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27일 수요일

Sony / Lucas Debargue Plays Schubert & Szymanowski 2017




2015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피아노 부문 입상!
정통 클래식계의 이단아, 독학으로 피아노를 공부한 괴짜 피아니스트
뤼카 드바르그

2017년 겨울 새 앨범, 올 겨울 당신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줄 새 앨범!
슈베르트와 시마노프스키
차별화된 연주로 듣는 슈베르트와 시마노프스키의 아름다운 피아노 소나타

뤼카 드바르그는 2015년에 열린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피아노 부문 파이널리스트 중 아마 가장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는 11살에 귀로 들은 소리를 친구의 피아노로 연주하기 시작했고, 문학 학위를 위한 공부를 시작하며 17살에 피아노를 그만두고 파리의 슈퍼마켓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 후 진전이 없다가 그의 고향에서 초대를 받아 지역 축제에서 연주를 하기로 하며 다시 피아노 앞에 앉게 되었고, 훌륭한 연주 덕에 파리에 있는 속성 러시안 피아노 코치를 소개받게 된다. 코치와 4년간 피아노를 공부한 후 그는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파이널에 오르게 된 것이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모두 사실이다. 뤼카는 클래식 음악을 계속 공부하기 위해 재즈 클럽에서 8시간 동안 재즈 연주를 하며 아르바이트를 했고, 재즈로 연마한 그의 운지법이 꽤 기이하고 독특한 나머지 한 저명한 러시아 피아노 교수는 차이코프스키 파이널 무대에서 ‘제대로 교육받지도 못한 사람이 연주하는 걸 듣고 있을 수가 없다’며 큰 소리로 외치고는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을 재즈 클럽에서 연주하고, 많은 피아노 작품들을 그저 다른 이의 레코딩을 통해 귀로만 듣고 배우는 뤼카 드바르그의 개성 있고 섬세한 연주는 듣는 이를 사로잡는다.

이번 앨범에서 뤼카는 프란츠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2곡과 카롤 시마노프스키의 <피아노 소나타 2번>을 묶었다. 비교적 자주 연주되는 후기 소나타가 아닌 어딘가 어정쩡하게 걸쳐 있는 소나타들을 고른 것이다. 게다가 시마노프스키의 음악은 1990년대에 들어서야 재조명받고 있다. 고전이 되풀이하며 연주되는 시기에 드바르그는 용감하면서도 무모한 레퍼토리를 골랐다. 그는 세월에 잊힌 작품들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고전을 찾아내야만 하며 그곳에서도 얼마든지 들을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고, 또 이 앨범에 수록된 작품들이 그런 작품이라고 믿는다.

뤼카 드바르그는 카롤 시마노프스키와 프란츠 슈베르트라는 아무 공통점 없는 작곡가의 음악에서 무엇을 발견한 것일까? 이 두 작곡가는 외로움에서 시작했다. 말수가 많지 않았던 슈베르트는 “난 종종 이 세계에 속한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아”라고 이야기했다. 시마노프스키는 무언가 병약해 보인다는 점에서 선배 작곡가인 쇼팽을 닮았으나, 재능을 아낌없이 펼쳐냈던 쇼팽과는 달리 이 후배 작곡가가 태어난 시기는 여러모로 혼란스러웠으므로 그 역시 예민한 감성과 지성, 슬픔을 생에 끝까지 지니고 갔다.

추워지는 계절과 닮은 두 작곡가의 곡을 더없이 멋진 원석이 연주하는 것을 들으며, 우리는 이 피아니스트가 앞으로 어떤 멋진 변화를 겪게 될지 저절로 기대하게 된다.

