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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23일 월요일
Melodiya / Lev Oborin - Russian Piano School, Vol. 13
20세기의 음악계는 콩쿠르와 경연대회의 무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음악을 사랑하고 그에 충실히 봉사하려는 소신을 갖고 콩쿠르에 참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단순한 경쟁 심리에서, 또 명예를 목표로 그 무대에 뛰어드는 사람들까지 합쳐져 21세기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지금 세계는 바야흐로 콩쿠르와 여러 가지 대회들로 포화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불과 3, 40년 전부터의 일이다. 레프 오보린이 1927년 제1회 바르샤바 쇼팽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했을 당시는 지금과 달리 음악에 경연대회라는 개념이 확립되지도 않았던 시기였고 오보린은 그 결과 사회주의 혁명 후 이른바 “소비에트 연방의 문화적 저력”을 전 세계적으로 확인받게 한 산증인이 되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의미가 어떠했든 그것은 본인의 삶이나 예술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보린 같은 성품의 예술가에게는 특히 그러했을 것이다.
레프 니콜라예비치 오보린은 모스크바 태생이며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K. N. 이굼노프에게 피아노를, 그리고 카투아르와 미야스코프스키에게 작곡을 배웠다. 1928년 아스피란트(박사) 과정을 마치고 오보린은 이굼노프의 어시스턴트를 맡았다가 후에 그의 카페드라(교수직)를 이어받아 학과장으로 재직하면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의 제자들 중에는 유명한 V. 아쉬케나지, Y. 노비츠카야, 그리고 현재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로서 이굼노프와 오보린의 전통을 후대에 전수해주고 있는 미하일 보스크레젠스키 등이 있다.
그는 음악원 교수로 재직 당시 “모스크바의 음악적 양심”이라고 불려졌다. 연주자로서 그는 작곡가의 의도에 맞게 쓰인 작품의 충실한 전달자로서의 의무에 충실함을 최고의 덕목으로 꼽았다. 어떠한 치장이나 꾸밈, 겉치레나 편협한 연주자 개인의 버릇과 고집 등은 그가 혐오하다시피 하던 것이었다. 그는 피아니스트로서 청중들과 누구보다도 가까이 함께 호흡했던 사람이었지만 괴팍한 취향이나 비문화적인 성향에 대해서는 비난을 서슴지 않았고 일생동안 매우 고고한 아폴론적 예술을 추구했다. 러시아의 시인 벨린스키는 “단순함은 진실하기 때문에 아름답다.”라고 읊었는데, 바로 오보린의 예술세계에 아주 적절한 묘사가 아닐 수 없다. 성실하고 진실한 삶을 통해 추구해나가는 가장 깨끗하고 단순하며 정제된 음악이 바로 오보린의 음악이다. 쇼팽의 스페셜리스트였으나 그는 절제된 루바토와 시정으로 후세의 쇼팽 해석에서 (특히 에튀드, 녹턴, 소나타 등) 빼놓을 수 없는 큰 기준을 만들어냈으며, 당대 최고의 베토벤 해석가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또한 드뷔시의 우미적인 표현을 뛰어넘은 절대 음악적 해석으로 주목받는 등 오보린은 러시아 음악뿐만 아니라 서유럽 음악 또 나아가서 영화, 연극, 발레 등 방대한 문화적 소양의 다방면의 인텔리전트로도 알려져 있었다. 그 하면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실내악 연주자로서의 활동인데, 명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스비아토슬라프 크누셰비츠키와의 트리오 연주는 20세기 초, 중반 러시아 최고의 앙상블로 이름이 높았으며 오이스트라흐와의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전집 레코딩은 단순히 아쉬케나지의 선생 정도로만 알려졌던 오보린의 이름을 서방 세계에 알린 좋은 계기가 되었다.
다분히 환상곡풍의 성격을 띠고 있는 베토벤의 소나타 Op. 110은 에스프레시브한 1악장, 변덕스럽고 해학적인 기분의 2악장을 거쳐 레시타티브가 딸린 아리아와 푸가로 이어지는데, 특히 아리아를 주목해보자. 선행되는 레시타티브와 아리아의 진행은 분명 베토벤풍이 아닌 이탈리아 벨칸토 오페라(예를 들면 벨리니)의 그것이다. 베토벤은 생전에 로시니의 음악에 많은 흥미를 가졌었고 그 때문에 이탈리아인의 선율미에 대한 호감을 갖고 있었으리라 여겨지는데 어찌됐든 이런 짤막한 아리에타의 부분마저도 베토벤 특유의 기법과 후기 소나타들에서만 느껴지는 초월적 분위기에 녹아들고 있어 악성의 그림자를 새삼 느끼게 한다.
