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2일 화요일

DVD / Tchaikovsky 2 Films 2009



https://www.youtube.com/watch?v=Sa9NArmuHTg

https://www.youtube.com/watch?v=ZoPQtBRbzdw


러시아 최고의 작곡가 차이코프스키에 대한 두 편의 인상적 기록

크리스토퍼 누펜은 안드레스 세고비아, 예후디 메뉴인, 나탄 밀스타인, 재클린 뒤 프레,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이차크 펄만, 에프게니 키신 등 명 연주가에 대한 인상적 기록을 남긴 일급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그가 이번엔 작곡가를 선택했다. 15세 무렵부터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다. 요즘엔 차이코프스키의 우울한 내면을 동성애에서 찾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지만 누펜은 반대로 접근한다.


‘차이코프스키의 여인’이란 주제로 어린 나이에 잃은 모친, 억지 결혼 상대 안토니나 밀류코바, 13년간 후원한 폰 메크 부인은 물론 작품에 등장하는 카테리나(폭풍), 줄리엣, 백조 오데트, 리미니의 프란체스카, 타티아나(예프게니 오네긴), 심지어 차이코프스키가 사랑한 작곡가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에 나오는 돈나 안나까지 그의 삶과 연결시켜 70분에 걸쳐 탐구한 것이다.


누펜은 이것으로 성이 차지 않아 ‘운명’이란 86분짜리 다큐멘터리를 추가하여 교향곡 제4번부터 5번, 6번에 이르는 운명의 사슬을 추적한다. 풍부한 사진 자료가 제공되며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가 지휘하는 스웨덴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굉장한 연주를 들려준다. 일세를 풍미했던 미모의 발레리나 신시아 하비가 카테리나, 줄리엣, 오데트로 나선 점도 흥미롭다.


차이코프스키(1840~1893)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어머니의 때 이른 죽음을 겪으면서 염세적인 세계관을 갖게 되었다. 음악을 좋아했음에도 집안의 뜻에 따라 명문 법률학교에 진학했고 졸업 후에는 법무성 관료가 되었다. 그러나 끝내 음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만학도의 길을 걷는다. 결국 음악의 후발국이었던 러시아를 대표하는 대 작곡가가 되었으니 그의 선택은 옳았다고 할 것이다.


차이코프스키는 교향곡, 협주곡, 관현악곡, 실내악곡, 피아노곡, 발레, 오페라, 가곡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섭렵했는데, 긍정적인 의미에서든 그렇지 않든 ‘서구파’라고 불린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독일 음악전통에서 가장 중요시된 교향곡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 것이 사실이다. 모두 7곡의 교향곡을 남겼는데 6곡은 번호가 있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번호가 없는 표제적인 작품인 <만프레드 교향곡>이다. 이 중 3번까지는 민속적인 냄새가 강한 작품이었던 반면 4번부터 6번까지는 작곡가의 염세적 세계관이 다양한 방법으로 투영되어 있다.


차이코프스키는 당시 금기시되었던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괴로워하고 외부에는 숨기고자 했는데 이것이야말로 그의 비극적 세계관을 읽는 열쇠라 할 것이다. 그러나 누펜은 다시 그 이면에 숨겨진 차이코프스키 주변의 여인들에 주목했다. 실제 인물뿐 아니라 작품 속에 그려낸 여성들에 대해서도 탐구했다는 점이 무척 인상적이고 또 유효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Tchaikovsky’s Women (Part I)

In the summer of 1864, Pyotr Ilich Tchaikovsky, aged 24 and a second-year student at the St Petersburg Conservatoire, wrote his first full-scale orchestral work and called it The Storm. Tchaikovsky had based the piece on a new play by Russia's leading dramatist, Alexander Ostrovsky, which had touched him deeply and inspired him to produce, quite suddenly, a work that stood head and shoulders above anything that he had written before. It marked the beginning of his career as a composer, and it established patterns of composition and an artistic identification with suffering women that would remain with him for the rest of his days.


1864년 여름, 당시 24세였던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2학년 학생일 때 <폭풍>이라고 불리는 그의 첫 번째 본격적인(권위 있는) 오케스트라 작품(교향시)을 썼습니다. 차이코프스키는 러시아를 대표하는 극작가 알렉산더 오스트롭스키의 새로운 희곡을 바탕으로 곡을 썼는데, 이 희곡은 그에게 깊은 감동과 영감을 주어 그가 이전에 쓴 어떤 것보다 압도적인(이전 작품을 훨씬 능가하는) 작품이었죠. 그것은 작곡가로서의 그의 경력의 시작을 예고했으며, 그의 남은 날 동안(경력 전반에 걸쳐) 그의 작품에 나타날 고통받는 여성들에 대한 작곡 패턴과 예술적 동일시(정체성)를 확립했습니다.


Tchaikovsky’s Women


차이코프스키의 여인


In his play, Ostrovsky portrays a sensitive spirit destroyed by a rigid and uncomprehending society, and it was the idea of the vulnerable young woman in the grip of inescapable fate that touched Tchaikovsky so deeply. Ostrovsky's heroine, Katerina, is married to a weak young man, dominated by his mother. Oppressed and frustrated, she falls secretly in love with another man and, left alone, she succumbs to her passion. A wild storm breaks out and, in terror, she confesses her guilt. She is pursued through the storm by her mother-in-law until she drowns herself in the Volga.


오스트롭스키는 그의 희곡에서 경직되고 이해할 수 없는(엄격하고 편협한) 사회에 의해 파괴된 민감한 정신을 묘사하는데, 차이코프스키를 그토록 깊게 감동케 한 모티브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손아귀에 갇힌(운명을 벗어날 수 없는) 연약한 젊은 여성의 생각이었죠. 오스트롭스키의 여주인공 카테리나는 어머니에 지배당하는 약한 청년과 결혼했습니다. 억압과 좌절을 겪은 그녀는 다른 남자와 몰래 사랑에 빠지며, 혼자 남겨진 그녀는 자신의 열정에 굴복합니다. 폭풍우가 몰아치고 공포에 질린 그녀는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그녀는 폭풍우 속에서 시어머니에게 쫓기다가 볼가강에서 익사하게 됩니다.


Katerina, Juliet, Odette / 카테리나, 줄리엣, 오데트 역할

Cynthia Harvey / 발레리나 신시아 하비


Donna Anna / 돈나 안나 역할

Clarry Bartha / 발레리나 클라리 바사


Tatyana / 타티아나 역할

Helen Field / 발레리나 헬렌 필드


Prince Siegfried / 지크프리트 왕자 역할

Mark Silver / 발레리노 마크 실버


The Swedish Radio Symphony Orchestra


스웨덴 방송교향악단 반주


Vladimir Ashkenazy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지휘


In his first orchestral work, Tchaikovsky had demonstrated skill and some originality in his handling of the orchestra, but more significantly, he had shown an ability to capture the motivating forces of the drama. But none of this was seen at the time. The piece incurred the intense displeasure of his teacher, Anton Rubinstein, for going far beyond what was expected from a second-year student, and Rubinstein insisted that a performance was quite impossible. The work was never published, or even played, during Tchaikovsky's lifetime.


차이코프스키는 그의 첫 오케스트라 작품에서 오케스트라를 다루는 기술과 독창성을 보여주었지만, 무엇보다도 드라마의 원동력(동기)을 포착하는 능력을 보여줬죠. 그러나 당시에는 주목받지 못했는데요. 이 곡은 2학년 학생에게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고, 그의 스승인 안톤 루빈스타인에게 깊은 불만을 불러일으켰는데, 그것을 무대에 올릴 수 없다고 믿지 않았기 때문이죠. 이 작품은 차이코프스키의 생전에 출판되거나 연주되지도 않았습니다.


With its virtues unrecognised and its daring condemned, The Storm was an inauspicious start for a young man who had come late to music and whose talent had already been described as "quite unexceptional". But worse was to follow. For his graduation exercise, Tchaikovsky was given the task of setting Schiller's Ode To Joy. Time was limited and the subject did not touch his imagination. In addition, he was conscious of having to compete with Beethoven's Ninth Symphony, and was so nervous that he failed to appear at the final examination and very nearly lost his diploma. But the music was performed in his absence at the prize-giving ceremony and was a full-scale disaster. It drew widespread criticism, both at the Conservatoire and in the press, but none more biting than what appeared in print from the mighty César Cui. "The Conservatoire composer Mr Tchaikovsky is utterly feeble. It is true that his composition was written under most unfavourable circumstances, but if he had any gift at all, then at least somewhere or other it would have broken through."


그 실력은 인정받지 못했고 대담함은 멸시받는 <폭풍>은 음악을 늦게 접하여 재능이 이미 “별로 뛰어나지 않다”고 묘사된 청년에게 불길한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나쁜 일(최악의 상황)이 닥쳤죠.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죠.) 졸업 논문을 위해 차이코프스키는 쉴러 <환희의 송가>를 음악으로 설정하는 과제를 받았는데요. 시간은 제한되어 있었고 주제는 그의 상상력을 포착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베토벤 교향곡 9번과 씨름해야 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고, 너무 긴장해서 기말고사를 놓치고 학위를 거의 잃을 뻔했죠. 그러나 시상식에서 그가 빠진 상태로 음악이 연주되어 완전히 재앙이 되었죠. 음악원과 언론에서 비판이 쏟아졌지만, 러시아 5인조 중 한 명인 세자르 큐이가 언급한 것보다 더 가혹한 것은 없었습니다. “음악원 작곡가 차이코프스키는 매우 나약합니다. 그의 작품이 가장 불리한 상황에서 쓰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에게 조금이라도 재능이 있었다면 적어도 어딘가에서 느껴졌을(어느 순간 눈에 띄었을) 것입니다.” (음악원의 작곡가, 차이코프스키 씨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입니다. 불리한 상황에서 작곡해야만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에게 조금이라도 재능이 있었다면 한 번쯤은 들렸을 것입니다.)


Tchaikovsky was deeply affected. "When I read this terrible judgement, I hardly knew what I was doing and everything went black before my eyes. My head began to spin and I ran out of the café like a madman. I was not aware of what I was doing or where I was going. The whole day long, I wandered the streets, repeating to myself, 'I am sterile and shall never amount to anything.'"


차이코프스키는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차이코프스키는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 맹렬한 비판을 읽었을 때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거의 몰랐고 모든 것이 어두워졌다. 머리가 핑 돌기 시작했고 미친 사람처럼 카페에서 뛰쳐나왔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나는 온종일 거리를 배회하며 ‘나는 상상력이 부족하며(실패했다), 결코 아무것도 되지 않을 것’(나는 무능하고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할 것)이라고 되뇌었다.”


But, alone among the critics, his friend Herman Laroche had seen his potential. "I tell you frankly that I consider yours is the greatest musical talent to which Russia can look forward. I see in you the greatest, or rather the only, hope for our musical future. Your own original creations may not make their appearance for another five years, but they will surpass everything that we have heard since Glinka. To sum up, I do not honour you so much for what you have done as for what the force and vitality of your genius will accomplish one day."


그러나 모든 비판 속에서도 그의 친구인 헤르만 라로헤만이 그의 잠재력을 보았습니다. “솔직히 저는 당신이 러시아가 기대할 수 있는(바라는) 가장 위대한 음악적 재능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당신에게서 우리의 음악적 미래에 대한 가장 크거나 혹은 오히려 유일한 희망을 봅니다. (당신은 우리나라 음악의 유일한 희망은 아닐지라도 가장 큰 희망입니다.) 당신의 독창적인 창작물들은 앞으로 5년 동안 나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글린카 이후로 우리가 들은 모든 것을 능가할 것입니다. 요컨대 저는 당신의 천재성의 추진력과 활력이 언젠가 성취될 일에 대해 당신을 존경합니다.”


Tchaikovsky responded to both the encouragement and the criticism by plunging himself so fiercely into the composition of his First Symphony that he came close to collapse from exhaustion. His doctor was called, declared him close to madness and ordered complete rest. Three difficult years were to follow, with a number of disturbing failures, before Tchaikovsky's imagination would take flight as it had done with The Storm. Again, he was touched by the idea of the suffering woman, but this time it was Juliet, trapped and finally destroyed in the feud between the Montagues and the Capulets.


차이코프스키는 자신의 교향곡 1번 작곡에 너무 몰두하여 지쳐 쓰러질 뻔한 상태로 격려와 비판에 화답했습니다. 그들은 의사를 불러 그가 거의 미쳤다고(광기의 위기에 처해 있다고) 말했고 그를 완전히 쉬게 했죠. 몇 번의 실패로 얼룩진 3년 후, 차이코프스키는 <폭풍>에 대해 가졌던 영감을 재발견합니다. 다시 한번 그는 몬태규 가와 캐퓰렛 가 사이의 불화에 갇힌 채 결국 희생된 줄리엣이라는 여성의 고통에 감동합니다.


[Music]


Tchaikovsky had again been drawn by a literary source which mirrored his own mental state. He was recovering from an infatuation with the Belgian opera singer Désirée Artôt, and already convinced that his life was governed by a fate quite beyond his control that would crush his own emotional longings - the beginnings of a preoccupation with fate that would become, in time, a mortal obsession.


차이코프스키는 자신의 정신 상태를 반영한 문학 작품에 다시 한번 끌렸는데요. 벨기에의 오페라 가수 데지레 아르토에 대한 반감에서 아직 회복 중인 그는 이미 자신의 삶이 자신의 감정적 갈망을 파괴할 통제할 수 없는 운명에 좌우된다는 것을 확신하고(자신의 감정적 욕망을 부숴버릴 임의적인 운명이 자신의 삶을 지배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죠. - 이 운명의 고뇌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치명적인 집착이 되었습니다.


At the age of 21, he had written to his sister, "How will I end up? What does the future hold? It is terrifying even to consider. But I know that sooner or later, and probably sooner, I will not be able to struggle with the difficult side of this life and will smash myself into pieces." His words were to come true at the age of 53, but more tragically than even he could have foreseen. What Tchaikovsky felt for Artôt was almost certainly the only sexual attachment to a woman in the whole of his life, although it was by no means certain where his feelings for the woman left off and his fascination with the performer began. Nevertheless, the attachment was very real and it helped to produce for Juliet the most convincing love music that Tchaikovsky had written yet.


21세에 그는 여동생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습니다. “나는 어떻게 될까? 내게 미래는 무엇일까? 생각만 해도 끔찍해. 그러나 조만간, 아마도 머지않아 나는 이 삶의 고단함을 견딜 수 없을 것이며 산산조각날 것을 알고 있어.” 그의 말(이 예측)은 53세의 나이에 실현될 것이었지만,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비극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차이코프스키가 아르토에 대해 느낀 것은 분명히 그의 평생 한 여성에 대한 유일한 성적 애착(유대감)이었지만, 여성에 대한 그의 감정이 어디까지 갔는지, 연주자에 대한 그의 매혹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착(그 유대감)은 진정성이 있었고 차이코프스키가 지금까지 작곡한 줄리엣을 위한 가장 매력적인 사랑 음악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어쨌든 그 연결은 진정성이 있었고 그때까지 차이코프스키가 작곡한 것 중 가장 설득력 있는, 줄리엣을 위한 사랑 음악을 만드는 것에 기여했습니다.)


[Music]


Romeo And Juliet had been suggested as a subject by Mily Balakirev, when Tchaikovsky was feeling particularly low in the autumn of 1869, and Balakirev played a crucial role in its development. One of the failures of the preceding years had been an overture which Tchaikovsky had dedicated to Balakirev, who accepted the dedication, but after performing it in St Petersburg early in 1869, delivered a devastating criticism in a private letter to the composer. Tchaikovsky responded with disarming grace. "Your letter contains only criticisms, but they are just ones and I was not in the least offended. In my heart I salute that absolute integrity which is one of the most attractive facets of your musical personality. Of course I shall not withdraw the dedication, but some day I hope to write something better for you."


<로미오와 줄리엣>은 1869년 가을 차이코프스키가 특히 우울할 때 밀리 발레키레프의 주제로 제안되었으며, 발라키레프는 그 발전부에서 중요한(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전 몇 년 동안 실패한 것 중 하나는 차이코프스키가 발라키레프에게 헌정을 수락한 서곡이었지만, 1869년 초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공연한 후 작곡가에게 편지를 보내 신랄하게 비판했죠. 차이코프스키는 무장을 해제하는 우아함(매력적인 기품)으로 화답했습니다. “당신의 편지에는 비판만 포함되어 있지만, 단지 하나의 비판일 뿐이고 나는 조금도 기분이 상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속으로 당신의 음악적 성격의 가장 매력적인 측면 중 하나인 완전한 무결성에 경의를 표합니다. 물론 나는 헌정을 철회하지 않겠지만 언젠가는 당신을 위해 더 좋은(아름다운) 곡을 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This set the tone of the relationship for some time to come, and with Romeo And Juliet, Balakirev saw his opportunity to do something of real value for the young composer. Having first proposed the subject, he quickly followed with a ground plan for the whole piece, and within a few weeks, Tchaikovsky was able to write to him, "The greater part is already composed in outline, and a large portion of what you advised has been carried out as instructed." But his mentor was far from satisfied and kept up a highly critical scrutiny relieved only at times by flashes of spontaneous enthusiasm. "This is simply delightful. When I play it, I can just see you wallowing in your bath with Artôt herself ardently rubbing you with fragrant soap-suds. Just one thing I will say against it - there is little in it of inner, spiritual love, and only a passionate physical longing." But he did note approvingly Tchaikovsky's skill in projecting the twin themes of love and implacable feud.


