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30일 토요일

Daniel Lozakovich - Violin Recital at the Fondation Louis Vuitton in Paris (28 June 2018)


다니엘 로자코비치 - 2018년 6월 28일 파리 루이 비통 재단
바이올린 리사이틀

Program
J.S. Bach Partita for Solo Violin No. 2 in d, BWV 1004 /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2번
I. Allemande / 알르망드
II. Courante / 쿠랑트
III. Sarabande / 사라방드
IV. Gigue / 지그
V. Chaconne / 샤콘느

Kreisler: Recitativo und Scherzo-Caprice, Op. 6 / 크라이슬러 레치타티보와 스케르초-카프리체

Paganini 24 Caprices for Solo Violin, Op. 1 / 파가니니 무반주 바이올린 카프리치오 중 21, 24번
No. 21 in A
No. 24 in a

Nathan Milstein: Paganiniana / 나단 밀스타인 <파가니니아나>

Encore
J.S. Bach Partita for Solo Violin No. 2 in d, BWV 1004: I. Allemande /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2번 중 알르망드

2018년 6월 19일 화요일

FIFA World Cup Gala Concert at the Red Square in Moscow (13 June 2018)


http://www.aveclassics.net/news/2018-06-19-7856
https://www.youtube.com/watch?v=aHYagr0HFxk
https://www.medici.tv/en/concerts/world-cup-gala-concert/

2018년 6월 13일 모스크바 붉은 광장 FIFA 월드컵 갈라 콘서트
Symphony Orchestra of the Mariinsky Theater / 마린스키 극장 심포니 오케스트라
Valery Gergiev, conductor / 발레리 게르기에프 지휘

Program
Tchaikovsky Piano Concerto No. 1 in b flat, Op. 23: I. Allegro non troppo e molto maestoso – Allegro con spirito /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1악장
... Denis Matsuev, piano / 데니스 마추예프, 피아노

Gounod Romeo & Juliet: I. "Je veux vivre" (Juliette) / 구노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 중 줄리엣의 아리아 <꿈속에 살고 싶어라>
... Aida Garifullina, soprano / 아이다 가리풀리나, 소프라노

Bizet Carmen: II. "Votre toast... je peux..." - "Toréador, en garde" (Escamillo, Pastia, Zuniga, Carmen, Chorus, Frasquita, Pastia, Dancaire) / 비제 오페라 <카르멘> 중 <투우사의 노래>
... Ildar Abdrazakov, bass / 일다르 압드라자코프, 베이스

Donizetti: La Fille du Régiment: I. "Ah mes amis" (Tonio) / 도니제티 오페라 <연대의 딸> 중 토니오의 아리아 <오늘은 기쁜 날>
... Juan Diego Flórez, tenor / 후안 디에고 플로레스, 테너

Donizetti: Lucia di Lammermoor: III. "Il dolce suono" / 도니제티 오페라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중 루치아의 아리아 <부드러운 속삭임이 - 광란의 아리아>
... Albina Shagimuratova, soprano / 알비나 샤기무라토바, 소프라노

Puccini Tosca: III. "E lucevan le stelle" / 푸치니 오페라 <토스카> 중 카바라도시의 아리아 <별이 빛나건만>
... Yusif Eyvazov, tenor / 유시프 에이바조프, 테너

Verdi: Don Carlo: II. Restate! / 베르디 오페라 <돈 카를로> 중 펠리페(베이스)와 로드리고(바리톤)의 듀엣 <멈춰라!>
... Ildar Abdrazakov, bass / 일다르 압드라자코프, 베이스
... Plácido Domingo, baritone / 플라시도 도밍고, 바리톤

Tchaikovsky 7 Romances, Op. 47 No. 6 Does the Day Reign? / 차이코프스키 7개의 로망스 중 6번
... Anna Netrebko, soprano / 안나 네트렙코, 소프라노
... Denis Matsuev, piano / 데니스 마추예프, 피아노

Rachmaninov Italian Polka for 4 hands piano in e flat, TN II/21 / 라흐마니노프 4개의 손을 위한 <이탈리아 폴카>
... Yelisey Mysin (light) & Denis Matsuev (left), pianos / 옐리세이 미신과 데니스 마추예프(왼쪽)의 피아노 연주

Glinka: "Ruslan & Lyudmila" Overture / 글린카 오페라 <루슬란과 루드밀라> 서곡

Verdi Rigoletto I: 2. "È il sol dell'anima" - "Addio... speranza ed anima" / 베르디 오페라 <리골레토> 중 만토바 공작과 질다의 아리아 <사랑은 영혼의 햇살>
... Juan Diego Flórez, tenor / 후안 디에고 플로레스, 테너
... Aida Garifullina, soprano / 아이다 가리풀리나, 소프라노

Umberto Giordano: Andrea Chénier: III. « Nemico della patria » / 움베르토 조르다노 오페라 <안드레아 셰니에> 중 제라르의 아리아 <조국의 적>
... Plácido Domingo, baritone / 플라시도 도밍고, 바리톤

Offenbach: Robinson Crusoé: II. Edwige's Waltz "Take Me Away to the One I Adore" / 오펜바흐 오페라 <로빈슨 크루소> 중 에드위지의 왈츠 <내가 경배하는 그에게 데려다 주오>
... Albina Shagimuratova, soprano / 알비나 샤기무라토바, 소프라노

Puccini Turandot: III - 1. "Nessun dorma!" /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 중 칼라프 왕자의 아리아 <아무도 잠 못 이루고>
... Yusif Eyvazov, tenor / 유시프 에이바조프, 테너

Puccini Turandot: II - 2. "In questa Reggia" /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 중 투란도트의 아리아 <이 궁전에는>
... Anna Netrebko, soprano / 안나 네트렙코, 소프라노

Agustin Lara: Granada / 아구스틴 라라 <그라나다>
... Plácido Domingo, baritone / 플라시도 도밍고, 바리톤

Nikolai Devitte/Evgeny Grebenka: "Dark Eyes" / 니콜라이 데비테/에프게니 그레벤카 <검은 눈동자>
... Ildar Abdrazakov, bass / 일다르 압드라자코프, 베이스

Russian Song "Kalinka" / 러시아 민요 <칼린카>
... Aida Garifullina, soprano / 아이다 가리풀리나, 소프라노
... Ildar Abdrazakov, bass / 일다르 압드라자코프, 베이스
... Juan Diego Flórez, tenor / 후안 디에고 플로레스, 테너
... Albina Shagimuratova, soprano / 알비나 샤기무라토바, 소프라노
... Yusif Eyvazov, tenor / 유시프 에이바조프, 테너
... Plácido Domingo, baritone / 플라시도 도밍고, 바리톤
... Anna Netrebko, soprano / 안나 네트렙코, 소프라노
... Denis Matsuev, piano / 데니스 마추예프, 피아노


보고 나서 지웠기 때문에 가지고 있지 않다. 다운로드 버튼이 보이지 않으면 Yandex.Disk 사이트에 회원 가입해서 무료로 받으면 된다. 마추예프가 치는 피아노를 보니 야마하네... 푸틴의 지지자이자 축구광으로 알려진 마추예프가 1998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다른 참가자들의 연주를 보지 않고 오히려 월드컵 축구 경기를 봤다고 했다. 차이코프스키 콩쿠르가 2002년까지는 월드컵이랑 시기가 겹쳤다. 요즘에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그 숨겨진 이야기>란 책을 읽었는데 심사위원들이 낮에는 심사하고 새벽에는 월드컵 경기 보느라 아침에 눈이 부어 있었다는 얘기가 있었다. ㅋㅋㅋㅋㅋ 앗.. 그런데 피아노 연주하는데 멀리서 종이 울린다. 월드컵을 보니깐 성 바실리 성당 사진이 화면에 자주 나오는데, 이반 4세가 바실리 성당의 화려한 모습에 반한 나머지, 다시는 이런 건축물을 짓지 못하도록 바실리 성당을 설계한 건축가들의 두 눈을 뽑았다는 얘기가 있다.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지어냈다는 소리도 있고... 피아노 연주가 막바지에 다다르면서 또 다시 종소리가 울린다. 푸틴이랑 인판티노 피파 회장이 나란히 앉아있다. 푸틴이 피아노 치는 대통령이긴 하다. 에이바조프와 네트렙코는 2015년부터 부부 사이... 마추예프가 꼬마랑 피아노를 칠 때 관중석 사이에서 축구공으로 묘기 부리는 사람들도 비춘다. 둘이 라흐마니노프를 치는데 왠지 게임 음악 같다. 히히... 이어서 나온 글린카의 곡은 오페라가 잘 상연되지는 않고 서곡만 주로 연주된다. 글린카를 연주하면서 어느덧 해가 저물었다. 투란도트에 나오는 아리아는 테너 다음에 누가 나올까 궁금했는데 당연하게도(?) 남편이 먼저 부른 다음에 아내가 나와서 부른다. 도밍고는 바리톤으로 나오는데 이벤트 회사에서 만든 말이라지만 세계 3대 테너 중 한 명. 동호회에서 도밍고에 대해서 말하길 여성들한테 인기가 많다고... 러시아에서 열리는 공연이라서 그런지 마무리는 러시아 노래다. 마지막 곡이 나오기 전에 데니스 마추예프의 어린 시절부터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결선까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지막 곡은 모두들 나와서 피아노와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서 노래 부른다.

A조
우루과이 ★★★★ (14)
이집트 (45)
사우디아라비아 (67)
러시아 (70)

B조
포르투갈 (4)
스페인 ★ (10)
이란 (37)
모로코 (41)

C조
프랑스 ★ (7)
덴마크 (공동 12)
페루 (11)
호주 (36)

D조
아르헨티나 ★★ (5)
크로아티아 (20)
아이슬란드 (22)
나이지리아 (48)

E조
브라질 ★★★★★ (2)
스위스 (6)
코스타리카 (23)
세르비아 (34)

F조
독일 ★★★★ (1)
멕시코 (15)
스웨덴 (24)
대한민국 (57)

G조
벨기에 (3)
잉글랜드 ★ (공동 12)
튀니지 (21)
파나마 (55)

H조
폴란드 (8)
콜롬비아 (16)
세네갈 (27)
일본 (61)

월드컵 참가국들을 한 번 열거해봤는데 피파랭킹 1위가 독일이고 2위가 브라질! (괄호 안에 2018년 6월 7일 발표 FIFA랭킹을 넣었다.) 랭킹 2위가 우승한 게 최근의 추세라서 알 수는 없지만 영원한 우승후보 브라질을 개인적으로 이번 대회의 우승후보로 생각하고 있다. 우승하면서 피파랭킹 1위로 올라서는 거다. 2002년에 우리나라랑 16강부터 맞붙은 나라들이 차례대로 우승했는데 이후 내리막길을 걸었다. 우승하고 나서 차기 월드컵에서는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것. 이탈리아는 조별리그에서 두 번 탈락하더니 안타깝게도 이번 월드컵에 나오지 못했다. 스페인은 2010년에 결국 처음으로 별을 달았고... 독일은 60년 이상 기본 8강... 유니폼에 별을 몇 개 달았는지 표시해봤는데 우루과이는 실제로는 2번 우승이다. 하지만 월드컵이 맨 처음 생기기 전에 올림픽에서 두 번 금메달 딴 것을 기리기 위해서 별이 4개인 것이다. 마지막 노래에서는 잠잠했던 종소리가 다시 울리고 불꽃놀이도 나온다. 에이바조프와 네트렙코가 무대에서 커플 댄스도 춘다. 화려한 불꽃들이 밤하늘에 터지고 신나게 종들이 울리면서 공연 끝!