오보린은 탁월한 화성 감각과 천부적인 음악적 타이밍으로 인해 상반된 악장이 (때로는 각 악장 사이에 전혀 상관관계가 없는) 여럿 모여 있는 곡들, 예를 들면 바흐의 파르티타나 슈베르트의 마지막 B flat 장조 소나타 등의 레퍼토리에서 훌륭한 구성력을 보여주고 있는데, 쇼팽의 B단조 소나타에서도 슈만이 “서로 판이한 성질을 갖고 있는 네 사람을 억지로 소나타라는 집에 모아놓은 듯하다”라고 평했던 곡인만큼 오보린의 뛰어난 구성력이 빛을 발하고 있다. 응집력이 있는 1악장과 2악장, 부드럽고 사색적이나 결코 감상에 빠지지 않는 3악장을 거쳐 화려하면서도 절도 있는 피날레에 이르기까지 오보린은 실로 감탄할만한 솜씨로 쇼팽의 곡 중에서도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이 곡을 결론내리고 있다.
브람스 최만년의 작품인 4개의 작품 Op. 119는, 그의 말년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고질적인 체념과 비탄, 그리고 비밀스러움으로 인해 모든 피아니스트들에게 문제작으로 남아있는데, 오보린은 진실로 작곡가에 충실하였던 연주자답게 자신을 모두 내던지는 듯한 집중력으로 곡을 해석해낸다. 오보린의 제자 M. 보스크레젠스키는 그의 브람스 연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오보린은 진정으로 브람스의 깊은 내면의 회한이나 동경 같은 것들에 공감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피아니스트였습니다. 그가 브람스를 연주할 때마다 청중들은 이런 ‘기적’을 경험하곤 했습니다.”
마침내 오보린의 러시아 음악에 도착했다. 스크리아빈의 소나타 제2번은 소나타-판타지라고도 불리며, 대조되는 성격의 두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보린의 연주는 쇼팽에게 경도되어 있는 젊은 스크리아빈의 모습을 뚜렷이 그려내 준다. 특히 2악장 프레스토는 깔끔하게 연주해내기가 어떤 스크리아빈의 에튀드보다도 어려운데 오보린은 세계적인 명교수답게 오소독스하면서도 초절적인 기교로 멋지게 요리해내고 있다.
★ 필자 : 김주영 (피아니스트)
서울 출생. 서울 음대 기악과 졸업. 러시아 모스크바 음악원 아스피란트(박사) 과정 졸업.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사무엘 파인베르크의 제자인 지나이다 이그나체바 교수를 사사. 유학 중 모스크바 프로코피에프 콩쿠르, 파리 인터내셔널 그랜드 콩쿠르 등에서 입상.
Track
01 Beethoven Sonata No. 31 in Ab, Op. 110: 1. Moderato cantabile molto espressivo / 베토벤 소나타 31번
02 Beethoven Sonata No. 31 in Ab, Op. 110: 2. Scherzo. Allegro molto
03 Beethoven Sonata No. 31 in Ab, Op. 110: 3. Adagio ma non troppo -
04 Beethoven Sonata No. 31 in Ab, Op. 110: 3. Fuga. Allegro ma non troppo
05 Chopin Sonata No. 3 in b, Op. 58: 1. Allegro maestoso / 쇼팽 소나타 3번
06 Chopin Sonata No. 3 in b, Op. 58: 2. Scherzo. Molto vivace
07 Chopin Sonata No. 3 in b, Op. 58: 3. Largo
08 Chopin Sonata No. 3 in b, Op. 58: 4. Finale. Presto, non tanto
09 Brahms 4 Pieces, Op. 119 No. 1 Intermezzo in b / 브람스 4개의 소품 작품 119
10 Brahms 4 Pieces, Op. 119 No. 2 Intermezzo in e
11 Brahms 4 Pieces, Op. 119 No. 3 Intermezzo in C
12 Brahms 4 Pieces, Op. 119 No. 4 Rhapsody in Eb
13 Scriabin Sonata No. 2 in g#, Op. 19 (Sonate-fantaisie): 1. Andante / 스크리아빈 소나타 2번 <소나타-판타지>
14 Scriabin Sonata No. 2 in g#, Op. 19 (Sonate-fantaisie): 2. Presto
Beauty Created: Lev Nikolayevych Oborin (1907-1974) / 아름다움을 창조하다 - 레프 니콜라예비치 오보린
Lev Oborin belongs to the same generation as Ginsburg, being born only three years later in Moscow. A relatively "late starter", he received his first musical impressions from his father, a railway engineer, who enjoyed singing and could play the piano. When the boy began picking out chords and melodies on the instrument his father taught him the basics of musical notation.
