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18일 금요일

Telos Music / Igor Shukow Edition, Vol. 4 - Bach, Mozart & Shostakovich Piano Concertos (Live Recording) 2014



주코프 에디션 4
Igor Shukow, piano & conductor / 이고르 주코프, 피아노 및 지휘
New Moscow Chamber Orchestra / 뉴 모스크바 실내 오케스트라

Track
01 Bach Concerto for harpsichord, strings & continuo No. 3 in D, BWV 1054 - I. (Allegro) / 바흐 하프시코드 협주곡 3번 BWV 1054
02 Bach Concerto for harpsichord, strings & continuo No. 3 in D, BWV 1054 - II. Adagio e piano sempre
03 Bach Concerto for harpsichord, strings & continuo No. 3 in D, BWV 1054 - III. Allegro
04 Mozart Piano Concerto No. 23 in A, K. 488 - I. Allegro /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3번
05 Mozart Piano Concerto No. 23 in A, K. 488 - II. Adagio
06 Mozart Piano Concerto No. 23 in A, K. 488 - III. Allegro assai
07 Shostakovich Concerto No. 1 for piano, trumpet & strings in c, Op. 35 - I. Allegro moderato / 쇼스타코비치 피아노 협주곡 1번
08 Shostakovich Concerto No. 1 for piano, trumpet & strings in c, Op. 35 - II. Lento
09 Shostakovich Concerto No. 1 for piano, trumpet & strings in c, Op. 35 - III. Moderato
10 Shostakovich Concerto No. 1 for piano, trumpet & strings in c, Op. 35 - IV. Allegro con brio

'Herr Bach is a master of music of such eminence that we can certainly challenge all foreign composers with him. It is no wonder then that he can offer us a work in this form which earns the envy of our own great composers, while others attempt to emulate him but in vain.'

‘헤어(남자의 독일어 경칭) 바흐는 우리가 확실히 그와 함께 모든 외국 작곡가들에게 도전할 수 있는 그런 저명한 음악의 거장이다. 그가 우리의 위대한 작곡가들의 부러움을 사는 이런 형식의 작품을 우리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인 반면, 다른 작곡가들이 그를 모방하려 하지만 헛된 것이다.’

With these words in the weekly magazine "Der Critische Musikus" of Hamburg, Johann Adolph Scheibe forced himself to praise the music of Johann Sebastian Bach.

요한 아돌프 샤이베는 함부르크의 주간지 <데어 크리티쉐 무지쿠스>에서 이러한 말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음악에 찬사를 보냈다.

This was a pleasing exception to his usual judgement: he would customarily accuse his countryman of exaggerated artificiality, florid style, and striking absence of a sense of ease. His chauvinism regarding music is wholly inappropriate, for the muse of German music would have been poorly served were it not for those 'foreign composers'. Scheibe's praise quoted above was for Bach's Concerto for clavier in F major (BWV 1057). This work comes out of the Romantic tradition originating south of the Alps. So do many musical forms - sonata, sinfonia, and of course concerto - which we are happy, if not right, to attribute to 'our' Viennese School. Michael Praetorius had already admired 'the new concerto style of the Italians' and had suggestively adopted the name for this form from the Italian 'concertare'. Such musical competition and cooperation among different instrumental groups developed along a path going from the Venetian polychoral work of Giovanni Gabrileli, through the concerto grosso of Arcangelo Corelli, to the solo concerto of Giuseppe Torelli. And Johann Sebastian Bach let himself be inspired by that 'Italian gusto' and transcribed during his Weimar years quite a few of Antonio Vivaldi's violin concertos. Vivaldi, who was known as il prete rosso (the red-haired priest) used the musical structure called ritornello, with its alternation of tutti and modulated virtuoso solo passages. This served as a model for Bach, the 'Luther of Music', for his own violin concertos.

