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30일 토요일

DVD / We Want the Light 2004



https://www.youtube.com/watch?v=S9MIbHdUVFs

https://search.alexanderstreet.com/preview/work/bibliographic_entity%7Cvideo_work%7C2369340


“절대로 놓칠 수 없는 다큐멘터리” - 타임스


우리는 빛을 원해요.

나치 캠프라는 특별한 장소에서 자유와 생존의 의미를 일깨워준 크리스토퍼 누펜의 강력한 영상물이다.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다니엘 바렌보임, 에프게니 키신, 주빈 메타, 이차크 펄만, 핀커스 주커만 등 세계의 거장들이 대거 출연하는 증보판 음악 다큐멘터리! 말러, 바흐, 쇤베르크, 브루흐, 슈만, 멘델스존, 바그너, 슈베르트, 브람스의 음악들이 가득 담겼다.


뮤지컬 오피니언, BBC 뮤직 매거진, 그라모폰, 클래식 FM 등 음악 관련지에 대대적인 광고를 했거나 하고 있고, 2004년 뉴욕 영화 &TV 페스티벌의 베스트 편집상, 2004년 영화 & TV 부문의 유대 문화상을 수상했는가 하면, 영국의 유력 일간지에 오늘의 영상물, 편집자의 선택 등에 등극하며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아이템이다.


21세기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자유의 의미를 새삼 음미하게 만들어 주는 감동적인 DVD다.


Vladimir Ashkenazy

Daniel Barenboim

Evgeny Kissin

Zubin Mehta

Itzhak Perlman

Pinchas Zukerman

The Gurzenich Orchestra of Cologne

The Cologne Opera Chorus

The Cologne Cathedral Children's Choir

Vladimir Ashkenazy, conductor


연주 : 쾰른 귀르체니히 오케스트라 / 쾰른 오페라 합창단 / 쾰른 교회 어린이 합창단

지휘 :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Music]


Tom Wesel: In the years of anxiety before the First World War, a Jewish one composer, Gustav Mahler, sounded a new tone in German symphonic music, a tone of ambivalence and immense. Visions of a remote world of peace are threatened by violence.


톰 베젤 : 1차 세계 대전 이전의 불안한 시대에 유대계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는 독일 교향곡에서 새로운 음색, 즉 양면성과 거대한 음색을 울렸습니다. 평화의 외딴 세계에 대한 비전은 폭력으로 위협받고 있습니다.


[Music]


Tom Wesel: This music is rooted in a 150 years of German symphonic thought, but its nervousness and suspenseful body are characteristic of Jewish art and thought in the early 20th century. They opened the way to the modernness movement and marked the beginning of the end of many things for the Western world. Mahler’s music with its depth to Richard Wagner is both powerfully German and intensely Jewish. It is also a summation, a farewell and an omen. It has been said that Mahler told what was coming in the language of the past, and he knew very well that he was paving the way for a new era in music. What he could not see was that the epoch that was ending was to signal also the end of a remarkable period of harmony and mutual enrichment between Germans and Jewish.


톰 베젤 : 이 음악은 150년간의 독일 교향곡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그 긴장과 긴장된 몸은 20세기 초 유대인들의 예술과 사상의 특징입니다. 그들은 근대 운동의 길을 열었고 서구 세계의 많은 것에 대한 종말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깊이를 지닌 말러의 음악은 강력하게 독일식이면서도 동시에 대단히 유대식입니다. 집대성, 고별, 조짐이기도 하죠. 말러는 과거의 언어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을 말했으며, 그는 자신이 음악의 새 시대를 여는 길을 잘 닦고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볼 수 없었던 것은 종말을 고하는 시대가 독일인과 유대인 사이의 놀라운 조화와 상호 풍요의 시대의 끝을 알리는 신호라는 것이었죠.


[Music]


Tom Wesel: Nor could he know that Germany was soon to visit on European jury, a cataclysm of violence, hatred and unimaginable terror that would condemn his own niece, Alma Rosé, to imprisonment in the Nazi death camp, and bring to an end a process of Jewish assimilation in the Germany society which had lasted from more than a 100 years and in which music had played such a significant role.


톰 베젤 : 그는 독일이 곧 유럽의 배심원단을 방문할 것이라는 사실도 알 수 없었고, 폭력, 증오, 상상할 수 없는 공포의 대격변으로 자신의 조카 알마 로제가 나치 사형수 수용소에 수감되어 100년 이상 지속되고 음악이 그토록 중요한 역할을 해온 독일 사회에서의 유대인 동화 과정이 종식될 것이라는 사실도 알 수 없었죠.


[Music]


Elyakim Ha’etzni: It’s not by, by chance that so many of the greatest lights in music, who enrich humanity immeasurable are Germans. So there is something in the German, ah, nature which, which gives us music, which, which... and, and the Ger... and, and it is a question of... you have it in your nature, you cultivate it, you cultivate it, it gets deeper into your nature, etcetera, etcetera,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Yes, it is, ah... it is being very tragic that the Germans and the Jewish... you see the, the, the, uhm... a Masmidim, the exterminators and the exterminated, the, the, the prosecutors and the victim, they meet on the ground of music. You see, for me, it is not easy... and to listen to the Matthäus-Passion sounds so special because we are accused there of something very terrible but the music is, is such that you cannot, ah... you cannot withstand it.


엘리야킴 하에츠니 : 인류를 헤아릴 수 없이 풍요롭게 하는 음악의 가장 위대한 빛 중 다수가 독일인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래서 독일 음악에는 뭔가가 있는데, 아, 우리에게 제공하는 자연이 있으며... 독일 음악에는... 그리고 당신은 자연을 가꾸고, 대대로 당신의 본성 등등에 더 깊숙이 들어가죠. 예, 독일인과 유대인이... 아시다시피 음... 마스미딤, 학살한 자들과 학살당한 자들, 그리고 희생자들, 그들은 음악을 바탕으로 만납니다. 아시다시피 제게는 쉽지 않으며... 마태 수난곡을 듣는 것은 매우 특별한데, 왜냐하면 우리는 그곳에서 매우 끔찍한 뭔가에 대한 비난을 받지만, 음악은 비난을 견딜 수 없으니까요.


Tom Wesel: German music was a latecomer in the European concept. And yet, when it came, its first great master, Johann Sebastian Bach, was to become a point of reference by everything that followed. For many, the most universal, the most expressive and the most technically accomplished musician who ever lived. He was also the most mystical.


톰 베젤 : 독일 음악은 유럽 관념의 후발주자였습니다. 그러나 독일 음악이 생겨났을 때, 첫 번째 위대한 거장인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뒤따르는 모든 것의 기준점이 되었죠. 많은 사람에게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표현력이 풍부하며 기술적으로 가장 뛰어난 음악가입니다. 그는 가장 신비로운 사람이기도 했죠.


Alice Sommer: This is so like the bible. I would... I would compare Bach with bible. Their book of, of hu... hu... humanity and their music of humanity, the same language, actually. The same language.


알리스 좀머 : 이것은 마치 성경과 같아요. 저는... 바흐를 성경과 비교할 거예요. 인류에 관한 그들의 책과 인류에 관한 그들의 음악은 실제로 같은 언어입니다. 같은 언어죠.


[Music]


Alice Sommer: Beethoven and Mozart learned from him. He, he inspired all. All. So, he is, say... he is, say, inventor. He’s source of this beauty.


알리스 좀머 : 베토벤과 모차르트는 그의 음악에서 배웠습니다. 그는 모두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모두에게요. 그래서 그는 말하자면... 그는 발명가입니다. 그는 이 아름다움의 근원이죠.


Tom Wesel: And so began the music that was to become a cornerstone of musical expression in the Western world for the next 200 years and more. The reasons are not far to seek. They lie in the work of a whole host of composers and performers from Bach to Schönberg, who built the German musical tradition.


톰 베젤 : 따라서 앞으로 200년 넘게 서구 세계에서 음악적 표현의 초석이 될 음악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독일 음악전통을 구축한 바흐부터 쇤베르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작곡가와 연주자들의 작품에 있죠.


[Music]


Tom Wesel: But the early years, from Bach to the Viennese classicism of Haydn, Mozart and Beethoven came to soon for the Jewish to participate. Because music was sustained by the church and the closed aristocratic circles from which the Jews were excluded.


톰 베젤 : 그러나 초기에는 바흐에서 빈 고전주의(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에 이르기까지 유대인들이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음악은 교회와 유대인들이 배제된, 폐쇄된 귀족 집단에 의해 유지되었기 때문이죠.


Pinchas Zukerman: So as foreigners, even though we had the passports, as foreigners, we were always put behind a state of... behind a little some sort of a wall. And therefore, in order to preserve identity and Jewish guide, we did basically three things. We made a lot of children. There were 8 to 10 children in every family. My father had 8 brothers and sisters. Ah, the religion played a huge factor. And I’m not just talking about Passover services, really learning the term with, understanding the nuances of the sentences, of all those mavens for many, many years before that put this down on as a way to follow. Uhm, and then, for entertainment, we played music. Because... we sang, there’s a lot of singing going on. And my struggle is tremendous amount of singing, the Passover, I think, took 4 times with more singing than eating. All kinds of songs.


핀커스 주커만 : 그래서 외국인으로서, 비록 우리가 여권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외국인으로서 우리는 항상 일종의... 벽 뒤에 있는 상태 뒤에 놓여 있었어요. 그래서 정체성과 유대인 입문서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기본적인 3가지를 했죠. 우리는 많은 아이를 낳았어요. 모든 가정에는 8~10명의 아이가 있었죠. 아버지에게는 8남매가 있었어요. 아, 종교가 큰 역할을 했죠. 그리고 저는 단지 유월절(이집트 탈출을 기념하는 유대인의 축제) 예배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며, 실제로 용어를 실제로 배우고 문장의 뉘앙스를 이해하며, 이것을 그 모든 전문가가 따라야 할 방식으로 여러 해 동안 여겼죠. 음, 그러고 나서 오락을 위해 우리는 음악을 연주했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노래를 불렀으므로, 많은 노래가 나왔죠. 그리고 저의 고군분투는 노래하는 양이 어마어마해서, 유월절은 먹는 것보다 노래하는 것이 4배나 더 걸렸던 것 같아요. 모든 종류의 노래가 있었죠.