레프 오보린은 긴즈부르크와 동세대에 속하는데, 긴즈부르크보다 불과 3년 늦게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상대적으로 “후발 주자”인 그는 노래하는 것을 즐기고 피아노를 칠 수 있었던 철도 기술자인 아버지에게서 그의 첫 음악적인 인상을 받았다. 소년이 악기에서 화음과 멜로디를 골라내기 시작했을 때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음악 표기법의 기초를 가르쳐주었다.
"The Boy Who Composes" / “작곡하는 소년”
Lev's musical education proper began in 1914 when he entered the Gnesin Music School. Soon he was admitted to the piano class given by Yelena Gnesina, a teacher who employed what was in those days an extremely progressive method of teaching based on that of Vasily Safonov and Ferrucio Busoni. Dull technical exercises were not called for: each scale, each etude was to be filled with true musical expression coupled with an endeavour to perfect the touch (a method which goes back to Schumann as set out in his instructive manual entitled "Haus- und Lebensregeln"). In addition, every effort was made to nip the pupils' stage-fright in the bud and to accustom them to performing in public. The study pieces were, therefore, always presented in school concerts. A third requirement was that of learning repertoire by heart. Lev, however, exhibited further talents and was admitted to the composition class. Madame Gnesina presented him to the great Rachmaninov with the words, "this is the boy who composes".
레프의 정식 음악 교육은 1914년 그네신 음악학교에 입학하면서 시작되었다. 얼마 후 그는 바실리 사포노프와 페루치오 부조니의 가르침을 토대로 극도로 진보적인 교수법을 채택한 교육자 엘레나 그네시나의 피아노 클래스에 들어갔다. 무의미한 기술적인 연습이 요구되지 않았다. - 각각의 스케일, 각각의 에튀드는 터치(슈만이 그의 <생활의 질서와 규칙>라는 제목의 교훈적인 설명서에서 시작했던 것처럼 슈만으로 돌아가는 방법)를 완벽하게 하기 위한 노력과 결부된 진정한 음악적인 표현으로 채워져야 했다. 또한 제자들의 무대공포증을 미연에 방지하고 대중 앞에서 연주하는 것이 익숙해지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므로 연습곡들은 항상 학교 연주회에서 발표되었다. 세 번째 요구사항은 외워서 레퍼토리를 배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레프는 더 많은 재능을 보여줬고 작곡 수업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네시나 여사는 위대한 작곡가 라흐마니노프에게 “얘는 작곡하는 소년”이라는 말로 그를 소개했다.
Praise from Szymanowski / 시마노프스키로부터의 찬사
At the age of 14, Lev Oborin entered the Moscow Conservatory where he studied piano under Konstantin Igumnov and composition with Georgy Konyus (who also taught Scriabin, Medtner and Goldenweiser) and Nikolai Myaskovsky (who had himself studied with Rimsky-Korsakov and Liadov and counted Khachaturian among his pupils). The eager student took up conducting as soon as he was able, - first with Konstantin Saradzhev and later with Bruno Walter and Hermann Abendroth.
14세에 레프 오보린은 모스크바 음악원에 들어가서 콘스탄틴 이굼노프에게서 피아노, (스크리아빈, 메트너, 골덴바이저를 가르치기도 했던) 게오르기 코뉴스와 (림스키코르사코프, 리아도프와 함께 공부했으며, 제자들 중에 하차투리안이 있었던) 니콜라이 미야스코프스키에게서 작곡을 배웠다. 열심히 공부한 학생은 가능한 한 빨리 지휘를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콘스탄틴 사라제프, 나중에는 브루노 발터와 헤르만 아벤트로트를 사사했다.
