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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21일 토요일
Melodiya / Grigory Ginsburg - Russian Piano School, Vol. 12
대가라는 말이 너무도 쉽게, 그리고 많이 쓰이고 있는 지금이다. 과연 우리에게 진실한 감동과 그 인간적이고 위대한 예술가적 풍모로 경외심마저 불러일으키게 하는 대가들은 사라져버렸는가? 어떤 예술가들은 평생 호화롭고 화려하게 그 발자취를 남겨 가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들 중에는 일생동안 누구도 다다를 수 없는 높은 경지에 이르렀으되 불운하여 혹은 너무도 짧은 생을 통해 빛을 보지 못하고 사후(死後)에 뭇 애호가들을 안타깝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리 긴즈부르크는 러시아어식 표현을 빌리자면 “삶의 길에서 너무 일찍 물러나버린” 대가 중 한 사람이다. 니즈니노브고로드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모스크바 음악원을 다니기까지 명교수 알렉산더 골덴바이저를 사사했으며, 졸업 시에 금메달의 수석을 차지했고 후에 모교의 교수로 재직하여 세르게이 도렌스키, 글렙 악셀로드, 알렉세이 스카브론스키 등 현재 러시아 피아노를 이끌어가고 있는 피아니스트들을 배출해낸 교육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작 그를 진정한 러시아 피아니스트의 전설 중 하나로 남아있게 만든 것은 그의 연주가 실린 음반들이다. 이제부터 그 전설에 귀 기울이자.
필자는 긴즈부르크와 꽤 가까운 인연을 갖고 있다. 유학시절 긴즈부르크의 집(현재는 그의 아들이 살고 있음)에서 잠시 기거한 적이 있었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러시아에서 유일한 영문음악 잡지의 편집장이자 음악평론가인 그의 아들 레프 긴즈부르크는 내게 아버지가 남긴 이런 음악적 유산이나 연주 스타일, 그때 당시의 러시아 음악계의 분위기 등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었고 지금도 음악학도로서의 내게 큰 경험으로 남아있다.
동시대의 연주자들 중 레코딩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진 긴즈부르크의 연주 성향은 한마디로 “정중동”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매우 예민하고 섬세하면서도 선이 뚜렷이 살아있는 싱잉 톤과 작품 전체를 꿰뚫는 통찰력 그리고 오랜 기간 꾸준히 갈고 닦아온 듯한 절제된 테크닉 등이 연주자 특유의 낙천적인 분위기 속에 한데 녹아있는 것이다. 그는 매우 정확하고 깔끔한 테크닉을 갖고 있었으나 겉으로 보이는 무대에서의 드러남이라든지 치장은 그와 관계없는 것이었다.
특히 그는 미스터치를 싫어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미스터치를 할 때마다 피아니스트를 튕겨져 나가게 하는 의자를 고안하고 싶어 했죠.” 레프 긴즈부르크는 웃으며 말하곤 했다. 제자에게 철두철미함을 교육하는 선생님, 또 자기 자신에게는 완벽함을 요구했음을 우리는 그의 연주를 들으면서 공감할 수 있다. 그의 레퍼토리는 주로 낭만파 음악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암울한 당시 공산체제의 정정과는 관계없이 현대 소비에트 작곡가, 즉 미야스코프스키, 카발레프스키, 파인베르크 등의 피아노 작품들의 소개에도 최선을 다했다. 또 러시아 작곡가들 중 안톤 루빈스타인, 아렌스키, 리아도프, 메트너 등의 연주에도 남다른 관심을 가졌으며 특히 안톤 루빈스타인의 제4번 협주곡과 연습곡들의 레코딩은 지금도 그 곡의 최고 명반으로 꼽히고 있다.