2018년 6월 18일 월요일

Brilliant Classics / Legendary Russian Pianists CD25 Nikolai Lugansky



CD25 Nikolai Lugansky / 니콜라이 루간스키
01 Rachmaninoff Etudes-Tableaux, Op. 33 No. 1 in f: Allegro non troppo / 라흐마니노프 <회화적 연습곡>
02 Rachmaninoff Etudes-Tableaux, Op. 33 No. 2 in C: Allegro
03 Rachmaninoff Etudes-Tableaux, Op. 33 No. 5 in d: Moderato
04 Rachmaninoff Etudes-Tableaux, Op. 33 No. 7 in Eb: Allegro con fuoco
05 Rachmaninoff Etudes-Tableaux, Op. 33 No. 3 in c: Grave
06 Rachmaninoff Etudes-Tableaux, Op. 33 No. 6 in e flat: Non allegro
07 Rachmaninoff Etudes-Tableaux, Op. 33 No. 8 in g: Moderato
08 Rachmaninoff Etudes-Tableaux, Op. 33 No. 9 in c#: Grave
09 Rachmaninoff Etudes-Tableaux, Op. 39 No. 1 in c: Allegro agitato
10 Rachmaninoff Etudes-Tableaux, Op. 39 No. 2 in a: Lento assai
11 Rachmaninoff Etudes-Tableaux, Op. 39 No. 3 in f#: Allegro molto
12 Rachmaninoff Etudes-Tableaux, Op. 39 No. 4 in b: Allegro assai
13 Rachmaninoff Etudes-Tableaux, Op. 39 No. 5 in e flat: Appassionato
14 Rachmaninoff Etudes-Tableaux, Op. 39 No. 6 in a: Allegro
15 Rachmaninoff Etudes-Tableaux, Op. 39 No. 7 in c: Lento lugubre
16 Rachmaninoff Etudes-Tableaux, Op. 39 No. 8 in d: Allegro moderato
17 Rachmaninoff Etudes-Tableaux, Op. 39 No. 9 in D: Allegro moderato - Tempo di marcia

거장 타티아나 니콜라예바를 사사하고 1994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를 석권함으로써 일약 악단의 총아가 된 루간스키의 초창기 녹음. 두 곡의 소나타, 전주곡집과 같은 시기에 나온, 작곡자의 피아노 독주곡을 대표하는 곡의 하나인 회화적 연습곡에서 루간스키는 훗날 수많은 상을 휩쓸게 될 완벽한 테크닉과 시적인 상상력, 그리고 시각적인 효과를 마음껏 과시해 보인다. 그의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녹음들에 반한 사람이라면 이 음반 역시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Nikolai Lugansky (b. 1972) / 니콜라이 루간스키
Principal Teachers: Sergei Ipatov, Tatiana Kestner, Tatiana Nikolayeva, Sergei Dorensky / 세르게이 이파토프, 타티아나 케스트너, 타티아나 니콜라예바, 세르게이 도렌스키 사사

Prizes:
1988 - All-Union Competition in Tbilisi, 1st / 트빌리시 전연방 콩쿠르 1위
1988 - Bach Competition in Leipzig, 2nd / 라이프치히 제8회 바흐 콩쿠르 2위
1990 - Rachmaninoff Competition in Moscow, 2nd / 모스크바 라흐마니노프 콩쿠르 2위
1994 - Tchaikovsky Competition, 2nd (highest placed finalist) /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1위 없는 2위

Lugansky owes his career as much to the tenth Tchaikovsky Competition as to his formative years under the watchful, caring tutelage of Tatiana Nikolayeva. 'To study with her was an unusual experience in that she was very rarely in Moscow; sometimes many weeks would pass between lessons. For me that was a good discipline - to think, study, and work alone - it was a good training for being a pianist' ("Gramophone", June 1996). 'Her musical horizon was incredibly wide. She was the first person in the Soviet Union to play Bartok's Third Concerto, and one of the first to play Prokofiev's Fifth. Her hunger for music was eternal. She was open to everything' ("Daily Telegraph", 21 July 2003). In common with her predecessors and peers, his destiny was set well before he knew anything about it. 'When you study in [Moscow's] Central Music School and you're seven years old, you've already played in the Great Hall of the Moscow Conservatory, one of the best halls of Russia. If you are good, you play more and more in other cities. Then, you play abroad...So it starts before a young man thinks what he wants to be. It became my life' ("Cincinnati Enquirer", 4 December 2003).

루간스키는 타티아나 니콜라예바의 주의 깊게 챙겨주는 지도하에 자신의 발달에 중요한 해들과 마찬가지로 제10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많은 경력을 기울인다. ‘그녀를 사사한 것은 그녀가 모스크바에 거의 없었기 때문에 특별한 경험이었는데, 때로는 여러 주에 걸쳐 레슨이 진행되었다. 내게 그것은 좋은 훈련이었다. - 혼자 생각하고 공부하며 일할 수 있었다. -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한 좋은 훈련이었다(1996년 6월 <그라모폰>에서).’ ‘그녀의 음악적 지평선은 엄청나게 넓었다. 그녀는 소련에서 버르토크 협주곡 3번을 최초로 연주했으며, 프로코피에프 협주곡 5번을 최초로 연주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음악에 대한 그녀의 굶주림은 영원했다. 그녀는 모든 것에 열려 있었다(2003년 7월 21일 <데일리 텔레그래프>에서).’ 그녀의 선임자들 및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운명은 자신이 그것에 대해 알기도 전에 잘 정해졌다. ‘당신이 [모스크바의] 중앙음악학교에서 공부하고 7세였을 때, 당신은 이미 러시아 최고 홀들 중 하나인 모스크바 음악원 대강당에서 연주했다. 당신이 좋다면 당신은 다른 도시들에서 점점 더 연주할 것이다. 그런 다음 당신은 해외에서 연주할 것이다...젊은이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생각하기 전에 시작된다. 그것은 내 인생이 되었다(2003년 12월 4일 <신시내티 인콰이어러>에서).’

Rachmaninoff Etudes-Tableaux, Opp. 33 (1911), 39 (1916-17) / 라흐마니노프 회화적 연습곡 전곡
Up to 1917 Rachmaninoff was a Tsarist forging his own dreams; following his move to Prohibition America an emigre recreating other people's. To the Stravinsky-Diaghilev-Balanchine camp he was rude and 'glum', his music a 'terrible' tasteless 'much'. But to those in accord, he was the guardian noble of old Russia, the 'steel and gold' legacy of his aristocratic, land-owning birthright, his art the mirror of his country's might and splendour as much as its melancholy. The "Etudes-Tableaux" enigmatically combine the art-study tradition of Chopin-Liszt-Liapunov-Scriabin with the narrative vision of Mussorgsky. To Respighi Rachmaninoff confided some programmatic ideas in 1920 (Op. 39) but as a rule preferred to remain un-drawn. The first edition of Op. 33 (1914) comprised originally six numbers. In this 1992 recording Lugansky revises their order, and adds a further two omitted by Rachmaninoff, in D minor and C minor, first published in Moscow in 1948.

1917년까지 라흐마니노프는 자신의 꿈을 향해 전진하는 차르(황제)였는데, 금지된 땅 아메리카로 이동하여 망명했다. <작곡가 스트라빈스키 - 안무가 디아길레프 - 안무가 발란신> 캠프에 대해 그는 당돌하고 ‘침울했으며’, 그의 음악은 ‘훨씬 끔찍하게도’ 천박했다. 그러나 부합하는 것들에 대해 그는 옛 러시아의 고귀한 수호자로 ‘강철과 금 같은’ 그의 귀족적 유산, 토지 소유에 대해 타고난 권리, 그의 예술은 그 우울함 못지않게 그의 나라의 힘과 화려함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회화적 연습곡>은 <쇼팽 - 리스트 - 리아푸토프 - 스크리아빈>의 예술적 연습곡의 전통을 무소르그스키의 서사적인 비전과 절묘하게 결합한다. 레스피기에게 라흐마니노프는 1920년에 에튀드 Op. 39에 대한 몇 가지 프로그램 아이디어를 털어놓았지만 일반적으로 그리지 않은 상태로 남는 것을 선호했다. 에튀드 Op. 33(1914)은 원래 6개의 곡으로 구성되었다. 이 1992년 녹음에서 루간스키는 연습곡들의 순서를 수정한 다음 더 나아가 1984년 모스크바에서 처음 출판된 d단조와 c단조 연습곡에서 라흐마니노프가 생략한 2개를 더한다.

Further Reading / 더 읽을거리
Christopher Barnes: The Russian Piano School (London 2007) / 크리스토퍼 반스 <러시안 피아노 스쿨>
Bruno Monsaingeon, trans. Stewart Spencer "Sviatoslav Richter: Notebooks and Conversations" (London 2001) / 브뤼노 몽생종 (스튜어트 스펜서 번역) <스비아토슬라프 리흐테르 - 회고담과 음악수첩>
Heinrich Neuhaus, trans. K.A. Leibovitch "The Art of Piano Playing" (London 1973) / 하인리히 네이가우스 (레이보비치 번역) <피아노 연주 기법>
Dmitry Paperno "Notes of a Moscow Pianist" (Portland 1988) / 드미트리 파페르노 <모스크바 피아니스트에 대한 기록>
Jasper Parrot "Vladimir Ashkenazy Beyond Frontiers" (London 1984) / 재스퍼 패럿 <경계선 너머의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Mark Zilberquit "Russia's Great Modern Pianists" (Neptune 1983) / 마르크 질베르퀴트 <러시아의 위대한 현대 피아니스트들>

'The more talented, the more musical the pianist [...] the more vividly will he portray truth in his performance.' - Heinrich Neuhaus

‘재능이 많을수록, 음악적일수록 피아니스트는 [...] 연주에서 더 생생하게 진실을 묘사할 것이다.’ - 하인리히 네이가우스


여기까지 <전설적인 러시아 피아니스트들> 음반에 대해서 소개했다. 영어로 타이핑하면서 불편했던 것은 작은따옴표 안에 큰따옴표가 있는 문장들이었다. 오타나 잘못된 해석까지 그때그때 점검해서 구글 드라이브에도 수정본들을 넣었다. 소개한 글들마다 댓글에 다운로드 링크도 넣었는데 이만 끝!!!!!

Brilliant Classics / Legendary Russian Pianists CD24 Evgeny Kissin



CD24 Evgeny Kissin / 에프게니 키신
01 Liszt Waldesrauschen (Forest Murmurs) / 리스트 2개의 연주회용 연습곡 중 1번 <숲의 속삭임>
02 Liszt: La leggierezza / 리스트 3개의 연주회용 연습곡 중 2번 <가벼움>
03 Liszt Liebestraum No. 3 in Ab / 리스트 <사랑의 꿈> 3번
04 Liszt Hungarian Rhapsody No. 12 in c# / 리스트 헝가리 랩소디 12번
05 Liszt Etude d'execution transcendante No. 10 in f: Appassionata /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10번
06 Schumann Etudes symphoniques, Op. 13 / 슈만 <교향적 연습곡>
07 Schumann Abegg Variations, Op. 1 / 슈만 <아베크 변주곡>
08 Schumann/Liszt: Widmung / 슈만 헌정 (리스트 편곡)

리스트, 슈만 모음집
서유럽에서 데뷔 연주회를 갖고 연주활동을 왕성하게 시작하던 때의 키신 레코딩. 러시아의 마지막 슬라브적 미감을 간직하며 기교적 과시를 자제하고 말끔한 타건으로 곡을 연주하는 모습이 이미 10대에 정상급 피아니스트로 발돋움하고 있음을 입증해주는 음반.