이것은 가까운 미래에 대한 관계(향후 협력)의 분위기를 조성했으며, 발라키레프에게 <로미오와 줄리엣>은 젊은 작곡가에게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 일(수익성 있는 프로젝트)을 제안(부여)할 기회였습니다. 주제를 처음 제안한 그는 곡 전체에 대한 기본 계획(전체 작품의 개요)을 신속하게 따랐으며, 몇 주 만에 차이코프스키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낼 수 있었죠. “기초는 이미 다 짜여 있고(이미 대부분의 초안을 작성했고) 지시한 대로 하라고 조언한 부분이 상당 부분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멘토는 전혀 만족하지 않았고 자신의 가혹한 비판을 유지했으며, 때때로 자발적인 열정으로 누그러졌습니다. “이건 정말 즐거운 일이야. 내가 연주할 때 나는 아르토 자신이 향기로운 비눗물로 자네를 열정으로 문지르고 있는 욕조에서 뒹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거든. 그것에 대해 한 가지만 말할게. (한 가지 불만이 있어.) - 내면의 영적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거의 없고 오직 열정적인 육체적 욕망만 있을 뿐이야.” 그러나 그는 사랑과 끊임없는 불화라는 두 가지 주제를 투영하는(제시한) 차이코프스키의 능력(재능)을 높이 평가(인정)했습니다.


[Music]


Never again would Tchaikovsky work under such close critical scrutiny, nor take so long to perfect the form of any of his works. In the end, he worried at Romeo And Juliet for ten years before he felt that he had done it justice. Never again would he feel for any woman what he had felt for Désirée Artôt, although the theme of love crushed by a hostile fate would continue to inspire many of his greatest works. Under his friend's guidance, Tchaikovsky had produced his first real masterpiece and, at its close, some of the tenderest music that he ever wrote.


차이코프스키는 다시는 다른 사람들의 비판적인 시선 아래서 작업하지 않았고, 작품의 형식을 완성하는 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10년 동안 고민하다가(관심을 두다가) 자신이 정의로운 일을 했다고 확신하게 되었는데요. 역경(적대적인 운명)에 짓눌린 사랑이라는 주제(모티브)가 그의 많은 위대한 작품에 계속 영감을 주었지만, 그는 데지레 아르토에 대해 느꼈던 것과 같은 감정을 어떤 여성에게도 다시는 느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친구의 지도로 차이코프스키는 자신의 첫 번째 진정한 걸작을 만들었으며, 마지막 부분에서는 그가 작곡한 것 중 가장 부드러운 음악을 남겼습니다.


[Music]


Pyotr Tchaikovsky, second son of Ilya, was born in this house in Votkinsk on the 7th of May 1840, his father a hard-working chief inspector of mines who was both liked and respected in the local community. Ilya Tchaikovsky had no particular musical talent, although he had played the flute in his youth and had an interest in the theatre. But he was even-tempered and fair-minded and enjoyed a warm, committed relationship with his second son throughout his life, supporting him and guiding him through many a difficult crisis.


일리야의 둘째 아들인 표트르 차이코프스키는 1840년 5월 7일 봇킨스크에 있는 이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성실한 광산 감독관으로, 지역 사회에서 존경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일리야 차이코프스키는 어린 시절에 플루트를 연주했고 연극에 관심이 있었지만 특별한 음악적 재능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품이 온화하고 정의로웠고, 항상 둘째 아들과 따뜻하고 헌신적인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여러 어려운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지지하고 인도했습니다.


The boy's relationship with his mother, Alexandra, was, by contrast, highly charged. She had an excitable, nervous temperament inherited from a family with a history of epilepsy, and had spent her childhood from the age of six in an orphans' home. Alexandra Tchaikovskaya was of French Huguenot descent, spoke fluent French and German and played the piano and sang with talent. So there was music in the house, which possessed both a piano and an orchestrion. This was a grand, magical music box which played excerpts from well-known operas, including, significantly, Don Giovanni, and which would always be remembered with gratitude as the introduction to Mozart.


그와 대조적으로 소년과 그의 어머니 알렉산드라의 관계는 매우 까다로웠는데요. 그녀는 흥분하고 신경질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었고 간질의 가족력을 ​​물려받았으며 6세 때부터 고아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알렉산드라 차이코브스카야는 프랑스 위그노 혈통으로,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피아노를 연주하며 노래에 재능이 있었죠. 그래서 집에는 피아노와 오케스트리온을 겸비한 음악이 있었는데요. 이것은 현저하게 <돈 조반니>를 비롯하여 잘 알려진 오페라들을 발췌하여 연주하는 웅대한 마법의 음악상자(오르골)였으며 모차르트에 대한 입문서로 항상 기억될 것입니다.


[Music]


"The music of Don Giovanni was the first to make a deep impression on me. It awoke the spiritual ecstasy which was later to bear fruit. With its help, I penetrated into that world of artistic beauty where only great genius soars. It is due to Mozart that I have devoted my life to music. He gave me the impulse to all my efforts and made me love it above all else in the world."


“‘돈 조반니’의 음악은 내게 처음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것은 나중에 열매를 맺을 영적 황홀감을 깨웠습니다. 그 도움으로 나는 위대한 천재만이 떠오르는 예술적 아름다움의 세계에 들어섰습니다. 평생을 음악에 바친 것도 모차르트 덕분입니다. 그는 내 모든 노력에 대한 원동력(연료)이 되었고 그로 인해 나는 세상에서 무엇보다도 그것을 사랑했습니다.” (‘돈 조반니’의 음악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진정한 천재만이 떠오르는 이 예술적 아름다움의 세계로 가는 문을 여는 데 도움이 된 영적 고양감을 일깨워주었습니다. 내 인생을 음악에 바친 것은 모차르트 덕분입니다. 그는 나에게 성공에 대한 의지를 심어주었고 나는 무엇보다 매 순간을 즐겼습니다.)


[Music]


I call for vengeance

Your heart demands it too


Ich ersuche Gerechtigkeit,

Dein Herz ersucht Gerechtigkeit!


Je demande justice,

votre cœur demande justice


Vendetta ti chiedo,

La chiede il tuo cor.


Venganza te pido,

la pide tu corazón


누가 우리 아버지를 죽였는가를

그대가 내 복수 해줬으면 좋겠네.


[Music]


At three and a half, Pyotr was attempting to improvise at the piano, and at the age of four, when his mother went away on a journey, he and his sister, Alexandra, aged two and a half, devised a song with the title Our Mama In St Petersburg. On her return, his mother brought with her a governess from Alsace named Fanny Durbach, to begin the education of her eldest son Nikolay and his cousin Lydia. Pyotr soon asked to join in, and made such rapid progress that by the age of six he could read French and German fluently, and by seven was writing verses in French. His first was a poem about Joan of Arc, a subject that would continue to fascinate him all through his life, and, presumably, his first encounter with the doomed young woman. Fanny Durbach was pleased both by the boy's sensitivity and by his ability to learn. Not surprisingly, he was soon very firmly attached to her.


3.5세에 표트르는 피아노로 즉흥 연주를 시도했고, 4세에는 어머니가 여행을 떠났을 때 그와 2.5세인 여동생 알렉산드라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우리 엄마>라는 제목의 노래를 작곡했습니다. 어머니는 돌아와서 장남 니콜라이와 그의 사촌인 리디아를 가르치기 위해 알자스에서 파니 뒤르바흐라는 가정교사를 데려왔습니다. 표트르는 곧 그들과 합류하여 6세가 되었을 때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유창하게 읽고 7세에는 프랑스어로 시를 쓸 수 있을 정도로 급속한 발전을 이뤘죠. 그의 첫 번째 시는 잔 다르크에 대한 것으로, 이는 평생 그를 매료시켰으며, 아마도 파멸의 운명에 처한 젊은 여성과의 첫 만남(여성의 고통과 마주한 첫 대면)일 것입니다. 파니 뒤르바흐는 소년의 감수성과 학습 능력에 모두 만족했죠. 당연히 그는 곧 그녀에게 매우 애착을 갖게 되었습니다.


"At lessons, no child was more industrious or quicker to understand. In playtime, none was so full of fun. But his sensitivity was extreme, and I had to be very careful how I treated him. He was as brittle as porcelain and a trifle could wound him deeply. With Pyotr, there could be no question of punishment. The least criticism or reproof of a kind that would pass lightly over other children would upset him alarmingly."


“수업 시간에 이보다 더 부지런하거나 이해력이 좋은 아이는 없었어요. 그는 쉬는 시간에 즐거워하지 않았죠. 그러나 그의 감수성은 극도로 예민했고 나는 그를 어떻게 대할지 매우 조심해야 했습니다. 그는 도자기처럼 부서지기 쉬웠으며 사소한 일에도 깊은 상처를 입을 수 있었습니다. 표트르에게는 처벌의 여지가 없었는데요. 다른 아이에게는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 사소한 비난이나 질책이 그에게는 괴로움의 원인이 되었거든요.”


She was disturbed also by the way in which music would excite and unsettle the child. The next few years brought painful changes to a temperament that was already hyper-sensitive. The changing fortunes of the family deprived him of Fanny Durbach at the age of eight, turned his industriousness to indolence and, at the age of ten, brought the two most wounding experiences of his childhood. Taken to boarding school in St Petersburg by his mother, he could not face the parting. The incident was later recalled by his brother, Modest.


그녀는 또한 음악이 아이를 흥분시키고 불안하게 하는 방식에 대해 걱정했습니다. 다음 몇 년은 이미 과민했던 기질에 고통스러운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가족의 변화하는 운명(가계의 몰락)은 8세에 그에게 파니 뒤르바흐를 박탈하고 그의 부지런함을 게으름으로 바꾸었으며 10세에는 가장 가슴 아픈 어린 시절의 경험을 두 번 겪었죠. 어머니에 의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기숙학교에 보내진 그는 이별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그의 남동생 모데스트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습니다.


"When the actual moment of parting came, he completely lost his self-control and, clinging wildly to his mother, refused to let her go. Neither kisses nor words of comfort nor the promise of return were of any use. He saw nothing, heard nothing and hung onto her as though he were part and parcel of her beloved presence. It became necessary in the end to carry him off by force and to hold him fast until his mother had driven away. Even then he broke loose and, with a cry of despair, ran after the carriage and clung to one of the wheels. To his life's end, Tchaikovsky could never recall this hour without a shiver of horror."


“실제로 이별할 순간이 되자 그는 자제력을 완전히 잃고 어머니를 놓지 않으려고 미친 듯이 매달렸습니다. 입맞춤도, 위로의 말도, 돌아오겠다는 약속도 소용없었죠. 그는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않았고 마치 그가 어머니의 사랑하는 존재의 일부인(그녀와 하나가 된) 것처럼 어머니에게 매달렸습니다. 결국 강제로 그를 끌고 가서 어머니가 떠날 때까지 단단히 붙잡아 둘 수밖에 없었죠. 그때도 그는 몸을 풀고(손아귀에서 풀려) 절망의(필사적인) 외침과 함께 마차를 따라 달려가 바퀴 중 하나에 매달렸습니다. 삶이 끝날 때까지 차이코프스키는 공포에 떨며 그 순간을 회상했죠.”


Worse was to follow. Within a month, scarlet fever broke out at the school and his guardian, Modest Alexeyevich Vakar, took the boy to his own home for safety. Soon afterwards, Vakar's own son caught the disease and died. Pyotr Tchaikovsky, aged ten, felt responsible and was overcome with guilt and remorse. When the period of mourning was over, Vakar and his wife took the boy to a performance of Don Giovanni.


더 나쁜 것(최악의 상황)이 이어졌는데요. 한 달 만에 학교에 성홍열이 발생했고, 그의 보호자(가정교사)인 모데스트 알렉세예비치 바카르는 안전을 위해 소년을 집에 데려갔죠. 얼마 지나지 않아 바카르의 아들이 질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습니다. 10세의 표트르 차이코프스키는 책임감을 느꼈고 죄책감과 양심의 가책에 사로잡혔죠. 애도 기간이 끝나자 바카르와 그의 아내는 소년을 <돈 조반니> 공연에 데려갔습니다.


[Music]


Oh! Ye gods

That is the man who killed my father


Oh, Ihr Götter

Er ist der Mörder meines lieben Vaters!


Ô mes Dieux !

C'était l'assassin de mon cher père !


Oh dei!

Quegli è il carnefice del padre mio!


¡Oh, dioses!

¡Ese era el asesino de mi querido padre!


오, 하느님! 지금 그자가

생각해보니 아버지의 살인자예요.


Once again, Mozart bowled him over and once again it was the desperate plight of a woman that touched him most.


그는 다시 한번 모차르트에 매료되었고 한 여성의 절망적인 처지(곤경)에 감동했습니다. (다시 모차르트는 그를 기절시켰고, 다시 한번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한 여성의 절망적인 고통이었습니다.)


[Music]


Now you know who tried

to rob me of my honour

Now you know the traitor

who took my father from me

I call for vengeance

Your heart demands it too


Or sai chi l'onore

Rapire a me volse,

Chi fu il traditore

Che il padre mi tolse.

Vendetta ti chiedo,

La chiede il tuo cor.

Rammenta la piaga


나이 드셔 쇠잔한 아버지를 죽이고 말았지요.

이제는 그대도 알겠지요.

누가 내 명예를 더럽히려 했는가를.

누가 나를 해치려 하고

누가 우리 아버지를 죽였는가를

그대가 내 복수 해줬으면 좋겠네.


"I simply cannot convey to you what I experience when Donna Anna, that majestic image of proud, vengeful beauty, appears on the stage. Nothing in any opera affects me so strongly. When she recognises Giovanni as the man who has killed her father, and her anger finally pours out in a raging torrent in that marvellous recitative, and then that wonderful aria, I tremble with horror and am ready to cry out and weep from the overwhelming force of it."


“거만하고 복수심에 불타는 미모의 장엄한 인물인 돈나 안나가 무대에 나타났을 때의 기분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어떤 오페라에서도 제게 그다지 감동을 주지 않는 것은 없어요. 그녀가 조반니를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남자로 인식하고 마침내 그녀의 분노가 그 놀라운 레치타티보와 그 멋진 아리아에서 격렬한 급류로 쏟아졌을 때(거센 강물처럼 흘러가는 순간), 저는 공포에 떨며 그 압도적인 힘에 울부짖을(공포에 몸서리를 치고 그 소리에서 나오는 힘 앞에서 눈물을 흘릴) 준비가 되었습니다.”


[Music]


A just rage

Now you know who tried

to rob me of my honour

Now you know the traitor

who took my father from me

I call for vengeance

Your heart demands it too

Remember the wound

remember the blood

I call for vengeance

Your heart demands it too


...compiè il misfatto suo col dargli morte!

Or sai chi l'onore

Rapire a me volse,

Chi fu il traditore

Che il padre mi tolse.

Vendetta ti chiedo,

La chiede il tuo cor.

Rammenta la piaga

Del misero seno,

Rimira di sangue

Coperto il terreno.


아버지보다 더 힘이 센 그자가 

나이 드셔 쇠잔한 아버지를 죽이고 말았지요.

이제는 그대도 알겠지요.

누가 내 명예를 더럽히려 했는가를.

누가 나를 해치려 하고

누가 우리 아버지를 죽였는가를

그대가 내 복수 해줬으면 좋겠네.

내 복수 그대가 해줘요.

정의의 분노 당신의 핏속에 끓지 않으면

당신이 그 악한 용서한다면

아버지의 목숨 앗아간 그 상처


"Mozart is the Christ of music, in whom are quenched all his predecessors, just as rays of light are quenched in the sun itself."


“모차르트는 빛의 광선이 태양 자체에 가려지듯이 그의 모든 전임자를 가리는(한 줄기 빛이 태양 아래서 그들의 갈증을 풀듯이 그의 전임자들의 갈증을 풀어주는) 음악의 그리스도입니다.”


[Music]


A quieter and happier period followed with two long summer holidays and some musical encouragement from Aunt Katerina, who played through the piano score of Don Giovanni with him. But in the following year, 1854, when he was 14 years old, his mother died of cholera. She had been the central figure in his life, and in some sense would remain so for the rest of his days. More than 20 years after her death, he would write, "Despite the overwhelming strength of my conviction that there is no after-life, I can never reconcile myself to the thought that my mother, whom I loved so much, has disappeared forever, that I shall never have the chance to tell her that, even after 23 years of separation, I still love her." As always, he sought solace in music, and within two months had made his first serious attempt at composition. Soon afterwards, he produced the first real signs of developing talent with a setting of a simple poem in which a young poet quietly invokes his muse.


두 번의 긴 여름 휴가와 <돈 조반니>의 피아노 악보를 연주한 카테리나 아주머니의 음악적 격려(지원)로 더 조용하고 행복한 기간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듬해인 1854년 그가 14세였을 때 어머니가 콜레라로 사망했죠. 그녀는 그의 인생에서 중심인물이었고 어떤 면에서는 그의 생이 끝날 때까지 그렇게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녀가 죽은 지 20여 년이 지난 후 차이코프스키는 이렇게 썼습니다. “내세는 없다는 확신이 압도적으로 강함에도(죽은 이후에는 삶이 없다는 확고한 신념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어머니가 영원히 사라졌고, 어머니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기회가 없었다는 것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헤어진 지 23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어머니를 사랑한다.” 언제나처럼 그는 음악에서 위안을 찾았고 두 달 만에 처음으로 진지한 작곡에 도전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젊은 시인이 조용히 자신의 뮤즈에게 호소하는 단순한 시를 배경으로 엄청난 재능의 첫 번째 진정한 징후를 보여주었습니다.


[Music]


Will you not come to me,

like a gentle shadow

My genius, my angel, my friend

And commune with me

quietly and gently fly round me?

And will you bring shy inspiration

and heal my sweet disorder

And give a quiet dream

My genius, my angel, my friend?


나에게 오지 않을래,

부드러운 그림자처럼

나의 수호신, 나의 천사, 나의 친구여

그리고 나와 소통(교감)해줘

조용하고 부드럽게 내 주위를 날아올래?

그리고 나에게 영감을 줄래?

그리고 내 달콤한 고통을 달래기 위해

그리고 나에게 달콤한 꿈을 꾸게 할 것인가?

나의 수호신, 나의 천사, 나의 친구여?