여기에 실린 리스트의 오페라 패러프레이즈들은 그가 가장 관심을 기울였으며 러시아 피아니스트들의 연주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단골 레퍼토리인 편곡 프로그램 중에서 가장 기교적으로나 음악적으로 완성된 것들만을 모은 것이다. 첫 곡인 “피가로의 결혼 중 두 개의 테마에 의한 판타지아”는 부조니에 의해 다시 손질이 가해진, 작곡가 한 명에 편곡자 두 명이라는 복잡한 구조를 거쳐 태어난 곡이다. 에밀 길렐스가 전 소련 연방 콩쿠르에서 우승했을 당시 그의 센세이셔널한 연주로 알려졌으며 피가로와 케루비노의 아리아 두 곡을 배합한, 화려함과 동시에 부조니 특유의 우수가 깃들어있는 것이다. 돈조반니를 심판하는 석상의 유니즌이 인상적인 “돈조반니의 회상”은 테크닉적으로 복잡하기로 소문난 리스트의 편곡들 중에서도 최고의 난곡이며, 곡이 쓰인지 150년이 가깝게 지나갔지만 아직도 대다수의 피아니스트의 실력을 시험케 한다. 긴즈부르크의 절제되고 구석구석 정리된 연주를 들어보면 자칫 잘못하면 난잡한 옥타브와 반음계의 연속으로 들릴 수 있는 이 곡의 핵심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노르마의 회상”은 조금 내성적인 성격을 갖고 있으며, 삼각관계의 가운데에서 고민하는 여사제의 탄식 소리가 들릴 듯한 무거운 팀파니 소리가 시종일관 인상적이다. 가장 유명한 리골레토 패러프레이즈는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 중 4막의 4중창을 기본테마로 삼아 다성부적인 진행을 보이면서도 장황하지 않고 잘 정리된 악상으로 말미암아 널리 사랑받고 있는 곡이다. 여기서 긴즈부르크의 터치가 각 주인공들의 목소리들과 오페라 안에서의 상반된 네 사람의 운명을 얼마나 정교하게 나타내주는지 귀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다. 누구나 알고 있을 왈츠의 선율이 인상적인 “파우스트”에서는 흥겨운 프랑스 왈츠의 리듬을 만끽할 수 있으며, 특히 왈츠를 지나 긴즈부르크가 보여주는 마르그리트의 내성적 표현이 일품이다.
앨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세빌리아의 이발사”는 다름 아닌 긴즈부르크 자신의 편곡이다. 이 피가로의 아리아는 흥겹고 밝은 곡이지만 워낙 성악적인 표현으로 가득 차 있어 피아노의 편곡이 용이하지 않은데, 긴즈부르크는 화려한 피아노의 비르투오시즘을 무리 없이 이끌어내고 있으며 연주 또한 이 곡이 위의 리스트의 오페라 편곡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마스터피스라는 것을 증명해주는데 부족함이 없다.
★ 필자 : 김주영 (피아니스트)
서울 출생. 서울 음대 기악과 졸업. 러시아 모스크바 음악원 아스피란트(박사) 과정 졸업.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사무엘 파인베르크의 제자인 지나이다 이그나체바 교수를 사사. 유학 중 모스크바 프로코피에프 콩쿠르, 파리 인터내셔널 그랜드 콩쿠르 등에서 입상.
Track
01 Liszt Fantasia on Mozart's Marriage of Figaro / 리스트 - 모차르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 의한 환상곡
02 Liszt Reminiscences of Don Giovanni / 리스트 - 돈 후안의 회상
03 Liszt Reminiscences from Bellini's Norma / 리스트 - 벨리니의 노르마의 회상
04 Liszt Paraphrase from Verdi's Rigoletto / 리스트 - 베르디 리골레토 패러프레이즈
05 Liszt Transcription of Gounod's Faust Waltz / 리스트 - 구노의 파우스트 왈츠 편곡
06 Ginsburg Transcription from Rossini's Barber of Seville / 긴즈부르크 - 로시니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 편곡
Goldenweiser's Best Pupil: Grigory Romanovich Ginsburg (1904-1961) / 골덴바이저의 최고 제자 - 그리고리 로마노비치 긴즈부르크
The name of Grigory Ginsburg is particularly associated with the music of Franz Liszt and more especially with the compositional world of the "virtuoso assoluto", which he himself continued to explore in the form of the piano transcription.
그리고리 긴즈부르크라는 이름은 특히 프란츠 리스트의 음악과 관련이 있는데, 피아노 편곡의 형식에서 그 자신이 계속 탐구했던 “절대적인 거장”의 작곡 세계와 특히 더 관련이 있다.
An Ambitious Goal / 야심찬 목표
Ginsburg's aesthetic outlook was basically aimed at providing enlightenment and proved both fruitful and popular. Whether as composer or teacher, he sought to make the works of the great composers as intelligible and accessible as possible to the widest circle of listeners. The choice of works that comprise the present recording makes it palpably plain that Ginsburg subscribed to the views of the "Mighty Handful" - a legacy which, handed down by Rimsky-Korsakov to at least to hundred students in the early 20th century, entailed a democratisation of musical life and of musical experience in general. It was for this reason that Borodin, Mussorgsky and Rimsky himself emphatically pinned their colours to the mast of opera and that all five members of the group championed programme music for piano and orchestra - form which, in comparison to such "absolute" genres as the string quartet, sonata, concerto and non-programmatical symphony, are designed to create a more immediate and accessible impression.
