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7일 수요일

Mercury / Frederick Fennell & Eastman Wind Ensemble - Sousa 24 Favorite Marches 2004




Track

01 Sound Off / 보조를 맞추라!

02 Nobles of the Mystic Shrine / 신비한 신전의 귀족

03 Sabre & Spurs / 검과 박차

04 The Picadore / 기마 투우사

05 Our Flirtation / 우리의 관심 (우리의 연애 장난)

06 The High School Cadets / 고등학교 사관후보생

07 The Invincible Eagle / 무적의 독수리

08 Bullets & Bayonets / 총탄과 총검

09 The Liberty Bell / 자유의 종

10 Riders for the Flag / 깃발을 위한 기수

11 Solid Men to the Front / 튼튼한 남자는 앞으로 (멋진 병사여 앞으로!)

12 The Gallant Seventh / 용감한 일곱 번째

13 The Rifle Regiment / 소총 연대

14 The Pride of the Wolverines / 울버린의 명예

15 Golden Jubilee / 황금 희년 (50주년)

16 The Gridiron Club / 미식축구 클럽

17 New Mexico / 뉴멕시코

18 Sesqui-Centennial Exposition / 150년 박람회

19 The Black Horse Troop / 흑마 기병 중대

20 The Kansas Wildcats / 캔자스 살쾡이

21 Manhattan Beach / 맨해튼 해변

22 Ancient & Honorable Artillery Company / 오래되고 명예로운 포병 중대

23 The National Game / 내셔널 게임 (야구)

24 The Glory of the Yankee Navy / 미국 해군의 영광


John Philip Sousa: Sound Off! Sousa on Review / 존 필립 수자 : 보조를 맞추라! 수자 온 리뷰

In addition to writing over a hundred marches, John Philip Sousa (1854-1932) also wrote an autobiography 365 pages long. Entitled “March Along” and published in 1928, it is a rambling and reflective account of his fascinating life, somewhat frustrating to the reader who is anxious above all to get to the point: Sousa does not get down to the facts of writing marches until page 358! But then he is unquestionably precise in his observations:


존 필립 수자(1854-1932)는 100개가 넘는 행진곡을 쓴 것 외에 365쪽 분량의 자서전을 썼다. 1928년에 출판된 <함께 행진을>이라는 제목의 이 책은 그의 매력적인 삶에 대해 장황하고 두서없는 사색적인 기록으로, 무엇보다도 요점에 도달하기를 갈망하는 독자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운데, 수자는 358쪽까지 행진곡을 쓰는 것에 대한 사실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은 자신의 관찰에서 의심할 여지 없이 정확하다.


Marches, of course, are well known to have a peculiar appeal to me. Although during my busy life I have written ten operas and a hundred other things – cantatas, symphonic poems, suites, waltzes, songs, dances and the like – marches are, in a sense, my musical children…. The march speaks to a fundamental rhythm in the human organization and is answered. A march stimulates every center of vitality, wakens the imagination…. I can speak with confidence because I have seen men profoundly moved by a few measures of a really inspired march. But a march must be good. It must be as free from padding as a marble statue. Every line must be carved with unerring skill. Once padded, it ceases to be a march. There is no form of musical composition where the harmonic structure must be more clean-cut. The whole process is an exacting one. There must be a melody which appeals to the musical and unmusical alike. There must be no confusion in counterpoints. The composer must, to be sure, follow accepted harmonization; but that is not enough. He must be gifted with the ability to pick and choose here and there, to throw off the domination of any one tendency. If he is a so-called purist in music, that tendency will rule his marches and will limit their appeal. How are marches written? I suppose every composer has a somewhat similar experience in his writing. With me the thought comes, sometimes slowly, sometimes with ease and rapidity. The idea gathers force in my brain and takes form not only melodically but harmonically at the same time. It must be complete before I commit it to paper. Then I instrument it according to the effects it requires…. I do not, of course, manufacture my themes deliberately; the process isn’t direct or arbitrary enough for that. It is not a nonchalant morning’s work.