Evgeny Kissin (b. 1971) / 에프게니 키신
Principal Teacher: Anna Kantor / 안나 칸토르 사사

Prizes:
1997 - Russian Federation Triumph Prize / 러시아 연방 트라이엄프 상
2003 - Shostakovich Award / 쇼스타코비치 상
2005 - Karajan Award / 카라얀 상
2006 - Grammy Award / 그래미상

'He's knowledgeable and plays well, but he ever throws himself headlong into the sea. Perhaps he'll never do so' (Sviatoslav Richter, 1990). 'So compelling is Kissin's pianism, so fresh his response to even the most familiar phrases, that one hangs on every note' ("The Times", 10 May 1999). Born to a Jewish family, Kissin studied at the Gnessin Institute, and remains still under the long-term guidance of his only teacher, Anna Kantor. In March 1984, aged 12, he attained fame playing the Chopin concertos with the Moscow State Philharmonic under Dmitri Kitaenko, recorded live by Melodiya. The following year he visited Eastern Europe, then in 1986 Japan. In 1987 he made his debut at the Berlin Festival, and in 1988 his London debut with Valery Gergiev and the LSO (London Symphony Orchestra), the same year also appearing with Herbert von Karajan and the Berliner Philharmoniker. He hasn't looked back - though his musicianship and manner has often been divisive. 'My art is my life. One is inseparably related to the other. To realize the potential given me by nature is, perhaps, most important for me, and my potential is in music.'

‘그는 지식이 풍부하고 잘 연주하지만 아주 거꾸로 바다에 뛰어들 수 있다. 아마도 그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1990년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키신의 피아니즘은 매우 강렬하고 가장 친숙한 프레이즈에 대한 반응조차 매우 신선해서 모든 음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1999년 5월 10일 <더 타임스>).’ 유태계 가정에서 태어난 키신은 그네신 음악원에서 공부했으며, 안나 칸토르가 아직도 오랫동안 그의 유일한 스승으로 남아있다. 그는 1984년 3월, 12세의 나이에 드미트리 키타옌코의 지휘로 모스크바 필하모닉과 쇼팽 협주곡들을 연주하여 명성을 얻었는데, 멜로디야 레이블에서 실황이 녹음되었다. 이듬해(1985년)에 그는 동유럽, 이어서 1986년에는 일본을 방문하였다. 1987년에는 베를린 페스티벌에 데뷔하였고, 1988년에는 발레리 게르기에프의 지휘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면서 런던 데뷔를 가졌으며, 역시 같은 해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지휘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였다. 그는 자신의 음악적 기교와 방식이 종종 분열되었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내 예술은 내 인생이다. 하나는 다른 하나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선천적으로 내게 주어진 잠재력을 실현하는 것은 어쩌면 내게 가장 중요하며, 내 잠재력은 음악에 있다.’

Liszt Waldesrauschen (Forest Murmurs) - Concert Study in Db, S. 145 No. 1 (c 1862-63) / 리스트 2개의 연주회용 연습곡 중 1번 <숲의 속삭임>
'We hear the wind rising softly, caressing the leaves as it moves through the forest. The murmuring sounds swell, die away again, then grow stronger and louder until the wind shakes the branches of the mightiest trees and spreads havoc all around. Next it takes to careering wildly, whistling through the leaves; only to die away again at the end to the merest whisper' (Tilly Fleischmann, "Aspects of the Liszt Tradition", 1988).

‘우리는 바람이 부드럽게 일어나서 숲을 헤치며 가는 것처럼 나뭇잎을 어루만지는 것을 듣는다. 속삭이는 소리가 퍼지고, 다시 서서히 사라지며, 바람이 가장 튼튼한 나뭇가지들을 흔들어서 사방을 엉망으로 만들 때까지 더 강해지고 더 커진다. 다음으로 정신없이 쫓아서 잎을 가르면 날아간다. - 결국 아주 작은 속삭임에 다시 서서히 사라질 뿐이다(1988년 아일랜드 피아니스트 틸리 플레이슈만의 책 <리스트 전통의 양상들>).’

Liszt: La leggierezza - Concert Study/Caprice poetique in f, S. 144 No. 2 (c. 1848) / 리스트 3개의 연주회용 연습곡 중 2번 <가벼움>
'The master himself performed the theme very calmly, but not too slowly. He stressed that as a rule, he does not take runs in his original compositions very fast, "because the business becomes too messy and blurred for me"' (August Gollerich "Diaries", Weimar 29 June 1885).

‘거장 그 자신은 주제를 매우 침착하게 그러나 너무 느리게 연주하지는 않았다. 그는 일반적으로 “일이 너무 엉망으로 되고 나를 흐릿하게 만들기 때문에” 원작을 매우 빠르게 연주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1885년 6월 29일 바이마르에서 오스트리아 피아니스트 아우구스트 괼레리히의 <다이어리>).’

Liszt Liebestraum No. 3 in Ab, S. 541 No. 3 (c 1850) / 리스트 <사랑의 꿈> 3번
A transcription by Liszt of one of his Ferdinand Freiligrath songs, "O lieb, so lang du lieben kannst" (c. 1845), 'O love, love as long as you can!/love as long as you will!/The time will come/When you will stand grieving at the grave'.

리스트가 독일 시인 페르디난트 프라일리그라트의 가사에 노래를 붙인 것들 중의 하나인 <오 사랑하라, 그대가 사랑할 수 있는 한!>(1845년경)을 편곡한 것으로, 가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 사랑하라, 그대가 사랑할 수 있는 한! 오 사랑하라, 그대가 사랑하고 싶은 한! 시간이 오리라, 시간이 오리라, 그대가 무덤가에 서서 슬퍼할 시간이.’

Liszt Hungarian Rhapsody No. 12 in c#/Db (1846-47) / 리스트 헝가리 랩소디 12번
Dedicated to Joseph Joachim, Liszt's former Austro-Hungarian concertmaster in Weimar, this deals in mesto declamation, ad libitum caprice, una corda allegro zingarese, high bells, grace and gaiety, and attacks of power.

바이마르에 있는 리스트의 전 오스트리아-헝가리 악장인 요제프 요아힘에게 헌정된 이 곡은 슬픈 열변, 임의의 갑작스러운 변화, 약음 페달을 밟으면서 집시풍의 빠르기로, 높은 종소리, 우아함과 흥겨움, 권력의 공격을 다룬다.

Schumann Etudes symphoniques, Op. 13 (1834-37) / 슈만 <교향적 연습곡>
'Studies', variations, in composition, "bravura" piano technique, unspecified scene painting and 'character' depiction, conceived originally as a series of 'Zwolf Davidbundler Etuden' - the League of David being that imaginary army of musicians and radicals waging war in the pages of the Neue [Leipzig] Zeitschrift fur Musik" against the Establishment and Philistines, of the day. Kissin includes the five supplementary variations edited by Brahms in 1893 (I, IV, V, III, II).

구성, “고도의 예술적 기교를 지닌” 피아노 테크닉, 불특정 장면 그림, ‘캐릭터’ 묘사에서 변주곡인 이 ‘연습곡들’은 원래 ‘12개의 다비드동맹 연습곡’ 시리즈로 구상되었다. - 다윗 동맹은 그날의 창립과 필리스틴(블레셋)에 대항하여 새로운 [라이프치히] 음악 잡지>의 한 페이지에 전쟁을 수행하는 음악가들과 급진주의자들의 상상의 군대라고 나와 있다. 키신은 1893년에 브람스가 편집한 슈만 사후에 발견된 5개의 변주곡(I, IV, V, III, II)을 포함하여 연주한다.

Schumann Abegg Variations Op. 1 (1829-30) / 슈만 <아베크 변주곡>
ABEGG - the note A-B flat-E-G-G - is a fantasy on the surname of a girl embraced at a Mannheim ball. It may be second-division pianism, but it is first-division creative flame.

ABEGG (아베크) - A - B 플랫 - E - G - G(라 - 시 플랫 - 미 - 솔 - 솔)는 만하임 무도회에서 사귀었던 젊은 여성 피아니스트 메타 아베크의 이름에 의한 환상곡이다. 후반부는 피아니즘(피아노 연주 기법)일지도 모르지만, 전반부는 불꽃을 자아낸다.

Schumann-Liszt Widmung, S. 566 (1840/48) / 슈만 헌정 (리스트 편곡)
'You are my soul and heart, my joy and pain, the world in which I live, the heaven to which I float [...] Your love makes me what I am' (Friedrich Ruckert).

‘그대는 내 영혼, 그대는 내 심장, 그대는 내 기쁨, 오 그대는 내 고통, 그대는 내가 살고 있는 세상, 그대는 내가 부유하는 하늘 [...] 그대가 사랑으로 날 치켜 올리니(프리드리히 뤼케르트의 시).’

2018년 6월 17일 일요일

Brilliant Classics / Legendary Russian Pianists CD23 Mikhail Pletnev & Andrei Gavrilov



CD23 Mikhail Pletnev & Andrei Gavrilov / 미하일 플레트네프, 안드레이 가브릴로프
01 Mozart Piano Concerto No. 9 in Eb, K. 271 'Jeunehomme': I. Allegro /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9번 <죄놈>
02 Mozart Piano Concerto No. 9 in Eb, K. 271 'Jeunehomme': II. Andantino
03 Mozart Piano Concerto No. 9 in Eb, K. 271 'Jeunehomme': III. Rondeau. Presto
Mikhail Pletnev, piano / 미하일 플레트네프, 피아노
State Chamber Orchestra / 국립 실내 오케스트라
Viktor Tretiakov, conductor / 빅토르 트레차코프 지휘

04 Beethoven Piano Concerto No. 3 in c, Op. 37: I. Allegro con brio /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
05 Beethoven Piano Concerto No. 3 in c, Op. 37: II. Largo
06 Beethoven Piano Concerto No. 3 in c, Op. 37: III. Rondo. Allegro
Andrei Gavrilov, piano / 안드레이 가브릴로프, 피아노
USSR State Symphony Orchestra / 소련 국립 심포니 오케스트라
Yuri Temirkanov, conductor / 유리 테미르카노프 지휘

Mikhail Pletnev (b. 1957) / 미하일 플레트네프
Principal Teachers: Evgeni Timakin, Yakov Flier, Lev Vlasenko / 에프게니 티마킨, 야코프 플리에르, 레프 블라센코 사사

Prizes:
1978 - Tchaikovsky Competition, 1st /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1위
2005 - Russian Federation Prize / 러시아 연방상
2005 - Grammy Award / 그래미상
2007 - Presidential Prize / 대통령상

'This young man is extraordinary talented [...] But why does [he] look so unhappy? You'd think it was sheer torment for him to play' (Sviatoslav Richter, 1986). Pletnev traces his pianistic lineage back to Konstantin Igumnov and Anan Esipova. Winning the sixth Tchaikovsky Competition - before a jury that included Lev Vlasenko, Evgeny Malinin, Victor Merzhanov, Eugene List and Halina Czerny-Stefanska - launched his international career, and his US debut followed in 1979. His aspirations as a conductor (he is also a composer and arranger) were fostered through Gorbachev, leading in 1990 to the founding of the Russian National Orchestra, the first privately subsidized ensemble of its kind in the country since before the Revolution. 'In the 21st century culture of oversupply and underdemand, it's small wonder that every second musician in the marketplace is sold by agents, impresarios and record companies as unique. It doesn't mean much. But just occasionally it does. And Mikhail Pletnev - arguably the most distinctive and idiosyncratically remarkable of living pianists - is a case in point' (Michael White, "New York Times", 16 March 2003).

‘이 청년은 비범한 재능이 있다. [...] 그런데 왜 [그가] 그렇게 불행해 보일까? 당신은 그가 연주하는 것이 순전한 고통이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1986년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플레트네프는 콘스탄틴 이굼노프와 안나 에시포바의 피아니스트 계보를 잇는다. 레프 블라센코, 에프게니 말리닌, 빅토르 메르자노프, 유진 리스트, 할리나 체르니-스테판스카 등이 심사위원으로 있었던 제6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국제 경력을 시작했으며 1979년에 미국 데뷔가 이어졌다. 지휘자로서의 포부(그는 작곡가이자 편곡자이기도 함)는 1990년에 러시안 내셔널 오케스트라 창설을 이끄는 것이 고르바초프를 통해 조성되었는데, 혁명 이전부터 러시아 최초로 사적인 보조금을 받은 앙상블이다. ‘공급과잉과 수요 부족의 21세기 문화에서 시장에 있는 모든 제2의 음악가가 에이전트, 기획자, 음반사에 의해 독자적으로 팔리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것은 많은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가끔은 그렇다. 그리고 주장하건대 가장 독특하면서 살아있는 피아니스트들 중에서 특색 있게 주목할 만한 미하일 플레트네프가 좋은 예이다(2003년 3월 16일 <뉴욕 타임스>의 마이클 화이트).’