긴즈부르크의 심미적인 관점은 근본적으로 이해를 제공하는 것이 목표였으며 유익하고 유명한 것 모두 입증되었다. 작곡가이든 교사이든, 그는 위대한 작곡가들의 작품들을 가능한 한 가장 넓은 청취자 그룹에게 알기 쉽고 접근하기 쉽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이 음반을 구성하는 작품의 선택은 일반적으로 음악적인 삶과 음악적인 경험의 민주화를 수반하는 20세기 초반에 최소 100명 이상의 학생들에게 림스키코르사코프가 물려준 유산 <러시아 5인조>의 견해를 긴즈부르크가 구독했다는 것을 확실히 분명하게 만든다. 이런 이유로 보로딘, 무소르그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그 자신은 그들의 색깔을 오페라의 돛대에 단단히 고정시켰고 5인조 구성원들은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프로그램 음악을 옹호했다. - 스트링 콰르텟, 소나타, 협주곡, 프로그램에 없는 교향곡 같은 “절대적인” 장르와 비교해서 보다 즉각적이고 접근하기 쉬운 느낌을 주기 위해 고안된 형식.
A Stroke of Luck / 뜻밖의 행운
Ginsburg was born in Nizhny-Novgorod, one of the oldest cities in Russia. His staggering musical gifts persuaded his parents to approach one of the country's leading piano teachers, Alexander Goldenweiser, who initially entrusted the five-year-old student to his wife, before assuming personal responsibility not only for his musical education in 1916 but also, following the death of Ginsburg's father, for his general upbringing. His confidence was rewarded: after eight years of systematic study the now twenty-year-old Ginsburg graduated from the Moscow Conservatory with the institute's coveted gold medal. From 1924 to 1928 he worked as a research assistant at the Conservatory. Together with Tatiana Nikolayeva, Ginsburg has always been regarded as Goldenweiser's principal pupil.
긴즈부르크는 러시아의 가장 오래된 도시들 중 하나인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엄청난 음악적인 재능들은 그의 부모님이 지역의 유명한 피아노 교육자들 중의 한 명인 알렉산더 골덴바이저에게 접근할 것을 설득했다. 골덴바이저는 다음과 같은 개인적인 책임을 맡기 전에 5세 학생을 처음에는 그의 아내에게 맡겼는데, 1916년에 그의 음악적인 재능을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긴즈부르크의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그의 일반적인 양육을 위해서였다. 그의 신뢰는 보상받았다. - 8년간의 체계적인 공부를 거쳐 현재 20세가 된 긴즈부르크는 모스크바 음악원을 금메달(수석)로 졸업했다. 1924년부터 1928년까지 그는 음악원에서 연구 조교로 일했다. 타티아나 니콜라예바와 함께 긴즈부르크는 항상 골덴바이저의 최고 제자로 여겨져 왔다.
From Proletkul't to Persimfans / 프롤레트쿨트에서 페르짐판스로
Ginsburg was still only thirteen when, not altogether surprisingly, he began to give private lessons himself. In 1921 he started work as a pianist for Proletkul't (Proletarian Cultural and Educational Organisation), an activity that was to provide him with invaluable experience for his career on the concert platform. Three years later he was appointed to the staff of the Scriabin Institute; and in 1929 he joined the staff of the Moscow Conservatory, becoming a professor in 1935 and retaining this post until shortly before his death in 1961. Of crucial importance for Ginsburg's later development were his early years in the Goldenweiser household, which was a regular meeting-place for many of the great names in Russian music, including Scriabin, Rachmaninov and Nikolai Medtner. Medtner even pretended to be jealous of Ginsburg's abilities: "If only I could play Czerny's studies like that boy!"