행진곡은 물론 내게 독특한 매력이 있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비록 바쁜 인생에서 10편의 오페라와 100편의 다른 것을 썼지만 – 칸타타, 교향시, 모음곡, 왈츠, 노래, 춤곡 등과 같은 – 행진곡은 어떤 의미에서 나의 음악적 아이들이다…. 행진곡은 인간 조직의 근본적인 리듬에 대해 말하고 응답한다. 행진곡은 활력의 모든 중심을 자극하고, 상상력을 일깨운다…. 나는 진정으로 영감을 받은 행진곡의 몇 마디에 깊이 감동한 사람들을 보았기 때문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행진곡은 좋아야 한다. 대리석 조각상처럼 군더더기가 없어야 한다. 모든 선은 틀림없는 솜씨로 새겨져야 한다. 일단 불필요하게 장황해지면 행진곡이 멈춘다. 화성 구조가 이보다 더 깔끔해야 하는 작곡 형식은 없다. 모든 과정이 까다롭다. 음악적이든 비음악적이든 모두에게 호소력 있는 멜로디가 있어야 한다. 대위법에 혼동이 없어야 한다. 작곡가는 확실히 허용된 화음을 따라야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진 않다. 그는 여기저기 까다롭게 고르면서도 어느 한 경향의 지배를 버릴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나야 한다. 그가 음악에서 소위 순수주의자라면, 그 경향이 그의 행진곡을 지배하고 그것의 호소력을 제한할 것이다. 행진곡은 어떻게 작곡될까? 나는 모든 작곡가가 자신의 작곡에서 어느 정도 비슷한 경험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생각은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쉽고 빠르게 다가온다. 그 아이디어는 내 머리에서 힘을 모아 선율적으로뿐만 아니라 동시에 화성적으로 형태를 취한다. 내가 종이에 그것을 행하기 전에 완성되어야 한다. 그런 다음 필요한 효과에 따라 악기를 사용한다…. 물론 나는 의도적으로 주제들을 만들지 않는데, 그 과정은 직접적이거나 자의적이지 않다. 아무렇지 않은 아침의 일이 아니다.


The twenty-four marches presented here span forty-nine years of Sousa’s creative activity: 1880 (“Our Flirtation”) to 1928 (“Golden Jubilee”). The years between were filled with such wide-ranging activities, so many concerts, so many marches, so much traveling, that it is not too surprising to discover that Sousa failed to leave behind even the most basic information concerning the composition of many of his most famous creations. His autobiography includes no reference to several of these marches. There is, of course, no official documentation of the majority of his manuscripts, and thus, save for those marches to which he made specific reference in his autobiography or for which a dedication was printed on the solo cornet part, all comment is but the purest conjecture.


여기에 제시된 24개의 행진곡은 1880년(우리의 관심)에서 1928년(50주년)까지의 49년 동안 수자의 창작 활동에 걸쳐 있다. 그 사이의 몇 년은 매우 광범위한 활동, 수많은 연주회, 수많은 행진곡, 수많은 여행으로 가득 차서 수자가 그의 많은 유명한 창작곡들의 구성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정보조차 남기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의 자서전에는 이러한 행진곡 중 몇 가지에 대한 언급이 포함되지 않는다. 물론 그의 필사본 대부분에 대한 공식 문서는 없으며, 따라서 그가 자서전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한 행진곡이나 독주 코넷(작은 트럼펫같이 생긴 금관 악기) 파트에 헌정이 인쇄된 행진곡을 제외하고, 모든 언급은 가장 순수한 추측에 불과하다.


[Since Dr. Fennell penned these notes, a biography of Sousa by Paul Bierley was published: “John Philip Sousa: American Phenomenon” (New York: Appleton, Century, Crofts, 1973) – in Fennell’s words, “the most comprehensive overview of Sousa the conductor….” That same year, Bierley’s “John Philip Sousa: A Descriptive Catalog of His Works” was published by the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Urbana, 1973). It was updated in 1984, published under the title “The Works of John Philip Sousa” (Columbus, Ohio: Integrity Press). – Ed.]


[페넬 박사가 이 메모를 작성한 이후 폴 비얼리의 수자 전기가 출판되었는데, <존 필립 수자 : 미국의 현상>(뉴욕 애플톤, 센추리, 크로프츠, 1973)은 페넬의 말에 따르면, “지휘자 수자에 대한 가장 포괄적이 개요이다….” 같은 해에 비얼리의 <존 필립 수자 : 그의 작품에 대한 설명 카탈로그>가 일리노이 대학교 출판부(어바나, 1973)에서 출판되었다. 1984년에는 갱신되어 <존 필립 수자의 작품들>(오하이오 주 콜럼버스 시 인테그리티 출판부)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Any Sousa anthology is certain to include a host of marches that are totally unfamiliar both to the public and to performing musicians. Why at least half of those recorded here do not share the fame of “Washington Post” or “King Cotton” is a question that only the public and the performer could answer. Of the two, Sousa preferred to serve the former, for he never claimed to be anything other than an entertainer of the public. The title “March King” was conferred upon him when he was leader of the Marine Band, by an anonymous writer for what he referred to as “some obscure brass-band journal, published in England….” He wore the crown and raiment of that office with rare devotion, being more stimulated by its responsibilities than enervated by its privileges. Following his own belief that “subsidy is the death of art,” Sousa, as “king,” did not freeze his creative assets in a “royal bank” and retreat behind the security of palace walls where, in the ancient practice of monarchs, he could rule the future from the past. Sousa was a different kind of “king,” for he continued to produce his marches, never fearing, for instance, that his next would fail simply because it had been his fate to write the “Stars and Stripes Forever!”