이것은 그의 평소의 판단에서 즐거운 예외였는데, 그는 과장된 인위적인 것, 거친 스타일, 편안한 감각의 현저한 부재를 관습적으로 비난했을 것이다. 음악에 대한 그의 쇼비니즘(우월주의)은 전적으로 합당하지 않은데, 독일 음악의 뮤즈는 그런 ‘외국 작곡가들’이 아니었다면 형편없는 취급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샤이베의 찬사는 바흐의 클라비어 협주곡 6번 F장조(BWV 1057)에 대한 것이었다. 이 작품은 알프스 남부에서 시작된 낭만주의 전통에서 나온 것이다. 소나타, 신포니아, 물론 협주곡 등 많은 음악 형식도 마찬가지인데, ‘우리의’ 비엔나 스쿨에 속하는 것이 옳지 않을지라도 행복하다. 미하엘 프레토리우스(독일의 작곡가)는 이미 ‘새로운 이탈리아 풍의 협주곡 스타일’에 감탄했으며 이탈리아의 ‘콘체르타레’(경쟁하다, 협력하다)에서 유래한 이 형식에 대한 이름(콘체르토)을 암시적으로 채택했다. 조반니 가브리엘리의 베네치아 풍의 다성 합창곡부터 아르칸젤로 코렐리의 콘체르토 그로소(합주 협주곡)를 거쳐 주제페 토렐리의 솔로 콘체르토(독주 협주곡)에 이르기까지의 길을 따라가는 다양한 기악 그룹들 사이의 음악적 경쟁과 협력이 발전했다. 그리고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이탈리아 풍‘에 영감을 받아 바이마르 시절 동안 안토니오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들 중 상당수를 편곡했다. “빨간 머리의 신부"로 알려진 비발디는 투티의 교체, 조바꿈된 비르투오소 솔로 패시지들과 함께 리토르넬로(독주와 총주가 서로 번갈아가며 곡을 진행시키는 기법)라고 불리는 음악 구조를 사용했다. 이것은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에 대한 ’음악의 루터‘ 바흐를 위한 모델로 쓰였다.

During Bach's time in Leipzig, he performed frequently in the Collegium Musicum and therefore needed representative works for keyboard. His own violin concertos were among the works he used, in order to adapt them for the desired instrumentation. Thus out of the Violin Concertos in A minor (BWV 1041) and E major (BWV 1042) emerged the Clavier Concertos in G minor (BWV 1058) and D major (BWV 1054) respectively. The aforementioned F major Concerto, praised by Scheibe, can be traced to the fourth Brandenburg Concerto. In the well-known D minor Concerto (BWV 1052), Bach used material from a concerto for violin which Bach had already used in two of his cantatas. Of the seven concertos for clavier of Bach that are believed to have been composed between the years 1730 and 1733, all are adaptations of earlier works, either his own or by others. This was a very common practice then; the idea that a person of genius must pursue originality at all costs was still alien to those times. In his transcriptions for the keyboard part, Bach gave to the right hand what was played on the solo instrument (violin, oboe, etc.) in the original concerto. The left hand performed for the most part the traditional role of the basso continuo: either doubling the bass line of the violoncellos or expanding it into chords. This can be seen in the figured bass of the "Adagio" in the D major Concerto. By 'clavier' of course was meant in Bach's time the harpsichord which, rather than the delicate-sounding clavichord, was the preferred keyboard instrument for concerts. The clavier was thus now somewhere between its earlier modest role as an accompanying instrument for the general bass line, and the exposed position of a solo instrument that it would find in later times. The result was not so much a brilliant contest as a gentle approach to a dialogue which, at least in Goethe, awakened a sensation 'as if the eternal harmony were communing with itself.'

