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19일 목요일

Melodiya / Sviatoslav Richter - Russian Piano School, Vol. 6



Track
01 Bach Italian Concerto in F, BWV 971: 1. Allegro / 바흐 <이탈리아 협주곡>
02 Bach Italian Concerto in F, BWV 971: 2. Andante
03 Bach Italian Concerto in F, BWV 971: 3. Presto
04 Bach Fantasia & Fugue in a, BWV 944 / 바흐 <환상곡과 푸가> BWV 944
05 Haydn Sonata in C, Hob. XVI No. 50: 1. Allegro / 하이든 소나타 50번
06 Haydn Sonata in C, Hob. XVI No. 50: 2. Adagio
07 Haydn Sonata in C, Hob. XVI No. 50: 3. Allegro molto
08 Beethoven Sonata No. 12 in Ab, Op. 26: 1. Andante con Variazioni / 베토벤 소나타 12번
09 Beethoven Sonata No. 12 in Ab, Op. 26: 2. Scherzo. Allegro molto
10 Beethoven Sonata No. 12 in Ab, Op. 26: 3. Marcia funebre sulla morte d'un Eroe
11 Beethoven Sonata No. 12 in Ab, Op. 26: 4. Allegro
12 Chopin Ballade No. 1 in g, Op. 23 / 쇼팽 발라드 1번
13 Chopin Ballade No. 2 in F, Op. 38 / 쇼팽 발라드 2번

Sviatoslav Teofilovich Richter (born 1915) / 스비아토슬라프 테오필로비치 리히터
According to the current political map Sviatoslav Richter is a Ukrainian artist, for he was born to a German-Russian family on 20 March (old style 7 March) 1915 in the Ukrainian town of Zhitomir. His father was an organist and composer. So it is not too surprising that the son tried his hand at composition when he was eight years old, only to give it up again at the age of 20, just before he embarked on his pianistic studies. It was the music of Chopin which fired him with the ambition to master the keyboard. "When I heard my father play the fifth nocturne, I was deeply moved and decided to become a musician myself."

현재의 정치지도에 따르면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는 우크라이나 아티스트로, 그가 1915년 3월 20일(구력으로는 3월 7일) 지토미르의 우크라이나 마을에 있는 독일-러시아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오르간 연주자이자 작곡가였다. 그래서 아들이 8세 때 작곡을 시도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으며, 그 결과 그의 피아노 공부에 착수하기 바로 전, 20세에 작곡을 다시 포기했다. 건반을 마스터하기 위한 야심으로 그의 열정을 불태웠던 것은 쇼팽의 음악이었다. “아버지가 녹턴 5번(Op 15 No. 2)을 연주하는 걸 들었을 때, 나는 감동을 받아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Richter soon won renown as an accompanist of lieder singers, appearing with his wife, the singer Nina Dorliac, as well as Elisabeth Schwarzkopf and Dietrich Fischer-Dieskau. But he also performed a good deal of chamber music, especially with his friend Mstislav Rostropovich (with whom he premiered two works by Prokofiev) and with the composer himself, who dedicated his Piano Sonatas Nos 6, 7 and 9 to him, all of which Richter introduced to the public. Among his regular chamber music partners, David Oistrakh, Oleg Kagan and Gidon Kremer deserve special mention.

리히터는 디트리히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 피셔-디스마우뿐만 아니라 아내(라기보다는 동반자라고 해야 맞음)이자 가수인 니나 도를리악과 함께 출연하면서 곧 가곡 반주자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는 실내악도 많이 했는데, 특히 그의 친구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그와 함께 프로코피에프의 작품 2개 초연)와 작곡가 그 자신(프로코피에프)과 협연했다. 프로코피에프는 그의 피아노 소나타 6, 7, 9번을 리히터에게 헌정했으며, 리히터는 모두 공개로 연주했다. 그의 정기적인 실내악 협연자들로는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올렉 카간, 기돈 크레머(셋 다 바이올린)가 있는데 특별한 언급이 필요하다.