Trailer
I am feeling like a very deep duty is to go as deep as possible in some pieces that are very well known by the musicians and the audience, like the Schubert sonatas, but also to give the opportunity to some audiences to get to know some pieces that they don't have the occasion to hear very often. I am very happy to present my third recording with Sony Classical. It's contrasted program with two Schubert sonatas and the second Szymanowski piano sonata. This time we spent a week in a wonderful place in Evian in France, it's a place called la Grange au lac, the house is only made of wood, so the entire house is cracking sometimes and when it's raining you can simply not record, so it's fantastic way actually to cope with the nature. The two Schubert sonatas I am presenting are in A minor and in A major, they are called the 'small ones', but even though they are very big if you consider the range of emotion and the contrasts. Sometimes I say to myself that the musical gap that you have between the two Schubert sonatas, the A major and the A minor one, only 4 years, is bigger in a way than the gap that you have between the two Schubert sonatas and the Szymanowski, because the Szymanowski is fully in the romantic tradition - some bits are modernist but the whole thing is very romantic - whilst the difference between the two Schubert sonatas is like the whole life of a man.

저는 슈베르트 소나타처럼 음악가와 청중에게 정말 잘 알려진 곡들을 가능한 한 깊이 다루는 것뿐만 아니라 자주 들을 기회가 없는 곡들을 몇몇 청중이 알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매우 깊은 의무라고 느낍니다. 소니 클래시컬과 세 번째 음반을 발표하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2개의 슈베르트 소나타와 시마노프스키 피아노 소나타 2번이 대조를 이루는 프로그램이죠. 이번에 우리는 프랑스 에비앙에 있는 멋진 곳에서 일주일을 보냈는데, 라 그랑주 오 라크라고 불리는 곳으로, 집이 나무로만 만들어졌으므로, 집 전체가 때로는 갈라져요. 비가 올 때는 녹음할 수 없으므로, 실제로 자연에 대처하는 환상적인 방식이었네요. 제가 선사하는 2개의 슈베르트 소나타는 a단조와 A장조인데, 감정의 범위와 대조를 고려하면 매우 크다고 해도 ‘소규모 소나타’로 불립니다. 때때로 저는 2개의 슈베르트 소나타, 하나는 A장조이고 다른 하나는 a단조로, 불과 4년 사이의 음악적 차이가 2개의 슈베르트 소나타와 시마노프스키 소나타 2번 사이의 차이보다 방식에 있어서 더 크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는데, 시마노프스키가 낭만적인 전통에 완전히 몰두했기 때문이며 - 몇 가지는 현대적이지만 모든 것이 매우 낭만적인 - 반면 2개의 슈베르트 소나타의 차이는 인생 전체와 같아요.

Track
01 Schubert Piano Sonata No. 14 in a, D. 784: I. Allegro giusto /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14번
02 Schubert Piano Sonata No. 14 in a, D. 784: II. Andante
03 Schubert Piano Sonata No. 14 in a, D. 784: III. Allegro vivace
04 Schubert Piano Sonata No. 13 in A, D. 664: I. Allegro moderato /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13번
05 Schubert Piano Sonata No. 13 in A, D. 664: II. Andante
06 Schubert Piano Sonata No. 13 in A, D. 664: III. Allegro
07 Szymanowski Piano Sonata No. 2 in A, Op. 21: I. Allegro assai / 시마노프스키 피아노 소나타 2번
08 Szymanowski Piano Sonata No. 2 in A, Op. 21: II. Tema. Allegretto tranquillo
09 Szymanowski Piano Sonata No. 2 in A, Op. 21: Fuga. Allegro moderato

Not having set foot on such a path, Lucas Debargue has never had any need to leave the beaten track. When he found himself in the final round of the Tchaikovsky Competition in Moscow in 2015, he was the only candidate never to have taken part in an international competition. Not until he was in his twenties did he attend the prestigious Paris Conservatoire. Largely self-taught, he has always stood apart from the crowd. As soon as he was launched on his career by his success in Moscow, his choice of programmes both in the recital room and on disc has continued to reflect this uniqueness. His debut album featured "Gaspard de la nuit", which, with its moonstruck poetry and dazzling digital dexterity, reveals clearly enough the reasons for his triumph in Moscow. But it also demonstrated his approach to Scarlatti: nimble-fingered, evasive, disquieting in its blackness and a prelude of things to come. Then came Medtner's Piano Sonata in F minor Op. 5, a revelation for practically every listener and a stunning piece when heard for the very first time. Debargue believes that it is the role of recordings to give a timeless (and global) currency to works that have been neglected because they and either too complex or insufficiently rewarding for their performers. Having raised Medtner's profile, he has now turned his attention to the great Szymanowski, a more famous figure as a composer but one whose works for the piano are no more often performed in public than Medtner's.