어떤 수자 선집에는 대중과 연주자 모두에게 완전히 생소한 행진곡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녹음된 것 중 적어도 절반이 <워싱턴 포스트>나 <목화 왕>의 명성을 공유하지 않는 이유는 대중과 연주자만이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다. 둘 중 수자는 대중의 연예인 이외의 다른 것을 주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자를 섬기는 것을 선호했다. “행진곡의 왕”이라는 칭호는 그가 미군 해병대 군악대장이었을 때 “영국에서 출판된 어떤 모호한 취주악단 저널”이라고 언급했던 것 때문에 익명의 작가에 의해 주어졌다. 그는 그 직책의 면류관과 의복을 드물게 헌신적으로 입었고, 특권 때문에 지쳐 있기보다는 책임 때문에 더 자극을 받았다. “보조금은 예술의 죽음”이라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왕”인 수자는 자신의 창조적 자산을 “왕실 은행”에 동결하지 않았으며, 고대 군주의 관행에서 과거로부터 미래를 지배할 수 있는 성벽의 보안 뒤로 물러났다. 수자는 계속해서 행진곡들을 만들었기 때문에 다른 형태의 “왕”이었는데, 예를 들어 <성조기여 영원하라!>를 쓰는 것이 그저 그의 운명이었으므로 그의 다음 작품은 실패할 것이라는 사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Sound Off” (1893) is the first of Sousa’s lesser-known marches in this album and, like “Liberty Bell” and “Picadore”, it was written during the first years with his own band. The familiar bugle call “Sound Off” was well-known to Sousa from his recent service as leader of the Marine Band. In spite of its title, it is not a regimental march in the spirit or fashion of “Sabre and Spurs”, and any musical quotation of the three-note bugle call to “Sound Off” does not appear until the trio. The march has an unorthodox introduction and first strain in the key of C Minor, and the bass drum after-beats in the first strain are Sousa’s, not mine. But like the chanting of the drill sergeant and the crunching of boots, “Sound Off” swings along in a compelling and infectious manner.


<보조를 맞추라>(1893)는 이 앨범에서 수자의 덜 알려진 행진곡의 첫 번째 곡이며 <자유의 종> 및 <기마 투우사>처럼 처음 몇 년 동안 자신의 밴드용으로 작곡되었다. 익숙한 나팔 소리인 <보조를 맞추라>는 최근 미군 해병대 군악대장으로 복무한 수자에게 잘 알려져 있었다. 그 제목에도 불구하고 <검과 박차>의 정신이나 유행에 따른 연대 행진이 아니며, <보조를 맞추라>에 대한 3음 나팔 소리의 음악적 인용은 트리오 전까지 나타나지 않는다. 이 행진곡은 C단조의 독특한 도입부와 첫 번째 변형이 있으며, 첫 번째 변형의 베이스 드럼 애프터 비트(4/4박자의 경우 제2박과 제4박에 악센트를 두는 것으로, 주로 재즈에서 많이 사용)는 내 것이 아니라 수자의 것이다. 그러나 교관의 외침과 장화를 두드리는 소리처럼 <보조를 맞추라>는 설득력과 전염성이 있는 방식으로 휘두른다.


“Nobles of the Mystic Shrine” (1923) is unique among Sousa’s marches: it has a part for the harp! It also calls for triangle and tambourine as part of the percussion texture. The addition of these instruments to the normal complement of reeds, brasses, and percussion found in his scoring was intended to provide those touches of color that are such an integral part of the “Turkish Music” so intimately associated with public appearances of Shrine marching units. Cymbals, triangles, and tambourines were some of the many fascinations the Crusaders beheld in their contacts with life in the Holy Land when they sought to wrest it from the Turks (1096-1271). The Noblemen of Europe were indeed so fascinated by the tromperies of the Turkish and Saracen forces that they brought them back to Europe and adapted them to their own ceremonial life. One of the most unusual of these noisemakers is the Turkish Crescent, known also as a Schellenbaum (bell tree), Pavillion, or Jingling Johnnie; it was first used to signal the passage of a person of high station. This arrangement of bells was mounted on a long staff and carried with great dignity by an imposing personality who, through the years, developed a technique of brandishing it about in a most skillful manner. As it was whirled about, everything but the round silver ball flew off – leaving the shaft topped by the ball, thus providing us with today’s drum major baton. The use of a modern reconstruction of the Crescent in Sousa’s march “Nobles of the Mystic Shrine” seemed most appropriate. It can be heard in the noisy outbursts of the first strain (so typically “Turkish,” in which Sousa, who was a Shriner, sought to capture the spirit of his title), in the last strain of the trio, and in the final decay of sound as the march comes to its conclusion.


