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0일 일요일

Brilliant Classics / Legendary Russian Pianists CD3 Lev Oborin & Rudolf Kerer



CD3 Lev Oborin & Rudolf Kerer / 레프 오보린, 루돌프 케러
01 Mozart Piano Concerto in d, K. 466: I. Allegro /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
02 Mozart Piano Concerto in d, K. 466: II. Romanze
03 Mozart Piano Concerto in d, K. 466: III. Rondo. Allegro assai
Lev Oborin, piano / 레프 오보린, 피아노
Moscow Philharmonic Orchestra / 모스크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David Oistrakh, conductor /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지휘

04 Tchaikovsky Piano Concerto No. 1 in b flat, Op. 23: I. Allegro non troppo e molto maestoso - Allegro con spirito /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05 Tchaikovsky Piano Concerto No. 1 in b flat, Op. 23: II. Andante semplice - Prestissimo
06 Tchaikovsky Piano Concerto No. 1 in b flat, Op. 23: III. Allegro con fuoco
Lev Oborin, piano / 레프 오보린, 피아노
USSR State TV & Radio Symphony Orchestra / 소련 국립 TV-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Alexander Gauk, conductor / 알렉산더 가우크 지휘

07 Prokofiev Piano Concerto No. 1 in Db, Op. 10: I. Allegro brioso / 프로코피에프 피아노 협주곡 1번
08 Prokofiev Piano Concerto No. 1 in Db, Op. 10: II. Andante assai
09 Prokofiev Piano Concerto No. 1 in Db, Op. 10: III. Allegro scherzando
Rudolf Kerer, piano / 루돌프 케러, 피아노
Grand Symphony Orchestra / 그랜드 심포니 오케스트라
Alexander Gauk, conductor / 알렉산더 가우크 지휘

10 Prokofiev March from 'The Love for Three Oranges' / 프로코피에프 3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 중 행진곡
Rudolf Kerer, piano / 루돌프 케러, 피아노

Lev Oborin (1907-74) / 레프 오보린
Principal Teachers: Yelena Gnessina, Konstantin Igumnov / 옐레나 그네시나, 콘스탄틴 이굼노프 사사

Prize:
1927 - Chopin Competition, 1st / 쇼팽 콩쿠르 1위

'Oborin's reputation at the first Soviet laureate remain firm, whatever shining stars appeared on the pianistic horizon [...] a superlative Russian man and musician' (Dmitri Paperno). He studied originally with one of the three founding sisters of the elite Gnessin Institute, a former pupil of Ferruccio Busoni when he was teaching in Moscow (1890). He then went to Igumnov at the Moscow Conservatory (1921-26, graduating with Beethoven's "Hammerklavier" Sonata), attending Miaskovsky's and Catoire's composition classes (having already worked with Grechaninov). After his win in the 1927 Chopin Competition (when Grigory Ginzburg took fourth place), he joined the piano faculty of the Moscow Conservatory in 1928. Awarded a professorship in 1935 and a chair in 1948, he stayed at the Conservatory until his death, counting Ashkenazy as his most famous pupil (despite an apparent lack of 'personal rapport'). Along with his colleagues he also oversaw a quota of foreign exchange students.

‘최초의 소비에트 입상자 오보린의 명성은 피아니스틱한 지평선에 등장한 어떤 빛나는 별들이든지 [...] 최고의 러시아 남자이자 음악가로 남아있다(드미트리 파페르노).’ 그는 원래 명문 그네신 음대를 창설한 세 자매들 중의 한 명(옐레나 그네시나)과 공부했는데, 그녀는 페루치오 부조니가 1890년 모스크바에서 가르칠 당시의 과거 제자였다. 그는 이후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이굼노프를 사사했는데(1921~26년에 베토벤 소나타 29번 <함머클라비어> 연주로 졸업), (이미 그레차니노프와 함께 일했던) 카투아르와 미야스코프스키에게서 작곡도 배웠다. 1927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후(그리고리 긴즈부르크는 4위에 입상), 1928년에 모스크바 음악원 피아노 교수진에 합류했다. 1935년에 교수직을, 1948년에 피아노과장직을 받았으며, 죽을 때까지 음악원에 머물렀는데, (‘개인적인 친밀한 관계’가 명백하게 부족했음에도) 가장 유명한 제자로 아쉬케나지를 꼽았다. 동료들과 함께 그도 해외 교환 학생들의 할당 인원을 감독했다.

