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30일 토요일

DVD / We Want the Light 2004



https://www.youtube.com/watch?v=S9MIbHdUVFs

https://search.alexanderstreet.com/preview/work/bibliographic_entity%7Cvideo_work%7C2369340


“절대로 놓칠 수 없는 다큐멘터리” - 타임스


우리는 빛을 원해요.

나치 캠프라는 특별한 장소에서 자유와 생존의 의미를 일깨워준 크리스토퍼 누펜의 강력한 영상물이다.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다니엘 바렌보임, 에프게니 키신, 주빈 메타, 이차크 펄만, 핀커스 주커만 등 세계의 거장들이 대거 출연하는 증보판 음악 다큐멘터리! 말러, 바흐, 쇤베르크, 브루흐, 슈만, 멘델스존, 바그너, 슈베르트, 브람스의 음악들이 가득 담겼다.


뮤지컬 오피니언, BBC 뮤직 매거진, 그라모폰, 클래식 FM 등 음악 관련지에 대대적인 광고를 했거나 하고 있고, 2004년 뉴욕 영화 &TV 페스티벌의 베스트 편집상, 2004년 영화 & TV 부문의 유대 문화상을 수상했는가 하면, 영국의 유력 일간지에 오늘의 영상물, 편집자의 선택 등에 등극하며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아이템이다.


21세기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자유의 의미를 새삼 음미하게 만들어 주는 감동적인 DVD다.


Vladimir Ashkenazy

Daniel Barenboim

Evgeny Kissin

Zubin Mehta

Itzhak Perlman

Pinchas Zukerman

The Gurzenich Orchestra of Cologne

The Cologne Opera Chorus

The Cologne Cathedral Children's Choir

Vladimir Ashkenazy, conductor


연주 : 쾰른 귀르체니히 오케스트라 / 쾰른 오페라 합창단 / 쾰른 교회 어린이 합창단

지휘 :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Music]


Tom Wesel: In the years of anxiety before the First World War, a Jewish one composer, Gustav Mahler, sounded a new tone in German symphonic music, a tone of ambivalence and immense. Visions of a remote world of peace are threatened by violence.


톰 베젤 : 1차 세계 대전 이전의 불안한 시대에 유대계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는 독일 교향곡에서 새로운 음색, 즉 양면성과 거대한 음색을 울렸습니다. 평화의 외딴 세계에 대한 비전은 폭력으로 위협받고 있습니다.


[Music]


Tom Wesel: This music is rooted in a 150 years of German symphonic thought, but its nervousness and suspenseful body are characteristic of Jewish art and thought in the early 20th century. They opened the way to the modernness movement and marked the beginning of the end of many things for the Western world. Mahler’s music with its depth to Richard Wagner is both powerfully German and intensely Jewish. It is also a summation, a farewell and an omen. It has been said that Mahler told what was coming in the language of the past, and he knew very well that he was paving the way for a new era in music. What he could not see was that the epoch that was ending was to signal also the end of a remarkable period of harmony and mutual enrichment between Germans and Jewish.


톰 베젤 : 이 음악은 150년간의 독일 교향곡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그 긴장과 긴장된 몸은 20세기 초 유대인들의 예술과 사상의 특징입니다. 그들은 근대 운동의 길을 열었고 서구 세계의 많은 것에 대한 종말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깊이를 지닌 말러의 음악은 강력하게 독일식이면서도 동시에 대단히 유대식입니다. 집대성, 고별, 조짐이기도 하죠. 말러는 과거의 언어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을 말했으며, 그는 자신이 음악의 새 시대를 여는 길을 잘 닦고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볼 수 없었던 것은 종말을 고하는 시대가 독일인과 유대인 사이의 놀라운 조화와 상호 풍요의 시대의 끝을 알리는 신호라는 것이었죠.


[Music]


Tom Wesel: Nor could he know that Germany was soon to visit on European jury, a cataclysm of violence, hatred and unimaginable terror that would condemn his own niece, Alma Rosé, to imprisonment in the Nazi death camp, and bring to an end a process of Jewish assimilation in the Germany society which had lasted from more than a 100 years and in which music had played such a significant role.


톰 베젤 : 그는 독일이 곧 유럽의 배심원단을 방문할 것이라는 사실도 알 수 없었고, 폭력, 증오, 상상할 수 없는 공포의 대격변으로 자신의 조카 알마 로제가 나치 사형수 수용소에 수감되어 100년 이상 지속되고 음악이 그토록 중요한 역할을 해온 독일 사회에서의 유대인 동화 과정이 종식될 것이라는 사실도 알 수 없었죠.


[Music]


Elyakim Ha’etzni: It’s not by, by chance that so many of the greatest lights in music, who enrich humanity immeasurable are Germans. So there is something in the German, ah, nature which, which gives us music, which, which... and, and the Ger... and, and it is a question of... you have it in your nature, you cultivate it, you cultivate it, it gets deeper into your nature, etcetera, etcetera,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Yes, it is, ah... it is being very tragic that the Germans and the Jewish... you see the, the, the, uhm... a Masmidim, the exterminators and the exterminated, the, the, the prosecutors and the victim, they meet on the ground of music. You see, for me, it is not easy... and to listen to the Matthäus-Passion sounds so special because we are accused there of something very terrible but the music is, is such that you cannot, ah... you cannot withstand it.


엘리야킴 하에츠니 : 인류를 헤아릴 수 없이 풍요롭게 하는 음악의 가장 위대한 빛 중 다수가 독일인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래서 독일 음악에는 뭔가가 있는데, 아, 우리에게 제공하는 자연이 있으며... 독일 음악에는... 그리고 당신은 자연을 가꾸고, 대대로 당신의 본성 등등에 더 깊숙이 들어가죠. 예, 독일인과 유대인이... 아시다시피 음... 마스미딤, 학살한 자들과 학살당한 자들, 그리고 희생자들, 그들은 음악을 바탕으로 만납니다. 아시다시피 제게는 쉽지 않으며... 마태 수난곡을 듣는 것은 매우 특별한데, 왜냐하면 우리는 그곳에서 매우 끔찍한 뭔가에 대한 비난을 받지만, 음악은 비난을 견딜 수 없으니까요.


Tom Wesel: German music was a latecomer in the European concept. And yet, when it came, its first great master, Johann Sebastian Bach, was to become a point of reference by everything that followed. For many, the most universal, the most expressive and the most technically accomplished musician who ever lived. He was also the most mystical.


톰 베젤 : 독일 음악은 유럽 관념의 후발주자였습니다. 그러나 독일 음악이 생겨났을 때, 첫 번째 위대한 거장인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뒤따르는 모든 것의 기준점이 되었죠. 많은 사람에게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표현력이 풍부하며 기술적으로 가장 뛰어난 음악가입니다. 그는 가장 신비로운 사람이기도 했죠.


Alice Sommer: This is so like the bible. I would... I would compare Bach with bible. Their book of, of hu... hu... humanity and their music of humanity, the same language, actually. The same language.


알리스 좀머 : 이것은 마치 성경과 같아요. 저는... 바흐를 성경과 비교할 거예요. 인류에 관한 그들의 책과 인류에 관한 그들의 음악은 실제로 같은 언어입니다. 같은 언어죠.


[Music]


Alice Sommer: Beethoven and Mozart learned from him. He, he inspired all. All. So, he is, say... he is, say, inventor. He’s source of this beauty.


알리스 좀머 : 베토벤과 모차르트는 그의 음악에서 배웠습니다. 그는 모두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모두에게요. 그래서 그는 말하자면... 그는 발명가입니다. 그는 이 아름다움의 근원이죠.


Tom Wesel: And so began the music that was to become a cornerstone of musical expression in the Western world for the next 200 years and more. The reasons are not far to seek. They lie in the work of a whole host of composers and performers from Bach to Schönberg, who built the German musical tradition.


톰 베젤 : 따라서 앞으로 200년 넘게 서구 세계에서 음악적 표현의 초석이 될 음악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독일 음악전통을 구축한 바흐부터 쇤베르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작곡가와 연주자들의 작품에 있죠.


[Music]


Tom Wesel: But the early years, from Bach to the Viennese classicism of Haydn, Mozart and Beethoven came to soon for the Jewish to participate. Because music was sustained by the church and the closed aristocratic circles from which the Jews were excluded.


톰 베젤 : 그러나 초기에는 바흐에서 빈 고전주의(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에 이르기까지 유대인들이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음악은 교회와 유대인들이 배제된, 폐쇄된 귀족 집단에 의해 유지되었기 때문이죠.


Pinchas Zukerman: So as foreigners, even though we had the passports, as foreigners, we were always put behind a state of... behind a little some sort of a wall. And therefore, in order to preserve identity and Jewish guide, we did basically three things. We made a lot of children. There were 8 to 10 children in every family. My father had 8 brothers and sisters. Ah, the religion played a huge factor. And I’m not just talking about Passover services, really learning the term with, understanding the nuances of the sentences, of all those mavens for many, many years before that put this down on as a way to follow. Uhm, and then, for entertainment, we played music. Because... we sang, there’s a lot of singing going on. And my struggle is tremendous amount of singing, the Passover, I think, took 4 times with more singing than eating. All kinds of songs.


핀커스 주커만 : 그래서 외국인으로서, 비록 우리가 여권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외국인으로서 우리는 항상 일종의... 벽 뒤에 있는 상태 뒤에 놓여 있었어요. 그래서 정체성과 유대인 입문서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기본적인 3가지를 했죠. 우리는 많은 아이를 낳았어요. 모든 가정에는 8~10명의 아이가 있었죠. 아버지에게는 8남매가 있었어요. 아, 종교가 큰 역할을 했죠. 그리고 저는 단지 유월절(이집트 탈출을 기념하는 유대인의 축제) 예배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며, 실제로 용어를 실제로 배우고 문장의 뉘앙스를 이해하며, 이것을 그 모든 전문가가 따라야 할 방식으로 여러 해 동안 여겼죠. 음, 그러고 나서 오락을 위해 우리는 음악을 연주했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노래를 불렀으므로, 많은 노래가 나왔죠. 그리고 저의 고군분투는 노래하는 양이 어마어마해서, 유월절은 먹는 것보다 노래하는 것이 4배나 더 걸렸던 것 같아요. 모든 종류의 노래가 있었죠.


Margaret Brearley: In the temple when solemnly instituted it, uhm, music was at the heart of the Wess’har. And when the temple was destroyed, the, ah... in 1870, uhm, from then on, within, ah, Judaism, there was never to be full music until the temple would be recreated. But the concept of music... music has, uhm, coming from God, music has being a consolation or joy, music has the one of the great, uhm, elements which would enhance a community, that concept remained very powerful. So as soon as the ghettos were opened, as soon as Jews were emancipated, it meant that, uhm, the, the, the concept and the love of music, which should be nurtured over so many generations, hundreds and thousands of years, could suddenly emerge and, and blossom as never before.


마거릿 브레얼리 : 성전에서 그것을 엄숙하게 제정했을 때, 음, 음악은 베스하르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원이 파괴되었을 때, 아... 1870년에, 음, 그때부터 내부, 아, 유대교에서는 사원이 재건될 때까지 완전한 음악이 없었어요. 그러나 음악의 개념은... 음악은, 음, 신에게서 나오고, 음악은 위안이나 기쁨을 주며, 음악은 공동체를 향상시킬 위대한 요소 중 하나를 가지고 있는데, 그 개념은 여전히 매우 강력합니다. 그래서 게토가 열리자마자, 유대인들이 해방되자마자, 음,,,, 수백, 수천 년에 걸쳐 길러져야 할 음악에 대한 개념과 사랑이 갑자기 나타나서 전에 없던 꽃을 피웁니다.


[Music]


Tom Wesel: But opportunities remained imminent. Legal emancipation was uneven in the German states. And it was only with the founding of the German Empire in 1871 that all Jews in Germany finally received full legal emancipation. Even then, the shadow persisted.


톰 베젤 : 그러나 기회는 임박했죠. 독일 국가에서는 법적 해방이 고르지 않았어요. 그리고 1871년 독일제국이 수립되면서 비로소 독일의 모든 유대인이 마침내 완전한 법적 해방을 얻게 되었는데요. 그때도 그림자는 여전했죠.


Pinchas Zukerman: We were foreign objects. When you’re foreign person in a land, ah, you wanna be better, you wanna achieve status, ah, economic status, individual statuses, somebody that’s recognize not just by the fact that, that Jewish or from a different... or look different, you wanna... you wanna be stand... you wanna stand out, and that’s what German music does, it makes you standout.


핀커스 주커만 : 우리는 이물질이었어요. 당신이 한 나라에서 외국인일 때, 아, 당신은 더 나아지고 싶고, 지위를 얻고 싶고, 아, 경제적 지위, 개인적 지위, 단지 그 사실만으로 인정되는 사람이 유대인이든 다른 나라 출신이든... 또는 다르게 보이고 싶고... 돋보이고 싶고, 그게 독일 음악이 하는 것이며, 당신을 돋보이게 해주죠.


Anita Lasker-Wallfisch: Jews are always in a minority... and regardless of where they are... are never really at home... And minorities which don’t feel entirely safe. Although, sadly... we felt far too safe in Germany. Where you are in a minority and not 100 percent certain... there is always this tendency to excel... to be at least as good as the people who live here. And quite by chance, you then become a little better. And that, of course, is our deadly sin.


아니타 라스커-발피쉬 : 유대인들은 항상 소수에 속하며...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결코 집에 있지 않죠... 그리고 소수는 완전히 안전하다고 느끼지 않죠. 슬프게도... 우리는 독일에서 너무나도 안전하다고 느꼈어요. 당신이 소수이고 100% 확실하지 않은 곳에서는... 항상 탁월해지려는 경향이 있는데... 적어도 여기에 사는 사람들만큼은 훌륭해요. 그리고 아주 우연히, 당신은 조금 나아질 거예요. 그리고 그것은 물론 우리의 치명적인 죄입니다.


Michael Haas: And in the eagerness, they basically were too good. They exceeded everybody else, they overtook everybody else, they dominated academia, they dominated the law, they dom... dominated science, they dominated medicine, they dominated the arts, uhm, and their, uhm, ambition was not to submerge German culture and Jewish culture, quite the opposite, their ambition was to contribute to German culture.


마이클 하스 : 그리고 열망에서 그들은 기본적으로 매우 좋았어요. 그들은 다른 모든 사람을 능가하고, 다른 모든 사람을 따라잡았고, 학계를 지배하고, 법을 지배하고... 과학을 지배하고, 의학을 지배하고, 예술을 지배했으며, 음, 그리고 그들의, 음, 그들의 야망은 독일 문화와 유대 문화를 침수시키지 않는 것이었는데, 정반대로 그들의 야망은 독일 문화에 기여하는 것이었죠.


[Music]


Tom Wesel: Assimilation proceeded surprisingly quickly despite developing antisemitism. And Germany soon became the most tolerant of the central European states, the Prussia, among the most liberate. And so, it’s no surprise that the first great German composer of Jewish origin was wealthy, Prussian and baptized into the Christian faith.


톰 베젤 : 반유대주의가 커졌음에도 흡수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독일은 곧 가장 자유로운 중부 유럽 국가 중 하나인 프로이센 중에서 가장 관대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유대계 최초의 위대한 독일 작곡가가 부유하고 프로이센인이었고 기독교 신앙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Music]


Tom Wesel: Felix Mendelssohn was born on the 3rd of February 1809 into a family which stands as a great emblem of the meeting of the German and Jewish spirits in the 19th Century. His grandfather, Moses Dessau, or Moses Mendelssohn as he came to call himself, was born in 1729 when J.S. Bach was 44 years old. He became a leading thinker of the enlightenment, a fighter for Jewish freedom and a powerful advocate of religious tolerance. He saw reason as the best hope for Jews and Germans alike.


톰 베젤 : 펠릭스 멘델스존은 1809년 2월 3일, 19세기 독일인과 유대교 정신의 만남의 위대한 상징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할아버지인 모제스 데사우는 자신이 스스로 모제스 멘델스존이라고 불렀는데, 1729년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44세였을 때 태어났죠. 그는 계몽사상가이자 유대인의 자유를 위한 투사이자 종교적 관용의 강력한 옹호자가 되었는데요. 그는 이성을 유대인과 독일인 모두에게 최고의 희망으로 보았죠.


[Music]


Tom Wesel: Moses Mendelssohn became a key figure in Jewish-German relations at the most critical period for Jewish emancipation in Germany, a founding father of the dream of fruitful, unproblematic assimilation of the Jews into German society. He was not loved by all because of the secularizing tendency of his thinking, but he was, without doubt, the most powerful voice calling for a synthesis of Jewishness and Germanness. His son, Abraham, converted to Christianity and became one of Berlin’s most successful bankers. He, in turn, baptized his own son, Felix, into the Lutheran Church in his 7th year.


톰 베젤 : 모제스 멘델스존은 유대인이 독일 사회에 유익하고 문제없이 동화되는 꿈의 창시자이자 독일에서 유대인 해방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유대인-독일인 관계의 핵심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상에 대한 세속화 경향 때문에 모두에게 사랑받지 못했지만, 의심의 여지 없이 유대인과 독일인의 통합을 요구하는 가장 강력한 목소리를 냈죠. 그의 아들 아브라함은 기독교로 개종하여 베를린에서 가장 성공한 은행가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결국 그의 아들 펠릭스에게 7세 때 루터교의 세례를 받게 했죠.


[Music]


Four years after baptizing his son, Abraham Mendelssohn confirmed his daughter, Fanny, into the Lutheran Church. He wrote her explaining his reasons. The outward form of religion with your teacher has given you is historical and like all human institutions subject to change. Thousands of years ago, the Jewish form was the dominant one, then, came the heathen and now it’s the Christian. Your mother and I, were born and brought up by our parents as Jews that we’ve been able to follow our divine instincts and conscience. We’ve educated you and your brothers and sisters in the Christian faith because it’s the faith of most civilized people, and contains nothing that can draw you away from what is good and much that guides you to love, obedience, tolerance and acceptance, even if it offered nothing but the example of its founder, understood by so few and followed by still fewer.


아들에게 침례교 세례를 받게 한 지 4년 후, 아브라함 멘델스존은 그의 딸인 파니를 루터교 교회로 승인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렇게 한 이유를 그녀에게 설명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당신의 스승이 당신에게 준 종교의 외적 형태는 역사적이며 모든 인간 제도와 마찬가지로 변할 수 있습니다. 수천 년 전에는 유대교 양식이 지배적이었고, 다음에는 이교도가 왔으며, 지금은 기독교인이 되었죠. 당신의 어머니와 저는 우리의 신성한 본능과 양심을 따를 수 있었던 유대인으로서 우리 부모님에 의해 출생하여 성장하였죠. 우리는 기독교 신앙 안에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형제자매들을 가르쳤는데,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은 대부분의 문명화된 사람들의 신앙이고 여러분을 사랑, 순종, 관용, 수용으로 인도하는 선한 것과 많은 것에서 여러분을 멀어지게 수 있는 어떤 것도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며, 비록 그것이 설립자의 모범 외에는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극소수의 사람들이 이해하며 더 적은 수의 사람들이 따랐습니다.


Tom Wesel: Felix accepted his father’s wishes with conviction, and at his request took the name Mendelssohn Bartholdy. His father insisting that a Christian composer with the name of Mendelssohn made no sense.


톰 베젤 : 펠릭스는 확신을 가지고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였으며, 그의 요청에 따라 멘델스존 바르톨디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멘델스존이라는 이름의 기독교 작곡가는 말이 안 된다고 주장했죠.


Leon Botstein: Mendelssohn was the most important Protestant composer of the 19th century. He was able to take the traditions of classicism and the baroque, and convert them into a romantic sensibility to reach a wide believing public in the Protestant Lutheran community. Mendelssohn relation discretion is very, very interesting. He viewed Protestantism to be the outgrowth of, of Judaism. So, Judaism was rendered obsolete. So, he was not, himself, caught by any kind of, uhm, self-approach by being Jewish. He was proud to have endured the modern world, the way we would abandon a typewriter for a computer. It was no insult to the typewriter, but the typewriter had just worn out its, its historical moment. It was an atrophied religion. And that was certainly a widely shared opinion in the first generation assimilation. That now, to modernize was no insult to this whole tradition, but its natural outgrowth was Protestantism which arrived most of the Mendelssohn religious music, whether its Lobgesang or Paulus, or Elijah, ah, uhm, are in fact, uhm, very focused on the... not the trinity so much, but on the continuity between a monotheistic, abstract, god of, of, of justice and humanity, and light and truth. Ah, so, it is, ah, in my view, a Judaising after from theology through music.


레온 보츠타인 : 멘델스존은 19세기의 가장 중요한 개신교 작곡가입니다. 그는 고전주의와 바로크의 전통을 취하고 낭만적인 감성으로 변환하여 개신교의 루터교 공동체에서 널리 믿는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었죠. 멘델스존 관계 재량은 매우 흥미로운데요. 그는 개신교를 유대교의 파생물로 보았죠. 따라서 유대교는 무용지물이 되었죠. 그래서 그는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어떤 종류의, 음, 자기 접근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죠. 그는 우리가 컴퓨터 때문에 타자기를 포기하는 것처럼 현대 세계를 견뎌온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죠. 타자기에 대한 모욕은 아니었지만, 타자기는 그 역사적인 순간을 닳아 버렸어요. 위축된 종교였죠. 그리고 그것은 확실히 1세대 동화(흡수)에서 널리 공유된 의견이었죠. 이제 현대화하는 것은 이 전체 전통에 대한 모욕이 아니라 그 자연스러운 파생물은 멘델스존 종교 음악 대부분에 도달한 개신교였는데... 교향곡 2번 <찬양의 노래>이든 또는 오라토리오 <사도 바울>이든 또는 <엘리야>이든, 사실 매우 집중되어 있는데... 삼위일체가 아니라 일신교적이고 추상적이며 정의와 인류의 신, 빛과 진리 사이의 연속성에 관한 것입니다. 아, 그래서, 아, 제 생각에는 신학에서 음악을 통한 유대교화입니다.