긴즈부르크는 놀랍게도 그 자신이 개인 레슨을 했을 때만 해도 여전히 13세였다. 1921년에 그는 프롤레트쿨트(프롤레타리아 문화교육기구)의 피아니스트로 일하기 시작했는데, 콘서트 무대에서의 그의 경력에 대한 귀중한 경험을 제공하는 활동이었다. 3년 후 그는 스크리아빈 기관의 교수로 임명되었고 - 1929년에는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가 되었고 1935년에 정교수가 되었으며 1961년 사망 직전까지 이 지위를 유지했다. 긴즈부르크의 나중의 발전을 위해 단연 중요한 것은 골덴바이저의 가정에서의 초기였는데, 스크리아빈, 라흐마니노프, 니콜라이 메트너를 위시하여 많은 러시아 음악계의 대표 모임 장소였다는 것이다. 메트너는 긴즈부르크의 능력을 질투하는 척했다. - “내가 저 소년처럼 체르니 연습곡들을 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Ginsburg was eighteen when he made his concert debut, playing Liszt's E flat major Concerto in the Great Hall of the Moscow Conservatory. The evening was additionally noteworthy for the fact that the orchestra was Persimfans (Perviy Simfonicheskiy Ansamble' bez Dirizhora [First Conductorless Symphony Ensemble]): soloist and orchestra became a team, touring together throughout Russia, the Ukraine and the northern Caucasus. Their repertory gradually expanded and soon included not only works by Liszt but also Bach, Beethoven and Chopin.
긴즈부르크는 18세 때 콘서트 데뷔 무대를 가졌는데, 모스크바 음악원 대강당에서 리스트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했다. 이 이벤트는 오케스트라가 페르짐판스(지휘자 없는 최초의 심포니 앙상블)였다는 사실에도 주목할 만하다. - 솔로이스트와 오케스트라가 한 팀이 되어서 러시아, 우크라이나, 북부 코카서스 전역을 함께 여행했다. 그들의 레퍼토리는 점차 늘어났고 곧 리스트뿐만 아니라 바흐, 베토벤, 쇼팽의 작품들도 포함했다.
International Breakthrough with Chopin & Chamber Music / 쇼팽과 실내악에 대한 국제적 명성
At the end of 1926 Ginsburg gave his first-all-Chopin recital as a sort of dress rehearsal for the First International Chopin Competition that was to take place in Warsaw the following year. One man from Nizhny-Novgorod won a thoroughly respectable fourth prize and followed it up with a triumphant tour of Poland. On his return to Moscow, he began to work on a new repertory that reflected his new interest in arrangements and transcriptions - he played Bach, for example, in versions by Godowsky, Halston and Busoni. From this period dates his first encounter with Mozart in the form of Concerto No. 25 and the A major Sonata, as well as a lively interest in chamber music: Ginsburg played not only with well-known groups such as the Beethoven and Komitas String Quartets but also with violinists such as Dmitry Tsiganov, pianists of the stature of Heinrich Neuhaus, Lev Oborin and Grigory Kogan, and leading singers such as the tenor Nikolai Raisky. It was to this circumstance that Ginsburg owed his acute and well-developed sense of melodic line and phrasing, qualities that he needed not only to play the exuberant operatic paraphrases included in the present recording but to prepare others of his own. (In this context it is worth recalling the invaluable experience gained in this way by Sergei Rachmaninoiv whose melodic gifts were much enhanced by his work as Shalyapin's accompanist.)
1926년 말에 긴즈부르크는 그의 첫 번째 쇼팽 리사이틀을 이듬해 바르샤바에서 열리는 제1회 쇼팽 국제피아노콩쿠르 총연습의 일종으로 선사했다. 니즈니노브고르드 출신의 이 남자는 충분히 존경할만한 4위를 차지했고 성공적인 폴란드 투어로 이어졌다. 모스크바로 돌아오면서, 그는 개정과 편곡에 새로운 흥미를 반영했던 새로운 레퍼토리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 그는 바흐를 예로 들면 고도프스키, 핼스튼, 부조니의 편곡 버전으로 연주했다. 이 시기부터 모차르트와의 첫 만남은 협주곡 25번과 소나타 11번 K. 331의 형식뿐만 아니라 실내악에 대한 활발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 긴즈부르크는 베토벤 스트링 콰르텟과 코미타스 스트링 콰르텟 같이 잘 알려진 실내악단뿐만 아니라 드미트리 치가노프 같은 바이올리니스트들, 하인리히 네이가우스, 레프 오보린, 그리고리 코간 같은 위상을 가진 피아니스트들, 테너 니콜라이 라이스키 같은 주요한 성악가들과 협연했다. 긴즈부르크는 그의 예민하고 잘 발달된 선율과 프레이징의 감각, 이 음반에 포함된 활기 넘치는 오페라 패러프레이즈를 연주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다른 곡들을 준비하는데 필요한 자질 덕분에 이런 협연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가 샬리아핀의 반주자로서 그의 작품에 의해 선율에 대한 재능이 훨씬 향상되었다는 것에 의해 이런 방식으로 얻어진 귀중한 경험은 상기할 가치가 있다.)