The highlights of Oborin's career included the premiere of Khachaturian's Piano Concerto (12 July 1936), a lifelong partnership with David Oistrakh and Sviatoslav Knushevitzky (from the early 40s), and his British and American debuts in 1958 (with Mussorgsky's "Pictures") and 1963 (Tchaikovsky's First Piano Concerto). For his 60th birthday concert in 1967, weak heart and alcoholism notwithstanding, he offered three of his favourite concertos: the second concertos by Chopin and Rachmaninoff and the third by Prokofiev. As a solo, concerto and chamber player of refined finish, Oborin was a regular visitor to the studio, as much at home in romantic miniatures and classical masterworks as Soviet epics. He was the first Soviet to record Rachmaninoff's Second and Third Concertos (conducted by Alexander Gauk in 1947 and Konstantin Ivanov in 1949).

오보린의 경력의 하이라이트는 하차투리안 피아노 협주곡 초연(1936년 7월 12일),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첼리스트 스비아토슬라프 크누셰비츠키(40대 초반)와의 평생 동반자 관계, 1958년 영국(무소르그스키 <전람회의 그림>)과 1963년 미국(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데뷔 등이 있다. 1967년 60세 생일 콘서트를 위해 약한 심장에다가 알코올 중독이었음에도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3개의 협주곡(쇼팽 협주곡 2번,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2번, 프로코피에프 협주곡 3번)을 제공했다. 독주자, 협주곡 연주자, 실내악 연주자로서 세련된 마무리를 한 오보린은 소비에트 서사시만큼 낭만파 소품들과 고전파 걸작들에서 편안하게 여겼던 스튜디오를 정기적으로 방문했다. 그는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2번과 3번을 최초로 녹음(1947년 알렉산더 가우크의 지휘로 협연, 1949년 콘스탄틴 이바노프의 지휘로 협연)한 소련인이었다.

Dmitri Paperno speaks of him as a man who 'conducted himself simply and with proper pride. He was accessible and benevolent [...] Thanks to his special status and authority, Oborin, like Gilels, could stand apart from all the intrigues and squabbles. Even during the period of "ideological campaigns" I never saw them at any meeting. He would never take part in anybody else's persecution, and at that gloomy time one could hardly condemn such a position of noninterference'. 'In art nothing is worse than fossilized dogma,' remarked Oborin himself. 'Life itself changes, and so does music - and together with it technique and aesthetic norms and criteria also change.'

드미트리 파페르노는 그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신에 대해 그저 적절한 자부심을 가지고 지휘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가까이 가기 쉬우며 자애로웠다. [...] 그의 특별한 지위와 권위 덕분에, 길렐스와 마찬가지로 오보린은 모든 음모와 싸움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었다. “이데올로기 운동” 기간에도 나는 어떤 모임에서도 그들을 보지 못했다. 그는 다른 누구의 박해에도 결코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 우울한 시기에 그러한 불간섭의 입장을 거의 비난할 수 없다.’ 오보린은 스스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술에서 화석화된 교리보다 더 나쁜 것이 없다. 인생 자체가 변하고, 음악도 변한다. - 그리고 그것과 함께 기술, 미적인 규범, 기준도 변한다.’