Mozart Piano Concerto No. 9 in Eb, K. 271 "Jeunehomme" [Jenamy] (1777) /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9번 <죄놈>
The final solo keyboard concerto of Mozart's Salzburg period, and the first of his mature canon. 'One of the great wonders of the world' (Alfred Brendel). In March 2004 Michael Lorenz conjectured that the identity of the person for whom it was written may have been Victoire Jenamy (1749-1812), eldest offspring of his friend the French ballet-master Jean-Georges Noverre ("Mozart Experiment Aufklarung", Vienna 2006). The work arrests as much for the piano's presence at the start (anticipating Beethoven) as the held-back minuet episode foiling its rondo.

모차르트의 잘츠부르크 시기의 마지막 솔로 키보드 협주곡과 성숙한 캐논의 첫 번째 곡. ‘세계의 위대한 놀라움 중 하나(알프레드 브렌델).’ 2004년 3월에 음악학자 미하엘 로렌츠는 모차르트가 이 곡을 그의 친구이자 프랑스 발레 안무가 장-조르주 노베르의 장녀인 피아니스트 빅투아르 제나미(1749~1812)를 위해 썼다는 사실을 밝혀냈다(<모차르트 계몽 실험>, 2006년 비엔나). 이 작품은 론도를 방해하는 억제된 미뉴에트 에피소드만큼 (베토벤을 예상하는) 시작에서 피아노의 존재를 위해 많은 것을 저지한다.

Andrei Gavrilov (b. 1955) / 안드레이 가브릴로프
Principal Teachers: Assanetta Eguiserian (his mother), Tatiana Kestner, Lev Naumov / 아사네타 이퀴제리안(어머니), 타티아나 케스트너, 레프 나우모프 사사

Prize:
1974 - Tchaikovsky Competition, 1st /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1위

'The teenage superstar with the world at his feet [who] crashed and burned' (Stephen Moss, "The Guardian", 21 December 2006). Descendent of both Neuhaus' line (through his mother and Lev Naumov) and Goldenweiser's (through Tatiana Kestner), Gavrilov's life has run the gamut from championship highs to personal conflict and political controversy. An intricately complex poet and firebrand of 'diabolical talent' (Sviatoslav Richter), tensioned by 'emotional richness' and 'ungovernable temperament' (his words), fabled for his keyboard voicing, unabashed imagery and Russo-Olympian technique, he came to prominence in 1974, winning the Tchaikovsky Competition, aged still 18, and substituting for Richter at the Salzburg Festival. A visceral, all-devouring Abbey Road reading of Prokofiev's First Concerto under Sir Simon Rattle, taped in July 1977, taking 'all the corners hair-raisingly on two wheels' (David Faning), understandably astonished. Star collaborations followed (Vladimir Ashkenazy, Riccardo Muti, Neville Marriner), as well as solo and chamber discs (from Bach and Handel to double-piano Stravinsky with Vladimir Ashkenazy and Hindemith and Schnittke with Gidon Kremer).

‘발밑에 있는 세상을 가진 10대 슈퍼스타가 추락했다(2006년 12월 21일 <가디언>에서 스티븐 모스).’ (그의 어머니와 레프 나우모프를 통한) 네이가우스 라인과 (타티아나 케스트너를 통한) 골덴바이저 라인의 계보를 모두 이어받은 가브릴로프의 인생은 콩쿠르 우승부터 개인적인 갈등과 정치적인 논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악마적인 재능’(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의 복잡한 시인이자 선동가로, ‘감정의 풍부함’과 ‘억누를 수 없는 기질’(그의 말)로 긴장시키며, 자신의 건반 소리와 대단한 형상화와 러시아의 신과 같은 테크닉으로 전설적인 그는 1974년 18세에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유명해졌으며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리히터를 대신해서 연주했다. 사이먼 래틀 경의 지휘로 애비로드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프로코피에프 협주곡 1번의 본능적으로 집어삼키는 연주는 1977년 7월에 녹음되었는데, ‘두 개의 바퀴로 소름 끼치게 구석을 모두’(데이비드 패닝) 차지하며, 당연히 깜짝 놀라게 했다. 스타 지휘자들과의 협연(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리카르도 무티, 네빌 마리너)이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독주 음반과 실내악 음반(바흐와 헨델부터 2대의 피아노를 위한 스트라빈스키 작품을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와 녹음했으며,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와는 힌데미트와 슈니트케를 녹음)도 뒤따랐다.

Life turned unpleasant for Gavrilov in 1979. 'His career,' Bryce Morrison chronicles, 'was effectively terminated when on returning [from Japan] to the USSR, he was accused of anti-Soviet bias and of open criticism of the musical-political establishment. It was not until 1984, after severe privation, that [he] was able to resume his international appearances. However [...] references to undue aggression and an overbearing keyboard manner became frequent.' 'A story of abandoned concerts, loss of confidence, the end of the DG deal, a broken marriage [...] a personal and artistic implosion' (Stephen Moss).

1979년에는 가브릴로프의 인생에 불행이 닥쳤다. 브라이스 모리슨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일본에서] 소련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경력은 사실상 끝났으며 반 소비에트 성향과 음악적-정치적 지배층에 대한 공개적 비판으로 기소되었다. 1984년까지 심각한 상황에 처한 이후로, [그는] 국제적인 등장을 재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 과도한 공격성과 강압적인 연주 방식은 빈번해졌다.’ ‘버려진 콘서트, 자신감의 상실, DG 계약의 끝, 깨진 결혼 [...] 개인적이자 예술적인 파열(스티븐 모스).’

Gavrilov's own account of events is different from Morrison's, but scarcely more comforting. 'I was becoming rich and independent. I was driving a Mercedes that was better than Leonid Brezhnev's. I was constantly watched and constantly threatened. By the end, the militia people watching me had a licence to kill. One showed me a paper signed by Yuri Andropov [Chairman of the Supreme Soviet], which said the authorities wouldn't mind if a fatal accident happened to Mr. Gavrilov' ("The Gardian"). Offered a hand by Gorbachov, Gavrilov left Moscow in 1985, going first to London, then Germany.

가브릴로프의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모리슨의 것과는 다르지만, 거의 더 편안하지 않다. ‘나는 부자가 되어 독립하고 있었다. 나는 레오니드 브레즈네프의 차보다 더 좋은 메르세데스를 몰고 있었다. 나는 끊임없이 감시당했으며 끊임없이 위협을 받았다. 결국 나를 감시하고 있는 민병대 사람들은 살인 면허를 가지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소련 공산당 서기장] 유리 안드로포프가 서명한 서류를 내게 보여줬는데, 당국은 가브릴로프에게 치명적인 사고가 발생했는지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가디언).’ 가브릴로프는 1984년에 (당시 정권 2인자였던) 고르바초프에게 편지로 호소한 끝에 힘겹게 서방 연주 여행을 허가받았다. 1985년 런던을 다시 찾은 그는 고르바초프에게 서방 체류를 요청, 그해 뉴욕 카네기홀에서 성공적으로 데뷔 이후 1989년 독일에 정착했다.

In "Russia's Great Modern Pianists", he speaks warmly of Richter - 'my idol'. 'We often interpret the notion of influence in the negative sense of the word, that is, meaning overwhelming an individual [and encouraging] imitation. But this is not the case with me. Richter's influence has never showed itself [in this way]. It has been rather a guiding and directing force. Richter is not even a "school". It is a kind of biofield in which you start feeling and thinking differently.' The great man first heard him in July 1976 at Grange de Meslay, writing in his notebook: 'Temperament (lost of people think he makes a bit too much of it, but for my own part I thought that what he did was just right), stature, brilliant technique, it all came together to make me think that we're dealing here with the most gifted pianist of his generation.'

마르크 질베르퀴트의 책 <러시아의 위대한 현대 피아니스트들>에서 그는 리히터에 대해 ‘나의 우상’이라고 따뜻하게 말한다. ‘우리는 단어의 부정적인 의미, 즉 개성적인 [그리고 힘을 북돋아주는] 상상을 압도한다는 의미에 영향을 미치는 생각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경우와 다르다. 리히터의 영향은 [이런 방식으로] 그 자체를 본 적이 없다. 오히려 안내하고 지도하는 힘이었다. 리히터는 “스쿨”이 아니다. 당신이 다르게 느끼고 생각하기 시작하는 일종의 바이오필드(생명체를 둘러싸거나 침투하는 에너지 또는 생명력으로 간주되는 분야)이다.’ 위대한 남자는 1976년 7월에 그랑주 드 메슬레에서 처음으로 그의 연주를 들었는데, 수첩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 ‘기질(많은 사람들은 그가 기질을 좀 너무 많이 만든다고 생각하지만, 딴사람은 모르거니와 나로서는 그가 옳았다고 생각했다.), 위상, 화려한 테크닉, 우리가 여기서 그와 동세대의 가장 재능 있는 피아니스트를 다루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것을 모두 합친 것이었다.’

For Gavrilov himself, 'Crisis, in principle, is always present, [I'm] a highly emotional, impulsive person, so that one day is not like another with me. I can give way to despair, ten times a day, to emotional crisis [...] maybe it's the fate of all artistic people to be constantly tormented?'

가브릴로프 자신에게 있어 ‘위기는 원칙적으로 항상 존재한다. [나는] 어느 날은 나 같지 않게 대단히 감정적이면서도 충동적인 사람이다. 감정적인 위기로 하루에 10번 절망감에 무너질 수도 있는데 [...] 어쩌면 끊임없이 괴로워하는 게 모든 예술인들의 운명일까?’

Beethoven Piano Concerto No. 3 in c, Op. 37 (1796-1804) /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
'Not as significant' as Mozart's in the same key (Brahms, 1896). 'Beethoven the tone-poet [...] I sometimes think this Concerto is as much a self-portrait of Beethoven at thirty as the "Eroica" is of Beethoven at thirty-three' (Marion Scott, 1934). 'A turning-point in the history of the classical concerto' (Donald Tovey, 1936).

같은 조성의 모차르트 협주곡 24번만큼 ‘중요하지 않다(1896년 브람스).’ ‘음시의 시인 베토벤 [...] 나는 때때로 이 협주곡이 베토벤의 33세 때 작품인 <에로이카> 변주곡 못지않은 30대 베토벤의 자화상이라고 생각한다(1934년 바이올리니스트 마리온 스콧).’ ‘고전 협주곡 역사의 전환점(1936년 영국 저술가 도널드 토베이).’

