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18일 토요일

Mariinsky / Daniil Trifonov - Tchaikovsky Piano Concerto No. 1 (2012)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외

또 다른 매머드급 러시아 피아니스트의 탄생을 알리는 축포를 만끽할 수 있다. 게르기에프가 발탁한 1991년 러시아 태생의 다닐 트리포노프가 그 주인공으로서, 2011년 루빈스타인과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1등, 2010년 쇼팽 콩쿠르 3등이라는 화려한 경력을 토대로 강력한 러시아 피아니즘을 펼쳐 보이는 신예다. 그의 눈부신 테크닉과 폭발적인 다이내믹이 빛을 발하는, 실로 오랜만에 경험하는 통쾌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녹음이다.


Track

01 Tchaikovsky Piano Concerto No. 1 in b flat, Op. 23: I. Allegro non troppo e molto maestoso - Allegro con spirito /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02 Tchaikovsky Piano Concerto No. 1 in b flat, Op. 23: II. Andantino semplice

03 Tchaikovsky Piano Concerto No. 1 in b flat, Op. 23: III. Allegro con fuoco

04 Tchaikovsky: Un poco di Chopin, Op. 72 No. 15 / 차이코프스키 <짐짓 쇼팽처럼>

05 Chopin Barcarolle in F#, Op. 60 / 쇼팽 <뱃노래>

06 Schubert/Liszt: Erlkonig / 슈베르트 <마왕> (리스트 편곡)

07 Schubert/Liszt: Fruhlingsglaube / 슈베르트 <봄의 찬가> (리스트 편곡)

08 Schubert/Liszt: Die Forelle / 슈베르트 <송어> (리스트 편곡)

09 Schubert/Liszt: Auf dem Wasser zu singen / 슈베르트 <물 위에서 노래함> (리스트 편곡)

10 Schubert/Liszt: Die Stadt / 슈베르트 <도시> (리스트 편곡)

11 Schumann/Liszt: Liebeslied (Widmung) / 슈만 <헌정> (리스트 편곡)


THE FIRST. THE BEST. / 처음. 최고.

Obviousness. If you were to ask people in Russia, “Who is the nation’s greatest poet?” ten out of ten would answer “Pushkin” with absolute sincerity, and they would be right. And if you were to ask them what the most famous piece of Russian classical symphonic music was, eight out of ten would name Tchaikovsky’s Piano Concerto No 1 (if they ventured an answer at all), and this too would be completely correct.


분명하다. 러시아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위대한 민족 시인은 누구인가?” 이렇게 질문한다면, 10명 중 10명은 “푸시킨”이라고 절대적으로 진지하게 대답할 것이고, 그들이 옳을 것이다. (이것은 핑계가 아니라 진실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러시아 고전주의 교향악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그들이 대답한다면 / 대답을 감히 한다면) 10명 중 8명은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꼽을 것이고 이 역시 완전히 맞을 것이다. (이것 또한 진실과 완전히 일치할 것이다.)


What are the reasons for this? It would be difficult to give an exhaustive list, but some obvious ones immediately spring to mind. Tchaikovsky was a genius in terms of lyrical music, and many of his compositions are compelling in their beauty and soulfulness. He was a Russian genius; the breadth of melodic flow in his scores is remarkable. It is also worth noting that prior to Tchaikovsky nothing comparable to the First Piano Concerto had existed in the Russian musical tradition, nor was there anything like it in the rest of the world’s concert music (post-Beethoven): it was unlike Schumann’s refined chamber-like Concerto, and even less akin to the concerti of Liszt, with their theatrical pathos. No one would dispute the fact that Tchaikovsky’s piano music owes much to both Schumann and Liszt, as well as to Anton Rubinstein, yet throughout the Concerto the piano offers a heartfelt and warm pronouncement by an emphatically Russian composer.


그 이유는 무엇일까? (왜 그럴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으며 모두 나열하기는 어렵지만 몇 가지는 즉시 마음에 떠오른다. (그들 모두의 이름을 말하기는 어려우나 일부는 분명하다.) 차이코프스키는 서정적인 음악의 천재였으며(서정적인 음악에 있어 탁월했으며), 그의 많은 작품은 그 아름다움과 영혼의 충만함에서 매력적이다. 그는 러시아 천재였으며, 선율적인 호흡(멜로디 흐름)의 폭은 놀랍다. (그리고 그의 천재성은 러시아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따라서 그의 음악에서 선율적 흐름의 풍부함은 압도적이다.) 게다가 차이코프스키 이전의 러시아 음악 전통에서는 그의 피아노 협주곡 1번과 견줄 만한 것이 없었으며, 베토벤 이후의 세계 협주곡 레퍼토리에도 이와 같은 것이 없었는데, 슈만의 세련된 실내악 협주곡도 그렇고, 극적인 파토스를 지닌 리스트의 협주곡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음악이 슈만, 리스트, 안톤 루빈스타인에게 큰 빚을 졌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협주곡 전반에 걸쳐 러시아 작곡가의 진솔하고 따뜻한 표현력으로 가득 차 있다. (협주곡 내내 단호한 러시아 작곡가의 따뜻하고 친밀한 목소리가 피아노에 울려 퍼진다.)