Serious interest in composition had begun relatively late and, not surprisingly in so sensitive a nature, very tentatively. Progress over the next few years would be difficult and uncertain. Tchaikovsky continued his studies at the School of Jurisprudence, which included both singing and piano lessons. At the age of 15, he also had lessons from an eminent German pianist, Rudolph Kundinger. On being asked for an opinion by the boy's father, Kundinger advised against a musical career, although he admitted to being impressed by his pupil's capacity for improvisation.


작곡에 대한 진지한 관심은 비교적 늦게 찾아왔고, 의외로 예민한 마음에 아주 조심스럽게 다가왔습니다. 향후 몇 년 동안의 진전(발전)은 힘들고 불확실해졌죠. 차이코프스키는 성악과 피아노 레슨을 제공하는 법학 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15세에는 독일의 저명한 피아니스트 루돌프 퀸딩어에게 레슨을 받기도 했죠. 소년의 아버지로부터 의견에 대한 질문을 받자(아버지가 평가를 요청했을 때) 퀸딩어는 학생의 즉흥 연주 능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인정했지만, 음악 경력을 쌓지 말라고(포기하라고) 조언했습니다.


[Music]


"If I had had any idea of what he was to become, I should have kept a diary of our lessons. But I must admit, to my great embarrassment, that at no time did it occur to me that Tchaikovsky had in him the stuff of a great musician. Certainly he was gifted, had a good ear and memory and an excellent touch, but apart from that, there was nothing, absolutely nothing, that suggested a composer, or even a fine performer."


“그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었다면, 저는 우리의 레슨을 일지에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저는 차이코프스키가 위대한 음악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결코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확실히 그는 재능이 있고 좋은 귀와 기억력과 뛰어난 터치(운지법)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 외에는 훌륭한 연주자는 고사하고 작곡가를 암시하는 어떤 것도,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Music]


At 16, Tchaikovsky studied singing with an eccentric Neapolitan, Luigi Piccioli, who painted his face, dyed his hair and declared that he loathed all music save that of the great Italian melodists. At 19, he left the School of Jurisprudence and took up a post at the Ministry of Justice as a clerk, first class. But soon he was going to concerts and operas and became something of a dandy, assisted in this by his good looks and his ability to play the piano with convincing elegance. But he was not at ease, and letters to his sister trace the next tentative steps.


16세에 차이코프스키는 얼굴을 칠하고 머리를 염색하고 위대한 이탈리아 선율 작곡가들을 제외한 모든 음악을 혐오(경멸)했던 괴짜 나폴리인 루이지 피치올리에게 성악을 배웠습니다. 19세에는 법학 학교를 그만두고 법무부 1급 서기(비서관)로 취직했습니다. 그러나 곧 그는 콘서트와 오페라를 보러 갔고 그의 멋진 외모와 함께 설득력 있는 우아함으로 피아노를 치는 능력에 힘입어 멋쟁이가 되었죠. 그러나 그는 마음이 편치 않았고, 누나에게 보낸 편지는 이러한 마음 상태를 증언합니다.


[Music]


"They have made a civil servant out of me, and a bad one at that. I try to improve as best I can and to do my job more seriously, and suddenly I am also studying harmony."


“그들은 나를 공무원을 만들었고, 그런 면에서 나쁜 놈들이야. 내가 할 수 있는 한 더 나아지려고 하고, 일을 더 진지하게 받아들이려고 하고 있는데, 갑자기 화성학을 공부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At 21, his father encouraged him to think seriously about music once again. "Father declared that it was not too late for me to become an artist. If only that were true! But even if I do have any talent, it is probably too late to develop it now."


21세에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다시 한번 음악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음악 경력을 재고)하도록 격려했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예술가가 되기에 너무 늦지 않았다고 하셨다. 그게 사실이라면! 하지만 재능이 있다고 해도 지금 개발(활용)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다.”


By the autumn of 1861, he was studying harmony with Nikolay Zaremba at the newly established St Petersburg Conservatoire, but he continued to hold his post at the Ministry, and to send reports of his progress to his sister.


1861년 가을까지 그는 새로 설립된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니콜라이 자렘바와 함께 화성학을 공부하고 있었지만, 계속 사역(목회)에서 그의 지위를 유지하고 자신의 진행 상황(발전)에 대한 보고를 누나에게 전했습니다.


[Music]


"I wrote to you that I had begun to study music theory, and very successfully. I hope you won't think I am boasting if I say that I have a tolerable talent. The only thing I fear is lack of willpower. Perhaps laziness will claim her own in the end, but if the opposite happens, then I promise I will become something. I am making good progress. Who knows? Perhaps in three years' time you'll be listening to my operas and singing my arias! I am now firmly convinced that, sooner or later, I shall exchange my present work for music. Don't think I imagine I'll become a great artist. I just feel that I must do work for which I have a vocation. Whether I shall be a famous composer or a struggling teacher, I shall feel that I have done the right thing."


“나는 음악 이론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누나에게 썼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재능을 가졌다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길 바라. (자랑하고 싶지는 않지만, 내 재능은 그럭저럭 쓸만하다고 생각해.) 내가 두려워하는 유일한 것은 의지력의 부족이야. 어쩌면 결국 내 게으름이 결국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내가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 것이라고 약속해. 나는 좋은 진전을 이루고 있어. 누가 알아? 아마도 3년 안에 누나는 내 오페라를 듣고 내 아리아를 부르게 될 거야! 이제 조만간 음악을 위해 현재 직장을 그만둘 것이라고 확신해. 내가 위대한 예술가가 될 것을 상상한다고 생각하진 마. 그저 내 소명에 따라 일해야 한다고 느껴. (내 부름을 따라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내가 유명한 작곡가가 되든 고군분투하는(좌절한) 선생님이 되든, 내가 옳은 선택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Music]


At 23, Tchaikovsky resigned his post at the Ministry of Justice and, in spite of financial difficulties, began full-time study at the St Petersburg Conservatoire. A little over a year later, at the age of 24 and inspired by Ostrovsky's play, he wrote The Storm, his first piece for full orchestra and, touched by the fate of Ostrovsky's Katerina, his first work of real significance.


23세에 차이코프스키는 법무부에서 사임하고 재정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전임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1년이 조금 넘은 24세의 그는 알렉산더 오스트롭스키의 희곡에서 영감을 받아 전체 오케스트라를 위한 그의 첫 작품인 <폭풍>을 작곡했으며, 진정한 의미를 지닌 그의 첫 작품인 오스트롭스키의 카테리나의 운명에 충격을 받았죠.


[Music]


Tchaikovsky's identification with his ill-fated heroines would haunt him through much of his life and would form the substance of much of his greatest work. It can also be linked to the best music in many of his lesser pieces and was at times to exercise a strong and disturbing influence on his own emotional life.


그의 불행한 여주인공과 차이코프스키의 동일시는 평생 그를 괴롭혔을 것이고 그의 가장 위대한 작품의 많은 부분을 형성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그의 많은 작은 작품 중 최고의 음악과 연결(음악으로 추적)될 수 있으며 때로는 자신의 감정적 삶에 강력하고 혼란스러운 영향을 미치기도 했죠.


[Music]


In the next few years, he further developed the idea in his first two operas, The Voyevoda and Undine, both suggested by Ostrovsky. It then appeared even more strongly in 1869 as the central theme in Romeo And Juliet, followed by Miranda's music in the overture to The Tempest, and two years later, in 1875, with Odette in Swan Lake, the most vulnerable and appealing of all Tchaikovsky's ballerinas.


그 후 몇 년 동안 그는 자신의 첫 두 오페라인 <지방 장관>과 <물의 요정>에서 아이디어를 더욱 발전시켰는데, 둘 다 오스트롭스키가 제안한 것입니다. 그 후 1869년 <로미오와 줄리엣>의 중심 주제로 더욱 강력하게 등장했고, 그 뒤를 <템페스트> 서곡에서 미란다의 음악으로, 그리고 2년 후인 1875년에는 차이코프스키의 모든 발레리나 중에서 가장 연약하고 호소력(매력) 있는 <백조의 호수>의 오데트와 함께 등장했습니다.


[Music]


Swan Lake was to be his first ballet, an enterprise about which he felt justifiably nervous, but Odette had been in his mind for some years, and once again, the power of his muse more than compensated for his lack of experience. He had devised a children's ballet on the same subject six years earlier. Now he insisted on the same fantastic story and even used some of the original music. He may also have drafted the plot himself, but certainly his involvement is very clear from his own instructions in the manuscript score.


<백조의 호수>는 그의 첫 번째 발레였고, 그 제안은 그를 상당히 긴장하게 했지만, 오데트는 몇 년 동안 그의 마음속에 있었으며, 다시 한번 그의 뮤즈의 힘은 그의 경험 부족을 만회했죠. 그는 6년 전에 같은 주제로 어린이 발레를 구상했습니다. 이제 그는 똑같은 환상적인 이야기를 주장하며 원곡 일부를 사용했습니다. (그는 이 환상적인 전설을 이어받아 원래 음악의 일부를 재사용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또한 플롯(줄거리)의 초안을 직접 작성했을 수도 있지만, 필사본 악보에 있는 표시에 그가 얼마나 관여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Music]


"The Prince is constantly close to Odette. During the dances, he falls wildly in love with her and implores her not to reject his love. Odette laughs. 'I am afraid to believe you, noble knight. I fear that it is only your imagination deceiving you. Tomorrow, at your mother's feast, you will see many beautiful young women and will fall in love with someone else. You will forget me. I will not hide from you that I have also fallen in love with you, but a terrible foreboding grips me. I shall love you, only you, all my life. It is not in my power to forgive you. All is finished, and we are seeing each other for the last time. You have destroyed us both and I am dying.' The waves sweep over the Prince and Odette and they swiftly disappear beneath the waters. The storm dies down and pale moonlight breaks through the scattering clouds."


“왕자는 항상(여전히) 오데트와 가깝습니다. 춤을 추는 동안 그는 그녀에게 미친 듯이 사랑에 빠지고 사랑을 거부하지 말라고 그녀에게 애원합니다. 오데트가 웃습니다. ‘당신을 믿기가 두렵습니다, 고귀한 기사님. 당신의 상상이 당신을 속이는 것이 아닐까 두렵습니다. (당신을 속이고 있는 것은 당신의 상상뿐입니다.) 내일 어머니의 잔치에서 당신은 아름다운 젊은 여성들을 많이 볼 것이며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나를 잊을 것입니다. 나도 당신과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당신에게 숨기지 않겠지만, 끔찍한 예감이 나를 방해합니다. 나는 평생 당신만을 사랑할 것입니다. 당신을 용서하는 것은 내 능력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고 우리는 마지막으로 서로를 봅니다. 당신은 우리 둘 다 망쳤고 나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파도는 왕자와 오데트를 휩쓸고 그들은 순식간에 물속으로 사라집니다. 폭풍우가 사라지고 흩어진 구름 사이로 희미한 달빛이 보입니다. (폭풍이 그치고 창백한 달빛이 흩어지는 구름 사이로 부서집니다.)”


[Music]


Swan Lake was completed in the spring of 1876, when Tchaikovsky was nearing his 36th birthday. He had a growing store of successes to his credit, but an increasing sense of loneliness and uncertainty, both about his life and about his ability to work. During the summer, he suffered an unexplained illness and, as so often in the past, several bouts of acute melancholy. The prime cause on this occasion was a desperate attempt and failure to come to terms with his homosexuality, something of which he had confided to his brother Modest, who shared the same difficulties. In July, Tchaikovsky went to Vichy in search of a cure for his mysterious illness, but within days, he wrote again to his brother, opening with a quotation from Dante's Divine Comedy.


<백조의 호수>는 차이코프스키가 36세 생일을 앞두고 있던 1876년 봄에 완성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명성에 걸맞게 성공을 거두었지만(점점 더 많은 성취를 경험했지만), 자신의 삶과 일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외로움과 불안함도 커졌습니다. 여름 동안 그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에 시달렸고 과거에도 자주 그랬듯이 급성 우울증을 여러 차례 겪었습니다. 이 경우의 주된 원인은 자신의 동성애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시도의 실패였는데, 그는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남동생 모데스트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았습니다. 7월에 차이코프스키는 자신의 불가사의한 병에 대한 치료법을 찾기 위해 프랑스 비시로 갔지만, 며칠 후 단테의 <신곡>을 인용하며 남동생에게 다시 편지를 썼습니다.


"'There is no greater sorrow than to be mindful of the happy time in misery.' The melancholy that consumes me is the more terrible because those three days that I spent with you in Lyon are so clear in my memory. I am troubled by that intolerable condition of the spirit which descends on me every time I am abroad by myself. There is something unhealthy in this. Just imagine, yesterday I wept ten times."


“‘우리가 행복했던 시절을 비참한 환경 속에서 생각해내는 것만큼 큰 슬픔이 또 있을까.’ 나를 집어삼키는(갉아먹는) 우울함은 최악이야. 너와 함께 리옹에서 보낸 3일이 너무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으니까. 난 혼자 해외에 있을 때마다 엄습하는 참을 수 없는 정신 상태로 괴로워. 이 모든 것이 건강에 해로워. 어제만 해도 열 번은 울었다고 상상해봐.”


August found Tchaikovsky again reading an edition of the Inferno, with illustrations by Gustav Doré, in the train on the way to Bayreuth, for the first performance of Wagner's Ring Cycle. Modest had suggested Francesca da Rimini as a subject for a new orchestral work, and before the end of the month, Tchaikovsky wrote to him again.


8월에 바그너의 링 사이클(니벨룽의 반지 4부작 시리즈) 초연에 참석하기 위해 바이로이트로 가는 기차에서 차이코프스키는 구스타프 도레의 삽화가 있는 <지옥>의 또 다른 판을 읽었습니다. 모데스트는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를 새로운 관현악 작품의 주제(모티브)로 제안했으며, 그달이 끝나기 전에 차이코프스키는 다시 그에게 편지를 썼죠.


"I am living through the most critical period of my life. Soon I shall tell you about it in more detail, but meanwhile I will just say that I have decided to marry. I cannot avoid this. I must do it, but I shall not do it hastily or suddenly."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를 겪고 있어. 조만간 더 자세히 말하겠지만, 그동안 나는 결혼을 결심했다고만 말할게. 나는 이것을 피할 수 없어. 결혼해야 하지만, 서두르거나 갑자기 하진 않을 거야.”


In this atmosphere he began work on Francesca da Rimini, and it was to reflect his inner turmoil more directly than anything he had written before.


이러한 분위기에서 그는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에 대한 작업을 시작했는데, 이전에 쓴 어떤 것보다 내면의 혼란(갈등)을 더 직접적으로 반영하려는 의도였죠.


[Music]


Tchaikovsky prefaced the score with the same lines from Dante which he had quoted in his letter to Modest, "There is no greater sorrow than to be mindful of the happy time in misery."


차이코프스키는 모데스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단테를 인용한 것과 같은 구절로 악보를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행복했던 시절을 비참한 환경 속에서 생각해내는 것만큼 큰 슬픔이 또 있을까.”


[Music]


Tchaikovsky's capacity to identify with his heroine had moved onto a new and dangerously personal level. Francesca's illicit love and the dreadful inevitability of her fate powerfully matched his own despair, and the expression of her predicament became in some sense a vehicle for the release of his own sexual guilt.


자신의 여주인공과 동일시하는 차이코프스키의 능력은 새롭고 위험한 개인적 차원으로 옮겨갔습니다. 프란체스카의 금지된 사랑과 처절한 운명의 필연성은 그의 절망에 대한 강력한 이미지를 형성(그 자신의 절망과 일치)했으며, 그녀의 곤경에 대한 표현은 일종의 성적 죄책감에서 해방되는 수단이 되었죠.


[Music]


Dante's Francesca, married against her will and through deception to a deformed tyrant, Rimini, is in love with her husband's brother. Rimini surprises the couple in their one act of passion and stabs them both to death. For their sin, they are condemned to spin eternally in the dark whirlwinds of Hell.


기형이 된 폭군 리미니와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결혼한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프란체스카는 남편의 남동생과 사랑에 빠졌는데요. 리미니는 끔찍한 행위로 부부를 놀라게 하고 둘을 찔러 죽입니다. 그들은 죄로 인해 지옥의 어두운 회오리바람 속에서 영원히 회전하도록 저주받았습니다.


[Music]


Despite Tchaikovsky's acute sense of crisis, work on the overture brought a measure of relief from his persistent melancholy, and his brother tried to dissuade him from his desperate plan to marry. Tchaikovsky replied, "You say that one should not give a damn for what people say. That is true only up to a certain point. Of course there are people who cannot despise me for my vices simply because they began to love me before they suspected, but isn't it a terrible thought that people who love me can sometimes be ashamed of me? But my habits and inclinations have become so hardened that it is impossible to discard them now just like an old glove. In short, I should like, through marriage or an open liaison with a woman, to stop the mouths of the contemptible creatures who could cause distress to people close to me. In any case, don't fear for me, dear Modest."


고통에 대한 차이코프스키의 극도의 민감성(심각한 위기감)에도 불구하고, 서곡 작업은 우울함을 어느 정도 완화했고, 그의 남동생은 그의 절박한 결혼 계획을 단념시키려 했는데요. 차이코프스키는 이렇게 답변(반박)했죠. “너는 사람들이 하는 말에 신경 쓰지 말라고 한다. 그건 어디까지나(부분적으로만) 사실이야. 물론 그들이 나를 의심하기도 전에 나를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나의 악덕을 비방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때때로 나를 부끄러워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두렵지 않니? 그러나 내 습관과 성향이 너무 굳어져서 이제는 낡은 장갑처럼 버릴 수 없어. 간단히 말해서, 나는 결혼하거나 여성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기꺼이 나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비열한 생물들의 입을 막고 싶어. 어쨌든(무슨 일이 있어도) 날 두려워하지 마, 사랑하는 모데스트에게.”


[Music]


By mid-October, Tchaikovsky was able to write to his brother in better spirits. "I have just this very moment finished the composition. I worked on it con amore and I believe that my love has been successful. As for the whirlwind, I could have written something which corresponded more closely to Doré's drawings, but it didn't turn out as I wanted. However, it is impossible to come to a true judgement of this piece until it is orchestrated and performed."