<신비한 신전의 귀족>(1923)은 수자의 행진곡 중에서 독특한데, 하프를 위한 부분이 있다! 타악기 조화의 일부로 트라이앵글과 탬버린도 필요하다. 그의 관현악보 작성에서 볼 수 있는 목관악기, 금관악기, 타악기의 일반적인 보완에 이러한 악기들을 추가한 것은 신전 행진 부대의 공개적인 모습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된 “튀르키예 음악”의 필수적인 부분인 색채의 터치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심벌즈, 트라이앵글, 탬버린은 십자군이 튀르크로부터 성지를 빼앗으려 할 때(1096~1271) 성지에서의 삶과의 접촉에서 본 많은 매력 중 일부였다. 유럽의 귀족들은 실제로 튀르키예군과 사라센군의 속임수에 넘어가 그들을 다시 유럽으로 데려와 자신들의 의식 생활에 맞췄다. 이러한 뿔피리 중에서 가장 특이한 것 중 하나는 셸렌바움(벨 트리), 파빌리온, 징링 조니라고도 알려진 튀르키예 크레센트(전통적으로 국제적으로 군악대가 사용하는 초승달 모양의 타악기)인데,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의 통과를 알리는 신호로 처음 사용되었다. 이러한 종들의 배열은 긴 지팡이에 장착되었으며 수년에 걸쳐 가장 능숙하게 휘두르는 기술을 개발한 위풍당당한 성격에 의해 위엄 있게 운반되었다. 빙글빙글 돌면서 둥근 은색 공을 제외한 모든 것이 날아가서 손잡이 위에 공이 놓이게 하여 오늘날 고적대장의 지휘봉을 제공했다. 수자의 행진곡 <신비한 신전의 귀족>에서는 현대식으로 재현된 크레센트를 사용하는 것이 가장 적절해 보였다. 그것은 [수자가 그의 직함의 정신을 포착하려고 노력했던 (프리메이슨의 외부적인 단체로, 친목 · 보건 활동 · 자선 사업 따위를 목적으로 하는) 우애 결사 회원인 수자라는, 따라서 전형적으로 “튀르키예의”] 첫 번째 변형의 시끄러운 분출에서, 트리오의 마지막 변형에서, 행진곡이 끝나갈 때 소리의 마지막 쇠퇴에서 들을 수 있다.


The traditional “esprit de corps” among those who were “Riders for the Flag” (1926) marked with honor the service of cavalry units of the United States Army, from the Revolution until their replacement in the recent past by armored units. Sousa was a devoted rider himself, and two of the marches recorded here were written for his fellow horsemen. “Sabre and Spurs” (1927) became the “March of the American Cavalry.” Both these classic marches are written after the rhythm of galloping horses and both employ the sounds of the traditional cavalry bugle as the basic musical materials in the trio. In addition to its effectiveness as a cavalry march, “Riders for the Flag” has always struck me as typical of the two-step dance-march of Sousa’s earliest successes, such as “Washington Post”.


<깃발을 위한 기수>(1926)였던 사람 중 전통적인 “소속감”(단결심)은 혁명부터 최근에 기갑 부대로 대체될 때까지 미국 육군의 기병 부대에 대한 영예로 표시된다. 수자는 헌신적인 기수였으며, 여기에 기록된 행진곡 중 2개는 동료 기병들을 위해 작곡되었다. <검과 박차>(1927)는 “미국 기병대의 행진곡”이 되었다. 이 두 가지 고전 행진곡은 모두 질주하는 말들의 리듬에 따라 작곡되었으며 둘 다 트리오에서 기본 음악 소재로 전통적인 기병 나팔 소리를 사용한다. 기병 행진곡으로서의 효율성 외에도 <깃발을 위한 기수>는 수자가 초기에 성공했던 <워싱턴 포스트> 같은 투스텝(사교댄스의 일종 또는 그 춤곡) 행진곡풍 춤곡의 전형으로 항상 나를 사로잡았다.


In his youth, Sousa had “a very hazy idea of the value of money” and “no adequate idea of the value of my compositions.” His sense of values was indeed so hazy and inadequate as to allow him to sell “‘Semper Fidelis’, ‘The Picadore’, ‘The Crusader’, ‘Washington Post’, ‘High School Cadets’, and several others, under a contract to Harry Coleman, the music publisher in Philadelphia, for thirty-five dollars apiece, and I was also to furnish three arrangements, one for piano, one for orchestra, and one for band!” But as was the case with Antonín Dvořák and his second set of Slavonic Dances, Sousa’s next brace of marches cost his publisher most of the bonanza reaped from the first. “High School Cadetes” (1892) was written for a company of cadet students in Washington. “The Picadore” (1889), also from the first of Coleman’s publications, is exemplary of the warmth and charm in Sousa’s early style.