Margaret Brearley: In the temple when solemnly instituted it, uhm, music was at the heart of the Wess’har. And when the temple was destroyed, the, ah... in 1870, uhm, from then on, within, ah, Judaism, there was never to be full music until the temple would be recreated. But the concept of music... music has, uhm, coming from God, music has being a consolation or joy, music has the one of the great, uhm, elements which would enhance a community, that concept remained very powerful. So as soon as the ghettos were opened, as soon as Jews were emancipated, it meant that, uhm, the, the, the concept and the love of music, which should be nurtured over so many generations, hundreds and thousands of years, could suddenly emerge and, and blossom as never before.


마거릿 브레얼리 : 성전에서 그것을 엄숙하게 제정했을 때, 음, 음악은 베스하르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원이 파괴되었을 때, 아... 1870년에, 음, 그때부터 내부, 아, 유대교에서는 사원이 재건될 때까지 완전한 음악이 없었어요. 그러나 음악의 개념은... 음악은, 음, 신에게서 나오고, 음악은 위안이나 기쁨을 주며, 음악은 공동체를 향상시킬 위대한 요소 중 하나를 가지고 있는데, 그 개념은 여전히 매우 강력합니다. 그래서 게토가 열리자마자, 유대인들이 해방되자마자, 음,,,, 수백, 수천 년에 걸쳐 길러져야 할 음악에 대한 개념과 사랑이 갑자기 나타나서 전에 없던 꽃을 피웁니다.


[Music]


Tom Wesel: But opportunities remained imminent. Legal emancipation was uneven in the German states. And it was only with the founding of the German Empire in 1871 that all Jews in Germany finally received full legal emancipation. Even then, the shadow persisted.


톰 베젤 : 그러나 기회는 임박했죠. 독일 국가에서는 법적 해방이 고르지 않았어요. 그리고 1871년 독일제국이 수립되면서 비로소 독일의 모든 유대인이 마침내 완전한 법적 해방을 얻게 되었는데요. 그때도 그림자는 여전했죠.


Pinchas Zukerman: We were foreign objects. When you’re foreign person in a land, ah, you wanna be better, you wanna achieve status, ah, economic status, individual statuses, somebody that’s recognize not just by the fact that, that Jewish or from a different... or look different, you wanna... you wanna be stand... you wanna stand out, and that’s what German music does, it makes you standout.


핀커스 주커만 : 우리는 이물질이었어요. 당신이 한 나라에서 외국인일 때, 아, 당신은 더 나아지고 싶고, 지위를 얻고 싶고, 아, 경제적 지위, 개인적 지위, 단지 그 사실만으로 인정되는 사람이 유대인이든 다른 나라 출신이든... 또는 다르게 보이고 싶고... 돋보이고 싶고, 그게 독일 음악이 하는 것이며, 당신을 돋보이게 해주죠.


Anita Lasker-Wallfisch: Jews are always in a minority... and regardless of where they are... are never really at home... And minorities which don’t feel entirely safe. Although, sadly... we felt far too safe in Germany. Where you are in a minority and not 100 percent certain... there is always this tendency to excel... to be at least as good as the people who live here. And quite by chance, you then become a little better. And that, of course, is our deadly sin.


아니타 라스커-발피쉬 : 유대인들은 항상 소수에 속하며...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결코 집에 있지 않죠... 그리고 소수는 완전히 안전하다고 느끼지 않죠. 슬프게도... 우리는 독일에서 너무나도 안전하다고 느꼈어요. 당신이 소수이고 100% 확실하지 않은 곳에서는... 항상 탁월해지려는 경향이 있는데... 적어도 여기에 사는 사람들만큼은 훌륭해요. 그리고 아주 우연히, 당신은 조금 나아질 거예요. 그리고 그것은 물론 우리의 치명적인 죄입니다.


Michael Haas: And in the eagerness, they basically were too good. They exceeded everybody else, they overtook everybody else, they dominated academia, they dominated the law, they dom... dominated science, they dominated medicine, they dominated the arts, uhm, and their, uhm, ambition was not to submerge German culture and Jewish culture, quite the opposite, their ambition was to contribute to German culture.


마이클 하스 : 그리고 열망에서 그들은 기본적으로 매우 좋았어요. 그들은 다른 모든 사람을 능가하고, 다른 모든 사람을 따라잡았고, 학계를 지배하고, 법을 지배하고... 과학을 지배하고, 의학을 지배하고, 예술을 지배했으며, 음, 그리고 그들의, 음, 그들의 야망은 독일 문화와 유대 문화를 침수시키지 않는 것이었는데, 정반대로 그들의 야망은 독일 문화에 기여하는 것이었죠.


[Music]


Tom Wesel: Assimilation proceeded surprisingly quickly despite developing antisemitism. And Germany soon became the most tolerant of the central European states, the Prussia, among the most liberate. And so, it’s no surprise that the first great German composer of Jewish origin was wealthy, Prussian and baptized into the Christian faith.


톰 베젤 : 반유대주의가 커졌음에도 흡수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독일은 곧 가장 자유로운 중부 유럽 국가 중 하나인 프로이센 중에서 가장 관대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유대계 최초의 위대한 독일 작곡가가 부유하고 프로이센인이었고 기독교 신앙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Music]


Tom Wesel: Felix Mendelssohn was born on the 3rd of February 1809 into a family which stands as a great emblem of the meeting of the German and Jewish spirits in the 19th Century. His grandfather, Moses Dessau, or Moses Mendelssohn as he came to call himself, was born in 1729 when J.S. Bach was 44 years old. He became a leading thinker of the enlightenment, a fighter for Jewish freedom and a powerful advocate of religious tolerance. He saw reason as the best hope for Jews and Germans alike.


톰 베젤 : 펠릭스 멘델스존은 1809년 2월 3일, 19세기 독일인과 유대교 정신의 만남의 위대한 상징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할아버지인 모제스 데사우는 자신이 스스로 모제스 멘델스존이라고 불렀는데, 1729년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44세였을 때 태어났죠. 그는 계몽사상가이자 유대인의 자유를 위한 투사이자 종교적 관용의 강력한 옹호자가 되었는데요. 그는 이성을 유대인과 독일인 모두에게 최고의 희망으로 보았죠.


[Music]


Tom Wesel: Moses Mendelssohn became a key figure in Jewish-German relations at the most critical period for Jewish emancipation in Germany, a founding father of the dream of fruitful, unproblematic assimilation of the Jews into German society. He was not loved by all because of the secularizing tendency of his thinking, but he was, without doubt, the most powerful voice calling for a synthesis of Jewishness and Germanness. His son, Abraham, converted to Christianity and became one of Berlin’s most successful bankers. He, in turn, baptized his own son, Felix, into the Lutheran Church in his 7th year.


톰 베젤 : 모제스 멘델스존은 유대인이 독일 사회에 유익하고 문제없이 동화되는 꿈의 창시자이자 독일에서 유대인 해방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유대인-독일인 관계의 핵심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상에 대한 세속화 경향 때문에 모두에게 사랑받지 못했지만, 의심의 여지 없이 유대인과 독일인의 통합을 요구하는 가장 강력한 목소리를 냈죠. 그의 아들 아브라함은 기독교로 개종하여 베를린에서 가장 성공한 은행가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결국 그의 아들 펠릭스에게 7세 때 루터교의 세례를 받게 했죠.


[Music]


Four years after baptizing his son, Abraham Mendelssohn confirmed his daughter, Fanny, into the Lutheran Church. He wrote her explaining his reasons. The outward form of religion with your teacher has given you is historical and like all human institutions subject to change. Thousands of years ago, the Jewish form was the dominant one, then, came the heathen and now it’s the Christian. Your mother and I, were born and brought up by our parents as Jews that we’ve been able to follow our divine instincts and conscience. We’ve educated you and your brothers and sisters in the Christian faith because it’s the faith of most civilized people, and contains nothing that can draw you away from what is good and much that guides you to love, obedience, tolerance and acceptance, even if it offered nothing but the example of its founder, understood by so few and followed by still fewer.


아들에게 침례교 세례를 받게 한 지 4년 후, 아브라함 멘델스존은 그의 딸인 파니를 루터교 교회로 승인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렇게 한 이유를 그녀에게 설명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당신의 스승이 당신에게 준 종교의 외적 형태는 역사적이며 모든 인간 제도와 마찬가지로 변할 수 있습니다. 수천 년 전에는 유대교 양식이 지배적이었고, 다음에는 이교도가 왔으며, 지금은 기독교인이 되었죠. 당신의 어머니와 저는 우리의 신성한 본능과 양심을 따를 수 있었던 유대인으로서 우리 부모님에 의해 출생하여 성장하였죠. 우리는 기독교 신앙 안에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형제자매들을 가르쳤는데,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은 대부분의 문명화된 사람들의 신앙이고 여러분을 사랑, 순종, 관용, 수용으로 인도하는 선한 것과 많은 것에서 여러분을 멀어지게 수 있는 어떤 것도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며, 비록 그것이 설립자의 모범 외에는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극소수의 사람들이 이해하며 더 적은 수의 사람들이 따랐습니다.


Tom Wesel: Felix accepted his father’s wishes with conviction, and at his request took the name Mendelssohn Bartholdy. His father insisting that a Christian composer with the name of Mendelssohn made no sense.


톰 베젤 : 펠릭스는 확신을 가지고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였으며, 그의 요청에 따라 멘델스존 바르톨디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멘델스존이라는 이름의 기독교 작곡가는 말이 안 된다고 주장했죠.