Brilliant Classics / Legendary Russian Pianists CD22 Nikolai Demidenko



CD22 Nikolai Demidenko / 니콜라이 데미덴코
01 Scriabin Sonata-Fantasy No. 2 in g#, Op. 19: I. Andante / 스크리아빈 <환상 소나타> 2번
02 Scriabin Sonata-Fantasy No. 2 in g#, Op. 19: II. Presto
03 Scriabin Etude in f#, Op. 8 No. 2: A capriccio, con forza / 스크리아빈 에튀드 작품 8-2
04 Scriabin Etude in B, Op. 8 No. 4: Piacevole / 스크리아빈 에튀드 작품 8-4
05 Scriabin Etude in E, Op. 8 No. 5: Brioso / 스크리아빈 에튀드 작품 8-5
06 Scriabin Etude in F#, Op. 42 No. 3: Prestissimo / 스크리아빈 에튀드 작품 42-3
07 Scriabin Etude in F#, Op. 42 No. 4: Andante / 스크리아빈 에튀드 작품 42-4
08 Scriabin Etude in f, Op. 42 No. 7: Agitato / 스크리아빈 에튀드 작품 42-7
09 Scriabin 4 Pieces, Op. 51 No. 1 Fragilite / 스크리아빈 4개의 소품 작품 51-1 <연약함>
10 Scriabin 4 Pieces, Op. 51 No. 2 Prelude / 스크리아빈 4개의 소품 작품 51-2 <프렐류드>
11 Scriabin 4 Pieces, Op. 51 No. 3 Poeme aile / 스크리아빈 4개의 소품 작품 51-3 <가벼운 시>
12 Scriabin 4 Pieces, Op. 51 No. 4 Danse languide / 스크리아빈 4개의 소품 작품 51-4 <나른한 춤>
13 Scriabin Sonata No. 9, Op. 68 'Black Mass': Moderato quasi andante - Molto meno vino - Allegro - Allegro molto - Alla marcia - Piu vivo - Allegro - Piu vivo - Presto - Tempo I / 스크리아빈 소나타 9번 <흑미사>
14 Scriabin Vers la flamme: Poeme, Op. 72 / 스크리아빈 시곡 <불꽃을 향하여> 작품 72
15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1 Lentamente / 프로코피에프 <덧없는 환영>
16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2 Andante
17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3 Allegretto
18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4 Animato
19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5 Molto giocoso
20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6 Con eleganza
21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7 (Harp) Pittoresco
22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8 Commodo - Meno mosso
23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9 Allegretto tranquillo
24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10 Ridicolosamente
25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11 Con vivacita
26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12 Assai moderato
27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13 Allegretto
28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14 Feroce
29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15 Inquieto
30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16 Dolente
31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17 Poetico
32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18 Con una dolce lentezza
33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19 Presto agitatissimo
34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20 Lento

Nikolai Demidenko (b. 1955) / 니콜라이 데미덴코
Principal Teachers: Anna Kantor, Dmitri Bashkirov / 안나 칸토르, 드미트리 바쉬키로프 사사

Prizes:
1976 - Montreal Competition, joint 2nd with Naum Grubert and Gerhard Oppitz / 몬트리올 콩쿠르에서 나움 그루베르트 및 게르하르트 오피츠와 공동 2위
1978 - Tchaikovsky Competition, joint 3rd prize with Evgeny Ryvkin /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에프게니 리브킨과 공동 3위
1992 - Gramophone Award / 그라모폰 상 수상

'His extraordinary intimacy with the piano, which withholds no secrets of keyboard brilliance or expressive colouring from him, maximizes the potential in the scoring, however modest or extravagant, of whatever he chooses to play' (Gerald Larner, "The Times"). Moscow-trained, Demidenko made his Royal Festival Hall debut in November 1985 with Alexander Fedoseyev in Tchaikovsky's First Piano Concerto. In 1993, following the precedent of Alkan, Anton Rubinstein, Busoni and Sofronitzky, he presented a cycle of landmark recitals at the Wigmore Hall, "Piano Masterworks", 'offering a personal insight into 250 years of keyboard music, instrumental technique and the development of modern piano resource' - from Scarlatti and C.P.E. Bach to Messiaen and Gubaidulina.

‘그에게서 건반의 광휘나 표현력이 풍부한 색채를 다 안다는 것에 대한 비밀을 지키는 피아노와의 탁월한 친밀감은 악보에서 잠재적인 것을 극대화하나 그가 연주하길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겸손하거나 엄청나다(<더 타임스>에서 제럴드 러너).’ 모스크바에서 훈련받은 데미덴코는 1985년 11월에 알렉산더 페도세예프의 지휘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하면서 로열 페스티벌 홀에 데뷔했다. 1993년 알캉, 안톤 루빈스타인, 부조니, 소프로니츠키의 사례를 따라 위그모어 홀에서 스카를라티와 카를 필립 에마누엘 바흐부터 메시앙과 구바이둘리나에 이르는 ‘250년 동안의 건반 음악, 악기의 기술과 현대 피아노의 발전에 대한 개인적인 통찰력을 제공하는’ 획기적인 리사이틀 <피아노 걸작>을 선보였다.

Since the fall of the USSR he has lived in the West (taking British citizenship in 1995), but continues to maintain ties with his compatriots. His discography includes recordings of Scarlatti, Beethoven, Schubert, Clementi, Weber, Schumann, Chopin, Liszt and Bach-Busoni. But for many it is with the Russian school that he is most identified: Mussorgsky, Rachmaninoff, Medtner (including a two-piano album with his duo-partner Dmitri Alexeev, who in 1975 became the first Russian to win the Leeds International Piano Competition), Scriabin, Tchaikovsky and Prokofiev (recordings of the complete concertos conducted by Alexander Lazarev) seem to be outstandingly "his" composers.

소련이 붕괴한 후 그는 (1995년에 영국 시민권을 획득하여) 서방에서 살았지만, 동포들과의 유대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그의 디스코그래피에는 스카를라티, 베토벤, 슈베르트, 클레멘티, 베버, 슈만, 쇼팽, 리스트, 부조니의 바흐 편곡 녹음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가 러시안 스쿨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의 듀오 파트너로 1976년 리즈 국제피아노콩쿠르에서 러시아 최초로 우승했던 드미트리 알렉세예프와 녹음한 2대의 피아노를 위한 앨범을 포함하여) 무소르그스키, 라흐마니노프, 메트너, (알렉산더 라자레프의 지휘로 협주곡 전곡을 녹음한) 스크리아빈, 차이코프스키, 프로코피에프는 뛰어난 “그의” 작곡가들인 것 같다.

For Demidenko 'concerts are special if you are in the audience because you want to hear that magic which doesn't necessarily translate into sound waves. How does this magic happen? We can't explain it very easily, but I see the phenomenon as a mirror. Music cannot give you anything you don't already possess emotionally. You only see your reflection, and each member of an audience will hear a different thing. Yet if there are some features of your personality you didn't know existed, a performance can open them up in unusual ways - exactly what art in any form does. It's a spiritual activity of human beings - and that's the joy of it!'

데미덴코에게 있어 ‘콘서트는 청중 속에서 있는 경우에 특별한데 반드시 음파로 표현되지 않는 마술을 듣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이 마법은 어떻게 생길까? 우리는 그것을 아주 쉽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현상을 거울처럼 본다. 음악은 이미 감정적으로 소유하고 있지 않은 것을 당신에게 줄 수는 없다. 당신은 당신의 반영만을 보며, 청중의 각 구성원은 다른 것을 들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모르는 자신의 성격의 몇몇 특징들이 있다면, 연주는 색다른 방식으로 그것들을 열 수 있는데, 정확히 어떤 형태의 예술이다. 그것은 인간의 영적인 활동이며, 그것은 이런 활동에 대한 기쁨이다!’

Scriabin Sonatas - No. 2 in g#, Op. 19 (1892-97). No. 9 in F [Black Mass] Op. 66 (1912-13); Studies - Op. 8 Nos. 2, 4, 5 (1894); Op. 42 Nos. 3, 4, 7 (1903); Four Pieces Op. 51 (1906); Vers la flamme: Poeme Op. 72 (1914) / 스크리아빈 소나타 2번, 소나타 9번 <흑미사>, 연습곡 작품 8의 2, 4, 5번, 연습곡 작품 42의 3, 4, 7번, 4개의 소품 작품 51, 시곡 <불꽃을 향하여>
'Scriabin,' Demidenko argues, 'plays with out expectations, his ideas are elusive, his ground-plans unpredictable, he gives us a tenth of the information we need to know. Conjuring the elements to alchemize new alloys of experience, often to points just short of destruction, was what he liked doing best. 2 + 2 = 4 may have satisfied other composers, it never did him. In the ambience, phrasing and cadence of his music we meet with a world almost without skin, a world of nerve-ends where the slightest contact can bring pain. Scriabin's music is not neurotic (a frequent accusation against it). But it is patently about over-exposed senses, about a different kind of nervous chemistry, about fantasies and reflections flying in the face of opposites'.

데미덴코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스크리아빈은 기대 이상으로 연주한다, 그의 악상은 포착하기 어렵다, 그의 기초 계획은 예측할 수 없다, 그는 우리에게 우리가 알아야 할 정보의 10분의 1을 제공한다. 경험의 새로운 합금을 변질시키려는 요소들을 종종 짧은 파괴 지점에 생기게 하는 것은 그가 도움이 되는 것을 좋아했다는 것이었다. 2 더하기 2는 4가 된다는 것은 그가 절대 못했던 다른 작곡가들을 만족시켰을 것이다. 그의 음악에 있는 분위기, 프레이징, 종지에서 우리는 최소한의 접촉이 고통을 가져올 수 있는 신경 끝의 세계인 피부가 거의 없는 세계를 만난다. 스크리아빈의 음악은 (비난이 빈번한) 신경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노출되어 있는 감각들에 대해, 신경질적인 다양한 화학적 성질에 대해, 반대편에 있음에도 날아가는 환상과 반영에 대해서는 틀림없다.

Prokofiev Visions fugitives (1915-17) / 프로코피에프 <덧없는 환영>
'In every fleeting glimpse I see worlds full of the changeable play of rainbow colours' (Konstantin Balmont). 'People at the end of an age, people now living, now dreaming, now petrified, people turned inside-out, people in the throes of new tumults [...] Twenty reflections brought together, twenty photo-clips [...] Some are in black-and-white, some are in colour, some are out of focus [...] Some are like windows onto a landscape - windows that you can open, windows through which you can catch fantastic shapes and spectres, windows of frost and mist and distortion. Without title to guide or hinder, the associations of this music are whatever you might want them to be' (Nikolai Demidenko, 1991).

‘모든 덧없는 영상으로부터 나는 무지개의 다채로운 조화로 가득 찬 세계를 본다(콘스탄틴 발몬트).’ ‘시대가 끝날 무렵의 사람들, 현재를 살고 현재를 꿈꾸며 현재 겁에 질린 사람들, 뒤집힌 사람들, 새로운 혼란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 [...] 20개의 반영은 20개로 자른 사진을 합친다. [...] 일부는 흑백으로, 일부는 컬러로, 일부는 화상이 흐릿하다. [...] 일부는 열 수 있는 창, 환상적인 모양과 유령을 포착할 수 있는 창, 서리와 안개와 뒤틀림의 창 등 풍경 위에 있는 창문과 같다. 가이드의 제목이나 방해가 없다면, 이 음악에 대한 여러 가지 연상은 당신이 원하는 무엇이든지 될 것이다(1991년 니콜라이 데미덴코).’