Lev Oborin passed his final examinations with distinction and his name appeared in gold letters on the famous marble panel in the foyer of the Conservatory. For his examination pieces he chose Liszt's "Fantasia on Mozart's Le nozze di Figaro" which was completed by Busoni, and one of the most difficult piano concertos ever written, namely Rachmaninov's Third. Proof enough of the young maestro's talents!
레브 오보린은 졸업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했으며, 그의 이름은 음악원 로비의 유명한 대리석 패널에 금 글씨로 나타났다. 졸업곡을 위해서 그는 리스트가 작곡하고 부조니가 완성한 모차르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 의한 환상곡과 가장 어려운 피아노 협주곡들 중의 하나인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3번을 선택했다. 젊은 마에스트로의 재능에 대한 충분한 증거!
In 1927 Lev Oborin won the first Warsaw International Chopin Competition. The highest praise awarded him was from Karol Szymanowski who said, "It is no shame to bow before him. He created beauty!".
1927년 레프 오보린은 바르샤바에서 열린 제1회 쇼팽 국제피아노콩쿠르에서 우승했다. 그에게 주어진 극찬은 카롤 시마노프스키가 “그에게 절을 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다. 그는 아름다움을 창조했다!”고 했던 말이었다.
Oistrakh's Partner / 오이스트라흐의 파트너
Once back in Moscow Oborin taught chamber music, a genre to which he was increasingly attracted, although a post-graduate assistant to Igumnov at the time. During the course of his life he partnered the violinist Dmitry Tsiganov many times and together they performed violin sonatas by Beethoven, Mozart and Grieg. He was also a member of the Moscow Conservatory String Quartet (renamed the Beethoven Quartet). Lev Oborin is best known, however, for his partnership with David Oistrakh which began in 1935. During the war the duo was joined by the cellist Sviatoslav Knushevitsky and the three recorded piano trios by Beethoven, Schubert, Tchaikovsky, Rachmaninov and Ravel, many of which were awarded prizes in the West.
모스크바에 돌아와서 오보린은 실내악을 가르쳤는데, 당시에 대학원생이었지만, 점점 매력을 느끼는 장르였다. 인생의 과정 동안 그는 바이올리니스트 드미트리 치가노프와 여러 번 협연했는데 그들은 베토벤, 모차르트, 그리그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연주했다. 그는 모스크바 음악원 스트링 콰르텟(베토벤 콰르텟으로 개칭)의 일원이기도 했다. 그러나 레프 오보린은 1935년에 시작했던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의 파트너십으로 잘 알려져 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듀오는 첼리스트 크누셰비츠키의 합류로 트리오가 되어 베토벤, 슈베르트,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 라벨의 피아노 트리오를 녹음했으며, 서방에서 많은 상을 받았다.
Concert Platform or Lecture Hall / 콘서트 플랫폼 아니면 강당
During wartime, Lev Oborin purposefully played a great deal of patriotic, Russian repertoire, including works by Rubinstein and Lyapunov. But contrary to the majority of his colleagues he began to give concerts outside Russia before the war had ended, visiting Austria, Bulgaria, Rumania and Czechoslovakia. Later Germany, France, Belgium, Great Britain, Finland, Denmark and Japan were added to his schedule.
전시 기간 동안 레프 오보린은 루빈스타인과 리아푸노프의 작품들을 포함하는 많은 애국적인 러시아 레퍼토리를 의도적으로 연주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동료들과 달리 그는 러시아 밖에서 콘서트를 가지기 시작했는데, 전쟁이 끝나기 전에 오스트리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를 방문했다. 나중에는 독일, 프랑스, 벨기에, 영국, 핀란드, 덴마크, 일본이 그의 일정에 추가되었다.
Upon the death of his teacher Igumnov in 1948 he took over his professorial duties and was then given a chair in his own right. Among Oborin's most successful pupils were Mikhail Voskresensky and Vladimir Ashkenazy. In 1957 the tireless pianist and teacher suffered a heart attack. Oborin possessed a will of iron and did not let this affect his life but continued concertizing, performing Rachmaninov's Third Piano Concerto under Leopold Stokowski in 1961 for example.
