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30일 금요일

Mitsuko Uchida - Live at Wigmore Hall in London (16 December 2020)


미츠코 우치다 - 2020년 12월 16일 런던 위그모어 홀 독주회

Schubert Piano Sonata No. 15 in C, D. 840 “Reliquie” /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15번 <미완성>

I. Moderato

II. Andante

III. Menuetto. Allegretto - Trio

IV. Rondo. Allegro


Schubert Piano Sonata No. 18 in G, D. 894 “Fantasy” /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18번 <환상곡>

I. Molto moderato e cantabile

II. Andante

III. Menuetto. Allegro moderato - Trio

IV. Allegretto


보고 나서 지웠으므로 가지고 있지 않다.

Mark Padmore & Mitsuko Uchida - Live at Wigmore Hall in London (26 June 2020)


https://wigmore-hall.org.uk/whats-on/mark-padmore-mitsuko-uchida-202006261300


2020년 6월 26일 런던 위그모어 홀 콘서트

Mark Padmore, tenor / 마크 패드모어, 테너

Mitsuko Uchida, piano / 미츠코 우치다, 피아노


Program

Schubert Winterreise, D. 911 / 슈베르트 연가곡 <겨울 나그네>

No. 1 Gute Nacht / 밤 인사

No. 2 Die Wetterfahne / 바람개비

No. 3 Gefrorne Tränen / 얼어붙은 눈물

No. 4 Erstarrung / 동결

No. 5 Der Lindenbaum / 보리수

No. 6 Wasserflut / 홍수

No. 7 Auf dem Flusse / 냇가에서

No. 8 Rückblick / 회상

No. 9 Irrlicht / 도깨비불

No. 10 Rast / 휴식

No. 11 Frühlingstraum / 봄의 꿈

No. 12 Einsamkeit / 외로움

No. 13 Die Post / 역마차

No. 14 Der greise Kopf / 회색 머리

No. 15 Die Krähe / 까마귀

No. 16 Letzte Hoffnung / 마지막 희망

No. 17 Im Dorfe / 마을에서

No. 18 Der stürmische Morgen / 폭풍의 아침

No. 19 Täuschung / 환각

No. 20 Der Wegweiser / 이정표

No. 21 Das Wirtshaus / 여관

No. 22 Mut! / 용기를!

No. 23 Die Nebensonnen / 햇무리

No. 24 Der Leiermann / 길거리 악사


Encore

Purcell: The Tempest, Z. 631 - No stars again shall hurt you / 퍼셀 세미오페라 <템페스트> 중 중창 및 합창 <별은 다시 당신을 해칠 수 없다>


보고 나서 지웠으므로 가지고 있지 않다. 앙코르곡은 위그모어 홀 사이트에서 찾은 것이지 동영상에는 없다.

Zhu Xiao-Mei, How Bach Defeated Mao 2016


https://www.medici.tv/en/documentaries/zhu-xiao-mei-how-bach-defeated-mao

https://www.youtube.com/watch?v=5_O59zP8ju0&t=16s


주샤오메이 다큐멘터리 <바흐는 어떻게 마오쩌둥을 이겼는가>

Dan Wesker, narrator (voice) / 댄 웨스커, 화자

Zhu Xiao-Mei, pianist / 주샤오메이, 피아니스트

Michel Mollard, music essayist / 미셸 몰라르, 음악 평론가

Zhang Kexin, concert promoter / 장커신, 콘서트 기획자

Yin Chengzong, pianist / 인쳉종, 피아니스트

Zuoyin, Zhu Xiao-Mei's former co-student / 주오인, 주샤오메이의 전 교우

Zhou Guangren, Zhu Xiao-Mei's former teacher / 저우광렌, 주샤오메이의 전 스승


[Zhu Xiao-Mei: Bach Goldberg Variations, BWV 998 - Aria]


[주샤오메이 -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중 아리아]


Zhu Xiao-Mei: When I am in Paris, people often come up to me after a concert and ask: “How are you able to play Bach so that we can understand it? How are you able to understand Bach and western music?” Then I say to them: I believe that art and culture, in their purest form, are the same all throughout the world they have no geographical borders; they are the spiritual property of all mankind.


주샤오메이 : 제가 파리에 있을 때 사람들은 종종 콘서트가 끝난 후 저를 찾아와 다음과 같이 질문합니다. “바흐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어떻게 연주할 수 있나요? 어떻게 바흐와 서양 음악을 이해할 수 있나요?” 그러면 저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예술과 문화가 가장 순수한 형태로 전 세계 어디에서나 같다고 믿는데, 지리적 경계가 없으며, 모든 인류의 영적 재산입니다.



Zhu Xiao-Mei, How Bach Defeated Mao


주샤오메이, 바흐는 어떻게 마오쩌둥을 이겼는가


Paris


파리


Zhang Kexin: Hello? Hello there.


장커신 :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Zhu Xiao-Mei: Hello, Kexin. How are you? Aren’t you tired?


주샤오메이 : 안녕하세요, 커신. 잘 지내시나요? 피곤하지 않으세요?


Zhang Kexin: No, I’m not tired.


장커신 : 아뇨, 피곤하지 않아요.


Zhu Xiao-Mei: Not tired ― haha! You are incredible. It wasn’t easy but you were right. You pestered me for three years, and in the end I came.


주샤오메이 : 피곤하지 않다니, 하하! 진짜 대단하군요. 쉽지 않았지만, 당신이 옳았어요. 당신은 3년 동안 저를 압박했고, 결국 제가 왔습니다.


Zhang Kexin: Did you find the Chinese audience greatly changed?


장커신 : 중국 청중이 많이 변했다는 걸 느끼셨나요?


Zhu Xiao-Mei: No, not at all... and all of the young people! Even Jinan was sold out. I wouldn’t have believed that in my wildest dreams.


주샤오메이 : 아뇨, 전혀... 그리고 모든 젊은이! (산둥성의) 지난 시도 매진되었어요. 제 가장 거친 꿈속에서도 그것을 믿을 수 없었어요.


Zhang Kexin: I also didn’t expect that. Although I was pretty confident I didn’t expect it would be this successful.


장커신 : 저도 예상치 못했어요. 자신감이 있었지만 이렇게 성공할 줄은 몰랐죠.


Zhu Xiao-Mei: No, nobody could have foreseen this. It was a pure twist of fate. Some things really just need time to work out on their own.


주샤오메이 : 아니, 아무도 이것을 예상치 못했어요. 정말 반전입니다. 저절로 일어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일들이 있어요.


Zhang Kexin: Nobody in China will be afraid of Bach anymore.


장커신 : 중국에서는 더 이상 아무도 바흐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Zhu Xiao-Mei: That’s why it was so important. But thank you so much! We’ll keep in touch.


주샤오메이 : 그래서 중요했어요. 하지만 정말 감사합니다! 계속 연락해요.


Zhang Kexin: Okay. Go get some rest.


장커신 : 네. 가서 편히 쉬세요.


Zhu Xiao-Mei: Get some sleep. Bye.


주샤오메이 : 얼른 주무세요. 안녕히 계세요.


Dan Wesker: Music, Especially the music of Bach made it possible for Zhu Xiao-Mei to cope with the worst challenges of her existence. The Pianist experienced all of the consequences of the Mao regime: years of indoctrination, five years of re-education, another five years confined to a labor camp, a shattered family, hardships and harassment. In 1980, she emigrated and ultimately made Paris her new home. This film tells the story of her return to China as an internationally acclaimed interpreter of Bach's music 35 years after leaving her country.


댄 웨스커 : 음악, 특히 바흐의 음악은 주샤오메이가 자기 존재의 가장 힘든 도전에 대처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이 피아니스트는 마오쩌둥 정권의 모든 결과를 겪었는데, 수년간의 세뇌, 5년간의 재교육, 또 다른 5년간의 노동 수용소, 산산이 부서진 가족, 고난과 괴롭힘입니다. 1980년에 그녀는 이민을 떠났고 궁극적으로 파리를 새로운 집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필름은 그녀가 고국을 떠난 지 35년 만에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바흐 음악의 해석자로서 중국으로 돌아온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Zhu Xiao-Mei: Schubert/Liszt Winterreise, D. 911 No. 1 Gute Nacht]


[주샤오메이 - 슈베르트 연가곡 <겨울 나그네> 중 1번 <밤 인사> (리스트 편곡)]


Zhu Xiao-Mei: Next to Bach, Schubert is one of my most favorite composers. That started very early. I remember how I loved his “Winterreise” in secondary school. Simply the two first verses: “As a stranger I arrived, as a stranger I depart.” It moved me back then, even though I didn’t understand it yet. I didn’t expect it would happen to me 20 years later. Even today I’m not sure if I’m Chinese or a foreigner. It’s a very strange feeling. I lived in China for 29 years and now I’ve lived abroad for 36 years.


주샤오메이 : 슈베르트는 바흐 다음으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 중 한 명입니다. (제게 슈베르트는 바흐와 함께 가장 중요한 작곡가입니다.) 아주 일찍 시작되었죠. 저는 중학교 때 그의 연가곡 <겨울 나그네>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기억합니다. 단지 다음과 같은 2개의 첫 구절이 있어요. “이방인으로 왔다가 / 이방인으로 떠나네요.” 아직 이해하지 못했는데도 그때 감동했어요. 20년 후 제게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죠. 지금도 제가 중국인인지 외국인인지 모를 때가 있어요. 굉장히 묘한(아주 이상한) 느낌입니다. 저는 중국에서 29년을 살았고 지금은 36년 동안 해외에서 살아왔어요.


Dan Wesker: The decision to return to China is not easy for her. The winds of the cultural revolution in which Mao laid waste to the country lie too deep. Her family is considered to be bourgeois and counterrevolutionary. She becomes the victim of public denunciations, experiences how musical schools are burned, how her teachers are humiliated and are driven to suicide. Apart from a few so-called model operas, piano playing and classical music are forbidden. It takes years until she secretly begins to play again.


댄 웨스커 : 중국으로의 귀국 결정은 그녀에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오쩌둥이 나라를 황폐하게 만든 문화대혁명의 바람이 너무 깊으니까요. 그녀의 가족은 부르주아적이고 반혁명적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녀는 공개 비난의 희생자가 되었고, 음악 학교가 어떻게 불탔는지, 교사들이 어떻게 굴욕을 당하고 자살하게 되었는지 경험합니다. 이른바 모델 오페라 몇 개를 제외하고 피아노 연주와 클래식 음악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녀가 은밀하게 다시 연주를 시작하기까지 몇 년이 걸립니다.


Thank you. Are you Zhu Xiao-Mei?


감사합니다. 주샤오메이 씨죠?


Zhu Xiao-Mei: How do you know?


주샤오메이 : 어떻게 아세요?


Because I read your biography.


당신의 전기를 읽었거든요.


Zhu Xiao-Mei: No!


주샤오메이 : 아니!


And you came to Dijon. I live in Dijon.


그리고 당신은 디종으로 연주하러 오셨죠. 저는 디종에 살아요.


Zhu Xiao-Mei: That can’t be!


주샤오메이 : 설마요!


There you go ― and I admire you.


그렇다니까요. ― 그리고 당신을 존경합니다.


Zhu Xiao-Mei: Oh, that touches me greatly. Thank you!


주샤오메이 : 오, 제게 큰 감동을 주시는군요. 고맙습니다!


See you soon. We are practically neighbors.


곧 또 봐요. 우리는 거의 이웃입니다.


Zhu Xiao-Mei: See you soon.


주샤오메이 : 또 봐요.


Thank you. Goodbye.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Zhu Xiao-Mei: I hardly had any access to culture as a child. There were no books to read, no music to listen to no art ― nothing. There was no school, no education. Artists, writers, musicians didn’t have the freedom to express themselves, to write, to develop their talent.


주샤오메이 : 저는 어렸을 때 문화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어요. (어렸을 때 저는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어요.) 읽을 책도, 들을 음악도, 예술 작품도, 아무것도 없었죠. 학교도, 교육도 없었고요. 예술가, 작가, 음악가에게는 자신을 표현하고, 쓰고, 재능을 발전시킬 자유가 없었습니다.


Michel Mollard: In 1949, Mao established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which became a communist country. However, the implementation of communism didn’t go well. He decides to somehow bypass all existing structures in China and rely on the youth to consolidate his power and finally establish communism and revolution in China. That is the Cultural Revolution. It won’t cause more deaths than the Great Leap Forward - far fewer, but it will destroy the greatest and most beautiful things in Chinese culture. It attacks art and culture, it attacks the intellectuals and the elites.


미셸 몰라르 : 1949년에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고, 중국은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이행은 순탄치 않았죠. 그는 어떻게든 중국의 기존 구조를 모두 우회하고 젊은이들에게 의존하여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여 마침내 중국에서 공산주의와 혁명을 수립하기로 합니다. 그것이 바로 문화대혁명입니다. 대약진 정책(모택동에 의한 1958~1961년의 경제 공업화 정책)보다 더 많은 사망자를 일으키지 않을 것인데, 훨씬 적지만 중국 문화에서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파괴할 것입니다. 예술과 문화를 공격하고, 지식인들과 엘리트층을 공격합니다.


Zhu Xiao-Mei: The Cultural Revolution destroyed the entire culture. One cannot imagine it: in China’s bookstores, there was not one single book to buy, not even dictionaries. Artists were chased into cowsheds. This is the first mistake of this terrible tragedy. Moreover, the youth was brutally manipulated. They were mislead and made into fools by politics and they had no access to literature and art. Because there was no culture during my youth, I joined the masses and engaged myself in class-struggle and revolution. I wanted to devote my life to Mao Zedong. I even turned away from my father and mother. I despised them and was ashamed of them.


주샤오메이 : 문화대혁명은 모든 문화를 파괴했어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로, 중국의 서점들에는 살 책이 한 권도 없었고, 심지어 사전도 없었습니다. 예술가들은 외양간(수용소)으로 쫓겨났습니다. 이것이 이 끔찍한 비극의 첫 번째 실수(한 단면)입니다. 게다가 청년들은 잔인하게 조종(착취)당했죠. 그들은 정치에 현혹되어 미쳐버렸고 문학과 예술을 접할 수 없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문화가 없었기 때문에 저는 대중에 합류하여 계급투쟁과 혁명에 뛰어들었습니다. 저는 평생을 마오쩌둥에게 바치고 싶었어요. 심지어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도 등을 돌렸죠. 그들을 멸시하고 부끄러워했어요.


[Bach Toccata, Adagio & Fugue in C, BWV 564: II. Adagio]


[바흐 토카타, 아다지오, 푸가 중 2악장 아다지오]


Zhu Xiao-Mei: Chinese culture and society was almost completely destroyed. The destruction is irreversible for generations to come. For me, it’s a terrible tragedy, because I experienced it personally.


주샤오메이 : 중국 문화와 사회는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파괴는 다음 세대에 돌이킬 수 없습니다.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제게 끔찍한 비극입니다.


[Bach Sinfonia No. 5 in Eb, BWV 791]


[바흐 신포니아 5번]


Michel Mollard: Xiao-Mei refused to do this tour for years. And she has pretty much always rejected the idea. Many here in France told her she had to go, that, in the spirit of this phrase by Lao-Tzu: "The return is the movement of Tao." There were also many friends in China who told her to come back. But she didn’t want to go. Surely, there was fear of confronting her past, an extremely painful past. There was fear of facing hostility there - either political hostility or the animosity of people she might have known, who did not have the chance to go abroad and dedicate their lives to music. She was also afraid of confronting the Chinese public. The idea of going to China in this context, with a work like the Goldberg Variations, it’s true, it seemed a bit mad.


미셸 몰라르 : 샤오메이는 수년간 이 여행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거의 항상 그 아이디어를 거부했습니다. 여기 프랑스의 많은 사람은 그녀에게 가야 한다고 말했는데, 노자가 <도덕경>에서 말한 이 구절의 정신에 따르면 “돌아오는 것은 도의 움직임”입니다. 중국에는 그녀에게 돌아오라고 한 친구들도 많이 있었어요. 그러나 그녀는 가고 싶지 않았죠. 확실히 그녀의 과거, 극도로 고통스러운 과거를 마주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어요. 적대감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는데, 정치적인 적대감이나 그녀가 알았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적대감, 그들은 해외로 나가 음악에 자신의 삶을 바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중국 대중과 대면하는 것도 두려워했죠. 이런 맥락에서 <골드베르크 변주곡> 같은 작품으로 중국에 간다는 생각은 사실 조금 미친 것 같았어요.


Zhu Xiao-Mei: I thought that Chinese audiences would still need time to accept Bach. But they kept on insisting. So I said to myself, I’ll try it. If I had waited longer, I would have been too old. So I decided to go back.


주샤오메이 : 중국 청중이 바흐를 받아들이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그들은 계속 주장했죠. (중국 청중이 바흐를 접할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그들은 저를 괴롭히는 것을 멈추지 않았죠.) 그래서 한번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더 기다렸다면, 저는 너무 늙었을 거예요. 그래서 돌아가기로 했죠.


Shanghai


상하이


Zhu Xiao-Mei: When I returned back to Shanghai after 35 years, I felt like a stranger. I was born in Shanghai, like my mother. But I don’t recognize it anymore. The place where I was born is no longer there. The old houses and cottages, the courtyards ― they are all gone. China is now so modernized. Standing in front of these office towers and skyscrapers, I feel insignificant, lost and overwhelmed.


주샤오메이 : 35년 만에 상하이로 돌아왔을 때, 저는 낯선 사람(이방인)처럼 느껴졌어요. 저는 어머니처럼 상하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상하이는 저의 고향이자 어머니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더 이상 인식하지 못합니다. 제가 태어난 곳은 더 이상 그곳에 없습니다. 오래된 집과 별장, 마당 ― 모두 사라졌어요. 중국은 이제 너무나도(그만큼) 현대화되었습니다. 이 오피스 타워(사무실 건물)와 고층 빌딩 앞에서 저는 보잘것없고(하찮고) 길을 잃고 압도당한 느낌이 듭니다.


Zhang Kexin: This tour to China consists of eight solo concerts in seven cities. It took me three years to persuade her. When she finally agreed to perform in China, I was overjoyed. But she was hesitant up to the end, wondering if she really should play. The Symphony Hall in Shanghai has a large auditorium. We could have easily filled it twice. But she didn’t want that.


장커신 : 이번 중국 투어는 7개 도시 8회 단독 콘서트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번 투어에서 그녀는 7개 도시에서 8번의 콘서트를 가집니다.) 그녀를 설득하는 데 3년이 걸렸어요. 그녀가 마침내 중국에서 공연하기로 합의했을 때 저는 매우 기뻤어요.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정말 연주해야 할지 망설이며 끝까지 주저했죠. 상하이 심포니 홀에는 큰 강당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곳을 두 번 쉽게 채울 수 있었죠.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Zhu Xiao-Mei: Bach Goldberg Variations, BWV 998 - Variatio 22. a 1 Clav. alla breve]


[주샤오메이 -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중 변주 22]


Zhu Xiao-Mei: My agent Zhang Kexin wanted me to play in the large auditorium. But the Goldberg Variations are ill-suited for it. It is very intimate music; it isn’t glorious. It is crucial that the auditorium fits the music. Kexin called me and said the people had been standing in line all night to be the first to get tickets at the box office early in the morning.


주샤오메이 : 제 에이전트인 장커신은 제가 큰 강당에서 연주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적합하지 않거든요. 과장된 음악이 아니라 매우 친밀한 음악이라서요. 강당이 음악에 맞는 것이 중요해요. 커신은 제게 전화를 걸어 사람들이 아침 일찍 매표소에서 표를 가장 먼저 사려고 밤새도록 줄을 섰다고 말했죠.