Leon Botstein: Mendelssohn was the most important Protestant composer of the 19th century. He was able to take the traditions of classicism and the baroque, and convert them into a romantic sensibility to reach a wide believing public in the Protestant Lutheran community. Mendelssohn relation discretion is very, very interesting. He viewed Protestantism to be the outgrowth of, of Judaism. So, Judaism was rendered obsolete. So, he was not, himself, caught by any kind of, uhm, self-approach by being Jewish. He was proud to have endured the modern world, the way we would abandon a typewriter for a computer. It was no insult to the typewriter, but the typewriter had just worn out its, its historical moment. It was an atrophied religion. And that was certainly a widely shared opinion in the first generation assimilation. That now, to modernize was no insult to this whole tradition, but its natural outgrowth was Protestantism which arrived most of the Mendelssohn religious music, whether its Lobgesang or Paulus, or Elijah, ah, uhm, are in fact, uhm, very focused on the... not the trinity so much, but on the continuity between a monotheistic, abstract, god of, of, of justice and humanity, and light and truth. Ah, so, it is, ah, in my view, a Judaising after from theology through music.


레온 보츠타인 : 멘델스존은 19세기의 가장 중요한 개신교 작곡가입니다. 그는 고전주의와 바로크의 전통을 취하고 낭만적인 감성으로 변환하여 개신교의 루터교 공동체에서 널리 믿는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었죠. 멘델스존 관계 재량은 매우 흥미로운데요. 그는 개신교를 유대교의 파생물로 보았죠. 따라서 유대교는 무용지물이 되었죠. 그래서 그는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어떤 종류의, 음, 자기 접근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죠. 그는 우리가 컴퓨터 때문에 타자기를 포기하는 것처럼 현대 세계를 견뎌온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죠. 타자기에 대한 모욕은 아니었지만, 타자기는 그 역사적인 순간을 닳아 버렸어요. 위축된 종교였죠. 그리고 그것은 확실히 1세대 동화(흡수)에서 널리 공유된 의견이었죠. 이제 현대화하는 것은 이 전체 전통에 대한 모욕이 아니라 그 자연스러운 파생물은 멘델스존 종교 음악 대부분에 도달한 개신교였는데... 교향곡 2번 <찬양의 노래>이든 또는 오라토리오 <사도 바울>이든 또는 <엘리야>이든, 사실 매우 집중되어 있는데... 삼위일체가 아니라 일신교적이고 추상적이며 정의와 인류의 신, 빛과 진리 사이의 연속성에 관한 것입니다. 아, 그래서, 아, 제 생각에는 신학에서 음악을 통한 유대교화입니다.


Help Lord! Help Lord! Wilt Thou quite destroy us? Help Lord!


주여, 주여. 주여 도와주옵소서. 주여, 주여.


Tom Wesel: Felix Mendelssohn Bartholdy soon became an acknowledged symbol of assimilation, and came to occupy a special place in the development of a specifically German musical culture, a culture in which music was seen as an expression of the very best in human nature, of humanity and light and truth. Music was taught to have a significance beyond racial creed, beyond what could be expressed in words and so, beyond what could be tainted by words. Above all, music was understood to have an implicitly spiritual context, a conviction powerfully reinforced when Mendelssohn rescued Bach’s St. Matthew Passion from a hundred years in the dark. And then, became widely identified with it.


톰 베젤 :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는 곧 동화(흡수)의 인정받는 상징이 되었고, 특히 독일 음악 문화, 즉 음악이 인간의 본성, 인간성, 빛과 진실의 가장 좋은 표현으로 여겨지는 문화의 발전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음악은 인종적 신념을 넘어서,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 그래서 말로 더럽혀질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의미가 있다고 알려줬죠. 무엇보다도 음악은 멘델스존이 100년 동안의 암흑 속에서 바흐의 <마태 수난곡>을 발굴해냈을 때 강력하게 강화된 확신인, 암시적으로 영적인 맥락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죠. 그러고 나서 그것과 함께 널리 동일시되었죠.


Eduard Devrient, a close friend of Mendelssohn took the part of Jesus in their first performance of the St. Matthew Passion, recalls an incident in the opera square in Berlin, “We discussed the wonderful coincidence at exactly 100 years must have passed between the last live seen performance, and when does ‘St. Matthew Passion’ would again see the light of day and great feelings exuberantly. Suddenly, stopping in the middle of the opera square, that it should a comedian and a Jew boy who restored to the world the greatest Christian music. Felix usually refused repressively to refer to his Jewish origins. From this occasion, he was carried away by the happy mood, the striking nature, his observation.”


멘델스존의 절친한 친구인 에두아르트 데브리엔트는 <마태 수난곡>의 첫 공연에서 예술의 역할을 맡았는데, 베를린의 오페라 광장에서 있었던 사건을 다음과 같이 회상합니다. “우리는 정확히 100년 만에 마지막 실황으로 볼 수 있는 공연과 ‘마태 수난곡’이 언제 다시 빛을 발하고 위대한 감정을 활기차게 보일 것인지 그 사이의 놀라운 우연의 일치에 대해 논의했어요. 갑자기 오페라 광장 한가운데에 멈춰 섰는데, 희극인이자 유대인 소년이 세계에 가장 위대한 기독교 음악을 되살린 것이죠. 펠릭스는 일반적으로 자신의 유대인 혈통을 언급하는 것을 억압적으로 거부했는데요. 이때부터 그는 행복한 기분, 놀라운 자연, 관찰력에 사로잡혔죠.”


[Music]


Tom Wesel: Mendelssohn’s reticence about his origins was characteristic of many converted Jews who despite persistent antisemitism felt more German than Jewish.


톰 베젤 : 멘델스존이 자신의 혈통에 대해 과묵한 것은 지속적인 반유대주의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보다 독일인을 더 많이 느끼는 개종한 많은 유대인의 특징이었죠.


Samuel Adler: You know, they never believe, my grandfather who comes from a little to... who came from a little town in Bavaria, they could trace their ancestry back to almost 600 years in this little town, 8 brothers were together in the First World War, all received the Iron Cross. ‘Of course, they don’t mean me. They mean the other Jews... but me? I am German first and a Jew only second.’


사무엘 아들러 : 아시다시피 그들은 결코 믿지 않았는데, 제 할아버지는 약간... 바이에른의 작은 마을 출신인 그들은 이 작은 마을에서 거의 600년 동안 조상을 추적할 수 있었는데, 1차 세계 대전에 8형제가 함께 있었고 모두 철십자훈장(1813년 제정된 프러시아 무공훈장)을 받았어요. ‘물론 그들이 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다른 유대인들을 의미하는데... 저를 제외하고? 저는 첫 번째로 독일인이고 두 번째로 유대인입니다.’


Hellmut Stern: But to come back to Germany... the so-called German music – by all means let’s use that term – was for the German Jews – I am talking specifically of the German Jews, from whom I come – a very important point on assimilation. This was also part of wanting to be absorbed into German society. The so-called symbiosis... of Moses Mendelssohn and Lessing... and other representatives... of the Enlightenment. And that was achieved... by the German Jews – not just 100%, but 1,000%. And precisely that was the reason for their downfall later. Because this symbiosis only took place in our heads... not in the heads of the other Germans.


헬무트 슈테른 : 하지만 다시 독일로 돌아와서... 소위 독일 음악 – 꼭 그 용어를 사용하자면 – 독일계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었죠. – 저는 특별히 제가 속한 독일계 유대인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동화(흡수)에 대한 매우 중요한 점입니다. 이것은 또한 독일 사회에 흡수되고 싶은 마음의 일부였죠. 이른바 모제스 멘델스존과 레싱의 공생... 그리고 계몽주의의 다른 대표자들... 그리고 독일계 유대인들에 의해 100%가 아닌 1,000% 달성되었죠. 그리고 그것은 나중에 그들이 몰락한 이유였는데요. 이 공생은 다른 독일인들의 머리가 아니라... 우리의 머릿속에서만 일어났으니까요.


Tom Wesel: Moses Mendelssohn dreamed of assimilation. Nevertheless, remained a long time both vital and relatively untroubled despite growing antisemitism. Until Germany produced the revolutionary spirit in the form of Richard Wagner, who set alight in number of flies that are still born to this day. Among them, an essay first published in 1850 under the suit of Karl Freigedank, freethinker. That is the most aggressively antisemitic track in the history of German music.


톰 베젤 : 모제스 멘델스존은 동화(흡수)를 꿈꿨어요. 그런데도 반유대주의가 커짐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중요하면서도 상대적으로 곤란한 문제가 되지 않았죠. 독일이 오늘날에도 태어나는 무수한 파리떼에 불붙인 리하르트 바그너의 형식으로 혁명 정신을 만들어낼 때까지요. 그중 1850년 자유 사상가인 카를 프라이게당크가 모은 에세이가 처음 출판되었죠. 그것은 독일 음악 역사상 가장 공격적으로 반유대주의적인 방향입니다.


[Music]


The Jews in Music by Karl Freigedank


카를 프라이게당크의 음악에 나오는 유대인들


[Music]


Tom Wesel: Antisemitism was in the air but this text was written by an artist who’s music and who’s interest had come to stay. Richard Wagner articulated and gave weight to a new face of antisemitism based not on religious document but on social, aesthetic and artistic criteria.


톰 베젤 : 반유대주의가 만연했지만, 이 가사는 음악을 하고 관심을 갖게 된 아티스트가 쓴 것입니다. 리하르트 바그너는 종교적 문서가 아니라 사회적, 미학적, 예술적 기준에 근거하여 반유대주의의 새로운 면모를 분명히 표현하고 강조했죠.


The Jew never had an art of his own and, consequently, never lived a life with any substance capable of sustaining art... Anything which sprouts from the Jews’ undertaking to create art must therefore necessarily embody the characteristics of coldness, indifference, even triviality and absurdity. Historically, we must describe the Jewish era in modern music as one of complete unproductivity.


유대인은 자신의 예술을 가진 적이 없으며, 결과적으로 예술을 지탱할 수 있는 어떤 물질로도 삶을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술을 창조하려는 유대인들의 노력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냉정함, 무관심, 심지어 사소함과 부조리의 특성을 구현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현대 음악의 유대인 시대를 완전한 비생산적 시대로 묘사해야 합니다.