1948년에 그의 스승 이굼노프가 사망하자마자 그는 교수직을 맡았고 당당히 피아노과 주임이 되었다. 오보린의 가장 성공적인 제자들 중에는 미하일 보스크레젠스키와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가 있다. 1957년에 지칠 줄 모르는 피아니스트이자 교육자는 심근경색으로 고통 받았다. 오보린은 강철 의지를 지니고 이것이 그의 삶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했지만 콘서트를 계속했는데, 예를 들어 1961년 레오폴트 스토코프스키의 지휘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협연했다.
As time went by he began to devote more time to teaching and less to the concert hall. From 1958 onwards he was a member of the jury at the International Tchaikovsky Competition. He made a further tour of Japan in 1967 and even after a stroke he returned to the lecture hall although he was now unable to play the piano (but he never gave up hope that this might change one day). In 1974 he suffered a second fatal stroke. Igumnov once described Oborin's art of piano playing as "light, harmonious and full of optimism": a true description indeed of an artist who loved life and his art.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는 가르치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을, 콘서트홀에는 더 적은 시간을 할애하기 시작했다. 1958년부터 그는 차이코프스키 국제음악콩쿠르 심사위원을 지냈다. 그는 1967년에 일본을 더 여행했고 뇌졸중 후에도 피아노를 칠 수 없었지만 강당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언젠가는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1974년에 그는 두 번째 치명적인 뇌졸중으로 고통 받았다. 이굼노프는 오보린의 피아노 연주의 예술을 “가볍고 조화로우며 낙천주의로 가득 차 있다”로 묘사한 적이 있었다. - 삶과 그의 예술을 사랑했던 아티스트에 대한 진정한 묘사.
The Classicist's Penultimate / 고전주의자의 끝에서 두 번째 소나타
While working on his "Missa Solemnis" in 1822, Beethoven also found the time to complete his Piano Sonata No. 31, Op. 110 which he had began two years previously. Just like the earlier Sonata No. 28 in A major, Op. 101, composed in 1816, which marks the beginning of the group of late sonatas with their highly individual and novel style, Beethoven queries the validity of four-movement sonata form and even dispenses with it in most cases. Sonata No. 31 begins with a slow movement and close with a fugue. Beethoven's preference for the upper register of the piano is striking, as is his breaking down of the melody and figures into minute cells. This is typical of the late Beethoven who takes the music to celestial heights in his final sonata, Opus 111. - The almost blustering Scherzo is contrasted by a strangely lurid Trio. The intimate Adagio in a B flat minor constitutes the climax of the piece and begins - similar to the Finale of the Ninth Symphony - in a conversational manner; it then proceeds to a moving A flat minor song "Arioso dolente", one of the most moving laments Beethoven ever composed. - That this "sad Arioso" returns in a central section of the concluding three-part fugue, turning the whole thing upside down as it were, is highly significant. The theme returns once more with new vigour, temporarily in its invented form, and thus signalizes a new beginning and confidence. Beethoven has clearly not resigned, and for this he deserves complete and utter admiration.
1822년에 <장엄미사>를 작업하는 동안, 베토벤은 그가 2년 전에 시작했던 피아노 소나타 31번을 완성할 시간도 얻었다. 전작의 28번 소나타와 마찬가지로 31번 소나타는 1816년에 작곡되었는데, 후기 소나타의 시작 부분을 매우 개성적이고 색다른 스타일로 보여주며, 베토벤은 4악장 소나타 형식의 타당성을 질문하고 심지어 대부분의 경우 그것을 배제한다. 소나타 31번은 느린 악장으로 시작하여 푸가로 끝난다. 멜로디와 형태를 세심한 단위로 분해하는 것처럼, 피아노 윗성부에 대한 베토벤의 선호도는 놀랍다. 이것은 그의 마지막 소나타인 제32번 소나타에서 천상의 높이까지 음악을 취하는 베토벤 후기 소나타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 2악장에서 거의 세차게 몰아치는 스케르초는 기이하게 충격적인 트리오와 대조된다. 친밀한 3악장 아다지오(느리게)는 곡의 클라이맥스를 구성하는 내림B단조로 시작한다. - 9번 교향곡의 피날레(4악장)와 유사하게 - 대화식으로 - 계속하여 베토벤이 작곡한 가장 뭉클한 애가 중의 하나인 감동적인 내림A단조의 노래 “아리오소 돌렌테”(슬프게 노래하듯이)로 이어진다. - 이 “슬픈 노래”가 이를테면 모든 것을 거꾸로 바꾸면서 3성부 푸가를 마무리하는 중앙부로 돌아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주제는 다시 한 번 새로운 활력과 함께 일시적으로 발명된 형태로 등장하므로, 새로운 시작과 자신감을 전달한다. 베토벤은 분명히 물러나지 않았고 이 때문에 그는 완전한 존경을 받을만하다.
