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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4일 토요일
DVD / Ivo Pogorelich in Villa Contarini 1989
https://www.youtube.com/watch?v=gHZHy2B6MCc
https://www.youtube.com/watch?v=xgaVpOIaAJ0
https://www.youtube.com/watch?v=vuL5f7VYpxA
https://www.youtube.com/watch?v=D2FIJGKpGc8
https://www.youtube.com/watch?v=Qg9A39rmR6Y
https://www.youtube.com/watch?v=zhjD9TKkMjY
https://www.youtube.com/watch?v=7XoPAdPGNck
이 시대의 가장 개성 넘치는 피아니스트를 영상으로 만나다
이보 포고렐리치는 1958년 유고 연방의 수도였던 베오그라드에서 태어났다. 포고렐리치가 음악계의 이슈메이커로 부각되었던 것은 1980년 쇼팽 콩쿠르에서의 해프닝 때문이었다. 본선 3라운드에서 그가 탈락하자, 당시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었던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그에 반발하여 콩쿠르 심사를 거부했던 것이다. 이후 포고렐리치는 아르헤리치의 든든한 후원에 힘입어 정상급 피아니스트로 승승장구했던 반면, 당시 우승자였던 당 타이 손은 이후 음악계에서 그리 큰 반향을 일으키질 못했다.
지난 2005년의 내한공연에서 중후한 풍채의 민머리 중년남의 모습으로 등장하여 국내 팬들에게 당혹감을 주기도 했지만, 그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1987년 8월 이탈리아의 빌라 콘타리니에서 촬영된 본 DVD에는 날카롭고도 댄디했던 과거 미청년 시절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2번과 베토벤의 두 후기 소나타 27, 32번을 중심으로 이 개성 넘치는 피아니스트의 화려한 테크닉과 풍부한 표현력이 화면 가득히 펼쳐져나간다.
Program
Chopin Sonata No. 2 in b flat, Op. 35 / 쇼팽 소나타 2번
I. Grave - Doppio movimento
II. Scherzo - Più lento - Tempo I
III. Marche funèbre (Lento)
IV. Finale (Presto)
Chopin Prelude in Bb, Op. 28 No. 21 / 쇼팽 전주곡 21번
Chopin Polonaise No. 5 in f#, Op. 44 / 쇼팽 폴로네즈 5번
Beethoven Sonata No. 27 in e, Op. 90 / 베토벤 소나타 27번
I. Mit Lebhaftigkeit und durchaus mit Empfindung und Ausdruck
II. Nicht zu geschwind und sehr singbar vorgetragen
Beethoven Sonata No. 32 in c, Op. 111 / 베토벤 소나타 32번
I. Maestoso - Allegro con brio ed appassionato
II. Arietta. Adagio molto semplice cantabile
Scriabin Etude in f#, Op. 8 No. 2 / 스크리아빈 연습곡 작품 8-2
Scriabin 2 Poemes, Op. 32 / 스크리아빈 2개의 시곡 작품 32
No. 1 in F#: Andante cantabile
No. 2 in D: Allegro, con eleganza, con fiducia
A production of UNITEL, Munich, 1989
The Last Romantic - Liner Note by Harald Reiter & Translation by Stewart Spencer / 마지막 낭만주의 - 하랄트 라이터의 라이너 노트 (스튜어트 스펜서 번역)
Difficult. Brilliant. Arrogant. A genius, s pop star, a child prodigy. During the 1980s - before he disappeared completely from the scene for a considerable period of time - Ivo Pogorelich was all of these things. In some of the more lurid articles in the popular press he was described as "Kid Dracula", while others wondered if he was a "god or a devil at the piano". Pin-up posters portraying him in romantic poses and colourful costumes were all the rage. Nowadays such treatment of the stars of the world of classical music strikes us as almost normal, but in the 1980s this was terra incognita in the world of music marketing.