젊었을 때 수자는 “돈의 가치에 대해 매우 약한 개념”이 있었으며, “내 작품들의 가치에 대한 적절한 개념”도 없었다. 그의 가치관은 참으로 너무 흐릿하고 부적절하여 “‘영원한 충성’, ‘기마 투우사’, ‘십자군’, ‘워싱턴 포스트’, ‘고등학교 사관후보생’ 및 기타 여러 곡을 필라델피아의 음악 출판업자인 해리 콜먼과 계약하여 개당 35달러에 팔도록 했으며, 나는 피아노 편곡 하나, 오케스트라 편곡 하나, 밴드 편곡 하나 이렇게 3개도 제공해야 했다!” 그러나 안토닌 드보르자크와 그의 <슬라브 무곡> 2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수자의 다음 행진곡들에 대한 준비는 첫 번째에서 거둔 대박의 대부분을 자신의 출판업자에게서 잃게 했다. <고등학교 사관후보생>(1892)은 워싱턴에 있는 생도 학생 단체를 위해 작곡되었다. 역시 콜먼의 첫 번째 출판물인 <기마 투우사>(1889)는 수자 초기 스타일의 따뜻함과 매력을 잘 보여준다.


As a young musician, Sousa played the violin in various theaters in Washington and Philadelphia. He was particularly interested in operetta, which flourished everywhere and to which his particular talents as a composer and orchestrator seemed ideally suited. After a series of routine jobs as an arranger of “opera fantasies” and following a long association with Philadelphia productions of “Pirates of Penzance” as an orchestral player and “Pinafore” as a conductor, Sousa received an offer to write the music for a new musical comedy, “Our Flirtation” (1880). He had recently married Jennie Bellis, a member of his “Pinafore” company, and when that show closed he took his “bride, a couple quires of music paper, and a large capacity for work, to Cape May and straightway wrote the piece.” The march recorded here is all that survives of the score, but “Our Flirtation” probably held a warm place in his memory, for he was in the midst of his tour west with that company when he received word that he was wanted in Washington to lead the Marine Band – a summons that was to change his entire life. “Our Flirtation” [Sousa confusingly limited the flirtations to a single event in the march. – Ed.] is different from any of his marches thus for known to me. In it I perceive the unmistakable spirit of the Strausses of Vienna, uniting “Waltz King” and “March King”. Sousa’s later operettas, “El Capitan”, “The Charlatan”, and “The Bride Elect” were great successes in their time, but it is the marches from them that have survived.


젊은 음악가로서 수자는 워싱턴과 필라델피아의 여러 극장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그는 특히 오페레타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는 어디에서나 번창했으며 작곡가이자 관현악 작곡가라는 그의 특별한 재능이 이상적으로 적합해 보였다. “오페라 환상곡”의 편곡자로서 일련의 판에 박힌 일을 하고 이어서 오케스트라 단원으로서 오페라 <펜잔스의 해적>, 지휘자로서 오페라 <피나포어>의 필라델피아 제작자들과 오랜 관계를 맺은 후 수자는 새로운 희가극 <우리의 연애 장난>(1880)을 위한 음악을 써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는 최근에 <피나포어> 단체의 일원인 제니 벨리스와 결혼했으며, 쇼가 끝났을 때 그의 “신부, 악보 몇 장, 대용량의 작품을 (뉴저지 주의) 케이프메이로 데려가서 곧바로 이 곡을 썼다.” 여기에 녹음된 행진곡은 악보에 남아있는 모든 것이지만, 그가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소집이었던 미군 해병대 군악대를 워싱턴에서 이끌고 싶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단체와 함께 서부 여행을 하던 중이었으므로, <우리의 연애 장난>은 아마도 그의 기억에 따뜻한 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다. [수자가 행진곡에서 연애 장난을 하나의 사건으로 혼란스럽게 제한했던] <우리의 연애 장난>은 그렇게 내게 알려진 그의 행진곡들과는 다르다. 그것에서 나는 “왈츠의 왕”과 “행진곡의 왕”을 결합한 비엔나 슈트라우스 집안의 틀림없는 정신을 감지한다. 수자가 나중에 쓴 오페레타인 <엘 카피탄>, <허풍꾼>, <신부>는 당대에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남아있는 것들은 여기에 나오는 행진곡이다.


“Invincible Eagle” dates from 1901 and was written during Sousa’s first tour with the Marine Band. They played for the month of June at the Pan-American Exposition in Buffalo, and Sousa wrote this march commemorating that Exposition. The spirit of 1918 provided Sousa with his march and title, “Solid Men to the Front”. Virtuosity of a special kind is demanded from the low brass section in the first two strains, and its trio is a model of the college fight songs that came with the rise of football. Another march from the period of World War I was “Bullets and Bayonets”, which Sousa wrote in 1919 for “the Officers and Men of the U.S. Infantry.”


<무적의 독수리>는 1901년에 시작되었으며 수자가 미군 해병대 군악대와 함께한 첫 번째 여행 중에 작곡되었다. 그들은 뉴욕 버팔로에서 열린 범미 박람회에서 6월 한 달 동안 연주했으며, 수자는 그 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 이 행진곡을 썼다. 1918년의 정신은 수자에게 행진곡과 제목 <튼튼한 남자는 앞으로>(멋진 병사여 앞으로!)를 제공했다. 첫 2개의 변형에 나오는 저음 금관악기 섹션에서는 특별한 종류의 기교가 요구되며, 그 트리오는 미식축구의 부상과 함께 제공된 대학교 대항전 노래의 모델이다. 1차 세계대전 기간의 또 다른 행진곡은 수자가 1919년에 “미군 보병의 장교들과 병사들”을 위해 쓴 <총탄과 총검>이었다.