Beethoven Sonata No. 31 in Ab, Op. 110: II. Allegro molto (Opening) / 베토벤 소나타 31번 2악장 오프닝 (영어 설명에서는 스케르초라고 나와 있으나 악보에 스케르초라고 나와 있지도 않고 3/4박자도 아니다.)
Beethoven Sonata No. 31 in Ab, Op. 110: II. Allegro molto (Middle Section) / 베토벤 소나타 31번 2악장 중간부 (영어 설명에서는 트리오라고 나와 있으나 악보에 트리오라고 나와 있지 않다.)
Beethoven Sonata No. 31 in Ab, Op. 110: III. Adagio ma non troppo (Opening) / 베토벤 소나타 31번 3악장 오프닝
Beethoven Sonata No. 31 in Ab, Op. 110: III. Adagio ma non troppo (Arioso dolente) / 베토벤 소나타 31번 3악장 중 탄식의 노래
Beethoven Sonata No. 31 in Ab, Op. 110: III. Fuga. Allegro ma non troppo (Opening) / 베토벤 소나타 31번 3악장 중 푸가 오프닝
Beethoven Sonata No. 31 in Ab, Op. 110: III. Fuga. Allegro ma non troppo (Middle Section) / 베토벤 소나타 31번 3악장 중 푸가 중간부
Mature Work of a Dying Man / 죽어가는 남자의 성숙한 작품
Five years before his death, Chopin composed the last of his three piano sonatas (1844). Five years before that he had written the second Sonata in B flat minor, with its famous Funeral March, in which he treats the canonised form (initiated by Beethoven) extremely freely. But in his later sonata the composer appears to curb himself - perhaps an indication of his broken health and spirit. He adheres desperately to sonata form and obeys its "rules" far more strictly than the late Beethoven. But while form is a mere skeleton, musical inspiration and melodic invention are quite another matter. The march theme of the first movement is thrilling, the lyrical second theme is of bewitching beauty, melting sweetness even. The development, usually a section full of contrasts and conflicts, is instilled with a touch of melancholy; accompanied throughout by semiquavers, a fresh lyrical idea in the distant key of A flat major dominates here whose harmonic touch illuminates Chopin's late work with a special brilliance. The Scherzo, with its amazingly nimble outer sections, is written in the unusual key of the mediant, E flat major, while the rather brooding Trio (which looks forward to Brahms) is in the "required" key of B major, a variant of the sonata's main key of B minor. - The slow third movement is also held in the key of B major and could almost be termed a nocturne if one disregarded the fairly grim unisono introduction. Chopin employs the well tried form of the rondo for his Finale. Powerful chords unchain, as it were, the surging energy of the passage work with its refrain of quaver triplets.