Zhang Kexin: Yes, I remember it was raining that day. Everything was sold out in two hours. I tried to convince Zhu Xiao-Mei to give a second concert. There was such a great demand. She finally agreed. And this concert was sold out within ten minutes. Tickets were being sold on the black market for 800 Euros. Zhu was speechless when she heard that.


장커신 : 네, 그날 비가 내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두 시간 만에 다 팔렸어요. 저는 주샤오메이에게 두 번째 콘서트를 열도록 설득하려고 했는데요. 그만큼 수요가 많았거든요. 그녀는 마침내 수락했죠. 그리고 이 콘서트는 10분 만에 매진되었어요. 티켓은 암시장에서 800유로에 거래되고 있었죠. 그 말을 들은 주샤오메이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Michel Mollard: That was an incredible surprise. She never imagined encountering this audience. When one compares it to Western audiences, it is almost three times younger. She never imagined being known by this audience, but beyond that, it shocked her because she could not help but make the connection between these young people and her own youth from the time of the Cultural Revolution.


미셸 몰라르 : 그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웠어요. 그녀는 이 청중을 만나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죠. 서양 청중과 비교하면 거의 세 배나 어려서요. 그녀는 이 청중에게 알려지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그 이상으로 그녀는 이 젊은이들과 문화대혁명 당시의 자신의 청춘을 연결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충격을 받았죠.


[Zhu Xiao-Mei: Bach Goldberg Variations, BWV 998 - Aria]


[주샤오메이 -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중 아리아]


Zhu Xiao-Mei: The audience was so enthusiastic and so moved by the music. But that wasn’t because of me but because of the greatness of the music. It totally dispelled my belief that Chinese audiences weren’t ready for Bach. I completely banished the thought.


주샤오메이 : 청중은 음악에 매우 열광했고 감동했어요. 하지만 그건 저 때문이 아니라 음악의 위대함 때문입니다. 중국 청중이 바흐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저의 믿음을 완전히 무너뜨렸습니다. 저는 그 생각을 완전히 버렸습니다.


[Zhu Xiao-Mei: Bach Goldberg Variations, BWV 998 - Variatio 1. a 1 Clav.]


[주샤오메이 -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중 변주 1]


Zhu Xiao-Mei: There are so many interpretations and versions of this wonderful work. I think I’m more the emotional type. I can only take to the stage what I feel in the music and share it with the audience. “We have a bit of time to talk, if you wish. I have played this piece for so long, it’s simply a part of my life. And I would like to share that with you.”


주샤오메이 : 이 멋진(천재적인, 비범한) 작품에는 많은 해석과 버전이 있습니다. 저는 감정적인 면에 더 치우친 것 같아요. 저는 음악에서 느끼는 것을 무대에 올려 청중과 공유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원한다면 이야기할 시간이 조금 있습니다. 저는 이 곡을 오랫동안 연주해왔고, 단지 제 삶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어요.”


“I recently saw your interview. In the interview you said you learned a lot from Lao-Tzu and Zhuangzi and you would read them daily. Does ancient Chinese philosophy help you play piano? What role does it play?”


“최근에 당신의 인터뷰를 봤습니다. 인터뷰에서 당신은 노자와 장자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고 매일 읽기도 한다고 말했습니다. 고대 중국 철학이 바흐 연주에 도움이 되나요? 어떻게 서로 관련되어 있나요?”


Zhu Xiao-Mei: “This is a very good question although I cannot explain it easily. I cannot say that I simply applied the teachings of Lao-Tzu to the Goldberg Variations. Our Chinese ancerstors like Lao-Tzu were great philosophers. They taught us how to live and how to pursue knowledge. Their way taught me to be patient, how to approach life, knowledge and music.”


주샤오메이 : “쉽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그것은 대답하기 쉬운 질문이 아닙니다.) 저는 단순히 노자의 가르침을 ‘골드베르크 변주곡’에 적용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노자와 같은 중국인의 조상은 위대한 철학자(비범한 대가)였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함께 사는 방법과 지식을 위해 노력하는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그들의 방식은 제게 인내심, 인생과 지식과 음악에 접근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Xian Xinghai/Yin Chengzong & Chu Wanghua: Yellow River (1970)]

Yin Chengzong, piano / 인쳉종, 피아노

Central Phliharmonic Orchestra / 중앙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Li Delun, conductor / 리더룬 지휘


[시앤싱하이 피아노 협주곡 <황하> (인쳉종 및 추왕화 편곡)]


Zhu Xiao-Mei: During the rehearsal in Shanghai Kexin came in and said: “Yin Chengzong would like to see you.” I was extremely surprised because Yin is one of China’s most important pianists. He had adapted the model operas into a piano concerto and in turn saved the piano during the Cultural Revolution. Because no one was allowed to play the piano. Of course, he was also exploited by the Gang of Four and he had to serve them.


주샤오메이 : 상하이에서 리허설 하는 동안 커신이 와서 말했습니다. “인쳉종이 당신을 보고 싶어 합니다.” 인쳉종은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이기 때문에 매우 놀랐어요. 그는 모델 오페라를 피아노 협주곡으로 편곡했고 차례로 문화대혁명 기간에 피아노를 구했습니다. 피아노를 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죠. (실제로 피아노 연주는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그 역시 “4인방”(중화인민공화국의 문화대혁명 동안 마오쩌둥의 주위를 맴돌며 권력을 장악한 네 사람)에게 착취(이용)당했고 그들을 섬겨야 했죠.


Michel Mollard: It is a very touching encounter. Yin Chenzong - who won the Tchaikovsky Competition in 1962, with Vladimir Ashkenazy, Ashkenazy came in first, he second - returned to China and he eventually becomes the official pianist of the regime. There is a famous picture of him taking tea with Mao, being received by Mao, for Xiao-Mei Yin was someone who she never imagined being able to approach while she was in China. And now they meet in Shanghai, in this hall with two auditoriums. Yin Chenzong is performing the second Rachmaninov concerto with his friend Ashkenazy, and in the other hall Xiao-Mei is performing the Goldberg Variations. So there are two completely opposite worlds there two opposite styles of music, two opposite paths, and under normal circumstances the meeting should not have happened.


미셸 몰라르 : 매우 감동적인 만남입니다. 1962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와 함께 입상한 인쳉종은 아쉬케나지가 우승할 때 준우승했으며, 중국으로 귀국하여 마침내 정권의 공식 피아니스트가 되었습니다. 인쳉종이 마오쩌둥과 함께 차를 마시며 마오쩌둥에게 대접받는 유명한 사진이 있는데, 샤오메이에게 인쳉종은 그녀가 중국에 있는 동안 접근할 수 있을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사람이었죠. 그리고 이제 그들은 상하이에서 2개의 강당이 있는 이 홀에서 만납니다. 인쳉종은 그의 친구 아쉬케나지와 함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하고 있으며, 다른 홀에서 샤오메이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반대되는 2개의 세계가 있고 2개의 반대되는 음악 스타일, 2개의 반대 경로가 있으며, 정상적인 상황에서 만남이 일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Yin Chenzong: That we are still able to play after everything that we went through...


인쳉종 : 우리가 겪은 모든 것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연주할 수 있다는 것이...


Zhu Xiao-Mei: How true! It’s been a huge stroke of luck. Thank goodness that I am still able to play. But it was a lot more difficult for you... The older generation is gone; artists like Gu Shengying ― they all passed away.


주샤오메이 : 사실입니다! 엄청난 행운이 따랐죠. (정말 다행입니다.) 아직까지 연주할 수 있어서 감사해요. 하지만 당신은 훨씬 더 힘들었죠... 구세대가 사라졌는데, 구쉥잉 같은 예술가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습니다.


Yin Chenzong: Weren’t you in the United States for several years? How is Tao Zongsheng?


인쳉종 : 몇 년 동안 미국에 계시지 않았나요? 타오종성은 어떤가요?


Zhu Xiao-Mei: Very well ― she is still playing. I was first in America for eight years and then I moved to France. I have been living in France for 25 years.


주샤오메이 : 잘 지내는데, 그녀는 여전히 연주하고 있어요. 저는 8년 동안 미국에 있다가 프랑스로 이주했어요. 프랑스에서 25년 동안 살아가고 있어요.


Yin Chenzong: Yes, everyone left around this time.


인쳉종 : 네, 모두 이때 떠났군요.


Zhu Xiao-Mei: Yes, how true. I was happy to see him; he is so humble. We followed two different paths, but it’s a miracle that we could both give concerts. He really rendered a great service to music. We shouldn’t forget his contribution.


주샤오메이 : 네, 사실입니다. 저는 그를 만나서 기뻤는데, 그는 매우 겸손합니다. 각자의 길을 걸었지만, 둘 다 여전히 콘서트를 할 수 있다는 게 기적입니다. 그는 정말로 음악에 변화를 가져왔어요. 우리는 그의 기여를 절대 잊지 말아야 합니다.


[Xian Xinghai/Yin Chengzong & Chu Wanghua: Yellow River (1970)]

Yin Chengzong, piano / 인쳉종, 피아노

Central Phliharmonic Orchestra / 중앙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Li Delun, conductor / 리더룬 지휘


[시앤싱하이 피아노 협주곡 <황하> (인쳉종 및 추왕화 편곡)]


Névache, Vallée de la Clarée in France


프랑스 네바쉐 클라레 계곡


Zhu Xiao-Mei: Each person’s character is different. Many couldn’t bear the absurdity of the Cultural Revolution. They felt it was better to end their own life. Others believed that things would change, that fate would change things. And so they held on.


주샤오메이 : 사람마다 성격이 다릅니다. 많은 사람이 문화대혁명의 부조리함(비극)을 견딜 수 없었어요. 그들은 삶을 끝내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출구를 찾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상황이 바뀌고 운명이 바뀌기를 바랐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버틴 이유입니다.


[Schumann/Liszt Myrthen, Op. 25 No. 1 Widmung]


[슈만 가곡 2집 <미르테의 꽃> 중 1번 <헌정> (리스트 편곡)]


Zhu Xiao-Mei: Gu Shengying is the pianist who I most admired. She won second prize in Geneva in 1958, together with Pollini. She was the first Chinese musician to win an international prize. During the Cultural Revolution she couldn’t take the humiliation, the insults and the abuse anymore. At 29, she committed suicide. She is my idol. The way she plays music is my ideal, so natural and simple - so passionate but never melodramatic. Her elegance, her noble temperament ― one rarely finds such pianists today. I have always lived in big cities, Shanghai, Beijing and Paris. But I have always been drawn to nature, to rivers, mountains, and majestic peaks. They give me peace and strength within. That’s why I enjoy working in Névache. Before each concert or recording I retreat to the mountains to meditate and work.


주샤오메이 : 구쉥잉은 제가 가장 존경하는 피아니스트입니다. 폴리니와 함께 1957년 제네바 국제음악콩쿠르에서 준우승했죠. 그녀는 국제 대회에서 입상한 최초의 중국 음악가였어요. 문화대혁명 동안 그녀는 굴욕, 모욕, 폭력을 견딜 수 없었죠. 29세에 그녀는 자살했어요. 그녀는 제 우상입니다. 그녀가 연주하는 방식은 제게 이상적이며, 자연스럽고 단순하며 열정적이지만, 결코 멜로드라마 같지는 않아요. 그녀의 우아함, 고상한 기질 ― 오늘날 그러한 피아니스트는 거의 찾아볼 수 없어요. (오늘날 저는 극소수의 피아니스트에게서만 이러한 세련미와 우아함을 발견할 수 있어요.) 저는 항상 대도시들, 상하이와 베이징과 파리에서 살았어요. 그러나 항상 자연, 강, 산, 장엄한 봉우리에 끌렸죠. 그런 것들이 제게 평화와 힘을 줍니다. 그래서 네바쉐에서 일하는 게 즐거워요. 각 콘서트나 녹음 전에는 명상과 작업을 위해 산으로 도피합니다.


[Jia Ran: Schubert Piano Sonata No. 19 in c, D. 958 - II. Adagio]


[지아란 -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19번 2악장]


Zhu Xiao-Mei: Sorry to interrupt you ― The beginning is good, but one detail: It is better when the strength comes from within. Don’t just control it through the fingers. It’s not easy. Try the beginning again. Try it again. More slowly. The more slowly you press the keys, the better it sounds. Go as slowly as you can. The treble line!


주샤오메이 : 방해해서 미안한데 ― 시작은 좋지만 한 가지 디테일이 다음과 같아. 내부에서(여기 아래에서) 힘이 나오면 더 좋아. 손가락으로만 통제하지 마. 쉽지 않아. 처음부터 다시 시도해봐. 다시 한번. 더 천천히. 건반을 천천히 누를수록(느리게 연주할수록) 더 좋은 소리가 나. 최대한 천천히(부드럽게) 가. 가장 높은 성부!


Michel Mollard: Her dream is to pass things on, to create a school that can only be understood if one knows that for ten years, schools and universities in China were closed. And that there were hardly any books or music and that an entire generation was denied education. Therefore, this idea to create a school is her big idea. She is looking for the right way to do it.


미셸 몰라르 : 그녀의 꿈은 10년 동안 중국의 학교들과 대학교들이 문을 닫았다는 것을 알아야만 이해될 수 있는 학교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책이나 음악이 거의 없었고, 한 세대 전체가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것. 따라서 학교를 만드는 것이 그녀의 큰 아이디어입니다. 그녀는 그렇게 할 올바른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Jia Ran & Zhu Xiao-Mei: Bach Cantata “Gottes Zeit ist die allerbeste Zeit” (Actus tragicus), BWV 106 - Sonatina]


[지아란 및 주샤오메이 - 바흐 칸타타 <하느님의 시간이 최상의 시간이로다>(비극) 중 소나티나 (4개의 손을 위한 편곡)]


Zhu Xiao-Mei: I often joke with western journalists and say: “Actually, Bach's a Buddhist; you just don’t know that.” But I really think that there is some truth in it. If I compare Bach to Lao-Tzu, I find they are related. Because the highest forms of culture and art are interconnected. Bach’s name means “brook” and Lao-Tzu’s claimed that a person should live like water; he should enrich the lives of other people but never struggle against the flow. Playing Bach has become a daily ritual for me like meditating or eating breakfast. It’s simply a habit. And if I don’t do it I become nervous and disoriented.


주샤오메이 : 저는 종종 서양의 기자들과 농담을 합니다. “사실, 바흐는 불교도인데, 당신은 그걸 모르네요.” 하지만 그 속에 진실이(그것이 정말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바흐를 노자에 비유하면 그들이 관련되어 있음(두 가지가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가장 높은 형태의 문화와 예술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성은 “시냇물”을 의미하고 노자는 사람이 물처럼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다른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되 흐름에 맞서 싸우지(자신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죠. 제게 바흐 연주는 명상이나 아침 식사와 같은 일상적인 의식이 되었습니다. 단순히 습관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초조해지고 혼란스러워집니다. (바흐를 연주하는 것은 명상처럼 매일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는 속으로 안절부절못하고 목적도 없었을 것입니다.)


[Zhu Xiao-Mei: Bach Goldberg Variations, BWV 998 - Variatio 13. a 2 Clav.]


[주샤오메이 -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중 변주 13]


Zhu Xiao-Mei: For this tour I wanted to play at the Sichuan Conservatory of Music. I’ve always liked Sichuan and its people. The Sichuan Conservatory of Music is China’s largest conservatory. It has more than 17,000 students.


주샤오메이 : 이번 투어를 위해 쓰촨 음악원에서 연주하고 싶었어요. 저는 항상 쓰촨성과 그곳의 사람들을 좋아했어요. 쓰촨 음악원은 중국 최대 규모의 음악원입니다. 17,000명 이상의 학생이 있습니다.


[Bach Chromatic Fantasia & Fugue in d, BWV 903: I. Fantasia]


[바흐 <반음계적 환상곡과 푸가> 중 환상곡]


Zhu Xiao-Mei: “Feel how the sound still reverberates. Don’t break it off. This part is very interesting.” A master class is something that I really don’t like doing. The pupils are very nervous and then they are supposed to play in front of several hundred people. And then you have to tell them what they did wrong until they no longer know what is right or wrong and are completely unnerved. “You are rushing here. Just keep calm. Relax. I get the feeling that you want to get through this too quickly.” I believe that Bach’s music is very important for young people. Its sense of balance, its elegance ― there is nothing melodramatic about it. Bach's approach to emotional expression is like an ancient Chinese ideal. It is a kind of emotional control that is not reckless or unbridled. A person who plays Bach well has built a very good foundation.


주샤오메이 : “소리가 어떻게 아직도 울려 퍼지는지 느껴봐. (그 음색이 오래 가도록 둬.) 끊지 말고. 이 부분이 매우 흥미로워.” 마스터클래스 제공은 제가 정말 하기 싫은 것입니다. (저는 마스터클래스의 개념, 그런 종류의 가르침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매우 긴장하여 수백 명의 사람 앞에서 연주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옳고 그른 것을 더 이상 알지 못하고 완전히 초조해질 때까지 그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무엇이 그른지) 말해야 합니다. “너 여기 서두르고 있구나. 진정해. (침착해.) 손 풀어. 너무 빨리 끝내고 싶은 것 같아.” 저는 바흐의 음악이 젊은이들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균형감, 우아함(그 고귀한 느낌) ― 멜로드라마 같은 게 없어요. 바흐가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은 고대 중국의 이상과 같은데요. 무모하거나 억제되지 않는 일종의 감정 조절입니다. 바흐를 잘 연주한다면 아주 좋은 기초가(매우 견고한 기초를 구축하게) 됩니다.


Welcome to the concert hall of the Sichuan Conservotary of Music. The concert will begin shortly.


쓰촨 음악원 콘서트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곧 연주회가 시작됩니다.


[Zhu Xiao-Mei: Bach Goldberg Variations, BWV 998 - Variatio 14. a 2 Clav.]


[주샤오메이 -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중 변주 14]


Zhu Xiao-Mei: When I returned back to China, I was impressed by all of the young people. Most of those who attended were between 20 and 25 years old. It’s very unlike Europe where the average age is around 60. The young people in China are so open-minded. I think they are the hope for China’s future.


주샤오메이 : 중국으로 돌아왔을 때 모든 젊은이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참석자 대부분은 20~25세였죠. 평균 연령이 60세 전후인 유럽과는 사뭇 달라요. 중국의 젊은이들은 매우 개방적입니다. 저는 그들이 중국의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고 생각합니다.


Please line up! This is Bach, after all!


줄을 서주세요. 이것이 바로 바흐입니다!


Beijing


베이징


Zhu Xiao-Mei: When this tour is over I need to rest for a while.


주샤오메이 : 이번 여행이 끝나면 잠시 쉬어야겠어요. (투어가 끝나면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Zhang Kexin: If you need some rest, listen to your recording of the Goldberg Variations. Seriously, whenever I hear it I feel calm within. It should be sold at pharmacies!


장커신 : 휴식이 필요하면 당신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녹음을 들어보세요. 진심으로 들을 때마다 마음이 평온해집니다. 약국에서 팔아야지!


Dan Wesker: Beijing is the highlight of the tour. The city was the center of Zhu Xiao-Mei’s life until she left the country. She studied here and here is where the cultural revolution suddenly cut off her promising career. Here, she put together again, the shards of her life as a person and artist after she was released from labor camp. Her friends and her four sisters still live here. The concert in Beijing also allows the opportunity for a family reunion.


댄 웨스커 : 베이징은 투어의 하이라이트입니다. 이 도시는 주샤오메이가 나라를 떠날 때까지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녀는 여기에서 공부했는데, 여기는 문화대혁명이 그녀의 유망한 경력을 갑자기 단절시킨 곳입니다. 이곳에서 그녀는 노동 수용소에서 풀려난 후의 개인이자 예술가로서의 삶의 조각들을 다시 모았습니다. 그녀의 친구들과 그녀의 네 자매는 여전히 여기에 살고 있습니다. 베이징 콘서트는 이산가족 상봉의 기회이기도 합니다.