Ginsburg's Best Years / 긴즈부르크의 전성기
Grigory Ginsburg was one of the first Soviet artists to be allowed to travel abroad. He returned to Poland in 1936 and later that same year paid his first visit to the Baltic Sates and Switzerland. (Among the same group was David Oistrakh.) Three solo recitals earned Ginsburg outstanding reviews. During the Second World War, he often performed on the front and in military hospitals. After 1945 he gave around one hundred concerts annually, in addition to teaching at the conservatory and making numerous recordings. In 1949 he was doubly acclaimed, when he was not only appointed an Honoured Artist or the RSFSR but also awarded the State Prize of the USSR. He now concentrated increasingly on Russian music and also played less familiar works both in the concert hall and recording studio, including Arensky's Fantasia and Piano Concerto and various miniatures by Anton Rubinstein, whose Fourth Concerto he recorded in a version under Aron Shereshevsky that was soon to become a collector's item. Meanwhile, his repertory had expanded to incorporate all the Beethoven Sonatas and almost the whole of Chopin and Liszt, including many transcriptions. Among the new pieces that he took into his repertory were works by Schumann (including "Carnaval"), Dvorak's Piano Concerto and works by Grieg.
그리고리 긴즈부르크는 해외여행이 허용된 최초의 소비에트 아티스트들 중의 한 명이었다. 그는 1936년에 폴란드로 돌아왔고 나중에 같은 해에 발트 해 연안과 스위스를 처음으로 방문했다. (다비드 오이스트라흐도 같은 무리에 속해 있었다.) 3번의 독주회로 긴즈부르크는 극찬 받았다. 2차 세계대전 동안 그는 군병원 안팎에서 종종 연주했다. 1945년 이후 그는 매년 약 100회의 콘서트를 열었으며, 음악원에서 가르치고 수많은 녹음도 했다. 1949년에 그는 두 배로 인정받았는데, RSFSR(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공훈예술가로 임명되었을 뿐만 아니라 소련 연방상도 받았다. 그는 점점 더 러시아 음악에 집중하고 콘서트홀과 녹음 스튜디오에서 아렌스키의 판타지아와 피아노 협주곡, 안톤 루빈스타인의 다양한 소품들을 비롯하여 덜 익숙한 작품들도 연주했다. 그가 아론 셰레셰프스키의 버전으로 녹음했던 안톤 루빈스타인의 제4번 협주곡은 곧 컬렉터의 아이템이 되었다. 한편 그의 레퍼토리는 많은 편곡들을 위시하여 베토벤 소나타 전곡과 쇼팽과 리스트의 거의 모든 작품들을 포함하도록 확대되었다. 그의 레퍼토리에 들어간 새로운 곡들 중에는 슈만의 작품들(<사육제> 포함), 드보르작 피아노 협주곡, 그리그의 작품들이 있었다.
Impressive Versatility / 인상적인 다재다능함
Ginsburg's increasing fascination with chamber music encouraged him to take into his repertory not only Grieg's A minor Piano Concerto but also the same composer's E minor Sonata and his own arrangement of pieces based on the incidental music to "Peer Gynt". He played the three violin sonatas with the violinist Leonid Kogan, and performed Grieg's songs with the soprano Nadezhda Sukhovitsina. As if that were not enough, he began to take an interest in piano making at the end of the 1940s, ensuring that only the finest instruments were produced not only for the concert hall but also for teaching purposes and for domestic use. He published widely on the subject and entered into correspondence with international firms such as Steinway and Petroff.
긴즈부르크의 점점 늘어나는 실내악에 대한 매료는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뿐만 아니라 그리그의 소나타와 그리그의 모음곡 <페르 귄트>에 대한 부수적인 음악을 토대로 한 긴즈부르크 자신의 편곡들도 그의 레퍼토리에 넣도록 장려했다. 그는 바이올리니스트 레오니드 코간과 그리그 바이올린 소나타 3곡, 소프라노 나데즈다 수호비치나와 그리그의 노래들을 협연했다. 그만큼으로도 충분하지 않았던지 그는 1940년대 말에 피아노 제작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콘서트홀뿐 아니라 교육 목적 및 가정용 용도로 최고의 악기만 생산되도록 했다. 그는 그 대상에 대해서 폭넓게 출판하고 스타인웨이, 페트로프 같은 국제적인 피아노 회사들과 서신 왕래를 시작했다.