Rudolf Kerer (1923-2013) / 루돌프 케러
Prizes:
1961 - All-Union Competition, 1st / 전소련 콩쿠르 1위
1977 - Robert Schumann Prize / 로베르트 슈만 상
2004 - Russian-German Culture Prize / 러시아-독일 문화상

'Music is basically everything for me. A possibility to speak fully, to say something...my feelings, my thoughts. It is possible to say with music what others say with words: to speak of love, loyalty and of sadness - and above all it is possible to tell a story. Music is very rich - music begins where words leave off.' A Caucasusian-German of Swabian ancestry, Kerer [originally Kehrer] was born in Tiflis, and in October 1941 was one of 19,000 Georgians deported to Kazakhstan in Central Asia (during the war nearly a million Russian-Germans were dispersed under Stalin's orders, with around a third exterminated). Initially he specialized in mathematics, teaching in schools. But he returned to the piano in 1954 (having studied originally with Anna Tulashvili), attending Tashkent Conservatory. To the collective surprise of the Soviet Establishment, Kerer - an ethnic-minority unknown of limited credentials in his late thirties, who hadn't had a piano for 13 years (1941-54) - won the 1961 All-Union Competition. It led to a professorship at the Moscow Conservatory, a People's Artist of the USSR title, and concerto engagements with conductors including Kirill Kondrashin, Gennady Rozhdestvensky, Kurt Sanderling, Yuri Simonov, Vassily Sinaisky, Vaclav Smetacek and Evgeny Svetlanov (1961-98). Having played more than 2,000 concerts in nearly 400 countries, together with a number of commercial and archive recordings made in many places, Kerer lived in Zurich.

‘음악은 기본적으로 내게 전부다. 완전히 말할 수 있는 가능성, 어떤 것...내 느낌, 내 생각을 말하기에. 다른 사람들이 언어로 말하는 것을 음악으로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 - 사랑, 충성, 슬픔에 대해 말하는 것 -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하다. 음악은 매우 풍부하다. - 음악은 단어가 멈추는 곳에서 시작된다.’ 슈바벤[독일 남서부에 있던 중세의 공국(公國); 현재는 바이에른 주 남서부의 한 행정 구역] 조상의 코카서스-독일계인 케러는 티플리스(트빌리시)에서 태어났으며 1941년 10월에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으로 추방된 19,000의 조지아인들 중 한 명이었다. (전쟁 중 약 100만 명의 러시아/독일인들이 스탈린의 명령으로 약 3분의 1이 흩어졌다. 그는 처음에는 학교에 있는 동안 수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그는 타슈켄트 음악원에 입학하면서 (원래 안나 툴라쉬빌리와 함께 공부했던) 1954년에 피아노로 돌아왔다. 소비에트 집단을 놀라게 한 케러는 13년 동안(1941~54년) 피아노가 없었던 30대 후반에 제한된 자격의 이름 없는 소수 민족인데, 1961 전소련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이로 인해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 소련 인민예술가, 여러 지휘자들(키릴 콘드라신, 겐나디 로제스트켄스키, 쿠르트 잔데를링, 유리 시모노프, 바실리 시나이스키, 바츨라프 스메타체크, 에프게니 스베틀라노프)과의 협주곡 계약(1961~98년)이 이어졌다. 거의 400개 지역에서 2,000회 이상의 콘서트를 가졌으며, 수많은 상업 음반들과 녹음 자료들이 여러 곳에서 제작되었다. 케러는 취리히에 거주했다.

Prokofiev Piano Concerto No. 1 in Db, Op. 10 (1911-12) / 프로코피에프 피아노 협주곡 1번
A student of Anna Esipova, Prokofiev played this to win the coveted 1914 Anton Rubinstein Prize. The score was dedicated to his composition teacher, the 'dreaded Alexander Tcherepnin', director of the Conservatory in Petersburg and a Rimsky-Korsakovite.

안나 에시포바의 제자인 프로코피에프는 이 곡을 연주하여 대부분 탐내는 1914 안톤 루빈스타인 상을 받았다. 이 악보는 그의 작곡 스승으로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장이자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제자인 ‘무서운(호랑이 선생님) 알렉산더 체레프닌’에게 헌정되었다.

(이미 사망했으므로 현재 취리히에 거주한다는 마지막 문장을 고쳤다.)

댓글 1개:

  1. https://cloud.mail.ru/public/3bzF/bzUJsGjXH

    https://cloud.mail.ru/public/Cvpd/UEz2G5Sh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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