Sousa seems always to have been able to provide the appropriate title to his marches, and he rarely wrote about the manner of choice or the order in which they came to him. Concerning “The Liberty Bell”, however, he wrote: “During the Trocadero engagement [Chicago, 1893] I brought out ‘The Liberty Bell’. I had finished the march, but had not determined what its title should be, when on entering the Auditorium one day I chanced to see a spectacle there, called ‘America’. I was impressed by the very artistic scenic drop which depicted the Liberty Bell. At the end of the performance I went into the lobby of the Auditorium Hotel to inquire for my mail. A letter from my wife informed me that our little boy, Philip, had paraded that day in Philadelphia with his kindergarten class in honor of the Liberty Bell. The two incidents decided me. I called my new march ‘The Liberty Bell’….”


수자는 항상 그의 행진곡들에 적절한 제목을 제공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선택 방식이나 행진곡이 그에게 떠오른 순서에 대해 거의 쓰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유의 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트로카데로 교전[시카고, 1893] 동안 나는 ‘자유의 종’을 발표했다. 나는 행진곡을 끝냈지만, 제목이 무엇인지 결정하지 못했는데, 어느 날 오디토리엄 호텔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서 ‘아메리카’라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나는 자유의 종을 묘사한 매우 예술적인 무대 장치가 내려가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공연이 끝나자 오디토리엄 호텔 로비로 가서 내 우편을 문의했다. 아내가 보낸 편지에서 우리의 어린 아들 필립이 자유의 종을 기리기 위해 그날 필라델피아에서 유치원 수업으로 돌아다녔다고 알려왔다. 두 사건이 나를 결정했다. 나는 나의 새로운 행진곡을 ‘자유의 종’이라고 불렀다….”


Sousa’s 101st march was “The Gallant Seventh”, and he “brought it out” at a gala concert at the old New York Hippodrome on November 5, 1922, celebrating the thirtieth season of “Sousa’s Band.” The Seventh Regiment of New York has long been known for its gallantry in the service of our country. On the occasion of the first performance of “The Gallant Seventh”, Sousa augmented his band by that of the Seventh Regiment. Listening to this marvelous example of the Sousa style one cannot fail to comprehend him at the height of his mastery of marches.


수자의 101번째 행진곡은 <용감한 일곱 번째>였으며, 그는 “수자 밴드”의 30번째 시즌을 축하하는 1922년 11월 5일 구 뉴욕 히포드롬에서 열린 갈라 콘서트에서 “발표”했다. 뉴욕의 제7기병연대는 오랫동안 조국에 대한 용맹함으로 알려져 왔다. <용감한 일곱 번째>의 첫 공연을 계기로 수자는 제7기병연대 군악대로 그의 밴드를 보강했다. 수자 스타일의 이 놀라운 예를 들으면 행진에 대한 장악력의 절정에 있는 그를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The Rifle Regiment” (1886) was written for the 3rd Infantry, and it is one of the many he sold to publisher Harry Coleman for thirty-five dollars a title. It is one of his finest regimental marches and contains unusual structural features, such as an extended introduction that is repeated and a break-strain that is similarly lengthy and equally unique.


<소총 연대>(1886)는 제3보병연대를 위해 작곡되었으며, 그가 출판업자 해리 콜먼에게 개당 35달러로 판매한 많은 것 중 하나이다. 그의 가장 훌륭한 연대 행진곡 중 하나이며 반복되는 연장된 도입부, 유사하게 길고 똑같이 독특한 변형이 깨진 것과 같은 특이한 구조적 특징을 포함한다.


One of Sousa’s most unusual marches is the one he wrote in 1928 for the Governor and the people of New Mexico. Sousa’s skein was running out, but he had a few more good ones yet to give when he wrote those final marches. “New Mexico March” is one in which Sousa departs considerably from his customary observance of traditional march forms. Rarely did he attempt to color his marches with props or borrowed tunes, feeling, perhaps, that an appropriate title on a good, solid march was all he needed to provide. But when he decided to shed his traditions, he went all the way. “New Mexico” begins like many of his marches, after which he launches into a musical history of New Mexico, embracing with appropriate effects the music of the Indian, the cavalry, the Spanish, the Mexican, and concluding with a happy fusion of these diverse elements.