10월 중순이 되자 차이코프스키는 기분이 좋아진 상태로 남동생에게 편지를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작곡을 마쳤어. 나는 애정을 가지고 더 많은 일을 했고 내 사랑이 성공했다고 믿어. (온 마음을 다해 노력했고 열매를 맺었다고 생각해.) 회오리바람에 관해서는 구스타프 도레의 그림들에 더 가까운 것을 쓸 수 있었지만,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어. 그러나 이 곡이 관현악으로 편곡되어 연주되기 전까지는 진정으로 판단할 수 없어.”


[Music]


Tchaikovsky was aware that his inner turmoil had spilled over into his work and that much of the wilder music seems overstated, but he knew also that he had once again produced his best work in the love music.


차이코프스키는 자신의 작품에 쏟아진 내면적 혼란과 거친 음악의 많은 부분이 과장된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최고 작품을 다시 한번 사랑 음악으로 만들어냈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Music]


"There is no greater sorrow than to be mindful of the happy time in misery." Tchaikovsky quotes 22 lines from Dante's poem. In the second circle of Hell's abyss, Dante sees the spirits of mortals whose reason in life has been clouded by sexual passion, eternally tormented in the hellish whirlwind. He is struck by the beauty of Francesca and her lover Paolo. She recounts to him her sad tale, and then is carried away again by the storm, locked forever in her amorous embrace.


“우리가 행복했던 시절을 비참한 환경 속에서 생각해내는 것만큼 큰 슬픔이 또 있을까.” 차이코프스키는 단테의 시에서 22행을 인용합니다. 지옥의 심연의 두 번째 고리에서 단테는 삶의 이성(인생의 목적)이 성적인 열정으로 흐려져 지옥의 회오리바람에 영원히 고통받는 인간의 영혼을 봅니다. 그는 프란체스카와 그녀의 연인 파올로의 아름다움에 매료됩니다. 그녀는 그에게 자신의 슬픈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다시 폭풍우에 휘말려(휩쓸려) 그녀의 사랑스러운 포옹에 영원히 갇히게 됩니다.


[Music]


In Francesca da Rimini, Tchaikovsky's tormented emotional life had come dangerously close to his music, and with damaging results, but worse was to follow with the composition of Eugene Onegin. This time, however, it was to be the other way round. It was to be the music that would come dangerously close to his life. His decision to marry at all costs had set him on just the sort of fateful road to inevitable disaster that he so feared. When he had first resolved to marry in August of 1876, he had nobody particular in mind, but, not surprisingly, it did not take long for fate to present him with an opportunity to choose. In the spring of the following year, he received a letter from Antonina Milyukova, a former piano student at the Moscow Conservatoire, declaring that she had been in love with him for some years. Tchaikovsky had replied, courteously sidestepping her advances and without taking the letter seriously. Another followed.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에서 차이코프스키의 고통스러운 감정적 삶은 위험할 정도로 그의 음악에 가까워졌으며, 비참한 결과를 낳았지만, 최악의 상황이 오페라 <에프게니 오네긴> 작곡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반대였죠. 그의 삶에 위험할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것은 음악이었는데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결혼하겠다는 그의 결심은 그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피할 수 없는 재앙에 이르는 일종의) 운명으로 이끌었죠. 1876년 8월에 처음으로 결혼하기로 했을 때 특별히 염두에 둔 사람은 없었지만, 운명이 그에게 선택할 기회를 주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듬해 봄, 그는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안토니나 밀류코바로부터 몇 년 동안 그를 사랑해 왔다는 편지를 받았는데요. 차이코프스키는 편지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정중하게 그녀의 접근을 피하면서 답장을 보냈죠. 또 다른 편지가 뒤따랐습니다.


[Music]


"I see I ought to begin by mastering my feelings, as you said in your first letter, but wherever I may be, I shall not be able to forget you or to lose my love for you. What I liked in you when I first came to know of you I no longer find in any other man. Indeed, I do not want to look at any other man after you."


“당신의 첫 번째 편지에서 말했듯이 내 감정을 다스리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내가 어디에 있든 당신을 잊거나 당신에 대한 사랑을 잃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내가 당신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당신에게서 마음에 들었던 것은 다른 어떤 남자에게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나는 당신 이후에 어떤 남자도 사랑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당신 말고 다른 남자는 보고 싶지 않아요.)”


[Music]


On the same day, yet another letter appeared. "l have been in the most agonising state for a whole week. Will you really break off this correspondence with me, without ever having met me even once? No, I am convinced you will not be so cruel. After your letter, I love you twice as much again and your shortcomings mean absolutely nothing to me. There is no failing which might cause me to fall out of love with you. I pace the room from corner to corner like a crazy thing, thinking only of that moment when I shall see you. My first kiss shall be given to you and to no one else in the world. I cannot live without you, and so I shall soon perhaps kill myself. Let me see you and kiss you in order that I may remember that kiss in the other world. Farewell, my dearest. Yours eternally, Antonina Milyukova."


같은 날 또 다른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나는 일주일 동안 가장 괴로운 상태에 있었습니다.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채, 정말로 나와 이 서신을 끊을 것인가요? 아니, 나는 당신이 그렇게 잔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당신의 편지를 받고 나는 당신을 두 배나(전보다 더욱) 더 사랑하며 당신의 결점은 내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당신과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실패는 없습니다. 당신을 볼 그 순간을 그리워하며 미친 듯이 방을 이리저리 서성거립니다. 내 첫 키스는 당신에게만 주어질 것이며, 이 세상 그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내 첫 키스는 세상 그 누구도 아닌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나는 당신 없이는 살 수 없으므로 곧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입니다. (당신 없이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다른 세상에서 그 키스를 기억할 수 있도록 당신을 만나서 당신에게 키스하게 해주세요. 안녕, 내 사랑. 영원히 당신의 것입니다, 안토니나 밀류코바로부터.”


[Music]


This time Tchaikovsky ignored the letter, but, as fate would have it, just nine days later, a singer, Elizaveta Lavrovskaya, suggested Pushkin's Onegin as a subject for an opera and it was to have a major impact on his life.


이번에는 차이코프스키가 편지를 무시했지만, 운명처럼 단 9일 후 가수 엘리자베타 라브로브스카야가 푸시킨의 운문 소설 <에프게니 오네긴>을 오페라 주제로 제안했고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죠.


[Music]


"The idea seemed to me wild and I said nothing. Afterwards, when I was dining alone, I recalled Onegin, and fell to thinking about it. Next, I began to find the idea a possibility, then got enthusiastic about it, and by the end of the meal had made up my mind. I ran off to track down a copy of Pushkin, found one with difficulty, went home, read it through with delight, and spent an utterly sleepless night devising the scenario."


“그 생각은 기막힌 것 같았고(내게 터무니없어 보였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혼자 저녁을 먹다가 오네긴이 생각나서 문득 궁금해졌죠. 다음으로 그 아이디어에 가능성을 찾기 시작했고, 그것에 대해 흥분했으며, 식사가 끝날 무렵에는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아이디어인 것 같았고, 점점 그 프로젝트가 마음에 들어서 식사가 끝나고 결정이 내려졌죠.) 나는 푸시킨의 사본을 찾기 위해 달려가 어렵사리 구했고, 집에 돌아와서 신나게 읽었으며, 시나리오를 구상하면서(대본 생각에) 완전히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냈습니다.”


[Music]


As always, Tchaikovsky's imagination was fired by the plight of his heroine and he began with Tatyana's Letter Scene, in which she first declares her secret love for Onegin.


언제나처럼 차이코프스키의 상상력은 여주인공의 곤경에 불타올랐고(그의 여주인공의 곤경은 차이코프스키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그는 타티아나의 편지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그녀는 오네긴에 대한 은밀한 사랑을 처음으로 드러냅니다. (차이코프스키의 상상력은 타티아나의 편지에서 그녀가 오네긴에 대한 은밀한 사랑을 처음 선언하는 장면에서 시작하여 여주인공의 비애에 의해 불타올랐습니다.)


[Music]


Let me perish

But first let me summon, in dazzling hope,

a bliss as yet unknown

I recognise the rapture of life

I drink the magic potion of desire

I am besieged by reveries and visions

Everywhere, everywhere I look,

I see my fatal tempter

Wherever I look, I see him before me


난 죽어도 좋아, 그러나 그전에 찬란한

희망을 가지고 아직 느낀 적이 없었던,

기쁨을 불러내고 싶어.

달콤한 인생을 느끼기 시작했어!

욕망의 독이 들어있는 약을 마시도록

환상이 나를 재촉하고 있어!

그 어느 곳을 가더라도

운명적인 힘이 날 유혹하고 있어!

어디를 가도 그가 보여!


[Music]


"Having an invincible desire to write the letter music, I set about it, and entirely forgot about Miss Milyukova. I identified myself so thoroughly with the image of Tatyana that she became for me like a living person. I loved Tatyana, and was furious with Onegin, who seemed to me cold and heartless. When I received another letter from Miss Milyukova, I felt ashamed. I even became furious with myself for my attitude towards her. In her letter, she complained bitterly that she had received no reply, adding that if her present letter suffered the same fate as its predecessor, then the only thing left for her would be to put an end to herself. In my mind, this linked with the idea of Tatyana and it seemed that I myself had acted incomparably more basely than Onegin. Since the letter contained Miss Milyukova's address, I went there immediately."


“그 편지에 대한 음악을 쓰고 싶은 불굴의 욕망을 품고 시작하면서 밀류코바 양을 완전히 잊어버렸어요. 나는 타티아나의 이미지와 너무도 완벽하게 일치하여 그녀가 나에게 살아있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나는 타티아나를 사랑했고 내게 차갑고 무자비해 보이는 오네긴에게 분노했습니다. 밀류코바 양에게서 또 다른 편지를 받았을 때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나는 그녀를 대하는 태도에 스스로 화가 나기까지 했습니다. 그녀는 편지에서 답장을 받지 못했다고 씁쓸하게 하소연하며 현재의 편지가 전작과 같은 운명을 맞게 된다면 자신에게 남은 것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만 남았다고 덧붙였죠. 내 생각에 이것은 타티아나의 인상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나 자신이 오네긴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비열하게 행동하는 것 같아요. 편지에 밀류코바 양의 주소가 적혀 있어서 바로 그곳으로 달려갔습니다.”


And so Antonina Milyukova and Pyotr Tchaikovsky met for the first time on the 1st of June 1877. Another meeting followed a few days later, at which Tchaikovsky proposed and was accepted. Within a week, he had left Antonina alone to make preparations for the wedding while he retreated to a friend's country estate to continue his work on the opera.


그래서 안토니나 밀류코바와 표트르 차이코프스키는 1877년 6월 1일에 처음 만났습니다. 며칠 후 또 다른 만남이 이어졌는데, 거기에서 차이코프스키는 그녀에게 제안했고 그녀는 이를 수락했습니다. 일주일 안에 그는 결혼식 준비를 위해 안토니나를 혼자 남겨두고 오페라 작업을 계속하기 위해 친구의 시골 저택으로 도피했죠.


[Music]


Why, oh why, did you visit us?

Buried in this remote countryside,

I would never have known you

Nor should I have known such bitter torment

The turbulence of a youthful heart might

have been calmed by time, who knows?

Perhaps I would have found another

Have proved a faithful wife

And virtuous mother

Another!

No, not to any other in the world

would I have given my heart

It is decreed in the Council on high

It is the will of heaven: I am yours

My whole life has been a pledge

of this inevitable encounter

I know this: God sent you to me

You are my keeper till the grave

You appeared before me in my dreams

As yet unseen, you were already dear to me

Your wondrous gaze filled me with longing

Your voice resounded in my heart

Long ago

No, it was no dream

As soon as you arrived, I recognised you

I was bewitched

and began to blaze with passion

And in my thoughts I said:

'Tis he!

'Tis he!


“왜, 왜 저희 집에 오셨나요?

이렇게 멀리 떨어진 시골에 묻혀서,

당신을 만날 일도 없었고,

이런 괴로움을 느낄 일도 없었는데...

젊은 처녀의 소용돌이치던 마음도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고, 누가 알아요?

마음에 드는 좋아하는 다른 남자를 만나서,

정숙한 아내가 되고

좋은 어머니가 되는 거겠죠...”

다른 남자라고!

안돼, 이 세상의 어떤 다른 사람에게

내 마음을 주지 않을 거야!

하늘이 결정하신 거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전 당신의 것이에요!

제 모든 인생은 당신과의 피할 수 없는 

만남을 위해서 있는 것이었어요;

전 알아요; 하나님이 당신을 보내주셨어요,

죽을 때까지 절 지켜주실 분이죠!

꿈속에서 제 앞에 나타나셨어요;

만나기 전부터 당신은 이미 제 사랑이었어요,

당신의 불가사의한 시선으로 전 황홀감에 빠졌고,

제 마음에는 당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어요.

오래전에...

아니, 그건 꿈이 아니었어요!

당신이 도착했을 때 저는 곧 알았어요,

거의 기절할 뻔했고

열정으로 불타오르며,

속으로 중얼거렸죠;

그분이야!

그분이야!


There are striking parallels between Tatyana's words and what Antonina Milyukova had written only a few days before. Tchaikovsky was caught in a dangerous double fantasy, but his identification with Tatyana was absolute, and, just as he saw fate as the controlling influence in his own destiny, so he made it the mainspring of his opera.


타티아나의 말과 안토니나 밀류코바가 불과 며칠 전에 쓴 것 사이에는 놀라운 유사점들이 있는데요. 차이코프스키는 위험한 이중적인 왜곡된 환상에 사로잡혔지만, 타티아나와 동일시하는 것은 절대적이었으며, 운명을 자신의 성향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았듯이(운명이 자신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이를 오페라의 원동력(주요 모티브)으로 삼기도 했죠.


[Music]


But so be it!

My fate henceforth I entrust to you

In tears before you, I implore your protection

I beseech you

Imagine: I am all alone here

No one understands me

My mind fails from exhaustion

and I must perish in silence

I await you. I await you

Speak the word

to revive the hopes of my heart

Or shatter this oppressive dream

with, alas, the reproach

Alas, the scorn I have deserved!

Finished! It's too frightening to read over

My heart stops beating

from shame and fear

But his honour is my guarantee

And in that I boldly put my trust


그래도 좋아요!

이제부터는 제 운명을 당신의 손에 맡기겠어요;

당신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절 지켜주시길 부탁드려요,

부탁드려요.

생각해보세요; 전 여기서 외톨이에요!

누구도 절 이해해주지 않아요!

더 이상 생각할 수도 없고,

침묵 속에서 사라져야만 해요!

당신을 기다리겠어요,

당신을 기다리겠어요!

제 희망을 되살려 줄 말을 해주세요,

아니면 괴로운 이 꿈을 깨도록 해주세요,

아, 경멸의 말과 함께,

당연히 받아야 할 경멸의 말과 함께!

다 썼어! 무서워서 다시 읽어볼 수가 없어,

수치감와 두려움으로 기절할 거야,

그러나 그분의 성실함을 굳게 믿고

내 모든 것을 맡기겠어!


[Music]


Pyotr Tchaikovsky and Antonina Milyukova were married on the 18th of July, 1877. He was 37, she 28. It was not a happy occasion. Tchaikovsky had told no one until shortly before the wedding and the only other person present, apart from the priest, Dmitry Razumovsky, were Tchaikovsky's brother Anatoly and his young friend, the violinist Iosif Kotek.


표트르 차이코프스키와 안토니나 밀류코바는 1877년 7월 18일에 결혼했습니다. 그는 37세, 그녀는 28세였는데요. 행복한 사건은 아니었죠. 차이코프스키는 결혼식 직전까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고, 사제(신부) 드미트리 라주모프스키 외에 유일하게 참석한 사람은 차이코프스키의 남동생 아나톨리와 그의 젊은 친구인 바이올리니스트 이오시프 코테크뿐이었습니다.


"l remained a sort of bystander until the moment, at the conclusion of the ceremony, when Razumovsky made us kiss. Then a kind of pain gripped my heart, and I was suddenly seized with such emotion that it appears I wept. When the carriage started, I was again ready to burst out sobbing. I think that, little by little, I shall grow accustomed to my new situation. It would be an intolerable sham if I were to deceive my wife in anything, but I have warned her that she can count only on my brotherly love. Physically, she has become totally repugnant to me. Yesterday morning, while my wife was taking a bath, I went to Mass at St Isaac's Cathedral. I felt a need to pray."


“나는 결혼식이 끝날 때 라주모프스키가 우리에게 키스를 요구할 때까지 일종의 방관자였습니다. 그러다가 마음에 어떤 고통이 엄습해 오더니 갑자기 너무 많은 감정에 사로잡혀 울 것 같았습니다. 마차가 출발하자 또 눈물이 날 지경이었죠. 새로운 상황에 점차 익숙해져야 한다고(조금씩 익숙해지리라) 생각합니다. 내가 아내를 속이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거짓말이지만, 아내에게 내 형제 같은 사랑만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육체적으로 그녀는 내게 완전히 혐오감(거부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제 아침, 아내가 목욕하는 동안 나는 성 이삭 대성당에서 미사에 참석했습니다.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기도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Music]


Within a week, Tchaikovsky wrote to Anatoly, "Yesterday was perhaps the most painful day since the wedding. In the morning, it seemed to me that my life was broken for ever and I suffered a fit of despair. This crisis was terrible. If it had not been for my love for you and others close to me, it might have ended with illness or madness. Today we go back to Moscow."


일주일 안에 차이코프스키는 아나톨리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습니다. “어제는 아마도 결혼식 이후 가장 고통스러운 날이었을 거야. 아침에 내 삶은 영원히 망가진 것 같았고(산산조각이 났고) 절망에 시달렸어. (아침에 내 인생이 영원히 끝났다는 느낌을 받았고 절망의 고통을 느꼈어.) 이 위기(고통)는 끔찍했어. 너와 함께 나와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나의 사랑이 없었다면 질병이나 광기로 끝났을(병에 걸리거나 미쳐버렸을) 거야. 오늘 우리는 모스크바로 돌아간다.”