Noteworthy too is the manner in which Tchaikovsky’s score substantially covered the “spectrum of moods” in Russian culture at the time. It contains almost no minor tones (and perhaps for that reason the Concerto has only two ‘minor’ themes), yet there is plenty of celebratory music – for example, at the opening of the Concerto and in the final coda. This work displays neither the heavy mood characteristic of Mussorgsky, who wrote “Boris Godunov” not long before Tchaikovsky’s Concerto, nor the tragic motifs of Pyotr Ilyich himself that filled his earlier fantasy overture “Romeo and Juliet”. The score of Piano Concerto No 1 provided a counterbalance to the dark side of the Russian musical spectrum and it has earned eternal fame thanks to its captivating major keys.


차이코프스키의 악보가 당시 러시아 문화에 만연한 “기분의 스펙트럼”을 크게 확장한 것(상당 부분 다뤘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얼마나 잘 포착했는지도 놀랍다.) 여기에는 단조가 거의 없으나 (그리고 아마도 그런 이유로 협주곡에는 2개의 ‘단조’ 주제가 있지만) 예를 들어 협주곡의 시작 부분과 마지막 코다에서 축제 음악이 많이 나온다(음악은 종종 흥겹다). 이 작품은 차이코프스키의 협주곡이 있기 얼마 전에 <보리스 고두노프>를 작곡한 무소르그스키의 무거운 분위기나 그의 초기 환상 서곡 <로미오와 줄리엣>을 채운 표트르 일리치 자신의 비극적 동기를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악보는 러시아 음악 스펙트럼의 어두운 면에 균형을 제공했으며 매혹적인 장조 덕분에 영원한 명성을 얻었다.


Unusual aspects of a familiar work. True lovers of classical music will have listened to the First Piano Concerto dozens of times, and the pleasure they receive from it does not diminish even when the Concerto is performed many times in succession (as in the final round of the International Tchaikovsky Competition): it still has the power to enchant and stir the listener. Perhaps there is little point attempting to “retell” such music; rather we ought to point out certain peculiarities of its form that might escape the listener’s notice, yet which lend the Concerto an element of its magnificence. For example, the opening theme is not repeated anywhere else in the Concerto, yet it is a theme of unparalleled power and beauty. The same is true of the astonishing secondary theme of the first movement, reminiscent of a lullaby; it does not appear in the recapitulation. Tchaikovsky’s melodic generosity truly knows no bounds, and the listener cannot help but delight in it. And what of the centre part of the second movement? It is none other than a paraphrase of the popular French chansonnette “Il faut s’amuser, danser et rire” (“One must have fun, dance and laugh”). It was frequently sung in the Tchaikovsky household, and who could have thought that it would come to the aid of the composer when he needed an easy scherzo in his piano concerto? Here, as so often, the great Russian poet Anna Akhmatova’s (1889–1966) verse comes to mind: “If you only knew from what rubbish / Poems grow, knowing no shame”.


익숙한 작품의 특이한(유명한 작품의 잘 알려지지 않은) 면. 진정한 클래식 음악 애호가라면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수십 번은 들었을 것이고, 그것이 주는 기쁨은 (차이코프스키 국제음악콩쿠르 결선처럼) 아무리 들어도 시들지 않을 것이며, 여전히 청중을 매료시키고 사로잡는 힘이 있다. 그러한 음악을 “다시 말한다”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는데, 오히려 우리는 듣는 사람의 주의를 끌지 못할 수도 있지만, 협주곡의 웅장함을 더해주는 몇 가지 특징에 주목하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도입부 주제는 비할 데 없는 힘과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데에서는 반복되지 않는다. (비길 데 없는 힘과 아름다움의 첫 번째 주제는 협주곡의 어느 곳에서도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자장가를 연상시키는 1악장의 놀라운 두 번째 주제도 마찬가지인데, 재현부에 나오지 않는다. 차이코프스키의 선율적 관대함은 진정으로 한계가 없으며, 협주곡을 들으면 무의식적으로 즐기게 된다. (듣는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차이코프스키는 자신의 선율적 아이디어를 완전히 사치스럽게 사용한다.) 그리고 2악장의 중간 부분은 어떤가? 그것은 바로 프랑스의 유명한 샹송 <Il faut s’amuser, danser et rire>(즐겁게 춤추며 웃어라)의 의역에 지나지 않는다. 차이코프스키 집안에서 자주 불렀는데, 피아노 협주곡에서 가벼운 스케르초가 필요할 때 작곡가에게 도움이 되리라고(그것을 사용할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여기에서 (이와 관련하여) 러시아의 위대한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1889~1966)의 시가 자주 떠오른다. “어떤 쓰레기에서 알았더라면 / 시는 부끄러움을 모르고 성장하고”.