Richter is an artist of many talents. He has been a passionate opera-lover all his life, and in 1983 he produced an opera for the first time. On one occasion he even wielded the baton. This was when Rostropovich played the solo part in the first performance of Prokofiev's "Sinfonia concertante" for cello and orchestra (one of the two works mentioned above). Nor should we neglect to mention that Richter has added painting to his artistic pursuits under the influence of Piet Mondrian and Kasimir S. Malevich. Given his remarkable versatility, it is hardly amazing that his formal musical training should have begun at a relatively late stage. He was 22 years old when he entered the class of Neuhaus in Moscow to study with him for the next seven years, virtually for the entire duration of the war. This investment brought its first reward in 1945 when he won first prize at the All-Union Competition, which catapulted him to international prominence virtually overnight. But it was not until 1960 that he made his first tours abroad, appearing in the United States, Britain, France, and Austria. In 1964 he helped to launch the French Festival "de la Grange de Meslay" (Tourraine), where he has since appeared year after year.

리히터는 많은 재능을 가진 아티스트이다. 그는 평생 동안 열정적인 오페라 애호가였으며 1983년 오페라를 처음으로 제작했다. 지휘를 한 적도 한 번 있었다. 이는 로스트로포비치가 프로코피에프의 첼로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신포니아 콘체르탄테>(위에서 언급된 두 작품들 중의 하나)의 첫 연주에서 솔로 파트를 연주했을 때였다. 우리는 리히터가 피에트 몬드리안과 카시미르 말레비치의 영향을 받아 그의 예술적 추구에 그림을 추가했다는 언급도 무시하고 넘어갈 수는 없다. 그의 현저한 다재다능함을 감안할 때, 공식적인 음악 교육이 비교적 늦은 단계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가 모스크바에서 네이가우스의 문하에 들어갔을 때에는 22세였는데, 다음 7년 동안 사실 전쟁의 전체 기간 동안 네이가우스를 사사했다. 이 투자는 1945년에 전소련 콩쿠르에서 우승한 첫 번째 보상으로, 사실상 하룻밤 사이에 국제적인 명성을 쌓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60년이 되어서야 미국,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에서 첫 해외 투어를 가졌다. 1964년에 그는 프랑스 투렌 음악제(페스티발 드 라 그랑주 드 메슬리)의 창설을 도왔고, 이후 해마다 등장했다.

Richter's memory is phenomenal. He compiles up to 15 different programmes for one season. This peculiar gift goes hand in hand with a general openness to virtually all stylistic trends. As a true Russian, he concedes that his playing, for all its perfection, is predominantly a matter of feeling and sensibility. "As a rule, I follow my intuition and my heart," he once remarked. Echoing Beethoven, whose music invariably went "from heart to heart", he said: "The composer's thoughts, his heart and his true feelings must always be recognizable."

리히터의 암보력은 놀랍다. 그는 한 시즌 동안 15개의 다른 프로그램을 편성한다. 이 독특한 재능은 사실상 모든 양식적인 흐름에 대한 일반적인 개방성과 관련되어 있다. 진정한 러시아인으로서, 그는 모든 완벽함을 위한 연주가 주로 감정과 감각의 문제라고 인정한다. “원칙적으로, 나는 내 직감과 내 마음을 따라간다”고 그가 한 번 언급했다. 음악이 끊임없이 “마음에서 마음으로” 갔다고 베토벤을 상기하면서 그가 말했다. - “작곡가의 생각들, 그의 마음, 그의 진정한 느낌들은 항상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Just as Karl May never set foot on American soil and Debussy never saw the Far East, Johann Sebastian Bach never visited Italy. And yet his "Italian Concerto" fully captured the style then in vogue, imported from the country where the concerto had originated. It is one of two quasi-orchestral works for the two manual harpsichord which were printed as the second part of his "Clavier-Ubung" in 1735. These works provide a graphic illustration of the two national styles that were dominant in his day: the Italian solo concerto and the French orchestral suite (alternatively known as overture because the opening movement was the most significant part). Both styles - and especially the Italian one - had a considerable influence on his own output. This can be seen from the fact that Bach transcribed about a dozen Italian violin concertos for his own performing requirements during his first period in Weimar, where he served as court organist, chamber musician and (at a later stage) first violin of the orchestra.