바흐는 라이프치히 시절 동안 콜레기움 무지쿰에서 자주 연주했으며 따라서 건반을 위한 대표적인 작품들이 필요했다. 자작 바이올린 협주곡들은 그가 원하는 악기 연주에 맞추기 위해 사용했던 작품들 중에 있었다. 따라서 바이올린 협주곡 1번 a단조(BWV 1041)와 2번 E장조(BWV 1042)는 각각 클라비어 협주곡 7번 g단조(BWV 1058)와 3번 D장조(BWV 1054)로 나타났다. 앞서 언급한 6번 F장조 협주곡은 샤이베가 찬사를 보낸 것으로,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4번에서 기인한다. 잘 알려진 1번 d단조 협주곡(BWV 1052)에서 바흐는 그가 이미 그가 작곡한 칸타타 중 두 곡에서 사용했던 바이올린 협주곡의 소재를 사용했다. 1730~1733년에 작곡된 것으로 여겨지는 바흐의 7개 클라비어 협주곡 중, 모두가 초기 작품들의 편곡이며, 자신의 작품 아니면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이다. 이것은 당시에 매우 일반적인 관행이었는데, 천재성을 가진 사람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독창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생각은 여전히 그런 시대들에 맞지 않았다. 건반 파트를 위한 편곡들에서 바흐는 원래의 협주곡에서 독주 악기(바이올린, 오보에 등)로 연주된 것을 오른손으로 옮겼다. 왼손은 대부분 바소 콘티누오(=통주저음 : 저음을 고정시키고 위에서 화성으로 반주하는 오르간 연주법)의 전통적인 역할을 수행했는데, 첼로의 베이스 선율을 두 배로 높이거나 화음들로 확대했다. 이것은 3번 D장조 협주곡 2악장 아다지오(느리게)의 통주저음에서 볼 수 있다. 물론 바흐의 시대에는 ‘클라비어’가 섬세한 음색을 가진 클라비코드보다는 연주회용으로 선호하는 하프시코드로 여겨졌다. 따라서 이 클라비어는 이제 일반적인 베이스 선율을 위한 반주 악기로서의 초기의 겸손한 역할과 후기에 발견할 수 있는 독주 악기로 노출된 위치 사이의 어딘가에 있었다. 그 결과는 적어도 괴테가 말했던, ‘마치 영원한 화성이 스스로 대화하듯’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대화에 대한 부드러운 접근처럼 뛰어난 경쟁이 아니었다.

Goethe, 'the prince of poets', used to compare his own genius to that of Raphael or Mozart: 'My works cannot become popular. [...] And when properly perceived, is that not so with all extraordinary things? So is Mozart popular? [...] And how do most people in the world behave towards intellectual lives that represent great overflowing sources? They nibble a bit, and are happy to pick up something now and then that offers them a superior diet for a while.' But Mozart was actually 'popular' at least during the first half of the 1780s - a short time indeed. He became a free person in 1781 after his break, preceded by Count Arco's infamous kick, with Archbishop Colloredo of Salzburg. This was however at a time which knew musicians only as appointees of the court and not as freelance artists. Nevertheless, Mozart's beginning as a self-employed musician was full of promise. The father Leopold had hit upon Vienna as the heart of central Europe's music world; and here Wolfgang, who in the meantime had grown out of his Wunderkind years, soon became a renowned celebrity. The Viennese Court gave Mozart commissions and was present at his opera premieres. The nobility invited him to their salons. His subscription concerts were very well attended and financially most successful, as Leopold noted with satisfaction during a visit to Vienna in 1785. Permanent features of these public 'academies', in addition to the arias, chamber and symphonic works which they offered, were his piano concertos composed from 1782 on. Mozart presented himself as the virtuoso in these concertos.