The specifics of the First Piano Concerto in question do not only relate to the concerto’s form – these features unquestionably changed the very essence of the classical genre. Tchaikovsky wrote specifically of his Piano Concerto that “here we have two equal forces … the powerful ... orchestra, with which there struggles and over which there triumphs ... a small … but strong-spirited rival” (letter to Nadezhda von Meck, 24 November 1880). Yet in reality there is neither “struggle” nor “triumph” in the First Piano Concerto; rather there is a dialogue, surprisingly rich in emotional hues. Continuing what Tchaikovsky had begun, Rachmaninov opened up a vast field of piano concerti in which the “Russian concerto” stands triumphant as a harmony of personal and extra-personal spiritual forces.


지금까지 논의된 협주곡 1번의 특징은 형식에만 국한되지 않는데, 덕분에 고전 장르의 본질이 바뀐다. (문제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세부 사항은 협주곡의 형식과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특징은 의심할 여지 없이 고전주의 시대에 존재했던 장르의 본질을 분명히 바꾸어 놓았다.) 차이코프스키는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에 대해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썼다. (작곡가 자신은 이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는 두 개의 동등한 세력이 있는데... 강력한... 오케스트라, 투쟁과 승리를 거둔... 작지만... 강력한 라이벌”(1880년 11월 24일 나데즈다 폰 메크 백작 부인에게 보낸 편지). 그러나 실제로 피아노 협주곡 1번에는 “승리”도 “투쟁”도 없는데, 오히려 놀라운 감정적 풍요의(풍부한 감정적 색채에 놀라운 정도로) 대화가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 협주곡에는 다툼도 없고, 감정의 그림자가 놀라울 정도로 복잡한 편도 아니다.) 차이코프스키에 이어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노 협주곡에 대한 광대한 시각을 열어 러시아 협주곡이 개인과 개인을 초월한 영적 힘의 조화를 대표하는 대표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차이코프스키가 시작한 일을 계속하면서 라흐마니노프는 “러시아 협주곡”이 개인과 개인을 초월한 영적 힘의 조화로 의기양양하게 서 있는 광대한 피아노 협주곡 분야를 개척했다.)


And the grandiose Russian fortepiano school also emerged in Tchaikovsky’s score. We know that Pyotr Ilyich was not a professional performer, but in his First Piano Concerto, through the force of his compositional genius, he created a pianism of unrivalled diversity and brilliance. In today’s world, there are few pianists appearing in public for whom Tchaikovsky’s First Piano Concerto would not be a prized addition to their repertoire, despite the fact that it poses intriguing artistic challenges.


그리고 웅장한 러시안 포르테피아노 스쿨이 차이코프스키의 악보에 등장했다. (차이코프스키의 악보는 또한 러시아 피아노 학교의 위대함을 증언한다.) 표트르 일리치는 전문 연주자가 아니었지만(우리는 표트르 일리치가 전문 연주자가 아니었음을 알고 있지만), 협주곡 1번에서 천재성 덕분에 전례 없는 다양성과 광채의 피아니즘(비할 데 없는 다양성과 탁월함 /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피아노 테크닉)을 창조했다. 오늘날 세계에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이 흥미로운 예술적 도전을 제기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 곡을 레퍼토리에 소중하게 지니지 않은 채 대중 앞에서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Peculiarities and lessons. During Tchaikovsky’s lifetime, however, things were different. The thirty-four-year-old composer worked on the First Piano Concerto not without effort, and his fingers did not play all by themselves (as is the case with composers who are pianists); this turned out to be for the best – everything was brought about through conscious choice. Having finished the work, Tchaikovsky proposed to Nikolai Rubinstein that he might play it, which seemed natural enough: Rubinstein was not only a splendid pianist, but also a close friend of Tchaikovsky. Then suddenly “the Concerto is worthless and unplayable … it is bad, vulgar, and only two or three pages are worth preserving” (Rubinstein’s reaction as relayed by Tchaikovsky in a letter to von Meck, dated 21 January 1878). Unthinkable words; and expressed in the less than desirable Russian tradition of “calling a spade a spade”. Their relations became strained, the première of the Concerto was delayed and, moreover, Tchaikovsky found himself forced to turn to a foreign musician. That musician was Hans von Bülow, a renowned pianist, prominent conductor and generally a kind-hearted man. The first performance of the Concerto took place in Boston on 13 October 1875. And it was only after three years that Rubinstein played it, having undergone a change of heart. Here was a bitter lesson not only about intolerance, but also about responding thoughtlessly to a new work by a contemporary. After all, Rubinstein should have borne in mind that a gifted artist is always ahead of his time.