Zhu Xiao-Mei: “Mother would faint if she saw this performance.” My parents are no longer alive, but my four sisters are still there. And the most important family member: the piano. It even followed me to the labor camp and later back to Beijing. It is the patriarch of our family. “We need to repair it!”


주샤오메이 : “엄마가 이 공연을 보면 기절할 텐데.” (엄마가 무대에서 나를 봤다면 기뻐서 쓰러졌을 거야.) 부모님은 더 이상 살아 계시지 않지만 네 자매와 가장 중요한 가족 구성원인 피아노는 여전히 그곳에 있습니다. 피아노는 노동 수용소로 저를 따라갔다가 나중에 저와 함께 베이징으로 돌아오기도 했죠. 피아노는 우리 가족의 가장입니다. “수리해야 해!”


“But someone told us it wouldn’t be the same anymore.”


“하지만 누군가는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어.”


“We have to replace the felt pads.”


“펠트 패드(해머)를 바꿔야 해.”


Zhu Xiao-Mei: “Yes, precisely.” When my mother was young, my grandfather didn’t let her play the piano. So she invested all of her hopes and dreams in me. I was to realize her dream of playing the piano. She invested all of her energy and did everything she could. In Beijing, during the Cultural Revolution, she was afraid people would say: “She is playing the large western drum.” Every evening, even during the winter, she would wrap herself in a blanket, and would stand guard outside to make sure nobody would hear me playing.


주샤오메이 : “그래, 맞아.” 어머니가 젊었을 때 할아버지는 어머니가 피아노를 치도록 놔두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어머니는 자신의 모든 희망과 꿈을 제게 투영했죠. 저는 피아노를 치는 어머니의 꿈을 이뤄야 했는데요. 어머니는 저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고 최선을(모든 에너지를 쏟아붓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셨어요. 문화대혁명 당시 베이징에서 어머니는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말할까 봐 두려워하셨어요. “그녀는 매일 커다란 서양의 북을 연주하고 있다.” 매일 저녁, 심지어 겨울에도 어머니는 담요를 덮고 밖에서 아무도 제가 치는 소리를 듣지 못하도록 경비를 서곤 하셨죠.


[Zhu Xiao-Mei: Schumann Kinderszenen, Op. 15 - VII. Träumerei]


[주샤오메이 - 슈만 <어린이의 정경> 중 7번 꿈]


Zhu Xiao-Mei: When I tried playing on the piano I heard my mother playing Schumann’s “Träumerei” for me as a child; I broke into tears. Right to the very end of her life she encouraged me to follow my own path.


주샤오메이 : 제가 피아노를 치려고 했을 때, 저는 어렸을 때 어머니가 저를 위해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를 연주하시는 것을 듣고 눈물을 흘렸어요. 어머니는 삶이 끝날 때까지 항상 제 길을 따르도록 격려하셨죠.


Central Conservatory of Music, Beijing


베이징 중앙 음악원


[Bach Sinfonia No. 7 in e, BWV 793]


[바흐 신포니아 7번]


Zhu Xiao-Mei: I grew up in this conservatory of music. I spent more time here than at home. I studied from when I was 10 until I was 30. I had the happiest years of my life here. I could study here together with my teachers and classmates. But I also had the most excruciating years of my life here, with public denunciations and accusations. And often, they were extremely cruel. When I was twelve I was publicly denounced here in front of 400 people, the entire conservatory. I will never forget that my entire life. During the Cultural Revolution there was a stage here, I remember. Hearings were held here. “Yes, yes - right here.” Returning back to the conservatory, my classmate Zuoyin was excited. But I felt overwhelmed. It wasn’t just a place to study, a place for academic discussion and a place to listen to concerts. It was also the location for the Cultural Revolution: for agitation, indoctrination and denunciations. The bittersweet memories all came back; an emotional roller coaster. “Nothing has changed here. It looks just like back then.”


주샤오메이 : 저는 이 음악원에서 성장했는데요. 집보다 여기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죠. 10세부터 30세까지 공부했어요. 이곳에서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세월을 보냈죠. 여기서 선생님, 반 친구들과 함께 공부할 수 있었어요. 그러나 대중의 비판과 비난도 접하면서 제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종종 그들은 극도로 잔인했습니다. 제가 12세였을 때 400명 앞에서 음악원 전체가 공개적으로 비난을 받았습니다. 평생 잊을 수 없어요. 문화대혁명 당시 이곳에 무대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공판도 이곳에서 열렸죠. “그래, 그래, 바로 여기야.” 음악원으로 돌아가자 동급생 주오인은 흥분되었어요. 그러나 저는 압도된 느낌이 들었어요. (저는 그게 편안하지 않았어요.) 단순히 공부만 하는 곳, 학술적인 토론을 하는 곳, 콘서트를 들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거든요. 선동, 세뇌, 비난을 위한 문화대혁명의 장소이기도 했죠. 모든 쓰라린 기억, 감정의 산이었죠. (조금씩 기억이 떠올랐는데,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네요.) “여기서 변한 건 없어. 여전히 예전과 똑같은 모습이야.”


Zuoyin: “Yes, that’s true. Do you still remember... everything that happened here?”


주오인 : “그래, 맞아. 아직도... 여기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기억하니?”


Zhu Xiao-Mei: During the Cultural Revolution, all concerts as well as public denunciations and punishments were held here. It’s hard to believe... I would raise my hands until they hurt, shouting: “Long live Chairman Mao! Long live Chairman Mao!” There are scenes from the Cultural Revolution that I can’t get out of my mind. Society should never forget the importance of culture, music and education. They are the most important criteria for an intact and harmonious society. But how does one ensure that such tragedies do not happen again? Sadly, there is no accountability for the past. No one has the courage to confront this tragedy fully. The period is left as a blank in the history of China.


주샤오메이 : 문화대혁명 동안 모든 콘서트뿐만 아니라 공개적인 비난과 형벌이 이곳에서 열렸어. 믿기 힘들어... 나는 그들이 다칠 때까지 손을 들어 이렇게 외쳤어. “마오 주석 만세! 마오 주석 만세!” 문화대혁명 때 잊히지 않는 장면들이 있어요. 사회는 문화, 음악, 교육의 중요성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온전하고 조화로운 사회를 위한 가장 중요한 기준(전제 조건)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과거는 처리되지(누구도 과거를 책임지지) 않습니다. 아무도 이 비극에 맞서 싸울 용기가 없습니다. 이 기간은 중국의 역사에서 공백으로 남아 있습니다.


Beijing Concert Hall


베이징 콘서트홀


Zhu Xiao-Mei: The concert in Beijing was the toughest challenge for me. I really wanted to play in this hall. It is where I last heard Gu Shengying play. That means a lot to me. “Why is this chair in the way?”


주샤오메이 : 베이징에서의 콘서트는 제게 가장 힘든 도전이었습니다. 이 콘서트홀에서 정말 연주하고 싶었어요. 구쉥잉의 연주를 마지막으로 들었던 곳인데요. 제게 많은 것을 의미합니다. “이 의자는 왜 여기 있죠?”


Michel Mollard: That morning, the rehearsal goes badly. It is very cold in Beijing; the rehearsal is absolutely catastrophic. Beijing is definitely the most difficult concert of all. There is an incredible public: there are young people as well as officials and high ranking officials, the daughters of Deng Xiaoping, those who are called the Red Princes, the intellectuals, her friends and many old friends from the conservatory. It creates stress that is absolutely terrible.


미셸 몰라르 : 그날 아침, 리허설은 엉망이 되었습니다. 베이징은 매우 추운데, 리허설은 절대적으로 치명적입니다. 베이징은 확실히 가장 어려운 콘서트입니다. 엄청난 대중이 있는데,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붉은 왕자”(또는 “왕자의 아들”로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정치, 경제, 군사 권력을 획득한 중국 공산당 최고 지도자의 후손)라 불리는 관리와 고위 관리 및 덩샤오핑의 딸들, 지식인들, 주샤오메이의 친구들, 음악원의 많은 오랜 친구들이 있습니다. 절대적으로 끔찍한 스트레스를 만듭니다.


[Zhu Xiao-Mei: Bach Goldberg Variations, BWV 998 - Variatio 19. a 1 Clav.]


[주샤오메이 -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중 변주 19]


Dan Wesker: To sold out halls, the acclaimed pianist forms her tour in a transformed China. The music school is no longer a haven of the counter-revolution; mastering an instrument, no longer an expression of Western bourgeoisie. On the contrary owning a piano is a status symbol that all strive for. And yet the dark chapter of the cultural revolution still remains unresolved. Fighting against oppression and oblivion, Zhu Xiao-Mei constantly raises this sore point that Chinese society still suffers from today.


댄 웨스커 : 매진된 홀들을 위해 저명한 피아니스트는 변모된 중국 투어를 만듭니다. 음악 학교는 더 이상 반혁명의 피난처가 아닙니다. 더 이상 서구 부르주아 계급의 표현이 아닌, 악기를 마스터하는 곳입니다. 반대로 피아노를 소유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지위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의 어두운 시기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 남아 있죠. 억압과 망각에 맞서 싸우면서 주샤오메이는 오늘날 중국 사회가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이 아픈 점을 끊임없이 제기합니다.


[Zhu Xiao-Mei: Bach Goldberg Variations, BWV 998 - Variatio 25. a 2 Clav. Adagio]


[주샤오메이 -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중 변주 25]


Zhu Xiao-Mei: I am performing to let everyone know that our generation still exists. It had to suffer greatly, not just physical suffering but through the lack of culture. There was no music to listen to and even dictionaries had to be copied by hand! I want to show everyone that my generation hasn’t just disappeared. I want to honor my generation.


주샤오메이 : 저는 우리 세대가 아직 존재한다는 것을 모두에게 알리고자 연주하고 있습니다.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문화의 부재로 큰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들을 음악도 없었고 심지어 사전도 손으로 베껴야만 했죠! 제 세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걸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제 세대를 존경하고 싶어요.


Michel Mollard: I feel something very particular that I have never felt in a concert hall; it's a hall that is just starting to liquify. People who were there made this wonderful comment: "The barriers have fallen." Many describe this concert as a moment of freedom.


미셸 몰라르 : 저는 콘서트홀에서 느껴본 적이 없는 매우 특별한 무언가를 느끼는데, 막 녹아내리기 시작하는 홀입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이렇게 멋진 말을 남겼습니다. “장벽이 무너졌다.” 많은 사람이 이 콘서트를 자유의 순간으로 묘사합니다.


Zhu Xiao-Mei: “I am so happy that I could share this moment with you. The last time I heard a concert in this hall, it was a recital given by Gu Shengying. I still can remember it very clearly; she played Chopin. Even after so many years I think we shouldn’t forget how she opened up a path for us that she couldn’t complete. I am continuing that path for her. Thank you, thank you, thank you!”


주샤오메이 : “지금 이 순간을 여러분과 함께할 수 있어서 매우 행복합니다. 제가 이 홀에서 마지막으로 콘서트를 들은 때는 구쉥잉의 독주회였어요. 저는 아직도 아주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는데, 그녀는 쇼팽을 연주했어요.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녀가 완성하지 못한 길을 우리에게 열어주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녀를 위해 그 길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You played wonderfully!”


“멋진 연주였어요!”


Zhu Xiao-Mei: “You also came!”


주샤오메이 : “너도 왔구나!”


“We haven seen each other for many years!”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서로를 보지 못했어요!”


Zhu Xiao-Mei: “Professor Zhou!” My teacher, Zhou Guangren, also came to the concert. She supported me greatly back then. I was her graduate student in 1980 but I immediately decided to go to America. I feared she would be very disappointed. I never thought she would still support me. However, she came up to me and said: “Xiao-Mei, young people like you should go out and see the world. It’s a good thing!” I have never forgotten this.


주샤오메이 : “저우 교수님!” 제 스승인 저우광렌도 연주회에 오셨어요. 그때 모든 면에서 저를 엄청나게 지원하셨죠. 저는 문화대혁명 이후 1980년에 그분의 대학원생(석사과정)이었지만, 즉시 미국으로 가기로 했어요. 그분이 매우 실망할까 봐 두려웠어요. 그분이 여전히 제 곁에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죠. 그러나 그분은 제게 다가와(저를 격려하며) 이렇게 말했어요. “샤오메이야, 너희 같은 젊은이들은 나가서 세상을 봐야 해. 그게 좋은 거야!” 저는 이것을 잊은 적이 없어요.


[Zhu Xiao-Mei: Bach Goldberg Variations, BWV 998 - Aria]


[주샤오메이 -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중 아리아]


Zhu Xiao-Mei: I always dreamed of visiting Bach’s grave. And when that dream finally came true, I had a greater dream: I wanted to play his masterpiece in front of his grave. This dream was also fulfilled. I am fully content.


주샤오메이 : 저는 항상 바흐의 무덤을 방문하는 것을 꿈꿨습니다. 그리고 그 꿈이 마침내 이루어졌을 때 더 큰 꿈이 생겼는데, 그의 무덤 앞에서 그의 걸작(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하고 싶었어요. 이 꿈도 이루어졌어요. 이제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엄청난 행복이었어요.)


Michel Mollard: In China, when one goes to the grave of his ancestors, one speaks to them aloud. And when Xiao-Mei played the Goldberg Variations at St. Thomas in Leipzig, she had the feeling of talking to Bach this way, just like when she goes to the grave of her parents.


미셸 몰라르 : 중국에서는 조상의 묘에 가면 큰소리로 그들에게 말합니다. 그리고 샤오메이가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 교회에서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했을 때, 그녀는 마치 부모님의 무덤에 갈 때처럼 바흐에게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Zhu Xiao-Mei: All my life I have felt like a puppy whose tail is between her legs. To suddenly become a big star feels uncomfortable. I am a pianist who lacks self-confidence. I never knew it; I never felt pride for myself. That has to do with my upbringing and with the Cultural Revolution that is deeply a part of me. I never see myself as a protagonist. I always play the role of a servant: a servant to music, a servant to the composers, a servant to my students. This is my traditional Chinese upbringing.


주샤오메이 : 평생을 저는 다리 사이에 꼬리가 있는 강아지(일종의 작은 개)처럼 느껴왔습니다. 갑자기 큰 스타가 되는 것은 불편합니다. 저는 자신감이 부족한 피아니스트입니다. 저는 자신감을 전혀 몰랐지만, 저 자신에 대해 자부심을 느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제 성장과 제 안의 깊은 문화대혁명과 관련이 있습니다. 저는 저 자신을 주인공으로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주연을 맡은 제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저는 항상 봉사하는데, 음악의 하인, 작곡가들의 하인, 제 학생들의 하인입니다. 이것은 저의 전통적인 중국 교육입니다.


[Bach Toccata, Adagio & Fugue in C, BWV 564: II. Adagio]


[바흐 토카타, 아다지오, 푸가 중 2악장 아다지오]



메디치 TV 사이트에서 유료로 볼 수 있다. 영어, 독어, 불어를 절충하여 번역했다. 아무런 자막이 없는 부분은 자막 생성 프로그램으로 추출하여 될 수 있으면 최선을 다하여 듣고 받아적은 다음에 외국 분에게 부탁하여 다듬었다.

2022년 9월 23일 금요일

DVD / Maurizio Pollini, De main de maître 2014



https://www.youtube.com/watch?v=kW0ogdrIfdI

https://www.medici.tv/fr/documentaries/maurizio-pollini-de-main-de-maitre-a-musical-profile


대가의 손 (브루노 몽생종 다큐멘터리)

마우리치오 폴리니의 인터뷰를 담은 귀중한 다큐멘터리 영상이 발매된다. 음악가의 진면목을 가장 생생하게 그려내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브루노 몽생종이 제작한 것으로, 1960년 쇼팽 콩쿠르에서부터 그의 음악 동료들, 그의 음악 세계, 그리고 정치적 견해까지 폴리니의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다. 그의 모습을 만나게 되는 극히 드문 영상물이면서도 노 대가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놓쳐서는 안 된다.


마우리치오 폴리니에 대한 영화를 만드는 것에는 여러가지 훌륭한 이유들이 있다. 그는 친절하고 지적이며, 매우 다양한 주제에 박식하지만,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고, 접근하기 어려우며, 그의 별난 콘서트와 매우 드문 인터뷰들을 제외하곤 정보가 거의 없다. 더 중요한 것은 70세가 넘는 그가 처음으로 영화에 찍히는 것을 수락했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장시간에 걸친 인터뷰 장면들을 기반으로, 폴리니와 직접 촬영한 라이브 영상과 그에 대한 기록들을 담는다. (2014년 제10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



[Music]


Maurizio Pollini: The piano is finally a rather neutral instrument. But it has a limitless ability to transform itself. Thus, it can become a singing instrument...


마우리치오 폴리니 : 피아노는 결국 다소 중립적인 악기입니다. 하지만 변신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노래하는 악기가 될 수 있습니다...


[Music]


Maurizio Pollini: To see how this instrument actually reacts, and yields to whatever you want to do, to what you are after, is something quite extraordinary. This is why I still am, so happy to be a pianist.


마우리치오 폴리니 : 이 악기가 실제로 어떻게 반응하고 원하는 것, 무엇을 추구하는지 보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일입니다. 이것은 제가 오늘날에도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 행복한 이유죠.


[Maurizio Pollini: Beethoven Piano Sonata No. 26 in Eb, Op. 81a "Les Adieux": I. Das Lebewohl. Adagio]


[마우리치오 폴리니 -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6번 <고별> 1악장 <고별>]


Who is that boy who can be seen on the canvas behind you? Is that you?


당신 뒤에 있는 캔버스에 보이는 저 소년은 누구인가요? 당신인가요?


Maurizio Pollini: No, no! It's my grandfather's brother. He ran away from home when he was 16, in 1800, joined Garibaldi's army, and took part in the battle of Mentana which Garibaldi led against the Papal States without the help of the Italian State. He died there...


마우리치오 폴리니 : 아니, 아니! 할아버지의 형제입니다. 1800년 16세에 집을 떠나 가리발디의 군대에 들어가 이탈리아 연방의 도움 없이 가리발디가 이끄는 멘타나 전투에서 교황령(1870년까지 교황이 지배한 중부 이탈리아 지역)에 맞서 싸웠어요. 그곳에서 돌아가셨지요...


On the battlefield?


전장에서요?


Maurizio Pollini: Yes, on the battlefield.


마우리치오 폴리니 : 네, 전장에서요.


He looks so much like you!


당신을 많이 닮았군요!


[Music]


Maurizio Pollini: I find it hard to speak about my childhood, for some personal, mysterious reason. In any event, there is no doubt that mine was a family of artists. My father was an architect. He was very active in the modernist movement of Italian architecture in the 30's. My uncle, Fausto Melotti, was an important sculptor. His abstract works, which he created from 1930 to 1970, became very famous. My mother loved music, she sang and played the piano. A real passion for music pervaded the whole family: my father played the violin, my uncle played the piano. For instance, they were keen on Debussy, Ravel, Stravinsky, and rather less keen on the Austro-German trend. They didn't talk about Schönberg, Berg, Webern. I discovered them later on. I took all these things in probably unconsciously. This accounts for my curiosity and interest for modern art which have remained to this day...