‘시인의 왕자’ 괴테는 그의 천재성을 라파엘(가브리엘, 미하엘과 더불어 3대 천사로 탁월한 상상력의 소유자)이나 모차르트와 비교하는 데에 사용했다. - ‘내 작품들은 인기가 없다. [...] 그리고 적절하게 감지될 때, 모든 특별한 것들이 그렇지 않았나? 그럼 모차르트가 인기 있나? [...] 그리고 세계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넘쳐흐르는 근원을 나타내는 지적인 인생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나? 그들은 조금씩 먹고 이제 어떤 것을 집는 것이 행복하며 이제 잠시 동안 수준 높은 식사를 제공한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적어도 1780년대 상반기 동안 실제로 인기가 있었는데, 정말 잠깐이었다. 그는 잘츠부르크의 대주교 히에로니무스 그라프 폰 콜로레도(잘츠부르크의 영주이자 정치와 종교를 지배할 수 있는 최고의 권력을 가진 대주교. 모차르트의 음악을 듣고 새로운 세상을 깨닫지만 그는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자신의 소유물로 만들고 싶어 한다.)의 명령에 의해 악명 높은 카를 요제프 그라프 아르코 백작(콜로레도 대주교의 오른팔로 그의 명령에 따라 볼프강 모차르트를 감시한다. 신분 차이를 이용해서 모차르트를 직접적으로 억압한다.)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여 쫓겨난 후 1781년에 자유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한때 자유 계약(프리랜서) 아티스트가 아닌 궁정의 임명자로만 알려져 있었다. 그럼에도 모차르트의 독자적으로 연주 활동을 하는 음악가로서의 시작은 가능성에 가득 차 있었다. 아버지인 레오폴트는 비엔나를 유럽 음악의 중심으로 꼽았으며, 여기서 분더킨트(신동) 시기 동안 성장했던 아들 볼프강은 곧 유명 인사가 되었다. 비엔나 궁정은 모차르트에게 작품을 위촉했으며 그는 자신의 오페라 초연에 참석했다. 귀족은 그를 그들의 살롱에 초대했다. 그의 (티켓을 미리 파는) 예약제 콘서트는 레오폴트가 1785년에 비엔나를 방문하는 동안 매우 만족하여 기록했던 것처럼 출석이 아주 좋았으며 재정적으로 가장 성공적이었다. 이 대중의 영속적인 기능인 ‘아카데미’는 이들이 제공했던 아리아, 실내악, 교향악 작품들과 함께 1782년부터 계속 작곡된 피아노 협주곡들이었다. 모차르트는 이 협주곡들의 거장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One of the favourites of the public then as now was the bright and lively A major Concerto KV 488. It was composed for an academy held during Lent 1786, at the same time that Mozart was working on his first da Ponte opera "The Marriage of Figaro". In this concerto, the orchestra foregoes kettledrums and tympani. The traditional oboes are replaced by clarinets, which had slowly begun to be accepted as orchestral instruments. The transparency of the part-writing corresponds to the clarity of the structure. The two lighthearted and playful themes from the "Allegro", first introduced by the orchestra, are taken over as is usual by the piano in figured form. The orchestra introduces, after the exposition, a third theme which is more staid. The piano concentrates almost exclusively on this theme during the development section. This is but one example of the manifold variants which Mozart allows the sonata form to give to the piano concertos. The cadence (from Mozart's own hand), reached after the reprise with the traditional six-four chord, engages itself with none of the above three themes; rather, it is free discourse, improvised modulation. The "Adagio", in the sombre parallel key of F sharp minor, leaves an agreeable sense of melancholy, a gallant style, far behind. It conveys rather, in spite of a bright middle section for woodwinds, a deep sadness. The feeling is not of distracted despair, but more of a mild resignation which seems to cast its gaze towards the hereafter. The opening notes of the "Finale" bring one back to a bright, festive earth. Although a minor key-related sense of overcast recalls the mood of the "Adagio", it is soon overcome with great vigour and an opulent variety of themes. What Mozart had planned in 1782 for his piano concertos appears here to have been realized perfectly:

그때나 지금이나 대중이 선호하는 것들 중의 하나는 밝고 활기찬 23번 A장조 협주곡이었다. 이 곡은 1786년 사순절 동안 개최된 아카데미를 위해 작곡되었으며, 동시에 모차르트는 그의 첫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로렌초 다 폰테의 대본)에 애쓰고 있었다. 이 협주곡에서 오케스트라는 케틀드럼과 팀파니를 앞선다. 전통적인 오보에는 오케스트라 악기로 서서히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클라리넷으로 대체된다. 각 성부 진행의 안배는 분명한 구조와 일치한다. 오케스트라가 먼저 나오는 1악장 알레그로(빠르게)에서 2개의 경쾌하고 활발한 주제들은 구성 형식에서 피아노로 흔히 나오는 것처럼 넘어간다. 오케스트라는 제시부가 나온 후 보다 침착한 제3주제를 도입한다. 피아노는 발전부에서 이 주제에만 거의 집중한다. 이것은 모차르트가 피아노 협주곡에 소나타 형식을 허용하는 여러 가지 변형들 중 하나일 뿐이다. (모차르트의 손에서) 종지는 전형적인 4-6 화음(3화음의 제5음이 베이스에 있는 화음, 즉 3화음의 둘째자리바꿈을 말한다. 이것은 베이스로부터 4도와 6도의 음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한다.)으로 반복 부분에 손을 뻗치는데, 세 가지 주제 중 아무것도 다루지 않는다. - 오히려 자유로운 화법, 즉흥적인 조바꿈이다. (A장조와 단3도 간격의 나란한조인) 침울한 올림f단조의 2악장 아다지오(느리게)는 씩씩한 스타일과는 멀리 떨어진 우울함에 선뜻 동의하는 느낌을 남긴다. 목관악기의 밝은 중간부가 있음에도 오히려 깊은 슬픔을 전달한다. 이 느낌은 괴로운 절망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갈 시선을 돌리는 것 같은 차라리 가벼운 체념이다. 3악장 피날레의 첫머리에 나오는 음들은 화려한 축제의 땅으로 모인다. 단조와 관련된 흐린 느낌은 2악장 아다지오의 분위기를 회상하지만, 곧 커다란 활력과 풍부하면서도 다양한 주제들로 극복된다. 모차르트가 1782년에 피아노 협주곡에 대해 계획한 것이 여기서 완벽하게 실현된 것으로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The concertos are a cross between being too heavy and too light - they are very brilliant - pleasant to the ears - naturally, not sinking into an absence of expression - here and there - also could be that the expert alone gets satisfaction - but still - the amateur must be satisfied with them, without knowing why.'

‘협주곡은 너무 무겁고 너무 가벼운 것 사이의 십자가이다. - 협주곡은 매우 훌륭하다. - 귀에 즐겁다. - 자연스럽게도 표현의 부재에 빠져들지도 않는다. - 여기저기서도 - 전문가만이 만족할지도 모른다. - 그러나 여전히 - 아마추어는 이유를 모른 채 협주곡에 만족해야 한다.’

He was not always able to keep to this 'recipe for success'. Every now and then came forcefully out of his music something sombre, passionate, depressive, which shook the social milieu of the 18th century. Cramer's "Musikmagazin" disapprovingly diagnosed, in the composer's 'propensity to seriousness and the unusual'. The demonically growling D minor Concerto KV 466, which became so popular in the 19th century, only irritated its public. The C minor Concerto KV 491, composed in the same year as the cheerful A major Concerto, finally shocked the public. There were no more subscribers after 1787, and a stillness descended around Mozart. The thought just did not occur to anyone of inviting him to the coronation of Leopold II in Frankfurt in 1790. The public had - exactly in the sense that Goethe meant it - nibbled enough of Mozart's 'superior provender', and now would rather consume the easily digestible stuff from Clementi, Kozeluch, and Dittersdorf.