Help Lord! Help Lord! Wilt Thou quite destroy us? Help Lord!


주여, 주여. 주여 도와주옵소서. 주여, 주여.


Tom Wesel: Felix Mendelssohn Bartholdy soon became an acknowledged symbol of assimilation, and came to occupy a special place in the development of a specifically German musical culture, a culture in which music was seen as an expression of the very best in human nature, of humanity and light and truth. Music was taught to have a significance beyond racial creed, beyond what could be expressed in words and so, beyond what could be tainted by words. Above all, music was understood to have an implicitly spiritual context, a conviction powerfully reinforced when Mendelssohn rescued Bach’s St. Matthew Passion from a hundred years in the dark. And then, became widely identified with it.


톰 베젤 :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는 곧 동화(흡수)의 인정받는 상징이 되었고, 특히 독일 음악 문화, 즉 음악이 인간의 본성, 인간성, 빛과 진실의 가장 좋은 표현으로 여겨지는 문화의 발전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음악은 인종적 신념을 넘어서,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 그래서 말로 더럽혀질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의미가 있다고 알려줬죠. 무엇보다도 음악은 멘델스존이 100년 동안의 암흑 속에서 바흐의 <마태 수난곡>을 발굴해냈을 때 강력하게 강화된 확신인, 암시적으로 영적인 맥락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죠. 그러고 나서 그것과 함께 널리 동일시되었죠.


Eduard Devrient, a close friend of Mendelssohn took the part of Jesus in their first performance of the St. Matthew Passion, recalls an incident in the opera square in Berlin, “We discussed the wonderful coincidence at exactly 100 years must have passed between the last live seen performance, and when does ‘St. Matthew Passion’ would again see the light of day and great feelings exuberantly. Suddenly, stopping in the middle of the opera square, that it should a comedian and a Jew boy who restored to the world the greatest Christian music. Felix usually refused repressively to refer to his Jewish origins. From this occasion, he was carried away by the happy mood, the striking nature, his observation.”


멘델스존의 절친한 친구인 에두아르트 데브리엔트는 <마태 수난곡>의 첫 공연에서 예술의 역할을 맡았는데, 베를린의 오페라 광장에서 있었던 사건을 다음과 같이 회상합니다. “우리는 정확히 100년 만에 마지막 실황으로 볼 수 있는 공연과 ‘마태 수난곡’이 언제 다시 빛을 발하고 위대한 감정을 활기차게 보일 것인지 그 사이의 놀라운 우연의 일치에 대해 논의했어요. 갑자기 오페라 광장 한가운데에 멈춰 섰는데, 희극인이자 유대인 소년이 세계에 가장 위대한 기독교 음악을 되살린 것이죠. 펠릭스는 일반적으로 자신의 유대인 혈통을 언급하는 것을 억압적으로 거부했는데요. 이때부터 그는 행복한 기분, 놀라운 자연, 관찰력에 사로잡혔죠.”


[Music]


Tom Wesel: Mendelssohn’s reticence about his origins was characteristic of many converted Jews who despite persistent antisemitism felt more German than Jewish.


톰 베젤 : 멘델스존이 자신의 혈통에 대해 과묵한 것은 지속적인 반유대주의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보다 독일인을 더 많이 느끼는 개종한 많은 유대인의 특징이었죠.


Samuel Adler: You know, they never believe, my grandfather who comes from a little to... who came from a little town in Bavaria, they could trace their ancestry back to almost 600 years in this little town, 8 brothers were together in the First World War, all received the Iron Cross. ‘Of course, they don’t mean me. They mean the other Jews... but me? I am German first and a Jew only second.’


사무엘 아들러 : 아시다시피 그들은 결코 믿지 않았는데, 제 할아버지는 약간... 바이에른의 작은 마을 출신인 그들은 이 작은 마을에서 거의 600년 동안 조상을 추적할 수 있었는데, 1차 세계 대전에 8형제가 함께 있었고 모두 철십자훈장(1813년 제정된 프러시아 무공훈장)을 받았어요. ‘물론 그들이 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다른 유대인들을 의미하는데... 저를 제외하고? 저는 첫 번째로 독일인이고 두 번째로 유대인입니다.’


Hellmut Stern: But to come back to Germany... the so-called German music – by all means let’s use that term – was for the German Jews – I am talking specifically of the German Jews, from whom I come – a very important point on assimilation. This was also part of wanting to be absorbed into German society. The so-called symbiosis... of Moses Mendelssohn and Lessing... and other representatives... of the Enlightenment. And that was achieved... by the German Jews – not just 100%, but 1,000%. And precisely that was the reason for their downfall later. Because this symbiosis only took place in our heads... not in the heads of the other Germans.


헬무트 슈테른 : 하지만 다시 독일로 돌아와서... 소위 독일 음악 – 꼭 그 용어를 사용하자면 – 독일계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었죠. – 저는 특별히 제가 속한 독일계 유대인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동화(흡수)에 대한 매우 중요한 점입니다. 이것은 또한 독일 사회에 흡수되고 싶은 마음의 일부였죠. 이른바 모제스 멘델스존과 레싱의 공생... 그리고 계몽주의의 다른 대표자들... 그리고 독일계 유대인들에 의해 100%가 아닌 1,000% 달성되었죠. 그리고 그것은 나중에 그들이 몰락한 이유였는데요. 이 공생은 다른 독일인들의 머리가 아니라... 우리의 머릿속에서만 일어났으니까요.


Tom Wesel: Moses Mendelssohn dreamed of assimilation. Nevertheless, remained a long time both vital and relatively untroubled despite growing antisemitism. Until Germany produced the revolutionary spirit in the form of Richard Wagner, who set alight in number of flies that are still born to this day. Among them, an essay first published in 1850 under the suit of Karl Freigedank, freethinker. That is the most aggressively antisemitic track in the history of German music.


톰 베젤 : 모제스 멘델스존은 동화(흡수)를 꿈꿨어요. 그런데도 반유대주의가 커짐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중요하면서도 상대적으로 곤란한 문제가 되지 않았죠. 독일이 오늘날에도 태어나는 무수한 파리떼에 불붙인 리하르트 바그너의 형식으로 혁명 정신을 만들어낼 때까지요. 그중 1850년 자유 사상가인 카를 프라이게당크가 모은 에세이가 처음 출판되었죠. 그것은 독일 음악 역사상 가장 공격적으로 반유대주의적인 방향입니다.


[Music]


The Jews in Music by Karl Freigedank


카를 프라이게당크의 음악에 나오는 유대인들


[Music]


Tom Wesel: Antisemitism was in the air but this text was written by an artist who’s music and who’s interest had come to stay. Richard Wagner articulated and gave weight to a new face of antisemitism based not on religious document but on social, aesthetic and artistic criteria.


톰 베젤 : 반유대주의가 만연했지만, 이 가사는 음악을 하고 관심을 갖게 된 아티스트가 쓴 것입니다. 리하르트 바그너는 종교적 문서가 아니라 사회적, 미학적, 예술적 기준에 근거하여 반유대주의의 새로운 면모를 분명히 표현하고 강조했죠.


The Jew never had an art of his own and, consequently, never lived a life with any substance capable of sustaining art... Anything which sprouts from the Jews’ undertaking to create art must therefore necessarily embody the characteristics of coldness, indifference, even triviality and absurdity. Historically, we must describe the Jewish era in modern music as one of complete unproductivity.


유대인은 자신의 예술을 가진 적이 없으며, 결과적으로 예술을 지탱할 수 있는 어떤 물질로도 삶을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술을 창조하려는 유대인들의 노력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냉정함, 무관심, 심지어 사소함과 부조리의 특성을 구현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현대 음악의 유대인 시대를 완전한 비생산적 시대로 묘사해야 합니다.


Leon Botstein: With the rise of German nationalism, an antisemitic movement was well underway. Wagner articulated it and gave it special twists, but he wasn’t original. What he did was, to make it really powerful. It was an excellent attrition. The great essay on Jewish music is, ah, fabulously brilliant essay, perverse but it’s brilliant. And therefore, he was able when he issued its first anonymously in 1850, he was able actually to capitalize on something people were saying, he didn’t invent this.


레온 보츠타인 : 독일 민족주의의 부상과 함께 반유대주의 운동이 잘 진행되고 있었는데요. 바그너는 그것을 분명히 표현하면서도 특별한 왜곡을 가했지만, 그는 독창적이지 않았죠. 그가 한 일은 그것을 정말 강력하게 만드는 것이었죠. 훌륭한 소모였죠. 유대인의 음악에 대한 위대한 에세이는, 아, 놀랍도록 훌륭한 에세이이며, 삐딱하지만 훌륭해요. 따라서 그가 1850년에 익명으로 첫 번째 책을 발행했을 때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실제로 활용할 수 있었는데, 그는 이것을 발명한 것이 아닙니다.


Norman Lebrecht: Wagner was a prophet of German nationalism quite openly, quite consciously. Ah, he admired Bismarck. He saw himself as parallel to Bismarck. He exchanged letters with Bismarck as per diem because they were both working towards the same end, they were both creating a greater Germany. But involving this might, the greater German art could only be creative by removing those things that had formed him, those impurities as he put it, that have formed him, those Jewish elements. So, in that respect, regardless of each value result, Wagner’s music is quite essentially antisemitic.


노먼 레브레히트 : 바그너는 아주 공개적으로, 아주 의식적으로 독일 민족주의의 예언자였어요. 아, 그는 비스마르크를 존경했죠. 그는 자신이 비스마르크와 평행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비스마르크가 같은 목적을 위해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매일 비스마르크와 편지를 교환했으며 둘 다 더 큰 독일을 만들고 있었죠. 그러나 이러한 힘과 관련하여 더 큰 독일 예술은 그를 형성한 것들, 그가 말했듯이 그를 형성한 불순물, 유대인의 요소들을 제거함으로써만 창의적일 수 있었죠. 그런 점에서 각각의 가치 결과와 상관없이 바그너의 음악은 본질적으로 반유대주의적입니다.


Daniel Barenboim: Look, Wagner had very specific re... ideas about sound and about music expression. It so happens that many of the Jews who were musicians around the time were of a different idea therefore, Wagner’s antisemitism, if you want, is also artistic. Wagner hated the lightness of music of Mendelssohn. Instead of saying, Wagner’s mistake is not to see that Mendelssohn was about composer because he was Jewish. This is the fascistic element. Wagner should have said, Wag... ah, Mendelssohn for me is no music because it lacks this, this, this and this. This is the part of it.


다니엘 바렌보임 : 보세요, 바그너는 소리와 음악 표현에 대해... 매우 구체적인 아이디어들을 가지고 있었어요. 당시 음악가였던 많은 유대인은 생각이 달랐으므로 바그너의 반유대주의도 예술적이죠. 바그너는 멘델스존의 음악의 가벼움을 싫어했어요. 말하는 대신에 바그너의 실수는 멘델스존이 유대인이므로 작곡가에 관한 것이라고 보지 않은 것이죠. 이것이 파시즘의 요소입니다. 바그너는, 바그... 아, 제게 멘델스존은 이것, 이것, 이것, 이것이 부족하므로 음악이 아니라고 말했어야 했죠. 이것은 그것의 일부입니다.


Leon Botstein: But Wagner already puts a match into a room filled with kerosene. And that kerosene began to spill very aggressively in the early 19th century, particularly after Battle of Vienna. But remember the German Jews, or Jews in Europe were extremely ambivalent, if not supportive to Napoleon Bonaparte. Because Napoleon Bonaparte was viewed as philosemitic. So Napoleon became kind of Jewish hero, but Napoleon then became the arch enemy of Germany, of England and of the sense of national self-realization. So, the issues of 18th century nationalism caught the Jews in a very complex situation. In addition, Karl Marx wrote the other very important as of antisemitism in which he made the Jew as the ultimate capitalist. The Jew became the instrument of the destruction of a traditional world order, a rule world order, a world of family values, of all of these sort of right-wing rhetoric cosmopolitanism uprooted sort of high-minded abstract intellectualizing as opposed to a kind of, ah, brute and broaden sense of cultural identify, all of these works hand in glove. And Wagner exploits it shamelessly.


레온 보츠타인 : 그러나 바그너는 이미 등유로 가득 찬 방에 성냥을 놓았죠. 그리고 그 등유는 19세기 초, 특히 비엔나 전투 이후에 매우 공격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했죠. 그러나 독일의 유대인들, 즉 유럽의 유대인들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지지하지 않더라도 극도로 애증이 엇갈렸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철학자로 여겨졌기 때문이죠. 그래서 나폴레옹은 일종의 유대인의 영웅이 되었지만, 독일과 영국의 민족적 자아실현의 최대의 적이 되었죠. 그래서 18세기 민족주의의 문제는 유대인들을 매우 복잡한 상황에 빠뜨렸죠. 또한, 카를 마르크스는 유대인을 궁극적 자본가로 만든 반유대주의로서 매우 중요한 또 다른 글을 썼죠. 유대인은 전통적인 세계 질서, 규칙 세계 질서, 가족 가치의 세계, 이러한 모든 종류의 우익 미사여구의 세계주의를 뿌리 뽑은 일종의 고상한 추상적 지식화의 파괴 도구가 되었는데, 아, 무자비하고 문화적 정체성의 의미를 넓히는 이 모든 작품은 한통속이죠. 그리고 바그너는 그것을 뻔뻔하게 이용합니다.


Daniel Barenboim: I think also that, ah, ah, I mean, Wagner’s, ah, level of antisemitism was also very low. It wa... was a combination of, of so many things, a combination of jealousy, combination of another attitude to, to music. Ah, ah, I mean, of course, you cannot play the, ah, ah, the very Italian Symphony of Mendelssohn like you play the first act regarding both pieces of short notes, and this is a complete different world. Now, is this Jewish or not? I don’t know. This was just, ah, stupid, ah, ah, adjective. I mean, antisemitism no matter how intellectual it is remains a very basic and stupid trait because it is generalization.


다니엘 바렌보임 : 저도 아, 아, 바그너의, 아, 반유대주의의 수준도 매우 낮았다고 생각해요. 그건... 질투의 조합, 음악에 대한 또 다른 태도의 조합이었죠. 아, 아, 물론, 아, 아, 멘델스존의 바로 그 매우 이탈리아적인 교향곡을 당신처럼 연주할 수는 없는데, 두 개의 짧은 음표에 관한 첫 번째 막을 연주하는 것과 이것은 완전히 다른 세계입니다. 자, 이것은 유대인의 것인가요, 아니면 아닌가요? 모르겠어요. 이것은 단지, 아, 어리석은, 아, 아, 형용사였군요. 제 말은, 반유대주의는 그것이 아무리 지적인 것이라도 일반화이기 때문에 매우 기본적이고 어리석은 특성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죠.


Tom Wesel: And yet, for all its stupidity and banality, the idea of antisemitism dominated Richard Wagner’s mind as a mythical explanation of everything that he hated. And there was much that Richard Wagner hated. In Wagner’s mind, the opposition is not only between the German and Jewish spirits, his reaction is also against modernity. He hated what he saw as a dissolution of the organic links in society, the rise of empty individualism and the effect of industrialization. And because he sees this as abstract and impersonal forces, Wagner needs the Jew to give them identifiable features. And he coins the term for jutting Judaization, a concept that had been waiting for a name. The Jew becomes the scapegoat. More than that, the Jew is not merely the figure which embodies all that is disintegrated in modernity, but striving force. Money is the force behind the demonic spirit of manufacturer, and Jew controls money. The Jew is the personification of the economic principle and the art of vacuous entertainment. In particular, the grand opera of Mia Bella that was to be swept away by Wagner’s new music drama.


톰 베젤 : 그러나 그 모든 어리석음과 진부함에도 불구하고 반유대주의의 관념은 리하르트 바그너가 미워하는 모든 것에 대한 신화적인 설명으로서 그의 마음을 지배했죠. 그리고 리하르트 바그너가 싫어했던 것이 많이 있었어요. 바그너의 생각에 반대는 독일인의 정신과 유대인의 정신 사이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반응도 근대성에 반대하는 것이죠. 그는 사회의 유기적 연결의 해체, 공허한 개인주의의 부상, 산업화의 영향으로 본 것을 싫어했어요. 그리고 바그너는 이것을 추상적이고 인간미 없는 힘으로 보기 때문에 그는 유대인에게 식별 가능한 특징들을 부여해야 하죠. 그리고 그는 이름을 기다리고 있던 개념인 돌출된 유대화라는 용어를 만들었죠. 유대인은 희생양이 됩니다. 게다가 유대인은 근대성 속에서 와해된 모든 것을 형상화한 인물일 뿐만 아니라 투쟁하는 힘입니다. 돈은 제조업자의 악마 같은 영혼 뒤에 있는 힘이며, 유대인이 돈을 통제합니다. 유대인은 경제 원칙과 공허한 오락의 기술의 의인화입니다. 특히 바그너의 신작 음악극에 휩쓸리게 된 미아 벨라(나의 아름다운 여인)의 대 오페라가 그렇죠.


[Music]


Honour your German Masters. You will invoke good spirits and if you heed them even though the Holy Roman Empire dissolve in mist there will remain our sacred German art.


독일의 주인님들이시여. 당신들은 좋은 영혼을 불러낼 것이며 신성 로마 제국이 안개 속으로 사라지더라도 거기에 주의를 기울이면 우리의 신성한 독일 예술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Music]


Richard Wagner’s Bayreuth Festival Opera House


리하르트 바그너의 바이로이트 축제 오페라 극장


Margaret Brearley: And one of the consequences of the whole Bayreuth enterprise, the publications around Parsifal Bayreuther Blätter and, uh, Wagner’s essays of the late 1870s, early 1880s, one of the consequences of all those was a new version of Christianity called German Christianity, promoted by Hans von Wolzogen, the editor of the Bayreuther Blätter, close friend of Wagner. And this German Christianity drew on Wagner’s writings and on Parsifal, and promoted an Aryan Jesus, rejected Jewish teachings, rejected Jewish ethics, above all, rejected the Hebrew Scriptures, and, ah, promoted a kind of dynamism, strengths, uhm, ultra German right-wing nationalism and provided a raise (inaudible), ah, into which Hitler could later plant Nazism.


마거릿 브레얼리 : 그리고 전체 바이로이트의 결과 중 하나는 오페라 <파르지팔> 주변의 출판물들과 <바이로이터 블래터>와의 상호작용이고, 아, 1870년대 후반과 1880년대 바그너의 에세이들에 관한 출판물들과의 상호작용이며, 그 모든 것의 결과 중 하나는 바그너의 절친한 친구인 <바이로이터 블래터>의 편집자 한스 파울 폴초겐이 장려한 독일 기독교라고 불리는 기독교의 새로운 버전이었죠. 그리고 이 독일 기독교는 바그너가 쓴 곡들과 오페라 <파르지팔>에 근거하여 (특히 독일 나치당에서 주장한) 비유대계 코카소이드인(아리아인) 예수를 선전하고 유대교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유대인의 윤리를 거부했고 무엇보다도 히브리어 성경을 거부했으며 아, 일종의 역동성, 강점, 음, 극단적인 독일성을 장려했는데, 우익 민족주의와 히틀러가 나중에 나치즘을 심을 수 있는 인상(들리지 않음)을 제공했어요.


Did Wagner’s texts have any direct influence of Hitler’s political consciousness?


바그너의 텍스트가 히틀러의 정치적 의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나요?


Norman Lebrecht: No question at all. Not just on... not just... not just on Hitler’s consciousness, on the consciousness... not just on Hitler’s consciousness, on the consciousness of evolutionary German right-wing nationalism. I mean, Wagner’s idea of anti-Semitism was in the sense of, ah, an anticipation of Karl Lueger’s “Wer ein Jud’ ist, bestimme ich”. He would decide who was Jewish and if Hermann Levi was useful to him as a conductor then, for the purposes of his conducting, Hermann Levi ceased to be Jewish, even though his father was a Rabbi. Uhm, ah, ah, so it was... it was an illogical and, and, and ah, not a political uti... or totalitarian antisemitism but, ah, it was undoubtedly a legitimization of a secular antisemitism, which is something that had not existed in Europe. Before, we had clerical antisemitism. We had 2,000 years of the church preaching that the Jews had killed Christ, and the Jews where therefore anathema, pariahs and so forth. Wagner was a founding influence in the philosophy of secular nationalist antisemitism, and therein lies the danger.


노먼 레브레히트 : 의문의 여지가 전혀 없어요. 단지... 그저.... 히틀러의 의식, 의식... 히틀러의 의식, 진화론적 독일 우익 민족주의에 대한 의식에 대해서만이 아니거든요. 제 말은, 바그너의 반유대주의 사상은, 아, 카를 뤼거의 <누가 유대인인지는 내가 정한다>에 대한 기대의 의미였어요. 그는 누가 유대인인지 결정할 것이고, 헤르만 레비가 지휘자로서 그에게 유용했다면, 그의 아버지가 랍비임에도 불구하고 헤르만 레비는 그의 지휘를 우해 더 이상 유대인이 아니었죠. 음, 아, 아, 그랬어요... 그건 비논리적이고, 그리고, 아, 정치적 목적이... 또는 전체주의적 반유대주의가 아니었지만, 아, 의심할 여지 없이 세속적 반유대주의의 정당화였는데, 유럽에 존재하지 않았죠. 이전에는 성직자의 반유대주의가 있었거든요. 우리는 교회에서 2,000년 동안 유대인이 예수를 죽였다고 설교했고, 따라서 유대인들이 아주 혐오하는 것, 버림받은 사람들을 죽였다고 설교했는데요. 바그너는 세속적 민족주의적 반유대주의 철학에 기초적인 영향을 미쳤고, 그 안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죠.