수자의 가장 특이한 행진곡 중 하나는 1928년에 뉴멕시코 주지사와 주민들을 위해 쓴 것이다. 수자의 실타래는 바닥났지만, 마지막 행진곡들을 썼을 때 아직 줄 수 있는 좋은 것들이 몇 개 더 있었다. <뉴멕시코 행진곡>은 수자가 전통적인 행진곡 형식에 대한 자신의 관습적 준수에서 상당히 벗어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행진곡들을 소품들이나 빌린 곡들, 어쩌면 훌륭하고 견고한 행진곡에 대한 적절한 제목이 그가 제공해야 할 전부라는 느낌으로 색칠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전통을 버리기로 했을 때 모든 방식을 사용했다. <뉴멕시코>는 그의 많은 행진곡처럼 시작되고, 그 후 그는 뉴멕시코의 음악사를 시작하여 인디언, 기병, 스페인, 멕시코의 음악을 적절한 효과로 수용하고 이러한 다양한 요소들의 행복한 융합으로 끝맺는다.


The Ancient and Honorable Artillery Company of Boston was honored in 1924 by one of Sousa’s traditionally solid regimental marches, one in which he included their appropriate song “Auld Lang Syne” as the complete trio.


보스턴의 오래되고 명예로운 포병 중대는 1924년 수자의 전통적으로 견고한 연대 행진곡 중 하나로 영예를 얻었으며, 여기에는 적절한 노래 <작별>이 완전한 트리오로 포함되었다.


In 1925 he wrote one of his best marches, “The Black Horse Troop”. This is a regimental march of classic content and proportions, one which serves as a model for all that are similar to it. Sousa wrote it for a famous band of Cleveland horsemen, Troop A, a magnificent mounted unit of the most beautiful black animals man ever rode. I saw them ride many times in my youth, including their performance at the concert of Sousa’s band to which my father took me when he played the march for the first time. Sousa was a devoted horseman and owned a beautiful black Arabian steed called Aladdin, which mount threw him, wrenching his right shoulder, causing him thenceforwards to adopt that conducting style in which he swung his arm from the elbow rather than the shoulder. Much more than Sousa’s talent for writing marches is present in “The Black Horse Troop”; his love for horses must surely have helped to make this one of his finest creations.


1925년에 그는 자신의 최고 행진곡 중 하나인 <흑마 기병 중대>를 썼다. 이것은 고전적인 내용과 균형을 갖춘 연대 행진곡으로, 이와 유사한 모든 것의 모델 역할을 한다. 수자는 인간이 탔던 가장 아름다운 검은 동물들의 장엄한 기마 부대인 클리블랜드 제1중대의 유명한 군악대를 위해 이 곡을 썼다. 나는 그가 처음으로 행진곡을 연주했을 때 아버지가 나를 데려간 수자 밴드의 콘서트에서 그들의 공연을 포함하여 그들이 말에 타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수자는 헌신적인 기병이었으며 알라딘이라는 아름다운 아라비아 흑마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말이 그를 던지고 그의 오른쪽 어깨를 비틀어 그 이후로 어깨가 아닌 팔꿈치에서 팔을 휘두르는 지휘 스타일을 채택했다. 행진곡을 쓰는 수자의 재능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흑마 기병 중대>에 있는데, 말에 대한 그의 사랑은 이것을 그의 가장 훌륭한 창작물 중 하나로 만드는 데 분명히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When Sousa was leader of the Marine Band (1880-1892) he presided over the music for the meetings of the Gridiron Club. Later, as his fame grew, it was he who listened while others played, and for his colleagues in this famous Washington fellowship he wrote his march “The Gridiron Club” (1926). That same season he brought out another of his superior marches, “The Pride of the Wolverines”, written for Mayor John W. Smith and the people of Detroit.


수자가 미군 해병대 군악대장(1880~1892)이었을 때 그는 미식축구 클럽의 회의를 위한 음악을 주재했다. 나중에 그의 명성이 높아짐에 따라 다른 사람들이 연주하는 동안 듣는 사람이 되었으며, 이 유명한 워싱턴 협회에서 동료들을 위해 행진곡 <미식축구 클럽>(1926)을 썼다. 같은 시즌에 그는 디트로이트의 존 W. 스미스 시장과 주민들을 위해 쓴 그의 뛰어난 행진곡 중 하나인 <울버린의 명예>를 발표했다.


In his careful salutations to important people, places, and things, Sousa wrote a march for that hallowed American institution, baseball. He dedicated it to its most famous commissioner, Judge Kenesaw Mountain Landis, and called it “The National Game” (1925).


중요한 사람, 장소, 사물에 대한 조심스러운 인사말로 수자는 그 신성한 미국의 국민 스포츠인 야구를 위한 행진곡을 썼다. 그는 이 곡을 가장 유명한 위원인 케네소 마운틴 랜디스 판사에게 헌정했으며, <내셔널 게임>(1925)이라고 불렀다.


“The Glory of the Yankee Navy” (1910) may have been part of an operetta on the subject, “The Yankee Girl”; Sousa spent his boyhood in and around the Navy Yard section of Washington, and while he served in the Marine Corps before he became a Lt. Commander in the Navy, he seems to have had a long-held and deep affection for the Yankee navy.