카를 마이(독일 저술가)가 미국 땅에 발을 내딛지 않았고 드뷔시가 동아시아를 보지 못했던 것처럼,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이탈리아를 방문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바흐의 <이탈리아 협주곡>은 협주곡이 시작된 나라에서 수입된 유행의 스타일을 완전히 포착했다. 그것은 1735년 <클라비어위붕>(클라비어 연습) 시리즈 2부로 2단 하프시코드를 위한 2개의 오케스트라에 준하는 작품들 중의 하나이다. 이 작품들은 그의 시대에 지배적이었던 두 가지 국가 스타일의 도표를 제공하는데, 이탈리아 협주곡과 프랑스 오케스트라 모음곡(1악장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서곡으로 알려짐)이다. 두 스타일 모두 - 특히 이탈리아 스타일 - 그의 결과물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것은 바흐가 1기 바이마르 시대 동안 연주 요구 사항에 따라 12개의 이탈리아 바이올린 협주곡들을 편곡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바흐는 바이마르에서 궁정 오르간 연주자, 실내악 연주자, (나중에 무대에서) 오케스트라 제1바이올린으로 봉직했다.

The first movement is a stately affair while the third movement is more spirited in character. Both open with distinctly orchestral ritornellos followed by contrasting "solo" passages. As so often in Bach's slow movements, the central Andante is based on an ostinato bass line, originally to be played on the second manual of the harpsichord and set against a richly embellished cantilena on the first manual. Only four years after the piece had appeared in print, the influential critic J. A. Scheibe described the work as the "perfect model of a well-designed concerto". In actual fact, it was the prototype of an early classical sonata, composed long before Bach's second eldest son, Carl Philipp Emanuel, established the genre.

1악장은 대담한 사건이지만 3악장은 성격상 강렬하다. 둘 다 대조적인 “솔로” 패시지들이 따르는 뚜렷한 오케스트라적인 리토르넬로[바로크의 협주곡, 특히 콘체르토 그로소의 제1악장과 또 종종 끝악장의 전형적인 형식에 사용되는 말. 이러한 악장은 총주(투티) 부분과 독주(솔로) 부분의 교체로 이루어지고 있다.]로 시작한다. 바흐의 느린 악장들이 그렇듯이, 2악장 안단테(느리게)는 오스티나토(고집스럽게 반복되는 음형) 베이스 선율에 기초하는데, 원래는 2단 하프시코드에서 연주하고 1단 하프시코드에서는 풍부하게 장식된 칸틸레나(서정적인 선율)에 맞춰야 했다. 그 곡이 출판된 지 불과 4년 만에 영향력 있는 비평가 요한 아돌프 샤이베(Johann Adolph Scheibe)는 이 작품을 “잘 설계된 협주곡의 완벽한 모델”로 표현했다. 실제로, 그것은 바흐의 차남인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가 이 장르를 확립하기 훨씬 전에 만들어진 초기 고전 소나타의 원형이었다.

Ostinato bass line of Bach's Italian Concerto's 2nd movement / 바흐 이탈리아 협주곡 2악장의 오스티나토 베이스 선율

Two of the cantor's sons were not only composers, performers and conductors, but carved their names into musical history by providing direct or indirect guidance to eminent fellow musicians. Johann Christian (the "English" Bach), youngest son of Johann Sebastian and his second wife, performed with Mozart when the eight-year-old prodigy visited London and greatly influenced his early symphonic output. Carl Philipp Emanuel, second son of Johann Sebastian and his first wife (known as the "Berlin" or "Hamburg" Bach), created the prototype of the modern piano sonata. The young Joseph Haydn learned a great deal from him, as he emphasized himself: "Whoever knows me well will see how much I owe to Emanuel Bach and how I have understood and thoroughly studied him."

칸토르(성가대장)의 아들들 중 두 명은 작곡가, 연주자, 지휘자였을 뿐만 아니라 저명한 동료 음악가들에게 직접 또는 간접적인 지침을 제공하여 음악사에 그들의 이름을 새겼다. 요한 제바스티안과 그의 두 번째 아내의 막내아들인 요한 크리스티안(영국의 바흐)은 8세 신동인 모차르트가 런던을 방문했을 때 함께 연주했고 모차르트의 초기 교향곡 작풍에 큰 영향을 주었다. 요한 제바스티안과 그의 첫 번째 아내의 둘째아들인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베를린의 바흐 또는 함부르크의 바흐)은 현대 피아노 소나타의 원형을 만들었다. 젊은 요제프 하이든은 그 자신이 강조한 것처럼, 에마누엘 바흐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 “누구든지 나를 잘 아는 사람은 내가 얼마나 많은 빚을 졌는지, 내가 얼마나 많이 배웠는지, 그를 얼마나 철저히 연구했는지 알 것이다.”