A Foreign Comeback and an Indian Summer / 외국 복귀와 행복한 성공
Ginsburg resigned his teaching appointment in 1956 in order to concentrate more fully on giving concerts. His first foreign tour of the post-war period took him to the Liszt-Bartok Festival in Hungary. Three years later he visited Czechoslovakia. The curse was lifted: now everyone wanted to hear him. In spite of the first of a series of heart attacks, he refused to give up but forced himself to undertake a tour of Yugoslavia in 1961. That he was fully in command, at least temporarily, is clear from local press reports, which spoke of his "enchantingly beautiful touch and a technique that knows virtually no limitations". For the autumn of his final year he had planned another tour of Poland but by then he was already in hospital. On the day when his first concert was due to have taken place, Warsaw Radio broadcast one of his many recordings. He died in Moscow on 5 December 1961.
긴즈부르크는 콘서트를 가지는 데에 더욱 집중하기 위해 교수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첫 전후 해외 투어는 헝가리의 리스트-버르토크 페스티벌이었다. 3년 후 그는 체코슬로바키아를 방문했다. 저주가 풀렸다. - 지금 모든 사람이 그를 듣고 싶어 했다. 일련의 심장마비가 처음으로 있었음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지만 1961년 유고슬라비아 투어를 강행했다. 적어도 일시적으로 그는 완전히 거느렸다는 현지 언론의 보도에서 분명했는데, 그의 “매혹적인 아름다운 터치와 사실상 제한이 없는 기술”에 대해 말했다. 말년 가을에는 폴란드 투어를 계획했지만, 그때 그는 이미 병원에 있었다. 첫 콘서트가 열리기로 되어있던 날에 “바르샤바 라디오”는 그의 많은 녹음들 중의 하나를 방송했다. 그는 1961년 12월 5일 모스크바에서 영면했다.
Operas in Black and White by a Wizard of the Keyboard / 건반의 마법사에 의해 인쇄된 오페라들
Our operatic recital begins with Liszt's fantasy on Mozart's "Le nozze di Figaro", completed by Busoni. It opens impressively with a dotted rhythm followed by a descending third, which listeners will recognise as the beginning of Figaro's famous aria, "Non piu andrai". Before the melody is heard complete, however, we are forced to stare into a veritable abyss, as Liszt lays bare the opera buffa's demonic background, interpreting the passions depicted from his standpoint as a Romantic artist and bringing out their unsettling qualities. Equally magnificent is the chromatically descending bass line, followed by Cherubino's canzone from Act Two, "Voi che sapete", which gives Liszt the opportunity to indulge in one of his favourite devices: he first entrusts the melody to the piano's middle register and only later gives it to the treble, where it is increasingly richly ornamented, accumulating ever greater complexities as it builds to a typically Lisztian climax.
우리의 오페라 작품 리사이틀은 리스트의 모차르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 의한 환상곡(부조니가 완성)으로 시작한다. 이 곡은 청취자가 <피가로의 결혼> 중 유명한 아리아 <더 이상 날지 못하리>의 시작으로 인식할 하강하는 3도로 이어지는 붓점 리듬으로 인상적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멜로디가 완전히 들리기 전에 우리는 진정한 심연을 응시할 것을 강요당하는데, 리스트가 오페라 부파(이탈리아어로 쓰인 가벼운 내용의 희극적인 오페라)의 악마 같은 배경을 까발리는 것처럼, 낭만파 아티스트로서 그의 입장에서 묘사된 열정을 해석하고 그들의 불안정한 성격을 끌어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웅대한 것은 반음계로 하강하는 베이스 선율인데, <피가로의 결혼> 2막에 나오는 케루비니의 칸초네 <사랑의 괴로움을 그대는 아는가>로 이어지면서, 리스트에게 그가 좋아하는 묘안 중의 하나에 탐닉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 그는 먼저 멜로디를 피아노의 중간 성부에 맡기고 나중에는 고음역에만 멜로디를 주는데, 멜로디는 점점 풍부하게 장식되고, 전형적으로 리스트적인 클라이맥스에 멜로디를 구축하는 것처럼 점점 복잡한 것을 쌓는다.