난해하다. 멋지다. 도도하다. 천재, 팝스타, 신동. 1980년대 동안 - 그가 상당한 기간 동안 그 분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 이보 포고렐리치는 이 모든 것들이었다. 인기 있는 언론의 더 야단스러운 몇몇 기사들에서 그는 “키드 드라큘라”로 묘사된 반면 그렇지 않은 언론은 그가 “피아노의 신인지 악마인지” 궁금해 했다. 낭만적인 포즈와 화려한 의상으로 그를 묘사한 꽃미남 포스터들은 엄청나게 대유행했다. 요즘에 클래식 음악계 스타들을 그렇게 대하는 것은 우리에게 거의 평범한 것 같은 인상을 주지만, 1980년대의 음악계 마케팅에서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Yet the phenomenon that was Ivo Pogorelich was far, far more than that. When we listen to his audio recordings and watch the live recordings of his concertos from the 1980s, when he first came to prominence, we are bound to conclude that there have been few international pianists since then, whether male or female, who have been able to hold a candle to him in terms of their musical stature. This is certainly true of his transcendent technique, but above all it applies to his artistic individuality, to which he gave radical and logical expression, even if this ended in controversy and in some cases even in downright failure.
그래도 이보 포고렐리치 현상(열풍)은 그 이상이었다. 우리가 그의 오디오 녹음을 듣고 그의 1980년대 협주곡 실황 녹화를 볼 때, 그가 처음으로 눈에 띄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그때부터 남성이든 여성이든 관계없이 음악적 위상적인 관점에서 비교될 수 있는 국제적인 피아니스트들이 거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이것은 그의 탁월한 테크닉에 대해 틀림없이 사실이지만, 무엇보다도 논란으로 끝나서 어떤 경우에는 명백한 실패임에도 급진적이고 논리적으로 표현했던 그의 예술적인 개성에 적용된다.
As an interpretative artist, Pogorelich performs without a safety net but also without any ambiguity. Instead, he brings to his music-making only a sense of ecstasy and total commitment to the matter in hand. Even by the start of his third decade he was already bringing an individual and unique voice to the great music in his repertory, producing interpretations of a kind never previously heard in these works. It is this that constitutes his genius, while at the same time eusuring the timeless value of recordings which in an age of increasingly superficial perfection and pianistic uniformity appear to date from the 19th century rather than from the end of the 20th.
연주 아티스트로서, 포고렐리치는 안전망뿐만 아니라 모호함도 없이 연주한다. 대신에 그는 자신의 음악 만들기에는 오직 황홀감으로, 당면한 문제에는 완전한 몰두로 이끈다. 아직 30대 초반이지만 그는 이미 자신의 레퍼토리에서 위대한 음악에 개성적이고 독특한 목소리를 내어 이 작품들에서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었던 종류의 해석을 만들어냈다. 이것은 점점 더 피상적인 완전성과 피아노 연주에 능한 일관성의 시대에 20세기 말이 아니라 19세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기록들의 가치를 보장하는 동시에 그의 천재성을 이룬다.
The present DVD showcases key works from Pogorelich's repertory in the form of piano sonatas by Beethoven and Chopin. In 2009, at a time when the pianist is slowly embarking on the second stage of his career, these recordings raise the hope that we may look forward to more of the same in the future. After all, Ivo Pogorelich is still in his early fifties.
현재 DVD는 포고렐리치의 레퍼토리에서 베토벤과 쇼팽이 쓴 피아노 소나타 형식의 주요 작품들을 선보인다. 이 피아니스트가 서서히 제2의 경력 단계로 들어가는 시기인 2009년에 이 녹화는 우리가 앞으로도 더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있다는 희망을 불러일으킨다. 무엇보다도 이보 포고렐리치는 아직 50대 초반이다.
He was born in Belgrade on 20 October 1958, the son of a Croatian double bass player. He moved to Moscow in 1970 to study the piano there, initially at the Central School of Music, later at the Tchaikovsky Conservatory, where from 1976 he was taught by Aliza Kezeradze (1937-1996), whom he subsequently married. In 1978 he won the Alessandro Casagrande International Piano Competition at Terni in Italy and two years later was a prizewinner in the Montreal International Music Competition.