특징과 교훈. 그러나 차이코프스키의 생애 동안에는 많은 것(상황)이 달랐다. 34세의 작곡가에게 작품 작업은 결코 쉽지 않았고 (작곡가가 콘서트 피아니스트가 아닐 때 항상 그렇듯이) 그의 손가락은 스스로 음악을 연주하지 않았는데, 그러나 이것은 모든 결정이 의식적으로(합리적인 선택에 따라) 이루어져야 했으므로 더 나은 것(최선을 위한 것)으로 밝혀졌다. 악보가 완성되자 차이코프스키가 뛰어난 피아니스트일 뿐만 아니라 작곡가와 가까운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에게 제안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작업을 마친 차이코프스키는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에게 연주를 제안했는데, 이는 충분히 자연스러워 보였다. 루빈스타인은 뛰어난 피아니스트일 뿐만 아니라 차이코프스키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썼다. “루빈스타인은 이 곡은 절대 연주가 불가능하고 그럴 가치도 없다고 마구 지껄이며 쓸 만한 곳은 2∼3페이지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차이코프스키가 1878년 1월 21일자 폰 메크에게 보낸 편지에서 전달한 루빈스타인의 반응도 마찬가지이다.) 말도 안 되는 말인데, “자기 생각을 그대로(숨김없이) 말하는” 러시아 전통에서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경색되고 협주곡 초연은 연기되었으며, 더군다나 차이코프스키는 어쩔 수 없이 외국 음악가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그 음악가는 유명한 피아니스트이자 저명한 지휘자이며 일반적으로 매우 자애로운 성격을 지닌 한스 폰 뷜로프였다. 협주곡의 초연은 1875년 10월 13일 보스턴에서 열렸다. 그리고 3년 후에야 루빈스타인은 마음을 바꿨고 마침내 이 곡을 연주했다. 여기에서 쓰라린 교훈은 편협함뿐 아니라 동시대의 창조에 대해 알게 될 때의 무심함일 수도 있다. (이 예는 편협함뿐 아니라 현대인의 신작을 무심코 판단한다는 사실에 대한 쓰라린 교훈이 될 수도 있다.) 결국, 재능있는 예술가는 항상 자신의 시대보다 앞서 있다고 상상할 수 있다. (결국 루빈스타인은 재능 있는 예술가가 항상 시대를 앞서간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When, on 28 October 1893, Tchaikovsky appeared in public for the last time at the St Petersburg Noble Assembly, accompanying the German-American pianist Adele Aus der Ohe, who was performing as the soloist in the First Piano Concerto, he surely could not have foreseen the unimaginably glorious future that awaited his composition. He did not know that within fifty years many Hollywood movies would begin screenings to the opening bars of Piano Concerto No 1. And, of course, he could not have conceived that one renowned musician would later write in a newspaper article that Tchaikovsky was famous among the entire population of Russia, even though not everyone could name the tsar at the time. One should know both one’s own culture and one’s own history. It is necessary to value and preserve our own geniuses – our own artists – and to try to grasp the meaning of those works of art that are destined to become a symbol of their own country.


1893년 10월 28일, 차이코프스키가 피아노 협주곡 1번에서 독주자로 연주하고 있던 독일계 미국인 피아니스트 아델레 아우스 데르 오에와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 귀족 의회에서 마지막으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는 확실히 자신의 작품의 영광스러운 미래를 꿈도 꾸지(예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반세기 안에(50년 이내에) 많은 할리우드 영화가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첫 마디로 시작될 것임을 몰랐다. (그는 50년도 채 되지 않아 자신의 협주곡 1번의 첫 마디가 많은 할리우드 영화 상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될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리고 물론 당시에는 모든 사람이 차르의 이름을 지을 수는 없었지만, 한 유명한 음악가가 나중에 신문 기사에서 차이코프스키가 러시아 전역에서 유명하다고 쓸 것이라고는 상상(예상)할 수 없었다. 그 문화와 역사를 모두 아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천재들, 즉 우리 예술가들의 천재성을 소중히 여기고 보존해야 하며 그들이 태어난 나라의 상징이 될 예술 작품들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다.