https://www.youtube.com/watch?v=yz8n2tVyGwc
Liszt Fantasia on Mozart's Marriage of Figaro - "Non piu andrai" (descending third) / 리스트 - 모차르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중 아리아 <더 이상 날지 않으리> 선율이 붓점 리듬으로 하강하는 3도 음정
Liszt Fantasia on Mozart's Marriage of Figaro - "Non piu andrai" (chromatically descending bass line) / 리스트 - 모차르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중 아리아 <더 이상 날지 않으리>에서 반음계로 하강하는 베이스 선율
https://www.youtube.com/watch?v=mDeFdGzthV0
Liszt Fantasia on Mozart's Marriage of Figaro - Cherubino's canzone "Voi che sapete" (middle register) / 리스트 - 모차르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중 케루비노의 아리아 <사랑의 괴로움을 그대는 아는가>에서 중간 성부에 있는 멜로디
Liszt Fantasia on Mozart's Marriage of Figaro - Cherubino's canzone "Voi che sapete" (the treble) / 리스트 - 모차르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중 케루비노의 아리아 <사랑의 괴로움을 그대는 아는가>에서 고음역에 있는 멜로디
It was with showmanship of this order that Liszt repeatedly had his audiences eating out of the palm of his hand. Yet he also brought these operas and, in the case of Schubert, the composer's lieder to the attention of a wider public, ensuring a far greater popularity than any modern advertising campaign could achieve.
그것은 리스트가 반복적으로 그의 청중을 그의 손바닥 안에 있게 했던 이 명령의 쇼맨십과 함께 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이 오페라들을 가져왔는데, 슈베르트의 경우, 작곡가의 가곡을 현대의 광고 캠페인이 달성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인기를 확보하면서 대중에게 더 널리 알렸다. (리스트는 슈베르트의 가곡들을 많이 편곡했다.)
Listeners hoping to find in the "Don Giovanni" paraphrase the same surprising qualities that we met in the "Figaro" fantasy will not be disappointed. Its fatalistic opening anticipates the ending of Mozart's "dramma giocoso" or "semiseria", with its anti-hero's descent into hell. The repeated-note motif embodies destiny or fate and looks forward to Beethoven's Fifth Symphony, with its added minor third. The paraphrase's principal melody is that of the dust, "La ci darem la mano", which also inspired Chopin to write a set of variations for piano and orchestra. How innocent Don Giovanni's wooing seems at first sight! And how easily one might be taken in by the old scoundrel, especially if one were young and inexperienced. Neither here nor in Liszt's fantasy on Bellini's masterpieces, "Norma", will the listener have much difficulty in imagining what happens next.
우리가 <피가로의 결혼> 환상곡에서 만났던 깜짝 놀랄만한 특성을 마찬가지로 <돈조반니> 패러프레이즈에서 찾고 싶어 하는 청취자들은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돈조반니>의 운명적인 오프닝은 반영웅(일반인과 다를 바 없거나 도덕적으로 나빠 전통적인 영웅답지 않은 소설 속 주인공)이 지옥으로 하락하는 것과 함께 모차르트의 “해학극”이나 “진지한 ‘오페라 세리아’(그리스 신화나 고대의 영웅담을 제재로 한 엄숙하고 비극적인 이탈리아 오페라)의 요소가 강한 희극 오페라”를 예상한다. 반복되는 음의 모티프는 운명을 상징하고 이 모티프에 추가된 단3도 음정으로 베토벤 교향곡 제5번을 기대한다. 패러프레이즈의 주된 멜로디는 먼지투성이인데 쇼팽이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변주곡으로 쓰는 데에 영감을 주기도 했던 <자, 서로 손을 잡고>이다. 돈조반니의 구애가 첫눈에 보이는 게 순수하다! 그리고 한 사람이 젊고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면, 한 사람이 늙은 악당에 의해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게 얼마나 쉬운가. 여기도 아니고 벨리니의 걸작 <노르마>에 대한 리스트의 환상곡도 아니고, 청취자가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Liszt: Reminiscences of Don Giovanni (repeated-note motif) / 리스트 <돈 후안의 회상>에서 반복되는 음의 모티프(빨간 동그라미)와 밑에 추가된 단3도 음정(파란 동그라미)
https://www.youtube.com/watch?v=NqPcb1nKZYg
Liszt: Reminiscences of Don Giovanni (La ci darem la mano) / 리스트 <돈 후안의 회상>에서 <자, 서로 손을 잡고>의 선율
In the case of Verdi's "Rigoletto", it is no accident that the most seductive of all musicians chose to paraphrase the dramaturgical showpiece of the work, the bewitchingly beautiful quartet from Act Three, "Bella figlia dell'amore", in which the four characters' disparate, not to say contradictory, moods are expounded simultaneously, as the Duke attempts to seduce Maddalena, and Gilda and Rigoletto express their conflicting emotions.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의 경우, 대부분의 모든 매력적인 음악가들이 이 작품의 연출상의 대본을 다른 말로 바꿔서 표현하는 것이 우연이 아닌데, <리골레토> 3막에서 서로 성격이 다른 4명이 부르는 매혹적으로 아리따운 4중창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아가씨여>는 모순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공작이 마달레나를 유혹하려고 시도하면서 질다와 리골레토가 상충되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처럼 분위기가 동시에 설명된다.