그는 1958년 10월 20일, 베오그라드에서 크로아티아 더블베이스 연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먼저 중앙음악학교에서 공부하기 위해 1970년에 모스크바로 이동했으며, 다음으로 1976년에 차이코프스키 음악원에서 공부했는데, 알리자 케제라제(1937~1996)를 사사했으며, 나중에 그녀와 결혼했다. 1978년에는 이탈리아 테르니에서 열린 알레산드로 카사그란데 국제피아노콩쿠르에서 우승했으며, 2년 후에는 몬트리올 국제음악콩쿠르에서 우승했다.
But his meteoric international career began, in fact, with a piano competition that he failed to win: the occasion was the 1980 International Chopin Competition which, held in Warsaw every five years, is one of the most important piano competitions in the world. A Soviet apparatchik eliminated the young Croatian before the final round, whereupon Martha Argerich - a jury member who had herself won the first prize in 1965 - resigned from the jury in protest, describing Pogorelich as a genius. News of the incident spread all round the world and made Pogorelich famous more quickly than any prize could have done.
그러나 그의 혜성 같은 국제 경력은 실제로 우승하지 못했던 피아노 콩쿠르와 함께 시작되었다. - 그 경우는 1980 쇼팽 국제피아노콩쿠르였는데, 세계의 가장 중요한 피아노 콩쿠르들 중의 하나로 바르샤바에서 5년마다 열린다. 그를 못마땅해 한 소비에트 도당이 결선이 되기 전에 젊은 크로아티아인을 제거하자 1965 쇼팽 콩쿠르 우승자인 심사위원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포고렐리치를 천재로 표현하면서 그 결과에 항의하여 심사위원직을 사임했다. 이 사건의 소식은 전 세계로 퍼져서 포고렐리치는 어떤 입상자보다 더 빨리 유명해졌다.
Within months Deutsche Grammophon had released Pogorelich's debut album, an all-Chopin recital intended as a direct rebuttal of the Warsaw jury's evident injustice. Writing in 1985, the critic of "Audio" described it as a "Chopin-cleansing storm", a view shared by many of his colleagues. Central to the recital was Chopin's Piano Sonata No. 2 in B flat minor Op. 35, a work that also played a key role when Unitel launched a large-scale film project with Pogorelich in 1986 and 1987. A total of six recital programmes were recorded in historically significant venues of great architectural beauty. The entire programme of the present DVD was filmed at the Villa Contarini, a majestic Renaissance villa in the northern Italian province of Padua near Piazzola sul Brenta and based on designs by Andrea Palladio.
몇 달 안에 도이체 그라모폰은 바르샤바 심사위원단의 명백한 부당함에 대한 직접적인 반박을 의도한 포고렐리치의 쇼팽 리사이틀로 데뷔 앨범을 발표했다. 1985년에 <오디오> 지의 비평가가 글을 쓰면서 이 음반을 “쇼팽 콩쿠르에 대한 아쉬움을 털어내는 폭풍”으로 묘사했는데, 이는 그의 여러 동료들이 공유한 견해이다. 이 리사이틀의 중심이 되는 것은 쇼팽 피아노 소나타 2번인데, 유니텔이 1986년과 1987년에 포고렐리치와 함께 대규모 필름 프로젝트를 시작했을 때 중요한 역할을 한 작품이었다. 6개의 리사이틀 프로그램 전체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건축학적 아름다움을 지닌 장소에서 녹화되었다. 현재 DVD의 전체 프로그램은 피아촐라 술 브렌타 인근의 파도바 현 북부 지역의 장엄한 르네상스식 빌라로 안드레아 팔라디오가 설계한 빌라 콘타리니에서 촬영되었다.
