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16일 토요일

Chandos / Terence Judd, Alexander Lazarev & Moscow Philharmonic Orchestra - Tchaikovsky & Prokofiev Piano Concertos 2001



Track
01 Tchaikovsky Piano Concerto No. 1 in b flat, Op. 23: I. Allegro non troppo e molto maestoso - Allegro con spirito /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02 Tchaikovsky Piano Concerto No. 1 in b flat, Op. 23: II. Andantino semplice - Prestissimo - Tempo I
03 Tchaikovsky Piano Concerto No. 1 in b flat, Op. 23: III. Allegro con fuoco
04 Prokofiev Piano Concerto No. 3 in C, Op. 26: I. Andante - Allegro / 프로코피에프 피아노 협주곡 3번
05 Prokofiev Piano Concerto No. 3 in C, Op. 26: II. Theme & Variations
06 Prokofiev Piano Concerto No. 3 in C, Op. 26: III. Allegro ma non troppo
... Terence Judd, piano / 테렌스 주드, 피아노
... Moscow Philharmonic Orchestra / 모스크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Alexander Lazarev, conductor / 알렉산더 라자레프 지휘

Liner Note by Bryce Morrison 1982
Tchaikovsky's First is, understandably, the most popular of all Piano Concertos. And few compositions play more directly on such strong or immediate emotions or express such heroic ardour or heart-easing melancholy.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은 당연히 모든 피아노 협주곡들 가운데 가장 인기 있다. 그리고 강렬하거나 즉각적인 감정들을 더 직접 활용하거나, 영웅적인 열정이나 고요한(넘쳐흐르는) 우울함을 표현하는 작품은 거의 없다.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은 가장 유명하다. 거의 그러한 구성이 그러한 강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거나 영웅적 열정과 우울한 침착함을 모두 표현하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다.)

However, the First Concerto's success was ironically shadowed by a checkered history. Tchaikovsky was particularly unhappy with the piano as a medium for expression and in some desperation sought the advice of the eminent pianist Nicholas Rubinstein. A meeting was arranged and on Christmas Eve, 1874, after Tchaikovsky had played his Concerto Rubinstein delivered one of the most infamous of all critical tirades. Fluently caricaturing Tchaikovsky's music he pronounced it clumsy and unplayable when not vulgar and chaotic. Clearly the shock of the new was too much, but the damage done to Tchaikovsky's morbidly sensitive and uncertain nature was overwhelming. Yet with admirable courage he refused all suggested alternatives and hastily rededicated his Concerto to Hans von Bülow. The first performance took place in Russia in 1875 and was quickly followed by the American premiere in Boston where the "greatest of all battles for piano and orchestra" had its finale encored. Meanwhile Rubinstein recanted and later became one of the Concerto's foremost exponents. Tchaikovsky, too, had second thoughts and substantially revised his score in 1889. From then on success was assured and the Concerto's stormy, zig-zag career terminated in universal acclaim.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1번 협주곡의 성공은 파란만장한 역사(슬픈 이야기)로 인해 어두워졌다. 차이코프스키는 피아노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에 대해 특히 마음에 들지 않았으며(피아노로 말할 때 자신을 확신하지 못했으며), 절망적으로(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저명한 피아니스트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래서 그들은 만났는데, 1874년 크리스마스이브에 차이코프스키가 자신의 협주곡을 연주한 후 루빈스타인은 이 곡에 대해 혹평을 했다.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을 막힘없이 풍자한 그는 연주할 수도 없을 만큼 빈약한 곡이라고 평했다. 새로운 충격이 그에게 너무 큰 것이 분명했지만, 차이코프스키는 병적인 예민하고 불확실한 성격으로 인해 엄청난 손상을 입었다. 그러나 그는 놀라운 용기를 내어 제안된 모든 대안(변경 사항)을 거부하고 자신의 협주곡을 한스 폰 뷜로프에게 급히 재헌정했다. 초연은 1875년 러시아에서 열렸으며, 보스턴에서 즉시 이어진 미국 초연에서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모든 전투 중에서 가장 위대하다”는 호평을 받으면서 피날레를 장식했다. 한편 루빈스타인은 자신의 주장을 철회했으며 나중에 이 협주곡의 가장 큰 주창자(위대한 연주자) 중의 한 명이 되었다. 차이코프스키도 다시 생각하여 1889년에 악보를 상당히 개정했다. 그때부터 성공이 보장되었으며 협주곡에 대해 언쟁이 오가는(협주곡의 소란스러운) 지그재그 이야기는 보편적인 찬사로 끝났다.