The couple were together for only three weeks before Tchaikovsky escaped alone to his sister at Kamenka. On his return seven weeks later, he wrote again to Anatoly. "Naturally, you will want to know how I feel. Tolya, allow me to pass over this in silence. I am distressed, that's all I will say. But of course, this was inevitable after the abundance of happiness which I experienced at Kamenka. I know I must be patient, and then calm, contentment and, who knows, perhaps even happiness may come, bit by bit." Within days, however, he was to make an indirect attempt at suicide.


부부는 차이코프스키가 카멘카에 있는 여동생에게 홀로 도망가기 전까지 단 3주 동안 함께 있었습니다. 7주 후 돌아온 그는 아나톨리에게 다시 편지를 썼습니다. “넌 내 기분이 알고 싶을 거야. 톨랴(아나톨리의 애칭), 조용히 넘어가도록 해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할게.) 난 괴로워, 그게 내가 말할 전부야. 그러나 물론 이것은 내가 카멘카에서 경험한 풍요로운(나에게 일어난 넘치는) 행복 이후에는 피할(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인내심을 가지고 침착해야 하고 만족해야 하며, 어쩌면 행복도 서서히 찾아올지 누가 알겠어.” 그러나 며칠 후 그는 간접적인 자살 시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Music]


"Although not more than a week has passed since my return from my sister's, I have already lost all ability to cope with the burden of my situation. Not daring to go off to a friend or even to the theatre, I set off each evening for a walk. The weather has become gloomy and cold, and at night there is sometimes a slight frost. On one such night I came to the deserted bank of the River Moscow, and there entered my head the thought that it might be possible to kill myself by contracting a chill. I entered the water up to my waist and stayed there until I could endure no longer the bodily ache induced by the cold. I came out of the water with a firm conviction that I should die either from pneumonia or some other respiratory illness. At home, I said I had taken part in a nocturnal fishing expedition and had fallen into the water by accident. But my health showed itself to be so sound that my icy bath had no consequence for me."


“여동생의 집에서 돌아온 지 일주일도 안 되었지만, 이미 처한 상황의 부담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모두 잃었습니다. (이미 제 상황의 무게에 짓눌려 있는 것 같아요.) 감히 친구를 만나러 가거나 극장에 갈 엄두도 못 내고 매일 저녁 산책했습니다. 날씨가 흐리고 추워졌으며 밤에는 때때로 가벼운 서리가 내리기도 합니다. 어느 날 밤 나는 모스크바 강변의 황량한(한적한) 둑에 왔는데, 거기에서 감기에 걸려 자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리에 스쳤습니다. 허리까지 차오르는 물에 들어가 추위로 인한 몸살(육체적 고통)을 참을 수 없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나는 폐렴이나 다른 호흡기 질환으로 죽을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물 밖으로 나왔습니다. 집에서는 밤낚시를 하다가 실수로 물에 빠졌다고 말했죠. 하지만 생각보다 매우 건강해서 얼음물로 목욕해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습니다.”


[Music]


Finally, with the help of a telegram from Anatoly, he fled to St Petersburg. When Anatoly met him at the station, he had difficulty in recognising his own brother. Tchaikovsky collapsed and a doctor was called. He ordered that Tchaikovsky should never again live with Antonina, nor even see her. After this, neither the man nor his music would be quite the same again. But he would continue to feel the need of a relationship of some sort with a woman, and he was to find it with Nadezhda von Meck. It was to be the longest and most important relationship with anyone outside of his family. It was also to be the strangest.


마침내 그는 아나톨리에게서 온 전보의 도움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도피했습니다. 아나톨리가 역에서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의 형제를 알아보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차이코프스키가 쓰러지고 의사가 호출되었습니다. 그는 차이코프스키에게 다시는 안토니나와 함께 살거나 만나지 말라고 충고했죠. 그 후, 그 남자도 그의 음악도 다시는 예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여성과 일종의 관계가 필요하다고 느꼈고, 나데즈다 폰 메크에게서 그것을 찾아야 했습니다. 가족 이외의 사람과 가장 길면서도 가장 중요한 관계였습니다. 가장 이상하기도 했고요.


[Music]


Pyotr Ilich Tchaikovsky 1840 - 1893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 1840~1893


End of Part One


1부 끝


With many thanks to Professor David Brown


데이비드 브라운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Music]



Tchaikovsky’s Fate (Part II) / 차이코프스키의 운명

The desperate failure of Tchaikovsky's marriage to Antonina Milyukova, and of his attempted suicide, left scars that would never heal, and brought changes both to the man and to his music that would remain with him for the rest of his life.


차이코프스키와 안토니나 밀류코바의 결혼에 대한 절망적인 실패와 그의 자살 시도는 결코 치유되지 않을 깊은 상처를 남겼고, 그의 남은 생애 동안 그와 함께할 음악과 그 남자 모두에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Music]


Pyotr Ilich Tchaikovsky 1840 - 1893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 1840~1893


Vladimir Ashkenazy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지휘


The Swedish Radio Symphony Orchestra


스웨덴 방송교향악단 반주


Part Two


2부


Fate


운명


Tchaikovsky's marriage had been a hopeless attempt to provide an escape of some kind from the social consequences of his homosexuality. It reflected also his very real need of a close relationship with a woman to fill the void left by the loss of his mother. He felt doomed to eternal loneliness, but fate presented him with Nadezhda von Meck, and he was to find solace in his strange relationship with this unusual woman. Nadezhda von Meck was the widow of a railway developer who had died when she was 44, leaving her an extremely wealthy woman. She was clever and capable, played the piano with talent, and had admired Tchaikovsky's music for some time. Her first contact with the composer came in the form of a generous commission to write some pieces for her to play with Tchaikovky's young friend, the violinist Iosif Kotek. But following the collapse of Tchaikovsky's marriage, and in some degree because of it, the relationship steadily took on an increasing significance and was to play a major part in Tchaikovsky's further development. For the next 13 years, although they studiously avoided meeting, Nadezhda von Meck would guarantee Tchaikovsky the financial independence to devote himself entirely to composition. Perhaps even more significantly, she gave him, through a long and passionate correspondence, the support of an intimate confidante and an emotional focus which brought a measure of stability. All of these things contributed to an important change in Tchaikovsky's creative preoccupations. His identification with the fate of his young heroines begins to give way to an introspective concern with his own most intimate problems, and to the expression of his own fate through the symphonies. A concern that he was willing to share with his new confidante.


차이코프스키의 결혼은 동성애의 사회적 결과로부터 일종의 도피를 제공하려는(벗어날 길을 찾기 위한) 절망적인(필사적인) 시도였습니다. 어머니를 잃은 공허함(공백)을 채우기(메우기) 위해 여성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야 할 필요성도 반영했죠. 그는 영원한 외로움에 대한 운명을 느꼈지만, 운명은 그를 나데즈다 폰 메크에게 데려갔으며 이 독특한(놀라운) 여성과의 이상한 관계에서 위안을 찾아야 했는데요. 나데즈다 폰 메크는 44세에 세상을 떠난 철도 개발업자의 미망인으로 매우 부유한 여성이었죠. 그녀는 지적이고 유능했으며 피아노 연주에 재능이 있었고 한동안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을 동경(열렬히 추종)했습니다. 그녀가 작곡가와 첫 접촉을 한 것은 차이코프키의 젊은 친구인 바이올리니스트 이오시프 코테크와 함께 연주할 곡들을 써달라는 관대한 의뢰(넉넉한 작품 위촉의 형태)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차이코프스키의 결혼이 실패한 후 그로 인해 어느 정도 그 관계는 점점 더 중요해졌으며 차이코프스키의 (경력)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죠. 이후 13년 동안 그들은 만남을 열심히(서로를 간절히) 피했지만, 나데즈다 폰 메크는 차이코프스키가 작곡에 전념할 수 있도록 재정적 독립을 보장(확보)했습니다. 어쩌면 훨씬 더 의미심장하게도 그녀는 길고 열렬한 서신을 통해 친밀한 친구의 지원과 어느 정도 안정을 가져오는 정서적 집중을 그에게 제공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차이코프스키의 창조적 집착(창의적인 결과물, 예술적 접근 방식)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죠. 젊은 여주인공들의 운명(곤경)에 대한 그의 동일시는 이제 자신의 가장 내밀한 문제에 대한 내성적인 관심과 교향곡에서 자신의 운명을 표현하는 것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새로운 친구와 기꺼이 공유하고 싶은 걱정거리였죠. (그는 주저하지 않고 이 접근 방식을 새로운 친구와 공유했습니다.)


[Music]


"I am now absorbed in a symphony which I began to compose as far back as last winter, and which I very much want to dedicate to you, because I think you will find in it echoes of your own innermost thoughts and feelings. But if having your name on the title page is disagreeable to you, then we can manage without it. Let you and I alone know to whom this symphony is dedicated."


“저는 작년 겨울부터 작곡을 시작했고, 당신에게 정말 바치고 싶은 교향곡에 푹 빠져 있습니다. 당신이 이 교향곡에서 당신 자신의 가장 깊은 생각(은밀한 감정)과 감정의 메아리를 발견할 것이라 믿기 때문이죠. 그러나 첫 페이지에 당신의 이름이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표시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해당 이름을 생략할 수 있습니다. 이 교향곡이 누구에게 헌정되었는지는 당신과 저만 알 것입니다.”


Von Meck replied immediately. "Permit me to ask you one question. Do you consider me your friend? Since you have never once called me by that name, I do not know whether you acknowledge me as such. If in answer to my question you can say yes, it would be extremely agreeable to me if you would set down on your symphony that you dedicate it to your friend, mentioning no name."


폰 메크는 즉시 답변했습니다. “한 가지 질문을 드리지요. (질문 하나 할게요.) 당신은 저를 친구로 생각하시나요? 한 번도 저를 그렇게 부르지 않아서 당신이 저를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제 질문에 ‘예’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교향곡에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친구에게 헌정한다고 하면 대단히 감사할 거예요.”


Tchaikovsky responded to this demand for a more intimate relationship by writing across the title page of the manuscript score, "Dedicated to my best friend." He had found a seemingly perfect foil and it drew from him a flood of the most intimately revealing declarations of his artistic intentions. "In our symphony there is a programme. It is possible to express in words what it is trying to say, and to you, and only to you, I am able and willing to explain the meaning both of the whole and of the separate movements. Of course, I can do this only in a general way. The introduction is the seed of the whole symphony, undoubtedly the main idea."


차이코프스키는 더 친밀한 관계에 대한 이러한 요구에 대해 악보 원고의 첫 페이지에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나의 가장 친한 친구에게 바칩니다.” 그는 겉보기에 완벽해 보이는 배경을 찾았고 그것은 그의 예술적 의도를 가장 친밀하게 드러내는 선언의 급류를 그에게서 끌어냈죠. (그는 자신을 완벽하게 보완하는 누군가를 찾았고, 따라서 그의 예술적 목표에 대한 가장 공개적인 내밀한 선언이 나타났습니다.) “우리 교향곡에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말로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며, 저는 당신에게만, 그리고 당신에게만 전체와 개별 악장들의 의미를 말할 수 있고 기꺼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일반적인 방식(용어)으로만 말할 수 있습니다. 도입부는 의심할 여지 없이 주요 아이디어이며 전체 교향곡의 씨앗입니다.”


[Music]


"This is Fate, that fateful force which prevents the impulse to happiness from obtaining its goal, which jealously ensures that peace and happiness shall not be complete and unclouded, which hangs over your head like the sword of Damocles, and unwaveringly, constantly, poisons the soul. It is invincible, you will never overcome it. You can only reconcile yourself to it and languish fruitlessly."


“이것은 운명으로, 행복에 대한 충동(욕구)이 목표 도달을 방해하고, 평화와 행복이 완전하고 분명하지 않도록 질투하며, 다모클레스의 칼(왕이 국왕의 영화를 질시하는 다모클레스를 왕좌에 앉히고 그의 머리 위에 머리카락 하나로 칼을 매달아 놓아 왕에게는 항상 위험이 따름을 가르쳤다는 고사에서 나온 것으로, 언제 닥칠지 모를 신변의 위험)처럼 당신의 머리 위에 매달려 있으며, 흔들리지 않고 끊임없이 영혼을 독살시킵니다. 그것은 무적이며, 당신은 그것을 극복(통제)하지 못할 것입니다. 남은 것은 희망 없는 슬픔에 몸을 맡기는 것뿐이죠.”


[Music]


Tchaikovsky knew that his symphony was intensely biographical, and in answer to criticism from Sergei Taneyev that it was programmatic, he responded, "As for your observation that my symphony is programmatic, I completely agree, but the programme is such that it cannot be formulated in words. Should not a symphony express everything for which there are no words, but which the soul wishes to express and requires to be expressed?"


차이코프스키는 자신의 교향곡이 자전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에 대해 그를 질책한 세르게이 타네예프의 비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내 교향곡이 프로그램에 있다는 자네의 지적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그 프로그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네. 교향곡은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영혼이 전달하고자 하는 모든(표현하고자 하고 표현해야 하는) 것을 표현해야 하지 않겠나?”


There is a striking contrast between Tchaikovsky's words to Taneyev and what he had already written to Nadezhda von Meck. He had picked up the emotional challenge in her invitation to call her his friend and matched it with an extravagant gesture of his own. This atmosphere of secrecy with a highly charged emotional undercurrent was to pervade the whole of their relationship. Although they never spoke, and came face to face only once, for just a moment, and by accident, each was acutely conscious of the need for the other and expressed the need repeatedly in an increasingly intense correspondence, usually with von Meck setting the pace.


차이코프스키가 타네예프에게 한 말과 그가 이미 나데즈다 폰 메크에게 쓴 말 사이에는 현저한 대조(명백한 모순)가 있습니다. 그는 그녀를 친구라고 부르라는 그녀의 초대에 대한 감정적인 도전을 받아들였고 그것을 자신의 사치스러운(화려한) 몸짓과 일치시켰습니다. (그는 아낌없이 존경하는 그녀의 우정을 받아들임으로써 감정적으로 마음을 열었습니다.) 극도로 격렬한 감정적 기류와 함께(이면에 감춰져 있던) 이 비밀스러운 분위기가 그들의 관계 전체에 스며들었죠. (이 비밀스러운 분위기와 감정적인 뉘앙스가 그들의 관계 전체를 지배했죠.) 그들은 한 번도 말하지 않았고, 단 한 번만, 잠시나마 우연히 마주쳤지만, 각자 서로의 필요성을 절실히 의식했고(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임을 깨닫고) 일반적으로 메크에 의해 시기가 결정된 서신으로 이 필요성을 점점 더 격렬하게 표현했습니다.


"Perhaps I am not a person who is intimate with you, but you know how I love you, how I wish you all the best of everything. In my view it is not blood and physical ties that give the right to this, but feelings and moral relationships between people. You know how many happy moments you afford me, how deeply grateful I am for them and how necessary you are to me. Consequently, I am doing nothing for you but everything for myself."


“나는 당신과 친밀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지만(우리가 그렇게 친밀하지는 않으나),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당신이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기를 바라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 그 권리를 부여하는 것은 혈연이나 육체적 유대(애착)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감정과 도덕적(영적) 관계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제게 얼마나 많은 행복한 순간을 제공하는지, 그 순간을 얼마나 깊이 감사하는지, 당신이 제게 얼마나 중요(필요)한지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제가 하는 것은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저를 위한 것입니다.”


[Music]


The relationship had quickly taken on a peculiar intensity, no doubt fired by Tchaikovsky's dedication of the symphony and the programme which he had sent. "The cheerless and hopeless feeling grows yet stronger and more burning. Is it not better to turn away from reality and submerge yourself in daydreams? Oh, rejoice! There appears at the very least, 'a sweet and gentle daydream'. Some blissful, radiant, human image hurries by and beckons you away."


그 관계는 곧 특별한 강렬함을 나타냈는데, 틀림없이 차이코프스키가 교향곡과 그가 보낸 프로그램에 대한 헌신에 힘입은 것입니다. “기쁨과 희망이 없는(암울하고 절박한) 감정은 점점 더 강해지고 불타오릅니다. 현실을 외면(도피)하고 백일몽(공상)에 빠져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오, 이 기쁨! 적어도 ‘달콤하고 부드러운 백일몽(달콤함과 부드러움이 가득한 꿈)’이 나타납니다. 어떤 자애롭게(찬란하게) 빛나는 인간적인 이미지가 스쳐 지나가며 우리를 그것에 따르도록 초대합니다.”


[Music]


"How good this is! How distant now sounds the obsessive first theme of the Allegro. Little by little, daydreams envelop the soul completely. There she is, happiness!"


“이거 정말 좋아요! (정말 행복해요!) 이제 알레그로의 강박적인(잊히지 않는) 제1주제가 멀리 들립니다. 조금씩 백일몽(환상)이 영혼을 완전히 감싸요. 그녀가 있어서 행복해요!”


[Music]


"No! They were but daydreams, and Fate awakes you from them."


“아니! 그것들은 백일몽에 불과했고(단지 꿈이었고) 운명이 당신을 깨어나게 했습니다.”


[Music]


"And so all of life is an unbroken alternation of hard reality with swiftly passing dreams and visions of happiness. No haven exists. Drift upon that sea until it engulfs and submerges you in its depths."


“그래서 인생의 모든 것은 빠르게 지나가는 꿈, 행복에 대한 환상, 힘든 현실의 끊임없는 교대(모든 삶은 덧없는 꿈과 행복에 대한 환상으로 이루어진 가혹한 현실의 끊임없는 연속)입니다. 피난처(항구)가 없죠. 그 바다가 당신을 깊이 집어삼킬 때까지 파도 위를 떠돌게 놔두세요.”


[Music]


The Fourth Symphony was completed in January of 1878. Tchaikovsky had sought to express more of himself than he had ever dared before, and he had succeeded, but in addition, the process had forced him to broaden both the style and the content of what he was trying to say. The programme he had sent to Nadezhda von Meck was written after the event, and although it is a true piece of emotional biography, on rereading it, Tchaikovsky took fright and added a postscript to his letter which is in some ways even more revealing.