Chronologically, his C major Sonata No. 50 is the central item of the three English Sonatas which Haydn wrote for the pianist Therese Jansen-Bartolozzi in 1795, during his second visit to England, which brought him the public recognition as a symphonist that his own country had largely denied him. At last, he was leading the unfettered life of a freelance musician. Having been retired on a pension in 1790, he thoroughly enjoyed the exhilarating climate of independence. After all, the half century spent as kapellmeister in the service of the Esterhazy family had involved constraints on his creativity, for he was little more than a servant, his princely employer presenting him with a daily list of works that he wished to see rehearsed immediately and performed the same evening. Since Prince Nicolaus the Magnificent liked to play the barytone, Haydn was compelled to write about 150 trios for this obsolete string instrument. So he had to skip a number of genres in his catalogue of works simply because he found no time for them.

연대기적으로, 하이든 소나타 50번은 그의 두 번째 영국 방문 동안 피아니스트 테레제 얀센-바르톨로치를 위해 쓴 3개의 영국 소나타(50, 51, 52번)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조국(오스트리아)이 그를 크게 인정하지 않았던 교향곡 작곡가로서 대중의 인정을 받았다. 마침내 그는 프리랜서(자유 계약자)로 일하는 음악가의 자유로운 인생을 이끌고 있었다. 1790년에 연금을 받고 퇴직한 그는 철저히 독립의 짜릿한 분위기를 즐겼다. 결국 에르테르하지 가문을 위해 악장으로서 소비한 반세기(50년)는 그의 창의력에 제약을 가했는데, 그의 엄청난 고용주가 즉각 리허설을 보고 싶어 했고 같은 날 밤 연주했던 작품들의 일일 목록을 제시하면서 그의 하인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니콜라우스 에스테르하지 후작이 바리톤을 즐겨 연주했기 때문에, 하이든은 이 한물간 현악기를 위해 약 150개의 트리오를 쓰도록 강요받았다. 그래서 그는 그의 작품 카탈로그에서 여러 장르를 건너뛰었는데 단지 그가 그것들을 쓸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No. 50 is regarded as one of the most difficult sonatas from Haydn's pen (just a few more were to follow). Like all works from his late period (from 1781), it reveals the influence of Mozart with whom the older master had entered into a lively creative exchange in Vienna, not just on the subject of string quartets. Two sonatas written at about the same time are in the key of C major: Nos 48 and 50. The latter deliberately emphasizes a spontaneous kind of music-making. The opening Allegro features a staccato-like triadic motive (with subsequent leaps by a fifth and seventh), but no subsidiary lyrical theme is offered for contrast (this practice was not yet common at the time). So the composer here demonstrates his skill at thematic transformation instead. A striking unison passage (looking ahead to Beethoven) in the closing pages of the development is followed by a Kreisleriana to Chopin, and the latter responded by inscribing his Op. 38 to the Saxon composer. The contrast between a pastoral tune typical of Schumann and a furious minor-key theme follows the poet's account of an invasion by Russian armies and the miraculous rescue of Lithuanian virgins.

50번(몇 분 안 걸림)은 하이든이 쓴 것 중에서 가장 어려운 소나타들 중 하나로 여겨진다. 그의 후기(1781년부터)의 모든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이 소나타는 옛 거장이 현악4중주의 주제뿐만 아니라 비엔나에서 활발한 창조적인 교류에 관여했던 모차르트의 영향이 드러난다. 같은 시기에 쓰인 두 개의 소나타는 C장조인데 48번과 50번이다. 후자(50번)는 마음에서 우러난 음악 만드는 것의 일종을 신중하게 강조한다. 1악장 알레그로(빠르게)는 (5도 음정과 7도 음정으로 뒤이어 도약하는 것과 함께) 스타카토 같은(스타카티시모로 시작하는) 3화음 모티브를 특징으로 하지만, 대조(당시에는 이런 관행이 일반적이지 않았음)를 위해 제공되는 부수적인 서정적인 테마가 없다. 그래서 작곡가는 여기에서 대신에 주제를 변형하여 그의 재주를 보여준다. 발전부가 끝나가는 부분에서 (베토벤을 내다보는) 빼어난 유니즌(동음의) 패시지는 쇼팽에게 헌정된 슈만의 크라이슬레리아나로 이어지고 후자(쇼팽)는 색슨 작곡가(슈만은 색슨 계보의 서기의 아들)의 이름을 발라드 2번을 새기면서 답했다. 슈만과 유사한 전형적인 목가곡과 격렬한 단조 주제의 대조는 러시아 군대의 침공과 리투아니아 처녀들의 기적적인 구조에 대한 시인(아담 미츠키에비치)의 설명을 따른다.