Margaret Brearley: Hitler himself said that whoever wishes to understand National Socialism must read Wagner’s political writings. He also, uhm, said that, uhm, he had built up the foundations of his own religion on Wagner’s Parsifal. Those are two very important statements.


마거릿 브레얼리 : 히틀러 자신도 민족주의를 이해하려면 바그너의 정치적으로 쓴 것을 읽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한 음, 음, 그는 바그너의 파르지팔에 그 자신의 종교의 기초를 세웠다고 말했죠. 그 두 가지는 매우 중요한 진술입니다.


Norman Lebrecht: Of course, what a composer thinks is important, and Wagner would have been the first to say that what he thought was more important than what he composed. He wanted to be seen as a philosopher and a liberator.


노먼 레브레히트 : 물론 작곡가가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중요하고, 바그너는 자신이 작곡한 것보다 생각한 것이 더 중요하다고 먼저 말했을 것입니다. 그는 철학자이자 해방자로 보이길 원했죠.


Tom Wesel: And so there was much in Richard Wagner for the Third Reich to draw on, because there is no composer in the history of German music, who commented more extensively, or more energetically on his work and the ideas behind it than did Richard Wagner. His artistic production aims expressly and programmatically at nothing less than a redemption of mankind from the degeneracy of the times by revival of an older, better world and in the belief that the highest purpose of mankind is artistic.


톰 베젤 : 그래서 제3제국(1933~1945년 사이, 히틀러 치하의 독일)이 의지하는 대상과 일치하는 리하르트 바그너가 있었는데, 왜냐하면 독일 음악 역사상 리하르트 바그너보다 그의 작품과 그 이면에 있는 아이디어에 대해 더 광범위하고 열정적으로 논평한 작곡가는 없었기 때문이죠. 그의 예술적 작품은 더 오래되고 더 나은 세상의 부흥과 인류 최고의 목적이 예술적이라는 신념에 의해 시대의 타락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는 것 이상을 명시적이면서도 계획적으로 지향합니다.


The theater is the most comprehensive and the most influential of all artistic institutions. Art, eternally youthful and always able to refresh itself from the noblest spirits of its time, is better equipped than any senile religion or incapable government, to steer the turbulent currents of society towards their greatest and noblest goal – the goal of true humanity. It may be claimed that when religion becomes artificial, it falls to art to salvage the essence of religion. Without a revolution in society art will be unable to find its way back to its true essence, Richard Wagner.


극장은 모든 예술 기관 중 가장 포괄적이고 가장 영향력 있는 기관입니다. 영원히 젊고 항상 그 시대의 가장 고귀한 정신으로부터 그 자체를 새롭게 할 수 있는 예술은 노쇠한 종교나 무능한 정부보다 사회의 격동의 흐름을 가장 위대하고 가장 고귀한 목표, 즉 진정한 인간성이라는 목표를 향해 조종할 수 있는 장비를 더 잘 갖추고 있죠. 종교가 인위적으로 되었을 때, 종교의 본질을 살리는 것은 예술에 떨어진다고 할 수 있는데요. 사회의 혁명 없이 예술은 진정한 본질인 리하르트 바그너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Music]


Tom Wesel: In his obsession with redemption, Wagner sees a redeemed, revolutionized world as a de-Judaized humanity. And he concludes his essay on the Jews and music with the thought that the only salvation for the Jewish mind lies in annihilation. But Wagner does not specify what form the destruction should take, and a highly-charged debate about his intentions continues to this day. As does the debate about whether Wagner’s music should be performed in Israel at all.


톰 베젤 : 구속에 대한 집착에서 바그너는 구속된 혁신을 일으킨 세계를 탈 유대화 인류로 봅니다. 그리고 그는 유대인의 정신의 유일한 구원은 절멸에 있다는 생각으로 유대인과 음악에 대한 에세이를 마무리합니다. 그러나 바그너는 어떤 형태의 파괴를 취해야 하는지 명시하지 않았으며, 그의 의도에 대한 격렬한 논쟁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바그너의 음악이 이스라엘에서 연주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도 마찬가지입니다.


Uri Toeplitz, member of the Israel Philharmonic Orchestra for 34 years: Of course we knew his famous essay, ‘The Jews in Music’... which ends with the words, ‘The solution is annihilation’... but we tried to disguise it. We said that, of course he doesn’t mean destruction. He means that the Jews should be baptised... or something of the kind. We tried to get around it. Today, I believe that it is a kind of code-word and that he really did mean destruction. In any case that is how it worked on Hitler, Wagner was the spiritual influence on Hitler. That is why the ban on Wagner here in Israel is ever stronger. The more we see that Wagner really was, he was political and his ideas were monstrous.


우리 토에플리츠 (34년 동안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 : 물론 우리는 그의 유명한 에세이 <음악 속 유대인들>이... ‘해법은 전멸’이라는 말로 끝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위장하려고 했어요. 우리는 물론 그가 파괴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했죠. 그는 유대인들이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또는 그런 종류의 것이죠. 우리는 그것을 해결하려고 노력했어요. 오늘날 저는 그것이 일종의 암호 용어이며 그가 실제로 파괴를 의미했다고 믿는데요. 어쨌든 그것이 히틀러에게 어떻게 작용했는지, 바그너는 히틀러에게 영적 영향을 미쳤죠. 그것이 바로 여기 이스라엘에서 바그너에 대한 금지령이 더욱 강화된 이유입니다. 바그너가 실제로 그랬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그는 정치적이었고 그의 아이디어는 기괴했어요.


Richard Wagner ‘The Siegfried Idyll’


리하르트 바그너 <지크프리트 목가>


Tom Wesel: The 27th of October 2000, the Performing Arts Center in Rishon LeZion in Israel. This is the first programmed performance of a Wagner work by an official Israeli orchestra, since the Nazi Krystalnacht in 1938.


톰 베젤 : 2000년 10월 27일, 이스라엘 리숀레지온에 있는 공연예술센터. 이것은 1938년 나치 <수정의 밤>(나치스 돌격대와 독일인들이 유대인 상점과 시나고그를 공격한 사건) 이후 공식적인 이스라엘 오케스트라의 바그너 작품의 첫 프로그램 공연입니다.


[Music]


Ehud Gross, Director General of Israel Symphony Orchestra: The fact that, ah, Hitler adapted, ah, Wagner as, ah, ideologist of the Nazism doesn’t mean that he was the ideologist of the Nazism. And I think that in a way, when we, ah, play Wagner, we say to the Nazism, ah, you don’t own the music of Wagner. Maybe your, your own demand, but you don’t own his music.


에후드 그로스 (이스라엘 심포니 오케스트라 총감독) : 아, 히틀러가, 아, 바그너를 나치즘의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그가 나치즘의 이데올로기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 우리가 바그너를 연주할 때 우리는 나치즘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데, 아, 당신은 바그너의 음악을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쩌면 당신 자신의 요구 사항일 수도 있지만, 당신은 그의 음악을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Meir Nitzan (Mayor of Rishon LeZion): We’ll never forget and we’ll never forgive what the Nazis did to our people. But there’s still relation to the... to Wagner music. I, I don’t know, understand it. No one... no one contact between them. Please, hold them, uhm, ah, apart. Don’t connect them.


메이르 니찬 (리숀레지온 시장) : 우리는 나치가 우리 국민에게 한 일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며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바그너 음악과 관련이 있습니다. 모르지만 이해합니다. 아무도... 그들 사이에 아무도 연락하지 않습니다. 제발, 그들을 붙드세요, 음, 아, 떨어지세요. 그들과 연결하지 마세요.


[Music]


Yirmiyahu Yovel: Part of the reason that many Israelis or Jews still have a resistance to Wagner is not only because of the suffering of the people from the camps who we want to respect... I am, by the way, for the normalization of Wagner, I have been for 30 years for playing Wagner here. But I understand the resistance, and part of the resistance is that people feel here that Wagner has not been normalized over that, that Wagner is still worshiped rather that played. We play Mozart to enjoy Mozart, we played Beethoven, we, we, we go deeply into what he has to convey to us. But nobody worships, uhm, a musician as Wagner has worshiped then. And he seems to me that, ah, to worship Wagner has worshiped then. And he seems to me that, ah, to worship Wagner with everything that goes on with Wagner is an abomination, you cannot do that. Israelis and Jews, perhaps, ah, beyond Israel has not come to terms yet, in the normal ways. It was the phenomenon Wagner.


이르미야후 요벨 : 많은 이스라엘인이나 유대인이 여전히 바그너에 대해 저항하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중요시하고 싶은 수용소 사람들의 고통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런데 저는 바그너의 정상화를 위해 여기에서 바그너를 들려준 지 30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항을 이해하고 저항의 일부는 사람들이 여기에서 바그너가 그것에 대해 정상화되지 않았으며, 바그너가 연주되기보다는 여전히 숭배되고 있다고 느낀다는 것이죠. 우리는 모차르트를 즐기기 위해 모차르트를 연주하고, 베토벤을 연주했으며, 그가 우리에게 전달해야 할 것에 대해 깊이 들어가죠. 그러나 아무도 바그너가 숭배했던 것처럼 음악가를 숭배하지 않아요. 그리고 제게 그는, 바그너가 그때 숭배했던 것을 숭배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는 제게 아, 바그너와 관련된 모든 것으로 바그너를 숭배하는 것은 혐오스러운 것이며,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이스라엘인들과 유대인들, 아마도, 아, 이스라엘 너머에 있는 사람들은 아직 정상적인 방법으로 합의에 이르지 못했죠. 바그너 현상이었어요.


Please let the music be heard. Thank you.


음악을 들려주세요. 감사합니다.


Yirmiyahu Yovel: But everybody believes that the German have, and I believe they have not either.


이르미야후 요벨 : 그러나 모든 사람은 독일인이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고, 저는 그들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해요.


[Music]


Yirmiyahu Yovel: But I understand the resistance, Bayreuth was established by Wagner, and not only as a place of music but as a shrine. And he had this idea of putting together art and politics, music as a messenger and as a... as a full mentor of more than purely aesthetic and including political and social, ah, passion. This is how Bayreuth developed and degenerated into, into a shri... of music and shrine of politics.


이르미야후 요벨 : 그러나 저는 저항을 이해하는데, 바이로이트(오페라 극장)는 바그너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음악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성지였죠. 그리고 그는 예술과 정치, 음악을 메신저로... 그리고 순수하게 미학적인 것 이상으로 정치적, 사회적, 아, 열정을 포함하는 완전한 멘토로 결합하려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죠. 이것이 바이로이트가 성... 음악과 정치의 성지로 발전하고 타락한 방식입니다.


[Music]


The Post Office withdraws telephone lines from Jews.


우체국은 유대인들에게서 전화선 사용을 정지시킵니다. - 1940년 7월 29일


Tom Wesel: And so the debated continues, and the association of Richard Wagner with the Third Reich resists.


톰 베젤 : 그래서 논쟁은 계속되고 리하르트 바그너와 제3제국의 연합은 저항합니다.


Jews are banned from using public telephones.


유대인들은 공중전화 사용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 1941년 12월 21일


Tom Wesel: Wagner worked politics and racism into music, and something changed in the world.


톰 베젤 : 바그너는 정치와 인종차별을 음악으로 바꾸었으며, 세상에서 뭔가가 변했죠.


Jews must hand over jewelry of gold, silver, platinum and pearls.


유대인들은 황금, 은, 백금, 진주로 만든 장신구를 넘겨줘야 합니다. - 1939년 2월 21일


Tom Wesel: The Nazis then institutionalized racial hatred in a matter and to a degree, but until the Third Reich was unimagined.


톰 베젤 : 그런 다음 나치는 제3제국이 상상도 할 수 없을 때까지 어느 정도 인종적 증오를 제도화했죠.


Jews are banned from choral societies.


유대인들은 합창단에서 금지됩니다. - 1933년 8월 16일


Tom Wesel: The world change again, and the change called into question, fundamental beliefs about art, about religion and about humanity itself. The dream of unproblematic assimilation had shattered. In the words of Rabbi Leo Baeck, a survivor of Theresienstadt concentration camp, “For us Jews from Germany, an historical epoch has come to an end, such an epoch ends whenever a hope, a belief, a trust has finally to be buried. Our belief was that the German and Jewish spirits could meet on German soil, and through their marriage become a blessing. That was an illusion. The Jewish epoch in Germany is over once and for all.”


톰 베젤 : 세상은 다시 변하고, 그 변화는 예술, 종교, 인류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믿음에 의문을 제기했죠. 문제없는 동화(흡수)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죠. 테레지엔슈타트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랍비 레오 백의 말에 따르면, “독일 출신의 우리 유대인들에게 역사적 시대는 끝났고, 희망, 믿음, 신뢰가 마침내 묻힐 때마다 그러한 시대는 끝납니다. 우리는 독일인과 유대인의 영혼이 독일 땅에서 만나 그들의 결혼을 통해 축복이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은 환상이었습니다. 독일의 유대인 시대는 단번에 끝났습니다.”


Doctorates denied to Jews.


박사 학위는 유대인들에게 거부되었습니다. - 1937년 4월 15일


[Music]


Jews banned from emigration.


유대인들은 이주가 금지되었습니다. - 1941년 10월 23일


[Music]


Enforced retirement for postal workers married to Jewesses.


유대인 여자들과 결혼한 우체부들은 강제 퇴직을 당했습니다. - 1937년 6월 8일


[Music]


The time has come. I have to leave tomorrow and, of course, I find it hard. I will write to you before deportation.


시간이 왔습니다. 저는 내일 떠나야 하고, 물론 힘든데요. 추방되기 전에 편지를 쓸게요. - 1942년 1월 16일


[Music]


Alice Sommer: I was happy to be allowed to stay because my mother was there. She was already old. Then they took her away. That was the lowest point of my life. A woman of 72... with a rucksack on her back. Alone – my father had already died. She was alone. A black curtain came down in front of my eyes. It was terrible.


알리스 좀머 : 어머니가 계셔서 머물 수 있어서 기뻤어요. 이미 늙으셨죠. 그런 다음 그들은 어머니를 데려갔어요. 그게 제 인생에서 최악의 상태였죠. 72세의 여성... 배낭을 메고요. 홀로 –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어요. 어머니는 혼자였죠. 눈앞에 검은 커튼이 내려앉았어요. 끔찍했죠.


In November 1938, many Jews were murdered during an organised pogrom; Jewish businesses and synagogues wrecked. Thousands sent to concentration camps. Jews are banned from running retail or mail-order businesses.


1938년 11월, 많은 유대인이 조직적인 학살 동안 살해되었으며 유대인 상점과 회당이 파괴되었습니다. 수천 명이 강제수용소로 보내졌죠. 유대인들은 소매업이나 우편 주문 사업을 하는 것이 더 이상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 1938년 11월 12일


Testamentary bequests to Jews are null and void where they display a disregard for healthy popular sentiment.


유대인들에 대한 유언에 의한 유산은 건전한 대중 정서를 무시하는 경우 무효입니다. - 1938년 7월 31일


Jews must give up their radios.


유대인들은 라디오를 포기해야 합니다. - 1939년 9월 23일


All Jews obliged to report for forced labour.


모든 유대인은 강제 노동에 대해 보고할 의무가 있습니다. - 1941년 3월 4일


Organised arrests at works places – deportation follows.


직장에서 조직적인 체포가 일어나며 추방이 뒤따릅니다. - 1943년 3월 26일


Alice Sommer: But I... events were interesting thing in my house, this is what before deportation, where three of four Nazi families, and, ah, once I... I must practicing and lurking this time. After the, uhm... after the... my mother left, I was in a very mad state and, and I hate to play. I, I couldn’t. So, I played for hours and suddenly I heard, ah, ah, knocking, ah, on, on the flo... on the floor and I said, “Oh, the Nazis. And it is... it is... I disturbed him. I may not place it, now.” So, I stopped playing and, ah, the, the woman who took care of our house came once and said, “Mrs. Sommer, Mr. Hermann, the name of this Nazi, asked me that you are ordered in deporting. You know stop playing. He laughed, you’re playing,” She told me. So, immediately, I was sitting down and play, but they made me very... in one, ah, evening, the last evening, sitting already... everybody singing their backed. And then... and then the door was opened, and the Nazi came and said to me... “Mrs. Sommer, I see that you are about to be sent away I wish you all the best. Come back to us in good health. Remain healthy. I can tell you one thing for certain. I owe you a huge debt of gratitude. I have spent hours listening to you practice. My father was an organist... our entire family loved music. I admire you... and I cannot tell you how much you have helped us with your playing during this time especially.” This is what he said to me.


알리스 좀머 : 하지만 저는... 흥미로운 사건들이 집에서 일어났는데, 이것은 나치 가족 4명 중 3명이 추방되기 전의 일이며, 아, 한때 저는... 이번에는 연습하고 숨어야 했죠. 그 후, 음... 어머니가 떠난 후, 저는 매우 미친 상태에 있었고, 그리고 나는 연주하는 것을 싫어했어요. 전 할 수 없었죠. 그래서 몇 시간 동안 연주하다가 갑자기 아, 아, 노크, 바닥에서... 바닥에서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이렇게 말했어요. “오, 나치. 그리고 그것은... 그것은... 저는 그를 방해했죠. 지금은 배치하지 않을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연주를 멈추고, 아, 우리 집을 돌보던 그 여자가 한번 와서 이렇게 말했어요. “좀머 부인, 이 나치의 이름인 헤르만 씨가 당신에게 추방 명령을 내린다고 요청했어요. 그만 연주하세요. 그는 웃었고, 당신은 연주하고 있었죠.” 그녀가 제게 말했어요. 그래서 즉시 저는 앉아서 연습했지만, 그들은 저를 매우... 하루에, 아, 저녁, 마지막 저녁에 이미 앉아서... 모두가 그들의 뒤에서 노래를 부르게 했죠. 그러고 나서... 그러고 나서 문이 열렸고, 나치가 와서 제게 말했어요... “좀머 부인, 당신이 곧 보내질 것 같군요. 쾌유를 빌어요.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세요. 건강을 유지하세요. 한 가지는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큰 감사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저는 당신의 연습을 듣고 몇 시간을 보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오르가니스트였어요. 우리 가족은 모두 음악을 사랑했죠. 저는 당신을 존경하며... 당신이 특히 이 시간 동안 당신의 연주로 우리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말할 수 없어요.” 이것은 그가 제게 말한 것입니다.


Do you still practice now?


지금도 연습하시나요?


Alice Sommer: Yeah. Of course.


알리스 좀머 : 예. 물론이죠.


How much?


얼마나 하세요?


Alice Sommer: This is my food, two and a half hours.


알리스 좀머 : 이것은 제 양식으로, 2시간 반이요.


How old are you?


연세가 어떻게 되는지요?


Alice Sommer: Ninety-eight.


알리스 좀머 : 98세요.


[Music]


How many concerts did you give interrelationship?


얼마나 많은 콘서트에서 상호 관계를 제공했나요?


Alice Sommer: Yeah. More than hundred.


알리스 좀머 : 예. 100회 이상입니다.


[Music]


Paintings by the children of Theresienstadt


테레지엔슈테트 어린이들의 그림들


[Music]


Jacques Stroumsa: We arrived at a camp on the 8th of May 1943... at about four or five o’clock in the morning. The doors of the wagons were opened... and we were dazzled by the floodlights... panicked by the dogs... and by the SS shouting, ‘Everybody out, everybody out.’ With my right hand I held my wife, who was eight months pregnant... and with my left hand, my violin from which I was never separated I received a blow on the left hand, another on the right. ‘Leave your wife with her mother and your violin in the wagon!’ I left it there and got down.


자크 스트로움사 : 우리는 1943년 5월 8일... 아침 4시나 5시경에 수용소에 도착했어요. 마차의 문이 열렸고... 투광 조명등(야간 경기 등을 위한 강력한 조명등)에 우리는 눈이 부시게 되었으며... 개들에 당황하고... 친위대가 외치는 것에 놀랐어요. ‘모두 나가세요, 모두 나가.’ 오른손으로는 임신 8개월이 된 아내를 안고... 한 번도 떼지 못한 바이올린을 왼손에 들었는데, 왼손으로 맞고, 다른 쪽은 오른손으로 맞았어요. ‘어머니와 함께 아내를 남겨두고 바이올린은 마차에 남겨두시오!’ 저는 바이올린을 두고 내렸죠.


Alice Sommer: I have never wanted to talk about the atrocities we experience. And I still don’t want to. All I will say is that... when I say we had nothing to eat, you must believe me. In the mornings we had black water – that was coffee. At lunchtime some white water – that was soup. And in the evening the black water again. We were skin and bones. The women lost their menstruation, but – and thousands died of typhoid – but we were basically healthy. We were about 20 musicians... first-class musicians... and we were basically healthy. Of course the reason for that was... if we knew we were going to play in the evening, we were happy. We were happy.


알리스 좀머 : 저는 우리가 경험하는 잔학 행위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은 적이 없었어요. 그리고 여전히 그러고 싶지 않아요. 제가 할 말은... 우리가 먹을 것이 없다고 말할 때, 당신은 저를 믿어야 합니다. 아침마다 우리는 검은 물을 마셨는데, 그건 커피였죠. 점심시간에는 약간의 하얀 물이었는데, 그건 수프였죠. 그리고 저녁에는 다시 검은 물이었죠. 우리는 뼈와 가죽만 남았죠. 여성들은 월경을 잃었지만, 수천 명이 장티푸스로 사망했지만, 우리는 기본적으로 건강했어요. 우리는 약 20명의 음악가였는데... 일류 음악가였으며... 우리는 기본적으로 건강했어요. 물론 그 이유는... 저녁에 연주하러 갈 줄 알았다면, 우리는 행복했으니까요. 우린 행복했어요.