Leon Botstein: With the rise of German nationalism, an antisemitic movement was well underway. Wagner articulated it and gave it special twists, but he wasn’t original. What he did was, to make it really powerful. It was an excellent attrition. The great essay on Jewish music is, ah, fabulously brilliant essay, perverse but it’s brilliant. And therefore, he was able when he issued its first anonymously in 1850, he was able actually to capitalize on something people were saying, he didn’t invent this.


레온 보츠타인 : 독일 민족주의의 부상과 함께 반유대주의 운동이 잘 진행되고 있었는데요. 바그너는 그것을 분명히 표현하면서도 특별한 왜곡을 가했지만, 그는 독창적이지 않았죠. 그가 한 일은 그것을 정말 강력하게 만드는 것이었죠. 훌륭한 소모였죠. 유대인의 음악에 대한 위대한 에세이는, 아, 놀랍도록 훌륭한 에세이이며, 삐딱하지만 훌륭해요. 따라서 그가 1850년에 익명으로 첫 번째 책을 발행했을 때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실제로 활용할 수 있었는데, 그는 이것을 발명한 것이 아닙니다.


Norman Lebrecht: Wagner was a prophet of German nationalism quite openly, quite consciously. Ah, he admired Bismarck. He saw himself as parallel to Bismarck. He exchanged letters with Bismarck as per diem because they were both working towards the same end, they were both creating a greater Germany. But involving this might, the greater German art could only be creative by removing those things that had formed him, those impurities as he put it, that have formed him, those Jewish elements. So, in that respect, regardless of each value result, Wagner’s music is quite essentially antisemitic.


노먼 레브레히트 : 바그너는 아주 공개적으로, 아주 의식적으로 독일 민족주의의 예언자였어요. 아, 그는 비스마르크를 존경했죠. 그는 자신이 비스마르크와 평행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비스마르크가 같은 목적을 위해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매일 비스마르크와 편지를 교환했으며 둘 다 더 큰 독일을 만들고 있었죠. 그러나 이러한 힘과 관련하여 더 큰 독일 예술은 그를 형성한 것들, 그가 말했듯이 그를 형성한 불순물, 유대인의 요소들을 제거함으로써만 창의적일 수 있었죠. 그런 점에서 각각의 가치 결과와 상관없이 바그너의 음악은 본질적으로 반유대주의적입니다.


Daniel Barenboim: Look, Wagner had very specific re... ideas about sound and about music expression. It so happens that many of the Jews who were musicians around the time were of a different idea therefore, Wagner’s antisemitism, if you want, is also artistic. Wagner hated the lightness of music of Mendelssohn. Instead of saying, Wagner’s mistake is not to see that Mendelssohn was about composer because he was Jewish. This is the fascistic element. Wagner should have said, Wag... ah, Mendelssohn for me is no music because it lacks this, this, this and this. This is the part of it.


다니엘 바렌보임 : 보세요, 바그너는 소리와 음악 표현에 대해... 매우 구체적인 아이디어들을 가지고 있었어요. 당시 음악가였던 많은 유대인은 생각이 달랐으므로 바그너의 반유대주의도 예술적이죠. 바그너는 멘델스존의 음악의 가벼움을 싫어했어요. 말하는 대신에 바그너의 실수는 멘델스존이 유대인이므로 작곡가에 관한 것이라고 보지 않은 것이죠. 이것이 파시즘의 요소입니다. 바그너는, 바그... 아, 제게 멘델스존은 이것, 이것, 이것, 이것이 부족하므로 음악이 아니라고 말했어야 했죠. 이것은 그것의 일부입니다.


Leon Botstein: But Wagner already puts a match into a room filled with kerosene. And that kerosene began to spill very aggressively in the early 19th century, particularly after Battle of Vienna. But remember the German Jews, or Jews in Europe were extremely ambivalent, if not supportive to Napoleon Bonaparte. Because Napoleon Bonaparte was viewed as philosemitic. So Napoleon became kind of Jewish hero, but Napoleon then became the arch enemy of Germany, of England and of the sense of national self-realization. So, the issues of 18th century nationalism caught the Jews in a very complex situation. In addition, Karl Marx wrote the other very important as of antisemitism in which he made the Jew as the ultimate capitalist. The Jew became the instrument of the destruction of a traditional world order, a rule world order, a world of family values, of all of these sort of right-wing rhetoric cosmopolitanism uprooted sort of high-minded abstract intellectualizing as opposed to a kind of, ah, brute and broaden sense of cultural identify, all of these works hand in glove. And Wagner exploits it shamelessly.


레온 보츠타인 : 그러나 바그너는 이미 등유로 가득 찬 방에 성냥을 놓았죠. 그리고 그 등유는 19세기 초, 특히 비엔나 전투 이후에 매우 공격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했죠. 그러나 독일의 유대인들, 즉 유럽의 유대인들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지지하지 않더라도 극도로 애증이 엇갈렸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철학자로 여겨졌기 때문이죠. 그래서 나폴레옹은 일종의 유대인의 영웅이 되었지만, 독일과 영국의 민족적 자아실현의 최대의 적이 되었죠. 그래서 18세기 민족주의의 문제는 유대인들을 매우 복잡한 상황에 빠뜨렸죠. 또한, 카를 마르크스는 유대인을 궁극적 자본가로 만든 반유대주의로서 매우 중요한 또 다른 글을 썼죠. 유대인은 전통적인 세계 질서, 규칙 세계 질서, 가족 가치의 세계, 이러한 모든 종류의 우익 미사여구의 세계주의를 뿌리 뽑은 일종의 고상한 추상적 지식화의 파괴 도구가 되었는데, 아, 무자비하고 문화적 정체성의 의미를 넓히는 이 모든 작품은 한통속이죠. 그리고 바그너는 그것을 뻔뻔하게 이용합니다.


Daniel Barenboim: I think also that, ah, ah, I mean, Wagner’s, ah, level of antisemitism was also very low. It wa... was a combination of, of so many things, a combination of jealousy, combination of another attitude to, to music. Ah, ah, I mean, of course, you cannot play the, ah, ah, the very Italian Symphony of Mendelssohn like you play the first act regarding both pieces of short notes, and this is a complete different world. Now, is this Jewish or not? I don’t know. This was just, ah, stupid, ah, ah, adjective. I mean, antisemitism no matter how intellectual it is remains a very basic and stupid trait because it is generalization.


다니엘 바렌보임 : 저도 아, 아, 바그너의, 아, 반유대주의의 수준도 매우 낮았다고 생각해요. 그건... 질투의 조합, 음악에 대한 또 다른 태도의 조합이었죠. 아, 아, 물론, 아, 아, 멘델스존의 바로 그 매우 이탈리아적인 교향곡을 당신처럼 연주할 수는 없는데, 두 개의 짧은 음표에 관한 첫 번째 막을 연주하는 것과 이것은 완전히 다른 세계입니다. 자, 이것은 유대인의 것인가요, 아니면 아닌가요? 모르겠어요. 이것은 단지, 아, 어리석은, 아, 아, 형용사였군요. 제 말은, 반유대주의는 그것이 아무리 지적인 것이라도 일반화이기 때문에 매우 기본적이고 어리석은 특성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죠.


Tom Wesel: And yet, for all its stupidity and banality, the idea of antisemitism dominated Richard Wagner’s mind as a mythical explanation of everything that he hated. And there was much that Richard Wagner hated. In Wagner’s mind, the opposition is not only between the German and Jewish spirits, his reaction is also against modernity. He hated what he saw as a dissolution of the organic links in society, the rise of empty individualism and the effect of industrialization. And because he sees this as abstract and impersonal forces, Wagner needs the Jew to give them identifiable features. And he coins the term for jutting Judaization, a concept that had been waiting for a name. The Jew becomes the scapegoat. More than that, the Jew is not merely the figure which embodies all that is disintegrated in modernity, but striving force. Money is the force behind the demonic spirit of manufacturer, and Jew controls money. The Jew is the personification of the economic principle and the art of vacuous entertainment. In particular, the grand opera of Mia Bella that was to be swept away by Wagner’s new music drama.


톰 베젤 : 그러나 그 모든 어리석음과 진부함에도 불구하고 반유대주의의 관념은 리하르트 바그너가 미워하는 모든 것에 대한 신화적인 설명으로서 그의 마음을 지배했죠. 그리고 리하르트 바그너가 싫어했던 것이 많이 있었어요. 바그너의 생각에 반대는 독일인의 정신과 유대인의 정신 사이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반응도 근대성에 반대하는 것이죠. 그는 사회의 유기적 연결의 해체, 공허한 개인주의의 부상, 산업화의 영향으로 본 것을 싫어했어요. 그리고 바그너는 이것을 추상적이고 인간미 없는 힘으로 보기 때문에 그는 유대인에게 식별 가능한 특징들을 부여해야 하죠. 그리고 그는 이름을 기다리고 있던 개념인 돌출된 유대화라는 용어를 만들었죠. 유대인은 희생양이 됩니다. 게다가 유대인은 근대성 속에서 와해된 모든 것을 형상화한 인물일 뿐만 아니라 투쟁하는 힘입니다. 돈은 제조업자의 악마 같은 영혼 뒤에 있는 힘이며, 유대인이 돈을 통제합니다. 유대인은 경제 원칙과 공허한 오락의 기술의 의인화입니다. 특히 바그너의 신작 음악극에 휩쓸리게 된 미아 벨라(나의 아름다운 여인)의 대 오페라가 그렇죠.


[Music]


Honour your German Masters. You will invoke good spirits and if you heed them even though the Holy Roman Empire dissolve in mist there will remain our sacred German art.