P. I. TCHAIKOVSKY / 차이코프스키

Pyotr Ilyich Tchaikovsky was born into the family of a mining engineer on 7 May 1840 in Votkinsk in the Imperial Russian province of Vyatka. Despite an early and keen interest in music, his vocation as composer only became apparent much later. In 1859, when he was 19, he graduated from the St Petersburg School of Jurisprudence and was appointed to the Ministry of Justice as a civil servant. After several attempts at composition, he enrolled in the newly opened St Petersburg Conservatoire, attending Nikolay Zaremba’s theory classes and Anton Rubinstein’s composition classes. Tchaikovsky spent three years at the Conservatoire and was awarded its first medal (the Great Silver Medal). He then left the civil service and started a new life as a professional composer.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는 1840년 5월 7일 러시아 제국 비아트카 지방(현재 우드무르트 자치 공화국)의 봇킨스크에서 광산 기술 관리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깊은 관심을 보였지만, 작곡가로서의 소명은 비교적 늦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1859년 19세에 상트페테르부르크 법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법무부 공무원으로 임용되었다. 작곡을 몇 번 시도한 후 그는 새로 문을 연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등록하여 니콜라이 자렘바에게서 음악 이론을, 안톤 루빈스타인에게서 작곡을 배웠다. 차이코프스키는 음악원에서 3년 동안 공부한 끝에 우등 졸업으로 큰 은메달을 획득했다. 이후 공직을 그만두고 전문 작곡가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 후 공직을 떠나 작곡에만 전념했다.)


In 1866 Tchaikovsky moved to Moscow, which was to become his permanent home in Russia during his regular travels abroad to Italy, France and Switzerland. He started teaching at the Moscow Conservatoire and wrote the First Symphony (“Winter Daydreams”, 1866) and his first opera, “The Voyevoda” (1868).


1866년 차이코프스키는 이탈리아, 프랑스, 스위스를 정기적으로 여행하는 동안 영구 거주지가 될 예정인 모스크바로 이사했다. 그는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여 교향곡 1번(<겨울의 백일몽>, 1866)과 첫 번째 오페라 <지방장관>(1868)을 작곡했다.


In this early creative period Tchaikovsky produced many masterpieces: the overture-fantasia “Romeo and Juliet” (1870), First Concerto for Piano and Orchestra (1875) and the ballet “Swan Lake” (1876). With their open emotionality, captivating dramatic content and peerless melodic beauty, they have remained the most popular of his works.


이 초기 창작 시기에 차이코프스키는 오케스트라를 위한 환상 서곡 <로미오와 줄리엣>(1870), 피아노 협주곡 1번(1875), 발레곡 <백조와 호수>(1876) 같은 위대한 걸작들을 남겼는데, 숨길 수 없는 감정, 강렬한 극적인 내용, 전례 없는 선율적 아름다움으로 인해 여전히 가장 인기 있는 작품들로 남아 있다.


In 1877 Tchaikovsky suffered a deep personal crisis triggered by his marriage to Antonina Miliukova (a marriage which lasted all of three months). He left the Conservatoire and spent the next few years travelling around Europe. Moral and material support came from a rich patron, Nadezhda von Meck, who gave him substantial financial help. Von Meck maintained a deep personal correspondence with the composer for thirteen years even though they never met face to face.


1877년 차이코프스키는 안토니나 밀류코바와의 (3개월 동안 지속된) 결혼으로 인해 심각한 개인적 위기(매우 고통스러운 시기)를 겪고 있었다. 그는 음악원을 떠나 다음 몇 년 동안 유럽 전역을 여행했다. 도덕적, 물직적 지원은 그에게 상당한 재정적 도움을 준 부유한 후원자 나데즈다 폰 메크로부터 나왔다. 폰 메크는 13년 동안 작곡가와 만나지 않았지만, 집중적으로 서신을 주고받았다.


Once able to resume composing on a regular basis, in 1877, Tchaikovsky produced the Fourth Symphony with its dramatic conflicts, dedicated ‘To my best friend’ (that is, Nadezhda von Meck), the captivating Violin Concerto in 1878 and, in the same year, the opera Eugene Onegin (based on Pushkin’s poem) which still enthrals audiences with its psychological depth and noble style.


정기적으로 작곡을 재개할 수 있게 된 차이코프스키는 1877년 극적으로 충돌하는 교향곡 4번에 ‘나의 가장 친애하는 친구에게’라는 헌사를 담아 나데즈다 폰 메크에게 헌정했으며, 1878년에는 매혹적인 바이올린 협주곡과 오늘날에도 여전히 심리적 깊이와 고상한 스타일로 청중을 매료시키는 (푸시킨의 동명 운문소설을 기반으로 하는) 오페라 <에프게니 오네긴>을 작곡했다.


Tchaikovsky experienced another decline in creative energy in the first half of the 1880s, and it was only through the opera “Charodeika” (“The Enchantress”, 1887) and the Fifth Symphony (1888) that his genius was set free again. A succession of masterpieces followed: the ballet “Sleeping Beauty” (1889), the opera “Queen of Spades” (“Pique Dame”, 1889, a magnificent musical poem about St Petersburg), the opera “Iolanta” (1891), the string sextet “Souvenir de Florence” (1892) and the ballet “Nutcracker” (1892). By now, Tchaikovsky had achieved worldwide fame. He toured throughout Europe and visited the United States where he conducted his own compositions which continued to gain in popularity and success. The honorary doctorate awarded to him by the University of Cambridge in 1893 was tangible recognition of his success in Europe. No one, it seems, thought that his death would occur so soon.