마우리치오 폴리니 : 사적인 비밀스러운 이유로 어린 시절에 대해 말하기는 어려워요. 어쨌든 우리가 예술가 집안이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죠. (가족 중에 예술가가 있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아버지는 건축가였어요. 1930년대 이탈리아 건축의 모더니즘 운동에 매우 활발히 참여하셨죠. 외삼촌인 파우스토 멜로티는 유명한 조각가였는데요. 1930~1970년에 만드신 추상 작품들이 매우 유명해졌죠. 어머니는 음악을 사랑했고 노래를 불렀으며 피아노를 치셨죠. 음악에 대한 진정한 열정은 온 가족에게 스며 있었는데(가족 전체에 퍼져 있었는데), 아버지는 바이올린을 연주했고 외삼촌은 피아노를 연주했어요. 예를 들어 그들은 드뷔시, 라벨, 스트라빈스키를 높이 평가했고, 오히려 오스트리아-독일의 풍조에 덜 열광했죠. 그들은 쇤베르크, 베르크, 베베른(신빈악파)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요. 저는 신빈악파를 나중에 발견했는데요.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이 모든 것을 받아들였을 겁니다. 이것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현대 예술에 대한 저의 호기심과 관심을 설명해줍니다...


[Music]


Maurizio Pollini: The musical events that took place in Milan then also played a key role. There were many. For example, all the great pianists came to play in Milan...


마우리치오 폴리니 : 당시 밀라노에서 열린 음악 행사들도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많이 있었는데요. 예를 들어 모든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밀라노에 연주하러 왔죠...


[Artur Rubinstein: Chopin Waltz No. 1 in Eb, Op. 18]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 쇼팽 왈츠 1번]


Maurizio Pollini: Artur Rubinstein came almost every year, Benedetti Michelangeli too, of course, Walter Gieseking, Clara Haskil, Edwin Fischer, Wilhelm Backhaus, Alfred Cortot... And then, conductors. At a Wagner concert, conducted by Toscanini, I was ten, I inched my way to the balcony to listen. I wasn't mature enough to appreciate, really, but that was taking place in Milan.


마우리치오 폴리니 :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은 거의 매년 왔는데, 베네데티 미켈란젤리도 물론이고, 발터 기제킹, 클라라 하스킬, 에트빈 피셔, 빌헬름 박하우스, 알프레드 코르토... 그러고 나서 오케스트라 지휘자들도 왔어요. 10세일 때에는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바그너 콘서트에서 발코니로 가서 들었어요. 진정으로 감상할 만큼 성숙하지 않았지만, 밀라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죠.


[Maurizio Pollini: Beethoven Piano Concerto No. 3 in c, Op. 37: I. Allegro con brio]


[마우리치오 폴리니 -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 1악장]


Maurizio Pollini: Karajan also came, Furtwängler conducted a fantastic #Ring#. I know about it through a recording, because of course I did not attend. There was Mitropoulos whom I heard conduct #Pélleas and Mélisande# by Schönberg and the #Alpine Symphony# by Strauss... I say that to give you an idea of Milan's rather rich musical life.


마우리치오 폴리니 : 카라얀도 왔는데, 푸르트뱅글러가 환상적인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를 지휘했어요. 물론 저는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음반을 통해 알고 있었죠. 거기에서 미트로풀로스가 쇤베르크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알프스 교향곡>을 지휘한 것을 들었는데... 밀라노의 풍요로운 음악적 삶에 대한 생각을 제공하기 위해 그렇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은 밀라노를 지배했던 다소 풍부한 음악적 풍토를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Who decided you were going to play the piano?


누가 당신이 피아노를 칠 것이라고 결정했나요? (당신 자신이요?)


Maurizio Pollini: My parents, for sure. It came very naturally. I started when I was 5 or 6. Obviously, I had some aptitude. I did manage to play in a way, let's say, acceptable a few famous works acceptable, that is, for a young boy, for a budding pianist.


마우리치오 폴리니 : 물론 부모님입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다가왔어요. 5세나 6세에 시작했거든요. 분명히 약간 적성에 맞았어요. 저는 어떤 식으로든 연주할 수 있었는데, 말하자면 몇 가지 유명한 작품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즉 어린 소년이나 신진 피아니스트에게 허용되는 방식으로 연주할 수 있었죠.


[Maurizio Pollini: Chopin Prelude in f#, Op. 28 No. 8]


[마우리치오 폴리니 - 쇼팽 전주곡 8번]


Maurizio Pollini: I did play some small concerts, one, when I was 9, another at 10, then at 12. So at 13, I had around three concerts to my credit. It's odd, you're prompting me to delve into my memory something I never do. I don't really remember these things. It may be strange, but it's all rather vague in my mind.


마우리치오 폴리니 : 제가 9세에 한 번, 10세에 한 번, 12세에 한 번 등 몇 가지 작은 공연을 했어요. 그래서 13세에는 덕분에 세 번의 연주회를 했죠. 이상하게도 당신은 제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것을 제 기억 속으로 파고들라고 부추기고 있군요. 저는 거의 기억나지 않아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낯설지만)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들이죠.


So, your first contact with the instrument was natural? Effortless, with no preparation, and little practice?


그럼 악기와의 첫 만남이 아주 자연스러웠나요? 노력도, 준비도, 연습도 거의 없이 수월했나요?


Maurizio Pollini: Oh no! My first teacher, Carlo Lonati, endeavoured to teach me the rudiments of piano technique. In fact, he just let me play.


마우리치오 폴리니 : 오 아뇨! 제 첫 스승인 카를로 로나티는 제게 피아노 테크닉의 기초를 가르치려고 애쓰셨죠. 사실 그분은 단지 저를 연주하게 놔두셨죠.


[Maurizio Pollini: Chopin Impromptu No. 3 in Gb, Op. 51]


[마우리치오 폴리니 - 쇼팽 즉흥곡 3번]


Maurizio Pollini: He let me play in my own way. Then, Carlo Vidusso made me learn the Chopin #Etudes#, which I performed in public when I was 14. That, I remember very clearly. It was a lot of work: my technique was not sufficiently evolved for these very difficult works. But it helped me build up a more solid technique.


마우리치오 폴리니 : 그분은 제 방식으로 연주하게 해주셨어요. 그러다가 카를로 비두소에게 쇼팽 연습곡을 배우게 되었는데, 제가 14세에 대중 앞에서 연주했던 곡들이었죠. 그건 제가 뚜렷이 기억해요. 많은 작업이었는데, 제 테크닉은 이러한 매우 어려운 작품들을 위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거든요. 그러나 제가 더 견고한 테크닉을 구축(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죠.


[Maurizio Pollini: Chopin Prelude in b flat, Op. 28 No. 16]


[마우리치오 폴리니 - 쇼팽 전주곡 16번]


[Chopin: Andante spianato et Grande Polonaise brillante in Eb, Op. 22]


[쇼팽 <안단테 스피아나토와 화려한 대 폴로네즈>]


#The Chopin Competition is over. The jury has deliberated. Here is the verdict. The 1st Prize goes to an 18 year old, Maurizio Pollini. His performance of Chopin has aroused enthusiasm right from the start. He is the 1st Italian pianist awarded this coveted prize.#


“쇼팽 콩쿠르가 끝났습니다. 심사위원단은 심사숙고했습니다. 여기 판결이 있습니다. 1등상은 18세의 마우리치오 폴리니에게 돌아갑니다. 그의 쇼팽 연주는 시작부터 열광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는 이 탐나는 상을 받은 최초의 이탈리아 피아니스트입니다.”


Maurizio Pollini: In Warsaw, I made the acquaintance of Artur Rubinstein whom I had already heard when he performed in Milan. This time, I came to know him personally. He sat on the jury only for the Finals. He was extraordinarily sympathetic, that was obvious. He gave me a piece of advice, the best I've had in all those years. He asked me to come together with another pianist, Michel Block. It went like a flash: he put his middle finger on my shoulder and said: "By using that kind of weight, I never get tired while playing". He made us feel that really impressive weight.


마우리치오 폴리니 : 바르샤바에서 저는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을 만났는데, 밀라노에서 그의 연주를 이미 들은 적이 있었어요. 이번에는 그를 개인적으로 알게 되었죠. (이번에는 그를 직접 만나보기로 했어요.) 그는 결선에서만 심사위원이었어요. 그는 매우 훌륭했고, 그건 분명했어요. (그는 정말 친절했어요.) 그는 몇 년 동안 제가 받은 최고의 조언을 제게 해주었죠. 그는 제게 또 다른 피아니스트 미셸 블록과 함께 가자고 했어요. 즉석에서 그는 제 어깨에 가운뎃손가락을 올려놓고 이렇게 말했죠. “그 무게를 실어서 연주해도 저는 지치지 않아요.” 그는 우리에게 이 절대적으로 인상적인 무게를 느끼게 했습니다.


The weight...


무게라...


Maurizio Pollini: No, not only of the finger! He managed to transfer through his 3rd finger all the strength of his arm and shoulder, in a perfectly natural way. He said it was the very basis of his technique which allowed him never to get tired, and to produce the glorious sound that was his.


마우리치오 폴리니 : 아니, 손가락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중지를 통해 팔과 어깨의 모든 힘을 완벽하게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전달할 수 있었어요. 지치지 않고 장엄한 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이 그 테크닉의 기초(근간)였다고 합니다.


A great lesson!


좋은 레슨이군요!


Maurizio Pollini: The more I think of it, years later, the more I find it precious. These are things one appreciates more and more with the passing of time.


마우리치오 폴리니 : 생각하면 할수록, 세월이 흐를수록(몇 년이 지나니 더)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돌이켜보면 점점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입니다.


[Maurizio Pollini: Chopin Scherzo No. 3 in c#, Op. 39]


[마우리치오 폴리니 - 쇼팽 스케르초 3번]


Didn't he declare: "Maurizio Pollini plays better than all of us!"


그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나요? “우리 심사위원 중에 누가 마우리치오 폴리니보다 잘 칠 수 있겠는가!”


Maurizio Pollini: That's not quite accurate. Rubinstein only said that I played #technically# better than any member of the jury. I've always thought he said that to sort of tease his colleagues in the jury. It was fun to say that a young chap played technically better than them. I'm sure that was the reason. Thereupon, unbeknownst to me, this Rubinstein's statement was quoted without the "technically". The compliment had become grossly exaggerated...


마우리치오 폴리니 : 정확하진 않아요. 루빈스타인은 제가 심사위원들보다 “기교상으로” 낫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저는 항상 그가 심사위원 동료들을 조롱하는(약간 자극하기 위해 그런) 말을 했다고 생각해왔죠. 젊은 녀석(어린 소년)이 그들보다 기교적으로 더 잘했다고 말하는 게 재밌었어요. 그게 이유였다고 확신해요. 그래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 루빈스타인의 언급은 “기교적으로”가 없이 인용되었죠. 칭찬이 너무 과해져서... (정말 과장된 칭찬이 되어버렸군요...)


#Maurizio Pollini is met in Milan, by journalists, photographers, and by his family. Was it a real ordeal?#


“마우리치오 폴리니는 밀라노에서 기자, 사진작가, 가족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어려운 대회였나요?”


Maurizio Pollini: #Yes, nerve-racking, and very long. The competition lasted 3 weeks.#


마우리치오 폴리니 : “네, 너무 길어서 신경 쓰였어요. 콩쿠르는 3주 동안 진행되었습니다.”


#How many competitors were there?#


“참가자들은 몇 명이었나요?”


Maurizio Pollini: #Close to eighty, I think. The President of the jury, Rubinstein, said you had a colossal talent. He said lots of things... quite exaggerated!#


마우리치오 폴리니 : “80명에 가까웠던 것 같아요. 심사위원장인 루빈스타인은 제게 엄청난 재능이 있다고 말했죠. 말씀이 많으셨는데... 과장이 심하네요!”


#What was the most difficult moment?#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Maurizio Pollini: #Probably the 1st round.#


마우리치오 폴리니 : “아마도(의심의 여지 없이) 1라운드.”


#Is it true you were nervous?#


“긴장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Maurizio Pollini: #I was, indeed! But that's only natural.#


마우리치오 폴리니 : “정말 그랬어요! 하지만 당연한 일이죠.”


#With this prize, your career starts under favourable auspices. Is it true you have many engagements?#


“이 상과 함께 당신의 경력이 좋은 후원하에 시작됩니다. 계약이 많은 게 사실인가요?”


Maurizio Pollini: #True!#


마우리치오 폴리니 : “맞아요!”


#Concerts in Europe?#


“유럽에서의 연주회들?”


Maurizio Pollini: #Concerts in Europe, yes.#


마우리치오 폴리니 : “유럽에서의 연주회들, 맞아요.”


[Maurizio Pollini: Chopin Piano Concerto No. 2 in f, Op. 21: III. Allegro vivace]


[마우리치오 폴리니 -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 3악장]


After the Warsaw Competition, I was faced with a difficult situation. Naturally enough, a competition winner is sought after by many music societies around the world. It's always the case after a competition. And so, I started playing such concerts. But I quickly realised that such an intense concert life was a bit premature for me. I wanted to study more repertoire, I wanted to play Beethoven, Schumann and Brahms, whom I had of course tackled earlier on, but with whom I wanted to go deeper. Well, after Warsaw, everybody was always asking me to play Chopin, which was quite normal actually. It's odd, because today I find being labelled as a Chopin performer is a great honour, the most marvellous thing that can happen to a pianist. But then, the 18 year old chap I was wanted to be involved in many other musical experiences.


마우리치오 폴리니 : 바르샤바 대회가 끝난 후 저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당연히 콩쿠르 우승자는 전 세계의 많은 음악 협회에서 찾고(높은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대회가 끝난 뒤에는 항상 그렇죠. (대회가 끝나면 늘 이런 식이죠.) 그래서 그런 연주회들을 가지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그런 강렬한(치열한) 연주 인생이 제게는 다소 시기상조라는 것을 빨리 깨달았죠. 저는 더 많은 레퍼토리를 공부하고 싶었고, 베토벤, 슈만, 브람스를 연주하고 싶었는데, 물론 이전에 다루었지만, 더 깊이 들어가고(나아가고) 싶었어요. 음, 바르샤바 이후로 모든 사람이 항상 제게 쇼팽을 연주해달라고 부탁했는데, 사실 그건 아주 평범한 것이었죠. 이상한데, 오늘날 쇼팽 연주자(해석자)로 낙인찍힌 것은 큰 영광이며 피아니스트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일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때 18세의 소년은 더 많은 음악적 경험을 하고 싶었어요.


[Arturo Benedetti Michelangeli: Scarlatti Sonata in c, K. 11]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 - 스카를라티 소나타 K. 11]


Maurizio Pollini: So, I cancelled all my concerts for a year and a half, and went to study with Benedetti Michelangeli. I went to see him, first in Bolzano where he resided, then in Arezzo, where he had a villa in which all his pupils lived. I stayed there for a short time.


마우리치오 폴리니 : 그래서 1년 반 동안 모든 콘서트를 취소하고 베네데티 미켈란젤리를 사사하러 갔는데요... 그를 만나러 처음에는 그가 살았던 볼차노에 갔고, 그다음에는 그의 모든 제자가 살았던 별장이 있는 아레초에 갔죠. 저는 그곳에 잠시 머물렀어요.


How were these lessons with Michelangeli?


미켈란젤리의 레슨은 어땠나요?


Maurizio Pollini: I would play, of course, and he would give me some very useful advice. For instance, he suggested some fabulous fingering for the trills. I still use it today. He suggested that I start the #Waldstein Sonata# using the double escapement, #legatissimo#, not from the key, but from beneath the key. Michelangeli used the double escapement from beneath the key to produce as impalpable a sound as possible.


마우리치오 폴리니 : 물론 저는 연주했고, 그는 제게 매우 유용한 조언을 제공했는데요. 예를 들어 그는 트릴에 대한 멋진 운지법을 제안했어요. 지금도 사용하고 있어요. 그는 제가 반복 메커니즘(이중 이탈장치)인 “레가티시모”(극도로 이어서)를 사용하여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1번 <발트슈타인>을 건반이 아닌 건반 아래에서 시작하자고 제안했어요. 미켈란젤리는 건반 아래에서 이중 이탈장치를 사용하여 가능하면 만져지지 않는(최대한 만질 수 없는) 소리를 냈죠.


[Maurizio Pollini: Beethoven Piano Concerto No. 3 in c, Op. 37: I. Allegro con brio]


[마우리치오 폴리니 -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 1악장]


[Music]


Maurizio Pollini: Later on, during the 60s, I pursued a more "measured" activity which allowed me to enlarge my repertoire considerably. I gave my first concerts in America in 1968. From those years also date my first attempts in the field of so called "modern" music: Schönberg, if one can say he is modern, and Bartok. Then came Boulez whose #2nd Sonata# I learnt and performed in 1968 for the first time.


마우리치오 폴리니 : 나중에 1960년대에는 제 레퍼토리를 상당히 확장할 수 있는 보다 “제약된” 활동에 전념했어요. 1968년에는 미국에서 첫 콘서트를 가졌죠. 그 해부터 소위 “현대” 음악 분야에서 제가 처음 시도한 시기이기도 한데, 쇤베르크, 그가 현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리고 버르토크입니다. 그러고 나서 불레즈가 왔고, 그의 2번 소나타를 배웠으며, 1968년에 처음으로 연주했어요.


[Music]


Maurizio Pollini: Little by little, my musical life was getting richer, my repertoire larger, and I gained self-assurance.


마우리치오 폴리니 : 조금씩 제 음악적 삶이 풍요로워지고 레퍼토리가 넓어지며 자신감(확신)이 생겼습니다.


You didn't fear you might vanish by remaining silent for two years?


2년 동안 침묵하다가 사라질까 두렵지 않았나요?


Maurizio Pollini: Was I running the risk of playing too many concerts or of being forgotten by not playing? Both, quite obviously!


마우리치오 폴리니 : 제가 너무 많은 콘서트를 하거나 연주하지 않아 잊힐 위기에 처했던 걸까요? 물론 둘 다 분명히!


[Maurizio Pollini: Prokofiev Piano Concerto No. 3 in C, Op. 26 - III. Allegro, ma non troppo]


[마우리치오 폴리니 - 프로코피에프 피아노 협주곡 3번 3악장]


In fact, your real international career took off during the difficult years of spreading terrorism in Italy. Is there a link between your interest in contemporary music and your political commitment?


사실, 당신의 진정한 국제 경력은 이탈리아에서 테러리즘이 퍼지는 어려운 시기에 시작되었습니다. 현대 음악에 관한 관심과 정치적 헌신 사이에 연관성이 있나요?


Maurizio Pollini: Music is one thing, interest... in political ideas is another thing. These are completely separate things. In the 60s, I was completely neutral politically, I had no interest in politics. How did my interest arise? It dates back to the time of my acquaintance with Luigi Nono. I became politically conscious, which in turn at that time led me to decide somehow to join the Italian Communist Party. I could do that only because the Communist Party condemned the invasion of Prague by the Soviet army, thereby changing and becoming democratic. In that respect, earlier on, though I had no precise political ideas, I've always been intransigent. I could never have sympathised with a party which wouldn't have been democratic, in all respects.


마우리치오 폴리니 : 음악은 관심사이고... 정치적인 생각은 또 다른 것입니다. 완전히 다른 것들이죠. 1960년대에 저는 정치적으로 완전히 중립적이었고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는데요. 제 관심이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루이지 노노와 친분을 쌓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저는 어느 정도 정치적 양심을 얻었고(정치적으로 자각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공산당에 어느 정도 충실하기로 했어요. 제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공산당이 소비에트 군대의 프라하 침공을 규탄했고, 따라서 민주화를 통해 태도를 바꿨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전에는 정확한 정치적 사상이 없었지만, 항상 비타협적이었고, 모든 면에서 민주적이지 않은 정당에 결코 동조할 수 없었습니다.


[Music]


Maurizio Pollini: To be a left-winger at that time in Italy, was a way of protesting against a horrible right wing. Horrible then, and which has remained so, if not worse! In order to define it, one should coin a special adjective.