독일의 주인님들이시여. 당신들은 좋은 영혼을 불러낼 것이며 신성 로마 제국이 안개 속으로 사라지더라도 거기에 주의를 기울이면 우리의 신성한 독일 예술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Music]


Richard Wagner’s Bayreuth Festival Opera House


리하르트 바그너의 바이로이트 축제 오페라 극장


Margaret Brearley: And one of the consequences of the whole Bayreuth enterprise, the publications around Parsifal Bayreuther Blätter and, uh, Wagner’s essays of the late 1870s, early 1880s, one of the consequences of all those was a new version of Christianity called German Christianity, promoted by Hans von Wolzogen, the editor of the Bayreuther Blätter, close friend of Wagner. And this German Christianity drew on Wagner’s writings and on Parsifal, and promoted an Aryan Jesus, rejected Jewish teachings, rejected Jewish ethics, above all, rejected the Hebrew Scriptures, and, ah, promoted a kind of dynamism, strengths, uhm, ultra German right-wing nationalism and provided a raise (inaudible), ah, into which Hitler could later plant Nazism.


마거릿 브레얼리 : 그리고 전체 바이로이트의 결과 중 하나는 오페라 <파르지팔> 주변의 출판물들과 <바이로이터 블래터>와의 상호작용이고, 아, 1870년대 후반과 1880년대 바그너의 에세이들에 관한 출판물들과의 상호작용이며, 그 모든 것의 결과 중 하나는 바그너의 절친한 친구인 <바이로이터 블래터>의 편집자 한스 파울 폴초겐이 장려한 독일 기독교라고 불리는 기독교의 새로운 버전이었죠. 그리고 이 독일 기독교는 바그너가 쓴 곡들과 오페라 <파르지팔>에 근거하여 (특히 독일 나치당에서 주장한) 비유대계 코카소이드인(아리아인) 예수를 선전하고 유대교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유대인의 윤리를 거부했고 무엇보다도 히브리어 성경을 거부했으며 아, 일종의 역동성, 강점, 음, 극단적인 독일성을 장려했는데, 우익 민족주의와 히틀러가 나중에 나치즘을 심을 수 있는 인상(들리지 않음)을 제공했어요.


Did Wagner’s texts have any direct influence of Hitler’s political consciousness?


바그너의 텍스트가 히틀러의 정치적 의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나요?


Norman Lebrecht: No question at all. Not just on... not just... not just on Hitler’s consciousness, on the consciousness... not just on Hitler’s consciousness, on the consciousness of evolutionary German right-wing nationalism. I mean, Wagner’s idea of anti-Semitism was in the sense of, ah, an anticipation of Karl Lueger’s “Wer ein Jud’ ist, bestimme ich”. He would decide who was Jewish and if Hermann Levi was useful to him as a conductor then, for the purposes of his conducting, Hermann Levi ceased to be Jewish, even though his father was a Rabbi. Uhm, ah, ah, so it was... it was an illogical and, and, and ah, not a political uti... or totalitarian antisemitism but, ah, it was undoubtedly a legitimization of a secular antisemitism, which is something that had not existed in Europe. Before, we had clerical antisemitism. We had 2,000 years of the church preaching that the Jews had killed Christ, and the Jews where therefore anathema, pariahs and so forth. Wagner was a founding influence in the philosophy of secular nationalist antisemitism, and therein lies the danger.


노먼 레브레히트 : 의문의 여지가 전혀 없어요. 단지... 그저.... 히틀러의 의식, 의식... 히틀러의 의식, 진화론적 독일 우익 민족주의에 대한 의식에 대해서만이 아니거든요. 제 말은, 바그너의 반유대주의 사상은, 아, 카를 뤼거의 <누가 유대인인지는 내가 정한다>에 대한 기대의 의미였어요. 그는 누가 유대인인지 결정할 것이고, 헤르만 레비가 지휘자로서 그에게 유용했다면, 그의 아버지가 랍비임에도 불구하고 헤르만 레비는 그의 지휘를 우해 더 이상 유대인이 아니었죠. 음, 아, 아, 그랬어요... 그건 비논리적이고, 그리고, 아, 정치적 목적이... 또는 전체주의적 반유대주의가 아니었지만, 아, 의심할 여지 없이 세속적 반유대주의의 정당화였는데, 유럽에 존재하지 않았죠. 이전에는 성직자의 반유대주의가 있었거든요. 우리는 교회에서 2,000년 동안 유대인이 예수를 죽였다고 설교했고, 따라서 유대인들이 아주 혐오하는 것, 버림받은 사람들을 죽였다고 설교했는데요. 바그너는 세속적 민족주의적 반유대주의 철학에 기초적인 영향을 미쳤고, 그 안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죠.


Margaret Brearley: Hitler himself said that whoever wishes to understand National Socialism must read Wagner’s political writings. He also, uhm, said that, uhm, he had built up the foundations of his own religion on Wagner’s Parsifal. Those are two very important statements.


마거릿 브레얼리 : 히틀러 자신도 민족주의를 이해하려면 바그너의 정치적으로 쓴 것을 읽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한 음, 음, 그는 바그너의 파르지팔에 그 자신의 종교의 기초를 세웠다고 말했죠. 그 두 가지는 매우 중요한 진술입니다.


Norman Lebrecht: Of course, what a composer thinks is important, and Wagner would have been the first to say that what he thought was more important than what he composed. He wanted to be seen as a philosopher and a liberator.


노먼 레브레히트 : 물론 작곡가가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중요하고, 바그너는 자신이 작곡한 것보다 생각한 것이 더 중요하다고 먼저 말했을 것입니다. 그는 철학자이자 해방자로 보이길 원했죠.


Tom Wesel: And so there was much in Richard Wagner for the Third Reich to draw on, because there is no composer in the history of German music, who commented more extensively, or more energetically on his work and the ideas behind it than did Richard Wagner. His artistic production aims expressly and programmatically at nothing less than a redemption of mankind from the degeneracy of the times by revival of an older, better world and in the belief that the highest purpose of mankind is artistic.


톰 베젤 : 그래서 제3제국(1933~1945년 사이, 히틀러 치하의 독일)이 의지하는 대상과 일치하는 리하르트 바그너가 있었는데, 왜냐하면 독일 음악 역사상 리하르트 바그너보다 그의 작품과 그 이면에 있는 아이디어에 대해 더 광범위하고 열정적으로 논평한 작곡가는 없었기 때문이죠. 그의 예술적 작품은 더 오래되고 더 나은 세상의 부흥과 인류 최고의 목적이 예술적이라는 신념에 의해 시대의 타락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는 것 이상을 명시적이면서도 계획적으로 지향합니다.


The theater is the most comprehensive and the most influential of all artistic institutions. Art, eternally youthful and always able to refresh itself from the noblest spirits of its time, is better equipped than any senile religion or incapable government, to steer the turbulent currents of society towards their greatest and noblest goal – the goal of true humanity. It may be claimed that when religion becomes artificial, it falls to art to salvage the essence of religion. Without a revolution in society art will be unable to find its way back to its true essence, Richard Wagner.


극장은 모든 예술 기관 중 가장 포괄적이고 가장 영향력 있는 기관입니다. 영원히 젊고 항상 그 시대의 가장 고귀한 정신으로부터 그 자체를 새롭게 할 수 있는 예술은 노쇠한 종교나 무능한 정부보다 사회의 격동의 흐름을 가장 위대하고 가장 고귀한 목표, 즉 진정한 인간성이라는 목표를 향해 조종할 수 있는 장비를 더 잘 갖추고 있죠. 종교가 인위적으로 되었을 때, 종교의 본질을 살리는 것은 예술에 떨어진다고 할 수 있는데요. 사회의 혁명 없이 예술은 진정한 본질인 리하르트 바그너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Music]


Tom Wesel: In his obsession with redemption, Wagner sees a redeemed, revolutionized world as a de-Judaized humanity. And he concludes his essay on the Jews and music with the thought that the only salvation for the Jewish mind lies in annihilation. But Wagner does not specify what form the destruction should take, and a highly-charged debate about his intentions continues to this day. As does the debate about whether Wagner’s music should be performed in Israel at all.


톰 베젤 : 구속에 대한 집착에서 바그너는 구속된 혁신을 일으킨 세계를 탈 유대화 인류로 봅니다. 그리고 그는 유대인의 정신의 유일한 구원은 절멸에 있다는 생각으로 유대인과 음악에 대한 에세이를 마무리합니다. 그러나 바그너는 어떤 형태의 파괴를 취해야 하는지 명시하지 않았으며, 그의 의도에 대한 격렬한 논쟁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바그너의 음악이 이스라엘에서 연주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도 마찬가지입니다.


Uri Toeplitz, member of the Israel Philharmonic Orchestra for 34 years: Of course we knew his famous essay, ‘The Jews in Music’... which ends with the words, ‘The solution is annihilation’... but we tried to disguise it. We said that, of course he doesn’t mean destruction. He means that the Jews should be baptised... or something of the kind. We tried to get around it. Today, I believe that it is a kind of code-word and that he really did mean destruction. In any case that is how it worked on Hitler, Wagner was the spiritual influence on Hitler. That is why the ban on Wagner here in Israel is ever stronger. The more we see that Wagner really was, he was political and his ideas were monstrous.


우리 토에플리츠 (34년 동안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 : 물론 우리는 그의 유명한 에세이 <음악 속 유대인들>이... ‘해법은 전멸’이라는 말로 끝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위장하려고 했어요. 우리는 물론 그가 파괴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했죠. 그는 유대인들이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또는 그런 종류의 것이죠. 우리는 그것을 해결하려고 노력했어요. 오늘날 저는 그것이 일종의 암호 용어이며 그가 실제로 파괴를 의미했다고 믿는데요. 어쨌든 그것이 히틀러에게 어떻게 작용했는지, 바그너는 히틀러에게 영적 영향을 미쳤죠. 그것이 바로 여기 이스라엘에서 바그너에 대한 금지령이 더욱 강화된 이유입니다. 바그너가 실제로 그랬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그는 정치적이었고 그의 아이디어는 기괴했어요.


Richard Wagner ‘The Siegfried Idyll’


리하르트 바그너 <지크프리트 목가>


Tom Wesel: The 27th of October 2000, the Performing Arts Center in Rishon LeZion in Israel. This is the first programmed performance of a Wagner work by an official Israeli orchestra, since the Nazi Krystalnacht in 1938.