Today, we can perhaps see how disturbed Rubinstein must have been by Tchaikovsky's extreme novelty. The orchestra flings down the gauntlet in the grandest of grand manners and the soloist - a true David defying Goliath - replies with colossal layers of chords, and yet the real start of the first movement does not occur until the folk tune commencing as late as bar 110. That such magnificent material should be a mere preludial trial of strength must have struck the conservative Rubinstein as unforgivably extravagant and eccentric. The subsequent ding-dong battle for ascendancy between piano and orchestra must also have seemed grotesque, and the famous fusillades of octaves (as explosively exciting as anything in the "1812 Overture" in the hands of a gifted pianist) mere rodomontade. The contrast, too, in the "Andantino" between lyrical tenderness and high speed whimsy (the central "Prestissimo" based on the French chansonette, "Il faut s'amuser danser et rire", already looks forward to similarly quixotic flights in the slow movements of Bartok's Second and Third Piano Concertos) must have seemed exaggerated. Worst of all, the first movement's exuberance was brutally confirmed in the finale, a Ukrainian dance of uncompromising force and rhythmic pungency.

오늘날 우리는 차이코프스키의 극도의 참신함으로 인해 루빈스타인이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차이코프스키의 극도의 참신함이 루빈스타인을 어떻게 흔들었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 우리는 왜 차이코프스키의 극도의 참신함에 의해 루빈스타인이 그렇게 흔들린 이유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오케스트라는 가장 웅장한 방식으로 도전하며, 골리앗을 물리치는 진정한 다윗인 독주자는 거대한 일련의 화음들로 응답하지만, 1악장은 실제로 바로 110마디에 시작되는 민속 음악이 나올 때까지 시작되지 않는다. 그러한 웅장한 소재가 그저 견고한 서두의 시도에 그쳐야 한다는 것은 보수적인 루빈스타인이 용서할 수 없을 정도로 사치스럽고 별난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 다음의 피아노와 오케스트라 사이의 상승을 위한 격렬한 전투도 기괴해보였으며(피아노와 오케스트라 사이의 지배를 위한 뒤섞인 스크램블은 그로테스크한 효과를 가져 왔으며 / 피아노와 오케스트라 사이의 패권에 대한 투쟁은 그에게 괴상한 것처럼 보였고), (재능 있는 피아니스트의 손에서 <1812 서곡>에 있는 것만큼이나 폭발적으로 흥미진진한 / 그 어느 것보다 많은 동요와 불안을 낳는) 옥타브의 유명한 총알 세례(빗발치는 옥타브)는 허풍떠는 것에 불과했다. 서정적인 부드러움과 빠른 속도의 재미있는 표현[빠른 분위기 전환](프랑스의 짤막한 가요 <즐겁게 춤추며 웃어라>에서 영감을 얻은 중간의 “프레스티시모”는 이미 버르토크 피아노 협주곡 2번과 3번의 느린 악장들에 있는 것과 유사한 빠른 비행을 기대함) 사이의 “안단티노”에서도 대조가 과장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1악장의 충동은 3악장에서 인정사정없이 확인되었는데, 우크라이나의 반항적인(타협하지 않는) 힘과 신랄한(자극적인) 리듬을 지닌 춤곡이다.

Mercifully, posterity has taken a different view. A cautious prediction in a local Italian paper as late as 1940 that Tchaikovsky's First Concerto could one day become popular has already joined the extensive list of critical curios, for the music's success was both instant and lasting. And the composer who aristocratically hated "mankind in the mass" achieved world wide popularity.

다행히도 후대는 다른 견해를 취했다. (다행스럽게도 다음 세대는 다른 태도를 취했지만 약간의 의견 차이가 있었다.) 차이코프스키의 1번 협주곡이 언젠가는 대중화될 수 있다는(인기를 얻을 수 있다는) 바로 1940년 이탈리아 현지 신문의 신중한(조심스러운) 예측은 음악의 성공이 즉각적으로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에 이미 광범위한 호기심 목록에 합류했다. 그리고 “인류 전체”를 귀족적으로 미워했던 작곡가는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었다.