2018년 6월 16일 토요일

Brilliant Classics / Legendary Russian Pianists CD21 Nelly Akopian-Tamarina



CD21 Nelly Akopian-Tamarina / 넬리 아코피안-타마리나
01 Brahms Intermezzi, Op. 117 No. 1 in Eb: Andante moderato / 브람스 3개의 인토메조 작품 117
02 Brahms Intermezzi, Op. 117 No. 2 in b flat: Andante non troppo e con molto espressione
03 Brahms Intermezzi, Op. 117 No. 3 in c#: Andante con moto
04 Schumann Fantasy in C, Op. 17: I. Durchaus phantastisch und leidenschaftlich vorzutragen - Im Legendenton - Erstes Tempo - Adagio - Im Tempo / 슈만 환상곡 작품 17
05 Schumann Fantasy in C, Op. 17: II. Massig. Durchaus energisch. - Etwas bewegter. - Viel bewegter
06 Schumann Fantasy in C, Op. 17: III. Langsam getragen. Durchweg leise zu halten - Etwas bewegter
07 Schumann Arabeske in C, Op. 18 / 슈만 아라베스크

Nelly Akopian-Tamarina (b. 1941) / 넬리 아코피안-타마리나
Principal Teachers: Anaida Sumbatian, Alexander Goldenweiser, Dmitri Bashkirov / 아나이다 숨바티안, 알렉산더 골덴바이저, 드미트리 바쉬키로프 사사

Prizes:
1963 - Schumann Competition, 1st / 슈만 콩쿠르 1위
1974 - Robert Schumann Prize / 로베르트 슈만 상

'An artist of sovereign personality, with a palette of colours and dynamics in her sound the likes of which have not been heard in years [...] such poetic mystery and lyric individuality [...] One felt transported back to the beginning of the century' (Prague "Lidove Noviny"). Delicate, ballerineque, a latter-day 'lady in black', Akopian-Tamarina studied with Anaida Sumbatian at the Central School of Music, and at the Moscow Conservatory, as one of Goldenweiser's last students. Despite receiving the Schumann Prize, and her status as a Soloist of the Moscow State "Philharmonie", she was removed from public life during the 1970s (her sister having married a Jew and emigrated to the West). Prevented from giving concerts, she turned to painting, exhibiting in Moscow. Finally allowed to leave, she settled in London in 1978, only returning to play in Russia in 2002 for an emotional homecoming.

‘수년 동안 듣지 못했던 것 같은 그녀의 소리에서 색채와 다이내믹을 지닌 최고 자질의 아티스트 [...] 그런 시적인 신비함과 서정적인 개성 [...] 세기의 시작으로 다시 돌아간 것처럼 느껴졌다(프라하 <리도베 노비니>).’ 섬세하면서도 발레리나 같은 현대판 ‘레이디 인 블랙’ 아코피안-타마리나는 중앙음악학교와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골덴바이저의 마지막 제자들 중 한 명이었던 아나이다 숨바티안을 사사했다. 슈만 상을 받고 모스크바 연방 “필하모니” 솔로이스트 지위였음에도 그녀는 (그녀의 자매가 유태인과 결혼하여 서방으로 이주했던) 1970년대에 공적 생활에서 제외되었다. 콘서트를 열지 못하게 했으므로 그녀는 그림으로 전환하여 모스크바에서 전시했다. 마침내 떠날 수 있게 된 그녀는 1978년 런던에 정착했으며 감정을 자극하는 귀향으로 2002년에 러시아에서 연주하기 위해 재방문했을 뿐이었다.

For Melodiya she recorded the Schumann Concerto and Chopin Preludes. Her masterclasses tour witness to how she wanders the imagination. 'Play the unsaid, the unwritten'; play in a state of wonder'; 'think of the start of a Chopin ballade like a window opening'; 'don't prepare for something magical' (don't signpost a moment); 'a picture of sadness is not necessarily a sad picture'. 'I don't believe in facts, I believe in fairy-tales.'

멜로디야에서 그녀는 쇼팽 협주곡과 쇼팽 전주곡을 녹음했다. 그녀의 마스터클래스 투어는 그녀가 어떻게 상상력을 자극하는지 보여준다. ‘(악보에) 쓰이지 않은 모르는 것을 연주하라’ - ‘궁금한 상태에서 연주하라.’ - ‘창문이 열리는 것처럼 쇼팽 발라드 시작을 생각하라.’ - ‘마법 같은 것을 준비하지 말라.’ (순간을 제시하지 말라.) - ‘슬픈 그림이 반드시 슬픈 그림인 것은 아니다.’ - ‘나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나는 동화를 믿는다.’

Akopian-Tamarina recitals tend to haunt the memory with luminous "fortissimi", chords ice-edged in silver, the riskiest "pianissimi", singing lines, deliberated textures, complex voicings, broad-chested melodies 'thrown' across the auditorium, unspoken stories journeying to the stars. Following Heinrich Neuhaus, she is very much a believer in allegory as a passport to other worlds and states of mind. Phrasing, pausing, breathing, silence, the language of meaning, feeling and communication, is her universe. A Slavonically cultured Romantic, more poet and conjuror than "puissance" specialist, she takes listeners back to a distant, lost past.

아코피안-타마리나 리사이틀은 빛나는 “포르티시모”(매우 세게), 은빛의 얼음처럼 깎인 화음, 가장 위험한 “피아니시모”(매우 여리게), 노래하는 선율, 신중한 질감, 복잡한 목소리, 강당을 가로질러 ‘던져진’ 넓은 가슴의 멜로디, 별을 여행하는 무언의 이야기로 추억이 계속 떠오르는 경향이 있다. 하인리히 네이가우스에 따르면, 그녀는 다른 세계와 정신 상태에 대한 여권으로 우화를 매우 신봉한다. 프레이징, 정지, 호흡, 침묵, 의미의 언어, 느낌, 의사소통은 그녀의 우주이다. 슬라브 풍의 세련된 낭만주의자로, “힘” 전문가보다 더 시적이고 영리한 그녀는 먼 옛날 잃어버린 과거로 청취자들을 데려간다.

Brahms Intermezzi, Op. 117 (c1892) / 브람스 3개의 인터메조 작품 117
'Belated love-letters that call woefully and bitterly into the void' (Richard Specht, 1928). Of the third, Akopian-Tamarina suggests that 'Brahms remains within himself, restraining his emotions to the last phrase. Only then does he let go, unable to contain himself, weeping openly. In the pure, closed triad of the final decaying sound he returns to the recesses of his soul' (2008).

‘공허함으로 슬픔에 가득 차서 비통하게 부르는 뒤늦은 러브레터(리하르트 슈페히트, 1928).’ 세 번째 곡에서 아코피안-타마리나는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브람스는 마지막 프레이즈에 그의 감정을 억누르면서 자신 안에 머물러있다. 그제야 자신을 놓아주며 억누를 길이 없어서 드러내놓고 운다. 마지막으로 쇠퇴하는 소리의 순수한 폐쇄된 3화음에서 그는 자신의 영혼의 휴식으로 되돌아간다(2008).’

Schumann Fantasy in C, Op. 17 (1836-39) / 슈만 환상곡 작품 17
The C major Fantasy dedicated to Liszt soars among Schumann's works. He wrote it as a "poeme d'amour" for the young Clara Wieck, his earthly obsession, and as a memorial to his spiritual one, Beethoven. 'A fairy tale,' Akopian-Tamarina proposes of the E flat second movement, 'bringing back memories of a Russian childhood, my father reading Pushkin poems, my mother taking me to see "The Nutcracker". A resplendent march is repeated three times, each manifestation promising a kingdom of fantasy and whimsical images, a dreamland through whose gates enter only those "bundlers" brave enough to win noble deeds. "A magic place [quoting Pushkin's "Ruslan and Ludmila"]: there wends his way the woodsprite, there's a mermaid sitting in branches, there on trails past knowing are tracks of beasts you never met". Third time around, the march, imperial and burnished, glories into a happy ending. A golden cage opens, releasing flights of firebirds whistling deliriously in celebration of life' (1997).

리스트에게 헌정된 C장조 환상곡은 슈만의 작품들 사이에서 중요하다. 그는 자신의 세속적인 집착이었던 어린 클라라 비크를 위한 “사랑의 시”이자 그의 영적인 존재인 베토벤에 대한 추모로 이 곡을 썼다. 아코피안-타마리나는 이 곡의 2악장 내림E장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아버지는 푸시킨의 시를 읽으시고 어머니는 <호두까기 인형>을 보러 나를 데려가셨던, 러시아의 어린 시절 추억을 되살리는 동화. 눈부시게 빛나는 행진이 3번 반복되며, 각 표현은 환상과 기발한 이미지의 왕국(위대한 공적을 얻기에 충분히 용감한 “꾸러미”만 끌어들이는 신성한 문을 통과하는 꿈나라)을 약속한다. “마법의 장소[푸시킨의 <루슬란과 루드밀라> 인용]에서는 나무 요정이 그를 지나가고 인어가 나뭇가지에 앉아있으며 당신이 결코 만난 적이 없는 짐승의 궤적을 알고 있는 지난 흔적이 있다.” 셋째로, 행진, 제국의 불타는, 행복한 결말로의 영광. 황금 새장이 열리면서 살아 있음을 축하하여 기뻐 날뛰며 휘파람을 부는 불새들의 비행을 자유롭게 한다(1997).’

Brilliant Classics / Legendary Russian Pianists CD20 Vladimir Ashkenazy & Viktoria Postnikova



CD20 Vladimir Ashkenazy & Viktoria Postnikova /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빅토리아 포스트니코바
01 Prokofiev Piano Concerto No. 2 in g, Op. 16: I. Andantino - Allegretto / 프로코피에프 피아노 협주곡 2번
02 Prokofiev Piano Concerto No. 2 in g, Op. 16: II. Scherzo. Vivace
03 Prokofiev Piano Concerto No. 2 in g, Op. 16: III. Intermezzo. Allegro moderato
04 Prokofiev Piano Concerto No. 2 in g, Op. 16: IV. Finale. Allegro tempestuoso
Vladimir Ashkenazy, piano /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피아노
USSR State Symphony Orchestra / 소련 국립 심포니 오케스트라
Gennady Rozhdestvensky, conductor / 겐나디 로제스트벤스키 지휘

05 Rachmaninov Variations on a theme by Chopin / 라흐마니노프 <쇼팽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
06 Rachmaninov Polka de W.R. / 라흐마니노프 <베어의 아버지의 폴카> (스케르초 폴카)
07 Rachmaninov Prelude in c#, Op. 3 No. 2 / 라흐마니노프 프렐류드 작품 3-2 <모스크바의 종>
08 Arensky Prelude to 'The Fountain of Bakhchisaray', Op. 46 / 아렌스키 <바흐치사라이의 샘물> 전주곡
Viktoria Postnikova, piano / 빅토리아 포스트니코바, 피아노

Vladimir Ashkenazy (b. 1937) /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Principal Teachers: Anaida Sumbatian, Boris Zemlyansky, Lev Oborin / 아나이다 숨바티안, 보리스 젬리안스키, 레프 오보린 사사

Prizes:
1955 - Chopin Competition, 2nd / 쇼팽 콩쿠르 2위
1956 - Queen Elisabeth Competition, 1st / 퀸엘리자베스 콩쿠르 1위
1962 - Tchaikovsky Competition, joint 1st with John Ogdon /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존 오그던과 공동 1위
6 Grammy Awards / 그래미상 6회 수상

'I believe that interpretation should be like a transparent glass, a window for the composer's music. One should not be willful. I don't believe in interpretation with a capital letter. I believe in bringing the music to life from within - without artificial effects' (David Dubal, "Reflections from the Keyboard", 1984). 'Total disappointment. Expression = zero. Nothing happens. And this is Volodya Ashkenazy! Is he from another planet?' (Sviatoslav Richter, on hearing a Brahms intermezzo, 1989). Ashkenazy was born in Gorky (Nizhny-Novgorod). 'My father was ethnic Jewish, but not at all religious. My mother, an actress, was very Russian. As my father was always away, it was my mother who brought me up, and instilled in me my attitude to life' (Ashkenazy: "The Vital Juices Are Russian", Christopher Nupen film, 1968).

‘나는 그 해석이 투명한 유리, 작곡가의 음악을 위한 창과 같아야 한다고 믿는다. 계획적인 것이 아니어야 한다. 나는 대문자로 해석하는 것을 믿지 않는다. 나는 인공적인 효과 없이 내면에서 음악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이라고 믿는다(데이비드 듀발의 저서 <건반으로부터의 반영>, 1984).’ ‘표현=0.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볼로디아 아쉬케나지이다! 그는 또 다른 행성에서 왔나?(1989년 브람스 인터메조를 들은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아쉬케나지는 고르키(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소수민족인 유태계지만, 전혀 독실하지 않았다. 배우였던 어머니는 매우 러시아적이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떨어져 계셨으므로 나를 기르면서 항상 인생에 대한 태도를 심어주신 분은 어머니였다(1968년 크리스토퍼 누펜의 필름 <중요한 추출물은 러시아산이다>에서 아쉬케나지).’