차이코프스키의 창의성은 1880년대 전반기에 다시 쇠퇴했지만, 오페라 <여자 마법사>(1887)와 교향곡 5번(1888)으로 천재성을 되찾았다. 그런 다음 발레곡 <잠자는 숲속의 미녀>(1889), 오페라 <스페이드의 여왕>(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영광에 대한 장엄한 서정시 <스페이드의 여왕>, 1890), 오페라 <이올란타>(1891), 현악 6중주 <피렌체의 추억>(1892), 발레곡 <호두까기 인형>(1892) 등의 걸작들이 잇따랐다. 차이코프스키는 이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는 유럽 전역을 여행하고 미국을 방문하여 계속해서 인기와 성공을 얻은 자신의 작품들을 지휘했다. 1893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그에게 수여한 명예박사 학위는 당시 유럽에서 그의 명성을 잘 보여주는 증거이다. 아무도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예상하진 못했던 것 같다.


But the Sixth Symphony (the “Pathétique”, 1893) carries intimations of the finale of Tchaikovsky’s life. In this symphony the dramatic crescendo of the early movements is followed by the final adagio which peters out into oblivion – as though the composer were performing his own requiem.


그러나 교향곡 6번(<비창>, 1893)에는 차이코프스키의 삶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암시가 있다. 1악장의 극적인 크레셴도(점점 세게) 뒤에는 – 마치 작곡가가 그곳에서 자신의 레퀴엠을 연주하는 것처럼 – 망각 속으로 사라지는 아다지오(느리게)가 따라온다.


Tchaikovsky died in St Petersburg on 6 November 1893, nine days after the première of the Sixth Symphony. The circumstances of his death are still unclear (the suspicion of suicide still hovers). What is absolutely certain, however, is that Tchaikovsky was to become and remains the most internationally famous Russian composer and one of the most renowned classical composers – a place he will retain forever.


차이코프스키는 교향곡 6번을 초연한지 9일 후인 1893년 11월 6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정황은 여전히 불분명하다. (자살 의혹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차이코프스키는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러시아 작곡가이자 가장 인정받는 클래식 작곡가 중 한 명이 되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지속할 것이다.


Леонид Гаккель / Leonid Gakkel / 레오니드 가켈 글


Daniil Trifonov

Born in Nizhniy Novgorod (Russia) in 1991, Daniil Trifonov is emerging as one of the brightest new names of the next generation of pianists, having won prizes at the Chopin Competition in Warsaw (Bronze Medal), the Rubinstein Competition in Tel Aviv (First Prize) and the Tchaikovsky Competition in Moscow (Gold Medal). Valery Gergiev personally awarded Trifonov the ‘Grand Prix’ in Moscow, an additional award given to the best overall competitor in any of that Competition’s categories.


1991년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태어난 다닐 트리포노프는 오늘날 바르샤바 쇼팽 콩쿠르(동메달), 텔아비브 루빈스타인 콩쿠르(1위),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 콩쿠르(금메달)에 입상하면서 신세대의 가장 빛나는(설득력 있는) 피아니스트 중 한 명으로 떠오르고 있다. 발레리 게르기에프는 해당 대회의 모든 부문에서 종합적으로 가장 우수한 참가자에게 추가로 주어지는 전체 대상(그랑프리)을 트리포노프에게 직접 수여했다.


Trifonov recently gave his debut with the London Symphony Orchestra and during the 2011/12 season he will give his first performances with the Israel Philharmonic and the Warsaw Philharmonic, as well as collaborating with Mikhail Pletnev, Vladimir Fedoseyev, Sir Neville Marriner, Pietari Inkinen and Eivind Gullberg-Jensen. He will also appear at Salle Pleyel (Paris), Carnegie Hall (New York), Suntory Hall (Tokyo), Wigmore Hall (London) and venues across Italy, France, Israel and Poland. Recent concerts have included his Japanese debut in Tokyo, recitals at the Mariinsky Concert Hall, Moscow Easter Festival, Teatro La Fenice (Italy) and the Brighton Festival (UK), and a Chopin birthday concert in Warsaw.