뤼카 드바르그는 그런 길에 발을 내딛지 않았으므로, 조금 색다른 방면으로 갈 필요가 없었다. 2015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결선에 진출한 그는 국제 대회에 참가한 적이 없는 유일한 후보였다. (내지 설명과는 달리 2014년 6월, 프랑스 가이야르에서 열린 제9회 아딜리아 알리예바 국제피아노콩쿠르 프로페셔널 부문에서 우승한 경력이 있다.) 2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유명한 파리 음악원에 입학했다. 대부분 독학하다시피 했던 그는 항상 군중과 떨어져있었다. 모스크바에서의 성공으로 경력을 시작하자마자 리사이틀 룸과 디스크에서 그가 선택한 프로그램들은 이 독창성을 계속 반영해왔다. (그는 항상 자신의 길을 갔으며 모스크바에서 성공한 후 녹음하거나 연주한 작품의 선택을 보여준다.) 꿈결 같은 시와 눈부신 손재주를 선보였던 <밤의 가스파르>가 수록된 그의 데뷔 앨범은 모스크바에서 성공한 이유를 분명히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스카를라티에 대한 접근 방식도 보여주었다. - 재빠른, 포착하기 어려운, 암흑 속에서 불안하게 하는(어둠의 혼란), 미래의 탐사에 대한 전주곡이다. (이것은 다가오는 앨범의 주제가 될 것이다.) 그런 다음 메트너의 피아노 소나타 1번이 나왔는데, 실제로 모든 청취자에게 전혀 뜻밖이자 처음 들었을 때 놀라운 곡이다. 드바르그는 많이 다뤄지지 않는 작품들에 영원한 (그리고 세계적인) 인기를 제공하는 것이 녹음의 사명이라고 믿는데, 이 작품들은 해당 연주자들에게 너무 복잡하거나 불충분하게 보상하기 때문이다. 메트너의 인지도를 끌어올리면서 그는 이제 작곡가로서 더 유명한 인물인 위대한 시마노프스키에게 관심을 돌렸지만, 시마노프스키의 피아노를 위한 작품들은 메트너보다 공개 연주가 덜하다. (저명한 메트너 앨범 이후에는 위대한 시마노프스키 차례인데, 메트너보다는 잘 알려져 있지만, 피아니스트들이 거의 연주하지 않는 작곡가이기도 하다.)

Szymanowski was a committed champion of the classical tradition but was painfully aware that he had arrived too late in a world where so much music had already been written. And so he never ceased to reinvent himself, which is not the same as being untrue to himself or betraying his true nature. Rather, he always sought to extend himself. He underwent manifold influences, each the opposite of its predecessor, and yet his ultimate course was consistent, unified, as it was, by that supreme classical virtue of style, a virtue that Szymanowski was one of the very few musicians to cultivate in the 20th century. It is here that we find his unalterable identity, an identity that remains the same, even though each of his sonatas, separated by six or seven years from its predecessor, inhabits a different sound-world. His First Sonata remains in limbo, too weighed down by its own uncontrolled outpouring of ideas to have maintained a place for itself in the repertory, its high-flown language bordering on eccentricity. It's as if he were a second Chopin, wanting to remain a child of Bach (with his counterpoint and obligatory fugues), yet allowing himself to be transported to the world of Scriabin. The Second and the Third Sonatas were introduced by Rubinstein and Ziloti respectively, the former in 1911, the latter in 1918. But neither pianist ever played them again. Whereas Szymanowski's enigmatic opera "King Roger" has attracted a cult following and only "Metopes" (1915) and "Masks" (1915-16) are ostensibly admired among his piano pieces, albeit rarely played, the sonatas remain "terra incognita". Debargue meets head-on the challenges of the monumental Second Sonata, with its fantastical but authoritative writing for the instrument, restoring to it the clarity that Szymanowski had had in mind but which the complexity and power of his writing for the piano and his alleged stylistic eclecticism have undeniably obscured.