교향곡 4번은 1878년 1월에 완성되었습니다. 차이코프스키는 과거보다 훨씬 더 자신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싶었고 그렇게 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그가 말하려는(표현) 스타일과 내용을 모두 확장해야 했는데요. 그가 나데즈다 폰 메크에게 보낸 프로그램은 나중에야 작성되었으며, 진정한 감정 전기(감성적인 글)이지만(자신의 감정을 설명하고 있지만), 다시 읽으면서 차이코프스키는 겁을 먹고(충격을 받아) 그의 편지에 어떤 면에서 훨씬 더 드러내는 추신을 덧붙였죠.


"Just now, as I was about to place this letter in its envelope, I reread it and was horrified by the vagueness and inadequacy of the programme which I am sending you. For the first time in my life, I have had to put into words and phrases musical thoughts and musical images. I have not succeeded in saying this as I ought. I was seriously depressed last winter when I was composing the symphony, and it serves as a true echo of what I was going through at the time. But it is merely an echo. How could it be translated into any clearly defined verbal form? I am certainly not able to do so. Also, I have already forgotten much. There have remained only general recollections of the strength and horror of the feelings which I experienced at the time."


“지금 막 이 편지를 봉투에 넣으려던 참에 다시 읽었는데, 제가 당신에게 보내는 프로그램의 모호함과 부적절함(혼란과 빈약함)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음악적 생각과 이미지를 단어와 문장으로 표현해야 했습니다. 마땅히 이 말을 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지난겨울에 교향곡을 작곡할 때 많이 우울했는데, 그 당시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메아리(추억)에 불과합니다. 어떻게 명확하게 정의된 언어 형태로 번역될 수 있을까요? (영혼의 고통을 말로 어떻게 표현할까요?) 물론 저는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이미 많은 것도 잊었고요. 당시 제가 경험한 감정의 강렬함(저를 압도했던 감정의 어두움)과 공포에 대한 막연한 기억만 남아 있을 뿐이죠.”


The shadow of those feelings was to remain with Tchaikovsky for a long time to come. The collapse of his marriage had taken its toll, and for the next eight years, he composed nothing that showed the same inspiration and personal commitment as he had given to the fourth symphony and Eugene Onegin, and he knew it. He became depressed both about his career and about his creative powers, and began to feel that he had played himself out. For a long time, he composed nothing at all. Then, when he was in Italy in March of 1881, he learned that Nikolay Rubinstein, who was to have joined him on his tour, had died in Paris. He went there immediately, full of anxieties at the prospect of seeing Rubinstein's lifeless body.


이러한 감정의 그림자는 앞으로 오랫동안 차이코프스키와 함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감정의 그림자는 차이코프스키에게 오랫동안 남아있을 것입니다.) 결혼 생활이 파탄에 이르게 되었고, 그 후 8년 동안 그는 교향곡 4번과 <에프게니 오네긴>에 아낌없이 쏟았던 것과 같은 영감과 개인적인 헌신을 보여주는 어떤 것도 쓰지 않았으며, 그는 그것을 알고 있었죠. 그는 자신의 경력과 창의력 모두에 대해 우울해했고(희망을 잃기 시작했고), 자신이 죽은(끝난) 것처럼 느꼈는데요. 오랫동안 아무것도 쓰지 않았죠. 그러다가 1881년 3월 이탈리아에 머무는 동안 그의 여행(순회공연)에 동행할 예정이었던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이 파리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루빈스타인의 유해를 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즉시 그곳으로 갔죠.


[Music]


Nikolay had always been the kinder of the two brothers, and Tchaikovsky had developed a great affection for him. He was touched by the loss, and it brought back something of the lost commitment.


니콜라이는 항상 두 형제의 친절한 사람이었고, 차이코프스키는 그에 대한 깊은 애정을 키웠는데요. 그는 작곡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켰던 이 상실감에 큰 타격을 받았죠.


[Music]


He wanted to write something intimate, with an important piano part, and so when he returned to Italy, he began work on the piano trio, opus 50, including a set of variations based on episodes in Rubinstein's life. He completed it in January of 1882 and dedicated it "To the memory of a great artist."


그는 중요한(긴) 피아노 파트와 함께 친밀한 것을 쓰고 싶었는데, 이탈리아로 돌아와서 루빈스타인의 일화를 기반(영감)으로 한 변주곡을 포함하여 피아노 트리오 작품 50의 작곡에 착수했죠. 그는 1882년 1월에 이 작품을 완성하고 <위대한 예술가의 추억>을 헌정했습니다.


[Music]


In November of that same year, when Tchaikovsky was 42, Mily Balakirev, who had played so important a role in the composition of Romeo And Juliet, and who had so much admired Francesca da Rimini, suggested Byron's Manfred as a subject for another symphonic poem. Tchaikovsky turned it down, but with revealing thoughts about his feelings of inadequacy. "Despite my venerable age and my considerable experience in composing, I must confess that I am still wandering in the boundless field of composition, trying vainly to discover my true pathway. I feel that such a pathway does exist, and I know that, once I find it, I shall hit upon where I ought to be going. From time to time, I've come close to that path, but this has happened only rarely, and in no way can I number Francesca and The Tempest among those few exceptions. These compositions of mine in no way recreate the given subject, but are only written apropos of it, that is to say, the kinship of the music and the programme is not an inner one, but external and incidental."


같은 해 11월 차이코프스키가 42세였을 때, <로미오와 줄리엣>의 작곡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를 매우 존경(동경)했던 밀리 발라키레프는 바이런의 <만프레드>를 또 다른 교향시의 주제로 제안했는데요. 차이코프스키는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면서(능력 부족에 대해 공개적으로 의문을 제기하면서) 이를 거절했죠. “나이가 많고 작곡에 대한 상당한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무한한 작곡의 영역(드넓은 작곡 분야)에서 방황하고 있으며 진정한 길을 찾으려고 헛되이 노력하고 있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런 길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그것을 찾을 수 있다면,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잡을(나를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때로는 그 길에 가까이 갔지만, 이것은 아주 드물게 일어난 일이며 결코 그 몇 안 되는 예외에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와 <폭풍>을 꼽을 수 없습니다. 나의 이러한 작품들은 결코 주어진 주제를 재창조(반영, 재현)하지 않고 단지 그것에 맞게 쓰인 것뿐인데 즉, 음악과 프로그램 사이의 관계는 내적인 것이 아니라 외적이고 부수적인 것입니다.”


Two years later, however, in November of 1884, the two men met in Moscow and Balakirev, in a spirit of newfound religious fervour, demonstrated a concern and affection for Tchaikovsky which touched him deeply. He wrote to Balakirev on the following day. "I was profoundly moved by our conversation of yesterday. How good you are! What a true friend you are to me! How I wish that that enlightenment which has come into your soul would also descend on me."


그러나 2년 후인 1884년 11월, 두 남자는 모스크바에서 만났으며, 새로운 종교적 열정에 사로잡혀 있던 발라키레프는 차이코프스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표현하여 그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죠. 그는 다음 날 발라키레프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나는 어제 우리의 대화에 깊이 감동했어. 네가 좋아! 내게 진정한 친구야! 네 영혼에 들어온(스며든) 깨달음(빛)이 내게도 전해지기(내리기)를.”


Tchaikovsky had learned that his friend Iosif Kotek, who had made the introduction to Nadezhda von Meck, was dying of tuberculosis in Switzerland, and before going to see him, he bought a copy of Byron's Manfred to take on the journey. But it was not until June of the following year, more than seven years after the completion of the Fourth Symphony, that he felt able to begin composition. Then he wrote to Sergei Taneyev. "After some hesitation, I've decided to compose Manfred, because I feel that, until I've fulfilled the promise I imprudently gave Balakirev during the winter, I shall not be at ease. I don't know what will come out, and for the moment, I'm dissatisfied with myself. No! It's a thousand times more pleasant to compose without a programme."


차이코프스키는 나데즈다 폰 메크를 소개한 친구 이오시프 코테크가 스위스에서 결핵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를 만나러 가기 전에 바이런의 극시 <만프레드>를 사서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교향곡 4번이 완성된 지 7년이 넘은 이듬해 6월이 되어서야 다시 작곡할 수 있다고 느꼈죠. 그런 다음 그는 세르게이 타네예프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좀 망설이다가 ‘만프레드’를 작곡하기로 했어. 겨울에 무심코 발라키레프에게 한 약속을 지킬 때까지는 쉬지 못할 것 같아. 뭐가 나올지 모르겠고, 일단은 나 자신이 만족스럽지 못해. 아니! 프로그램 없이 작곡하는 것이 천 배는 나아.”


But then, as so often before, work drew him closer and closer to his subject. On the first of August, he wrote to Emiliya Pavlovskaya, who had sung Tatyana in the premiere of Eugene Onegin, "Now I can't stop. The symphony is coming out gigantic, serious, difficult, absorbing all my time, and sometimes wearying me in the extreme, but an inner voice tells me that I am not labouring in vain, and that this will perhaps be the best of my symphonic compositions."


그러나 이전에 자주 그랬듯, 작품은 그를 주제에 점점 더 가깝게 이끌었죠.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의 주제에 더 가까이 다가갔죠.) 8월 1일에 그는 <에프게니 오네긴>의 초연에서 타티아나를 노래(연기)했던 에밀리야 파블로브스카야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습니다. “이제 멈출 수 없어. 교향곡은 거대하고, 진지하고, 어렵고, 내 모든 시간을 잡아먹으며, 때로는 극도로 나를 지치게 하지만, 내면의 목소리는 내게 헛된 수고가 아니며 이것이 어쩌면 내 교향곡 중 최고일 것이라고 말한다네.”


For the first time, Tchaikovsky had begun to identify himself with the male figure in one of his works. He wrote again to Emiliya Pavlovskaya, expressing the fear that he was turning into a Manfred himself, but despite the hopelessness of Byron's tale and his protagonist's despair, Tchaikovsky had found the key to something in his creativity which had long been submerged, and through it, his ability to express himself moved onto a new level. In the first movement, he produced the most committed music that he had written in eight years, and the toughest and most masculine music that he had ever composed.


차이코프스키는 처음으로 자신의 작품 중 하나에서 남성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에밀리야 파블로브스카야에게 다시 편지를 보내 자신이 만프레드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했지만, 바이런의 이야기와 그의 남주인공의 절망(절박함)에도 불구하고 차이코프스키는 오랫동안 묻힌(억눌린, 잠들어 있던) 창의력의 열쇠(원천)를 찾았고, 이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능력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는데요. 1악장에서 그는 8년 동안 작곡한 것 중 가장 헌신적인 음악과 그가 작곡한 것 중 가장 거칠고 가장 남성적인 음악을 만들었죠.


[Music]


He had set the scene in a revealing preface to the manuscript score. "Manfred wanders in the Alps, tormented by hopeless longings and recollections of his guilty past. He suffers deep spiritual anguish and is torn by fatal questions of existence. Neither the sciences of the occult, nor the powers of darkness, nor anything in the world can afford him the forgetfulness which he seeks in vain. Memories of his ruined Astarte, whom once he had passionately loved, gnaw and eat at his heart. Nothing can remove the curse which weighs on his soul. There is no end to Manfred's boundless despair."


그는 악보 원고에 대한 공개 서문에서 그 장면(분위기)을 설정(묘사, 정의)했습니다. “만프레드는 절망적인 욕망(알 수 없는 향수)과 과거의 죄책감에 시달리며 알프스를 방황합니다. 그는 깊은 정신적 고뇌에 빠져 있으며 존재에 대한 치명적인 질문으로 인해 괴로워합니다. 오컬트의 과학도, 어둠의 힘(세력)도,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가 추구하는 망각을 헛되이 줄 수 없습니다. 한때 그가 그토록 열렬히 사랑했던 망가진 아스타르테(고대 페니키아의 풍요와 생식의 여신)에 대한 기억이 그의 마음을 갉아먹으면서 괴롭히죠. 그 어떤 것도 그의 영혼을 짓누르는 저주를 제거(감당, 극복)할 수 없습니다. 만프레드의 절망은 끝이 없어요.”


[Music]


The focal points of Tchaikovsky's identification with Manfred are not difficult to find - solitude, gloom and despair had all been constant companions since his childhood, as had the longing for forgetfulness and the idea of inescapable fate, but now, more particularly, Byron's hero is haunted by the guilt of unnatural love, the idea of incest which had haunted Byron himself. In addition, there is once again the theme of the wronged woman, but this time she does not appear in person. Astarte exists only in the mind of her lover, haunting his memories in the most touching music that Tchaikovsky had written since Tatyana had so stirred him eight years before.


차이코프스키가 만프레드와 동일시하는 초점을 찾는(주요 주제를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 고독, 우울, 절망은 망각에 대한 갈망(모든 것을 잊고 싶은 욕망)과 피할 수 없는(거침없는) 운명에 대한 생각과 마찬가지로 어린 시절부터 끊임없는 동반자였으나(그를 떠나지 않았으나) 지금, 특히 바이런의 남주인공은 부자연스러운 사랑에 대한 죄책감, 바이런 자신을 괴롭혀온 근친상간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죠. 또한, 다시 한번 부당한 취급을 받은(학대받은) 여성이라는 주제가 나오지만, 이번에는 그녀가 직접 나타나지 않아요. 아스타르테는 8년 전 타티아나가 차이코프스키를 감동케 한 이후로 그가 작곡한 가장 감동적인 음악에서 그의 기억을 맴돌며 그녀의 연인에 대한 상상(기억) 속에만 존재합니다.


[Music]


On the 25th of September 1885, five months after he had begun, Tchaikovsky wrote to Balakirev. "I have carried out your wish. Manfred is finished. I think you will be somewhat displeased at the speed with which I have composed it, but I could not do otherwise. I have sat over Manfred, not getting up from my seat, I may say, for nearly four months, from the beginning of June until today. It was very hard work, but also very pleasant, especially when, having begun with some effort, I got carried away. Of course, I cannot predict whether the symphony will please you or not, but believe me, never in my life have I tried so hard and become so weary from my work. The piece is very difficult and demands a very large orchestra. Of course, Manfred is dedicated to you. I think it's my best symphonic work, but because of its difficulty, its impracticability and its complexity it is doomed to failure and to be ignored."


시작한 지 5개월 후인 1885년 9월 25일, 차이코프스키는 발라키레프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습니다. “나는 자네의 소원을 이루어줬어. ‘만프레드’는 끝났어. 내가 작곡한 속도에 다소 불만이 있을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네. 6월 초부터 오늘까지 거의 4개월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만프레드’를 마주했어. 매우 힘든 일이기도 했지만, 특히 약간의 노력으로 시작하여 마음이 끌렸을 때 매우 기뻤지. 물론 자네가 이 교향곡을 좋아할지 아닐지 장담할 수 없지만, 내 일생에서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고 작품 때문에 지친 적은 없었거든. 이 곡은 매우 어렵고 거대한 오케스트라가 필요해. 물론 ‘만프레드’는 자네에게 바치네. 내 최고의 교향곡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어려움, 비현실성, 복잡성 때문에 실패하고 무시될 운명이네.”


[Music]


And so, with those despairing words, Tchaikovsky offered the score of Manfred to his publisher for no fee. Despite the references to the speed of composition in his letter to Balakirev, Tchaikovsky was conscious that he no longer worked at the same pace as before, and began again to express anxieties about being played out. More significantly, each of his major steps forward was now a hard-won battle in self-discovery that cost him dear and left him emotionally tired and full of doubt. He was at last beginning to enjoy public success, but because of the very nature of his personal quest, even this did little for his confidence in his own work. He was even convinced that Onegin was doomed to public failure, since it had been withdrawn from the repertoire, and all of this in spite of recognising quite clearly how much of himself he had succeeded in putting into it. He also found increasing difficulty with orchestration, which had always come so easily to him, and his old fear of inherent laziness began to trouble him seriously once again.


그래서 차이코프스키는 필사적인(절박한) 말로 만프레드의 악보를 출판사에 무료로 제공했습니다. 발라키레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작곡의 속도에 대해 언급했지만, 차이코프스키는 자신이 예전만큼 빠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다시 작품에 임하는 것에 대한 불안을 표현(완성에 대한 두려움을 반복)하기 시작했습니다. 더욱이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자기 발견을 향한 힘든 싸움이 되어 엄청난 비용을 치르게 했으며 감정적으로 소모되고 의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는 마침내 대중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지만, 개인적인 탐구의 성격 때문에(이기적인 성격 탓에) 이것조차 자기의 작품에 대한 자신감을 불러일으키지(확신을 주기에는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심지어 <에프게니 오네긴>이 레퍼토리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그가 이 곡에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는지 아주 분명하게 인식했음에도 대중에게 실패할(파멸할) 운명이라고 확신했죠. 그에게는 한 번도 문제가 되지 않았던(그를 괴롭힌 적이 없었던, 그에게 항상 쉬웠던) 오케스트레이션에 점점 더 많은 문제가 생겼고, 타고난 게으름에 대한 그의 오래된 두려움(집착)이 다시 심각하게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Perhaps there are grounds for attributing to the Russian people a lack of fundamental creativity, for saying that the Russian is a lazy person par excellence. By nature he is talented, but by nature he suffers from a deficiency of willpower, and from a lack of staying power. You must, you have first to overcome yourself." But his successes had helped in some ways. Tchaikovsky had begun to feel more at ease with the world, and early in 1888, when he was 47, he made his first international conducting tour with considerable success. But even this soon lost its charm, and at the end of the tour, he wrote to his publisher. "l have expended a great deal of money and even more health and energy. In return, I have gained some celebrity, but every hour I ask myself, 'Why? Is it worthwhile?' In the end I come to the conclusion that it is far better to live quietly, without fame."


