modest anyway. The first work to be acknowledged by the composer was the sonata (regrettably his only one) which he composed in 1907-8 and revised in 1920. The single-movement work was clearly written under the influence of Wagner's Tristan, a work that held a hypnotic fascination for more than one generation of composers. The key of B minor recalls Liszt's (only full-fledged) sonata, but the tonality is merely suggested at the beginning and towards the end. The broad gamut of expression, which even comprises flights of lyricism, highlights the expressive and dramatic gifts of a composer who managed to write gripping and sincerely expressive music despite the use of serial techniques and formal devices (Wazzek, Lulu and the Violin Concerto).

알반 베르크는 피아니스트도 아니었다. 피아노 음악은 그의 작품 중 아주 작은 부분만을 차지하는데, 어쨌든 겸손하다. 작곡가가 인정한 최초의 작품은 1907~8년에 작곡하고 1920년에 개정한 소나타(유감스럽게도 그의 유일한 작품)이다. 단악장 작품인 이 곡은 매우 현대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바그너의 트리스탄의 강렬한 영향 아래 작곡되었음이 명백한데, 거의 무아적인 정열이 곡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B단조는 리스트의 (유일하게 완전히 성장한) 소나타를 연상케 하지만, 조성은 처음과 끝날 때에만 제시된다. 서정성의 비행을 포함하는 넓은 범위의 표현은 일련의 테크닉과 공식적인 장치들(바제크, 룰루, 바이올린 협주곡)임에도 그립고 진심으로 표현적인 음악을 쓰는 데 성공한 작곡가의 표현적이고 극적인 재능을 강조한다.

Ernst Krenek, born in Vienna in 1900 (the same year as Kurt Weill), was also a product of the post-Romantic school. At the age of 16 he began to study with the operatic composer Franz Schreker, moving to the German capital when his teacher was named director of the Berlin College of Music. There was at least one marked change in his stylistic development, which occurred in 1937. His early works, notably those for the piano, still owe a great deal to Scriabin. It took a good deal of courage to play works by a composer whose music had been branded as degenerate or decadent by Hitler's and Stalin's henchmen and whose jazz opera "Johnny spielt auf" (Johnny Strikes Up) was castigated as a glorification of "nigger music". Maria Yudina possessed that courage.

1900년(쿠르트 바일과 같은 해) 빈에서 태어난 에른스크 크레네크는 후기낭만파의 경향도 지녔다. 16세에 그는 독일의 수도로 이주해서 오페라 작곡가 프란츠 쉬레커에게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의 스승이 베를린 음대 학장으로 임명되었을 때였다. 1937년 이후로 스타일이 크게 바뀌었다. 그의 초기 작품 중에 대표적인 이 소나타는 스크리아빈의 작품에서 많은 것을 섭취하고 있다. 히틀러와 스탈린의 부하들에 의해 퇴화되었거나 퇴폐적인 음악으로 기록된 작곡가의 작품들을 연주하는 데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고 재즈 오페라 <자니가 밴드를 연주한다>는 “깜둥이(흑인을 가리키는 대단히 모욕적인 말) 음악”에 대한 찬양으로 혹평 받았다. 마리아 유디나는 그런 용기를 소유했다.


유태계인 마리아 유디나는 스탈린이 연주를 사랑했다는 피아니스트이다. 바르톡은 바르토크라고도 하는데 버르토크가 올바른 표기인가보다.

댓글 1개:

  1. http://uploaded.net/file/83y6z6uu/from/aa33kn

    http://uploaded.net/file/o5yj5bxk/Mel.RPS04.r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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