톰 베젤 : 2000년 10월 27일, 이스라엘 리숀레지온에 있는 공연예술센터. 이것은 1938년 나치 <수정의 밤>(나치스 돌격대와 독일인들이 유대인 상점과 시나고그를 공격한 사건) 이후 공식적인 이스라엘 오케스트라의 바그너 작품의 첫 프로그램 공연입니다.


[Music]


Ehud Gross, Director General of Israel Symphony Orchestra: The fact that, ah, Hitler adapted, ah, Wagner as, ah, ideologist of the Nazism doesn’t mean that he was the ideologist of the Nazism. And I think that in a way, when we, ah, play Wagner, we say to the Nazism, ah, you don’t own the music of Wagner. Maybe your, your own demand, but you don’t own his music.


에후드 그로스 (이스라엘 심포니 오케스트라 총감독) : 아, 히틀러가, 아, 바그너를 나치즘의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그가 나치즘의 이데올로기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 우리가 바그너를 연주할 때 우리는 나치즘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데, 아, 당신은 바그너의 음악을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쩌면 당신 자신의 요구 사항일 수도 있지만, 당신은 그의 음악을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Meir Nitzan (Mayor of Rishon LeZion): We’ll never forget and we’ll never forgive what the Nazis did to our people. But there’s still relation to the... to Wagner music. I, I don’t know, understand it. No one... no one contact between them. Please, hold them, uhm, ah, apart. Don’t connect them.


메이르 니찬 (리숀레지온 시장) : 우리는 나치가 우리 국민에게 한 일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며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바그너 음악과 관련이 있습니다. 모르지만 이해합니다. 아무도... 그들 사이에 아무도 연락하지 않습니다. 제발, 그들을 붙드세요, 음, 아, 떨어지세요. 그들과 연결하지 마세요.


[Music]


Yirmiyahu Yovel: Part of the reason that many Israelis or Jews still have a resistance to Wagner is not only because of the suffering of the people from the camps who we want to respect... I am, by the way, for the normalization of Wagner, I have been for 30 years for playing Wagner here. But I understand the resistance, and part of the resistance is that people feel here that Wagner has not been normalized over that, that Wagner is still worshiped rather that played. We play Mozart to enjoy Mozart, we played Beethoven, we, we, we go deeply into what he has to convey to us. But nobody worships, uhm, a musician as Wagner has worshiped then. And he seems to me that, ah, to worship Wagner has worshiped then. And he seems to me that, ah, to worship Wagner with everything that goes on with Wagner is an abomination, you cannot do that. Israelis and Jews, perhaps, ah, beyond Israel has not come to terms yet, in the normal ways. It was the phenomenon Wagner.


이르미야후 요벨 : 많은 이스라엘인이나 유대인이 여전히 바그너에 대해 저항하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중요시하고 싶은 수용소 사람들의 고통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런데 저는 바그너의 정상화를 위해 여기에서 바그너를 들려준 지 30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항을 이해하고 저항의 일부는 사람들이 여기에서 바그너가 그것에 대해 정상화되지 않았으며, 바그너가 연주되기보다는 여전히 숭배되고 있다고 느낀다는 것이죠. 우리는 모차르트를 즐기기 위해 모차르트를 연주하고, 베토벤을 연주했으며, 그가 우리에게 전달해야 할 것에 대해 깊이 들어가죠. 그러나 아무도 바그너가 숭배했던 것처럼 음악가를 숭배하지 않아요. 그리고 제게 그는, 바그너가 그때 숭배했던 것을 숭배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는 제게 아, 바그너와 관련된 모든 것으로 바그너를 숭배하는 것은 혐오스러운 것이며,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이스라엘인들과 유대인들, 아마도, 아, 이스라엘 너머에 있는 사람들은 아직 정상적인 방법으로 합의에 이르지 못했죠. 바그너 현상이었어요.


Please let the music be heard. Thank you.


음악을 들려주세요. 감사합니다.


Yirmiyahu Yovel: But everybody believes that the German have, and I believe they have not either.


이르미야후 요벨 : 그러나 모든 사람은 독일인이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고, 저는 그들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해요.


[Music]


Yirmiyahu Yovel: But I understand the resistance, Bayreuth was established by Wagner, and not only as a place of music but as a shrine. And he had this idea of putting together art and politics, music as a messenger and as a... as a full mentor of more than purely aesthetic and including political and social, ah, passion. This is how Bayreuth developed and degenerated into, into a shri... of music and shrine of politics.


이르미야후 요벨 : 그러나 저는 저항을 이해하는데, 바이로이트(오페라 극장)는 바그너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음악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성지였죠. 그리고 그는 예술과 정치, 음악을 메신저로... 그리고 순수하게 미학적인 것 이상으로 정치적, 사회적, 아, 열정을 포함하는 완전한 멘토로 결합하려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죠. 이것이 바이로이트가 성... 음악과 정치의 성지로 발전하고 타락한 방식입니다.


[Music]


The Post Office withdraws telephone lines from Jews.


우체국은 유대인들에게서 전화선 사용을 정지시킵니다. - 1940년 7월 29일


Tom Wesel: And so the debated continues, and the association of Richard Wagner with the Third Reich resists.


톰 베젤 : 그래서 논쟁은 계속되고 리하르트 바그너와 제3제국의 연합은 저항합니다.


Jews are banned from using public telephones.


유대인들은 공중전화 사용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 1941년 12월 21일


Tom Wesel: Wagner worked politics and racism into music, and something changed in the world.


톰 베젤 : 바그너는 정치와 인종차별을 음악으로 바꾸었으며, 세상에서 뭔가가 변했죠.


Jews must hand over jewelry of gold, silver, platinum and pearls.


유대인들은 황금, 은, 백금, 진주로 만든 장신구를 넘겨줘야 합니다. - 1939년 2월 21일


Tom Wesel: The Nazis then institutionalized racial hatred in a matter and to a degree, but until the Third Reich was unimagined.


톰 베젤 : 그런 다음 나치는 제3제국이 상상도 할 수 없을 때까지 어느 정도 인종적 증오를 제도화했죠.


Jews are banned from choral societies.


유대인들은 합창단에서 금지됩니다. - 1933년 8월 16일


Tom Wesel: The world change again, and the change called into question, fundamental beliefs about art, about religion and about humanity itself. The dream of unproblematic assimilation had shattered. In the words of Rabbi Leo Baeck, a survivor of Theresienstadt concentration camp, “For us Jews from Germany, an historical epoch has come to an end, such an epoch ends whenever a hope, a belief, a trust has finally to be buried. Our belief was that the German and Jewish spirits could meet on German soil, and through their marriage become a blessing. That was an illusion. The Jewish epoch in Germany is over once and for all.”


톰 베젤 : 세상은 다시 변하고, 그 변화는 예술, 종교, 인류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믿음에 의문을 제기했죠. 문제없는 동화(흡수)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죠. 테레지엔슈타트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랍비 레오 백의 말에 따르면, “독일 출신의 우리 유대인들에게 역사적 시대는 끝났고, 희망, 믿음, 신뢰가 마침내 묻힐 때마다 그러한 시대는 끝납니다. 우리는 독일인과 유대인의 영혼이 독일 땅에서 만나 그들의 결혼을 통해 축복이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은 환상이었습니다. 독일의 유대인 시대는 단번에 끝났습니다.”


Doctorates denied to Jews.


박사 학위는 유대인들에게 거부되었습니다. - 1937년 4월 15일


[Music]


Jews banned from emigration.


유대인들은 이주가 금지되었습니다. - 1941년 10월 23일


[Music]


Enforced retirement for postal workers married to Jewesses.


유대인 여자들과 결혼한 우체부들은 강제 퇴직을 당했습니다. - 1937년 6월 8일


[Music]


The time has come. I have to leave tomorrow and, of course, I find it hard. I will write to you before deportation.


시간이 왔습니다. 저는 내일 떠나야 하고, 물론 힘든데요. 추방되기 전에 편지를 쓸게요. - 1942년 1월 16일


[Music]


Alice Sommer: I was happy to be allowed to stay because my mother was there. She was already old. Then they took her away. That was the lowest point of my life. A woman of 72... with a rucksack on her back. Alone – my father had already died. She was alone. A black curtain came down in front of my eyes. It was terrible.


알리스 좀머 : 어머니가 계셔서 머물 수 있어서 기뻤어요. 이미 늙으셨죠. 그런 다음 그들은 어머니를 데려갔어요. 그게 제 인생에서 최악의 상태였죠. 72세의 여성... 배낭을 메고요. 홀로 –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어요. 어머니는 혼자였죠. 눈앞에 검은 커튼이 내려앉았어요. 끔찍했죠.


In November 1938, many Jews were murdered during an organised pogrom; Jewish businesses and synagogues wrecked. Thousands sent to concentration camps. Jews are banned from running retail or mail-order businesses.


1938년 11월, 많은 유대인이 조직적인 학살 동안 살해되었으며 유대인 상점과 회당이 파괴되었습니다. 수천 명이 강제수용소로 보내졌죠. 유대인들은 소매업이나 우편 주문 사업을 하는 것이 더 이상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 1938년 11월 12일


Testamentary bequests to Jews are null and void where they display a disregard for healthy popular sentiment.


유대인들에 대한 유언에 의한 유산은 건전한 대중 정서를 무시하는 경우 무효입니다. - 1938년 7월 31일


Jews must give up their radios.


유대인들은 라디오를 포기해야 합니다. - 1939년 9월 23일


All Jews obliged to report for forced labour.


모든 유대인은 강제 노동에 대해 보고할 의무가 있습니다. - 1941년 3월 4일


Organised arrests at works places – deportation follows.