The opening Allegro of Haydn Sonata No. 50 / 하이든 소나타 50번 오프닝 (빨간 네모는 3화음 모티브, 남색 네모는 5도 음정 도약, 파란 네모는 7도 음정 도약, 주황색 네모는 주제 변형)

The unison passage of Haydn Sonata No. 50 / 하이든 소나타 50번 발전부에 나오는 유니즌 패시지

Chopin Ballade No. 2 Andante / 쇼팽 발라드 2번의 목가적인 오프닝

Chopin Ballade No. 2 Presto con fuoco / 쇼팽 발라드 2번의 격렬한 단조 주제

[1836년에 작곡하여 1838년에 개정이 이루어진 발라드 2번은 <크라이슬레리아나>를 자신에게 헌정한 것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슈만에게 헌정했다. 이 작품은 미츠키에비치의 ‘윌리스의 호수’라는 시로부터 영감을 받아 작곡한 곡이다. 러시아의 약탈에 황폐화된 폴란드의 어느 도시를 연상시키는 호수가 배경이다. 러시아의 압제에서 벗어나고자 도시의 젊은 여인들이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도하자 잔잔한 호숫가를 둘러싼 독을 품은 꽃들로 변해버리는 불가사의한 사건을 묘사한 내용이다. 이 작품 역시 섬세한 F장조와 보다 우울한 A단조가 전투적으로 대립을 벌이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조용하고 부드러운 안단티노를 거친 뒤 갑자기 파도가 밀려오듯 전율적이고 분노에 찬 악절이 펼쳐지며 이내 발작적인 엑스타시를 터뜨리는 프레스토에 이른다. 한 작품에서 두 개의 상반된 자아가 등장하여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형식은 슈만의 오이제비우스와 플로레스탄과 많이 다르지 않은 듯이 보인다. 이렇게 쇼팽, 슈만과 같은 낭만주의 작곡가들은 소나타 형식을 벗어나 표현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새로운 형식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런 형식은 휴머니티에 대한 진정한 반영으로 평가받는다.]


러시안 피아노 스쿨 20장 중에서 한글 부클릿을 안 가지고 있는 음반 3개 중에 하나라서 영어 정보를 발췌한 다음 번역한 것이다. 늘 그렇듯이 번역이 잘 안 되는 문장들이 있었지만 러시안 피아니즘을 워낙 사랑해서 그런지 알아가는 재미가 있었다. mp3 시절에 다른 음반들이랑 중복 관계로 지웠는데 귀한 정보를 스스로가 삭제하다니... 옛날에 속지 읽어보면서 러시안 피아노 스쿨을 대강이라도 공부했는데 지금은 내용을 대부분 까먹었다. 내가 중복 음원이 있으면 해당 음원을 지워도 앨범 표지 같은 건 남겨놓는데 통째로 지웠나보다. 그나마 3개만 없어서 감지덕지~ 그게 어디야... 그래도 나중에 외국 분들한테서 고음질도 구하고 영어 부클릿이라도 구해서 다행이긴 하다. 평소에 음반을 모을 때 앞표지랑 뒤표지를 구하는데 속지까지 있으면 좋겠지만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고음질 음원이니까! 번역자가 영어로 옮길 때 무지 힘들었을 것 같다. 이 음반이 발매되었을 때에는 리히터가 살아있을 때이다. 해석이 잘 안 되어서 한글 번역본이 좀 아쉽기는 한데 정보가 적어서 차라리 다행이다. 번역이 잘 안 되다 보니깐 문학에서 말하는 초월 번역하는 느낌이었다. 의역은 그렇다 치고 직역부터가 쉽지 않았다. 번역자가 영어로 옮길 때 무지 힘들었을 것 같다. 발라드 2번은 내용이 뭔가 함축적인 것 같아서 나부터 이해하기가 불편해서(대강의 설명이 한 문장으로 압축되어서) 곡 설명을 따로 찾아서 보충했다.

댓글 1개:

  1. http://uploaded.net/file/2bm3e0n5/from/aa33kn

    http://uploaded.net/file/esapp67q/Mel.RPS06.r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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