시마노프스키는 고전의 전통에 헌신적인 챔피언이었지만 너무나도 많은 음악이 이미 작곡된 세계에 너무 늦게 도착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그는 결코 자신의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멈추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 자신에게 진실하지 않거나 그의 본성을 등지는 것과 같지 않다. 오히려 그는 항상 자신을 확장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각각의 전임자와 반대되는, 다양한 영향을 받았으며, 이미 그의 궁극적인 과정은 고전 양식의 최고 장점, 시마노프스키가 20세기에 구축할 수 있는 극소수의 음악가들 중의 한 명이라는 장점에 의해 그때의 사정으로는 일관되게 통일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의 불변의 정체성, 전임자에게서 6~7년 떨어진 그의 소나타들이 다른 소리의 세계에 살고 있지만 동일하게 유지되는 정체성을 발견한다. [시마노프스키는 많은 고전 음악이 이미 작곡된 세계에서 자신의 늦은 등장을 고통스럽게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신을 재창조했다. 자아를 부정하거나 배신하는 것이 아니라 진화하려는 시도였다. 이런 식으로, 그는 부분적으로 완전히 반대되는 다른 영향에 의해 영향을 받았지만, 여전히 자신에게 충실했다. - 20세기의 몇 안 되는 작곡가들처럼. 19세기에는 최고 장점인 개성을 유지하고 개발했다. 이것은 그의 피아노 소나타(6~7년 간격)의 다른 음악적 파노라마에도 불구하고 그의 확실한 정체성을 제공한다.] 그의 소나타 1번도 레퍼토리에서 입지, 기이할 정도로 그 과장된 언어를 유지하기 위해 억제되지 않은 아이디어의 분출로 짓눌리는, 여전히 잊힌 상태이다. 마치 그가 (그의 대위법과 의무적인 푸가로) 바흐의 아이로 남길 원하지만, 자신을 스크리아빈의 세계로 옮기도록 하면서 제2의 쇼팽인 것처럼. 소나타 2번은 1911년 루빈스타인, 소나타 3번은 1918년 질로티에게 의해 소개되었다. 그러나 피아니스트 어느 누구도 다시 연주하지 않았다. 시마노프스키 오페라 <로저 왕>은 수수께끼 같은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팬들을 열광시키고 피아노곡들 중에서 <메토프>(1915)와 <가면>(1915~16)만이 널리 인정받았지만(드물게 연주되었지만), 거의 연주되지 않는 그의 소나타들은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다. 드바르그는 악기에 대한 환상적이지만 권위적인 작곡과 함께, 기념비적인 소나타 2번의 도전에 직면해있는데, 시마노프스키가 염두에 두었던 명료성을 회복하였지만, 피아노를 위한 작곡의 복잡성, 작품의 힘, 그가 주장하는 절충 양식은 의심의 여지없이 가려져있다.

As a true Pole, Szymanowski felt that spiritual blackness on which Chopin's genius fed and initially abandoned himself to the melancholic intoxications of the East. But no matter where he might go, his music remained grounded in Bach, who provided him with his sense of solidity. By extension he was also influenced by the dense counterpoint and restrictive structures of a composer like Max Reger. Szymanowski's Second Piano Sonata is an impassioned piece, "molto appassionato". An organic power is at work but with enough breath to ensure its own continuity in what appear to be outbursts of intense emotion. The result is coherent and creates the impression of an impassioned lyrical synthesis of all that is classical in piano music: a pianistic culture of sound in all of its profundity; a tonality that fluctuates and plays at hide-and-seek, while never becoming completely lost, and is neither overbearing nor uncompromising in its momentary excursions. Thanks to its enthusiastic boldness, this pianistic "Sturm und Drang" has something Beethovenian about it. There is a sense of heightened Romanticism that does not, however, deny the Classism that it is presumed to have acquired. The second movement, by contrast, reveals all manner of tricks, even appearing to flirt with the listener in the process. One by one, obsolete forms are passed in review, linked together by a knowing nonchalance. Such mannerism masks the search for a note or a breadth that remains to be found. Once found, it re-examines itself, unfolding in the form of a melody that immediately accelerates, growing disjointed and tortured to the point where it literally chokes on a furious fugue. The build-up is seismic, leading to a veritable explosion. Again, the frenzied foreshortening that gravitates towards the fugue has an inevitability about it that recalls Beethoven: the fugue, after all, is the only musical form that both expresses this insane headlong flight and legitimizes it. The pianist's task is to ensure that this surge of emotion retains its intelligibility and never appears disorganized. The water gushes freely and remains pure: profusion is not the same as confusion.