직장에서 조직적인 체포가 일어나며 추방이 뒤따릅니다. - 1943년 3월 26일


Alice Sommer: But I... events were interesting thing in my house, this is what before deportation, where three of four Nazi families, and, ah, once I... I must practicing and lurking this time. After the, uhm... after the... my mother left, I was in a very mad state and, and I hate to play. I, I couldn’t. So, I played for hours and suddenly I heard, ah, ah, knocking, ah, on, on the flo... on the floor and I said, “Oh, the Nazis. And it is... it is... I disturbed him. I may not place it, now.” So, I stopped playing and, ah, the, the woman who took care of our house came once and said, “Mrs. Sommer, Mr. Hermann, the name of this Nazi, asked me that you are ordered in deporting. You know stop playing. He laughed, you’re playing,” She told me. So, immediately, I was sitting down and play, but they made me very... in one, ah, evening, the last evening, sitting already... everybody singing their backed. And then... and then the door was opened, and the Nazi came and said to me... “Mrs. Sommer, I see that you are about to be sent away I wish you all the best. Come back to us in good health. Remain healthy. I can tell you one thing for certain. I owe you a huge debt of gratitude. I have spent hours listening to you practice. My father was an organist... our entire family loved music. I admire you... and I cannot tell you how much you have helped us with your playing during this time especially.” This is what he said to me.


알리스 좀머 : 하지만 저는... 흥미로운 사건들이 집에서 일어났는데, 이것은 나치 가족 4명 중 3명이 추방되기 전의 일이며, 아, 한때 저는... 이번에는 연습하고 숨어야 했죠. 그 후, 음... 어머니가 떠난 후, 저는 매우 미친 상태에 있었고, 그리고 나는 연주하는 것을 싫어했어요. 전 할 수 없었죠. 그래서 몇 시간 동안 연주하다가 갑자기 아, 아, 노크, 바닥에서... 바닥에서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이렇게 말했어요. “오, 나치. 그리고 그것은... 그것은... 저는 그를 방해했죠. 지금은 배치하지 않을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연주를 멈추고, 아, 우리 집을 돌보던 그 여자가 한번 와서 이렇게 말했어요. “좀머 부인, 이 나치의 이름인 헤르만 씨가 당신에게 추방 명령을 내린다고 요청했어요. 그만 연주하세요. 그는 웃었고, 당신은 연주하고 있었죠.” 그녀가 제게 말했어요. 그래서 즉시 저는 앉아서 연습했지만, 그들은 저를 매우... 하루에, 아, 저녁, 마지막 저녁에 이미 앉아서... 모두가 그들의 뒤에서 노래를 부르게 했죠. 그러고 나서... 그러고 나서 문이 열렸고, 나치가 와서 제게 말했어요... “좀머 부인, 당신이 곧 보내질 것 같군요. 쾌유를 빌어요.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세요. 건강을 유지하세요. 한 가지는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큰 감사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저는 당신의 연습을 듣고 몇 시간을 보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오르가니스트였어요. 우리 가족은 모두 음악을 사랑했죠. 저는 당신을 존경하며... 당신이 특히 이 시간 동안 당신의 연주로 우리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말할 수 없어요.” 이것은 그가 제게 말한 것입니다.


Do you still practice now?


지금도 연습하시나요?


Alice Sommer: Yeah. Of course.


알리스 좀머 : 예. 물론이죠.


How much?


얼마나 하세요?


Alice Sommer: This is my food, two and a half hours.


알리스 좀머 : 이것은 제 양식으로, 2시간 반이요.


How old are you?


연세가 어떻게 되는지요?


Alice Sommer: Ninety-eight.


알리스 좀머 : 98세요.


[Music]


How many concerts did you give interrelationship?


얼마나 많은 콘서트에서 상호 관계를 제공했나요?


Alice Sommer: Yeah. More than hundred.


알리스 좀머 : 예. 100회 이상입니다.


[Music]


Paintings by the children of Theresienstadt


테레지엔슈테트 어린이들의 그림들


[Music]


Jacques Stroumsa: We arrived at a camp on the 8th of May 1943... at about four or five o’clock in the morning. The doors of the wagons were opened... and we were dazzled by the floodlights... panicked by the dogs... and by the SS shouting, ‘Everybody out, everybody out.’ With my right hand I held my wife, who was eight months pregnant... and with my left hand, my violin from which I was never separated I received a blow on the left hand, another on the right. ‘Leave your wife with her mother and your violin in the wagon!’ I left it there and got down.


자크 스트로움사 : 우리는 1943년 5월 8일... 아침 4시나 5시경에 수용소에 도착했어요. 마차의 문이 열렸고... 투광 조명등(야간 경기 등을 위한 강력한 조명등)에 우리는 눈이 부시게 되었으며... 개들에 당황하고... 친위대가 외치는 것에 놀랐어요. ‘모두 나가세요, 모두 나가.’ 오른손으로는 임신 8개월이 된 아내를 안고... 한 번도 떼지 못한 바이올린을 왼손에 들었는데, 왼손으로 맞고, 다른 쪽은 오른손으로 맞았어요. ‘어머니와 함께 아내를 남겨두고 바이올린은 마차에 남겨두시오!’ 저는 바이올린을 두고 내렸죠.


Alice Sommer: I have never wanted to talk about the atrocities we experience. And I still don’t want to. All I will say is that... when I say we had nothing to eat, you must believe me. In the mornings we had black water – that was coffee. At lunchtime some white water – that was soup. And in the evening the black water again. We were skin and bones. The women lost their menstruation, but – and thousands died of typhoid – but we were basically healthy. We were about 20 musicians... first-class musicians... and we were basically healthy. Of course the reason for that was... if we knew we were going to play in the evening, we were happy. We were happy.


알리스 좀머 : 저는 우리가 경험하는 잔학 행위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은 적이 없었어요. 그리고 여전히 그러고 싶지 않아요. 제가 할 말은... 우리가 먹을 것이 없다고 말할 때, 당신은 저를 믿어야 합니다. 아침마다 우리는 검은 물을 마셨는데, 그건 커피였죠. 점심시간에는 약간의 하얀 물이었는데, 그건 수프였죠. 그리고 저녁에는 다시 검은 물이었죠. 우리는 뼈와 가죽만 남았죠. 여성들은 월경을 잃었지만, 수천 명이 장티푸스로 사망했지만, 우리는 기본적으로 건강했어요. 우리는 약 20명의 음악가였는데... 일류 음악가였으며... 우리는 기본적으로 건강했어요. 물론 그 이유는... 저녁에 연주하러 갈 줄 알았다면, 우리는 행복했으니까요. 우린 행복했어요.


Jacques Stroumsa: When the head of the block... on the night of our arrival, asked: “Are there any among you who can play an instrument... especially the violin?” I said nothing. I could not imagine talking about music... in a concentration camp. The absurd... and music. That is impossible, they do not go together. But when I was obliged – because of my companions – to admit that I played the violin... the head of the block said, “You will receive five strokes of the cane... because it is sabotage to have said nothing. I am now going to find out whether you are a violinist. I will give you a violin.” I said, “I don’t have a violin.” “I will give you a violin.” He gave me a violin and said, “This is an order. You must play.” He said, “What do you want? Beethoven? Mozart? Handel? Haydn? Schubert? Schumann?” He told me, “You know... Without music? Schubert and Beethoven, and Mozart... Without music?” “Yes”, I said, “yes”. “Play.” What do you want? And I began to play the concerto from Mozart in A-dur (la majeur). Perhaps, you know it, la mi do la mi mi, param-papam-papam, param-papa. He is very brilliant and very good composer. I play about 10 to 12 minutes, and all around, my comrades were at the floury. And after he comes and makes me so. “Stop. You play really very good. And I hope you will ne... not, ah...” “I hope you will not die here.” I hope I said, “We have not come here to die.” He told me, “You don’t know what this, ah, concentration camp.”


자크 스트로움사 : 우리가 도착한 밤에... 건물의 우두머리가 다음과 같이 물었어요. “당신들 중에 악기, 특히 바이올린을 연주할 줄 아는 사람이 있나요?”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죠. 강제수용소에서... 음악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어요. 터무니없는... 그리고 음악. 그것은 불가능한데, 그들은 함께 가지 않아요. 하지만 동료들 때문에 제가 바이올린을 연주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때... 건물의 우두머리가 말했어요. “당신은 지팡이 다섯 자루를 받을 것입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은 방해 행위이기 때문이죠. 저는 이제 당신이 바이올리니스트인지 알아보려고 합니다. 바이올린을 줄게요.” 저는 이렇게 말했죠. “바이올린이 없는데요.” 그는 제게 바이올린을 주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바이올린을 줄게요. 이것은 명령입니다. 당신은 연주해야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어요. “무엇을 원하나요? 베토벤? 모차르트? 헨델? 하이든? 슈베르트? 슈만?” 그는 제게 말했죠. “그러니까... 음악 없이요? 슈만, 베토벤, 모차르트... 음악 없이요?” “네.” 제가 이렇게 말했죠. “네.” “연주하시오.” “무엇을 원하세요?” 그리고 저는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5번을 연주하기 시작했어요. 어쩌면 당신도 이 곡을 알고 있겠죠, 라 미 도# 라 미 미 파람-파람-파람, 파람-파파. 그는 매우 훌륭하고 매우 좋은 작곡가입니다. 10~12분 정도 연주하니 주위에 동료들이 붐볐죠. 그리고 그가 와서 저를 그렇게 만든 후에요. “멈추세요. 정말 잘 연주하시네요. 그리고 저는 바라는데 당신이 절대... 아니, 아... “당신이 여기서 죽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말했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죽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그는 제게 이렇게 말했어요. “당신은 이것이, 아, 강제수용소가 뭔지 모르는군요.”


[Music]


Jacques Stroumsa: It was hell. Dante’s Inferno ‘Abandon hope all who enter here’. And he sent me, immediately, to the conservatoire in Birkenau, as with Auschwitz, there was a conservatoire. That was the extraordinary... absurd idea of the SS – music in a concentration camp.