If we take as our standard of comparison the tempestuous start to Pogorelich's career and the years up to 1996, then the subsequent period may seem distinctly uneventful. He survived a serious illness and had to deal with his wife's tragic death from cancer at the age of only fifty-nine. His last sound recording - his fourth devoted to Chopin and featuring the four Scherzos - was made in September 1995. But his approach to the works of a composer whose bicentenary in the spring of 2010 will inevitably leave its indelible mark on the whole of the classical musical scene has lost none of its unprecedented actuality in terms of its idiosyncratic pianism, its profound and searching truthfulness and its extremely emotional, yet entirely unsentimental expressiveness. There is little that can be compared to this.
포고렐리치의 경력의 격렬한 시작과 1996년까지의 해들을 우리가 비교하는 표준으로 삼는다면, 이후의 기간은 명백히 사건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는 심각한 질병에서 살아남았으며 불과 59세에 암으로 인한 아내의 비극적인 죽음을 마주해야만 했다. 그의 마지막 녹음인 쇼팽 4개의 스케르초 음반은 1995년 9월에 제작되었다. 그러나 2010년 봄에 탄생 200주년을 맞이한 작곡가의 작품들에 대한 그의 접근 방식은 필연적으로 클래식 음악계 전반이 그 독특한 피아니즘, 그 심오하고 면밀한 진실성과 그 극단적으로 감정적이나 전적으로 감상적이지 않은 표현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길 것이다. 이것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After Chopin, it is Beethoven who has remained a constant factor in Pogorelich's career as the composer who features most frequently in his recitals. This is particularly true of Beethoven's famous last Piano Sonata in C minor Op. 111. Time and again he has returned to this coda to Beethoven's cosmos, constantly rethinking and refining his interpretation of a work that has intimidated whole generations of composers and performers. Even today the work continues to feature on many of the concert programmes that he now gives with increasing infrequency. His interpretation of this masterpiece is a classic example of the boldness of his approach and of the liberties that he takes, but also of the way in which his interpretations divide opinion. For some commentators his performance is pure poetry, while for others it is almost a desecration of the piece. There is little doubt that both reactions are a matter of indifference to the performer.
쇼팽 다음으로 그가 리사이틀에서 가장 자주 연주하는 작곡가로 포고렐리치의 경력에서 끊임없이 변함없이 남아있는 사람은 베토벤이다. 이것은 특히 베토벤의 유명한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 32번에 해당된다. 몇 번이고 그는 베토벤의 우주에 대한 이 코다로 돌아왔는데, 모든 작곡가와 연주자 세대를 위협하는 작품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끊임없이 재고하고 다듬었다. 오늘날에도 이 작품은 현재 그의 빈번하게 늘어나는 여러 콘서트 프로그램에서 계속 연주된다. 그의 이 걸작 해석은 그의 대담한 접근 방식과 그가 취하는 자유일 뿐만 아니라 그의 해석 방식에 대한 의견이 분분해지는 대표적인 예이다. 어떤 평론가들에게 그의 연주는 순수한 시인 반면, 어떤 평론가들에게는 곡에 대한 신성 모독에 가깝다. 양쪽 반응 모두 연주자에 대한 무관심의 문제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All the hallmarks of Pogorelich's distinctive style may be found here in abundance - the extraordinarily rich palette of tone colours, the predilection for extreme speeds and bold rhythmic liberties and the pianist's ability to make overfamiliar works sound new, freshly minted and different. Ultimately listeners must decide for themselves what to make of all this. But listening to Ivo Pogorelich remains an experience comparable only to being the first person to walk across freshly fallen snow.
포고렐리치의 독특한 스타일의 모든 특징은 여기에서 풍부하게 발견된다. - 음색의 특별히 풍부한 팔레트, 극단적인 빠르기와 대담하게 자유로운 리듬, 지나치게 친한 작품들을 새롭고 신선하며 최근에 생겨난 다른 것으로 들리게 하는 피아니스트의 능력. 궁극적으로 청취자들은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보 포고렐리치의 연주를 듣는 것은 새로이 내린 눈을 가로질러 걷는 최초의 사람인 것에 비견될 만한 경험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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