진정한 폴란드인으로서, 시마노프스키는 쇼팽의 천재성이 제공한 것에서 영적 암흑을 느꼈으며 초기에는 동방에 대한 우울한 중독에 젖었다. 그러나 그가 어딜 가든지 그의 음악은 자신에게 견고함을 제공했던 바흐에 기반을 두었다. (그러나 그가 가는 곳마다 바흐는 시마노프스키의 기초, 견고함을 이어갈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막스 레거 같은 작곡가의 조밀한 대위법과 제한적인 구조의 영향도 받았다. [쇼팽의 천재성이 제공한 변덕스러운 분위기는 폴란드 작곡가 시마노프스키에게 이국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그의 초기 작품들은 동방의 우울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의 음악적 탐구가 그를 어디로 데려갔든지, 그는 절대로 확고한 출발점을 떠나지 않았으며, 바흐와 더 넓은 의미에서 막스 레거는 조밀한 대위법과 엄격한 음색 구조를 갖췄다.] 시마노프스키 소나타 2번은 열정적인 곡으로, “몰토 아파시오나토”(매우 열정적으로)로 시작된다. 유기적인 힘이 작용하고 있지만 숨을 충분히 쉬면서 강렬한 감정의 폭발로 보이는 것에서 자체 연속성을 보장한다. 그 결과 일관되며 피아노 음악에서 고전적인 모든 것에 대해 열정적으로 서정적인 통합에 대한 인상을 만든다. - 모든 깊이에 있어서 피아니스틱한 소리의 양식으로, 숨바꼭질에서 변동을 거듭하면서 노는 음색인 반면에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으며, 잠깐의 여행에서 거드름을 피우거나 단호하지도 않다. 열정적인 대담함으로 인해, 이 피아니스틱한 “질풍노도”에는 베토베니안(베토벤적인 것)이 있다. 그러나 낭만주의가 고조되었다는 느낌이 있지만, 그것이 획득한 것으로 추정되는 고전주의를 거부하지는 않는다. [여기에서 유기적인 힘은 다음과 같이 겉보기에 활력이 넘치는 패시지들을 표현하고 지배한다. 피아노 음악에서 고전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심오한 시적 합성과 같이 모든 것이 서로 뒤따르는데, 소리의 세계에 대해 포괄적인 피아노 연주의 탐구로 보인다. 때때로 변동하는 조성은 거의 잃어버린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모든 단기 여행에서 너무 지배적이지도 명확하지도 않다. 이 피아노 연주에 대한 질풍노도의 열렬한 대담은 베토벤을 떠오르게 한다. - 낭만적인 표현의 충만함에도 불구하고, 1악장은 결코 고전적인 성격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2악장은 모든 온갖 속임수를 드러내는데, 그 과정에서 청중이 바람둥이처럼 보인다. [반면에 2악장은 아양을 떠는(교태를 부리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기교를 거듭한다.] 다 안다는 듯한 무심함으로 결부되어 한물간 형식들이 하나하나 분열된다. 그러한 기교주의는 발견되어야 할 음이나 폭에 대한 탐구를 감춘다. (학문적으로 우연히 결합된 쓸모없는 형태이다. - 기교주의, 음색에 대한 탐구, 폭넓은 탐구.) 일단 발견되면, 그것은 즉시 가속되는 멜로디의 형태로 펼쳐져서 다시 심문을 받고, 일관성이 없이 늘어나며, 말 그대로 격렬한 푸가로 질식하는 지점까지 일관성 없고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것이 늘어난다. (그것은 발견되자마자 악의에 찬 분노에 빠질 때까지 악취가 나고, 멜로디가 퍼지고, 즉시 가속되며, 말 그대로 분노한 푸가에서 질식할 때까지 시달린다.) [일단 발견되면, 그것은 반복을 통해 스스로를 확립하고, 멜로디로 진화하여 즉시 화를 내며, 격노한 푸가로 흘러갈 때까지 스스로를 자극하고 괴롭힌다.] 이 증가는 실제로 폭발을 이끄는 엄청난 것이다. (폭발을 일으키는 지진처럼 쌓는다.) 다시 말하지만, 푸가로 향하는 강제적인 단축은 불가피하게 베토벤을 연상시킨다. - 결국 푸가는 이 미친 듯이 곤두박질치는 비행(이 미친 탈출)을 표현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유일한 음악적 형태이다. 피아니스트의 임무는 이러한 감정의 급증이 그 명료성을 유지하여 결코 무질서하게 보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폭포의 물은 연속적으로 쏟아지며 순수하게 남아있다. - 풍부함이 혼란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Nor does Debargue follow the beaten track with the two Schubert sonatas that are sometimes described as "Little" and that he has chosen to launch his third album. Any young student of the piano would nowadays feel that his honour had been impugned if he did not immediately tackle the vast "Molto moderato e cantabile" of the Sonata in G major D. 894 or the "Molto moderato" of the Sonata in B flat major D. 960. The first subject of the Sonata in A major D. 664 is lively and straightforward and - like so many of Schubert's inspired melodies - it seems to be heaven-sent. But Schubert can also ensure that it is at the same time moving, agitated and bittersweet. He passes from minor to major without telling us clearly which is blacker and sadder - as if Schubert could ever be uniformly black or sad. And he passes from light to shade and from one mood to another, without lingering there for long. Private suffering is revealed through a smile alone. It is enough for a single cloud to darken the Styrian sky to make us suddenly shudder.