자크 스트로움사 : 지옥이었어요. 단테의 신곡 중 지옥 편에는 이런 말이 나오죠. ‘여기에 들어오는 그대, 모든 희망을 버려라.’ 그리고 그는 즉시 저를 비르케나우에 있는 음악원으로 보냈는데, 아우슈비츠와 마찬가지로 음악원도 있었어요. 그것은 비범한... 친위대의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는데, 강제수용소의 음악이었죠.


Anita Lasker-Wallfisch: In Auschwitz... I was the only cellist in the orchestra. It is quite easy to explain. As long as they wanted an orchestra... they didn’t send us to the gas chambers. But the gas chambers... were always in front of our noses.


아니타 라스커-발피쉬 : 아우슈비츠에서... 오케스트라에서 저는 유일한 첼리스트였어요. 설명하기 상당히 쉬운데요. 그들이 오케스트라를 원하는 동안은... 우리를 가스실로 보내지 않았죠. 하지만 가스실은... 항상 우리 코앞에 있었어요.


Alice Sommer: I remember, in winter we would wear winder coats... with hats on our heads and high boots. It was freezing, but still we played. How we did it, I don’t know, but still we played. And people would sit there in an ice-cold room. It was like a church or a temple or a mosque. Indescribable.


알리스 좀머 : 저는 겨울에 우리가 바람막이 코트를 입었던 것을 기억하는데... 머리에는 모자를 쓰고 높은 부츠를 신었죠. 추웠지만 그래도 우리는 연주했죠. 우리가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여전히 우리는 연주했어요. 그리고 사람들은 얼음처럼 차가운 방에 앉았을 거예요. 교회나 절이나 이슬람 사원 같았죠.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Anita Lasker-Wallfisch: The remarkable thing about the orchestra that it was directed by Alma Rosé. Alma Rosé was a daughter of Arnold Rosé, who was a leader of the Vienna Philharmonic and had the famous Rosé Quartet, and she was the niece of Gustav Mahler. And she was herself a fantastic violinist. She arrived in the camp, she was in the experimental block, just about to be experimented upon when it came out that she was a violinist and somehow, she landed in, in Birkenau, shortly before I arrived and called. And, she was given the, uhm, the task to make an, ah, an orchestra, her experience in Auschwitz, Theresienstadt. We would play things like operettas – so much in fashion at the time – and Zarah Leander songs – we had a few female singers. It was a completely crazy ensemble. But our main job was to play marches. Marches, morning and evening... for the thousands marched off to work... in the factories surrounding the camp. The famous ‘slave-labour’. And my personal claim to fame... is that I played Schumann’s ‘Träumerei’ for Dr. Mengele, the famous doctor... who experimented to the twins... and was, apparently, a music-lover. He came to out block and wanted to hear Schumann’s ‘Träumerei’.


아니타 라스커-발피쉬 : 알마 로제가 지휘한 오케스트라에는 놀라운 것이 있어요. 알마 로제는 빈 필하모닉과 유명한 로제 콰르텟의 리더인 아르놀트 로제의 딸이자 구스타프 말러의 조카딸이었어요. 그리고 그녀는 그 자체로 환상적인 바이올리니스트였죠. 그녀가 캠프에 도착하여 실험 구역에 있었고 실험을 막 시작하려던 참이었는데, 그녀가 바이올리니스트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그녀는 제가 도착하여 요청하기 직전에 비르케나우에 상륙했어요. 그리고 그녀는 음, 오케스트라를 만드는 임무를 맡아서 아우슈비츠와 테레지엔슈타트에서 경험했죠. 우리는 당시 유행했던 오페레타와 자라 레안데르의 노래 같은 것들을 연주하곤 했는데, 몇몇 여성 가수들이 있었어요. 완전히 미친 앙상블이었죠. 그러나 우리의 주도니 일은 행진곡 연주였죠. 아침저녁으로 행진곡들... 일하러 행진하는 수천 명을 위해서... 수용소 주변의 공장들에서요. 그 유명한 ‘노예노동’이었죠. 그리고 명성에 대한 제 개인적인 주장은... 쌍둥이를 실험한 유명한 의사인... 요제프 멩겔레 박사를 위해 제가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를 연주했으며, 그는 분명히 음악 애호가였다는 것이죠. 그는 건물 밖으로 나와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를 듣고 싶어 했어요.


And did you play it for him in private?


그리고 당신은 사적으로 그를 위해 연주했나요?


Anita Lasker-Wallfisch: No, no, with orchestral accompaniment. We had an arrangement. We would sit in the block and rehearse... and the SS would come in... sometimes two or three, or just one... to listen to a bit of music... to refresh themselves from their work – putting people into the gas chambers.


아니타 라스커-발피쉬 : 아뇨, 오케스트라 반주로요. 우리는 편곡을 했죠. 우리는 건물에 앉아서 예행연습을 하고... 친위대가 와서... 때로는 두세 명, 아니면 한 명만... 음악을 조금 듣고... 일에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사람들을 가스실로 들여보냈죠.


Alice Sommer: I am a survivor of Theresienstadt, but you can’t compare the survivors of Auschwitz, for instance. This was indescribable. This is... so these people went through to the hell. Even the first year in Theresienstadt, we didn’t know about Auschwitz. In the second year, we knew it. And they wanted to, to make gas chambers in Theresienstadt as well, just started already, but I didn’t finish.


알리스 좀머 : 저는 테레지엔슈타트의 생존자이지만, 예를 들어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들을 비교할 수는 없어요. 이것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이것은... 그래서 이 사람들은 지옥에 갔죠. 테레지엔슈타트에서의 첫 번째 해에도 우리는 아우슈비츠에 대해 몰랐어요. 두 번째 해에는 알았죠. 그리고 그들은 테레지엔슈타트에서도 가스실을 만들고 싶었는데, 이미 시작했지만 끝내지 못했죠.


Oh God! Do not desert us in our pain. We see death! Death! Hold back your scythe!


오 신이시여! 고통 속에 우리를 버리지 마세요. 죽음이 보입니다! 죽음! 낫질을 막으세요!


The Song of Terezin by Franz Waxman, Words by Eva Pickova, aged 12, Theresienstadt


프란츠 왁스먼 작곡 <테레진의 노래>, 12세에 테레지엔슈테트에서 에바 피츠코바 작사


Alice Sommer: And to conclude I can only say... that when we played... it was like a divine service of something of the kind. We were close to the divine... when we were allowed to play – and so were our listeners.


알리스 좀머 : 그리고 결론을 내리자면... 우리가 연주했을 때... 일종의 신성한 봉사와 같았어요. 연주가 허용되었을 때, 우리는 신에 가까웠고... 듣는 사람도 마찬가지였죠.


Anita Lasker-Wallfisch: We sat there under sentence of death – alive today, but perhaps not tomorrow. If you were told to play something, you played it. I believe it would have been a luxury to sit here and analyse it all. It was an existence... from one minute to the other. We knew that today or tomorrow or the day after... we will go in there and come out as smoke. There really was no doubt about it.


아니타 라스커-발피쉬 : 우리는 사형 선고를 받으며 그곳에 앉아 있었는데, 오늘은 살아있지만, 내일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뭔가를 연주하라고 하면 연주했죠. 저는 여기 앉아서 모든 것을 분석하는 것이 사치였을 것이라고 믿어요. 1분에서 다른 시간 사이의... 존재였죠. 우리는 오늘이나 내일이나 모레... 거기에 들어가서 연기처럼 나올 것입니다. 정말 의심의 여지가 없었죠.


No, no my God in all the heaven. We seek a better world! We want to live! We want the light! We want to live! Do not forget us! Do not forget us! Do not forget us! Do not forget us!


아니요, 온 하늘에 있는 저의 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추구합니다! 우리는 살고 싶어요! 우리는 빛을 원해요! 우리는 살고 싶어요! 우리를 잊지 마세요! 우리를 잊지 마세요! 우리를 잊지 마세요! 우리를 잊지 마세요!


[Music]


Alice Sommer: Theresienstadt was proof of the magic of music. I cannot say it another way. It is extraordinary, the effect... that music has on the human soul. It is the most beautiful thing that human life can bestow on one. And I must say, till my, my last days, I am 98 years old. It helped me and it make my life beautiful. Beautiful, even in very, very difficult times, it makes me really happy.


알리스 좀머 : 테레지엔슈타트는 음악의 마법의 증거였어요. 달리 말할 수 없어요. 음악이 인간의 영혼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해요. 인간의 생명이 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사는 마지막 날까지 저는 98세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것은 저를 도왔고 제 삶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아름다워요, 매우 어려운 시기에도 저를 정말 행복하게 만듭니다.


[Music]




멘델스존, 바그너, 유대인 강제수용소를 소재로 한 내용을 번역하게 되었는데, 아쉬케나지에 대해서 욕심부리다가 빚어진 일. 마침 자막이 있어서 받아쓸 수 있었다. 하지만 완전한 것도 아니고 들리지 않는 부분(inaudible)이 표시되어 있어서 외국 분한테 부탁해서 들리지 않는 구간을 보완하려고 했으나 결국 4군데(30:10, 31:10 – 31:20, 35:35) 중 한 군데는 해결하지 못했다.

댓글 1개:

  1. 눈사람 드라이브
    https://drive.google.com/drive/folders/0B4QbexMaD9S8MXBDWjhUb1E5SmM

    Neige 드라이브
    https://drive.google.com/drive/folders/0B9PSN3c1KZtEUGN2THlRcDJJcXM

    눈사람2 드라이브
    https://drive.google.com/drive/folders/0B83HU4qshzJWZEN2R0pxUE5wdWs?resourcekey=0-YFW_K8TPeHBTZhTWkX6gyg

    Neige2 드라이브
    https://drive.google.com/drive/folders/0BwzTfO581R_eaFBBQm1MQ2M2VGs?resourcekey=0-d0QVR2QwxYVtuhnrDfar3A

    Neige눈사람 드라이브
    https://drive.google.com/drive/u/0/folders/1wpfdQBgpLO2L-FFwchXvfngzHkuX1Yxh

    You have to download until 31 August 2022.

    2022년 8월 31일까지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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