트리포노프는 최근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데뷔했고 2011~2012 시즌에는 처음으로 이스라엘 및 바르샤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미하일 플레트네프, 블라디미르 페도세예프, 네빌 마리너 경, 피에타리 인키넨, 에이빈드 굴베르그-옌센과도 협연한다. 그는 플레이엘 홀(파리), 카네기홀(뉴욕), 산토리 홀(도쿄), 위그모어 홀(런던)을 비롯하여 이탈리아, 프랑스, 이스라엘, 폴란드 전역의 공연장들에도 출연한다. 최근에는 도쿄에서의 일본 데뷔를 비롯하여 마린스키 콘서트홀, 모스크바 부활절 페스티벌, 이탈리아 페니체 극장, 영국 브라이튼 페스티벌, 바르샤바 쇼팽 생일 기념 콘서트에서 리사이틀을 가졌다.


Daniil Trifonov has performed at many international music festivals, including Rheingau (Germany), Crescendo (Russia), Arpeggione (Austria), Musica in Villa (Italy), Dame Myra Hess Series (US), Santo Stefano (Italy), and Festival Pianistico di Trieste (Italy). His first CD was released on Decca in 2011, featuring a selection of Chopin solo piano works, and he has also made a number of television recordings in Russia, the USA and Italy.


다닐 트리포노프는 라인가우(독일), 크레셴도(러시아), 아르페지오네(오스트리아), 무지카 인 빌라(이탈리아), 데임 마이라 헤스 시리즈(미국), 산토 스테파노(이탈리아), 트리에스테 피아노 페스티벌(이탈리아) 등 많은 국제 음악제에서 연주했다. 2011년 데카에서 쇼팽의 솔로 피아노 작품들이 수록된 첫 CD가 발매되었으며 러시아, 미국, 이탈리아에서 TV 출연하여 여러 차례 녹화했다.


Valery Gergiev

Valery Gergiev, one of the world’s finest conductors, is Artistic and General Director of the Mariinsky Theatre. As well as managing the Mariinsky Theatre, he works with the London Symphony Orchestra, the Vienna Philharmonic, the Rotterdam Philharmonic, the New York Philharmonic and the Orchestra of the Teatro alla Scala. He has founded and organised musical festivals of world renown such as the Gergiev Festival Mikkeli (Finland), the Rotterdam Philharmonic Gergiev Festival (The Netherlands), Stars of the White Nights Festival (Saint Petersburg) and the Moscow Easter Festival.


세계 최고의 지휘자 중 한 명인 발레리 게르기에프는 마린스키 극장의 예술감독이자 총감독이기도 하다. 마린스키 극장을 관리할 뿐만 아니라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비엔나 필하모닉, 로테르담 필하모닉, 뉴욕 필하모닉, 스칼라 극장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도 협연한다. 그는 미켈리 게르기에프 페스티벌(핀란드), 로테르담 필하모닉 게르기에프 페스티벌(네덜란드), 백야의 별들 페스티벌(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부활절 페스티벌 같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여러 음악제를 만들어 이끌고 있다.


Among Maestro Gergiev’s accomplishments is the involvement of the Mariinsky Theatre in creative collaboration with major opera houses around the world, such as the Metropolitan Opera (New York), the Royal Opera House, Covent Garden (London), Carlo Felice (Genoa), the San Francisco Opera, La Scala (Milan), the New Israeli Opera and the Théâtre du Châtelet. Under Gergiev, the Mariinsky Theatre Orchestra and Opera Company have appeared in over 50 countries in the Old and New Worlds, from Japan and China to the USA.


마에스트로 게르기에프의 업적 중에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뉴욕), 로열 오페라 하우스, 코벤트 가든(런던), 카를로 펠리체(제노아),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라 스칼라(밀라노), 뉴 이스라엘 오페라, 샤틀레 극장 같은 세계 주요 오페라 무대와 마린스키 극장의 창의적인 협업이 있다. 게르기에프가 지휘하는 마린스키 극장 오케스트라와 오페라단은 일본과 중국에서 미국에 이르기까지 구대륙과 신대륙의 50개국 이상에서 공연했다.


Valery Gergiev has achieved renown for his defence of humanitarian ideals. The maestro initiated a worldwide series of charity concerts entitled “Beslan: Music for Life” held in New York, Paris, London, Tokyo, Rome, and Moscow. In August 2008 he conducted a requiem concert in front of the ruined Government House of South Ossetia (Tskhinvali).


발레리 게르기에프는 인도주의적 이상(대의)에 대한 헌신(봉사)으로도 유명하다. 마에스트로는 뉴욕, 파리, 런던, 도쿄, 로마, 모스크바에서 <베슬란 : 삶을 위한 음악>이라는 제목의 전 세계 자선 콘서트 시리즈를 시작했다. 2008년 8월에는 폐허가 된 남오세티야 정부 청사(츠힌발리) 앞에서 레퀴엠 콘서트를 지휘했다.