Jacques Stroumsa: When the head of the block... on the night of our arrival, asked: “Are there any among you who can play an instrument... especially the violin?” I said nothing. I could not imagine talking about music... in a concentration camp. The absurd... and music. That is impossible, they do not go together. But when I was obliged – because of my companions – to admit that I played the violin... the head of the block said, “You will receive five strokes of the cane... because it is sabotage to have said nothing. I am now going to find out whether you are a violinist. I will give you a violin.” I said, “I don’t have a violin.” “I will give you a violin.” He gave me a violin and said, “This is an order. You must play.” He said, “What do you want? Beethoven? Mozart? Handel? Haydn? Schubert? Schumann?” He told me, “You know... Without music? Schubert and Beethoven, and Mozart... Without music?” “Yes”, I said, “yes”. “Play.” What do you want? And I began to play the concerto from Mozart in A-dur (la majeur). Perhaps, you know it, la mi do la mi mi, param-papam-papam, param-papa. He is very brilliant and very good composer. I play about 10 to 12 minutes, and all around, my comrades were at the floury. And after he comes and makes me so. “Stop. You play really very good. And I hope you will ne... not, ah...” “I hope you will not die here.” I hope I said, “We have not come here to die.” He told me, “You don’t know what this, ah, concentration camp.”


자크 스트로움사 : 우리가 도착한 밤에... 건물의 우두머리가 다음과 같이 물었어요. “당신들 중에 악기, 특히 바이올린을 연주할 줄 아는 사람이 있나요?”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죠. 강제수용소에서... 음악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어요. 터무니없는... 그리고 음악. 그것은 불가능한데, 그들은 함께 가지 않아요. 하지만 동료들 때문에 제가 바이올린을 연주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때... 건물의 우두머리가 말했어요. “당신은 지팡이 다섯 자루를 받을 것입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은 방해 행위이기 때문이죠. 저는 이제 당신이 바이올리니스트인지 알아보려고 합니다. 바이올린을 줄게요.” 저는 이렇게 말했죠. “바이올린이 없는데요.” 그는 제게 바이올린을 주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바이올린을 줄게요. 이것은 명령입니다. 당신은 연주해야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어요. “무엇을 원하나요? 베토벤? 모차르트? 헨델? 하이든? 슈베르트? 슈만?” 그는 제게 말했죠. “그러니까... 음악 없이요? 슈만, 베토벤, 모차르트... 음악 없이요?” “네.” 제가 이렇게 말했죠. “네.” “연주하시오.” “무엇을 원하세요?” 그리고 저는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5번을 연주하기 시작했어요. 어쩌면 당신도 이 곡을 알고 있겠죠, 라 미 도# 라 미 미 파람-파람-파람, 파람-파파. 그는 매우 훌륭하고 매우 좋은 작곡가입니다. 10~12분 정도 연주하니 주위에 동료들이 붐볐죠. 그리고 그가 와서 저를 그렇게 만든 후에요. “멈추세요. 정말 잘 연주하시네요. 그리고 저는 바라는데 당신이 절대... 아니, 아... “당신이 여기서 죽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말했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죽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그는 제게 이렇게 말했어요. “당신은 이것이, 아, 강제수용소가 뭔지 모르는군요.”


[Music]


Jacques Stroumsa: It was hell. Dante’s Inferno ‘Abandon hope all who enter here’. And he sent me, immediately, to the conservatoire in Birkenau, as with Auschwitz, there was a conservatoire. That was the extraordinary... absurd idea of the SS – music in a concentration camp.


자크 스트로움사 : 지옥이었어요. 단테의 신곡 중 지옥 편에는 이런 말이 나오죠. ‘여기에 들어오는 그대, 모든 희망을 버려라.’ 그리고 그는 즉시 저를 비르케나우에 있는 음악원으로 보냈는데, 아우슈비츠와 마찬가지로 음악원도 있었어요. 그것은 비범한... 친위대의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는데, 강제수용소의 음악이었죠.


Anita Lasker-Wallfisch: In Auschwitz... I was the only cellist in the orchestra. It is quite easy to explain. As long as they wanted an orchestra... they didn’t send us to the gas chambers. But the gas chambers... were always in front of our noses.


아니타 라스커-발피쉬 : 아우슈비츠에서... 오케스트라에서 저는 유일한 첼리스트였어요. 설명하기 상당히 쉬운데요. 그들이 오케스트라를 원하는 동안은... 우리를 가스실로 보내지 않았죠. 하지만 가스실은... 항상 우리 코앞에 있었어요.


Alice Sommer: I remember, in winter we would wear winder coats... with hats on our heads and high boots. It was freezing, but still we played. How we did it, I don’t know, but still we played. And people would sit there in an ice-cold room. It was like a church or a temple or a mosque. Indescribable.


알리스 좀머 : 저는 겨울에 우리가 바람막이 코트를 입었던 것을 기억하는데... 머리에는 모자를 쓰고 높은 부츠를 신었죠. 추웠지만 그래도 우리는 연주했죠. 우리가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여전히 우리는 연주했어요. 그리고 사람들은 얼음처럼 차가운 방에 앉았을 거예요. 교회나 절이나 이슬람 사원 같았죠.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Anita Lasker-Wallfisch: The remarkable thing about the orchestra that it was directed by Alma Rosé. Alma Rosé was a daughter of Arnold Rosé, who was a leader of the Vienna Philharmonic and had the famous Rosé Quartet, and she was the niece of Gustav Mahler. And she was herself a fantastic violinist. She arrived in the camp, she was in the experimental block, just about to be experimented upon when it came out that she was a violinist and somehow, she landed in, in Birkenau, shortly before I arrived and called. And, she was given the, uhm, the task to make an, ah, an orchestra, her experience in Auschwitz, Theresienstadt. We would play things like operettas – so much in fashion at the time – and Zarah Leander songs – we had a few female singers. It was a completely crazy ensemble. But our main job was to play marches. Marches, morning and evening... for the thousands marched off to work... in the factories surrounding the camp. The famous ‘slave-labour’. And my personal claim to fame... is that I played Schumann’s ‘Träumerei’ for Dr. Mengele, the famous doctor... who experimented to the twins... and was, apparently, a music-lover. He came to out block and wanted to hear Schumann’s ‘Träumerei’.


아니타 라스커-발피쉬 : 알마 로제가 지휘한 오케스트라에는 놀라운 것이 있어요. 알마 로제는 빈 필하모닉과 유명한 로제 콰르텟의 리더인 아르놀트 로제의 딸이자 구스타프 말러의 조카딸이었어요. 그리고 그녀는 그 자체로 환상적인 바이올리니스트였죠. 그녀가 캠프에 도착하여 실험 구역에 있었고 실험을 막 시작하려던 참이었는데, 그녀가 바이올리니스트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그녀는 제가 도착하여 요청하기 직전에 비르케나우에 상륙했어요. 그리고 그녀는 음, 오케스트라를 만드는 임무를 맡아서 아우슈비츠와 테레지엔슈타트에서 경험했죠. 우리는 당시 유행했던 오페레타와 자라 레안데르의 노래 같은 것들을 연주하곤 했는데, 몇몇 여성 가수들이 있었어요. 완전히 미친 앙상블이었죠. 그러나 우리의 주도니 일은 행진곡 연주였죠. 아침저녁으로 행진곡들... 일하러 행진하는 수천 명을 위해서... 수용소 주변의 공장들에서요. 그 유명한 ‘노예노동’이었죠. 그리고 명성에 대한 제 개인적인 주장은... 쌍둥이를 실험한 유명한 의사인... 요제프 멩겔레 박사를 위해 제가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를 연주했으며, 그는 분명히 음악 애호가였다는 것이죠. 그는 건물 밖으로 나와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를 듣고 싶어 했어요.


And did you play it for him in private?


그리고 당신은 사적으로 그를 위해 연주했나요?


Anita Lasker-Wallfisch: No, no, with orchestral accompaniment. We had an arrangement. We would sit in the block and rehearse... and the SS would come in... sometimes two or three, or just one... to listen to a bit of music... to refresh themselves from their work – putting people into the gas chambers.


아니타 라스커-발피쉬 : 아뇨, 오케스트라 반주로요. 우리는 편곡을 했죠. 우리는 건물에 앉아서 예행연습을 하고... 친위대가 와서... 때로는 두세 명, 아니면 한 명만... 음악을 조금 듣고... 일에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사람들을 가스실로 들여보냈죠.


Alice Sommer: I am a survivor of Theresienstadt, but you can’t compare the survivors of Auschwitz, for instance. This was indescribable. This is... so these people went through to the hell. Even the first year in Theresienstadt, we didn’t know about Auschwitz. In the second year, we knew it. And they wanted to, to make gas chambers in Theresienstadt as well, just started already, but I didn’t finish.


알리스 좀머 : 저는 테레지엔슈타트의 생존자이지만, 예를 들어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들을 비교할 수는 없어요. 이것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이것은... 그래서 이 사람들은 지옥에 갔죠. 테레지엔슈타트에서의 첫 번째 해에도 우리는 아우슈비츠에 대해 몰랐어요. 두 번째 해에는 알았죠. 그리고 그들은 테레지엔슈타트에서도 가스실을 만들고 싶었는데, 이미 시작했지만 끝내지 못했죠.


Oh God! Do not desert us in our pain. We see death! Death! Hold back your scythe!


오 신이시여! 고통 속에 우리를 버리지 마세요. 죽음이 보입니다! 죽음! 낫질을 막으세요!


The Song of Terezin by Franz Waxman, Words by Eva Pickova, aged 12, Theresienstadt


프란츠 왁스먼 작곡 <테레진의 노래>, 12세에 테레지엔슈테트에서 에바 피츠코바 작사


Alice Sommer: And to conclude I can only say... that when we played... it was like a divine service of something of the kind. We were close to the divine... when we were allowed to play – and so were our listeners.


알리스 좀머 : 그리고 결론을 내리자면... 우리가 연주했을 때... 일종의 신성한 봉사와 같았어요. 연주가 허용되었을 때, 우리는 신에 가까웠고... 듣는 사람도 마찬가지였죠.


Anita Lasker-Wallfisch: We sat there under sentence of death – alive today, but perhaps not tomorrow. If you were told to play something, you played it. I believe it would have been a luxury to sit here and analyse it all. It was an existence... from one minute to the other. We knew that today or tomorrow or the day after... we will go in there and come out as smoke. There really was no doubt about it.


아니타 라스커-발피쉬 : 우리는 사형 선고를 받으며 그곳에 앉아 있었는데, 오늘은 살아있지만, 내일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뭔가를 연주하라고 하면 연주했죠. 저는 여기 앉아서 모든 것을 분석하는 것이 사치였을 것이라고 믿어요. 1분에서 다른 시간 사이의... 존재였죠. 우리는 오늘이나 내일이나 모레... 거기에 들어가서 연기처럼 나올 것입니다. 정말 의심의 여지가 없었죠.


No, no my God in all the heaven. We seek a better world! We want to live! We want the light! We want to live! Do not forget us! Do not forget us! Do not forget us! Do not forget us!


아니요, 온 하늘에 있는 저의 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추구합니다! 우리는 살고 싶어요! 우리는 빛을 원해요! 우리는 살고 싶어요! 우리를 잊지 마세요! 우리를 잊지 마세요! 우리를 잊지 마세요! 우리를 잊지 마세요!


[Music]


Alice Sommer: Theresienstadt was proof of the magic of music. I cannot say it another way. It is extraordinary, the effect... that music has on the human soul. It is the most beautiful thing that human life can bestow on one. And I must say, till my, my last days, I am 98 years old. It helped me and it make my life beautiful. Beautiful, even in very, very difficult times, it makes me really happy.


알리스 좀머 : 테레지엔슈타트는 음악의 마법의 증거였어요. 달리 말할 수 없어요. 음악이 인간의 영혼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해요. 인간의 생명이 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사는 마지막 날까지 저는 98세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것은 저를 도왔고 제 삶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아름다워요, 매우 어려운 시기에도 저를 정말 행복하게 만듭니다.


[Music]




멘델스존, 바그너, 유대인 강제수용소를 소재로 한 내용을 번역하게 되었는데, 아쉬케나지에 대해서 욕심부리다가 빚어진 일. 마침 자막이 있어서 받아쓸 수 있었다. 하지만 완전한 것도 아니고 들리지 않는 부분(inaudible)이 표시되어 있어서 외국 분한테 부탁해서 들리지 않는 구간을 보완하려고 했으나 결국 4군데(30:10, 31:10 – 31:20, 35:35) 중 한 군데는 해결하지 못했다.

Vladimir Ashkenazy Observed: Episodes from the Life of a Wandering Musician 1987


https://www.youtube.com/watch?v=gkOM0o4KJS0

https://search.alexanderstreet.com/preview/work/bibliographic_entity%7Cvideo_work%7C2391585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는 다음과 같이 관찰했다. - 방랑하는 음악가로서의 인생에서 나온 일화들

1987년 다큐멘터리


[Beethoven Piano Sonata No. 30 in E, Op. 109: III. Gesangvoll, mit innigster Empfindung. Andante molto cantabile ed espressivo]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0번 3악장]


This man was born in Gorky in 1937. He has lived in the Soviet Union, in England, in Iceland and in Switzerland. But he spent most his professional life traveling. He is unusually private in an assuming face profession, and yet, he is known and affectionately remembered by millions of people all over the world. His name is Vladimir Ashkenazy and he is one of the foremost pianists of our time. He is recognized internationally for his talent, his earnestness and his quite charm. And all of these things together in his appearances on television which has played a major role in the development of his career. We have been making television films as in for the past 20 years, an experience that we have found both enjoyable and rewarded, and one worth remembering. And so, as an affectionate record of our association with him, we present “Ashkenazy Observed”.


이 남자는 1937년 고리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소련, 영국, 아이슬란드, 스위스에서 살았죠. 그러나 그는 직업 인생의 대부분을 여행하는 데 보냈죠. 그는 얼굴을 보이는 직업에서는 비정상적으로 사적이지만,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애정 어린 기억에 남죠. 그의 이름은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로 우리 시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한 명입니다. 그는 자신의 재능, 성실함, 상당한 매력으로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그의 경력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한 TV 출연에 함께합니다. 우리는 지난 20년 동안 TV 필름을 제작해왔으며, 즐겁고 보람 있고 기억할 가치가 있는 경험입니다. 그래서 그와의 관계에 대한 애정 어린 기록으로 <아쉬케나지가 관찰했다>를 소개합니다.


Ashkenazy Observed: Episodes from the life of Wandering Musician


아쉬케나지는 다음과 같이 관찰했다. - 방랑하는 음악가로서의 인생에서 나온 일화들


An Allegro Film


알레그로 필름


1996, LONDON ‘Double Concerto’


1996년 런던 2중주 협주곡


Good morning! How is it going?


안녕! 어떻게 되어가니?


Daniel Barenboim: Very good.


다니엘 바렌보임 : 아주 좋아.


It all started here with Daniel Barenboim, backstage at the Fairfield Halls in Croydon, when they played Mozart’s double concerto together for the first time on the 11th of March, 1966. This was also the opening sequence of our first film for BBC Television, “Double Concerto”.


이것은 1966년 3월 11일 크로이던의 페어필드 홀 백스테이지에서 다니엘 바렌보임이 모차르트의 2중주 협주곡을 처음으로 함께 연주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BBC TV를 위한 첫 번째 필름인 <2중주 협주곡>의 시작 장면이기도 하죠.


[Mozart Piano Concerto No. 10 for 2 pianos in Eb, K. 365/316a: I. Allegro]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10번 1악장]


Daniel Barenboim: Yeah, but darn, basic tempo’s too slow.


다니엘 바렌보임 : 그래, 하지만 참, 기본적인 템포가 너무 느려.


[Mozart Piano Concerto No. 10 for 2 pianos in Eb, K. 365/316a: I. Allegro]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10번 1악장]


Vladimir Ashkenazy: But look, I, I think this way... I don’t stop, can you feel you now?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 하지만 보라고, 난 이런 방식이라 생각하는데... 난 멈추지 않아, 이제 느낄 수 있니?


Daniel Barenboim: Yeah.


다니엘 바렌보임 : 그래.


Vladimir Ashkenazy: Did I?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 내가 그랬니?


Daniel Barenboim: A little bit.


다니엘 바렌보임 : 약간.


Vladimir Ashkenazy: Well, let’s play the one form.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 음, 한 가지 형식으로 연주해보자.


Daniel Barenboim: All right.


다니엘 바렌보임 : 알았어, 좋아.


[Mozart Piano Concerto No. 10 for 2 pianos in Eb, K. 365/316a: I. Allegro]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10번 1악장]


Vladimir Ashkenazy: We’re not going together.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 우린 함께 가지 않고 있어.


Daniel Barenboim: Yup.


다니엘 바렌보임 : 응.


[Mozart Piano Concerto No. 10 for 2 pianos in Eb, K. 365/316a: I. Allegro]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10번 1악장]


Vladimir Ashkenazy: Ah, ah.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 아아.


[Mozart Piano Concerto No. 10 for 2 pianos in Eb, K. 365/316a: I. Allegro]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10번 1악장]


Vladimir Ashkenazy and his Icelandic wife, Thorunn, were married in Moscow in 1962. But left the Soviet Union in the following year. And for five years, lived here with their family in Hengill. But in June of 1968, the combined precious of constant touring and living in London, persuaded them to move to Iceland in search of some peace and quiet, and a better relationship with their children.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와 그의 아이슬란드인 아내 토룬은 1962년 모스크바에서 결혼했습니다. 하지만 이듬해에 소련을 떠났죠. 그리고 5년 동안 여기 헤잉기들 산에서 가족과 함께 살았죠. 그러나 1968년 6월, 그러나 1968년 6월, 런던에서의 끊임없는 여행과 생활의 소중한 결합은 평화, 고요함, 아이들과의 보다 나은 관계를 찾아 아이슬란드로 이주하도록 설득했습니다.


1968, Rotterdam Moving


1968년 로테르담으로 이동 중


Vladimir Ashkenazy: You can imagine, yes, you can imagine all this travel, noise, and little difficulties, luggages and planes and hotels and everything. And, in the, in the midst of a tour I sometimes think, “God, I can’t, you know, I can’t stand it anymore. I have to go and rest.” Really, you know, even, even when I have a day or two if I feel really tired, I’ll just take a plane, go to Iceland for one day. But I wouldn’t go to London for one day because there I won’t rest. And this is a, this is an ideal place for special retreat. It’s, it's already marvelous, you feel already much healthier and that is very important because playing is not just mental work, it’s also physical work. You have to be in a good form always. Too bad, you have to have energy and vitamin C. So you come here for this northern midnight sun, waterfalls and green mountains and snowy mountains and it’s worth it. It’s worth having this.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 여행, 소음(혼돈), 이 모든 어려움(번거로움), 여행 가방(수하물), 비행기, 호텔 등을 상상할 수 있는데요. 그리고 투어 도중에(그 와중에) 가끔 이렇게 생각합니다. “맙소사,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어딘가에서 쉬어야겠어.” 정말이지, 심지어는 하루 이틀 쉬더라도 정말 피곤하면 비행기를 타고 아이슬란드로 돌아가 하루를 보냅니다. 그러나 저는 런던에서 쉬지 않기 때문에 하루라도 런던에 가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는 휴식을 취하기에 이상적인 곳이거든요. 이미 환상적이라고 느낍니다. 당신은 이미 훨씬 나아졌다고 느끼며, 연주하는 것은 정신적인 노동일뿐만 아니라 육체적 노동이므로 매우 중요하죠. 항상 좋은 몸 상태를 유지해야(컨디션이 좋아야) 하며, 에너지와 비타민 C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한밤중의 태양, 폭포, 푸른 산, 눈 덮인 산을 보려고 여기 북쪽으로 오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죠. (모든 것을 가질 가치가 있습니다.)


[Chopin Piano Sonata No. 3 in b, Op. 58: III. Largo]


[쇼팽 피아노 소나타 3번 3악장]


Vladimir Ashkenazy: My wife couldn’t really buy this house without me but she already saw it. And then, in January, I had literally one evening free. So we decided to fly here for a few hours. In fact, it was just for 3 hours. So, that I can see the house and to go next morning to Copenhagen I had to play, Copenhagen. So, I came here in the middle of the polar night. It was very romantic, you know, the circumstances were very romantic, I must say. So, we choose this house. Now, we get here just for a few days, and we thought we could put all our furniture and stuff, and things. But nothing has arrived so it’s all empty... I have my Beethoven here, that’s ah... I haven’t had time to unpack it. Look, there’s nothing in the house, absolutely. Well, just parquet, nothing else. So the kitchen is empty. Come. I couldn’t offer you a cup of tea, let alone breakfast. There is my room with nothing. No piano. I wouldn't mind practicing a little bit. That’s our first day in Iceland. First time we could stay here and there is nothing. It’s a bit stuffy here, though. Dolly!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 아내는 저 없이 이 집을 살 여유가 없었어요. 그러나 그녀는 이미 그것을 보았죠. 1월에는 정확히 하루 저녁에 시간이 있었으므로 몇 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들어갔고, 실제로는 3시간밖에 걸리지 않아서 집을 볼 수 있었어요.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코펜하겐으로 돌아갑니다. 코펜하겐에서 연주가 잡혀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북극의 밤에 여기에 있었죠. 매우 낭만적인 분위기가 있었어요. 그리고 우리는 이 집을 선택했는데요. 이제 이곳에 온 지 며칠만입니다. 우리는 가구와 다른 물건들을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아무것도 도착하지 않아 모든 방이 여전히 비어 있네요. 여기 제 베토벤이 있는데 그게 다죠. 아직 포장을 풀 시간이 없었어요. 그냥 보세요! 이 집에는 아직 아무것도 없습니다. 전혀 없죠. 제 말은, 그냥 쪽모이 세공을 한 마룻바닥. 그럼 아무것도(다른 건) 없군요. 부엌조차 텅 비어 있죠. 같이 갑시다. (오세요.) 저는 아침 식사는커녕 차 한 잔도 제공할 수 없었어요. 공간이 많군요. (그냥 빈 공간이네요.) 아무것도 아니지만. 피아노가 없군요. 조금 연습하고 싶어요. (조금 연습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아이슬란드에서의 첫날, 이 집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여기는 좀 답답해요. (다만, 약간 퀴퀴한 냄새가 나는군요.) 돌리!