죽기 5년 전인 1844년, 쇼팽은 3개의 피아노 소나타들 중에서 마지막 3번을 작곡했다. 그로부터 5년 전에는 유명한 3악장 장송곡이 있는 소나타 제2번을 썼는데, (베토벤이 시작한) 캐논 형식을 매우 자유롭게 취급했다. 그러나 제3번 소나타에서 작곡가는 그 자신을 억제하는 것처럼 보인다. - 아마도 그의 건강과 정신이 망가졌음을 나타낼 것이다. 그는 필사적으로 소나타 형식을 고수하고 베토벤 말기의 “규칙들”에 훨씬 더 엄격하게 복종한다. 형식은 단순한 골격이지만, 음악적인 영감과 멜로디를 만드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1악장의 행진 주제는 짜릿하고, 서정적인 제2주제는 마음을 녹이는 상냥한, 매혹적인 아름다움의 것이다. 보통 대조와 갈등으로 가득 찬 부분인 발전부는 우울함의 터치로 스며든다. - 16분음표들이 전체적으로 동반되며, 내림A장조의 먼 조성에서 신선한 서정적인 아이디어가 여기에서 지배적인데, 그의 화성적인 터치는 쇼팽의 후기 작품을 특별한 광채로 조명한다. 놀랍도록 민첩한 바깥 성부가 있는 2악장 스케르초는 메디안트(장음계 또는 단음계의 제3도의 음)의 특이한 조성인 내림E장조(B음보다 장3도 위의 음은 D#음인데 Eb음과 이명동음 관계)로 쓰인 반면, (브람스를 기대하는) 꽤 음울한 트리오 부분은 B장조의 “지정된” 조성(1악장의 조성과 같은 으뜸음조 관계)으로 쓰였다. - 느린 3악장에서도 B장조가 적용되며 상당히 우울한 유니즌의 도입부를 무시한다면 흡사 녹턴 같다. 쇼팽은 그의 4악장 피날레를 위해 충분히 시험해본 론도 형식을 쓴다. 강렬한 화음들은 구속되지 않는데, 이를테면 8분음표를 묶은 셋잇단음표의 반복구를 가진 패시지워크(작품의 주제와 관계없이 화려하고 장식적인 부차적 부분)의 용솟음치는 에너지이다.
Chopin Sonata No. 3 in b, Op. 58: I. Allegro maestoso (Opening) / 쇼팽 소나타 3번 1악장 오프닝
Chopin Sonata No. 3 in b, Op. 58: I. Allegro maestoso (second theme) / 쇼팽 소나타 3번 1악장 제2주제
Chopin Sonata No. 3 in b, Op. 58: I. Allegro maestoso (the development) / 쇼팽 소나타 3번 1악장 발전부
Chopin Sonata No. 3 in b, Op. 58: II. Scherzo. Molto vivace (Opening) / 쇼팽 소나타 3번 2악장 오프닝
Chopin Sonata No. 3 in b, Op. 58: II. Scherzo. Molto vivace (Trio) / 쇼팽 소나타 3번 2악장 트리오 부분
Chopin Sonata No. 3 in b, Op. 58: III. Largo / 쇼팽 소나타 3번 3악장 (빨간 네모는 유니즌인데 그걸 무시하고 들으면 녹턴처럼 들릴 수도 있다.)
Chopin Sonata No. 3 in b, Op. 58: IV. Finale. Presto, non tanto / 쇼팽 소나타 3번 4악장 (빨간 네모는 8분음표를 3개씩 대로 묶은 부분)
Grateful Thanks to the Piano / 피아노에 대한 고마움
Five years before his death too, Johannes Brahms - a lonely man despite all the honours showered upon him - made a review of his life. He had not intended to compose any further works after his Quintet, Op. 111 (perhaps leaning on Beethoven's final piano sonata with the same opus number). But then, in 1892, he felt an urge to compose intimate pieces, quasi monologues. These short piano pieces he put together in groups of four, with the opus numbers 116 to 119. Ever since 1854 Brahms had occupied himself with the short, informal "Intermezzo". Three of the four pieces in his final work for the piano were called Intermezzo; the fourth was a Rhapsody, and his final addition to the genre (Opus 79 consisted of two Rhapsody). In 1892 Brahms was still hounded by his remembrance of the despairing Schumann. The lengthy, reflective postlude (so typical for the older composer) of "Am leuchtenden Sommermorgen" on a poem by Heinrich Heine inspired Brahms to write the first Intermezzo. - The construction of Opus 119 is strangely reminiscent of the construction of Brahms' Fourth Symphony composed in 1885. Thus the second, slow movement corresponds to the second Intermezzo (Andantino), with its two melodies having one and the same contour; and the third movement, a scherzo, corresponds to the third Intermezzo in C major (grazioso e giocoso). The Rhapsody (Op. 119 No. 4) is destined not merely to finalize the four collections of piano works, all of which stem from a single year, but to bring to a close the composer's complete piano oeuvre. Thus the Rhapsody is a lengthy work, with a wide variety of contrasting moods and contrapuntal refinement (which is also to be found in the middle section of No. 2). The fact that Brahms closes the work in a minor key is proof of his unbroken, even stubborn, self-assertion.