그가 항상 이 ‘성공을 위한 레시피’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그의 음악에서 18세기의 사회적 환경을 뒤흔들어 놓았던 침울하고 정열적이면서도 우울한 뭔가가 격렬하게 나왔다. 크라머의 <음악 잡지>는 작곡가의 ‘진지함과 색다름에 대한 경향’에서 못마땅하다는 듯이 진단했다. 19세기에 대단한 인기를 얻은, 악마처럼 으르렁거리는 20번 d단조 협주곡은 대중을 오히려 짜증나게 했다. 쾌활한 23번 A장조 협주곡과 같은 해에 작곡된 24번 c단조 협주곡은 결국 대중에게 충격을 주었다. 1787년 이후에는 더 이상 후원자가 없었으며, 모차르트 주변에는 정적이 뒤따랐다. 어느 누구도 1790년 프랑크푸르트의 레오폴트 2세 대관식에 그를 초대할 생각이 없었다. 대중은 - 괴테가 의미했던 바로 그 느낌에서 - 모차르트의 ‘뛰어난 음식물’을 충분히 먹었으며 이제 클레멘티, 코젤루흐, 디터스도르프로부터 쉽게 소화할 수 있는 것을 소비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 같다.

Entertainment was obviously a main concern of the young Shostakovich. He allowed himself a sly wink using the neoclassical irony of so-called 'serious music': 'If the public, during a performance of my works, smiles or indeed laughs out aloud, that would be a great satisfaction for me.' His opus 35, originally titled 'Concerto for piano accompanied by string orchestra and trumpet', thoroughly offered this satisfaction posthumously. This was not alone due to its lighthearted high-spirited intonation; already in the beginning, the mischievous inanities of the two soloists leave no doubt about the intended musical parody. A broad, rhapsodic theme then follows, introduced by the piano and the orchestra. Effusively cadenced phrases from the strings seem now to prepare a secondary theme. But instead, we are offered a rather trivial three-note motive of classical character. This is mimicked by the trumpet with fanfare-like intonation. The instrument gets involved cheekily time and again in the exposition and the recapitulation sections, with a total absence of the traditional heroic intonation of this 'royal brass'. The second movement which follows attacca is a Lento in slow waltz rhythm displaying the elegiac mood of a notturno. It is a contrast to the witty brilliance of the preceding and succeeding movements, through its lyricism and the expressive cantilenas heard from the piano, muted strings, and muted trumpet.

엔터테인먼트는 분명히 젊은 쇼스타코비치의 주요 관심사였다. 그는 소위 ‘진지한 음악’이라는 신고전주의 풍의 아이러니를 사용하여 자신을 교활한 윙크로 만들었다. - ‘대중이 내 작품들을 연주하는 동안 미소 짓거나 실제로 큰소리로 웃으면 내게 큰 만족이 될 것이다.’ 그의 작품 35는 원래 ‘현악 오케스트라가 반주하는 피아노와 트럼펫을 위한 협주곡’이라는 제목으로 사후에 이 만족감을 충분히 제공했다. 이것은 가볍고 활기찬 인토네이션[노래나 연주를 정확한 음높이나 음조(音調)로 하는 것] 때문만은 아니었는데, 이미 첫머리에서 두 독주자들(피아노와 트럼펫)의 장난스러운 공허함은 의심의 여지없이 의도된 음악적 패러디에 대한 것을 남긴다. 이어서 폭넓은 랩소디 풍의 주제가 나오는데,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로 시작한다. 현악기에서 넘쳐흐르는 종지의 프레이즈는 이제 두 번째 주제를 준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대신 우리는 고전적인 성격에 대해 다소 시시한 3개의 음으로 된 모티브를 제공받는다. 이것은 팡파르 같은 인토네이션으로 트럼펫에 의해 모방된다. 이 악기(트럼펫)는 이 ‘로열 브라스’의 전통적으로 영웅적인 인토네이션이 전혀 없는 채로 제시부와 재현부에서 몇 번이고 건방지게 낀다. 아타카(악장의 마지막 또는 박자가 변하는 곳에서 다음 악장 또는 부분으로 중단 없이 계속 연주하라는 뜻)에 이어서 나오는 2악장은 느린 왈츠 리듬으로 슬픈 분위기의 녹턴을 나타낸다. 피아노에서 들려오는 칸틸레나(성악이나 기악에 사용되는 서정적인 선율, 또는 그러한 주법) 표현, (약음기를 써서) 소리를 줄인 현악기, 소리를 줄인 트럼펫을 통해 선행 악장(1악장)과 후속 악장(2악장)의 재치 있는 탁월함이 대조를 이룬다.