“아마 러시아인이 게으른 사람의 전형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러시아인의 창의성 부족을 탓할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는 타고난 재능이 있지만, 의지와 지속력이 부족하기도 한데요. 먼저 자신을 이겨내야(본질을 넘어서야) 합니다.” 그러나 그의 성공은 어떤 면에서는(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죠. 차이코프스키는 세상과 좀 더 친숙해지기(세상에 좀 더 편안함을 느끼기) 시작했고, 1888년 초 47세에는 지휘자로서 첫 해외 순회공연에서 주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곧 그 매력을 잃어버렸고, 여행이 끝날 무렵 출판사에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습니다. “나는 많은 돈과 더 많은 건강과 힘을 소비했습니다. 그 대가로 어느 정도 명성을 얻었지만 계속 스스로 질문합니다. ‘무슨 이유로(왜)? 그만한 가치가 있나?’ 결국에는 유명세 없이 조용히(평화롭게) 사는 게 훨씬 더 낫다는 결론에 이르렀죠.”


In April he moved to a new country house at Frolovskoye, just outside Klin, and in May he wrote to Modest. "It is indeed so beautiful that when I go out for a half-hour walk in the morning, I feel compelled to extend it to two hours. I have not yet begun work. To speak frankly, I feel as yet no impulse for creative work. Have I written myself out? No ideas, no inclinations?"


4월에 그는 클린 바로 외곽의 프롤로브스코예에 있는 새로운 시골집으로 이사했으며, 5월에는 모데스트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여기는 아침에 30분 산책하면 2시간이나 늘려야 할 것 같은 느낌(머물고 싶은 참을 수 없는 충동)이 들 정도로 정말 아름다워. 아직 일을 시작하진 않았어.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도 창작에 대한 충동(욕심,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아. 나는 시들어버린(끝난) 걸까? 아무 생각도, 의지도 없는 걸까?”


After two months of inactivity, he wrote to Nadezhda von Meck. "I am dreadfully anxious to prove, not only to others but also to myself, that I am not yet played out as a composer. Have I already told you that I intend to write a symphony? The beginning was difficult. Now, however, inspiration seems to have come. We shall see."


두 달 동안 활동이 없었던 그는 나데즈다 폰 메크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제가 아직 작곡가로서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저 자신에게 증명하고 싶을 정도로 두려워요. 제가 교향곡을 쓸 의향이 있다고(작곡하고 싶다고) 당신에게 이미 말씀드렸나요? 시작은(처음에는) 어려웠어요. 그러나 이제 영감이 온 것 같아요. (지금은 영감을 받았어요.) 우리는 보게 될 것입니다.”


[Music]


In the Fourth Symphony, Tchaikovsky had attempted to challenge Fate as he felt Beethoven had done in his Fifth, and he had succeeded, at least to some extent, in brushing Fate aside. Now, in a sketch for the first movement of his own Fifth Symphony, he suggests a mood of resignation and describes Fate more gently as the workings of Providence. "Introduction. Complete resignation before Fate or, which is the same thing, before the inscrutable predestination of Providence. Allegro. Murmurs, doubts, plaints, reproaches against X. Shall I throw myself into the embraces of Faith? A wonderful programme, if only it can be fulfilled."


교향곡 4번에서 차이코프스키는 베토벤이 교향곡 5번에서 했던 것처럼 운명에 도전하려 했고(운명을 거스르려 했지만),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운명을 쓸어버리는(어느 정도는 그 운명을 없애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제 그는 자신의 교향곡 5번 1악장 스케치(초고)에서 체념의 분위기를 암시하고(자아내며) 운명을 섭리의 작용보다 더 부드러운 방식으로(운명을 차분한 어조로 섭리의 의지로) 묘사합니다. “도입부. 운명 앞이나 마찬가지 또는 불가사의한 섭리 앞의 완전한 체념. 알레그로. X에 대한 중얼거림(투덜거림), 의심, 불평, 비난. 운명의 품에 몸을 맡겨야 하나? (운명에 정면으로 뛰어들어야 하나?) 실현될 수 있다면 멋진 프로그램이다.”


[Music]


Tchaikovsky's notes are no more than a preliminary sketch, but they do describe his mood. In any case, it is no longer possible to trace any sort of narrative in his music as it had been with Romeo And Juliet or Francesca da Rimini. Tchaikovsky had travelled a long way since then. There is little doubt that "X" refers in some way to anguish over his homosexuality, and the idea of religious faith as the road to solace had appealed to him before. But despite the emotional need, he had never been able to commit himself in any meaningful way. Now, however, he does imply some confidence in ultimate clemency.


차이코프스키의 메모는 예비 스케치(초고)에 불과하지만, 그의 기분(마음 상태)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로미오와 줄리엣>이나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의 경우처럼 그의 음악에서 어떤 종류의 묘사(내러티브)도 더 이상 추적(감지)할 수 없습니다. 그 이후로 차이코프스키는 먼 길을 여행(많이 발전)했습니다. “X”는 어떤 면에서 그의 동성애에 대한 고뇌와 관련이 있으며 종교적 믿음에서 찾은 위안에 대한 생각은 이전에 그에게 호소했죠. 그러나 감정적 필요에도 불구하고 그는 진지하게(의미 있는 방식으로) 자신을 헌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궁극적인 관대함에 대해 어느 정도 확신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Music]


If he was unable to find solace in faith, the idea of love as a redeeming force always remained with him, and in the second movement, he once again suggests the theme of love frustrated by Fate or Providence. But he no longer identifies himself with the sufferings of a heroine or hero. His quest has become one of self-discovery. Now he makes love his own, and in so doing, he makes it universal. In the manuscript score he wrote above the horn theme, "O que je t'aime! O mon amie!"


믿음의 위안을 얻지 못했다면 구속력으로서의 사랑이라는 사상이 항상 그와 함께 있었는데, 2악장에서는 운명이나 섭리에 좌절된 사랑이라는 주제를 다시 한번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여주인공이나 남주인공의 고통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그의 탐구는 이제 자아 발견의 하나(통찰력을 위한 것)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사랑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그렇게 함으로써 사랑을 보편적으로 만듭니다. 악보 원고에서 그는 호른 주제 위에 “오 내 사랑이여! 오 내 친구!”라고 썼습니다.


[Music]


"You ask, my friend, have I known a love that was not platonic? Yes and no. If the question is phrased differently, have I experienced complete happiness in love, then I will reply, 'No, no and no!' But I believe that the answer to that question is in my music. If you ask me, do I understand the omnipotence, the boundless force of that feeling, then I will reply, 'Yes, yes and yes,' and again I'll say that I have, with love, endeavoured repeatedly to express in music the torment and, at the same time, the bliss of love. I do not know whether I have succeeded. I must leave that to others to decide."


“벗이여, 당신은 제가 (육체관계를 하지 않는) 정신적인 사랑을 알고 있었느냐고 질문하나요?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죠. (때에 따라 다르죠.) 질문을 다르게 표현하면, 제가 사랑 안에서 완전한 행복을 경험한 적이 있나요? 저는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제 음악에 있다고 믿어요. 당신이 제게 전능함, 그 감정의 무한한 힘을 이해하느냐고 질문한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네, 네, 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저는 사랑의 고통(고뇌)과 동시에 사랑의 행복(황홀함)을 음악으로 표현하려고 여러 번 시도했는데요. 성공했는지는 모르겠어요. 다른 사람들이 결정해야 합니다. (판단은 다른 이들에게 맡깁니다.)”


[Music]


On the 19th of August 1888, when he was 48, Tchaikovsky wrote to Nadezhda von Meck. "Now that the symphony is nearing its end, I regard it more objectively than at the height of my work on it, and I can say that it is, praise be to God, no worse than its predecessors. This knowledge is very sweet to me."


1888년 8월 19일, 48세였을 때 차이코프스키는 나데즈다 폰 메크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습니다. “이제 교향곡이 막바지에 다다랐기(거의 완성 단계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저는 이 곡에 대한 제 작업이 절정에 달했을(작곡에 몰두했을) 때보다 더 객관적으로 보며, 신께 감사하게도 그것이 전작들보다 더 나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생각이 위안이 됩니다.”


But his self-criticism was developing all the time. By December, his spirit had failed, and what he wrote this time tells us more about his earnestness than about his music. "After two performances of my new symphony in St Petersburg and another in Prague, I have come to the conclusion that it is a failure. There is something repellent about it, an insincerity and artificiality. The public instinctively recognises this and it was very clear to me that the ovations which I received were directed at my previous work. The realisation of all this causes me acute and agonising dissatisfaction with myself. Am I really played out, as they say? Can I now only repeat and imitate my former style? Last night I looked through the Fourth Symphony. Our symphony! What a difference. How immeasurably superior it is. This is sad, very sad."


그러나 그는 항상 자신에 비판적이었는데요. 12월이 되자 그의 영혼은 쇠약해졌고, 그가 이번에 쓴 글은 그의 음악보다 그의 진지함에 대해 더 많이 말해줍니다. “새로운 교향곡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두 번, 프라하에서 한 번 공연한 후, 실패했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혐오스러운 것, 불성실함, 인위적인 것이 있습니다. (성실함과 진정성이 결여되어 마음이 아픕니다.) 대중이 본능적으로 이것을 알아차리고, 제가 받은 환호(박수)가 전작을 향한 것이었음이 너무나 분명했죠. 이 모든 것을 깨닫는 것은 나 자신에게 날카롭고(깊고) 고통스러운 불만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저는 정말로 끝난 걸까요? 예전 스타일을 반복하고 모방할 수밖에 없는 걸까요? 어젯밤에 교향곡 4번을 검토했는데요. 우리의 교향곡! 달랐어요. 헤아릴 수 없이 우월했어요! 슬퍼요, 정말 슬퍼요.”


Two years later, on the fourth of October 1890, he received a letter from Nadezhda von Meck announcing that she was on the verge of bankruptcy and that she would have to break off both the annuity and the friendship. "Goodbye, my dear incomparable friend. Remember me sometimes, and do not forget one whose love for you is infinite."


2년 후인 1890년 10월 4일에 그는 나데즈다 폰 메크로부터 그녀가 파산 직전에 있으며 그녀가 재정 지원과 우정을 모두 끊어야(끝내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안녕, 나의 친애하는 비할 데 없는(소중한) 벗이여. 가끔 저를 기억해주시고, 당신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잊지 말아 주세요.”


With those sentimental words, Tchaikovsky lost not only his benefactress but his most intimate confidante. After his mother, Nadezhda von Meck had meant more to him than anyone else in his life. She had fulfilled an essential need created by the loss of his mother, shared his innermost thoughts and the progress of his music through the years of his greatest development. She had become an integral part of his spiritual and creative life. When Tchaikovsky discovered that the threat of bankruptcy was unreal, and that in spite of his offers to begin repaying the subsidy, his friend and patron was unwilling to continue the friendship, it dealt him a blow from which he would not recover during the remaining three years of his life.


그 감상적인 말로 차이코프스키는 자신의 후원자뿐 아니라 가장 가까운 친구도 잃었습니다. 어머니 이후로 나데즈다 폰 메크는 그의 인생에서 그 누구보다도 그에게 의미가 있었는데요. 그녀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남겨진 공허함을 채웠고, 그의 가장 위대한 발전(다작)의 세월 동안 그의 가장 깊은(진심 어린) 생각과 음악의 진보(발전)를 공유했죠. 그녀는 그의 영적, 창조적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죠. 차이코프스키는 그녀가 파산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는(파산의 위협이 근거가 없다는) 사실과 보조금 상환을 시작하겠다는(지원금을 갚겠다는) 그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그의 친구이자 후원자가 우정을 지속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인생의 남은 3년 동안 회복하지 못할 타격을 입었습니다.


From very early on, Tchaikovsky had felt that the relationship had transcended its material dimensions, as indeed it had done, so what happened to end it attacked an essential part of his faith both in himself and in human nature. And its irony is heightened by the fact that he never discovered what lay behind it, and therefore could never begin to understand.


아주 일찍부터 차이코프스키는 관계가 물질적 차원(수준)을 초월한다고 느꼈고, 실제로 그랬던 것처럼 결국 관계가 끝난 것은 자신과 인간 본성에 대한 그의 믿음의 본질적인(중요한) 부분을 공격했죠. (초기에 차이코프스키는 그들의 관계가 물질적 고려를 초월했다고 느꼈고, 따라서 이 관계의 단절은 자신과 인간 본성에 대한 그의 믿음을 흔들었죠.) 그리고 그 배후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해를 시작조차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를 더욱 고조시킵니다.


Nadezhda von Meck was both physically ill with tuberculosis and emotionally under severe pressures from her children, perhaps also with a sense of guilt that her charity had been misdirected through self-interest. She was a passionate woman and no stranger to guilt. An early sexual infidelity had killed her husband and given her an illegitimate child, an event for which she was being blackmailed even at this late stage of her life. To make matters worse, Tchaikovsky could not adequately express his own hurt for fear of hurting in turn someone who had given him so much and for whom he had such affection. He felt abandoned, and became painfully aware of the real depth of his dependence and of his affection.


나데즈다 폰 메크는 몸이 아프고 결핵에 시달렸고 자녀들로부터 심한 정서적 압력을 받았으며(정서적으로 괴롭힘을 당했으며), 아마도 그녀의 도움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갔다는 죄책감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열정적인 여성이었고 죄책감에 익숙하지 않았죠. (그녀는 그 감정을 잘 알고 있는 열정적인 여성이었죠.) 초기의 성적인 외도(불륜)는 그녀의 남편을 죽이고 사생아를 낳았으며, 그녀는 인생의 말년에도 협박을 당하고 있었는데요. 설상가상으로 차이코프스키는 자신에게 많은 것을 주고 애정을 지니고 있던(그토록 많은 것을 베풀고 그가 엄청나게 아끼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까 봐 자신의 상처(고통)를 적절하게 표현할 수 없었죠. 그는 버림받았다고 느꼈고, 자신의 의존과 애정의 진정한 깊이를 고통스럽게(뼈저리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Tchaikovsky was only 50, but he had begun to age rapidly. Nevertheless, he plunged himself repeatedly into feverish activity. His friends found him changed, and noted both his age and a melancholy bordering on bitterness.


차이코프스키는 겨우 50세였지만 빠르게 늙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반복해서 미친 듯이 일에 몰두했는데요. 그의 친구들은 그가 변한 것을 발견했고, 그가 늙었고 그의 우울함이 괴로움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죠.


[Music]


He was saddened also by the deaths of many of his friends, including those of Nikolay Rubinstein, Iosif Kotek and his sister Alexandra. He became increasingly preoccupied with the idea of death, which he referred to as "that snub-nosed horror".


그는 니콜라이 루빈스타인, 이오시프 코테크, 여동생 알렉산드라 등 많은 친구의 죽음에 대해서도 슬퍼했는데요. 죽음에 대한 생각에 점점 더 몰두(집착)하게 되었고, 이를 “코가 막힌(역겨운) 공포”라고 불렀죠.


[Music]


Even success brought little solace. He had become, after Tolstoy, the most respected Russian artist of his age, with a degree of success given to few composers in their lifetime, but he felt that it was for past achievements, and since his artistic quest meant so much to him, that was not enough. His concern was always to move forward, and therefore for the success of his latest work. In this, he was generally disappointed with his best music all through his life, precisely because he had succeeded in breaking new ground, and felt that neither he nor the public knew how to judge it. He remained acutely self-critical. "If I become convinced that I can only serve reheated dishes at my musical banquet, then I shall certainly give up composing. A hoary old man should either go forward - Verdi, for instance, goes on developing at 80 - or else remain on the heights that he has already reached. Not for anything in the world do I want to go on dirtying paper when everything has long since failed."


성공은 그에게 약간의 위안을 가져다주었는데요. 그는 톨스토이 다음으로 당대에서 가장 존경받는 러시아 예술가가 되었고 일생에 이러한 수준의 성공을 거둔 작곡가는 거의 없었지만, 그것은 이전의 성취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의 예술적 탐구가 그에게 큰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충분하지 않다고 느꼈죠. 그에게는 앞서가는 것이 항상 중요했으므로(그의 관심사는 항상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으므로) 최신 작품의 성공이 중요했습니다. 이 점에서 그는 결과적으로 생애 최고의 음악에 실망했는데, 바로 그가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지평을 여는) 데 성공했고 그 자신도 대중도 그것을 판단할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죠. 그는 극도로 자기 비판적이었습니다. “음악회에서 데워먹을 수 있는 요리만 내놓을 거면(따뜻한 수프만 대접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든다면) 작곡을 포기하겠어요. 노쇠한 노인(백발노인)은 계속 전진해야 하며 – 예를 들어 베르디는 80세에 계속 발전하는데(80세에 혁신을 계속하는 베르디처럼) – 그렇지 않으면 그가 이미 도달한 높이에 머물 것입니다. 모든 것이 실패한 지 오래되었을(불꽃이 이미 허공으로 사라져버렸을) 때 세상 그 무엇보다도 종이를 더럽히고 싶지 않아요.”


[Music]


In 1892 he set to work on a new symphony, but with little conviction. He wrote from Berlin that he was thinking of abandoning the project, but still needed to work because he could not forget composition, and anyway, needed something to help him occupy his time. By the end of the year, however, he had given up entirely, with these words - "There is nothing in the least interesting or attractive about it. I have decided to throw it out and forget about it. I am delighted to have come to this irrevocable decision."


1892년에 그는 새로운 교향곡 작업에 착수했지만, 확신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는 베를린에서 이 프로젝트 중단(포기)을 고려하고 있지만, 작곡을 잊지 못해서 여전히 일해야 하고 시간을 채울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편지를 썼습니다. 그러나 연말까지 다음과 같은 말로 완전히 포기했죠. - “최소한 흥미롭거나 매력적인 게(조금의 매력도 관심도) 없어요. 그것을 버리고 잊어버리기로 했어요.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하게 되어 기뻐요.”