마우리치오 폴리니 : 그 당시 이탈리아에서 좌익이 된다는 것은 끔찍한 우익에 대항하는 항의의 한 형태였는데요. 그때는 끔찍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죠! 그것을 정의하려면 다른 형용사를 찾아야 합니다.


[Music]


Maurizio Pollini: It was a period of acute confrontation between political leanings. There were rumours of a possible fascist coup, or something similar. The extreme left was violent and one heard talks of a possible right-wing coup.


마우리치오 폴리니 : 정치적 성향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기였어요. 파시스트 쿠데타 또는 이와 유사한 것이 있을 수 있다는 소문이 있었죠. 극좌파는 폭력적이었는데 누군가는 우익 쿠데타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Music]


Maurizio Pollini: There was a bomb attack against a bank in Milan, the slaughter of Banca dell'Agricoltura. A terrorist action still not elucidated, just like the other massacres. I remember, one or two days later walking to the Piazza del Duomo which isn't far from here. There was a crowd of people protesting. I had the clear feeling that fascism wouldn't win, thanks to the strong opposition of public opinion. I found it comforting.


마우리치오 폴리니 : 국립농업은행의 대학살인, 밀라노의 한 은행에 대항한 폭탄 공격이 있었습니다. 다른 학살과 마찬가지로 테러 행위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는데요. 하루나 이틀 뒤에 여기에서 멀지 않은 두오모 광장에 갔던 기억이 납니다. 항의하는 군중이 있었어요. 여론의 거센 반대에 파시즘이 이길 수 없다는 분명한 예감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이것이 저를 안심시켰죠.


[Music]


Did such preoccupations have an effect on your musical activity?


그러한 선입견(우려)이 음악 활동에 영향을 미쳤나요? (걱정거리가 음악 활동으로 이어졌나요?)


Maurizio Pollini: Yes, attempts were made in Italy to organise concerts and meetings in Reggio Emilia and neighbouring villages. I took part in them for a while. Undoubtedly, the idea that music was a right for everyone, was very strong then. This is why all these experiments were made.


마우리치오 폴리니 : 네, 이탈리아에서는 레조 에밀리아(레조넬에밀리아)와 인근 마을들에서 연주회와 분산 회의를 조직하려는 시도가 있었어요. 잠시 참여했죠. 의심할 여지 없이 음악은 모든 사람의 권리라는 생각이 당시에는 매우 강력했어요. 이 모든 실험을 시도한 이유입니다. (그래서 모든 실험이 완료되었습니다.)


[Maurizio Pollini: Debussy Preludes, Book I No. 12 "Ce qu'a vu le vent d'ouest"]


[마우리치오 폴리니 - 드뷔시 전주곡 1집 12번 <서풍이 본 곳>]


Maurizio Pollini: Concerning programmes, we tried to promote the coexistence of the great Classics, the music of Beethoven and of other great authors of the past and that of avant-garde composers such as Stockhausen, Boulez or Nono.


마우리치오 폴리니 : 프로그램과 관련하여 우리는 위대한 클래식, 베토벤과 다른 위대한 과거 저자들의 음악, 그리고 슈톡하우젠, 불레즈, 노노 같은 전위음악 작곡가들의 음악 공존을 도모하고자 노력했습니다.


[Music]


#As encores, Pollini plays pieces by Debussy. Last night at La Scala, he repeated the same concert before an audience of young students, as a gesture of solidarity with the Polish people for the freedom and independence of people.#


“앙코르로 폴리니는 드뷔시의 곡(서풍이 본 곳)을 연주합니다. 어젯밤 라 스칼라에서 그는 폴란드 국민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연대의 표시로 어린 학생들 앞에서 같은 연주회를 반복했습니다.”


Maurizio Pollini: The most remarkable initiative from that time, was that of concerts for workers and students organised by Paolo Grassi at La Scala. Claudio Abbado was there and gave important cycles of concerts. For some years, these concerts took place, they were important, because of the ideals that inspired them, as much as because of their musical quality. Alas, these experiments had finally limited impact. From that point of view, it was something of a let-down. Our ideal had not materialised.


마우리치오 폴리니 : 그때부터 가장 주목할만한 계획은 라 스칼라에서 파올로 그라시가 조직한 노동자들과 학생들을 위한 연주회였어요.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거기에 있었으며 중요한 전곡 연주회들을 제공했죠. 몇 년 동안 이러한 연주회들은 이상을 위해 중요했으며 음악적인 질에 대해 많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불행히도 이러한 실험은 궁극적으로 제한된 영향을 미쳤습니다. (아아, 이 실험에는 속편이 없었어요.) 그런 면에서 보면 아쉬운 부분이었죠. 우리의 이상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Maurizio Pollini: Beethoven Piano Concerto No. 3 in c, Op. 37 - II. Largo]


[마우리치오 폴리니 -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 3악장]


Maurizio Pollini: It was clear that that type of activity couldn't go on in the same way. But one might have hoped it would leave a trace in Italian musical life. Such was not the case, except in a very limited way.


마우리치오 폴리니 : 그런 식으로 활동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것이 이탈리아 음악 생활에 흔적을 남기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매우 제한된 방식을 제외하고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Did you feel you were part of a group together with Claudio Abbado, Maderna or Sciarrino?


클라우디오 아바도, 브루노 마데르나 또는 살바토레 시아리노와 함께 그룹의 일원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나요?


Maurizio Pollini: Yes... but in fact no! Because a "group" means a tight association. Yet, our friendship left open to each one of us the possibility to realise oneself independently from the others. There was undoubtedly a friendly bond between us.


마우리치오 폴리니 : 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요! “그룹”은 긴밀한 연결(관계)을 의미하니까요. 그러나 우리의 우정은 우리 각자에게 다른 사람들과 독립적으로 자신을 실현할 가능성을 열어두었습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우리 사이에는(그러나 틀림없는) 우호적인 유대가 있었죠.


[Maurizio Pollini: Schumann Piano Concerto in a, Op. 54 - I. Allegro affettuoso]


[마우리치오 폴리니 - 슈만 피아노 협주곡 1악장]


Maurizio Pollini: My first encounters with Abbado go back to our earliest years. Abbado is a bit older than I, we were friends, we went together to the Piccolo Teatro to watch Strehler's productions. We made music together. Our musical relationship has remained intact up to now.


마우리치오 폴리니 : 아바도와의 첫 만남은 우리의 초창기(지난 몇 년)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바도는 저보다 약간 나이가 많고, 우리는 친구였으며, 우리는 조르조 스트렐러의 작품을 보기 위해 피콜로 극장에 함께 갔죠. 우리는 함께 음악을 만들었어요. 우리의 음악적 관계는 지금까지 변함이 없었죠.


[Maurizio Pollini: Schumann Piano Concerto in a, Op. 54 - I. Allegro affettuoso]


[마우리치오 폴리니 - 슈만 피아노 협주곡 1악장]


Maurizio Pollini: We still make music together, we have performed the bulk of the repertoire, all the important things, with a mutual understanding... a complicity, between pianist and conductor, conductor and pianist, really extraordinary. Usually, the relationship between a soloist and a conductor is finally limited to only a fraction of time. As a matter of fact, one sometimes manages to combine the conceptions of both by rehearsing straightaway with the orchestra, without preliminary discussions. With Karajan, I never had a piano rehearsal. Same thing with Pierre Boulez... We never rehearsed at the piano.


마우리치오 폴리니 : 우리는 계속해서 음악을 만들고, 많은 레퍼토리, 중요한 모든 것을 상호 이해하면서 연주했는데... 피아니스트와 지휘자, 지휘자와 피아니스트 사이의 관계는 정말 대단합니다. 보통 독주자와 지휘자의 관계는 궁극적으로 매우 짧은 시간에 제한됩니다. 사실 사전 논의(대화) 없이 오케스트라와 곧바로 예행연습하여 서로의 개념(생각)을 결합하기도 합니다. 카라얀과 함께 저는 피아노 리허설을 한 적이 없었어요. 피에르 불레즈도 그렇고... 우리는 피아노 리허설을 한 적이 없었죠.


You played Bartok without rehearsal?


리허설 없이 버르토크를 연주하셨나요?


Maurizio Pollini: We played for the first time Bartok's #1st# and #2nd Concertos# in New York when Boulez was the music director of the New York Philharmonic, without preliminary rehearsal at the piano, but straightaway with the orchestra, unless I forgot. But no! I would remember!


마우리치오 폴리니 : 불레즈가 뉴욕 필하모닉의 음악 감독(상임 지휘자)이었을 때 우리는 뉴욕에서 처음으로 버르토크의 피아노 협주곡 1번과 2번을 사전 피아노 리허설 없이 오케스트라와 바로 협연했어요. 하지만 아니에요! 전 기억해요!


[Music]


I know that you travel with your own piano, your concert instrument.


저는 당신이 자신의 피아노, 연주회용 악기를 가지고 여행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Maurizio Pollini: Yes, it's a piano I bought about two years ago. I almost always play on that instrument, which fits my requirements. It combines two elements which, for me are of utmost importance. Originally, the piano was not designed for concerts in venues sitting 2 or 3000 people, but to fill the sound space of small halls. So that in order to make sure that the works really reach out to the listeners, it is necessary to fill the hall with the sound of the instrument. The power of the instrument is therefore essential, together with something even more important: its sound quality. One should have a piano meeting all these requirements, which would adjust to the characteristics of each composer. One should have an instrument for each composer! It's obviously impossible! The slightest variant achieved by the tuner brings to the sound a variety of harmonic shades. Each concert has its own requirements: the venues are different, people change, I change, Fabbrini and programmes change too. Things are never identical.


마우리치오 폴리니 : 네, 약 2년 전에 산 피아노입니다. 저는 거의 항상 제 요구 사항에 맞는 그 악기로 연주해요. 제게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를 조화롭게 결합하거든요. 원래 피아노는 2000명 또는 3000명이 앉을 수 있는 공연장의 콘서트를 위해 설계된 것이 아니라 작은 홀의 사운드 공간을 채우기 위해 설계되었습니다. 그래서 작품들이 청중에게 진정으로 닿기 위해서는 홀을 악기 소리로 채워야 합니다. 따라서 악기의 힘은 필수적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음질이 수반됩니다. 이러한 모든 요구 사항을 충족하고 각 작곡가의 특성에 적응할 수 있는 피아노가 있어야 하죠. 각 작곡가를 위한 악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분명히 불가능합니다! 조율사에 의해 달성되는 가장 작은 변형은 사운드에 다양한 화성적 음색을 제공합니다. 각 콘서트에는 다음과 같은 자체 요구 사항이 있는데, 공연장들이 다르고, 사람들이 바뀌고, 저도 바뀌며, 파브리니 스타인웨이 피아노와 프로그램들도 바뀌죠. 상황이 절대 같지 않아요.


If I understand correctly, the brightness is alright, but slightly below?


제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밝기가 괜찮지만, 약간 아래인가요?


Maurizio Pollini: I want a round sound, we're almost there, but... Not quite. Brightness and substance are not the same thing, the substance can be made better, provided the roundness remains. The tuning is somewhat altered.


마우리치오 폴리니 : 저는 둥근(멋진) 소리를 원하는데, 거의 다 왔지만... 완전한 건 아니네요. 명도와 물질은 같은 것이 아니며, 원형이 남아 있다면 물질을 더 좋게 만들 수 있어요. (밝기와 내용은 같지 않아요. 내용은 전체가 남아 있는 한 더 좋아질 수 있어요.) 조율이 약간 변경되었군요. (합의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군요.)


It has to do with transportation...


수송과 관련이 있군요...


Maurizio Pollini: During the night, the piano... It will stay here.


마우리치오 폴리니 : 밤이 되면 피아노는... 여기에 머물 것입니다.


Tonight, we'll put it on the side. And tomorrow, it will stay there all the time.


오늘 밤, 우리는 피아노를 옆으로 치울 것입니다. 그리고 내일, 항상 거기에 머물 것입니다.


Maurizio Pollini: The contact with the instrument and the public is always something quite emotional. One changes because there's a musical emotion and because of the public. Acoustically, things are altered because of the presence of the public. One is not totally sure about what's going to happen.


마우리치오 폴리니 : 악기와 대중과의 접촉은 항상 상당히 감정적입니다. 음악적 감정이 있고 대중이 있으므로 바뀝니다. 음향적으로는 대중의 존재로 인해 상황이 변경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완전히 확신할 수 없어요.


[Music]


Maurizio Pollini: I've always stuck to a basic principle concerning my choice of repertoire, which isn't particularly large, many pianists have a repertoire much larger than mine. My decision to include a piece in my repertoire is based on the absolute certainty that I will never grow weary of the works I've selected.


마우리치오 폴리니 : 저는 항상 레퍼토리 선택에 관한 기본 원칙을 고수했는데, 특별히 많지는 않아요. 많은 피아니스트가 저보다 훨씬 더 방대한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 레퍼토리에 곡 하나를 포함하려는 결정은 제가 선택한 작품들에 절대 질리지 않을 것이라는 절대적인 확신에 근거합니다.


[Maurizio Pollini: Debussy Preludes, Book II No. 6 General Lavine - eccentric]


[마우리치오 폴리니 - 드뷔시 전주곡 2권 6번 <괴짜 라빈 장군>]


Maurizio Pollini: A pianist has in his repertoire works he will play again and again in various circumstances and cities. He has to learn and relearn them, he must have with them a special and sustained connection. I may not have such a connection with pieces that don't feature in my repertoire and which are beautifully played by others, but towards which I don't feel that necessity of having a special rapport, implying a searching, scrupulous and repeated study. I therefore stick to the idea of playing only things I know for sure I will never grow weary of. Consequently, since I only select works which I will never find tiresome, there are quite a few missing in my repertoire.


마우리치오 폴리니 : 피아니스트는 자신의 레퍼토리에 다양한 상황과 도시에서 반복하여 연주할 작품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배우고 다시 익혀야 하며, 그것들과 특별하고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제 레퍼토리에 포함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아름답게 연주하는 곡들과 저는 그러한 연결이 없을 수도 있지만, 조사하여 세심하고 반복적인 연구를 의미하는 특별한 교감을 가질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요. 그러므로 저는 제가 절대 질리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들만 연주한다는 생각을 고수합니다. 그래서 질리지 않을 작품들만 고르다 보니 제 레퍼토리에 빠진 작품이 꽤 많아요.


Yes, quite a few. Could you make out a list of them?


네, 꽤 많군요. 그것들을 나열해주실 수 있나요?


Maurizio Pollini: No way!


마우리치오 폴리니 : 안 돼요!


There is neither Spanish music, nor Scarlatti...


스페인 음악도 없고, 스카를라티도 없고...


Maurizio Pollini: I find Scarlatti a composer of genius, like Ravel whom I also seldom play. There are really a lot of marvellous pieces which I never played, much to my regret.


마우리치오 폴리니 : 스카를라티는 제가 거의 연주하지 않는 라벨처럼 천재라고 생각하는 작곡가입니다. 제가 한 번도 연주하지 않은 놀라운 곡들이 정말 많이 있는데, 그게 되게 아쉽군요.


[Maurizio Pollini: Beethoven Sonata No. 27 in e, Op. 90 - I. Mit Lebhaftigkeit und durchaus mit Empfindung und Ausdruck]


[마우리치오 폴리니 - 베토벤 소나타 27번 1악장]


Maurizio Pollini: So this is a choice which leaves behind works that I love listening to played by others. However I make the most rigorous choice: it's something I have to defend in the first person.


마우리치오 폴리니 : 그래서 이것은 다른 사람들의 연주를 듣고 싶은 작품들을 남기는 선택입니다. 그러나 저는 가장 엄격한 선택을 하는데, 제가 1인칭으로 방어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In a way, you are a kind of missionary?


어떻게 보면 당신은 전도사인가요?


Maurizio Pollini: No, no, please!


마우리치오 폴리니 : 아니, 아니, 제발!


A pioneer? A missionary?


개척자? 전도사?


Maurizio Pollini: Absolutely not! I do things for my own pleasure, #basta# !


마우리치오 폴리니 : 절대 아닙니다! (당연히 아니죠!) 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재미로) 모든 것을 해요, 이제 충분해요!


[Maurizio Pollini: Beethoven Sonata No. 27 in e, Op. 90 - II. Nicht zu geschwind und sehr singbar vorgetragen]


[마우리치오 폴리니 - 베토벤 소나타 27번 2악장]



유튜브에서도 전체를 볼 수 있다.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를 절충하여 번역했다. 실제로 DVD에서 지원되는 다른 외국어에는 독일어, 중국어, 한국어, 일본어도 있다.

2022년 9월 19일 월요일

DVD / Leonard Bernstein - Reflections 1978



https://www.youtube.com/watch?v=lPJyIAW8cE0

https://www.medici.tv/en/documentaries/leonard-bernstein-reflections


▶ 20세기 후반의 전방위 음악인 레너드 번스타인을 돌이켜 생각한다!

레니란 애칭으로 불리며 널리 사랑받았던 남자! 양키라는 비아냥거림을 받으면서도 유럽 악단까지 평정한 유대계 미국인! 바로 레너드 번스타인(1918~1990)이다. 번스타인은 작곡가로서, 지휘자로서, 작가로서, 또 음악해설가로서 모조리 대성공을 거둔 천재였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에서 고전적 명작을 내놓는가 하면 대담하고도 영적인 질문을 던진 정통 관현악곡으로, 열정과 통찰력이 돋보이는 지휘 솜씨로 20세기 음악계의 중심에 있었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번스타인은 보스턴에서 성장한 어린 시절, 하버드 대학과 커티스 음악원에서 보낸 음악적 학습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프리츠 라이너, 드미트리 미트로풀로스, 세르게이 쿠세비츠키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뉴욕 필하모닉과 함께 교육용 연주회를 진행하는 장면, 미국 문화의 상징적 존재로서 마치 음악 대사처럼 활동한 모습, 작곡에 대한 태도와 미국 음악에 관한 통찰까지도 엿볼 수 있다. 보너스로 1976년 파리의 샹젤리제 극장에서 다리우스 미요의 발레 음악 <지붕의의 소>를 덥수룩하니 온통 수염을 기른 채 지휘하는 모습이 실렸다.


Special Features

Darius Milhaud : Le Boeuf sur le toit - Ballet, Op. 58

A unique slide show of photos


레너드 번스타인 - 돌아보기

An exceptional documentary on one of the greatest artists of the 20th century


Leonard Bernstein: El motor natural que me da la energía para componer es la necesidad de comunicarme con el mayor número de gente posible, porque lo que más me gusta del mundo y de la vida son las personas. Me gustan tanto como la música, si no más. Me encantan las personas y tengo la obsesión de compartir con ellas lo que siento, lo que sé y lo que pienso.


레너드 번스타인 : 작곡할 수 있는 에너지를 제게 주는 타고난 원동력은 최대한 많은 사람과 소통하고 싶은 욕구입니다. 제가 세상과 인생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상이 사람들이기 때문이죠. 그 이상은 아니더라도 음악만큼 좋아해요. 저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제가 느끼고 알고 생각하는 것을 그들과 공유하는 데에 사로잡혀요.


En el vocabulario de nuestra época, el nombre de Leonard Bernstein significa música. Compositor, director de orquesta, pianista, profesor, autor. La variedad de sus talentos y actividades es extraordinaria. Compone tanto como para una sala de conciertos como para Broadway. Ha escrito sinfonías, obras corales, música para el cine, ballet, ópera y teatro.


우리 시대의 어휘에서 레너드 번스타인의 이름은 음악을 의미합니다. 작곡가, 지휘자, 피아니스트, 교육자, 저자. 그의 재능과 활동은 특히 다양합니다. 그는 콘서트홀과 브로드웨이를 위해 작곡합니다. 그는 교향곡, 합창곡, 영화 음악, 발레, 오페라, 연극을 작곡했습니다.