Gounod's world-famous waltz from his opera "Faust" is introduced by Liszt as though it were one of his Mephisto Waltzes. Of all his operatic paraphrases, this relatively brief example most immediately recalls the brilliant improvisations with which the "virtuoso assoluto" astonished his listeners: it is limited to a single theme and eschews any complicated interrelationships.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에서 나온 세계적으로 유명한 왈츠는 마치 리스트의 메피스토 왈츠 중 하나인 것처럼 리스트에 의해 소개되었다. 그의 모든 오페라 패러프레이즈 중에서, 이 비교적 간단한 예가 “절대적인 거장”이 그의 청취자들을 놀라게 했던 것과 함께 가장 즉시 훌륭한 즉흥 연주를 연상케 한다. - 이 곡은 하나의 주제로만 제한되며 복잡한 상호 관계는 피한다.
The final piece finds Ginsburg appearing as his own arranger and in doing so picking up a specifically Russian tradition: legion were the orchestral works which, from the mid-19th century onwards, were transcribed for piano solo in a country that had so very few symphony orchestras. And so that his recital may come full circle, Ginsburg returns to the subject with which he began - Beaumarchais' Figaro - but this time in the guise of Rossini's factorum from "Il barbiere di Siviglia", which tells of the events that take place before the curtain goes up on Mozart's "opera buffa".
마지막 곡에서는 긴즈부르크가 편곡자로 나오고 그렇게 하면서 특히 러시아 전통을 고수한다. - 많은 곡들이 19세기 중반부터 교향악단이 거의 없는 나라에서 피아노 독주로 편곡된 오케스트라 작품들이다. 그리고 그의 리사이틀이 충분해질 수 있도록 긴즈부르크는 그가 시작했던 주제로 돌아온다. - 18세기 프랑스의 극작가 보마르셰의 <피가로의 결혼> - 그러나 이번에는 로시니의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에 나오는 요소들로 변장하는데, 모차르트의 “오페라 부파”(이탈리아어로 쓰인 가벼운 내용의 희극적인 오페라)에서 커튼이 올라가기 전에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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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한글 정보에서 영어 해석하는데 보탬이 될 만한 정보를 찾을 수가 없었다.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의 개념은 고등학교 때 배웠다.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는 무산계급(無産階級) 또는 노동계급(勞動階級)이라고도 하는데, 정치상의 권력이나 병력의 의무도 없고 다만 자식밖에 남길 수 없는 무산자들을 의미하는 라틴어 "Proletarius"에서 나온 말이다. 즉 자기 자신의 생산수단을 갖고 있지 않으며 오직 살기 위한 노동만을 필요로 하는 임금노동자(賃金勞動者) 계급을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여 생활을 영위해 가는 무산자 계급, 노동력 이외에는 생계 수단을 갖지 못한 빈곤층을 지칭하기 위해 독일의 사회학자인 마르크스(Marx, Karl Heinrich)가 1840년대에 사용한 개념이다. 부르주아(Bourgeois)는 무산계급의 값싼 노동력을 활용하여 이익을 극대화하는 계층이다. 중세의 신흥 부르주아 계급엔 자영농민층(自營農民層), 직인(職人), 도제(徒弟), 상인자본가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금권을 쥔 그들은, 무산 계급을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자유롭게 해고할 수 있었기 때문에 무산자 계급을 착취하는 주체로서 성장하였다. 부르주아지는 상업을 통해 축적한 막대한 자본으로 다른 생산수단을 매입하고, 발생하는 잉여 이익을 재독점하면서 자본주의 경제 구조를 축조하기 시작하였다. 그들 중의 일부는 생산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보수를 삭감하거나 몰수하기도 하여 무산 계급의 집단적 반발을 사기도 하였다. <인디언 서머>는 영화 제목으로도 있는데 가을에 한동안 비가 오지 않고 날씨가 따스한 기간으로, (특히 만년에 맞게 되는) 행복한 성공을 의미하기도 한다. 오페라에 대한 설명은 길어서 해당 정보를 찾아서 링크 걸었다.
https://classicalpippo9.com/2017/10/24/russian-pianist-school-vol-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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