Gergiev is also well known for the range of his recordings, for which he has received many prestigious international rewards, in particular the “Record Academy Award” for his recordings of the complete Prokofiev symphonies with the London Symphony Orchestra and the “Académie du disque lyrique” prize for his recording of Russian operas.


게르기에프는 폭넓은 녹음 범위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특히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프로코피에프 교향곡 전집 녹음으로 ‘레코드 아카데미 상’, 러시아 오페라 녹음으로 ‘아카데미 뒤 디스크 리릭’ 상을 비롯하여 수많은 권위 있는 국제적인 상을 받았다.


The Orchestra of the Mariinsky Theatre is one of the oldest musical institutions in Russia. It traces its history back to the early 18th century, to the development of the Court Kapelle. In the 19th century, the orchestra flourished under Edouard Napravnik, who was its ruling spirit for over half a century. The excellence of the Orchestra was recognised by the world-class musicians who conducted it including Hector Berlioz, Richard Wagner, Hans von Bülow, Gustav Mahler and Arthur Nikisch. In Soviet times, these rich traditions were continued by conductors like Vladimir Dranishnikov, Ariy Pazovsky, Evgeny Mravinsky, Konstantin Simeonov and Yuri Temirkanov. The Orchestra had the honour of playing many premières: operas and ballets by Tchaikovsky and Prokofiev, operas by Glinka, Mussorgsky, Rimsky-Korsakov, and ballets by Asafyev, Shostakovich and Khachaturian.


마린스키 극장 오케스트라는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음악 단체 중 하나이다. 그 역사는 18세기 초, 궁정 기악 예배당이 등장할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세기에는 반세기 이상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에두아르드 나프라브니크의 활동이 마린스키 극장 오케스트라의 결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케스트라의 우수성은 엑토르 베를리오즈, 리하르트 바그너, 한스 폰 뷜로프, 구스타프 말러, 아르투르 니키쉬 등 이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세계적인 음악가들에게 인정받았다. 소비에트 시대에는 블라디미르 드라니쉬니코프, 아리 파조프스키, 에프게니 므라빈스키, 콘스탄틴 시메오노프, 유리 테미르카노프 같은 지휘자들이 오케스트라의 화려한(풍부한) 전통을 이어갔다. 오케스트라는 차이코프스키와 프로코피에프의 오페라와 발레곡, 글린카, 무소르그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아사피예프의 오페라, 아사피예프, 쇼스타코비치, 하차투리안의 발레곡 등 많은 초연의 영예를 누렸다.


Since 1988 the Orchestra has been under the baton of Valery Gergiev, a musician of the highest order and an outstanding figure in the music world. Gergiev’s arrival at the Mariinsky ushered in a new era of rapid expansion of the Orchestra’s repertoire, which now includes all the symphonies of Prokofiev, Shostakovich, Mahler, and Beethoven, the Requiems of Mozart, Verdi, and Tishchenko, and works by Tchaikovsky, Stravinsky, Shchedrin, Gubaidulina, and many young composers. The Orchestra regularly performs symphonic programmes in Europe, America, Japan and Australia. In 2008, the Orchestra of the Mariinsky Theatre, under the leadership of Maestro Gergiev, was ranked in Gramophone’s Top 20 list of the world’s best orchestras.


1988년부터 마린스키 극장 오케스트라는 광범위한 음악 및 사회 활동을 이끄는 세계적 수준의 음악가인 발레리 게르기에프가 지휘하고 있다. 마에스트로 게르기에프의 등장으로 오케스트라 레퍼토리가 빠르게 확장되어 새로운 시대를 열었는데 여기에는 프로코피에프, 쇼스타코비치, 말러, 베토벤의 교향곡, 모차르트, 베르디, 티셴코의 레퀴엠, 차이코프스키, 스트라빈스키, 셰드린, 구바이둘리나의 작품들, 많은 젊은 작곡가들이 포함된다. 오케스트라는 유럽, 아메리카, 일본,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교향악 프로그램을 정기적으로 연주한다. 2008년 마에스트로 게르기에프가 지휘하는 마린스키 극장 오케스트라는 그라모폰이 선정한 세계 최고의 20대 오케스트라에 선정되었다.


Tracks 1–3 recorded 25 October & 30 December 2011 in the Concert Hall of the Mariinsky Theatre, St Petersburg, Russia.

Tracks 4–11 recorded 26 October 2011, 24 January & 12 April 2012 in the Concert Hall of the Mariinsky Theatre, St Petersburg, Russia.


러시아어, 프랑스어, 독일어도 동원하여 번역했다. 될 수 있으면 자연스러운 쪽으로 정리했다.

댓글 2개:

  1. https://rutracker.org/forum/viewtopic.php?t=561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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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https://drive.google.com/drive/u/4/folders/1wpfdQBgpLO2L-FFwchXvfngzHkuX1Yxh

    You have to download until 31 January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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