Leonard Bernstein: 42. Tres ¡y...!


레너드 번스타인 : 42. 셋 그리고...!


Su compromiso con la música es total. Su deseo de comunicar ha hecho llegar la alegría de la música a millones de personas. De la tarima al piano, de su máquina a los estudios de televisión, su energía está en continuo movimiento.


음악에 대한 그의 헌신은 총체적입니다. 의사소통에 대한 그의 열망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음악의 기쁨을 가져다주었죠. 무대에서 피아노까지, 기계에서 텔레비전 스튜디오에 이르기까지, 그의 에너지는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Music]


Leonard Bernstein: ¡Genial! ¡Bravo! Un ensayo excelente. Me ha encantado. Habéis tocado muy bien. Gracias. ¡Esto es un ensayo!


레너드 번스타인 : 시원해요! 브라보! 전 그걸 사랑했어요. 아주 잘 연주했어요. 감사합니다. 이건 테스트입니다!


[Music]


En el Carnegie Hall de Nueva York, el 14 de noviembre de 1943, Leonard Bernstein irrumpió en la escena musical. Acababa de ser nombrado, a los 25, director adjunto de la La Orquesta Filarmónica de Nueva York.


1943년 11월 14일, 뉴욕 카네기 홀에서 레너드 번스타인은 음악계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는 25세에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부지휘자로 임명되었습니다.


Leonard Bernstein: En ese trabajo, la idea era estar siempre preparado en caso de que el director, es decir, el de verdad, en este caso, Rodzinski o un director invitado, estuviesen indispuestos. Pero en la historia de la Filarmónica todos recuerdan que ni un solo director se ha puesto enfermo. Los directores adjuntos se quedaban ahí, amargándose cada vez más, frustrados. Se sabían todas las partituras, siempre estaban listos para dirigir. Con sus fracs guardados en el camerino, preparados para intervenir en el último momento, pero jamás se les dio la oportunidad. No hacía ni dos meses que yo estaba trabajando de esto. Era el 14 de noviembre de 1943. Jamás lo olvidaré. Aquel domingo, a las 9 de la mañana, sonó el teléfono. Bruno Zurato estaba al otro lado de la línea y me dijo: ''Ya está.'' Esta tarde, a las 15h, tienes que dirigir. No hay tiempo para ensayar. Bruno Walter está enfermo con gripe y es imposible reunir antes a la orquesta. Te presentarás a las 14:45 en los bastidores de Carnegie Hall para dirigir esta tarde... Y ahí estaba yo entre bastidores, temblando, escuchando a Bruno Zurato que había subido al escenario para dirigirse al público y darles la mala noticia de que no escucharían a Bruno Walter, A lo que mascullaron y que escucharían a un joven director llamado Leonard Bernstein. Y eso es lo último que recuerdo hasta el final del concierto cuando vi a todo el público en pie, aplaudiendo y gritando. Pero desde el momento en que salí, hasta el final del concierto, no recuerdo nada. Lo siguiente que recuerdo es a mi madre y a mi padre y a mi madre y a mi padre entrando al camerino. Mi padre resplandecía por primera vez en su vida. Mi padre estaba perplejo, no entendía qué había pasado, porque él siempre había estado en contra de que yo fuera músico. ''¿A dónde te llevará?'' ¿Pasarás toda tu vida tocando en el vestíbulo de un hotel rodeado de palmeras? ''¿Tocando a Cole Porter?'' Su pensamiento era el del músico del gueto judío ruso del que provino y en el que vivió hasta los 16 años. Un músico estaba entre lo más bajo. Era menos que nada. Un músico era un saltimbanqui que iba de boda en boda a funerales y a Bar Mitzvás tocando el violín, o lo que sea que tocara, y le lanzaban un cópec de vez en cuando o le daban un plato de sopa. Era un poco mejor que un mendigo, pero era una de las categorías más bajas de la raza humana. Para él era muy difícil hacerse a la idea de que existía una especie de mundo musical en el que uno podía alcanzar el éxito. Le interrumpían y decía: ''Quiero rezar...'' ¡Demasiado corto! Ni siquiera supe, hasta los 14 años, que existían los conciertos y que se podía asistir a ellos. Que existía una vida musical, que había músicos y una comunidad de músicos, que había amantes de la música que se tomaban todo esto muy en serio. No había músicos en mi familia. Era mi padre el que estaba allí perplejo, atónito, estupefacto porque acababa de ver cuánta gente podía albergar aquel lugar, acababa de ver a gente en pie ovacionando a su pequeño Lenny que acababa de dirigir el concierto. Y, de repente, comprendió que todo era posible. Y aquel fue un gran momento de perdón y de profunda emoción.


레너드 번스타인 : 지휘자, 즉 실제 지휘자, 이 경우에는 로진스키나 객원 지휘자가 아플 경우를 대비해 항상 준비하는 것이 아이디어였습니다. 그러나 필하모닉의 역사에서 모든 사람은 단 한 명의 지휘자도 아프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부지휘자들은 그곳에 서서 점점 괴로워하고 좌절했죠. 그들은 모든 악보를 알고 있었고 항상 지휘할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요. 연미복을 탈의실에 보관한 채 마지막 순간에 개입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죠. 저는 두 달 동안 직장에 있지도 않았어요. 1943년 11월 14일이었어요. 저는 잊지 않을 거예요. 그날 일요일 아침 9시에 전화벨이 울렸죠. 전화를 건 브루노 주라토는 제게 말했어요. “그가 나오지 못해요.” 오늘 오후 3시에 이끌어야 합니다. 예행연습할 시간이 없어요. 브루노 발터가 독감에 걸려 미리 오케스트라를 모으는 것이 불가능하죠. 오늘 오후 2시 45분 카네기 홀 무대 뒤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무대 뒤에서 저는 브루노 주라토의 말을 들으면서 온몸을 떨고 있었는데, 그는 무대 위로 올라와서 청중에게 말하고 모두가 신음하는 브루노 발터가 아닌 레너드 번스타인이라는 젊은 지휘자가 될 것이라는 불쾌한 소식을 전했죠. 그제야 저는 홀 전체가 얼마나 환호하고 분노했는지 알아차렸는데, 제가 기억하는 마지막입니다. 하지만 떠나는 순간부터 콘서트가 끝날 때까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그다음으로 기억나는 것은 부모님이 탈의실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상기되셨는데요. 제가 음악가가 되는 것을 항상 반대하셨기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하셨죠. “어디로 갈까?” 야자수로 둘러싸인 호텔 로비에서 평생을 보낼까요? “콜 포터를 건드려?” 아버지의 생각은 자신이 16세까지 살았던 러시아 유대계 게토의 음악가에 대한 것이었죠. 음악가는 최하위권에 속했는데요.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적었죠. 음악가는 결혼식에서 결혼식, 장례식, 바르 미츠바(유대교에서 남자의 경우 13세, 여자의 경우 12세가 되어 성년의례를 치른 사람)에 이르기까지 바이올린이나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악기로 연주하는 산기슭에 있었고, 그들은 음악가에게 코펙 동전(소련의 화폐 단위로 1/100루블)을 던지거나 수프 한 그릇을 주었죠. 거지보다는 조금 나았지만, 인류 최하위 계급이었죠. 자신이 성공할 수 있는 일종의 음악적 세계가 있다는 생각에 익숙해지는 것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그를 가로막고 이렇게 말했죠. “기도하고 싶어요...” 너무 짧아요! 저는 14세가 될 때까지 연주회가 있고, 그 연주회들에 참석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죠. 음악 생활이 있었고, 음악가와 음악가 공동체가 있었으며, 이 모든 것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음악 애호가들이 있었죠. 제 가족 중에는 음악가들이 없었어요. 아버지는 그 자리에 얼마나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지 보셨고, 방금 콘서트를 지휘한 그의 어린 레니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들을 보았기 때문에 당황하고, 기절하고, 멍하게 계셨죠. 그리고 갑자기 아버지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했어요. 그리고 그것은 용서와 깊은 감정의 위대한 순간이었습니다.


Leonard Bernstein nació en 1918 en Lawrence, Massachusetts. Sus padres eran inmigrantes rusos. Su padre esperaba que siguiera con el negocio familiar. Años después dijo: ''¿Cómo iba yo a saber que acabaría siendo Leonard Bernstein?'' Después de su debut histórico en Carnegie Hall, el ascenso de Leonard Bernstein a la fama fue todo un fenómeno. Se hizo famoso del día a la mañana. La fama le dio oportunidades casi ilimitadas para su energía creativa.


레너드 번스타인은 1918년 매사추세츠 주 로렌스 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님은 러시아 이민자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가족 사업을 계속하기를 기대했습니다. 몇 년 후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결국 레너드 번스타인이 될 것을 내가 어찌 알았을꼬?” 역사적인 카네기 홀 데뷔 이후, 레너드 번스타인의 명성 상승은 현상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하룻밤 사이에 유명해졌습니다. 명성은 그에게 창조적 에너지에 대한 거의 무한한 기회를 주었습니다.


Leonard Bernstein: Deduje una cosa curiosa aquí, en el Carnegie Hall, que resultaba del suceso, del gran suceso acaecido en 1943: No solo fue un concierto para los 2000 espectadores en esta sala, si no que también lo echaron por la radio. Ya lo he dicho antes, pero se me ocurre bajo otra luz porque, en cierto sentido, fue profético que mi debut como director estuviese ligado a un medio eléctronico. El medio era la radio. Porque eso era tocar en una de las muchas formas que han tenido un papel muy importante en mi vida. No fue realmente hasta 1954, cuando empecé en la televisión, que me di cuenta del inmenso poder que ejercen los medios de comunicación en la música.


레너드 번스타인 : 저는 여기 카네기 홀에서 1943년 일어난 위대한 사건의 결과로 흥미로운 사실을 추론했는데, 이 홀에 모인 2000명의 관객을 위한 콘서트였을 뿐만 아니라 라디오로도 중계되었죠. 전에도 말했지만, 제가 지휘로 데뷔한 작품이 전자 매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예언적이기 때문에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매체는 라디오였는데요. 제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많은 방법의 하나로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1954년이 되어서야 텔레비전에 출연하기 시작하면서 미디어가 음악에 미치는 엄청난 힘을 깨달았어요.


[Music]


Leonard Bernstein fue todo un éxito inmediato en la televisión. Su combinación de inteligencia e ingenio asentaron su reputación como mejor portavoz elocuente de la música.


레너드 번스타인은 텔레비전에서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었는데요. 그의 식견과 재치의 결합은 음악의 가장 유창한 대변인으로서 그의 명성을 확립했죠.


Leonard Bernstein: Ya lo ven. No me necesitan. Lo hacen perfectamente bien ellos solos. Así qué, ¿para qué necesitan un director de orquesta? Me di cuenta de que, aparte de compartir lo que pensaba y sentía sobre todo esto, sobre Beethoven, sobre la música del proceso creativo en sí con millones de personas, cara a cara, frente a frente, también podía aprovechar el apoyo visual, algo totalmente nuevo. Por ejemplo, teníamos la primera página de la partitura de la 5ª de Beethoven pintada en blanco y negro sobre el suelo. Teníamos músicos sobre cada una de las líneas que les correspondían: Un chelista en la línea del chelo, un clarinetista sobre la del clarinete y así. Luego, hice a un lado a aquellos a quienes Beethoven hizo un lado en su propía línea porque la sinfonía nº.5 empieza solo con cuerda y clarinetes, así que ni flautas, ni oboes, ni cornos, ni trompetas. Se dejaba solo a los músicos que debían tocar. Esto impresiona mucho a los espectadores porque tenía una connotación visual y corroboraba lo que yo decía y lo recibían por los oídos. Entonces comprendí que mi antiguo instinto de profesor, heredado de mi padre y de todos mis profesores, que me enseñaron a enseñar, todo este instinto casi rabínico por enseñar, explicar, formular, encontró de repente un paraíso en el mundo electrónico de la televisión.


레너드 번스타인 : 당신은 이미 알 수 있는데요. 그들은 제가 필요하지 않아요. 그들은 스스로 완벽하게 잘해요. 그렇다면 왜 지휘자가 필요할까요? 저는 이 모든 것에 대해, 베토벤에 대해, 수백만 명의 사람들과 창작 과정 자체의 음악에 대해, 얼굴을 맞대고, 얼굴을 맞대고 제가 생각하고 느낀 것을 공유하는 것 외에도 시각적 지원, 즉 완전히 새로운 것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어요. 예를 들면 우리는 베토벤 교향곡 5번 악보의 첫 페이지를 바닥에 흑백으로 칠했는데요. 우리는 첼로 라인에는 첼리스트, 클라리넷 라인에는 클라리네티스트 등등 해당하는 각각의 라인에 음악가들을 배치했어요. 그런 다음 교향곡 5번은 현악기와 클라리넷으로 시작하고 플루트, 오보에, 호른, 트럼펫이 없으므로 베토벤이 자신의 라인에서 무시했던 것들을 무시했죠. 연주해야 하는 음악가들만 남았죠. 이것은 시각적인 함축을 지니고 있고 제가 말한 것과 그들이 귀로 접수한 것을 확증하기 때문에 시청자들에게 많은 인상을 줍니다. 그러고 나서 저는 아버지 그리고 교수법을 가르쳐주신 모든 선생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교육자로서의 오래된 본능, 가르치고 설명하고 공식화하려는 이 모든 거의 랍비 같은 본능이 갑자기 텔레비전의 전자 세계에서 낙원을 찾았다는 것을 이해했죠.


El innovador programa Omnibus de mediados de los 50 fue seguido del Young People's Concerts. Programas nacionales que Bernstein dirigió durante más de una década. Ningún otro programa ha enriquecido tanto la vida musical de tantos jóvenes norteamericanos.


1950년대 중반의 획기적인 옴니버스 프로그램에 이어 <청소년 음악회>가 이어졌습니다. 번스타인이 10년 이상 지휘한 국가 프로그램이었죠. 다른 어떤 프로그램도 그렇게 많은 젊은 미국인의 음악적 삶을 풍요롭게 하지 못했습니다.


Leonard Bernstein: Cuando asumí la dirección de la Filarmónica de Nueva York en 1958, unos años más tarde puse la condición de que Young People's Concerts figurara con frecuencia en el programa de la Filarmónica y que se televisara.


레너드 번스타인 : 1958년에 뉴욕 필하모닉 지휘자가 되었을 때, 몇 년 후 저는 <청소년 음악회>가 필하모닉 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하여 텔레비전으로 방영되는 것을 조건으로 했습니다.


Con todos ustedes, el señor Bernstein.


여러분 모두와 함께, 번스타인 씨.


Leonard Bernstein: Creo que estoy más orgulloso de los cincuenta de Young People's Concerts que de casi todo lo que he hecho como profesor. Bienvenidos a Philharmonic Hall. Puede que les parezca raro que yo abra esta nueva temporada de Young People's Concerts hablándoles sobre la enseñanza. Después de todo, ¿no están estos programas consagrados a la música? ¿Y qué tienen que ver los profesores con la música? La respuesta es: Todo.


레너드 번스타인 : 저는 제가 교육자로서 한 모든 것보다 50회의 <청소년 음악회>가 더 자랑스러워요. 필하모닉 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제가 가르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이번 <청소년 음악회>의 새 시즌을 여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 이 쇼는 음악에 전념하지 않나요? 그리고 교육자들은 음악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답은 다음과 같은데, 모든 것입니다.


[Music]


La propia educación de Bernstein lo puso en contacto con algunos de lo mejores músicos de su tiempo. En la universidad de Harvard, estudió composición con Walter Piston y con Edward Burlingame Hill. Después de graduarse, fue a Nueva York para convertirse en músico. Sin embargo, los tres primeros meses fueron toda una decepción.


번스타인 자신의 교육은 그를 당대의 가장 위대한 음악가들과 접촉하게 했습니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그는 월터 피스턴과 에드워드 벌린게임 힐에게서 작곡을 배웠습니다. 졸업 후 그는 음악가가 되기 위해 뉴욕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처음 3개월은 완전히 낙담했죠.


Leonard Bernstein: Tenía 21 años, me había graduado en Harvard y no encontraba trabajo. Era muy deprimente. Me sentía un poco fracasado. Fue uno de los peores momentos de mi vida.


레너드 번스타인 : 21세로 하버드를 졸업했지만,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어요. 매우 우울했죠. 실패를 좀 느꼈는데요. 제 인생의 최악의 순간 중 하나였어요.


Aquel año, sin embargo, Bernstein conocería a tres hombres que determinarían el devenir de su carrera. El director griego Dimitri Mitrópoulos estuvo en Nueva York aquel verano y Bernstein le pidió consejo.


그러나 그해 번스타인은 자신의 경력의 미래를 결정할 세 명의 남자를 만났을 것입니다. 그리스 지휘자인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가 그해 여름 뉴욕에 있었는데, 번스타인이 조언을 구했죠.


Leonard Bernstein: Quedé con Mitrópoulos en el hotel Biltmore. ''¿Qué debo hacer?'' le pregunté. A lo que me respondió: ''Debes ser director de orquesta''. ''¡¿Director?! ¿Yo?'' Para mí, un director era la minúscula silueta que solía ver desde el segundo palco de la Symphony Hall durante mi adolescencia. Una pequeña silueta apenas visible desde lejos que era tan sofisticada, inaccesible y especial, dirigiendo a una centena de músicos. Jamás hubiese pensado que yo podría hacer algo así. Me dijo que debía ser director y le dije:

- ''Vale, pero, ¿cómo lo hago?'' 

- ''Estudiando''.


레너드 번스타인 : 저는 빌트모어 호텔에서 미트로풀로스를 만났습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저는 그에게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죠. “당신은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했죠. “지휘자?! 제가요?” 제게 지휘자는 청소년 시절 심포니 홀 2층에서 보았던 작은 형상이었죠. 멀리서 보기 힘든 조그마한 실루엣, 그토록 정교하고 다가갈 수 없는 특별함으로 100명의 단원을 지휘하고 있었죠. 제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어요. 그는 제게 지휘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고 저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죠. “알겠어요, 하지만 어떻게 하죠?” 그러자 그가 말했어요. “공부해야죠.”


Fritz Reiner, profesor de dirección en el Instituto Curtis de Filadelfia, aceptó hacerle una audición a Bernstein.


필라델피아 커티스 음대의 지휘과 교수인 프리츠 라이너는 번스타인 오디션에 동의했습니다.


Leonard Bernstein: Me encontré con un hombre robusto y arisco llamado Fritz Reiner, que gruñió y profirió un ''hum...'' Sacó una partitura enorme, la colocó sobre el piano, la abrió por la mitad y no me dejó ver el título. Me dijo: ''¿Puedes tocarla al piano?'' ''Puedo intentarlo''. Y eso hice. Resultó ser la Obertura del festival académico de Brahms. Entonces ni siquiera la conocía, pero aun así la toqué. La repenticé bien, un poco forte entonces. Le impresionó que yo pudiera tocar aquello. Me admitió en su clase. En la primavera de 1940, leí en la prensa que que Serguéi Kusevitski, el director de la Orquesta de Boston, iba a fundar en Los Berkshires una escuela llamada Tanglewood en la que él enseñaría dirección.