상복이 터졌음에도 외로웠던 남자 요하네스 브람스도 죽기 5년 전에 그의 인생에 대한 리뷰를 만들었다. 그는 (아마도 같은 오푸스 넘버를 가진 베토벤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 제32번에 기대는) 스트링 퀸텟 2번 Op. 111 이후에 더 이상 작곡하기를 의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1892년에 그는 독백에 준하는 친밀한 곡들을 작곡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는 이 짤막한 피아노곡들을 Op. 116부터 119까지 4개의 그룹으로 구성했다. 1854년부터 줄곧 브람스는 짧고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인터메조>에 전념했다. 그의 피아노를 위한 마지막 작품에서 4개 중 3개는 인터메조로 불렸다. - 4번째 곡은 랩소디로, 이 장르의 마지막이다. (Op. 79는 2개의 랩소디로 구성된다.) 1892년에 브람스는 여전히 절망한 슈만에 대한 기억에 사로잡혔다. 하인리히 하이네의 시로 슈만이 만든 가곡 <눈부신 여름날 아침에>에 대한 (나이든 작곡가에게 매우 전형적인) 긴 사색적인 최종 악장은 브람스에게 첫 인터메조를 쓰는 데에 영감을 주었다. - Op. 119의 구성은 이상하게도 1885년에 작곡된 브람스의 제4번 교향곡을 연상케 한다. 따라서 교향곡 제4번의 느린 2악장은 2개의 멜로디가 하나의 동일한 윤곽을 갖는 두 번째 인터메조(조금 느리게)와 일치한다. - 그리고 교향곡 제4번 제3악장 스케르초(3/4박자가 아님)는 세 번째 인터메조(우아하고 즐겁게)와 일치한다. 랩소디(Op. 119 No. 4)는 1년 만에 완성된 모든 4개의 피아노 작품 모음을 마무리하는 것이 아니라 작곡가의 피아노 전집을 마무리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랩소디는 다양한 대조적인 분위기와 (인터메조 2번의 중간부에서도 발견되는) 대위법의 세련미가 있는 오랜 작업이다. 브람스가 단조로 작품을 마무리한다는 사실은 깨어진 적이 없는 심지어는 고집스러운 자기주장의 증거이다.
Brahms 4 Pieces, Op. 119 No. 2 Intermezzo in e (Middle Section) / 브람스 4개의 소품 작품 119-2 중간부
Cosmic Eroticism / 우주의 에로티시즘
Five years after Brahms' pianistic "swan song", the Moscow-born Alexander Scriabin composed the second of his ten piano sonatas, the "Sonate-Fantaisie" an inspired work filled with elasticity and youthful elan. The work consists of only two movements to which Scriabin himself gave a "programme": his desire for cosmic travel and the fulfillment of his wish in hurtling towards the beckoning firmament! This precisely expresses the two main streams of expression in his oeuvre: ardent longing and exaggerated, quasi metaphysical eroticism on the one side and vibrant, blazing ecstasy on the other. All in all, transcendental eroticism in its highest degree and promoting the thought of Scriabin as a sort of "Super-Tristan".
브람스가 “마지막 작품”을 쓴지 5년 후, 모스크바 태생의 알렉산더 스크리아빈은 그의 10개의 소나타 중 제2번 <환상 소나타>를 썼는데, 탄력과 젊은 엘랑(애정 고백)으로 가득 찬 탁월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스크리아빈 자신이 “프로그램”에 준 2개의 악장으로만 구성된다. - 그의 우주여행에 대한 열망과 유혹의 손짓을 하는 창공을 향해 날아가는 것에 대한 그의 소원의 성취! 이것은 그의 작품에서 표현의 두 가지 주요 흐름을 정확하게 표현한다. - 열렬한 갈망과 과장된, 한편에서는 형이상학적인 것에 준하는 에로티시즘, 다른 한편에서는 힘찬 격렬한 황홀감. 대체로 최고 수준의 초월적인 에로티시즘이자 스크리아빈의 생각을 일종의 “슈퍼 트리스탄”(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나오는 이름)으로 지위를 높이는 것이다.
한글 정보를 타이핑하면서 영어 정보에 쓸 게 역시나 없다는 걸 간파했다. 다만 영어 정보와의 차이점을 발견했는데, 구글에서 검색해보니 카투아르와 코뉴스 둘 다 오보린의 작곡 스승이 맞다.
https://classicalpippo9.com/2017/10/24/russian-pianist-school-vol-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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