[Chopin Piano Sonata No. 3 in b, Op. 58: III. Largo]


[쇼팽 피아노 소나타 3번 3악장]


Vladimir Ashkenazy: But, you know, we travel all the time, almost. So, more, I, ah, travel without, the more I want to see them, and you know, uhm, although they grow, more I want to see them anyway. It’s a funniest feeling, you know. And it’s... it’s not what you call family life, no. Family life has some funny connotations in order to see them in front of a fire, or have your tea with children around you, something like that, play with them. To play with them, I don’t know, I’m not so interested to... playing their toys with them, I don’t care much about that. But I want to spend some time with them, to talk to them, know... to tell them what I feel about things and to know what they feel about things, and, you know, to grow together somehow. Li... like human being with a human being. And little children see that. That’s really a good thing. It’s a pity we don’t see them more, of course. But, wha... what could I do? I couldn’t stop playing, right?. And now, when I go to London now, I will do as, ah... what I ever do in London, but at least I feel much better because I know that when I go to Iceland again for those five days, I'll see the children every day for hours and hours and hours. So, in London, I'll do the same things as ever.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 하지만 우리는 거의 항상 여행합니다. 그리고 아이들 없이 여행하면 할수록 더 보고 싶어집니다. 비록 아이들이 성장하고 있지만, 저는 여전히 어디에서든 아이들을 점점 더 보고 싶어요. 정말 이상해요. (매우 독특한 느낌입니다.) 이건 전형적인 가족생활이 아니죠. ‘가족생활’이라는 표현에는 모닥불 앞(옆)에 앉아 아이들과 차를 마시거나 아이들과 노는 것과 같은 어떤(재미있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거든요. 저는 그들의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데 그다지 관심이 없어요. 별로 신경 쓰지 않아요. 하지만 저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아이들과 이야기하고, 제가 사물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말하고 아이들이 사물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알고 싶어요. 그리고 다른 모든 인간처럼 어떻게든 아이들과 함께 성장하죠. 그리고 아이들이 그것을 인식한다면 정말 좋은 것 같아요. 물론 더 자주 볼 수 없는 게 아쉽긴 한데 어쩌죠? 저는 결코 연주하는 것을 멈출 수 없으니까요. 맞나요? 이제 런던에 가서 늘 하던 일을 하면 최소한 기분이 나아질 것입니다. 아이슬란드로 돌아가면 매일 몇 시간씩 아이들을 보게 될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죠. 런던에서는 평소와 같은 일을 할 거예요.


1968, London Cesar Franck


1968년 런던 세자르 프랑크


[Franck Violin Sonata in A: II. Allegro]


[프랑크 바이올린 소나타 2악장]


A few days later he is back in London recording the César Franck Sonata with Itzhak Perlman.


며칠 후 그는 런던으로 돌아와 이차크 펄만과 함께 세자르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녹음합니다.


[Music]


Vladimir Ashkenazy: Don’t you think it’s more inspiring?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 더 감동적이지 않니?


Itzhak Perlman: Uhm-uhm.


이차크 펄만 : 음음.


Vladimir Ashkenazy: No, don’t you think that delivery is such a tremendous in violin against the piano?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 아니, 피아노에 대한 바이올린의 전달력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니?


Itzhak Perlman: No.


이차크 펄만 : 아니.


This is their first recording together, and they’ve started their long association during which they will occur among other themes, all of the Beethoven’s sonatas.


이것은 그들이 함께한 첫 번째 녹음이며, 그들은 베토벤 소나타 전곡의 다른 주제들 사이에서 일어날 긴 교제를 시작했습니다.


[Franck Violin Sonata in A: II. Allegro]


[프랑크 바이올린 소나타 2악장]


Vladimir Ashkenazy: You see, you can’t hear my hanging also because it about...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 알다시피, 내가 매달려 있는 것도 들리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것에 대해...


James Mallinson (Producer): Yeah, there’s nothing we shall do. Take it out as little.


제임스 말린슨 (음반 제작자) : 그래, 우리가 할 일이 없어. 조금씩 꺼내자.


[Franck Violin Sonata in A: II. Allegro]


[프랑크 바이올린 소나타 2악장]


Itzhak Perlman: Where am I?


이차크 펄만 : 여기가 어디지?


Vladimir Ashkenazy: This is not bad. Oh, that’s all right. That’s all right.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 이건 나쁘지 않아. 오, 괜찮아. 괜찮아.


James Mallinson (Producer): Now, but he’s playing big codes up there, you see where it supposed in that place.


제임스 말린슨 (음반 제작자) : 이제 그는 큰 코드를 저 위에서 연주하고 있으면, 그곳에서 어디에 있었는지 안다.


Vladimir Ashkenazy: Yes, I understand, very...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 그래, 난 매우 이해해...


James Mallinson (Producer): And you should know.


제임스 말린슨 (음반 제작자) : 그리고 당신은 알아야 한다.


Itzhak Perlman: I see this is a not real fight.


이차크 펄만 : 난 이게 실제 (부부의) 싸움이 아니라고 보는데.


James Mallinson (Producer): I don’t know, it’s just crazy.


제임스 말린슨 (음반 제작자) : 몰라, 미치겠군.


[Franck Violin Sonata in A: II. Allegro]


[프랑크 바이올린 소나타 2악장]


Vladimir Ashkenazy: It was beautiful. Yes.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 아름다웠어. 그래.


James Mallinson (Producer): Yeah, but it came with... this is a one variation.


제임스 말린슨 (음반 제작자) : 그렇지만 함께 제공되었는데... 이건 변주야.


Vladimir Ashkenazy: I think I should go this.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 난 이렇게 가야 한다고 보는데.


James Mallinson (Producer): I feel great.


제임스 말린슨 (음반 제작자) : 난 위대하다고 느껴.


[Stravinsky Rite of Spring for piano 4 hands, Part I: L'Adoration de la Terre (Adoration of the Earth) – I. Introduction]


[스트라빈스키 4개의 손을 위한 <봄의 제전> 1부 <대지에 대한 찬양> 중 <서주>]


1968, LONDON Stravinsky


1968년 런던 스트라빈스키


London again in August to play Stravinsky’s own arrangement of the “Rite of Spring” with Daniel Barenboim, a further extension of their already very fruitful relationship.


8월에 다시 런던에서 다니엘 바렌보임과 함께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 편곡을 연주하며 이미 매우 유익한 관계를 더욱 확장했습니다.


[Stravinsky Rite of Spring for piano 4 hands, Part I: L'Adoration de la Terre (Adoration of the Earth) – II. Les Augures printaniers (Augurs of Spring)]


[스트라빈스키 4개의 손을 위한 <봄의 제전> 1부 <대지에 대한 찬양> 중 <봄의 태동, 젊은 여자들의 춤>]


Vladimir Ashkenazy: Let’s, let’s play from... that causes me to and that’s all right though, shall we play just some of this?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 내가 나오는 부분부터... 연주해보자, 괜찮은데, 우리 여기 일부만 연주해보자. (다른 연주를 해보자. 이거 말고. 괜찮아, 그렇지? 이것 좀 해볼까?)


Daniel Barenboim: Yeah, let’s play it from around here.


다니엘 바렌보임 : 그래, 여기부터 연주해보자.


Vladimir Ashkenazy: Yes.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 그래.


Daniel Barenboim: First time.


다니엘 바렌보임 : 처음 해보는 거야.


Vladimir Ashkenazy: No, second.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 아니, 두 번째야.


Daniel Barenboim: Second time, okay.


다니엘 바렌보임 : 그래, 두 번째.


[Stravinsky Rite of Spring for piano 4 hands, Part I: L'Adoration de la Terre (Adoration of the Earth) – III. Jeu du rapt (Ritual of Abduction)]


[스트라빈스키 4개의 손을 위한 <봄의 제전> 1부 <대지에 대한 찬양> 중 <유괴 의식>(유괴의 유희)]


Daniel Barenboim: Who’s going to buy a new piano for this hall?


다니엘 바렌보임 : 누가 이 홀을 위한 새로운 피아노를 살까?


Vladimir Ashkenazy: Oh, it’s hard, isn’t that right?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 아, 어렵군.


1970, ANTWERP Chopin


1970년 안트베르펜 쇼팽


[Chopin Piano Sonata No. 3 in b, Op. 58: IV. Finale. Presto non tanto]


[쇼팽 피아노 소나타 3번 4악장]


Antwerp, 1970, to play a Chopin Recital in the Queen Elizabeth Hall. On tour as usual and as usual with his wife at his side, companion, confident and musical critic who’s judgment he greatly respects.


1970년 안트베르펜 퀸엘리자베스 홀에서 쇼팽 독주회. 여느 때처럼 그가 크게 존경하는 판단력을 지닌 동반자이자 자신감 넘치는 음악 평론가인 아내가 곁에서 함께 여행합니다.


Vladimir Ashkenazy: You’re going to go now?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 이제 (무대로) 가나요?


[Chopin Etude in C, Op. 10 No. 1]


[쇼팽 연습곡 1번]


1970, DEN HAAG Critics


1970년 헤이그 비평가들


Vladimir Ashkenazy: My wife is my most valuable adviser, my most valuable critic too, and she tells me exactly what she thinks and she has a very natural response to music which helps me immensely. I couldn’t over valid her help, really. Well, how much importance you can attach to the criticisms is in very arguable thing. And when I sum it all up, I come to a conclusion that I shouldn’t take too much notice over critics. Only I and my very close friends know what I can do, how much I can develop, what could I have done in this particular. Only they can tell me, and I, myself can tell me what was good, what wasn’t good and what I have to achieve. And critics they can’t teach me.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 아내는 저의 가장 소중한 조언자이자 가장 소중한 비평가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제게 정확히 말해줍니다. 그녀는 음악에 대해 매우 자연스럽게 반응하며(음악에 타고난 소질이 있으며) 그것은 제게 엄청난 도움이 됩니다. 그녀의 도움이 제게 얼마나 중요한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죠. 비평가들에게 얼마나 많은 비중을 두고 있는지는 매우 의심스러운데요. 요약하자면, 제 결론은 비평가들에게 너무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얼마나 얻을 수 있는지, 그날 밤 내가 무엇을 잘했는지는 저와 가장 가까운 친구들만 알고 있죠. 그녀와 저만 저 자신에게 무엇이 좋았고 무엇이 좋지 않았는지, 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할 수 있어요. 비평가들은 제게 아무것도 가르칠(말할) 수 없습니다.


Þórunn Jóhannsdóttir: We don't usually bother. We forget the papers, if they’re there. If somebody tells us then... but then I don’t care at all. But he cares; if he gets a bad one he gets very upset. If he gets a good one he says: “They’re all fools; they don’t understand anyways.” You can’t please him at all. I’m very grateful that I, you know, I’ve been studying music ever since I was 2 or 3. I mean, I’ve known nothing else and I’m very grateful for it all because it is a great help and I suppose I enjoy it.


토룬 요한스도티르 : 우리는 보통 귀찮게 하지 않지만, 신문이 여기에 있거나(신문에서 보거나) 누군가가 우리에게 그것에 관해 이야기하면... 전 모르죠, 전혀 상관없죠. 저는 상관하지 않아요. 하지만 나쁜 리뷰는 그를 화나게 하죠. 그는 좋은 리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들은 바보야, 이해하지 못해.” 그가 만족하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죠. 저는 두세 살 때부터 음악을 공부하게 되어 매우 기뻐요. 다른 건 모르겠고 정말 감사하거든요. 제게 큰 도움이 되어 다행이고, 즐거운 것 같아요.


1972, COLCHESTER Beethoven


1972년 콜체스터 베토벤


[Beethoven Piano Sonata No. 31 in Ab, Op. 110: I. Moderato cantabile molto espressivo]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1번 1악장]


The University of Essex in Wivenhoe Park, Colchester, where he is to play Beethoven for students.


콜체스터 위븐호 공원 에식스 대학교에서 그는 학생들을 위해 베토벤을 연주할 예정입니다.


Ever since he left Russia in 1963, one of his main preoccupations as an artist has been with the music of Beethoven in the European tradition of performing it. He has described it as a process of overcoming inadequacies. But this froze more light on his earnestness than on his technical ability. And its characteristic of that same earnestness that the composer he must admires, he has found the most difficult.


1963년에 러시아를 떠난 이후, 예술가로서 그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는 유럽 전통에서 베토벤의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부족함을 극복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했죠. 그러나 이것은 그의 기술적인 능력보다 그의 진지함에서 더 빛을 발했죠. 그리고 작곡가가 존경해야 할 바로 그 진지함의 특징을 그는 가장 어렵다고 느꼈죠.


Vladimir Ashkenazy: Ah, I don’t know if it’s... if, if this is right to describe it as inhibition. It’s rather that I felt in... inadequate and I was right. Inhibition is something else, inhibition is something that, uhm, you might... the other could... and you still can do it because if some complex... in my case, I, I simply felt it was certainly... I was certainly inadequately prepared. Uhm, but to say that I am prepared now, would be, uhm, silly enough because it was such great music. You can never reach the bottom, I mean, this is only altruism, I’m not saying anything new. Uhm, I certainly feel much better than nine years ago. And I hope that I’m going feeling even better playing this music. I feel very deeply, uhm, but should be expressed in it. And I believe that if I do feel relatively and that if I continue my research in this field, and continue on working as could as I have been, uhm, I should be able to produce something worth one.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 아, 혹시... 혹시 억제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까요. 오히려 제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고... 제가 옳았어요. 억제는 다른 것이고, 억제는, 음, 당신은... 다른 사람은... 그리고 당신은 여전히 그것을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어떤 복잡한... 제 경우에는, 저는 단순히 그것이 확실히... 전 확실히 준비가 부족했으니까요. 음, 하지만 지금은 준비가 됐다는 말은 매우 좋은 음악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어리석은 일일 거예요. 당신은 바닥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제 말은, 이것은 단지 이타주의일 뿐이며, 저는 새로운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음, 확실히 9년 전보다 훨씬 나아진 것 같아요. 그리고 이 음악을 들으면서 기분이 더 좋아지길 바랍니다. 굉장히 깊게 느껴지지만, 음, 그걸로 표현해야 하죠. 그리고 제가 상대적으로 느낀다면, 이 분야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고 지금까지 해온 대로 계속 착수하면 음, 뭔가 가치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Beethoven Piano Sonata No. 31 in Ab, Op. 110: III. Adagio ma non troppo - Arioso dolente - Fuga. Allegro ma non troppo]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1번 3악장]


1977, LONDON Trio


1977년 런던 트리오


[Beethoven Piano Trio No. 6 in Eb, Op. 70 No. 2: III. Allegretto ma non troppo]


[베토벤 피아노 트리오 6번 3악장]


London again, 1977, to play a Beethoven trio at the Royal Opera House, Covent Garden, for a film about his friend Itzhak Perlman.


1977년 다시 런던, 코벤트 가든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그의 친구 이차크 펄만에 관한 필름을 위해 베토벤 트리오를 연주합니다.


[Beethoven Piano Trio No. 6 in Eb, Op. 70 No. 2: III. Allegretto ma non troppo]


[베토벤 피아노 트리오 6번 3악장]


The formation of the trio is a new departure, an extension of his artistic relationship with Itzhak Perlman and the start of a new one with Lynn Harrell, that is to develop steadily in the coming years and include recordings of all the Beethoven trios. The motivation for this and his readiness to cooperate in the film about Itzhak Perlman, lie squarely in a genuine wish to be a good colleague and in the value of artistic collaboration. These are the same principles that led him to conducting for the first time and to accept an invitation to make a series of films about composers. In fact, it maybe said that he is actually happier contributing to films about colleagues and composers than making films about himself.


트리오의 형성은 새로운 출발, 이차크 펄만(바이올린)과의 예술적인 관계 확장 및 린 하렐(첼로)과의 새로운 시작으로, 이는 앞으로 꾸준히 발전하여 모든 베토벤 트리오의 녹음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차크 펄만에 관한 필름에서 그의 협력 의지와 동기는 좋은 동료가 되고자 하는 진정한 소망과 예술적 협력의 가치에 있죠. 이런 것들이 그가 처음으로 지휘를 하고 작곡가에 관한 일련의 필름들을 만드는 초청을 수락하도록 이끈 동일한 원칙입니다. 사실 자신에 대한 필름들을 만드는 것보다 동료들과 작곡가들에 관한 필름들에 기여하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할 수 있죠.


1980 Respighi


1980년 레스피기


The first of the composer portraits was a film about Respighi. Made in Stockholm in Italy in 1980, was Ashkenazy conducting the Swedish Radio Symphony Orchestera and directing from the keyboard.


작곡가 초상의 첫 번째는 레스피기에 관한 필름이었습니다. 1980년 스톡홀름과 이탈리아에서 제작된 필름에서 아쉬케나지는 스웨덴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건반 앞에서 지휘했죠.


[Respighi Toccata per pianoforte e orchestra]


[레스피기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토카타]


He had began directing from the keyboard in Mozart concertos, but gave his first concert as a conductor in 1971. When he stood in the short notice to conduct a Beethoven program in Iceland with Daniel Barenboim, the soloist. This led to a number of invitations to conduct British orchestras. And within a few years, he found himself with a rapidly developing second career and one that he found both musically rewarding and instructive.


그는 모차르트 협주곡에서 건반에서 지휘를 시작했지만, 1971년에는 지휘자로서 첫 콘서트를 가졌습니다. 그가 독주자 다니엘 바렌보임과 함께 아이슬란드에서 베토벤 연주를 하기 위해 잠시 들렀을 때였죠. 이로 인해 영국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도록 여러 차례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몇 년 안에 그는 빠르게 발전하는 두 번째 직업이자 음악적으로 보람 있고 유익한 직업을 갖게 되었죠.


[Respighi: I Pini di Roma, P. 141 - III. I pini del Gianicolo]


[레스피기 교향시 <로마의 소나무> 제3부 <자니콜로의 소나무>]


The second of the composer’s films was about Mussorgsky’s “Pictures at an Exhibition”. For many years, after living the Soviet Union, Ashkenazy’s mastery of Russian keyboard music was partially eclipsed by his concern to come to terms with the music of the west in the European musical traditions. But slowly, Rachmaninoff, Scriabin and Mussorgsky began to reappear more frequently in his concert programs. And in September 1981, we filmed an astonishing performance of the “Pictures at an Exhibition” in the newly-opened concert hall at the Barbican Centre in London.


작곡가의 두 번째 필름은 무소르그스키 <전람회의 그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소련에서 생활한 후 수년 동안 아쉬케나지의 러시아 건반 음악에 대한 숙달은 유럽 음악 전통에서 서방의 음악과 타협하려는 그의 관심으로 인해 부분적으로 가려졌죠. 그러나 천천히 라흐마니노프, 스크리아빈, 무소르그스키가 그의 콘서트 프로그램에 더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1981년 9월, 우리는 런던 바비칸 센터에 새로 문을 연 콘서트홀에서 <전람회의 그림>이라는 놀라운 공연을 촬영했습니다.


[Mussorgsky Pictures at an Exhibition: XI. Promenade]


[무소르그스키 <전람회의 그림> 중 프롬나드 5]


[Mussorgsky Pictures at an Exhibition: XII. Limoges, le marche]


[무소르그스키 <전람회의 그림> 중 <리모주의 시장>]


[Mussorgsky Pictures at an Exhibition: XIII. Catacombae. Sepulcrum Romanum – Con mortuis in lingua mortua]


[무소르그스키 <전람회의 그림> 중 <카타콤 - 죽은 언어로 말하는 죽은 사람과 함께>]


After Mussorgsky, came two films about Sibelius, a composer who has always been closed to Ashkenazy’s heart. He feels a strong sense of identification with Finland and Finnish landscape, spending some free time there each year. Perhaps, it has echoes of his native Russia for him. In any event, having already made gramophone recordings of all the Sibelius symphonies, he responded enthusiastically to the opportunity to conduct the Swedish Radio Symphony Orchestra in two films that set out to play Sibelius’ music in its Finnish context.


무소르그스키 이후, 항상 아쉬케나지의 마음에 닫혀 있던 작곡가 시벨리우스에 관한 두 편의 필름이 나왔습니다. 그는 핀란드와 핀란드 풍경에 강한 동질감을 느끼며 매년 그곳에서 자유 시간을 보냅니다. 어쩌면 그것은 그에게 그의 모국인 러시아의 메아리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미 시벨리우스 교향곡 전집을 축음기로 녹음한 그는 핀란드식 맥락에서 시벨리우스의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한 두 편의 필름에서 스웨덴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기회에 열광적으로 반응했죠.


1985 Sibelius


1985년 시벨리우스


“Finlandia” caught the imagination of not only of the Finns, its message rang around the world and carried the name of Sibelius with it.


<핀란디아>는 핀란드인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을 뿐만 아니라 그 메시지가 전 세계에 퍼져 시벨리우스라는 이름을 널리 알렸습니다.


[Sibelius Finlandia]


[시벨리우스 핀란디아]


He, himself, is surprised at his success. Quiet as the symphonic poems speak to people he asked, perhaps, because of its open-air style. But then, it really his built on themes provided from above, pure inspiration.