레너드 번스타인 : 저는 프리츠 라이너라는 통통한 무뚝뚝한 남자를 만났는데, 그는 투덜거리며 이런 소리를 냈죠. “흠...” 그는 커다란 악보를 꺼내 피아노 위에 올려놓고 가운데를 펼쳐서 제목을 보지 못하게 했어요. 그는 제게 다음과 같이 말했어요. “피아노로 연주할 수 있나?” 그러자 저는 이렇게 말했죠. “시도할 수 있어요.” 그러고 나서 그렇게 했죠. 그 곡은 브람스의 <대학 축전 서곡>으로 밝혀졌어요. 그 곡을 잘 몰랐지만, 여전히 연주했어요. 잘 반복했더니 조금씩 강해졌죠. 그는 제가 그 곡을 건반으로 칠 수 있다는 것에 감동했죠. 그는 저를 제자로 받아들였어요. 1940년 봄, 언론에서 보스턴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인 세르게이 쿠세비츠키가 버크셔에 탱글우드라는 학교를 설립하여 지휘를 가르칠 예정이라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Con cartas de recomendación de Mitrópoulos y de Reiner, Bernstein se dirigió a Tanglewood.


미트로풀로스와 라이너의 추천서를 가지고 번스타인은 탱글우드로 향했습니다.


Leonard Bernstein: Ahí me senté, en presencia del gran Kusevitski, temblando y pálido. De repente Kusevitski me dijo: ''Claro que puedes venir a mi clase''. Así sin más. Aquello me impactó, ¡pero de buena manera! Aquel verano estudié con él en Tanglewood. Enseguida nos hicimos amigos, casi como padre e hijo. Su método de enseñanza se basaba más bien en la emoción: ''Debe ser cálido como el sol del alba. El crescendo debe...'' Mientras que Reiner era más de: ''¿Dónde toca el segundo clarinete?'' Y te interrumpía. Y yo pensaba: ¿hay un segundo clarinete? ''No lo sé... ¿Quiere decir una transposición o tal y como está en la partitura, o...?'' Eso me paralizaba. Su manera de enseñar daba miedo, pero Kusevitski era todo lo contrario. Me animaba, era acogedor, afable y... espléndido.


레너드 번스타인 : 그곳에서 저는 위대한 쿠세비츠키 앞에서 떨고 창백한 얼굴로 앉아 있었는데요. 갑자기 쿠세비츠키는 제게 이렇게 말했죠. “물론 너는 내 수업에 올 수 있어.” 그냥 그렇게요. 제게 충격을 주었지만, 좋은 방법으로요! 그해 여름 저는 탱글우드에서 그와 함께 공부했습니다. 우리는 거의 아버지와 아들처럼 즉시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의 교수법은 오히려 감정에 기초했습니다. “아침 햇살처럼 따스해야 해. 크레셴도는...” 반면에 라이너는 대부분 이랬어요. “제2클라리넷은 어디에서 연주하지?” 그리고 그는 방해했죠. 그러자 저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죠. ‘제2클라리넷이 있나?’ 저는 이렇게 말했죠. “모르겠어요... 조옮김을 의미하나요, 아니면 악보에 있는 그대로, 또는?” 그것은 저를 마비시켰죠. 그가 가르치는 방식은 무서웠지만, 쿠세비츠키는 그 반대였는데요. 그는 고양되고, 따뜻하고, 상냥하고... 훌륭했어요.


[Music]


Durante los siguientes veranos, Bernstein se convierte en el asistente y en el protegido de Kusevitski. Al fin, parecía que convertirse en director de orquesta era casi posible.


다음 몇 번의 여름 동안 번스타인은 쿠세비츠키의 조교이자 제자가 됩니다. 드디어 지휘자가 되는 것이 거의 가능해진 것 같았죠.


Leonard Bernstein: Deben entender que en 1943 que hubiese un director de 25 años era algo inaudito. Absolutamente nadie dirigía una orquesta antes de los 40 años. Entonces, se consideraba que era muy joven. Cuando Mitrópoulos debutó en este país, tenía unos 45 años y consideraron que era un director muy joven. Pero 25 años, ni hablar. Además, un director estadounidense de 25 años, aquello eran dos puntos en contra. Nunca había habido un director estadounidense, excepto Howard Barlow que dirigía la orquesta de la CBS y que a veces, por invitación, dirigía la Filarmónica de Nueva York porque era como un gesto simbólico para los artistas de EE.UU., muy simbólico. Y, bueno... El tercer punto en contra era que, además de director estadounidense de 25 años, me llamaba Leonard Bernstein, un nombre imposible para un director. Kusevitski, en 1942 o 1943, me suplicó que cambiara. Me invitó a cenar en u casa y me dijo: ''Lénoshka, te tengo que hablar de algo muy grave''. Fue durante la guerra y me empezó a explicar el fenómeno del antisemitismo que yo ya conocía bien, ya que los críos irlandeses me pegaban cuando iba al colegio en Boston. Ya me lo sabía. Me dijo: ''En este mundo la vida es muy dura para un joven judío'' y Leonard Bernstein... el póster de Leonard Bernstein jamás estará en Carnegie Hall... De hecho, él ya tenía un nuevo nombre preparado para mí: Leonard S. Berns. ¿Se lo imagina? Lo estuve reflexionando toda la noche y a la mañana siguiente le dije: ''Lo siento, pero no. Tendrá que ser con el nombre de Leonard Bernstein o ninguno''.


레너드 번스타인 : 1943년에 25세의 지휘자가 있다는 건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40세 이전에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죠. 따라서 그는 매우 젊다고 여겨졌는데요. 미트로풀로스가 이 나라에서 데뷔했을 때 그는 대략 45세였으며 매우 젊은 지휘자로 여겨졌죠. 하지만 25년, 방법이 없어요. 25세의 미국 지휘자도 두 번 반대했죠. CBS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때로는 초청받아 뉴욕 필하모닉을 지휘했던 하워드 발로우를 제외하고는 미국 지휘자가 없었는데, 이는 미국 예술가들에게 상징적인 표시와도 같았기 때문에 매우 상징적이었어요. 그리고 음... 세 번째의 반대되는 점은 25세의 미국 지휘자라는 것 외에 제 이름이 레너드 번스타인이라는, 지휘자로서는 불가능한 이름이었다는 것이죠. 1942년이나 1943년에 쿠세비츠키는 제게 변화를 간청했습니다. 그는 저를 자신의 집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제게 이렇게 말했어요. “레노쉬카, 아주 심각한 일에 관해 얘기해야 합니다.” 전쟁 중이었고 그는 제가 보스턴에서 학교에 다닐 때 아일랜드 아이들이 저를 때렸기 때문에 이미 잘 알고 있던 반유대주의 현상을 설명하기 시작했는데요. 저는 이미 알고 있었죠. 그는 제게 이렇게 말했어요. “이 세상에서 젊은 유대인들에게는 살기가 매우 힘들어요.” 그리고 레너드 번스타인... 레너드 번스타인의 포스터는 결코 카네기 홀에 없을 것입니다... 사실 그는 이미 저를 위해 준비된 새로운 이름인 레너드 S. 번스를 가지고 있었어요. 당신은 그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요? 저는 밤새도록 그것에 대해 생각했고 다음 날 아침에 그에게 이렇게 말했죠. “죄송하지만 아닙니다. 레너드 번스타인의 이름이 아니라면 안 될 것입니다.”


[Music]


Durante los siguientes años estuvo muy ocupado dirigiendo y enseñando, con estrenos mundiales y estrenos de Broadway. Bernstein se casó con la actriz Felicia Montealegre y juntos formaron una familia. Finalemente, Leonard Bernstein ocuparía el mayor puesto jamás ocupado por un músico nacido y formado en EEU.UU.: El de director musical de la Orquesta Filarmónica de Nueva York. Se llevó a la orquesta de gira por Europa, por Oriente Próximo y Extremo Oriente, por Latinoamérica y por la Unión Soviética. Bernstein se convirtió en el principal embajador musical de EE.UU. Israel fue uno de los países que más visitó Bernstein. Dirigió allí por primera vez la orquesta en 1947 para celebrar sus 30 años de colaboración. La Orquesta Filarmónica de Israel organizó a nivel nacional el festival Leonard Bernstein. Es la primera retrospectiva de su obra como compositor.


다음 몇 년 동안 그는 세계 초연과 브로드웨이 초연으로 지휘하고 가르치는 데 매우 바빴습니다. 번스타인은 칠레 출신 여배우 펠리시아 몬테알레그레와 결혼하여 함께 가정을 꾸렸습니다. 궁극적으로 레너드 번스타인은 미국에서 태어나 훈련받은 음악가가 보유한 가장 높은 위치인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 감독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는 오케스트라와 함께 유럽, 서아시아, 동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소련을 순회했죠. 번스타인은 미국 최고의 음악 대사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번스타인이 가장 많이 방문한 나라 중 하나였는데요. 1947년 그들의 협력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그곳에서 처음으로 오케스트라를 지휘했죠.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전국 레너드 번스타인 페스티벌을 조직했습니다. 작곡가로서 그의 첫 번째 회고전입니다.


Leonard Bernstein: El honor es todo mío. Esta retrospectiva es todo un privilegio. Es la primera vez que me pasa algo así y tengo un poco de vergüenza porque no me siento lo bastante viejo como para tener una retrospectiva. Creo que no he hecho bastantes cosas. Reconozco haber hecho muchas cosas, pero siento que no he llegado a ese punto todavía en el que hay que volver la vista atrás hasta el presente para evaluar y juzgar. Es un gran honor y me siento profundamente conmovido porque esto lo ha hecho esta orquesta a la que quiero como a mi familia. Todos los miembros de esta orquesta son muy preciados para mí, lo que hace que el concierto sea muy especial para mí.


레너드 번스타인 : 영광은 모두 저의 것입니다. 이 회고전은 특권입니다. 이런 일이 처음이고 회고를 할 나이가 아닌 것 같아서 조금 부끄러운데요. 충분히 일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많은 일을 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아직 현재를 돌아보고 평가하고 판단해야 할 지경에 이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족처럼 사랑하는 이 오케스트라에서 하게 되어 영광이고 감격스러워요. 이 오케스트라의 모든 단원은 제게 매우 소중하고, 제게 매우 특별한 콘서트를 선사합니다.


La orquesta ha invitado directores y solistas de todo el mundo.


오케스트라는 전 세계의 지휘자들과 독주자들을 초청했습니다.


Leonard Bernstein: El principio, si se acuerdan, hace 13 años...


레너드 번스타인 : 기억한다면 13년 전 시작...


La selección se ha hecho a partir de toda la variedad musical de Bernstein. La banda sonora de La ley del silencio, éxitos de West Side Story, Candide, On the Town y Wonderful Town, la Serenata para violín y cuerdas, las sinfonías n.º 1 Jeremiah y n.º 2 Age of Anxiety, pero la pieza central del festival es la sinfonía n.º 3 de Bernstein, Kaddish, dedicada al recuerdo de de John F. Kennedy, estrenada a nivel mundial por la Orquesta Filarmónica de Israel en 1964.


그의 선곡은 번스타인의 모든 음악적 다양성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영화 <침묵의 법칙> 사운드트랙,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히트 넘버들, 오페레타 <캉디드>, 뮤지컬 <마을에서> 및 <멋진 마을>, 바이올린과 현악기를 위한 세레나데, 교향곡 1번 <예레미야>, 교향곡 2번 <불안의 시대>였지만, 페스티벌의 중심이 되는 곡은 1964년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세계 초연한, 존 F. 케네디를 추모하여 헌정된 번스타인의 교향곡 3번 <카디시>입니다.


[Music]


Quiero decir Kaddish. No siento que tenga autoridad en el sentido de que les digo a todos lo que tienen que hacer, pero los mimo, o toco con ellos... Es algo difícil de describir. Respiro y palpito con ellos, les doy consejos. Si supiese tocar el oboe, la tuba y el fagot los tocaría todos, si tuviese 70 bocas y 50 brazos.


다시 말해 <카디시>입니다. 제가 모든 사람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하는 점에서 권위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지만, 저는 그들을 애지중지하거나 그들과 협연합니다... 설명하기 어려운 건데요. 저는 그들과 함께 숨을 쉬고 고동치며, 그들에게 조언합니다. 제가 오보에, 튜바, 바순을 연주할 줄 알았다면, 입이 70개이고 팔이 50개라면, 모두 연주했을 것입니다.


Leonard Bernstein: Vale, seguid, por favor. ¡Y más! No ha estado mal.


레너드 번스타인 : 알겠어요, 계속하세요. 그리고 더! 나쁘지 않았어요.


Leonard Bernstein: Cuando eres un personaje público, como habíamos dicho sobre Carnegie Hall, eres extrovertido, sociable, siempre estás rodeado de gente, con colegas, amigos, socios, mánagers, etc. Pero cuando estás en privado, componiendo, estás solo, pero hay algo de esa soledad que no tiene nada de solitario y que es mucho más sociable, aunque suene raro, que la vida pública. Funciona totalmente al revés porque si eres una persona que piensa, lo contrario a una persona que actúa o que no piensa, esos pensamientos siempre te acompañan. No estás nunca tan activo como cuando no haces nada y nunca estás menos solo. Nunquam minus solum esse que cuando estuvo solo. Piénsenlo un momento. Cuando se está solo es cuando todas las ideas, sentimientos, lo que sea que se reprime en la vida social o en público, sale a la superficie. Te acosan. En mis momentos de mayor soledad, cuando me dedicaba a Kaddish en MacDowell Colony, por ejemplo, estaba totalmente solo en MacDowell Colony y cuando estaba componiendo la MASS en MacDowell Colony, aquellos fantasmas y personajes me acosaban como si al escribir los personajes cobraran vida y me rodearan. No me dejaban en paz, ni siquiera en sueños. No se está nunca solo. De hecho, uno está más solo cuando está rodeado de gente. Un hombre que razona y un artista creativo están más solos cuando hay gente que cuando están solos. Y es mucho más activo por sí mismo que cuando está en acción. Desde el principio, todos. ¡Sopranos!


레너드 번스타인 : 카네기 홀에 대해 말했듯이 당신이 공인일 때 당신은 외향적이고 사교적이며 동료, 친구, 동반자, 관리자 등과 함께 항상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러나 사적으로 있을 때, 작곡할 때, 당신은 혼자이지만, 그 외로움에는 전혀 외롭지 않은 무언가가 있으며 그것은 공적인 삶보다 훨씬 더 사교적이고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행동하거나 생각하지 않는 사람과 달리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항상 그 생각이 따라오기 때문에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만큼 활동적이지 않으며 결코 덜 외롭지 않아요. 자신이 혼자였을 때보다 결코 덜 외롭지 않아요. 잠시 생각해보세요. 당신이 혼자일 때는 사회생활이나 공공장소에서 억압된 모든 생각, 감정, 모든 것이 표면으로 떠오를 때입니다. 그것들이 당신을 괴롭히죠. 제가 가장 외로웠던 순간, 예를 들어 맥도웰 칼러니에서 <카디시>를 하고 있었을 때 저는 맥도웰 칼러니에서 완전히 혼자였고, 제가 맥도웰 칼러니에서 <미사>를 쓸 때, 이 영혼들과 캐릭터들은, 캐릭터들을 쓰는 것이 생명을 불어넣은 것처럼 저를 괴롭혔으며, 저를 둘러쌀 것입니다. 그들은 꿈에서도 저를 혼자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 더 외롭죠. 이성적인 사람과 창의적인 예술가는 혼자 있을 때보다 사람들이 있을 때 더 외로워요. 그리고 행동할 때보다 그 자체로 훨씬 더 활동적입니다. 처음부터 모두. 소프라노!


Como compositor y director, Bernstein prepara Kaddish para un concierto del Festival de Israel. Religiosa, teatral y sumamente personal, la sinfonía es una obra compleja para una gran orquesta y tres coros.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번스타인은 이스라엘 페스티벌 콘서트를 위해 <카디시>를 준비합니다. 종교적이고 연극적이며 지극히 개인적인 이 교향곡은 대규모 오케스트라와 3개의 합창단을 위한 복잡한 작품입니다.


Leonard Bernstein: ¡Parad! ¡Parad! Los tenores, ya tenéis algunos forte-piano, ¿no? ¿Ya hemos hablado de los bajos? Entonces, forte-piano. Bueno, directemente. Me encantan vuestras caras, ¡son tan bonitas! ¡Pero no os oigo! Os veo muy guapos, pero os quiero oír. Que oiga cuando entráis. Aunque cantéis bien las notas, está mal. ¡No hay nada! ¡Hay que bailar! Vale, debe haber quedado claro. Claro como el alba. Uno hace mejor su trabajo de compositor estando tumbado y seguramente dormido, aunque sea en apariencia. Si hay suerte, es justo ese estado de trance entre consciente e inconsciente el estado ideal para que las ideas salgan de ese pozo sin fondo. De repente se te ocurre una idea, un concepto. El truco está en despertarse lo suficiente como para escribirla y no olvidarla. Es cuestión de segundos. Y en la transición entre el estado semiconsciente y consciente puedes olvidarlo. De hecho, el estado ideal se da cuando perdemos la noción del tiempo durante el proceso de composicióon. De repente miras el reloj y te has pasado cuatro horas escribiendo. No sabes qué ha pasado con las horas. No sabes qué pasa afuera, no sabes de tu familia ni de nada. Cuando me siento aquí, solo, durante largas noches pensando en nada, me digo: No puedo escribir nada. Estoy seco, bloqueado, como pasando por la sequía creativa de un escritor. Entonces, me siento al piano e improviso le doy a algunas cuerdas, pruebo una secuencia de notas. No me gusta mucho, pero sigo y, de repente, encuentro una que funciona que sugiere otra cosa, porque la idea de componer, como he dicho antes ''com-ponere'', poner junto, no es encontrar un acorde que te guste, ''oh, genial, lo apunto''. No significa nada. Una nota no significa nada. Solo significa algo cuando avanza hacia otra nota. Entonces, de repente, tiene un sentido. Lo mismo pasa con un acorde o un contrapunto. No significa nada a no ser que esté en contexto con otra cosa. Y cuando lo encuentras... ¿Cómo describir ese proceso? Si pensamos en la mente, no en el cerebro no hablo del cerebro, sino de la mente donde nace la creatividad como un circuito sumamente complejo de cables, todos conectados en ciertos puntos, todos cargados de información... Pero de vez en cuando hay una especie de cortocircuito, dos cables de información se cruzan, y se tocarán, se cruzarán y darán lugar a algo llamado ''idea''. De repente nace algo. Y cada vez que se produce me llena de satisfacción. Ahí es cuando digo: Gratias agimus tibi. Agradezco mucho ese don en esos momentos. Al igual que me deprimo mucho en los momentos en los que que no pasa nada. Pero siempre sé que, al final, llegará. Al final esos dos hilos se unirán y saldrá una chispa mientras estoy navegando. Dejo de un lado mi ego, olvido mi nombre y la hora que es, luego soy compositor. Es la primera vez que los niños tienen la ocasión de estar con nosotros, así que vamos a empezar desde el principio. Un compás antes de que entren los sopranos piano. ¿Vale? J. ¡Vamos! ¡Y...!