At the Central Music School (1945-55) he was a pupil of Anaida Sumbatian, an Armenian Muscovite who'd studied with Anna Esipova (and was the teacher also of Vladimir Krainev and Oxana Yablonskaya). He completed his training at the Moscow Conservatoire (1956-63), working principally with Lev Oborin and his assistant Boris Zemlyansky ('who really made music my life, for him it was always a matter of life and death'). One of the most professionally honed of today's artists, he divides his life between piano playing and conducting, orchestral appointments having included principal or guest positions with the Philharmonia, the Royal Philharmonic, the Cleveland, the Czech Philharmonic, and NHK Symphony orchestras.

중앙음악학교(1945~55년)에서 그는 아나이다 숨바티안의 제자였는데, 그녀는 (블라디미르 크라이네프와 옥사나 야블론스카야의 스승이기도 했던) 안나 에시포바를 사사했던 아르메니아계 모스크바 사람이었다. 그는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학업을 마쳤는데, 주로 레프 오보린과 그의 조교 보리스 젬리안스키(‘음악을 내 인생으로 만들었던 사람으로 그에게 음악은 항상 삶과 죽음의 문제였다.’)와 함께 일했다. 오늘날 가장 전문적으로 연마된 아티스트들 중의 한 명인 그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NHK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수석 또는 객원 지휘를 포함하는 오케스트라 지휘와 피아노 연주 사이에서 인생을 나눈다.

A copious recording artist, his discography is impressively catholic. The complete Bartok, Beethoven, Brahms, Mozart, Prokofiev, and Rachmaninoff concertos, Beethoven, Chopin and Scriabin cycles, Shostakovich's Prelude and Fugues, the major Schubert sonatas, chamber music and songs. Special projects he has devised have included 'Rachmaninoff Revisited' (New York 2002) and 'Prokofiev and Shostakovich Under Stalin' (London 2003). Having left the USSR in 1963 to settle in the West, he returned in 1989, appearing with the RPO (Royal Philharmonic Orchestra) in the Great Hall of the Moscow Conservatoire, with some unusual programmes which included Oliver Knussen's Third Symphony and William Walton's Second.

엄청난 레코딩 아티스트인 그의 디스코그래피는 인상 깊게 방대하다. 버르토크, 베토벤, 브람스, 모차르트, 프로코피에프,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전집, 베토벤, 쇼팽, 스크리아빈 전집, 쇼스타코비치 프렐류드와 푸가, 슈베르트의 주요 소나타, 실내악곡, 가곡들이 있다. 그가 고안한 특별 프로젝트에는 <라흐마니노프 재고>(2002년 뉴욕) 및 <스탈린 치하의 프로코피에프와 쇼스타코비치>(2003년 런던)가 있다. 1963년에 소련을 떠나 서방에 정착하게 된 그는 1989년에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재방문하여 모스크바 음악원 대강당에서 올리버 크누센 교향곡 3번과 윌리엄 월튼 교향곡 2번을 포함하는 색다른 프로그램을 지휘했다.

Prokofiev Piano Concerto No. 2 in g, Op. 16 (1912-13 reconstructed 1923-24) / 프로코피에프 피아노 협주곡 2번
Initially dismissed, today recognized as a dramatic 20th-century masterpiece, this received its European premiere in Paris, 8 May 1924, with the composer as soloist and Sergei Koussevitzky conducting. The pianist Alexander Toradze links the music programmically with the tragedy of its posthumous dedicatee, the pianist Maximilian Shmitgoff ('Dear Serioja, informing you of the latest new - I just shot myself'). The first-movement cadenza makes or breaks a pianist and a performance.

처음에는 무시당했으나 오늘날 극적인 20세기 걸작으로 인정받은 이 곡은 1924년 5월 8일 파리에서 작곡가의 연주와 세르게이 쿠세비츠키의 지휘로 유럽 초연을 받아들였다. 피아니스트 알렉산더 토라제는 프로그램에서 음악을 사후의 헌정자인 피아니스트 막시밀리안 슈미트호프의 비극(‘친애하는 세리오야에게, 가장 최근의 소식을 알리면서 - 죽어버리고 싶다네.’)과 관련시킨다. 1악장 카덴차는 피아니스트와 연주를 만들거나 끊는다.

https://www.youtube.com/watch?v=3eSgK6HRULE

유튜브에서 아쉬케나지의 다큐멘터리를 볼 수 있는데 아쉬케나지의 젊은 시절과 그의 가족들, 바이올리니스트 이착 펄만, 피아니스트 다니엘 바렌보임과의 협연도 나온다. 아쉬케나지는 3대 콩쿠르를 전부 석권했는데 제2의 아쉬케나지는 없다고 봐야 한다. 3대 콩쿠르의 경우 하나는 1위나 2위, 다른 하나는 3위인 경우는 있어도 아쉬케나지처럼 하나는 준우승, 다른 하나는 우승이 될 수 없다. 하나에서 준우승해봤으면 다른 하나도 잘 해야 준우승이다. 콩쿠르란 게 심사위원 다수의 비위를 거스르지 말아야 한다고 그랬는데 아쉬케나지의 경우 심사위원 다수를 두루 만족시키는 연주를 했나보다. 내가 학습자로서 우선순위로 참고하는 연주자가 아쉬케나지이기도 하다.

Viktoria Postnikova (b. 1944) / 빅토리아 포스트니코바
Princila Teachers: Eleonora Musaelian, Yakov Flier / 엘레오노라 무사엘리안, 야코프 플리에르 사사

Prizes:
1965 - Chopin Competition, honourable mention / 쇼팽 콩쿠르 세미파이널리스트
1966 - Leeds Competition, joint 2nd with Semyon Kruchin / 리즈 콩쿠르에서 세미온 크루친과 공동 2위
1967 - Vianna da Motta Competition in Lisbon, joint 1st with Farhad Badalbeyli / 리스본 제6회 비안나 다 모타 콩쿠르에서 파르하드 바달베일리와 공동 1위
1970 - Tchaikovsky Competition, joint 3rd with Arthur Moreira-Lima /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아르투르 모레이라-리마와 공동 3위

'A major talent' (Sviatoslav Richter). In the mid 1960s the young Postnikova - delicate, alluring, very Russian - captivated the West. When she appeared at the BBC Proms in 1967, her Chopin E minor and Tchaikovsky First Concerto (under Sir John Barbirolli) spell-bound thousands. That she failed to win Leeds, trailing Rafael Orozco, raised heated protest, particularly from Hans Keller of the BBC, who weighed in with all his authority. 'With intensely restrained intensity, with breathtaking poise between extremes of contrasting emotion, with an originality of insight that made every phrase [...] sound brand new - in short, with continuous inspiration and mastery, this 22-year-old girl gave performance after performance which showed where music came from: that it was an urgent communication inexpressible by any other means. Miss Postnikova is a supreme artist who composes while she plays.'

‘두드러진 재능(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1960년대 중반에 섬세하고 매혹적이며 매우 러시아적인 러시아인이었던 젊은 포스트니코바는 서방을 사로잡았다. 그녀가 1967년 BBC 프롬스에 등장했을 때 쇼팽 협주곡 1번과 차이코프스키 협주곡 1번(존 바비롤리 경 지휘)은 수천 명의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그녀가 리즈 콩쿠르에서 라파엘 오로스코에 이어 준우승하면서 우승에 실패했던 것은 BBC 방송의 한스 켈러에게서 특히 열띤 항의를 제기했다. ‘강렬하게 절제된 강렬함으로, 대조되는 극단적인 감정 사이의 숨이 멎는 듯한 침착함으로, 모든 프레이즈를 만든 통찰력의 독창성으로 [...] 완전히 새로운 것처럼 들린다. - 요컨대 지속적인 영감과 지배로 이 22세 여성은 음악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보여줬던 연주 후의 연주를 했는데, 다른 어떤 수단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절실한 의사소통이었다. 포스트니코바는 그녀가 연주하는 동안에 작곡하는 최고의 아티스트이다.’

With Gennady Rozhdestvensky (whom she married in 1969) she has recorded the complete concertos of Tchaikovsky (in Vienna) and Prokofiev (in Moscow) as well as Busoni, Janacek, Scriabin, Schnittke and Tishchenko. Her solo Tchaikovsky cycle from 1992-3 sets a benchmark, taking us on a fragrant journey, intimately imagined.

(1969년에 결혼한) 겐나디 로제스트벤스키와 함께 그녀는 (비엔나에서) 차이코프스키 협주곡 전곡과 (모스크바에서) 프로코피에프 전곡뿐만 아니라 부조니, 야나체크, 스크리아빈, 슈니트케, 티셴코도 녹음했다. 그녀의 차이코프스키 독주곡 전집 음반(1992~3년)은 우리에게 친밀한 상상의 향긋한 여행으로 데려가는 기준이 된다.

Rachmaninoff Variations on a Theme of Chopin, Op. 22 (1902-03) / 라흐마니노프 <쇼팽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
'Chopin! From the time I was nineteen years old [1892] I felt his greatness; and I marvel at it still. He is today more modern than many moderns [...] he remains for me one of the greatest of the giants' (Rachmaninoff, "The Etude", April 1932). The variations are Rachmaninoff's first extended work for piano solo, inspired by the C minor Prelude from Op. 28 and dedicated to Theodor Leschetizky.

‘쇼팽! 내가 19세[1892년]일 때부터 그의 위대함을 느꼈으며, 아직도 감탄한다. 그는 오늘날 많은 현대 작곡가들보다도 더 현대적이다. [...] 그는 내게 가장 위대한 거인들 중의 한 명으로 남아있다(1932년 4월 <더 에튀드>에서 라흐마니노프).’ 이 변주곡은 라흐마니노프가 처음으로 피아노 독주를 위해 확장한 작품으로, 쇼팽 전주곡 20번 c단조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테오도르 레셰티츠키에게 헌정되었다.

Rachmaninoff Polka de W.R. (1913) / 라흐마니노프 <베어의 아버지의 폴카> (스케르초 폴카)
Based on a theme by Rachmaninoff's father, Vasili, dedicated to Godowsky.

라흐마니노프의 아버지인 바실리의 주제에 기초한 것으로, 고도프스키에게 헌정되었다.

Rachmaninoff Prelude in c#, Op. 3 No. 2 (1892) / 라흐마니노프 전주곡 작품 3-2 <모스크바의 종>
'The Rachmaninoff "fans" and there were thousands of them - clamoured for the favourite piece of Flatbush "flappers". They surged towards Sergei in serried masses. They clustered about the stage [...] But Rachmaninoff did not play it. All Flapperdom sorrowed last night' (James Huneker, "New York Times", reporting the composer's New York debut, 21 December 1918).

‘라흐마니노프 “팬들”과 그들 중 수천 명이 - 플레부시의 “신여성들”이 선호하는 곡을 요구했다. 그들은 밀집한 대중 속에서 세르게이를 향해 몰려들었다. 그들은 무대 주위에 보였다. [...] 그러나 라흐마니노프는 그것을 연주하지 않았다. 모든 신여성들은 어젯밤에 슬퍼했다(1918년 12월 21일 작곡가의 뉴욕 데뷔를 보도한 <뉴욕 타임스>의 제임스 후네커).’

Arensky Prelude to "The Fountain of Bakhchisaray", Op. 46 (1899) / 아렌스키 <바흐치사라이의 샘물> 전주곡
'Mobile, nervous, with a wry smile on his clever, half Tartar face, always joking of snarling; all feared his laughter and adored his talent' (Rachmaninoff's classmate, Mikhail Bukinik). "The Fountain of Bakhchisaray", after Pushkin, is a cantata for solo voices, chorus and orchestra. One of the cruelest of Crimean Kahns loves Maria, a Polish girl in his harem. She dies young. He has a marble fountain erected so that the stone, like him, may weep forever.