그는 자신의 성공에 놀랐습니다. 교향곡이 그가 질문했던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는 것처럼 조용한데, 어쩌면 야외 스타일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곡은 실제로 위에서 제공된 주제, 순수한 영감을 바탕으로 구축된 것입니다.


[Sibelius Finlandia]


[시벨리우스 핀란디아]


Sibelius was 33 when he wrote “Finlandia”, and he chose little of the genius structure and symphonic poem that was yet to come. But the gift for an unforgettable melody is already there, and it speaks with conviction and passion in the clear and unmistakable voice of a young Finnish composer who has to become in time, one of the great symphonists of the 20th century.


시벨리우스는 33세에 <핀란디아>를 썼으며, 이제부터 시작인 천재적인 구조와 교향시를 거의 선택하지 않았죠. 그러나 잊을 수 없는 선율을 위한 선물은 이미 그곳에 있으며, 20세기의 위대한 교향곡 작곡가 중 한 명이 되어야 하는 젊은 핀란드 작곡가의 명확하고 틀림없는 목소리로 확신과 열정을 담아 이야기합니다.


[Sibelius Finlandia]


[시벨리우스 핀란디아]


And so, one of the foremost pianists of our time has become, in addition, a conductor of international repute. And on the 1st of January, 1987, he was appointed music director of the Royal Philharmonic Orchestra in London. He is now generally acknowledge to be at a new peak in his career. And it seems more than likely that the breadth of his activities and in particular his conducting, has contributed to a widely recognized deepening in his performances of the great works in the Western piano literature. Because in all of this, the piano has remained his prime concerned in the pursuit of Beethoven, a constant theme in his life. And so here, to conclude attribute to his master musician, his Beethoven’s late sonata, Opus 109, recorded at a public concert in Switzerland.


고로 우리 시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은 국제적으로 명성이 높은 지휘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987년 1월 1일 런던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일반적으로 자신의 경력에서 새로운 정점에 도달했음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의 폭넓은 활동, 특히 그의 지휘는 서양 피아노 문헌의 위대한 작품들을 연주하는 데 널리 인정받는 폭에 기여한 것 같습니다. 이 모든 것에서 피아노는 그의 삶의 끊임없는 주제인 베토벤을 추구하는 데 가장 중요한 관심사로 남아 있기 때문이죠. 고로 여기 그의 거장 음악가의 공로를 인정하기 위해 스위스에서 열린 공개 콘서트에서 녹화된 후기 베토벤 소나타 31번 연주가 있습니다.


[Beethoven Piano Sonata No. 30 in E, Op. 109: I. Vivace ma non troppo - Adagio espressivo]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0번 1악장]


[Beethoven Piano Sonata No. 30 in E, Op. 109: III. Gesangvoll, mit innigster Empfindung. Andante molto cantabile ed espressivo]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0번 3악장]


Vladimir Ashkenazy: What am I? I’m, ah, a human being, right? I’m a musician, pianist but I’m a man, husband and a father, uhm, a Russian, half Jewish and a football player. Ah, a traveller and I’m a citizen of the world. I hope.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 저는 뭘까요? 아, 저는 인간이죠? 음악가 출신, 피아니스트 또는 남자이자 남편이자 아버지이고, 음, 러시아인이자 반은 유대계이며 축구 선수이죠. 아, 저는 여행가이자 세계 시민입니다. 그랬으면 좋겠어요.


[Beethoven 6 Bagatelles, Op. 126 No. 4 in b]


[베토벤 바가텔 작품 126-4]



우연히 영어 자막을 알게 되었으나 웹마에서 복사 기능을 사용할 수 없게 막아놔서 일일이 보고 적었다. 번역하다가 절충하려고 혹시 다른 외국어 자막이 있는지 살펴보니 전혀 없었다. 흐흐흐흐흐~ 단단히 착각했다. 일단 영어를 다 받아쓰고 나서 지문만 보고 번역했다. 내용이 크게 중요해 보이진 않았다. 아무거나 번역하는 건 아니고 내용을 쓱 보고 판단하니까. 다른 동영상이랑 겹치는 인터뷰가 있어서 일부는 다시 가다듬을 수 있었다. 잘못된 자막도 일부 수정했다. 다른 것들을 정리하느라 바빠서 한참 나중에 동영상을 보면서 번역을 검토했는데 어떤 음악이 연주되었는지 보충한 정도이고 다듬은 게 별로 없다. 이대로 끝내려고 했으나 결국 외국 분한테 부탁해서 최종적으로 수정했다. 아쉬케나지가 영어를 쓰는 원어민이 아니라서 외국 분이 듣는 것이 시간 걸린다면서 어려워하셨다. 이 동영상은 결국 일부만 번역했다. 특히 힘들었던 구간은 아쉬케나지와 펄만이 녹음을 검토하는 장면이었다. 누가 말하는 건지 일일이 들여다보는 게 쉽지 않았다. 오히려 나한테는 음반 공부에 도움이 되었다.

2022년 7월 29일 금요일

The Language of the New Music - Arnold Schönberg & Ludwig Wittgenstein 1985


https://www.youtube.com/watch?v=DRI_ZSh6iF4

https://search.alexanderstreet.com/preview/work/bibliographic_entity%7Cvideo_work%7C2370545


새로운 음악의 언어 - 아르놀트 쇤베르크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At the close of the 19th century, Vienna presented to the world a picture of ordered elegance and dignified gaiety, but beneath the surface the corruption and hollowness of the late Hapsburg Empire produced widespread and deep-seated confusion and so set the stage for some of the profoundest meditations on the nature of human experience that this century has yet produced. This was the scene of the intellectual and artistic struggles of many of the seminal minds of the 20th century; among them, the writers Karl Kraus and Robert Musil, the poet Georg Trakl, the architects Otto Wagner and Adolf Loos, the painters Gustav Klimt, Egon Schiele and Oscar Kokoshka, the psychoanalyst Sigmund Freud, the musicians Gustav Mahler and Arnold Schönberg, and the philosopher Ludwig Wittgenstein.


19세기 말에 비엔나는 질서정연한 우아함과 위엄 있는 화려함의 그림을 세상에 선보였으나 표면 아래에는 후기 합스부르크 제국의 부패와 공허함이 만연하고 뿌리 깊은 혼란을 일으켰으며, 금세기가 이제까지 만들어낸 인간 경험의 본성에 대한 심오한 명상을 위한 무대를 마련했는데요. 이곳은 20세기 많은 선구자의 지적, 예술적 투쟁의 현장이었죠. 그들 중에는 작가 카를 크라우스와 로베르트 무질, 시인 게오르크 트라클, 건축가 오토 바그너와 아돌프 로스,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쉴레, 오스카르 코코슈카,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 음악가 구스타프 말러, 아르놀트 쇤베르크,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있었습니다.


[Music]


This is a film about the work of two of these men whose lives and ideas run parallel in the development of Viennese radicalism, and in a most striking way: Ludwig Wittgenstein and Arnold Schönberg.


이것은 비엔나 급진주의의 발전과 평행을 이루는 삶과 사상이 고스란히 담긴, 두 남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과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작품에 관한 필름입니다.


The Language of the New Music with Vladimir Ashkenazy and the Allegri String Quartet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및 알레그리 스트링 콰르텟과 함께하는 새로운 음악의 언어


[Music]


I said once, perhaps rightly, the earlier culture will become a heap of rubble and finally a heap of ashes, but spirits will hover over the ashes. - Ludwig Wittgenstein


이전의 문화는 폐허로, 마침내는 잿더미가 되겠지만, 그 정신들은 그 재 위에서 떠돌 것이다.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Music]


Both men emerged from the turmoil of the Habsburg Empire in its closing days with the idea of analyzing language and purging it with critical intent, believing that in the analysis and purification of language lies the greatest hope that we have. They never met and might never have fully understood one another, because by the nature of their genius they found themselves alone breaking new ground of the very frontiers of their respective disciplines. But their work springs from the same soil and shares a common ethical purpose, so that their ideas and methods echo and illuminate those of each other to a remarkable degree.


두 사람은 언어를 분석하고 비판적인 의도로 언어를 정화한다는 아이디어로 말기의 합스부르크 제국의 혼란에서 벗어났는데, 언어의 분석과 정화에 우리가 가진 가장 큰 희망이 있다고 믿는 것이죠. 그들은 만난 적이 없으며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어요. 그들의 천재성은 그들이 각자의 분야의 최전선에서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고 있음을 스스로 발견했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들의 작품은 같은 토양에서 시작되고 공통의 윤리적 목적을 공유하므로 그들의 아이디어와 방법이 서로의 아이디어와 방법을 현저하게 반영하고 조명합니다.


[Music]


Around the turn of the century, a sense of impending disaster and a growing awareness of the ideological and moral confusions of the time, produced in the work of all of the Viennese modernists a common quest for a new honesty and authenticity of communication and a vital concern with language as the vehicle of human expression.


세기가 바뀔 무렵, 임박한 재난에 대한 감각과 당시의 사상적, 도덕적 혼란에 대한 인식이 높아져 모든 비엔나 모더니스트의 작품에서 의사소통의 새로운 정직성과 진정성에 관한 공통의 탐구, 인간 표현의 수단으로서의 언어에 대한 중요한 관심이 생겨났습니다.


[Music]


The limits of my language are the limits of my world. - Ludwig Wittgenstein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이다.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Music]


And so the nature of language in life and in art became the prime concern of a whole generation of critical artists and thinkers in the movement that became known as Viennese modernism. The progress of the movement is clearly reflected in the changing face of contemporary Vienna, in particular in the buildings of Adolph Loos, which broke so dramatically with the past and caused such major social uproar.


그래서 삶과 예술에서 언어의 본질은 비엔나 모더니즘으로 알려지게 된 운동에서 비판적 예술가와 사상가의 전체 세대의 주요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운동의 진보는 현대 비엔나의 변화하는 얼굴, 특히 과거와 극적으로 단절되고 큰 사회적 소란을 일으킨 아돌프 로스의 건물에 명확하게 반영됩니다.


Motto: “Ein Scheusal von einam Haus” (aus einer Wiener Gemeinderatssitzung) im Sophiensaal Montag, den 11 Dezember 1911 um halb 8 uhr Abends vortrag des Architekten Adolf Loos Mein⦁Haus⦁Am Michaelerplatz mit Skioptikonbildern Karten bei Kehlendorfer, I, Krugerstr, 3 zu K 4,3, 2, 1 -.50


표어 : 1911년 12월 11일 월요일 8시 30분 건축가 아돌프 로스의 저녁 강의 <집안의 야수> (비엔나 시의회 회의에서)


A Monster of a House


집안의 야수


The central ring in Vienna had long reflected in its architectural style the attitudes of Viennese culture. So much so, that by the turn of the century opposition to Ringstraßenstil as it was known, had made architecture the focal point of an entire critical movement. In the words of Hermann Broch, director of the Burgtheater, “Just walk across the ring and you will have the impression of being in the midst of a cheap carnival. Everything masked, everything disguised. But life has become too serious for that sort of thing. A building should not conceal its intended purpose but serve and express that purpose clearly. To disguise it behind borrowed forms seems to us both silly and ugly. In earlier times people used to require that a building should looked like something. We demand that it should be something.”


비엔나의 중앙 고리는 비엔나 문화의 태도를 건축 스타일에 오랫동안 반영되었는데요. 세기가 바뀌면서 링슈트라세(비엔나 중심부에 있는 순환 도로) 스타일로 알려진 반대파가 건축을 전체 비판 운동의 초점으로 만들었죠. 부르크 극장의 감독인 헤르만 브로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고리를 가로질러 걸으면 싸구려 사육제 한가운데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수 있다. 모든 것이 가면을 쓰고, 모든 것을 위장한다. 그러나 인생은 그런 종류의 일에 너무 심각해졌다. 건물은 의도된 목적을 숨기지 않고 그 목적을 명확하게 나타내고 표현해야 한다. 빌린 형식 뒤에 숨기는 것은 어리석고 추한 것 같다. 예전에 사람들은 건물이 무언가와 같아야 한다고 요구했다. 우리는 그것이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Music]


The work of the architect and town planner Otto Wagner, who designed this building for the Austrian Postal Savings Bank shortly after the turn of the century, soon came to be seen as the antithesis of ring of Ringstraßenstil and established him as one of the fathers of modern architecture. And he laid the foundations for the work of Adolf Loos.


세기가 바뀐 직후 오스트리아 우체국저축은행을 위해 이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이자 도시 계획가인 오토 바그너의 작품은 곧 링슈트라세 스타일의 고리와 대조되는 것으로 여겨져서 그를 현대 건축의 아버지 중 한 명으로 확립했죠. 그리고 그는 아돌프 로스의 작품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Music]


In painting, the compelling need for change expressed itself even more dramatically as a movement of protest. The work of Gustav Klimt and the painters of the secession is deliberately and unmistakably a protest against the pervading spirit of historicism. The Secession Building where they exhibited boldly states the aims of the movement. To the age its own art, and to art its freedom. The paintings of Gustav Klimt demonstrate an energetic search for a new language and a new message in art leading towards the exploration of psychic states and away from representation. This heralded a fundamental change in the function of art, a new concern with instinctual life, the wish to penetrate the façade in search of the psyche, a movement that was to become increasing radical in the paintings of Egon Schiele and Oskar Kokoschka, and was to manifest itself with such startling force in both painting and the music of Arnold Schönberg between 1908 and the outbreak of the First World War.


회화에서 변화에 대한 강력한 요구는 항의의 움직임으로 훨씬 더 극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와 분리파(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세기말인 1890년대 이후 유행한 미술 사조) 화가들의 작품은 만연한 역사주의 정신에 대한 고의적이고 틀림없는 항의입니다. 빈 분리파 전시관은 전시 여부와 상관없이 운동의 목적을 과감하게 나타냅니다. 시대에 따라 자신의 예술이 되고, 예술에 자유가 있게 됩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들은 심령 상태를 탐구하고 재현에서 벗어나도록 이끄는 예술의 새로운 언어와 메시지에 대한 열정적인 탐색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예술 기능의 근본적인 변화, 본능적 삶에 대한 새로운 관심, 정신을 찾아 정면을 관통하려는 욕망, 에곤 쉴레와 오스카르 코코쉬카의 그림에서 점점 더 급진적으로 될 운동을 예고했으며, 1908년과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사이에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그림과 음악 모두에서 놀라운 힘 그 자체로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Music]


In his music, Schönberg set himself a task that echoed the spirit of the whole of Viennese modernism: to purify music of ornamentation and the inherited meaning of tonality and to create a new music in which the absolute logic of composition would become pure expression. For Schönberg, as for so many of the Viennese artists, cultural crisis made the purification of language a cultural and artistic necessity. In this way, the critique of language lies at the very heart of Viennese modernism. And these concerns with the logic and the limits of language were to find their supreme philosophical expression in the work of Ludwig Wittgenstein.


쇤베르크는 그의 음악에서 비엔나 모더니즘 전체의 정신을 반영하는 과제를 수행했는데요. 장식의 음악과 계승된 음조의 의미를 정화하고, 작곡의 절대 논리가 순수한 표현이 되는 새로운 음악을 창조했죠. 많은 비엔나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쇤베르크에게도 문화적 위기는 언어의 정화를 문화적이면서도 예술적인 필요로 만들었는데요. 이처럼 언어에 대한 비판은 비엔나 모더니즘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논리 및 언어의 한계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작품에서 최고의 철학적 표현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Music]


He was born in 1889 into a Viennese family of Jewish extraction and one of the wealthiest families in Austria. His father, Karl Wittgenstein, had built up the Austrian steel industry with exceptional success and patronized the arts in a grand manner, but with a very rare degree of commitment and intelligence. He was on intimate terms with most of the leading artists and intellectuals of his time, including Joseph Joachim and Johannes Brahms, and he contributed massively to the Viennese Secession in its earliest revolutionary years. He even paid for the building itself. In time, however, his son Ludwig was to give his entire fortune away. Part of it to the leading painters and poets of the day and in such absolute anonymity that they themselves never knew that Ludwig Wittgenstein was their benefactor; among them, Trakl and Rilke, Schiele, and Kokoschka. A man of astounding asceticism, he built himself the remotest retreat conceivable. High on an isolated rock face at the end of Snorre Field in Norway. A hut, accessible only by rowing boat and an arduous climb. Here he would remain alone for weeks at a time, struggling with the ideas that were later to appear in his astonishing philosophical work the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그는 1889년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부유한 가정 중 하나인 비엔나 출신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카를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 철강 산업을 독점하여 막대한 부를 쌓았으며 예술을 웅장하게, 그러나 매우 드물 정도의 헌신과 지성으로 후원했죠. 그는 요제프 요아힘, 요하네스 브람스 등 당대의 주요 예술가 및 지식인 대부분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혁명 초기에는 빈 분리파에 막대한 공헌도 했죠. 심지어는 건물 자체에 대한 비용도 지불했고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아들 루트비히는 전 재산을 포기해야 했는데요. 그 일부는 당대의 주요 화가와 시인에게 절대적으로 익명으로 제공되어 그들 자신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그들의 후원자라는 사실을 결코 알지 못했으며, 그들 중에는 게오르크 트라클, 라이너 마리아 릴케, 에곤 쉴레, 오스카르 코코슈카가 있었죠. 놀라운 금욕주의를 지닌 그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먼 은신처를 스스로 지었는데요. 노르웨이 스노레 들판 끝의 외딴 바위 면에 높이 솟아 있고요. 노 젓는 배와 험난한 등반으로만 갈 수 있는 오두막이죠. 여기서 그는 몇 주 동안 혼자 남아 나중에 그의 놀라운 철학서인 <논리-철학 논고>에 등장할 아이디어들과 씨름했습니다.


[Music]


When he finally came to write the work, he did so under even stranger circumstances. It was written under fire in the tranches on the eastern front during the First World War.


마침내 작품을 쓰게 되었을 때 그는 훨씬 더 낯선 상황에서도 그렇게 했는데요. 1차 세계 대전 당시 동부전선 일부분에 불을 지르면서 썼죠.


[Music]


He set out to define the limits of the intelligible, not by discussive or sequential argument but by a series of propositions designed to map precisely the limits of linguistic expression. He sought a way in which to see the world aright, as if from a point in eternity. And the work is a dream of total clarity in which all philosophical problems are dissolved.


그는 토론이나 연속적인 논증이 아니라 언어 표현의 한계를 정확하게 보여주기 위해 고안된 일련의 명제에 의해 지성의 한계를 정의하기 시작했는데요. 마치 영원의 한 지점에서 온 것처럼 세상을 올바르게 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죠. 그리고 그 작품은 모든 철학적 문제가 해결되는 완전한 명확성의 꿈입니다.


[Music]


Philosophy must set limits to what can be thought; and in so doing, to what cannot be thought. It will signify what cannot be said, by presenting clearly what can be said. - Ludwig Wittgenstein


철학은 생각할 수 있는 것에 한계를 긋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의 한계를 긋는다. 말할 수 있는 것을 명백히 나타냄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을 알려주게 된다.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Music]


In November 1918, he was taken prisoner with the manuscript of the Tractatus in his pocket. It had accompanied him throughout the war. And in March of the following year, he wrote to Bertrand Russell with whom he had worked in Cambridge from a prisoner of war camp at Monte Cassino in Italy. “I have written a book containing all my work of the last six years. I believe that I have solved all our problems finally. This may sound arrogant but I can’t help believing it. I finished the book in August 1918, and two months after that was made prisoner. I wish I could send it to you but you would not understand it without a previous explanation, as it is written in quite short remarks. This, of course, means that nobody will understand it, although I believe it is as clear as crystal. But it upsets all our theories of truth, of classes, of numbers, and all the rest. I can hardly imagine seeing you again. It will be too much. I suppose that it will be impossible for you to come and see me here or perhaps you think it’s a colossal cheat for me to even to think of such a thing. But if you were on the other end of the world and I could come to you, I would do it. Think of me often. Ever yours, Ludwig Wittgenstein.


1918년 11월, 그는 주머니에 있는 <논리-철학 논고>의 원고와 함께 포로로 잡혔는데요. 전쟁 내내 억류되었죠. 그리고 이듬해 3월에는 이탈리아 몬테 카시노에 있는 포로수용소에서 케임브리지 동료 버트런드 러셀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나는 지난 6년간 내가 작업한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논리-철학 논고’라 불리는 책을 썼습니다. 나는 마침내 우리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했다고 믿습니다. 어쩌면 건방지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1918년에 나는 이 책을 완성했습니다. 나는 그 책을 1918년 8월에 완성하고 그로부터 두 달 후 포로가 되었습니다. 보내드리고 싶지만, 이 책은 상당히 짧은 문장으로 기술되어 있으므로 설명을 먼저 듣지 않고서는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수정처럼 분명하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계급, 수, 그리고 그 외의 모든 진리에 대한 우리의 모든 이론을 뒤엎습니다. 나는 당신을 다시 보는 것을 거의 상상할 수 없습니다. 너무 많을 것입니다. 당신이 여기 와서 나를 보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하거나 그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나에게 엄청난 속임수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세상의 반대편에 있고 내가 당신에게 갈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할 것입니다. 저를 자주 생각해주세요. 당신의 벗,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Music]


In its form, the Tractatus is unlike that of any other work in Western philosophy. The writing is oracular and extremely dense. It is presented as a series of 7 propositions with numbered subdivisions and the extraordinary combination of brevity and breadth of scope has made the Tractatus at once the most difficult, the most misunderstood and perhaps the most influential philosophical work of the 20th century. Wittgenstein had attempted to define the limits of the sayable in the conviction that everything that can be said, can be said clearly. He was concerned to dispel the belief that questions about the meaning of life could be captured in language.