He continued his tour, and on New Year's Day, 1893, he visited his beloved Fanny Durbach at her home in France. He had not seen her for more than 40 years. "l knew her at once. And although she is now 70, she is little changed. I was very much afraid that there would be tears and a scene, but nothing of the sort took place. She greeted me as though it was only a year since we had met, with joy, tenderness, and quite simply. Then she showed me our exercise books and, most interesting of all, some wonderfully dear letters of Mama. The past rose up clearly before me and I seemed to breathe the air of Votkinsk and to hear the voice of Mama."


그는 여행을 계속했고 1893년 새해 첫날 프랑스에서 사랑하는 파니 뒤르바흐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40년 넘게 그녀를 보지 못했죠. “저는 그녀를 대번에 알아봤어요. 그리고 그녀는 이제 70세가 되었지만, 거의 변하지 않았죠. 눈물이 나는 장면이 나올까 두려웠지만, 그런 일은 없었어요. 그녀는 마치 우리가 만난 지 1년밖에 안 된(1년 전에 헤어진) 것처럼 기쁨과 부드러움으로 그저 단순하게 저를 맞이했어요. 그런 다음 제게 우리의 연습 책과 함께 가장 흥미롭게도 엄마가 보낸 놀랍고 소중한 편지를 보여줬죠. 과거가 제 앞에 분명히 떠올랐는데(갑자기 과거로 돌아가서) 봇킨스크의 공기를 마시며 엄마의 목소리를 듣는 것 같았어요.”


He continued his tour with mounting success, but wrote to Modest, "What I need is to believe in myself again. My faith in myself is terribly shattered, and it seems to me that my role has ended." Tchaikovsky was to find that belief only once again, and it brought with it his greatest single step forward and his masterpiece.


그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면서 여행을 계속했지만, 모데스트에게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내게 필요한 것은 나 자신을 다시 믿는 거야. (나 자신을 다시 믿어야 해.)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너무 산산조각이 났고(자신감이 많이 흔들렸고), 내 역할이 끝난 것 같다.” 차이코프스키는 그 믿음을 다시 한번 찾아야 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가장 큰 발걸음을 내디뎠고 걸작이 탄생했죠. (차이코프스키는 이 느낌을 마지막으로 경험했고, 그의 걸작을 작곡할 새로운 동력을 찾았죠.)


[Music]


"O Lord, I thank Thee! Today, 24th March, completed preliminary sketch well. During my journey, the idea for another symphony presented itself to me, this time with a programme, but of a kind that will remain an enigma to all. It will just be called Programme Symphony Number Six. It is shot through with subjective feeling, and while I was composing it in my mind during my travels, I often wept a great deal. Now that I am back, I have settled down to writing the sketches, and the work is proceeding so intensively, that in less than four days, the first movement is completely ready and the others clearly outlined in my head. There will be many formal innovations, among which, the finale will not be a noisy allegro but, on the contrary, a long drawn out adagio. You cannot imagine what bliss I feel in the conviction that my time is not yet over and that work is still possible. Of course, I may be wrong, but I don't think so. The ultimate essence of the symphony's plan is life. First movement, all impulsive passion, confidence, thirst for activity, must be short. Second movement, love. Third, disappointments. Finale, death, result of collapse, ends dying away. Must also be short."


“오 주님, 감사합니다! 3월 24일 오늘, 예비 스케치를 잘 마쳤습니다. 여행하는 동안 또 다른 교향곡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요. 이번에는 프로그램이 포함되었지만, 모두에게(누구에게나) 수수께끼로 남을 것입니다. 간단히 ‘교향곡 6번’이라고 부를 거예요. 주관적인 느낌이 많이 반영되어, 여행 중에 머릿속으로 작곡하면서 많이 울었어요. 이제 돌아와서 스케치를 쓰기에 바빴고, 작업이 너무 집중적으로 진행되어 4일 이내에 첫 번째 악장이 완전히 준비되고 나머지 악장들이 머릿속에 명확하게 윤곽이 잡혀 있습니다. 많은 형식적 혁신이 있을 것이며, 그중 피날레는 시끄러운 알레그로가 아니라 반대로 길게 늘어진(느린) 아다지오가 될 것입니다. 저의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여전히 일할 수 있다고 확신하면서 느끼는 행복은 상상할 수 없어요. 물론 제 생각이 틀릴 수도 있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교향곡 계획의 궁극적인 본질은 생명입니다. 1악장에서는 모든 충동적인 열정, 자신감(용기), 활동에 대한 갈증이 짧아야 합니다. 2악장은 사랑입니다. 3악장은 실망이고요. 4악장 피날레에서는 (실패로 인한) 죽음, 붕괴(타락)의 결과, 죽어가는(모든 것이 사라져버리는) 것으로 끝납니다. 역시 짧아야 하죠.”


Tchaikovsky had embarked on the most innovative and the most dramatic of all his works. Perhaps for the first time, he addressed the central emotional problem of his life full square, and in so doing, he succeeded in relating musical material and emotional idea more closely than he had ever done before. All the problems of organisation and structure which had so worried him in the past seem finally to be resolved. At the same time, he expresses more clearly than ever before the anguish of love and the unhappiness of a passionate and gentle nature doomed to frustration and seemingly eternal loneliness.


차이코프스키는 그의 모든 작품 중에서 가장 혁신적이면서도 가장 극적인 작품에 착수했습니다. 아마도 처음으로 그는 자신의 삶에서 중심적인 감정적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루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전보다 더 밀접하게 음악적 소재와 감정적 아이디어를 연관시키는(더 밀접하게 엮어내는) 데 성공했을 거예요. 그동안 그를 괴롭혔던(그토록 걱정했던) 조직과 구조의 모든 문제가 마침내 해결된 것처럼 보였죠. 동시에 그는 사랑의 고뇌와 좌절(고통과 실망)과 겉보기에 영원한 외로움으로 운명지어진 열정적이면서도 부드러운 본성의 불행(절망과 영원한 외로움에 처한 열정적이고 온화한 성격을 가진 누군가의 사랑의 고통과 슬픔)을 그 어느 때보다 명확하게 표현합니다.


[Music]


Although the composition of the Sixth Symphony was done in seven weeks, Tchaikovsky did not hurry into finishing the scoring. He had had increasing difficulty with orchestration, and so he now allowed his ideas to ripen in his mind before committing them to paper. He knew also that he was writing his greatest work and was quite conscious of the fact that in some way, he had been confronting death. He was elated with his progress, but the underlying turmoil remained. He suffered from physical pains and mental torments which he could not put into words but which he felt he was expressing in his symphony. In this mood, he received a set of poems from a young student named Daniel Rathaus, and he promptly composed the Six Songs, opus 73. The last of them, and Tchaikovsky's last song, might well have been written for him.


교향곡 6번의 작곡은 7주 만에 끝났지만, 차이코프스키는 서두르지 않고 악보를 완성했습니다. 그는 오케스트레이션에 점점 더 어려움을 겪었고, 따라서 이제 아이디어를 종이에 적기 전에 마음속에서 성숙하게 했죠. 그는 또한 자신의 가장 위대한 작품(걸작)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어떤 면에서는 죽음에 직면해 있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는데요. 계속 혼란스러웠으나 자신의 발전에 만족했죠.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교향곡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교향곡으로 전달할 수 있는)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혼란을 겪었으니까요. 이런 분위기에서 그는 다니엘 라트하우스라는 어린 학생에게서 시집을 받고 즉시 <6개의 노래 작품 73>을 작곡했습니다. 그중 마지막 곡이자 차이코프스키의 마지막 노래는 그를 위해 작곡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Music]


"Again, as before, I am alone

Again I am gripped by despair

The poplar looks in at the window

Bathed in moonlight

The poplar looks in at the window

Its leaves whisper something to me

And Heaven's ablaze with stars

Where are you now, my love?

I cannot begin to convey

All that is happening now

Pray for me

As I now pray for you"


“또 혼자, 예전처럼

다시 절망에 사로잡혀

포플러가 창밖을 내다본다

달빛 아래서

포플러가 창밖을 내다본다

그 잎사귀가 내 귓가에 속삭인다

그리고 하늘에는 별들이 타오른다

지금 어디 있나요, 내 사랑이여?

표현할 수 없어

무슨 일이야

나를 위해 기도해줘

지금처럼 그대를 위해 기도해”


On the first of August 1893, at his new home in Klin, Tchaikovsky set to work on the final details of the Sixth Symphony. But two days later he wrote to Modest. "The further I get with the instrumentation, the more difficulty it causes me. 20 years ago I rushed along with full speed without giving it a thought, and it turned out well. Now I have become timid and unsure of myself. I have just spent the entire day sitting over two pages. Nothing really turns out as I'd like it to, but the work is progressing all the same."


1893년 8월 1일, 차이코프스키는 클린의 새로운 집에서 교향곡 6번의 최종 디테일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그러나 이틀 후 모데스트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습니다. “악기 편성을 사용하면 할수록 더 어려워져. 20년 전에는 별생각 없이 뛰어들었는데 잘 되었거든. 이제는 불안해지고 자신이 없어졌어. 온종일 두 페이지 이상을 앉아서 보낸다. 내 뜻대로 되지는 않지만(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는 못했지만), 작업은 계속 진행 중이란다.”


A fortnight later, he wrote to his favourite nephew, Bob Davidov. "I shall find it neither unusual nor surprising if this symphony is torn to pieces or little appreciated. But I definitely consider it the best, and especially, the most sincere of all my works. I love it as I have never loved any other of my musical offspring." On the same day, he wrote to his brother Anatoly. "The comparative slowness of the orchestration has not been caused by a deterioration in my powers. It was the result of my having become a great deal stricter with myself. I'm very proud of this symphony. I think it is the best of my compositions."


보름 후에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조카 보브(블라디미르) 다비도프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나는 이 교향곡이 평가절하되거나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고 해도 이상하지도 놀랍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하지만 내 모든 작품 중 가장 훌륭하고, 무엇보다도 가장 진지하다고 생각해. 내 음악적 후손을 이렇게 사랑한 적이 없었어. (내 어떤 작품보다도 사랑해.)” 그는 같은 날 남동생 아나톨리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오케스트레이션이 상대적으로 느려진 건 내 능력의 저하로 인한 게 아니야. 나 자신에게 훨씬 더 엄격해진 결과이지. 난 이 교향곡이 매우 자랑스럽단다. 내 작품 중에서 최고인 것 같아.”


By the first of September, the work was complete. It was Tchaikovsky's moment of greatest triumph. He knew that he had written his finest work, and more than that, he had come to terms with the obsession that had haunted him all his life in the only way possible, by recognition and acceptance. Tchaikovsky knew what he had done, but what he did not know was that Fate, which had so preoccupied him for so long, was about to overtake him finally. He had written his own requiem. In the first movement, he quotes the Russian burial hymn, and the finale is a lamenting farewell with an inevitable descent into eternal darkness.


9월 1일에 작품이 완성되었는데요. 차이코프스키의 가장 위대한 승리의 순간이었죠. (차이코프스키는 마침내 자신의 승리를 맛볼 수 있었죠.) 그는 자신이 가장 훌륭한 작품을 썼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자신을 평생 괴롭혀온 강박관념(집착)을 인정하고 수용함으로써 가능한 한 유일한 방법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차이코프스키는 자신의 성공을 알고 있었지만, 그토록 오랫동안 그를 사로잡았던 운명이 마침내 자신을 따라잡으려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레퀴엠을 작곡했습니다. 1악장에서는 러시아의 장례 성가를 인용하고, 피날레에서는 영원한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피할 수 없는 하강과 함께) 눈물의 이별(작별 인사)로 끝맺습니다.


[Music]


Tchaikovsky conducted the first performance of his Sixth Symphony in St Petersburg on the 28th of October 1893. It was not liked, but, for the first time, that did not trouble him. At the very moment of his greatest achievement, his spirit and his febrile imagination had sunk so low that he could be brought to suicide by one-time school friends seeking to protect their school from homosexual scandal. Within a week of the premiere, Tchaikovsky was summoned to a Court of Honour convened by important men of the state who had once been his friends at the School of Jurisprudence. A few days later, on the 6th of November 1893, at three o'clock in the morning, Pyotr Ilyich Tchaikovsky, aged 53, died of poison, procured for him by his important friends and taken at their insistence.


차이코프스키는 1893년 10월 28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교향곡 6번의 초연을 지휘했습니다.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지만, 처음으로 그는 신경 쓰지(화 한번 내지) 않았죠. 그의 가장 위대한 성취의(그가 신격화되는) 바로 그 순간, 그의 정신(영혼)과 열렬한 상상력은 너무 낮아져서 동성애 스캔들로부터 학교를 보호하려는 학우들에 의해 자살로 내몰렸는데요. 초연 일주일 만에 차이코프스키는 법학 학교에서 한때 그의 친구들이었던, 국가의 고위 인사(저명한 정치가)들이 소집한 명예 재판소에 소환되었습니다. 며칠 후인 1893년 11월 6일 새벽 3시에 53세의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는 독극물로 사망했는데, 그의 옛 친구들은 그에게 비소를 건넸고, 그는 그들의 요구에 따라 마셨죠.


[Music]


Pyotr Ilyich Tchaikovsky 1840 - 1893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 1840~1893


Dedicated to the memory of Jacqueline du Pre


재클린 뒤 프레를 기념하여 헌정


Swedish Radio Symphony Orchestra conducted by Vladmir Ashkenazy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가 지휘하는 스웨덴 방송교향악단의 반주


Piano Trio Opus 50 / Klaviertrio, Opus 50 / Trio Piano Opus 50 / Opus 50 Trío para piano /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트리오

Daniel Barenboim, piano / 다니엘 바렌보임, 피아노

Pinchas Zuckerman, violin / 핀커스 주커만, 바이올린

Jacqueline du Pre, cello / 재클린 뒤 프레, 첼로


Recorded in Frederic Mann Auditorium, July 1972 by arrangement with


1972년 7월 프레데릭 만 강당 녹음


Israel Broadcasting Authority

EMI Records Ltd.


이스라엘 방송 기관 및 EMI 음반사 편집


With many thanks to Professor David Brown


Mit vielem Dank an Professor David Brown


Remerciements Professeur David Brown


Con profonda gratitudine al Professor David Brown


Con nuestros agradecimientos al catedrático David Brown


데이비드 브라운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Music]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이태리어, 스페인어를 동원하여 자막을 정리했다. 자막에서 mighty César Cui 구절을 보고 뭔지 딱 알았다. 옛날에 음반 표지를 보고 제목을 정리할 때 Mighty Handful 단어를 접해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찾아보니 러시아 5인조(Russian Five)를 칭하는 것이었다. 히히히! 1부 <차이코프스키의 여인>을 번역해보니 차이코프스키의 동성애에 대한 번민, 지극히 예민한 감수성이 드러난다. 차이코프스키의 가곡 <나의 수호신, 나의 천사, 나의 친구여!>의 가사는 임의로 번역한 것이다. 대부분 번역을 찾아주려고 애썼다. 차이코프스키가 다른 사람들과 주고받은 편지는 번역을 일부만 찾았을 뿐 마찬가지로 대부분 외국어를 동원하여 다듬었다. 일어 자막은 구두점이 생략되어 있어서 정리하기가 의외로 불편해서 결국 건너뛰었다. 2부 <차이코프스키의 운명>에 나오는 노래 가사도 마찬가지로 알아서 번역했다. 한글 파일에서 자막을 다듬었는데 ‘지난 겨울’에 자꾸 빨간 줄이 나왔다. 그래서 다른 계절을 써도 마찬가지였다. 찾아보니 지난겨울이 한 단어였다. 흐흐흐~ 지난 봄, 지난 여름, 지난 가을 이렇게 다 해봤다. 교향곡 6번 <비창> 4악장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파#~ 미레도#~ 시도# 이렇게 흘러가는 도입부의 선율은 악보에 없다고 배웠다. 재수생 시절에 서울대 서양음악연구소에서 특강 시간에 작곡과 교수님이 수강생들에게 이 음악을 들려주시면서 멜로디를 따라서 불러보라고 하셨다. 오케스트라 배치는 지휘자 맘인데, 보통 오케스트라에서는 제1바이올린 옆에 제2바이올린을 배치하는 형태이지만, 러시아식 오케스트라 배치는 제1바이올린과 제2바이올린을 양끝에 떨어뜨려 배치한다. 그래서 선율이 그렇게 들리는 것을 차이코프스키가 알고 작곡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들리는 이유는 어떤 음이 다른 음으로 이동할 때 가까운 음으로 가려는 성질 때문이라고 들었다. 차이코프스키의 고뇌가 묻어나는 다큐멘터리를 번역해봤는데 나보다 10배는 예민한 것 같다. 예술가의 기질이랄까? 한편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국제음악콩쿠르세계연맹에서 90%가 넘는 동의로 퇴출당했다. 2021년 10월 바르샤바에 머물 때만 해도 다음번에는 모스크바로 가서 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는데... 비행기 타고 가면서 모스크바의 하늘을 날았던 기억도 있었다. 어차피 모스크바 음악원이 1866년에 설립된 오래된 건물이라 에어컨 설치가 안 되고 무더운 여름이라 손으로 부채질하면서 봐야 하는 불편함도 있어서 딱히 가고 싶진 않게 되었다.

댓글 1개:

  1. 눈사람 드라이브
    https://drive.google.com/drive/folders/0B4QbexMaD9S8MXBDWjhUb1E5SmM

    Neige 드라이브
    https://drive.google.com/drive/folders/0B9PSN3c1KZtEUGN2THlRcDJJcXM

    눈사람2 드라이브
    https://drive.google.com/drive/folders/0B83HU4qshzJWZEN2R0pxUE5wdWs?resourcekey=0-YFW_K8TPeHBTZhTWkX6gyg

    Neige2 드라이브
    https://drive.google.com/drive/folders/0BwzTfO581R_eaFBBQm1MQ2M2VGs?resourcekey=0-d0QVR2QwxYVtuhnrDfar3A

    Neige눈사람 드라이브
    https://drive.google.com/drive/u/0/folders/1wpfdQBgpLO2L-FFwchXvfngzHkuX1Yxh

    You have to download until 31 August 2022.

    2022년 8월 31일까지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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