It is almost too much to call the "Moderato" which follows, again attacca, a movement. In any case this, with a toccata-like part for piano and a short emotional passage for strings, leads in less than thirty measures to the last movement. We experience in the concluding "Allegro con brio" the piano and the trumpet as equal solo partners. They converse mockingly with each other, and joyfully strike up more than once the most banal popular hits. The trumpet reaches back rather disrespectfully to 'Papa Haydn', and makes its own solo out of the opening theme from his Piano Sonata in D major (Hob. XVI:37). And now the piano also takes aim at a classic and does a brilliant cadence over Beethoven's famous "Rondo a capriccio in G major (opus 129), with the facetious title "Die Wut uber den verlorenen Groschen" (loosely: Fury over a lost penny). An oddly intensified stretto with high-spirited fanfares on trumpet and breath-taking glissandi on piano lead to an abrupt end to the work.

다시 한 번 아타카가 나온 다음에 3악장이 나오는데 대개 모데라토(보통 빠르기로)로 부른다. 어쨌든 이것은 피아노를 위한 토카타 같은 부분과 현악기를 위한 짧은 감정적인 패시지로 마지막 4악장까지 30개가 안 되는 마디들을 이끈다. 우리는 마지막 4악장 알레그로 콘 브리오(빠르고 활기차게)에서 동등한 독주 파트너로서의 피아노와 트럼펫을 경험한다. 그들은 서로 조소하듯이 대화를 나누며, 가장 진부한 히트곡들을 한 번 이상 즐겁게 연주하기 시작한다. 트럼펫은 차라리 ‘파파 하이든’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돌이켜 보며, 하이든 피아노 소나타 50번 D장조(Hob. XVI:37) 첫머리의 주제에서 이끌어낸 독창적인 솔로를 만든다. 그리고 이제 피아노 솔로도 클래식(고전파)을 목표로 하여 <잃어버린 동전에 대한 분노>라는 우스꽝스런 제목을 가진 베토벤의 유명한 <론도 아 카프리치오> G장조(작품 129)를 재단장하여 화려한 종지를 연주한다. 트럼펫에서의 활기찬 팡파르로 별나게 극대화된 스트레토(푸가에서, 주제의 제시가 밀접하게 서로 겹쳐 있는 일; 하나의 성부의 끝과 다음 성부의 처음이 서로 겹쳐 있는 형식)와 피아노에서의 숨이 멎는 듯한 글리산도(높이가 다른 두 음 사이를 급속한 음계에 의해 미끄러지듯이 연주하는 방법)로 인해 이 작품은 갑작스럽게 끝난다.

The Leningrad premiere of the concerto in October 1933, with the composer himself at the piano, earned great applause from the public and praise from the critics. The optimistic attitude of the music, in particular, corresponded to the prevailing political guidelines for things cultural, though these still required that all signs of bourgeois decadence were to be wiped out. The Soviet composer's attention was to be 'directed towards the successful and progressive principles of reality, and towards all that is heroic, radiant and magnificent'. This was a guideline against which the young and successful Shostakovich was himself soon to collide. Three years after the premiere of the piano concerto, a devastating article appeared in "Pravda" about his opera "Lady Macbeth of Mzensk". This led to a severe crisis in his career, his work, and his personal development; so began his decades-long struggle with the Soviet regime.