형식 면에서 <논리-철학 논고>는 서양 철학의 다른 어떤 작품과도 다릅니다. 글은 신랄하고 극도로 조밀한 글이죠. 그것은 번호가 매겨진 일련의 7개 명제로 제시되며 범위의 간결함과 폭의 놀라운 조합은 <논리-철학 논고>를 20세기의 가장 어렵고 가장 오해를 많이 받고 어쩌면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 작품으로 만들었는데요. 비트겐슈타인은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모두 명료하게 말해질 수 있다는 확신 속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정의하려고 시도했죠. 그는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 언어로 포착될 수 있다는 믿음을 불식시키는 데 관심을 가졌습니다.


[Music]


If only one does not try to utter the unutterable, then nothing will be lost. - Ludwig Wittgenstein


만일 당신이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말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Music]


Language he said, could only depict states of affairs in the world. It could not express ultimate meaning, for that lies outside the facts and so, outside the world. He had proposed the idea that the limits of our language define the limits of our world, but that the meaning of the world or of life lies beyond the limits of language and therefore is expressible in words. This was the realm which Wittgenstein called the mystical and the Tractatus ends with the demanding proposition that in the face of the inexpressible we should remain silent.


그가 말한 언어는 세상의 상황을 묘사할 수 있을 뿐입니다. 궁극적 의미를 표현할 수 없었죠. 사실 밖에 있고 따라서 세상 밖에 있으니까요. 그는 우리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를 규정하지만, 세계 또는 삶의 의미는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서 말로 표현할 수 있다는 생각을 제안했죠.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이 신비하다고 불렀던 영역이었으며, <논리-철학 논고>는 표현할 수 없는 것에 직면하여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명제로 끝납니다.


[Music]


Whereof one cannot speak, one must be silent. - Ludwig Wittgenstein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Music]


While fighting in a war that was to end a long phase of European culture, Wittgenstein had written a work which absconded from history and sought life in eternity, not in time. The book appears to deal solely with symbolic logic and the nature of the linguistic proposition, and was understood by Bertrand Russell in just that way. But its fundamental concern is with ethics and aesthetics, as Wittgenstein himself pointed out when trying to get the work published.


유럽 문화의 긴 국면을 끝내기 위한 전쟁에서 싸우는 동안 비트겐슈타인은 역사에서 도피하고 시간이 아닌 영원 속에서 삶을 추구하는 작품을 썼는데요. 이 책은 오로지 상징적 논리와 언어적 명제의 본질만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버트런드 러셀도 그렇게 이해했죠. 그러나 비트겐슈타인 자신이 작품을 출판하려고 할 때 지적했듯이 그것의 근본적인 관심은 윤리와 미학에 있습니다.


[Music]


The point of the book is an ethical one. - Ludwig Wittgenstein


이 책의 요점은 윤리적인 것이다.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It does not deal expressly with ethical questions, however, because for Wittgenstein at this period there can be no sentences about ethics. Ethics and aesthetics, just as the meaning of the world and of art, are beyond the reach of language. Art, on the other hand, is a way of capturing the world and revealing something of its meaning. In this way art can force us to a right perspective.


그러나 이 시기의 비트겐슈타인에게는 윤리에 관한 문장이 있을 수 없으므로 윤리적 문제를 명시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데요. 윤리와 미학은 세계와 예술의 의미와 마찬가지로 언어의 범위를 벗어납니다. 반면에 예술은 세계를 포착하여 그 의미를 드러내는 방법이죠. 이런 식으로 예술은 우리를 올바른 관점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In accord with the whole thrust of the Viennese modernist movement, Wittgenstein believed that the artwork should not depict anything or be an expression of subjective intention. What the artwork should do is to exhibit a meaning that is not expressible in words. And he shared with Arnold Schönberg the conviction that art should not be decoration or entertainment but the profoundest form of knowledge that we have.


비엔나 모더니즘 운동의 전체적인 흐름에 따라 비트겐슈타인은 예술 작품이 어떤 것도 묘사하거나 주관적인 의도의 표현이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습니다. 예술 작품이 해야 할 일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의미를 보여주는 것이었죠. 그리고 그는 예술이란 장식이나 오락이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심오한 형태의 지식이어야 한다는 신념을 아르놀트 쇤베르크와 공유했습니다.


[Music]


Music is not merely another kind of amusement, but a musical thinker’s representation of musical ideas; and these ideas must correspond to the laws of human logic. - Arnold Schönberg


음악은 단순히 또 다른 류의 오락이 아니라 음악 사상가가 음악적 생각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인간 논리의 법칙과 일치해야 한다. - 아르놀트 쇤베르크


[Music]


The parallels between Schönberg’s thinking and the ideas expressed in the Tractatus are both striking and illuminating. Just as Wittgenstein sought the logic inherent in ordinary language, so Schönberg sought the essence of music in the logic of composition. Both men are radical innovators in the understanding and use of language; seeking a meaning in art, beyond subjective intention generated by the language of the artwork itself. From this, Schönberg created a new concept of the relationship between art and its language which brought about a fundamental change in the function of musical expression. His achievements are prodigious. He was largely self taught, which in music is unusual enough on its own. But very soon the rigorous logic of his thinking and his extraordinary understanding of compositional procedures which will make him the most influential musician and teacher of the 20th century; the autodidact who became the most inspired pedagogue of his time.


쇤베르크의 생각과 책자에 표현된 아이디어 사이의 유사점은 놀랍고도 분명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일상 언어에 내재한 논리를 추구했듯이 쇤베르크는 작곡 논리에서 음악의 본질을 추구했죠. 두 사람 모두 언어의 이해와 사용에 있어 급진적인 혁신가입니다. 예술 작품 자체의 언어가 만들어내는 주관적인 의도를 넘어 예술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죠. 이를 바탕으로 쇤베르크는 예술과 그 언어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음악적 표현의 기능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는데요. 그의 업적은 대단합니다. 그는 음악에서 그 자체로 충분히 이례적인 것을 대부분 독학으로 익혔거든요. 그러나 곧 그의 엄격한 사고 논리와 작곡 체계에 대한 비범한 이해는 그를 20세기의 영향력 있는 음악가이자 교사로 만들었는데요. 당대 가장 탁월한 교육자가 된 독학자였죠.


[Music]


He was born on the 13th of September, 1874 to parents of no particular musical interests or talent who ran a small shoe shop in Vienna. But he began nevertheless to learn the violin at the age of 8 and to listen intently to violin duets and to military bands in the public gardens.


그는 1874년 9월 13일 비엔나에서 작은 신발 가게를 운영하던, 특별한 음악적 관심이나 재능이 없는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8세에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하여 공공농원에서 바이올린 듀오와 군악대의 연주를 열심히 듣기 시작했죠.


[Music]


Soon he began to imitate them in compositions of his own. And by his early 20s, he was writing chamber music with a strong contrapuntal character and an advanced and daring use of chromatic harmony, most notably his sextet “Transfigured Night” which he wrote in 1899.


곧 그는 자신의 작품에서 그것들을 모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0대 초반까지 강한 대위법적 성격과 진보된 대담한 반음계 화성의 사용으로 실내악을 작곡했는데, 특히 1899년에 쓴 그의 6중주 <정화된 밤>이 대표적입니다.


[Music]


But after the turn of the century, Schönberg moved steadily away from the romantic aesthetic in a search for a new authenticity in music which would dispense with decoration and conventional rhetoric in an absolute unity of sound and expression. Here Schönberg and Wittgenstein echo each other to a remarkable degree, each of them trusting in the revelations of language. In the Tractatus, Wittgenstein had written, “What expresses itself in language we cannot express by means of language.”


그러나 세기가 바뀐 후 쇤베르크는 소리와 표현의 절대적인 단일성에서 장식과 관습적인 수사학을 생략할 음악의 새로운 진정성을 찾기 위해 낭만적인 미학에서 서서히 멀어졌습니다. 여기서 쇤베르크와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계시를 신뢰하며 놀라운 정도로 서로 공명합니다. <논리-철학 논고>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썼죠. “언어에서 표현되는 것을 우리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Music]


How words are understood is not told by words alone. - Arnold Schönberg


언어가 어떻게 이해되는가는 언어로만 말해지는 것이 아니다. - 아르놀트 쇤베르크


This captures precisely the aesthetic program of the music that Arnold Schönberg was writing in 1909. It has come to be known as his atonal music although he himself disliked the term and showed quite clearly that it could never serve as an adequate description of what he was doing. The new music is, like the Tractatus, a dream of absolute communication. A music in which passions are no longer simulated or represented but genuine expressions of the unconscious. In the words of the painter Wassily Kandinsky, “A new realm in which musical experience is a matter not of sound but of the soul alone. From this point,” says Kandinsky, “begins the music of the future.”


이것은 아르놀트 쇤베르크가 1909년에 작곡한 음악의 미학적 프로그램을 정확하게 포착합니다. 비록 그 자신이 그 용어를 싫어했고 그것이 그가 하고 있었던 것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보여주었지만, 그것은 그의 무조성 음악으로 알려지게 되었죠. 새로운 음악은 <논리-철학 논고>처럼 절대적인 의사소통의 꿈입니다. 열정이 더 이상 거짓으로 꾸며지거나 표현되지 않고 무의식의 진정한 표현인 음악이었죠.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음악적 경험은 소리가 아니라 영혼의 문제인 새로운 영역입니다. 이 시점에서 미래의 음악이 시작됩니다.”


[Vladimir Ashkenazy: Schönberg Piano Piece, Op. 11 No. 3 (1909)]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 쇤베르크 피아노 소품 작품 11-3]


I am conscious of having broken through all the fetters of a bygone aesthetic. - Arnold Schönberg


나는 과거의 미학의 모든 족쇄를 깨뜨렸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 아르놀트 쇤베르크


The third of the Opus 11 Piano Pieces was completed on the 7th of August 1909, a significant date in the history of music. This was the first instrumental composition to dispense entirely with the total means of organization. And in abandoning the use of the tonal center, Schönberg had dissolved the structures from which Western music had derived much of its sense of shape and order for 400 years. However, he said again and again, that he had not gone willingly or easily into the unknown. He had felt himself under the command of higher powers in a natural historical process. By freeing himself from the key system and convention of resolving dissonance, he felt that he had taken the next logical step in a long progression of harmonic developments, a process that been accelerated in the music of Wagner, Debussy, Richard Strauss, Mussorgsky and Mahler, until finally Schönberg himself set the seal on what he called the ‘emancipation of dissonance’ and so, brought to an end an epoch in European music. In a brief and extraordinarily productive period marking the highest point in musical expressionism and his own creativity, Schönberg produced a series of masterpieces which signal the turning point in the history of Western music.


피아노 소품 작품 11-3은 음악사에서 중요한 날짜인 1909년 8월 7일에 완성되었습니다. 이 곡은 구성의 총체적 수단을 완전히 배제한 최초의 기악 작품이었죠. 그리고 조성 중심의 사용을 포기함으로써 쇤베르크는 400년 동안 서양 음악이 형태 감각과 질서에 대한 많은 부분을 끌어낸 구조를 해체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미지의 세계로 가거나 쉽사리 가보지 않았다고 거듭 말했죠. 그는 자연적인 역사적 과정에서 자신이 더 높은 권력의 지휘 아래 있다고 느꼈습니다. 불협화음을 해결하는 핵심 체계와 관습에서 벗어난 그는 바그너, 드뷔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무소르그스키, 말러의 음악에서 가속화된 과정인 화성 전개의 긴 진행에서 다음 논리적 단계를 밟았다고 느꼈는데요. 마침내 쇤베르크는 자신이 ‘불협화음의 해방’이라고 부른 것을 완성하였으며, 그리하여 유럽 음악의 한 시대를 종식했습니다. 음악적 표현주의와 자신의 창의성의 정점을 찍은 짧고도 특별한 창작 기간에 쇤베르크는 서양 음악사의 전환점을 알리는 일련의 걸작들을 만들었죠.


[Music]


But the expressions to dream were soon to fade. In the desolation of war torn Europe, the heroic attempt at a new beginning seemed to Schönberg to lose much of its relevance. The order which he had so effectively challenged had suddenly been swept away forever, and the preoccupations with self and the direct expressions of the subconscious began to give way to a search for something of a higher order. In a letter to Kandinsky, he later recalled the beginnings of this new quest. “I expect you know that we have had our trials here too. Famine, it was appalling. But perhaps the worst was the overturning of everything that one has believed in. That was probably the most grievous thing of all. For a man to whom ideas have always been everything this means nothing less than the total collapse of things unless he has come to find support in a belief in something higher, something beyond.”


그러나 꿈꾸는 표정은 곧 시들기 시작했는데요. 전쟁으로 황폐해진 유럽에서 새로운 시작을 향한 영웅적인 시도는 쇤베르크에게 그 의미를 상실한 것처럼 보였죠. 그가 그토록 효과적으로 도전했던 질서는 갑자기 영원히 휩쓸려 버렸고, 자아에 대한 집착과 잠재의식의 직접적인 표현은 더 높은 질서의 무언가를 찾는 데 자리를 내주기 시작했죠. 칸딘스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나중에 이 새로운 탐구의 시작을 회상했습니다. “여기에서도 우리가 시련을 겪었다는 것을 알고 계실 거라 기대합니다. 기근, 그것은 끔찍했죠. 아마도 최악의 상황은 자신이 믿었던 모든 것이 무너지는 일일 것입니다. 어쩌면 가장 괴로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생각이 항상 모든 것이었던 사람에게 이것은 더 높은 것, 그 너머에 있는 것에 대한 믿음을 지지하지 않는 한 모든 것의 완전한 붕괴에 지나지 않아요.”


[Music]


During the war and in the five years following, Schönberg published nothing at all and Wittgenstein after the Tractatus abandoned philosophy for more than a decade. Both men had fallen silent. There is no parallel in the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with Ludwig Wittgenstein, no other philosopher who has lived out the terms of his own philosophy to the same degree. Because with Wittgenstein, his life and thought are in a very real sense one and the same. Certainly there is no philosopher of such accomplishment who could have given up philosophy completely through the conviction that he had solved all the problems with which he was concerned. But that is what happened. The author of the Tractatus fell silent and lived out his silence as a primary school teacher in Lower Austria, and in extremely simple conditions.


전쟁 기간과 그 후 5년 동안 쇤베르크는 아무것도 출판하지 않았으며 <논리-철학 논고> 이후 비트겐슈타인은 10년 이상 철학을 포기했는데요. 두 사람 모두 침묵했던 거죠. 서양 철학사에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과의 유사점은 없으며, 자신의 철학을 같은 정도로 실천한 철학자는 없죠. 비트겐슈타인에게 그의 삶과 사상은 매우 실제적인 의미에서 같으니까요. 확실히 그가 관련된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는 확신으로 철학을 완전히 포기할 수 있었던 그러한 성취의 철학자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일어났는데요. <논리-철학 논고>의 저자는 니더외스터라이히에서 초등학교 교사로서 침묵을 지켰으며, 지극히 단순한 상태에 있었죠.


[Music]


It was not until he began to look at the same problems from a different point of view that he would take up philosophy again, apparently with an entirely new idea. His silence was to last for 10 years. But during this period, he worked between 1926 and 1928 on the design and construction of a house in Vienna for his sister Margaret Stonborough. Believing her brother to have been in personal crisis since the end of the war and yet believing that he could achieve anything to which he applied himself, his sister had suggested the idea as a form of therapy. Although the project began in association with the architect Paul Engelmann, Wittgenstein soon took it over entirely and began to sign himself “Wittgenstein, architect”.


그가 완전히 새로운 아이디어로 철학을 다시 시작한 것은 같은 문제를 다른 관점에서 보기 시작할 때부터였는데요. 그의 침묵은 10년 동안 계속되어야 했죠. 그러나 이 기간에 그는 1926~1928년 비엔나에서 누나인 마르가레트 스톤보로를 위해 집을 설계하고 건설하는 일을 했는데, 그녀의 남동생이 전쟁이 끝난 후 개인적인 위기에 처해 있다고 믿으면서도 그가 자신에게 적용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던 그의 여동생은 이 아이디어를 치료의 한 형태로 제안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건축가 파울 엥겔만과 함께 시작되었지만, 비트겐슈타인은 곧 전체를 인수하여 “건축가 비트겐슈타인”이라고 서명하기 시작했죠.


[Music]


Remember the impression one gets from good architecture; that it expresses a thought. It makes one want to respond with a gesture. - Ludwig Wittgenstein


좋은 건축에서 얻는 인상을 기억하라. 생각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몸짓으로 대답하고 싶게 만든다.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Music]


Once again, he had broken new ground. The interior of the building is unique in 20th century architecture. Nothing is taken from established architectural theories or forms. It was described by his sister as “house embodied logic”. But even this apt, if startling, description does less than justice to Wittgenstein’s achievement. He gave himself entirely in his customary way to the design of every detail as much as to the whole and every aspect of the house embodies his logical and rigorous thinking.


다시 한번 그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는데요. 건물의 내부는 20세기 건축 양식에서 독특합니다. 확립된 건축 이론이나 형식에서 아무것도 취하지 않거든요. 그의 누나는 그것을 “집에 구현된 논리”로 묘사했죠. 그러나 이 적절한 것조차도 비트겐슈타인의 업적을 정당화하는 데에는 충분하지 않아요. 그는 집 전체뿐만 아니라 모든 세부 사항의 설계에 자신의 관습적인 방식으로 전적으로 몰두했으며 집의 모든 측면은 그의 논리적이고 엄격한 사고를 구현합니다.


[Music]


He had again set out to criticize that degenerate form of expression and to give shape and form to his ideas in the logic and the language of construction. And once again, he had succeeded. The result is one of the notable monuments to the 20th century.


그는 그 퇴보적인 표현 형식을 비판하고 논리와 구성 언어에서 그의 생각에 형태와 형식을 부여하기 시작했는데요. 그리고 또다시 성공했죠. 그 결과 20세기의 주목할만한 기념물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In 1929, the year following the construction of the house in Vienna, Wittgenstein returned to the University of Cambridge to work on the development of his new philosophical ideas. He had studied here with Bertrand Russell between 1911 and 1913, and within a year had had a decisive impact on Russell’s work in logic. As Russell himself was later to put it, “Wittgenstein persuaded me that what one wanted to do in logic was too difficult for me and philosophy lost its hold on me.” Now Wittgenstein himself was to move away from formal logic as a means of explaining the significance and scope of language.


1929년, 비엔나에 집을 지은 이듬해에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새로운 철학적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기 위해 케임브리지 대학교로 돌아왔는데요. 1911~1913년 여기에서 버트런드 러셀과 함께 공부했으며, 1년 이내에 러셀의 논리학 작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러셀 자신이 나중에 말했듯이, “비트겐슈타인은 논리학에서 하고 싶은 것이 내게 너무 어렵고 철학이 나를 지배하지 못한다고 설득했습니다.” 이제 비트겐슈타인 자신은 언어의 의미와 범위를 설명하는 수단으로써 형식적인 논리학에서 벗어나야 했습니다.


I was unclear in the Tractatus about logical analysis and the clarification which it gives. I used to think that there was a direct connection between language and reality. - Ludwig Wittgenstein


나는 <논리-철학 논고>에서 논리적 분석과 그것이 제공하는 설명에 대해 명확하지 않았다. 나는 언어와 현실 사이에 직접적인 연결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The Tratatus had embodied a fundamental idea that all languages have an underlying and uniform logical structure which might be discovered by philosophical and logical inquiry. And Wittgenstein had proposed the thought that the structure of language pictures the structure of reality. But this conviction had begun to wane during his 10 years away from formal philosophy. He began to feel now that the reverse was true, that our language actually determines our view of reality. And he began to see the importance of language in its very diversity as the bearer of tradition and custom.


<논리-철학 논고>는 모든 언어가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탐구에 의해 발견될 수 있는 기본적이고 균일한 논리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근본적인 아이디어를 구현했습니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구조가 현실의 구조를 묘사한다는 사상을 제안했죠. 그러나 이러한 확신은 형식적인 철학을 떠나 10년 동안 쇠퇴하기 시작했는데요. 그는 이제 그 반대가 사실이며 우리의 언어가 실제로 현실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결정한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죠. 그리고 그는 전통과 관습의 전달자로서 언어의 다양성에서 언어의 중요성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His prime concern was still with the limits of language. But instead of deducing his conclusions by logic from a single theory as he had done in the Tractatus, he now set out to discover those limits by empirical investigation of the way in which language functions in society as a part of human life.


그의 주요 관심사는 여전히 언어의 한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논리-철학 논고>에서 했던 것처럼 단일 이론에서 논리적으로 결론을 도출하는 대신, 이제 언어가 인간 생활의 일부로서 사회에서 기능하는 방식에 대한 경험적 조사를 통해 그러한 한계를 발견하기 시작했죠.


To imagine a language is to imagine a form of life. - Ludwig Wittgenstein


하나의 언어를 상상한다는 것은 하나의 생태형식을 상상한다는 뜻이다.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In the Tractatus he had sought a common essence in all languages. But now he speaks of countless forms of language which he describes as language games and which we use as tools for apprehending the world. In this way, he sees the philosophical grammar of language as the grammar of the life of humanity. The change in perspective is significant but subtle, and he felt strongly that the second philosophy should be printed together with the first because he believed that it could only be intelligible as an extension of his earlier work. He remained true to the conviction expressed in the Tractatus that philosophy is an activity, not a doctrine. But he comes now to stress its critical and therapeutic intent.


<논리-철학 논고>에서 그는 모든 언어에서 공통된 본질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가 언어 게임으로 묘사하고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했던 수많은 형태의 언어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이런 식으로 그는 언어의 철학적 문법을 인류의 삶의 문법으로 봅니다. 관점의 변화는 의미심장하지만 미묘하며, 그는 제2의 철학을 전작의 연장선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제1의 철학과 함께 인쇄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느꼈죠. 그는 철학은 교리가 아니라 활동이라는 <논리-철학 논고>에 표현된 확신의 진리에 충실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그것의 비판적이고 치료적인 의도를 강조하게 되었죠.