<미국 해군의 영광>(1910)은 “양키 소녀”라는 주제에 대한 오페레타의 일부였을 것이다. 수자는 어린 시절을 워싱턴의 네이비 야드 구역과 그 주변에서 보냈으며, 해군 중령이 되기 전에 해병대에서 복무하는 동안 미국 해군에 대한 오랜 깊은 애정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Sesqui-Centennial Exposition” was written to observe the 150th Anniversary of the Republic of the United States, a much-celebrated occasion and one to which Sousa contributed his most appropriate service.


<150년 박람회>는 매우 축하받는 행사이자 수자가 그의 가장 적절한 복무에 기여하기 위한 것인 미합중국 건국 150주년을 기념하여 작곡되었다.


“The Kansas Wildcats” honors that State, its University, and all that goes with this famous plains country. Sousa is alleged to have produced the march for a visit to the State in the early 1920s.


<캔자스 살쾡이>는 그 주, 그 대학, 그리고 이 유명한 평원 지역과 관련된 모든 것을 기린다. 수자는 1920년대 초에 미국 방문을 위한 행진곡을 만들었다고 한다.


Another of his earliest march efforts was one he wrote for the President of the Long Island Railroad, Austin Corbin, who happened to be the owner of Manhattan Beach, a famous seaside resort to which Sousa often brought his band in the initial seasons of his travels. The march he wrote for “Manhattan Beach” dates from the year of this first visit, 1893; it is the briefest of Sousa’s marches and one that, to me, seems to invite a bright and moving tempo.


그의 초기 행진곡 활동의 또 다른 하나는 롱아일랜드 철도 회사의 회장인 오스틴 코빈을 위해 쓴 것이었다. 그는 수자가 여행의 초기 시즌에 종종 밴드를 데려온 유명한 해변 휴양지인 맨해튼 비치의 소유주였다. 그가 <맨해튼 비치>를 위해 쓴 행진곡은 이 첫 번째 방문인 18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 곡은 수자의 행진곡 중에서 가장 짧으며, 내게 밝고 감동적인 템포를 초대하는 것 같다.


Bye the time Sousa had reached the fiftieth year of his career as a conductor he had conducted in all of the great and humble places of the world; for both the great and the humble people he met, he often left the token of his highest esteem, a march with their name on it. “Golden Jubilee” was his own salute to himself, observing fifty years of conducting that began in the theater pits of Philadelphia and took him around the world and into the hearts of all who ever saw him lead his famous band. Composers do not usually write pieces for themselves – but then, John Philip Sousa was not the usual composer.


수자가 지휘자로서 경력 50년이 되었을 때 그는 세상의 모든 위대하면서도 변변치 않은 곳에서 지휘했는데, 그가 만난 위대하고 겸손한 사람들에게 종종 가장 높은 존경의 표시로 그들의 이름이 적힌 행진곡을 남겼다. <황금 희년>은 필라델피아의 극장 무대들에서 시작하여 그를 전 세계와 그가 유명한 밴드를 이끄는 것을 본 모든 사람의 마음으로 데려간 50년간의 지휘를 관찰하면서 자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었다. 작곡가들은 대개 자신을 위한 곡들을 쓰지 않지만, 존 필립 수자는 흔한 작곡가가 아니었다.


All the marches recorded on this disc were played by the full instrumentation of the Eastman Wind Ensemble from the published editions. Sousa’s Marine Band of 1891 contained 49 players (26 reeds, 20 brasses, 3 percussion). The Eastman Wind Ensemble personnel lists 52 players: 25 reeds, 19 brasses, 6 percussion, harp, and string contrabass.


이 디스크에 녹음된 모든 행진곡은 출판된 에디션들에서 이스트만 관악기 앙상블의 전체 기악 편성으로 연주되었다. 1891년 수자의 미군 해병대 군악대에는 49명의 단원(26개의 목관악기, 20개의 금관악기, 3개의 타악기)이 있었다. 이스트만 관악기 앙상블에는 52명의 단원이 있었는데 25개의 목관악기, 19개의 금관악기, 6개의 타악기, 하프, 현악기 콘트라베이스가 있다.


Note by Frederick Fennell / 프레더릭 페넬 글


Quotations from Sousa’s autobiography, “Marching Along” (Boston: Hale, Cushman & Flint, 1927)


수자의 자서전 <함께 행진을>(보스턴 <헤일, 커시먼, 플린트> 출판사, 1927)에서 인용

댓글 1개:

  1. https://rutracker.org/forum/viewtopic.php?t=4913004

    Neige눈사람 드라이브
    https://drive.google.com/drive/u/0/folders/1wpfdQBgpLO2L-FFwchXvfngzHkuX1Yxh

    You have to download until 31 December 2022.

    2022년 12월 31일까지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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