드바르그도 그가 3집 앨범을 발매하기 위해 선택한, “소규모”로 묘사되는 2개의 슈베르트 소나타와 함께 관례대로 하지 않았다. 오늘날 피아노를 배우는 젊은 학생들은 그가 소나타 18번의 방대한 1악장 “몰토 모데라토 에 칸타빌레”나 소나타 21번 1악장 “몰토 모데라토”와 즉시 씨름하지 않았다면 그의 명예가 의심된다고(그가 불명예를 당할 거라고) 느꼈을 것이다. [오늘날 젊은 피아니스트들조차도 소나타 18번 1악장이나 소나타 21번 1악장을 즉시 다루지 않는다는 그의 위엄을 느끼고 있다!] 소나타 13번의 제1주제는 활기차면서도 간단하며 - 슈베르트의 영감을 받은 멜로디처럼(많은 슈베르트의 멜로디와 마찬가지로) - 하늘이 내려준 것 같다. 그러나 슈베르트는 동시에 감동적이고, 동요되며, 괴로우면서도 즐거운 것도 보장할 수 있다. 그는 어느 쪽이 더 어둡고 슬픈지 명확하게 말하지 않고 단조에서 장조로 넘어간다. - 슈베르트가 한결같이 어둡거나 슬플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는 오랫동안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빛에서 그늘로 그리고 한 분위기에서 다른 분위기로 넘어가며, 어디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적인 고통은 미소만으로도 드러난다. (깊은 고뇌는 미소에서만 볼 수 있다.) 구름 한 점이 슈티리아 하늘을 어둡게 하여 우리를 갑자기 떨게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구름 한 점이 슈티리아의 하늘을 지나가고, 갑자기 전율한다...) [그러나 구름 한 점이 슈티리아 하늘 위로 움직이면...]