Philosophy, as we use the word, is a fight against the fascination which forms of expression exert upon us. - Ludwig Wittgenstein


철학은 언어라는 수단을 통해 지성의 마법에 대항하는(우리 지성에 걸린 주술과 벌이는) 싸움이다.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He felt himself at odds with the spirit of contemporary European and American civilization and he saw the task of the new philosophy as one of exposing the disorder in language and hence, in the life of the community. He was deeply disturbed by what he felt to be the decline in European culture. Passing a bookshop one day he saw in the window portraits of Russell, Einstein and Freud. And shortly afterwards, in a music shop, portraits of Beethoven, Schubert and Chopin. And he said that he felt intensely the degeneration of the human spirit that had taken place in only one hundred years. His sense of alienation flowed primarily from the belief that Western civilization had accepted a general faith in science as a solution to the problems of life. People nowadays think that scientists exist to instruct them while poets and musicians exist to give them pleasure; the idea that the latter have something to teach them: that does not occur to them.


그는 자신이 현대 유럽과 미국 문명의 정신과 동떨어져 있다고 느꼈고, 새로운 철학의 임무는 언어의 무질서를, 따라서 공동체의 삶에서 폭로하는 것 중 하나로 보았습니다. 그는 유럽 문화의 쇠퇴에 대해 느끼는 감정에 깊이 동요했는데요. 어느 날 그는 서점을 지나다가 창가에서 러셀, 아인슈타인, 프로이트의 초상화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음악 상점에는 베토벤, 슈베르트, 쇼팽의 초상화가 있었죠. 그리고 그는 불과 100년 만에 일어난 인간 정신의 퇴화를 뼈저리게 느꼈다고 말했는데요. 그의 소외감은 주로 서구 문명이 과학에 대한 일반적인 믿음을 삶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받아들였다는 믿음에서 비롯되었죠. 오늘날 사람들은 과학자란 그들을 가르치기 위해 존재하는 반면 시인과 음악가는 즐거움을 주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데, 후자는 그들에게 일어나지 않는 무언가를 가르칠 것이 있다는 아이디어입니다.


[Music]


It is striking how often Wittgenstein turns to music when investigating the functioning of language in the conviction that understanding a musical phrase is akin to understanding a language. “What happens,” Wittgenstein asks, “when we learn to feel the ending of a church mode as an ending?” And he invites the answer, “The historical practice of European music has codified itself in rules with which we had grown familiar.” And so music is the expression of its own history and of the life of mankind.


비트겐슈타인이 음악적 표현을 이해하는 것이 언어를 이해하는 것이라는 신념으로 언어의 기능을 조사할 때 얼마나 자주 음악으로 눈을 돌렸는지 놀라운데요.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질문합니다. “우리가 교회 선법으로 마무리하는 것을 끝으로 느끼는 법을 배우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유럽 음악의 역사적 관행은 우리가 익숙해진 규칙에 따라 체계화(성문화)되었습니다.” 따라서 음악은 그 자체의 역사와 인류의 삶을 표현하는 것이죠.


[Music]


Wittgenstein’s new perspective and his new focus on cultural history has strong parallels once again with the developing work and ideas of Arnold Schönberg. Just as Wittgenstein’s philosophical inquiry had shifted from the idea of a given logic in language to an investigation of the way in which language functions in everyday use, so Schönberg turned from the search for direct expressions for the logic of composition, to the idea of a new and better musical order that would give a new relevance to music in the 20th century. On a walk with his pupil, Josef Rufer, in 1921, he announced that he had made a discovery which would assure the pre-eminence of German music for the next 100 years – a statement not so much of national pride as of artistic aspiration. He had been working on the idea since 1917 and in the summer of 1921, on holiday on the Traunsee, in the Austrian Salzkammergut, he composed the Prelude to the Opus 25 Piano Suite – the first composition in what has come to be known as serial technique or composition with 12 tones.


비트겐슈타인의 새로운 관점과 문화사에 대한 새로운 초점은 아르놀트 쇤베르크가 발전시킨 작품 및 아이디어와 다시 한번 강한 유사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가 언어에 주어진 논리라는 관념에서 언어가 일상적인 사용에서 기능하는 방식에 대한 조사로 옮겨갔듯이 쇤베르크는 직접적인 표현을 찾는 것에서 작곡의 논리로 방향을 틀었고, 20세기 음악에 새로운 관련성을 부여할 새롭고 더 나은 음악적 질서에 대한 아이디어로 눈을 돌렸죠. 1921년에는 자신의 제자인 음악학자 요제프 루퍼와 함께 산책하면서 다음 100년 동안 독일 음악의 탁월함을 보장할 발견을 했다고 발표했는데, 국가적 자부심이라기보다는 예술적 열망을 담은 성명이었죠. 그는 1917년부터 그 아이디어에 착수해왔으며, 1921년 여름에는 오스트리아 잘츠카머구트의 트라운제 호수에서 휴가를 보내면서 작품 25 피아노 모음곡 중에서 전주곡을 작곡했는데, 음렬 기법 또는 12음 기법으로 알려지게 된 곡의 첫 작품입니다.


[Vladimir Ashkenazy: Schönberg Piano Suites, Op. 25: I. Prelude]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 쇤베르크 피아노 모음곡 작품 25 중 전주곡]


I called this procedure Method of Composing with 12 Tones which are Related Only to One Another. - Arnold Schönberg


나는 이 방법을 12개의 서로 연관된 음만을 사용한 작곡 방법이라고 명명하였다. - 아르놀트 쇤베르크


He had come to recognize that the compositions of the atonal period, while freeing music from its inherited limitations had, by the very process of innovation, destroyed much as well. New and colorful harmony had been won but much had been lost in the process. And in particular possibilities for development had been sacrificed. The 12 notes of the chromatic scale had, of course, always been their internal music. It was the organizing principle of the key system that had been broken down by the process of increasing dissonance. And so now he set out in serialism to replace the 7 notes of the diatonic scale with all 12 notes of the chromatic scale but in a prearranged order. He hoped by this to guarantee both unity and the possibility of continuous development within the structure of the piece. Apart from that, he felt that composition should proceed along the same lines as it had always done and pursue the same ends. The same impulse which lay behind the music of the brave atonal period is still there: to free music from the limitations of conventions that had lost their meaning in a changed world. But in place of the defiant, heroic gesture of the artist trusting in the force of his own unconscious, Schönberg had now taken on the even more heroic task of finding and codifying a new language from music which aspired to a higher order.


그는 무조성 시대의 작곡이 음악의 유전적 한계에서 해방되는 동시에 혁신의 과정에서 많은 것을 파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요. 새롭고 다채로운 화성을 얻었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잃었죠. 그리고 특히 발전할 가능성이 희생되었습니다. 반음계 스케일의 12음 기법은 물론 항상 내부 음악이었는데요. 불협화음이 증가하는 과정에 의해 무너진 것은 조성 체계의 구성 원리였죠. 그래서 이제 그는 온음계 스케일의 7개 음을 반음계의 모든 12개 음으로 대체하기 위해 음렬주의(12음 기법)에 착수했는데요. 그는 이것을 통해 곡의 구조 내에서 통일성과 지속적인 발전 가능성을 모두 보장하기를 희망했습니다. 그와 별개로, 그는 작곡이 늘 그래왔듯이 같은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하고 같은 목적을 추구해야 한다고 느꼈죠. 용감한 무조음 시대의 음악 뒤에 숨겨진 동일한 충동이 여전히 존재하는데요. 변화된 세계에서 의미를 잃은 관습의 한계로부터 음악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죠. 그러나 그 자신의 무의식의 힘을 믿는 예술가의 도전적이고 영웅적인 몸짓 대신, 쇤베르크는 이제 더 높은 질서를 갈망하는 음악에서 새로운 언어를 찾아 체계화하는 훨씬 더 영웅적인 임무를 떠맡게 되었습니다.


This music was distinctly a product of evolution, and no more revolutionary than any other development in the history of music. - Arnold Schönberg


이 음악은 분명히 진화의 산물이었고, 음악 역사상 다른 어떤 발전보다 더 혁명적이지 않았다. - 아르놀트 쇤베르크


[Vladimir Ashkenazy: Schönberg Piano Suites, Op. 25: I. Prelude (1921)]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 쇤베르크 피아노 모음곡 작품 25 중 전주곡]


Composition with 12 Tones has no other aim than comprehensibility. - Arnold Schönberg


12음 기법으로 쓴 작품은 이해력 외에 다른 목적이 없다. - 아르놀트 쇤베르크


If people speak of me, they at once connect me in horror with atonality and with composition with 12 tones. Perhaps they do not sufficiently consider that I am trying to say something which cannot be so easily or immediately grasped. By the most advanced analysis of Western music ever undertaken, Schönberg had showed why the compositional procedures of the past had lost their power and relevance for the 20th century composer. But now, like Wittgenstein, he too, directed a new attention to tradition and custom and he set out to integrate the advances of his early work with the inheritance of the 18th and 19th centuries. He saw in this the possibility of preserving the integrity of the great central tradition of Western European music. And it became his most pressing concern.


사람들이 저에 대해 말한다면, 그들은 한때 저를 무조와 12음 기법으로 된 작품으로 공포에 빠뜨렸는데요. 어쩌면 그들은 제가 그렇게 쉽게 또는 즉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고 한다는 것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연구된 서양 음악에 대한 가장 진보된 분석을 통해 쇤베르크는 과거의 작곡 체계가 20세기 작곡가에 대한 영향력과 관련성을 상실한 이유를 보여주었죠. 그러나 이제 비트겐슈타인처럼 그도 전통과 관습에 새로운 관심을 기울였으며, 초기 작품의 발전을 18세기 및 19세기의 유산과 통합하기 시작했는데요. 그는 여기서 서유럽 음악의 위대한 중심 전통의 완전성을 보존할 가능성을 보았죠. 그리고 그것은 그의 가장 시급한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Others conserve bad things. I am conservative, too. But I, I conserve the progress. - Arnold Schönberg


다른 사람들은 나쁜 것들을 보존한다. 나도 보수적이다. 그러나 나, 나는 진보를 보존한다. - 아르놀트 쇤베르크


He felt intensely the need to contribute both to the development and to the continuity of the European musical tradition. And he saw serialism as the most effective way possible of continuing the exploration of musical ideas within that tradition from Bach to the present day.


그는 유럽 음악전통의 발전과 지속성에 기여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음렬주의(12음 기법)가 바흐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전통 내에서 음악적 아이디어의 탐구를 계속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보았죠.


I do not attach so much importance to being a musical bogeyman as to being a natural continuer of properly understood good old tradition. - Ludwig Wittgenstein


제대로 이해된 오랜 전통의 자연스러운 계승자가 되는 것처럼 음악의 귀신이 되는 것이 내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But at the same time he foresaw with disturbing clarity the hostility that his work would provoke and it made him fiercely defensive. Hearing one day that the famous conductor did not conduct his music because he did not understand it, he responded, “Why did he have to become me in this sudden burst of wanting to understand? He’s been conducting classics for years without understanding.” Schönberg and the Viennese modernists had attacked the bogus traditionalism of a society doomed to extinction. But when destruction came so irrevocably and so soon, the greatest revolutionary mind in 20th century music came to seek ways of preserving tradition in a new context, with music that is radically new in its language but organically linked to the past in its content; that is the delicate synthesis that constitute Arnold Schönberg’s conservative revolution.


그러나 동시에 그는 자신의 작품이 불러일으킬 적대감을 혼란스러울 정도로 명확하게 예견했고, 그것이 그를 맹렬하게 방어적으로 만들었는데요. 어느 날 유명한 지휘자가 자신의 음악을 이해하지 못해서 지휘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를 갑자기 이해하고 싶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이해하지 못한 채 몇 년 동안 클래식을 지휘하고 있거든요.” 쇤베르크와 비엔나의 모더니스트들은 사라질 위기에 처한 사회의 가짜 전통주의를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파괴가 돌이킬 수 없이 너무 빨리 닥치자 20세기 음악의 가장 위대한 혁명가 정신은 새로운 맥락에서 전통을 보존하는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을 때, 언어 면에서 근본적으로 새로우나 내용 면에서 과거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음악과 함께, 그것은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보수적 혁명을 구성하는 보수적인 결합입니다.


I was a conservative who was forced to become a revolutionary; but what I did was neither revolution nor anarchy. - Arnold Schönberg


나는 혁명적으로 되기를 강요당한 보수주의자이다. 그러나 내가 한 것은 혁명도 무질서도 아니었다.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He began even to see the role of the composer in a different light, as much prophet as artist – an attitude conditioned in part by the First World War and then by the rise of Nazism which cost him his post at the Berlin Academy and finally forced him to flee for his life. For some years he had been exploring Jewish themes in his work and in Paris in 1933, already in exile, he returned to the faith of his fathers and rejoined the Jewish religious community. He had embarked on an immense spiritual quest to reinterpret in a higher and better order not only his own previous experience but the very course of musical history itself as he knew and profoundly understood it. He declared his teachers in this to have been Bach and Mozart in the first place and Beethoven, Wagner, and Brahms in the second.


그는 작곡가의 역할을 예술가 못지않게 예언자적 관점으로 보기 시작했는데요. 이러한 태도는 부분적으로는 1차 세계 대전과 나치즘의 부상으로 인해 결정되었고, 그로 인해 베를린 아카데미에서 해임되었으며, 마침내는 목숨을 위해 도피해야만 했죠. 몇 년 동안 그는 작품에서 유대인 주제를 탐구해 왔으며 이미 망명 생활을 하고 있던 1933년 파리에서 아버지의 신앙으로 돌아가 유대인 종교 공동체에 다시 합류했는데요. 그는 자신의 이전 경험뿐만 아니라 자신이 알고 깊이 이해했던 음악사 자체의 과정 그 자체를 더 높고 더 나은 질서로 재해석하려는 엄청난 영적 탐구에 착수했죠. 그는 이 부분에서 자신의 스승들을 1위는 바흐와 모차르트, 2위는 베토벤, 바그너, 브람스라고 선언했습니다.


I venture to credit myself with truly new music which, being based on tradition, is destined to become tradition. - Arnold Schönberg


나는 전통을 기반으로 하여 전통이 될 진정으로 새로운 음악에 대해 감히 나 자신을 인정한다. - 아르놀트 쇤베르크


And so the birth of serialism was both a reintegration of history and a development from Schönberg’s atonal music, not a retreat from it. It is in this that the true measure of his greatness lies and if in the opening bars of the Largo from his last Quartet there are unmistakable echoes from the Jewish liturgy, they represent not, as some have suggested, the retreat of a failing spirit from the brave gestures of 1909, but a statement of faith in our creative traditions and a courageous cry from the heart of this most passionate of musicians.


따라서 음렬주의(12음 기법)의 탄생은 역사의 재통합이자 쇤베르크의 무조성 음악이지, 후퇴가 아니었죠. 그의 위대함의 진정한 척도는 바로 이것에 있으며, 그의 마지막 4중주에서 3악장 라르고가 시작되는 마디들에 유대인 전례(예배식)의 명백한 메아리가 있다면, 그것은 일부 사람들이 제안한 것처럼 쇠약해진 영혼이 교회에서 퇴각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1909년의 용감한 몸짓이지만, 우리의 창조적 전통에 대한 믿음의 상태이자 가장 열정적인 음악가들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용감한 외침입니다.


[Allegri String Quartet: Schönberg String Quartet No. 4, Op. 37: III. Largo (1936)


[알레그리 스트링 콰르텟 - 쇤베르크 스트링 콰르텟 4번 3악장]


The Method of Composing with 12 Notes grew out of necessity. - Arnold Schönberg


12음 작곡 기법은 필연적으로 발생하였다. - 아르놀트 쇤베르크


“And although the goal towards which I’m striving appears to me a certain one, I’m nonetheless already feeling the resistance that I should have to overcome. I feel how passionately even the meanest of temperaments will rise in revolt against me. And I suspect that even those who have so far believed in me will not want to acknowledge the necessary nature of this development.” And so it happened that the state in which nobody ever said what they meant (to use the words of Robert Musil) produced in time a generation of critical artists and thinkers determined to say clearly exactly what they meant and to find new ways in which to say it; among them, two astonishingly creative temperaments whose courageous efforts to contribute to European culture have altered the course of that culture forever. As young men, both made bold strides into the unknown and with lasting effect. The languages of the new philosophy and the new music reflected a world transformed almost beyond recognition. But at the same time they embodied a sharply critical intention and paved the way for a new epoch in European history.


“그리고 제가 추구하는 목표가 확실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극복해야 할 저항을 이미 느끼고 있습니다. 아무리 천박한 기질이라도 제게 반기를 들게 되면 얼마나 격렬하게 일어날지 실감이 납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저를 믿어주신 분들도 이러한 발전의 필연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따라서 (로베르트 무질의 말을 빌리자면) 아무도 그 말의 의미를 말한 적이 없는 상태에서 한 세대의 비판적 예술가들과 사상가들은 그들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말하고 새로운 방법을 찾기로 했는데, 그중에는 유럽 문화에 기여하려는 용감한 노력이 그 문화의 흐름을 영원히 바꿔놓은, 놀랍도록 창의적인 기질을 지닌 두 사람이 있었는데요. 젊은 남성으로서 두 사람은 미지의 세계로 대담한 발걸음을 내디뎠죠. 새로운 철학과 새로운 음악의 언어는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모한 세계를 반영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날카로운 비판적 의도를 구현하여 유럽 역사의 새로운 시대를 위한 길을 닦았죠.


Perhaps, one day, this civilization will produce a culture. When that happens there will be a real history of the discoveries of the 18th, 19th and 20th centuries. - Ludwig Wittgenstein


언젠가는 이 문명이 문화를 낳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18, 19, 20세기의 발견에 대한 실제 역사가 있게 될 것이다.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But both men then found themselves at odds with the spirit of contemporary European civilization. And for a time, both fell silent. Their work then became a struggle against what Wittgenstein called the darkness of this time, critical of the present, but in deep awe of the achievements of the past. Both men sought to define a spiritual attitude which would reanimate those achievements in order to give sense and purpose to the present. They lived out the terms of their own philosophies to a degree that few have ever achieved. Both struggled for a lifetime without fear or compromise to answer the questions which they found before them. And in so doing, they changed the course of European thought. Both then died in exile: Ludwig Wittgenstein in Cambridge and Arnold Schönberg in Los Angeles, and both in the same year, 1951. They are without question among the principal architects of the imagination of our time. Although it is arguable that to this day the real meaning of their work has not yet been fully comprehended – certainly, both are more imitated for their technical innovations than understood in the spirit of their work – it is nevertheless true that Arnold Schönberg shaped the evolution of modern music more decisively than any other modern musician. It may even be said that without Schönberg most of modern music as we know it would not have come into being. And similarly, Ludwig Wittgenstein’s conviction that all philosophy is a critique of language has dominated the philosophical consciousness of the Western world in the 20th century.


그러나 두 사람은 현대 유럽 문명의 정신과 모순되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둘 다 침묵했죠. 그 후 그들의 작품은 비트겐슈타인이 이 시대의 어둠, 현재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지만 과거의 성취에 대한 깊은 경외심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투쟁이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현재에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기 위해 이러한 성취를 되살릴 영적 태도를 정의하려고 했는데요. 거의 달성하지 못한 정도로 자신들의 철학을 실천했죠. 둘 다 평생 두려움이나 타협 없이 자신이 발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고군분투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유럽 사상의 방향을 바꾸었죠. 그 후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케임브리지에서, 아르놀트 쇤베르크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망명 중에 사망했는데, 같은 해인 1951년이었습니다. 그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우리 시대 상상력의 주요 건축가 중 하나입니다. 오늘날까지 그들의 작품의 진정한 의미가 아직 완전히 이해되지 않았다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확실히 둘 다 작품의 정신으로 이해되는 것보다 기술적인 혁신을 위해 더 많이 모방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놀트 쇤베르크가 다른 어떤 현대 음악가보다 더 결정적으로 현대 음악의 진화를 형성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쇤베르크가 없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현대 음악이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죠. 그리고 마찬가지로 모든 철학은 언어에 대한 비판이라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신념은 20세기 서구 세계의 철학적 의식을 지배해 왔습니다.


Philosophy is a battle against the bewitchment of our intelligence by language. - Ludwig Wittgenstein


철학은 언어라는 수단을 통해 지성의 마법에 대항하는(우리 지성에 걸린 주술과 벌이는) 싸움이다.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Allegri String Quartet: Excerpts from Schönberg String Trio Op. 45]


[알레그리 스트링 콰르텟 - 쇤베르크 스트링 트리오 발췌]


Silver Medal (Music), New York International Film and Television Festival 1985


1985 뉴욕 필름 & 텔레비전 페스티벌 음악 부문 은상



자막 정리한 것을 찾아서 받아쓰기한 다음 외국 분한테 수정을 부탁해서 다듬었다. 내가 듣고 나서 다듬긴 했지만 번역하면서 다시 다듬어야 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쓴 <논리-철학 논고>는 철학서 중에서도 엄청 어렵다는 책이라고 했다. 그의 책에서 인용한 구절들에 대한 번역을 가능하면 구글링을 동원하여 찾았다. 번역을 다 구하진 못했다. 책 전체를 찾았으면 모를까. 이럴 땐 도서관에 가봐야 하나 고민해보기도 하지만 코로나19 때문에 어쩔 수 없다. 1차 세계 대전 때 오른팔을 잃은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알고 보니 루트비히의 형! 성이 같아서 관련 인물인지 아닌지 의아했다. 파울을 위해 라벨을 비롯한 몇몇 작곡가들이 왼손을 위한 곡들을 써줬다. 그중 하나가 라벨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