1933년 10월에 작곡가 자신이 피아노를 담당했던 레닌그라드 초연은 대중의 박수갈채와 함께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특히 음악에 대한 낙관적인 태도는 문화적 사상에 대한 정치적 지침에 부합했지만, 여전히 부르주아 퇴폐의 모든 징후가 사라지도록 요구했다. 소비에트 작곡가들의 관심은 ‘현실의 성공적이고 진보적인 원칙을 지향하며 영웅적이면서도 빛나는 장엄한 모든 것을 향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이것은 성공한 젊은이 쇼스타코비치가 곧 충돌할 것이라는 지침이었다. 이 피아노 협주곡을 초연한지 3년 후, 러시아 일간지 <프라우다>에서 그의 오페라 <므젠스크의 맥베스 부인>에 대해 엄청나게 충격적인 기사가 나왔다. 이것은 그의 경력, 그의 작품, 그의 개인적인 발전에서 가혹한 위기로 이어지면서 소비에트 정권과의 수십 년 간의 투쟁이 시작되었다.

Igor Shukow was born in 1936 in Gorki, a city known today as Nizhni-Novgorod. He has however lived in Moscow since his early childhood. He studied piano in the Moscow conservatory with Emil Gilels, and also with the legendary Heinrich Neuhaus. In 1957, he won a prize in the Marguerite Long Piano Competition in Paris. He has since then been much sought after as a soloist by orchestras around the world. Many critics, as well as music lovers consider him one of the great pianists of his generation. They find his amity above all else for Russian works for piano to be exemplary. He was the first to record the complete set of Alexander Scriabin's piano sonatas. These recordings have attracted considerable international attention, and are regarded as a milestone in the history of the interpretation of the composer.

이고르 주코프는 오늘날 니즈니노브고로드로 알려진 도시 고르키에서 1936년에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어린 시절을 모스크바에서 보냈다. 그는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에밀 길렐스에게서 피아노를 배웠으며, 전설적인 하인리히 네이가우스도 사사했다. 1957년에는 파리에서 열린 제7회 롱-티보 국제음악콩쿠르에서 준우승했다. 이후 그는 전 세계의 오케스트라들로부터 독주자로서 많은 관심을 받았다. 많은 비평가들뿐만 아니라 음악 애호가들도 그와 동세대의 위대한 피아니스트들 중의 한 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러시아의 피아노 작품들이 모범적이라는 것에 대해서 친근감을 느낀다. 그는 스크리아빈 피아노 소나타 전곡을 최초로 녹음했다. 이 녹음들은 상당한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으며 작곡가에 대한 해석에서 중요한 이정표로 간주된다.

Igor Shukow has also made a name as a conductor. He founded the New Moscow Chamber Orchestra in 1983 and conducted it until 1994. He disbanded the orchestra that year in order to devote himself to the piano with renewed vigour. The pianist, whose repertoire ranges from Jean Philippe Rameau to Alban Berg, made a splendid comeback at the Herkulessaal in Munich. In the "Suddeutsche Zeitung", the recital was hailed as a 'miracle' (Klaus Bennert). Since then, Shukow has appeared as guest pianist at musical events in many well-known locations.

이고르 주코프는 지휘자로서도 유명해졌다. 그는 1983년에 뉴 모스크바 실내 오케스트라를 창단하여 1994년까지 지휘했다. 그는 그 해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어 피아노에 몰두하기 위해 오케스트라를 해산시켰다. 장 필리프 라모에서 알반 베르크에 이르는 레퍼토리를 가진 주코프는 뮌헨의 헤라클레스 홀에서 화려하게 복귀했다. <쥐트도이체 차이퉁>에서 이 리사이틀은 ‘기적’(클라우스 벤네르트)으로 표현되었다. 이후 주코프는 잘 알려진 여러 장소에서 음악 행사의 게스트 피아니스트로 출연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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