Prokofiev's Third Piano Concerto was written when he was at the height of his pianistic powers, providing a dazzling vehicle for his formidable expertise. The self-consciously "cock-a-hoop" manner of the First and Second Concertos was already outgrown and although the Third concerto's gestation period was slow and painful (extending from Prokofiev's early Moscow days in 1913 to an idyllic summer spent in Brittany in 1921) its success was no less certain than that enjoyed by Tchaikovsky's First. The Russian, fairy tale opening contrasted by racing, toccata-style figurations struck a refreshingly original note and Prokofiev's sharper critics were relieved to find his caustic brilliance tempered by other warmer, less metallic attributes. The final variation of the "Andantino" (which so delightfully suggests two different kinds of movement proceeding simultaneously), and the lyrical elaboration of the finale's second subject proved irresistible. Furthermore, such stylish wit and charm helped the music's more conservative listeners to forget those moments when Prokofiev, no less characteristically, treads on the throat of his own song and mischievously reels to and fro between savagery and gentleness, economy and expansiveness. Such inclusiveness has helped to make Prokofiev's Third one of the richest and, arguably, the finest of all twentieth century Concertos.

프로코피에프의 3번 피아노 협주곡은 자신의 피아노 기교에 능한 힘이 절정에 달했을 때, 전문 지식을 위한 눈부신 수단을 제공하기 위해 작곡되었다. (프로코피에프는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했을 때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썼으며, 이 작품으로 자신의 재능을 보여줄 수 있는 훌륭한 기회를 제공했다.) 협주곡 1번과 2번의 의식적인 “의기양양한” 방식은 이미 열정이 식었으며(독창적이고 자랑스러운 방식은 이미 끝났으며), 협주곡 3번의 (1913년 프로코피에프의 초기 모스크바 시절부터 1921년 브르타뉴에서의 목가적인 여름까지 확장되는) 잉태(작곡) 기간은 느리고 고통스러웠지만 그 성공은 차이코프스키 협주곡 1번이 누렸던 것과 마찬가지로 확실했다. 경주와 대조되는 동화처럼 시작하는 러시아풍의 토카타 스타일 표현은 상쾌하게 독창적인 톤을 설정했으며(서두르는 토카타 스타일의 형상과 대조되는 러시아 이야기인 오프닝은 쾌적하고 독창적이었으며), 프로코피에프에게 보다 날카로운 비평가들은 보다 따뜻하고 삐걱거리는 소리가 덜 나는 특성으로 완화된 신랄한 화려함을 발견하고 안도했다. (프로코피에프의 가혹한 비평가들은 그의 신랄한 화려함이 보다 따뜻하고 금속성이 적은 속성으로 부드럽게 표현되었다고 안심했다.) (동시에 진행되는 두 가지 다른 종류의 악장들을 매우 즐겁게 제안하는 / 두 개의 다른 악장이 동시에 매력적으로 보이는) 1악장 “안단티노”의 마지막 변주와 3악장 제2주제의 서정적인 정교함은 굉장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게다가 이런 세련된 재치와 매력은 음악의 더욱 보수적인 청취자들이, 그다지 특징적이지 않은 프로코피에프가 자신의 노래에 대한 화를 내어 잔인함과 온화함, 아끼는 것과 광활함 사이에서 장난스럽게 이리저리 비틀거리는 순간들을 잊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포용성(이 특이한 조합)은 프로코피에프의 3번 협주곡을 20세기의 모든 협주곡 중에서 가장 풍부하고, 주장하건데 가장 훌륭한 것으로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가장 풍부하면서도 가장 세련된 것 중 하나라고 말할 수도 있다).

Terence Judd (1957-1979)
In a meteoric career, tragically cut short at the age of 22, Terence Judd achieved international recognition for his great artistry and virtuosity. Born in London on October 3rd, 1957, he began playing the piano at 5 and by the age of 10 had become the youngest First Prize winner of the National Junior Piano Competition, subsequently appearing at the Royal Albert Hall. At 11, his debut at the Royal Festival Hall in Beethoven's First Concerto was shown on BBC Television and shortly after, he played there again with the London Philharmonic Orchestra. Whilst still only 14 he made his North American debut in Cincinnati and a year later his South American debut in Caracas, Venezuela. He later returned to the USA for a series of recitals and Concerto performances.