Schubert's A major Sonata D. 664 marked the end of an adolescence spent honing his technique by working on quartets, symphonies and sonatas, whereas the Sonata in A minor D. 784, composed after a three-year silence, ushered in a brief summer that witnessed new depths of solitude and suffering, while also adumbrating the miraculous and all too precocious autumn of the composer's life. We are told that its opening motif is an inversion of that of "The Trout", but we could hardly be further removed from the latter's gambolling spirit, which is unique in Schubert's output. The paradox is instantly apparent, for here we have an "Allegro giusto" that could scarcely be slower. It is as if time has stood still. Minims snatched from thin air introduce a march that could scarcely be more different from the one found in D. 664, where the traveller whistles a tune while chewing on a blade of grass. It would be a solemn start - if Schubert were capable of solemnity. Perhaps it is a death knell. But three movements are never likely to drag. Schubert's approach here is allusive, suggestive. He invents a whole new dimension of presentiment. We do not pass from one theme to the next but glide between them. There is no sense of bridges being skillfully built from one tonality to the next, for each modulation arrives unannounced, like a cloud passing across the face of the sun. In the course of this peregrination we find only re-encounters, words of welcome and open arms. There is no music more open than this, no music that is more welcoming. It is a crime to dramatize it: even obvious pain is bashful. It is up to the pianist to retire behind the music and to forget himself, as Schubert did. The result should simply befall us. And we are all deeply moved by this.

슈베르트 소나타 13번은 콰르텟, 교향곡, 소나타에 착수하여 자신의 작곡 기술을 연마하면서 보낸 사춘기의 끝을 나타낸 반면, 3년의 침묵 이후에 작곡한 소나타 14번은 짧은 여름에 시작하게 되었는데, 새로운 깊이의 고독과 고통으로 가득한 한편, 작곡가의 기적적이면서도 너무나도 이른 가을을 너무나도 많이 암시한다. 시작하는 모티프가 <송어>의 반전 모티프라고 전해지지만, 슈베르트의 작품들에서 독특한, 후자의 무한한 정신에서 더 이상 멀어질 수 없다. 역설이 즉시 따르는데, 여기에는 거의 느려지지 않을 수 있는 “알레그로 주스토”(빠르면서도 정확하게)가 있기 때문이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어디선가 낚아 채인 2분음표들은 소나타 13번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거의 다를 수도 있는 행진을 도입하는데, 여기에서 여행자는 풀잎을 씹는 동안 휘파람을 분다. 엄숙한 시작이 될 것이다. - 슈베르트가 엄숙할 수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죽음의 징조일 것이다. 그러나 3개의 악장은 무거운 다리를 끌지 않는다. 여기에서 슈베르트의 접근 방식은 암시적이다. 그는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불길한 예감을 만든다. 우리는 한 주제에서 다음 주제로 넘어가지 않고 그 사이를 미끄러지듯이 간다. (슈베르트는 주제를 암시하고 주제를 다루며 예감을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만들어준다. 여기서 주제는 서로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미끄러진다.) 맑은 하늘의 구름이 태양을 덮는 것처럼, 각 전조가 알려지지 않은 상태로 발생하므로, 한 음색에서 다음 음색으로(음색 사이에 정통한) 다리를 능숙하게 짓는다는 것은 전혀 모른다. 이 인식 과정에서 우리는 다시 만나는 사람들, 환영의 말, 두 팔을 벌리는 것만 안다. 이보다 더 열린 음악은 없으며 더 환영하는 음악도 없다. 그것을 극화하는 것은 죄악이다. - 명백한 고통조차도 부끄럽다. 피아니스트는 자신을 잊고 슈베르트 같은 음악을 가져와야 한다. - 바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깊이 데려간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에 깊은 감동을 받는다.)

André Tubeuf / 앙드레 튀뵈프

영어로만 내지를 타이핑하여 번역해보니 점점 번역이 어려워진다는 것이 느껴졌다. 1집과 2집 음반은 안 되는 해석만 다른 외국어를 살펴봤다. 그래서 결국 3집은 프랑스어랑 독일어도 타이핑해서 절충했다. 3집 내지에 1집과 2집 리뷰가 있어서 그것도 각각 번역해서 넣어줬다. 다른 언어와 대조해봐서 더 나은 해석을 고르는 편인데, 이번에도 이렇게 해석해도 된다는 의미로 괄호 안에 다른 해석을 넣었다.

댓글 1개:

  1. https://classicalpippo9.com/2018/02/28/24-96-lucas-debargue-plays-schubert-szymanowski/

    https://rutracker.net/forum/viewtopic.php?t=5653631

    https://rutracker.net/forum/viewtopic.php?t=5509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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