레너드 번스타인 : 중지! 중지! 테너, 당신들은 이미 포르테-피아노를 가지고 있지 않나요? 우리는 이미 베이스에 관해 이야기했나요? 따라서 포르테-피아노. 음, 직접. [저는 당신들의 얼굴을 사랑해요, 그들은 너무 예뻐요! 하지만 저는 당신의 말을 듣지 않죠! 저는 당신이 아주 잘 생겼지만, 당신의 말을 듣고 싶어요. 당신이 들어갈 때 그가 듣게 하세요. 음을 잘 불러도 틀려요. 아무것도 없어요! 춤춰야 해요! 좋아요, 분명해야 했어요. 새벽처럼 맑아요.] 비록 분명하더라도 누워서 어쩌면 잠들어 있는 작곡가로서 작품에 최선을 다합니다. 운이 좋다면 의식과 무의식 사이를 가로지르는 상태는 아이디어가 바닥없는 구덩이에서 나오는 이상적인 상태일 뿐입니다. 갑자기 당신은 아이디어, 개념을 얻죠. 그 비결은 그것을 기록하고 그것을 잊지 않을 만큼 충분히 깨어있는 것입니다. 몇 초면 됩니다. 그리고 반의식과 의식 상태 사이의 전환에서 당신은 그것을 잊을 수 있습니다. 사실, 이상적인 상태는 우리가 작곡 과정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를 때입니다. 갑자기 당신은 시계를 보고 4시간 동안 곡을 썼습니다. 당신은 시간까지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요. 당신은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가족이나 어떤 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무 생각 없이 긴 밤을 여기 홀로 앉아 있을 때, 저는 저 자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쓸 수 없어.” 작가의 창작 가뭄을 겪고 있는 것처럼 저는 고갈되고 막혀 있죠. 그래서 저는 피아노 앞에 앉아 즉흥적으로 현을 치고 일련의 음들을 시험해봅니다.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계속하다가 갑자기 뭔가 다른 것을 제안하는 작품들을 찾게 되는데, 작곡의 아이디어는 “함께 넣는 것” 이전에 말했듯이 “오, 좋아, 나는 그것을 적는다”처럼 당신이 좋아하는 코드를 찾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아무 의미가 없어요. 음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다른 음으로 넘어갈 때만 의미가 있는데요. 그러다 갑자기 이해가 됩니다. 화음이나 대위법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것과 관련이 없는 한 아무 의미가 없죠. 그리고 당신이 찾을 때... 그 과정을 어떻게 설명할 건가요? 우리가 두뇌가 아니라 마음을 생각한다면, 저는 두뇌에 대한 것이 아니라, 모두 특정 지점에서 연결되고 정보로 가득 찬 매우 복잡한 케이블 회로로서 창의성이 나오는 마음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따금 2개의 정보 전선이 교차하고 서로 접촉하고 교차하여 “아이디어”라는 것을 생성하는 일종의 회로가 발생합니다. 갑자기 뭔가 탄생하죠.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만족감이 듭니다. 제가 말할 때는 이렇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위해 그것을 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그 순간들에는 그 선물에 관해 매우 감사합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 매우 우울해지는 것처럼요. 그러나 저는 항상 그것이 결국 올 것을 알고 있습니다. 결국, 그 2개의 실이 함께 와서 탐색하는 동안 불꽃이 나올 것입니다. 자존심은 버리고 제 이름과 시간도 잊어버리고 작곡가가 됩니다. 아이들이 우리와 함께할 기회는 처음인 만큼 처음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피아노 소프라노가 들어오기 전 한 마디. 됐어. J. 어서! Y...!


[Music]


Leonard Bernstein: ¡Bien! Vale, vale. No estás listo. Puedes hacer dos cosas: La primera, respirar. Si necesitas respirar, hazlo, aunque sea lo incorrecto. La segunda, no intentes cantar pianissimo.


레너드 번스타인 : 좋아요! 그래그래. 준비가 되지 않았군요. 다음 두 가지를 수행할 수 있는데요. 첫째, 숨을 쉬세요. 숨을 쉴 필요가 있다면,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하세요. 둘째, 피아니시모(매우 여리게)로 부르려고 하지 마세요.


Es decir, no hago crescendo, por eso...


제 말은, 제가 크레셴도(점점 세게)를 하지 않는 이유는...


Leonard Bernstein: Por eso no hay que expandir tanto. Es mejor tener una nota fuerte que no tener ninguna. ¿Entiendes a qué me refiero?


레너드 번스타인 : 그러므로 많이 확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강한 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예 없는 것보다 낫습니다. 제 말을 이해하세요?


[Music]


Leonard Bernstein: Me han puesto ciertas etiquetas y ya me he acostumbrado. El hecho de que la mayor parte de mi música sea con frecuencia tonal explica una de estas etiquetas, la de ''conservador'' o ''de la vieja escuela'', o lo que sea. Por supuesto, no se tiene en cuenta que yo he tocado mucha música no tonal y que me gusta mucho. Pero esto, en cierto modo, no parece afectar a la opinión general sobre mí, la que dice que son conservador y un rétrogrado, o como prefieras llamarlo. Y es, en gran parte, porque creo en la tonalidad. No es una convicción consciente ni la decisión consciente de una creencia preferente. Es, simplemente, parte de mí, algo en lo que creo. Está en el corazón de mi trabajo como compositor. Esto no quiere decir que no he escrito música no tonal, porque sí lo he hecho. Quizá el mejor ejemplo sea Kaddish, mi sinfonía n.º 3 que contiene un gran número de páginas de música dodecafónica sumamente compleja y muy elaborada según el sistema de Schönberg. Ahora me parece obvio que el tremendo sufrimiento del diálogo con Dios, que constituye la major parte Kaddish se tenía que expresar con expresionismo.


레너드 번스타인 : 그들은 제게 특정한 꼬리표를 붙였고 저는 이미 그것에 익숙해졌어요. 제 음악의 대부분이 종종 조성적이라는 사실은 이러한 꼬리표 중 하나인 “보수적” 또는 “구식” 등을 설명합니다. 물론 제가 조성이 없는 음악을 많이 연주했고 그것을 매우 좋아한다는 점은 고려하지 않죠. 그러나 이것은 어떻게든 제가 보수적이고 퇴행적이라는 일반적인 견해에, 또는 당신이 그것을 부르는 것을 선호하는 무엇이든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리고 대부분 제가 음색을 믿기 때문이죠. 의식적인 확신이나 선호하는 신념의 의식적인 결정이 아닙니다. 단지 제 일부, 제가 믿는 것입니다. 그것은 작곡가로서의 제 작품의 핵심입니다. 제게 무조 음악이 있으므로 무조 음악을 작곡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아마도 가장 좋은 예는 쇤베르크의 기법에 따라 매우 복잡하고 정교한 12음 음악의 많은 페이지를 포함하는 제 교향곡 <카디시>일 것입니다. 이제 <카디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신과의 대화의 엄청난 고통을 표현주의로 표현해야 했던 것이 제게 분명해 보입니다.


[Music]


Leonard Bernstein: ¡Bien! Un poco tarde. ¿Tienes seis notas ahí? Por eso. Él solo tiene cinco. Todos tenéis una cantidad diferente. Hay que estar muy nervioso, para que lleguemos todos a la vez. Una pequeña depresión nerviosa. Uno de los aspectos principales de la obra es que el dolor que expresa la música dodecafónica debe ceder el paso, porque es parte de la obra, a la tonalidad e incluso al diatonismo. Así, el final es triunfal. La manifestación de la fe es tonal. Bien. Uno antes de Y, por favor. Vamos a intentarlo sin tener que pararnos. Ya hemos avanzado algo. No habéis hecho el crescendo en la primera frase.


레너드 번스타인 : 좋아요! 약간 늦군요. 거기 6개의 음이 있나요? 그래서 그래요. 5개의 음만 있군요. 사람마다 양이 달라요. 우리 모두 동시에 도착할 수 있도록 매우 긴장해야 합니다. 약간의 신경성 우울증. 작품의 주요 측면 중 하나는 12음 기법의 음악이 표현하는 고통이 작품 일부라서 조성, 심지어 온음계까지 양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끝은 승리입니다. 믿음의 표현은 조성적입니다. 좋아요. Y 앞에 하나 주세요. 멈추지 말고 시도해 봅시다. 우리는 이미 어느 정도 진전을 이루었습니다. 첫 프레이즈에서 크레셴도를 하지 않았네요.


[Music]


Leonard Bernstein: Creo que si tuviese que ser crítico con mi propia música hasta el punto de juzgarla, porque la mayoría de artistas... solo fingen juzgar sus obras y su música. En mi caso, diría que sus raíces provienen de todas partes. Del jazz, de la música litúrgica, de Bach y Beethoven, de Schumann y Chopin y Mahler y demás, de los músicos de mi país como Copland, Roy Harris y William Schuman. Sus raíces también provienen de Schönberg y de los movimientos que han revolucionado la música de nuestro siglo y que han provocado la crisis de la historia de nuestra música.


레너드 번스타인 : 대부분의 예술가가,,, 그냥 그들의 작품과 음악을 판단하는 척하므로 제 음악을 판단할 정도로 비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경우에는 그 뿌리가 모든 곳에서 왔다고 말하고 싶어요. 재즈에서, 전례 음악에서, 바흐와 베토벤에서, 슈만과 쇼팽과 말러 그리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코플랜드, 로이 해리스, 윌리엄 슈만과 같은 미국의 음악가들로부터. 그 뿌리는 또한 쇤베르크와 우리 세기의 음악에 혁명을 일으키고 우리 음악사에 위기를 일으킨 운동들에서 비롯됩니다.


Durante la Conferencia de la Cátedra de Poesía Charles Eliot Norton de Harvard de 1973, Bernstein dio una serie de cursos sobre la crisis musical ocasionada por el abandono de la tonalidad. En seis programas televisados presentó una lógica física innata de la tonalidad basada en una analogía muy original entre la música y la lengua hablada. Sugirió que la música del futuro sería una síntesis de diferentes estilos enmarcada en la tonalidad.


1973년 하버드의 <찰스 엘리엇 노튼 시학 강의>에서 번스타인은 조성의 포기로 인한 음악적 위기에 대해 일련의 강의를 했는데요. 6개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음악과 구어 간의 매우 독창적인 유추를 기반으로 한 타고난 물리적 조성의 논리를 제시했죠. 그는 미래의 음악이 조성으로 짜인 다양한 양식의 합성이 될 것이라고 암시했습니다.


Leonard Bernstein: Creo que todo esto ha sido posible porque se ha redescubierto y se ha reaceptado la tonalidad, esa tierra universal de la que puede surgir tal diversidad. Y creo que no importa lo sea serial, estocástica o intelectual que pueda ser la música porque siempre podrá ser poesía si está arraigada en esa tierra. En EE.UU., el artista se encuentra en una postura particularmente ecléctica más que Bach, que Beethoven y que todos los que he mencionado, porque él mismo simboliza y representa a un país muy ecléctico y pluralista. Después de todo, ser norteamericano no significa nada. Los americanos, si hablamos de raíces, son los indios. Excepto ellos, el resto son inmigrantes. Todos somos inmigrantes, o hijos de, o nietos, o bisnietos de inmigrantes. Estos inmigrantes son de todo tipo. Algunos llegaron como esclavos y solemos olvidarlo cuando hablamos de ''norteamericanos''. Algunos eran polacos, húngaros, otros chinos, judíos y españoles. Hoy en día, muchos son latinoamericanos. Pero son todos norteamericanos. Cualquiera que tenga los ojos bien abiertos y que se interese por el país en el que vive, refleja ese país. El país, a ser tan variopinto y pluralista, hará que, naturalmente, haya un reflejo que sea también ecléctico. Lo que unifica todo esto, da igual cuál sea el compositor, es su propia voz, que siempre está ahí. Hace que la palabra ''ecléctico'' sea bonita.


레너드 번스타인 : 저는 조성이 재발견되고 다시 수용되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가능했으며 그러한 다양성이 발생할 수 있는 보편적인 땅이라고 믿어요. 그리고 음악이 아무리 연속적이든, 확률적이든, 지성적이든 간에 그 땅에 뿌리를 둔다면 언제나 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에서 예술가는 베토벤과 제가 언급한 모든 사람보다, 바흐보다 특히 절충주의적인 위치에 있는데, 왜냐하면 그 자신이 매우 절충적이고 다원적인 국가를 상징하고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미국인이 된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뿌리에 관해 이야기한다면, 미국인들은 인디언입니다.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이민자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민자, 이민자의 자녀, 손자, 증손자입니다. 이 이민자들은 모든 인종입니다. 일부는 노예로 도착했고 우리가 “미국인”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을 잊는 경향이 있어요. 일부는 폴란드인, 헝가리인, 다른 일부는 중국인, 유대인, 스페인인이었죠. 오늘날 많은 사람이 라틴 아메리카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미국인입니다. 눈을 크게 뜨고 자기가 사는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은 그 나라를 반영합니다. 국가는 매우 다양하고 다원적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절충주의적인 반영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것은 작곡가가 누구이든 상관없이 항상 존재하는 자신의 목소리입니다. “절충적”이라는 단어를 아름답게 만들죠.


El eclecticismo de Bernstein es evidente en su MASS, una obra teatral para cantantes, bailarines y músicos, que inauguraba el Centro John F. Kennedy para las Artes Escénicas en Washington en 1971. Una obra que combina liturgia romana y letras de rock, la MASS se encontró tanto con elogios como con desdén.


번스타인의 절충주의는 1971 워싱턴 DC에 존 F. 케네디 공연예술센터를 연 가수, 무용수, 음악가를 위한 연극인 <미사>에서 분명합니다. 로마식 전례와 록 가사가 조합된 작품인 <미사>는 찬사와 멸시를 동시에 받았죠.


Leonard Bernstein: Estoy acostumbrado a que me lluevan las críticas. Y ahora, alcanzada esta respetable edad, esto ya no me debería molestar y supongo que así es. Por otro lado, me gustaría que la gente entendiera lo que he intentado hacer. Cuando digo la gente, hago una clara distinción entre los críticos y la gente. Escribo mi música para la gente, no para los críticos. Se dice que mi música, que todo lo que he escrito, es para el teatro. Creo que es cierto, en cierto modo. Creo que las palabras me gustan tanto como las notas. La expresión natural de ese amor por las palabras y por la música a la vez imagino que debería haberse reflejado en un alud de canciones a lo largo de toda mi vida, pero no he sido un compositor de canciones en el sentido de como lo fue Schubert. Siempre he escrito las canciones en un contexto teatral.


레너드 번스타인 : 저는 제게 쏟아지는 비판에 익숙해요. 그리고 이제 이 존경할만한 나이에 이르렀으니 더는 저를 귀찮게 해서는 안 되며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제가 하려고 했던 것을 이해해 주었으면 합니다. 저는 사람들을 말할 때 비평가들과 사람들을 분명히 구분합니다. 저는 비평가들이 아니라 사람들을 위해 제 음악을 씁니다. 제 음악, 제가 쓴 모든 것이 극장을 위한 것이라고 하는데요. 어떤 면에서는 그게 사실이라고 생각해요. 음들만큼이나 단어들도 좋아하는 것 같아요. 가사와 음악에 대한 사랑의 자연스러운 표현은 제 평생에 걸친 수많은 노래에 반영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슈베르트와 같은 의미의 작곡가는 아니었어요. 저는 항상 연극적인 맥락에서 곡을 썼죠.


La escuela de música, ópera y teatro de la Universidad de Indiana ha enviado a 25 jóvenes cantantes y músicos a Israel para el Festival Bernstein. Interpretarán las canciones que Bernstein ha escrito para Broadway y su ópera en un acto Trouble in Tahiti.


인디애나 음악 오페라 연극 대학교는 번스타인 페스티벌을 위해 25명의 젊은 가수와 음악가를 이스라엘로 보냈습니다. 그들은 번스타인이 브로드웨이와 그의 단막극 <타히티섬의 소동>을 위해 쓴 노래들을 연주할 것입니다.


Leonard Bernstein: De hecho, en lo que hacéis, se nota vuestro talento. Debo admitir que la música es buena. ¿Y tú por qué lloras? Una vez de vuelta en Indiana todo irá bien.


레너드 번스타인 : 사실 당신이 하는 것에서 당신의 재능이 드러납니다. 저는 음악이 좋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왜 우시나요? 인디애나로 돌아가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


No paro de repetirme que debería estar en una granja en Carolina del Norte ¡y aquí estoy con Leonard Bernstein!


저는 계속 노스캐롤라이나의 농장에 있어야 한다고 되뇌고 있는데, 여기 레너드 번스타인과 함께 있어요!


Leonard Bernstein: La ópera no pega mucho con el lenguaje americano. Siempre he pensado que deberíamos inventar nuestra propia ópera, algo muy especial, único, inspirado en nosotros y en la música de Broadway. Por eso durante casi toda mi vida se me ha asociado con los musicales de Broadway. Finalmente he decidido dejar de experimentar con el musical de Broadway para intentarlo, por fin, con la ópera. Mis próximas obras serán todo óperas. Con suerte, descubriré un lenguaje americano afín al tipo de música que le corresponde, que le pegue y que no suene a forzado, a artificial ni a ópera ridícula, que suene natural. Si no tengo suerte, habré fracasado. Pero estoy dispuesto a intentarlo. También necesito armarme de cierto coraje y estoy dispuesto a aceptar el reto.


레너드 번스타인 : 오페라는 미국의 언어와 별로 어울리지 않아요. 저는 항상 우리와 브로드웨이의 음악에서 영감을 받은 매우 특별한, 독특한 우리 고유의 오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왔어요. 그것이 제가 평생 브로드웨이 뮤지컬과 인연을 맺은 이유입니다. 저는 마침내 브로드웨이 뮤지컬 실험을 그만두고 오페라를 시도하기로 했어요. 저의 다음 작품들은 모두 오페라가 될 것입니다. 운 좋게도 저는 그것에 해당하는 음악 유형과 관련된 미국 언어를 발견할 건데, 이 언어는 강압적으로 들리지 않고 인위적이거나 우스꽝스러운 오페라로 들리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들립니다. 운이 좋지 않다면, 저는 실패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기꺼이 시도합니다. 저 역시 용기를 내야 하고 도전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Music]


¡Oh Padre! ¡Señor de la Luz!

¡Su Majestad! ¡Mi Imagen, mi Yo!

Somos uno, después de todo.

¡Tú y yo!

Juntos sufrimos y juntos existimos.

Y nos recrearemos el uno al otro durante toda la eternidad.

¡Nos recreamos el uno al otro!

¡Sufrimos y nos recreamos el uno al otro!


오 아버지! 빛의 군주!

폐하! 나의 이미지, 나의 자아!

결국, 우리는 하나입니다.

당신과 나!

우리는 함께 고통받고 함께 존재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영원히 서로를 재창조할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재창조합니다!

우리는 고통을 겪고 서로를 재창조합니다!


Leonard Bernstein: Creo que lo que está pasando ahora y que ha estado pasando de manera encubierta todos estos años en los que me he mantenido firme para defender la tonalidad, a pesar de todas las virulentas críticas, los epítetos infames y demás es que la mayoría de los compositores están volviendo a la tonalidad. Casi todos. Están volviendo, están cerrando el círculo porque también quieren comunicar. Veo una unión descomunal de todos esos artistas desesperados que han estado tantos años en guerra entre ellos y con el público, no como un esfuerzo, sino como un movimiento muy natural y casi predecible para comunicarse con una gran público. Creo que vamos a asistir a un precioso periodo histórico de florecimiento en todas las artes.


레너드 번스타인 : 모든 맹렬한 비판, 악명 높은 별명 등에도 불구하고 제가 확고하게 조성을 옹호하기 위해 굳게 선 지난 몇 년 동안 지금 일어나서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는 것은 대부분 작곡가가 조성으로 돌아가고 있어서라고 생각합니다. 거의 모두. 그들은 또한 의사소통을 원하기 때문에 환상을 닫고 돌아오고 있습니다. 저는 수년 동안 서로 그리고 대중과 전쟁해온 필사적인 예술가들의 거대한 연합을 노력이 아니라 많은 대중과 소통하기 위한 매우 자연스럽고 거의 예측 가능한 운동으로 봅니다. 저는 우리가 모든 예술이 번성했던 아름다운 역사적 시기를 목격하게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Music]


Traducido por Clara Núñez Marsal / 클라라 누녜스 마르살의 스페인어 번역






유튜브에서도 전체를 볼 수 있다. 20분짜리 보너스 동영상은 나한테 없다. 번스타인과 관련된 사진들은 DVD 표지를 구하다가 아마존 사이트에서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