일약 성공을 거뒀으나 22세에 비극적으로 목숨을 갑자기 끊은 테렌스 주드는 위대한 예술성과 기교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1957년 10월 3일 런던에서 태어난 그는 5세에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으며, 10세에는 전국 청소년 피아노 콩쿠르에서 최연소 1위를 차지하여 로열 앨버트 홀에 출연했다. 11세에는 로열 페스티벌 홀 데뷔를 가졌는데 베토벤 협주곡 1번이 BBC 텔레비전에서 방영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거기에서 다시 협연했다. 불과 14세에는 신시내티에서 북아메리카 데뷔, 1년 후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남아메리카 데뷔를 가졌다. 그는 나중에 미국을 재방문하여 일련의 독주회와 협연을 가졌다.

After winning top prizes in Italy in the International Busoni Competition in 1975 and the International Casagrande Competition in 1976 he won First Prize in the 1976 British Liszt Competition while still only 18. In 1978 he was awarded a Music Fellowship by the Calouste Gulbenkian Foundation, Lisbon.

이탈리아에서 1975년 제27회 부조니 국제피아노콩쿠르 (스웨덴의 라즐로 시몬과) 공동 3위, 1976년 제11회 알레산드로 카사그란데 국제피아노콩쿠르 2위에 입상한 그는 1976년 영국 리스트 콩쿠르에서 불과 18세에 우승했다. 1978년에는 리스본의 칼루스테 굴벤키안 재단에서 음악 장학금을 받았다.

As a prize winner in the 1978 Tchaikovsky Competition in Moscow he received unanimous acclaim from both audiences and critics and was immediately invited to remain in the USSR for a 10-day concert tour. Shortly after, he returned for recitals in Siberia, performed with the Gabrieli String Quartet and repeated his prize-winning performance of Prokofiev's Third Concerto in Moscow. He was invited to return to the Soviet Union again in 1979 for an extended tour of recitals and concerto appearances with the Leningrad Philharmonic Orchestra.

1978년 제6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러시아의 보리스 페트로프와) 공동 4위에 입상한 그는 청중과 비평가 모두에게 만장일치의 찬사를 받았으며 10일간의 콘서트 투어를 위해 소련에 머물도록 즉시 초청 받았다. 얼마 후 그는 시베리아에서의 리사이틀을 위해 재방문하여 가브리엘리 현악 사중주단과 협연했으며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결선에서 연주했던 프로코피에프 3번 협주곡을 반복했다. 그는 1979년에 리사이틀의 확장된 투어 및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때문에 소련에 다시 방문할 것을 초청 받았다.

Terence Judd performed with most of the major British Orchestras and appeared extensively throughout Great Britain and in the USA, Italy, Holland, Poland and Eire.

테렌스 주드는 영국 유수 오케스트라들과 협연했으며 영국, 미국, 이탈리아, 네덜란드, 폴란드, 아일랜드에서 폭넓게 연주했다.

Both the performances on this recording were taken "live" from the finals of the 1978 Tchaikovsky Competition. They were played, literally, back to back within a few minutes of each other, a characteristic example of Terence Judd's stamina and exuberance.

이 음반에 수록된 연주는 모두 1978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결선 실황이다. 이 곡들은 문자 그대로 서로 몇 분 안에 연이어 연주되었는데, 테렌스 주드의 에너지와 활력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1982년 브라이스 모리슨의 글 / 눈사람 번역



며칠 전에 외국 분이 나한테 음반 몇 장 찾아달라고 하도 굽신거려서 끈덕지게 검색하여 몇 개 구해줬다. 전에도 굽신거림을 당해서 어떻게 검색해서 나왔는지 알려주곤 한다. 바이두 사이트까지 가게 되었는데 뭔가가 있어서 받았다. 차이코프스키랑 프로코피에프 협주곡이 수록된 샨도스 음반이 뭔가 했더니 내가 전에 찾다가 못 찾았던 음반이었다. 그래서 작년에 구글 드라이브로 공유하지 못했다가 이제 찾았다. 샨도스 사이트에서 내지를 pdf 파일로 구했는데 내용이 짧아서 뜻하지 않게 타이핑했다. 하지만 번역하는 데만 3시간 넘게 걸렸다. 차이코프스키 협주곡에 대한 작품 설명까지도 찾아봐서 의역에 활용했다. 표지는 내 블로그에서 받으면 된다. 바이두 사이트에 회원 가입한 다음 다운로드 프로그램을 설치하여 무료로 받을 수 있다.

댓글 1개:

  1. https://www.chandos.net/products/catalogue/CHAN%206509

    https://pan.baidu.com/s/1eR6ZAq2#list/path=%2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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