‘변덕스럽고 초조하며 영리한 반쯤은 타타르인의 얼굴로 쓴웃음과 함께 항상 으르렁거리면서 놀린다. - 모두 그의 웃음을 두려워하면서도 그의 재능을 사랑했다(라흐마니노프의 급우인 미하일 부키니크).’ 푸시킨의 시에 의한 <바흐치사라이의 샘물>은 독창, 합창, 오케스트라를 위한 칸타타이다. 크림 칸국의 가장 잔인한 사람 중 한 명이 그의 하렘(전통적인 이슬람 가옥에서 여자들이 생활하는 영역)에 있는 폴란드 소녀 마리아를 사랑한다. 그녀는 일찍 죽는다. 그는 그와 같은 돌이 영원히 울 수 있게 만든 대리석 분수를 가지고 있다.

A bust of Pushkin beside the Fountain of Tears at Bakhchisaray Palace / 바흐치사라이 궁전에 있는 눈물의 샘과 그 옆에 있는 푸시킨의 흉상

리즈 콩쿠르에 대해서 정리하다가 라파엘 오로스코가 우승한 것에 대해서 논란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 대회에서 여성이 최초로 우승한 것은 2009년이다.

2018년 6월 15일 금요일

Brilliant Classics / Legendary Russian Pianists CD19 Lazar Berman



CD19 Lazar Berman / 라자르 베르만
01 Liszt Sonata 'Apres une lecture de Dante' (from Annees de Pelerinage II: Italie) / 리스트 <단테 소나타>
02 Liszt Mephisto Waltz No. 1 / 리스트 메피스토 왈츠 1번
03 Liszt Etudes d'execution transcendante No. 1 Prelude /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1번 <전주곡>
04 Liszt Etudes d'execution transcendante No. 3 Paysage /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3번 <풍경>
05 Liszt Etudes d'execution transcendante No. 5 Feux follets /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5번 <도깨비불>
06 Liszt Etudes d'execution transcendante No. 6 Vision /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6번 <환영>
07 Liszt Etudes d'execution transcendante No. 10 in f: Appassionata /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10번
08 Liszt Etudes d'execution transcendante No. 11 Harmonies du soir /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11번 <밤의 선율>
09 Liszt Etudes d'execution transcendante No. 12 Chasse-neige /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12번 <눈치우기>
10 Liszt Rhapsodie espagnole / 리스트 스페인 랩소디

Lazar Berman (1930-2005) / 라자르 베르만
Principal teachers: Anna Lazarevna Mahover (mother), Samary Savshinsky, Alexander Goldenweiser / 안나 라자레프나 마호버(어머니), 사마리 사브신스키, 알렉산더 골덴바이저 사사

Prizes:
1951 - Festival of Democratic Youth in East Berlin, 1st / 동베를린 공산주의 청소년 축제 1위
1956 - Queen Elisabeth Competition, 5th / 퀸엘리자베스 콩쿠르 5위
1956 - Liszt Competition in Budapest, 3rd joint with Liu Si-Kun / 부다페스트 제3회 리스트 콩쿠르에서 류시쿤과 공동 3위

'The phenomenon of the musical world' (Emil Gilels). Berman was born in Leningrad, but moved to Moscow in 1939, making his concerto debut the following year, aged ten, playing Mozart's Piano Concerto No. 25, K. 503 with the Moscow Philharmonic under Grigori Stolyarov. The next year Berman made his concerto debut with the Moscow philharmonic under the respected Grigory Stolyarov, playing K. 503 again. In the West his career was an on/off affair. Following Brussels in 1956 and London in 1958, he wasn't to tour outside the USSR for 13 years, not until 1971. 'No one invited me,' he used to say. The truth was that the invitations never got past Goskoncert, the state-run agency. In those intelligence-gathering, KGB-monitored, them-and-us days, crammed into a tiny Moscow apartment with a French wife, his mother and a piano, he was effectively a chained man, ignored by a world readier to chase the latest competition winner than tangle with Red authority.

‘음악세계의 현상(에밀 길렐스).’ 베르만은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났으며 1939년에 모스크바로 이주하여 이듬해(1940년) 10세에 그리고리 스톨리야로프의 지휘로 모스크바 필하모닉과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5번을 연주하여 협주곡 데뷔를 가졌다. 이듬해(1941년)에 베르만은 훌륭한 그리고리 스톨리야로프의 지휘로 모스크바 필하모닉과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5번을 다시 연주하면서 협주곡 데뷔를 가졌다. 서방에서 그의 경력은 계속되다가 끊어졌다가 하는 문제였다. 1956년 브뤼셀과 1958년 런던에 이어 1971년까지 13년 동안 소련 밖을 여행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도 나를 초대하지 않았다’고 말하곤 했다. 그 진실은 소련 연방 콘서트 에이전시인 고스콘서트를 통과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정보 수집에서 KGB가 감시했던 고통의 나날들은 프랑스인 아내, 그의 어머니, 피아노를 좁은 모스크바 아파트로 쑤셔 넣었으며, 그는 사실상 사슬에 묶인 남자였는데, 붉은 권위와의 싸움에 휘말린 것보다 가장 최근의 콩쿠르 입상자를 쫓는 것에 준비된 세계에 의해 무시되었다.

With his third marriage in 1968, his luck changed. Building on successful Italian visits in the early 1970s, the high-profile support of Michelangeli and Richter, and a contract with DG to record the Tchaikovsky B flat minor with Karajan, a tour of the United States was offered to him for early 1976 - packaged and orchestrated by Jacques Leiser to a fanfare of notices in response to HMV/Melodiya's strategic reissue of the 1963 Liszt "Transcendentals" - old session work minted overnight into valuable, suddenly 'famous' currency. His New York debut, playing the Tchaikovsky with Lukas Foss on 17 January, prompted Harold C. Schonberg of the "New York Times" to opine that 'he may be that rarest of musicians - a real, true blue Romantic, one who understands the conventions and has the ability to put them into effect.' American audiences adored him, wanting to re-experience the euphoria they'd gone through with Gilels a couple of decades earlier, and Horowitz 20 years before that - to relive the same battle - charging repertory, thunder-weight division "a la lusse". In London he made a 'spectacular' return with the Rachmaninoff D minor Concerto under Claudio Abbado (30 November), following up five days later with Prokofiev's Eighth Sonata and Liszt's Transcendental Studies before a packed house of three thousand.

1968년 세 번째 결혼으로 그의 운이 바뀌었다. 1970년대 초의 성공적인 이탈리아 방문으로 미켈란젤리와 리히터로부터 세간의 이목을 끄는 지원을 받았으며, 카라얀과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녹음하기 위해 DG와의 계약인 미국 투어가 1976년 초에 그에게 제공되었는데, HMV/멜로디야 레이블의 1963년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음반의 전략적인 재발매에 대한 반응으로 대대적으로 축하하는 것을 알리는 의미로 자크 레이서가 모아서 편곡한 것으로, 소중하게도 갑작스럽게 ‘유명해진’ 인기로 하룻밤 사이에 최근 생겨난 오랜 시간의 작업이었다. 1월 17일 루카스 포스의 지휘로 차이코프스키 협주곡 1번을 연주한 뉴욕 데뷔에 대해 <뉴욕 타임스>의 평론가 해럴드 숀버그는 다음과 같이 견해를 밝혔다. ‘이 세상에 가장 희귀한 음악가이며. 정말 진짜 우울한 낭만주의자이고 무대 위에서 효과적으로 쏟아낼 수 있는 사람이다.’ 미국인 청중들은 그를 그리워하여 20년 전에 길렐스와 함께 했던 행복감을 원했으며, 20년 전에 호로비츠가 같은 전투를 재현하기 위해 연주했던 것처럼 “러시아 풍의” 번개 같은 레퍼토리를 요구했다. 런던에서 그는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3번(클라우디오 아바도 지휘)으로 ‘화려한’ 복귀를 가졌으며 이어서 5일 후에는 3천 명이 운집한 공연장 앞에서 프로코피에프 소나타 8번과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을 연주했다.

By November 1979, however, 'Lazar looked tired, nervous, and even dispirited. In private, he did not hide how hard he took the Soviet officials' refusal to let his wife join him [...] No wonder that his playing was slightly dimmed' (Dmitri Paperno). A few months later, accused of 'anti-Soviet smuggling' with banned American literature discovered in his luggage, the Great Dream was over. By the time he got back on the road, his glory days with DG and Columbia over, the supernova that had so dazzled the seventies was no more. Its ghost, though, the memory of what once had been, helped keep the legend alive. In August 1990, the USSR in free fall, Berman and his family left Moscow via Norway to settle in Florence, taking Italian citizenship four years later. Largely disenchanted with the rigours of concert life, semi-retired, he ended his days teaching (principally in Imola, but also in Weimar), taking master-classes, bringing his weight to the competition jury circuit, playing chamber music, and occasionally dusting off the Tchaikovsky with a provincial or radio orchestra. And he found time to write his memoirs, translated into German in 2003.

그러나 1979년 11월까지 ‘라자르는 피곤해보였고 긴장했으며 심지어 파문을 일으켰다. 사적으로 그는 아내가 그에게 합류하게 하려는 소련 관리의 거부를 얼마나 당했는지 숨기지 않았다. [...] 그의 연주가 약간 어둡게 될 만도 하다(드미트리 파페르노).’ 몇 달 후, 그의 가방에서 발견된 금서로 지정해놓은 ‘반 소련 밀수품’으로 체포되어 그의 ‘큰 꿈’은 끝났다. DG 및 컬럼비아 레이블과 함께 했던 영광의 날들이 끝나갈 무렵, 70년대를 정말 황홀하게 했던 초신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한때 있었던 추억이었지만 그 영혼은 전설이 계속 살아있게 했다. 소련이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면서 이 간섭의 빈도가 줄어들었던 1990년 8월, 베르만과 그의 가족은 모스크바를 떠나 노르웨이를 거쳐 피렌체에 정착했으며 4년 후 이탈리아 시민권을 획득했다. 엄격한 연주 인생에 크게 환멸을 느끼고 반쯤 은퇴한 그는 (특히 이몰라뿐만 아니라 바이마르에서도) 가르치고 마스터클래스를 가지고 콩쿠르 심사위원에 무게를 두고 실내악을 연주하며 가끔 지방 또는 라디오 오케스트라와 차이코프스키를 오랜만에 연주하면서 여생을 마쳤다. 그리고 그는 2003년에 독일어로 번역된 그의 자서전 <순례의 해. 음악가의 꿈>(The Years of Peregrination, A Musician's Reverie)을 쓸 틈을 냈다.

Berman was 'A bear of a man with a mane of chestnut hair and a ginger bread [...] like a character actor in a Chekhov play' ("The Times", 10 February 2005); a Leningrader trained under Stalin's flag; a Muscovite who lived through Khrushchev's Thaw, Brezhnev's Cold War, the Gorbachev's years of "glasnost, perestroika" and Chernobyl, and a Jew who incurred the wrath of but survived the Hades of Brezhnev/Andropov anti-semitism, anti-religion and non-detente. Compassionate, good-humoured, wanting to 'give pleasure to people [...] pleasure and joy with my art' (1982), Berman of the chords and octaves was a pianist of incandescent technique, as celebrated for the near-impossible (his famous 1963 "Spanish Rhapsody" recording) as the party-going stunt (playing a Chopin sonata with hands crossed). His bravura and flagrant heart-on-the-sleeve emotions weren't to everyone's taste, though. Many Westerners back in 1976 - the anti-Romantic Revivalists, the Teutonically biased - saw him as a barn-storming charlatan of shadow gesture, careless error and muddy pedalling, a speed-and-strength merchant inclined towards dynamic overkill with a tendency 'to pull out all the stops rather too often' (Joan Chissell). To an extent this was an opinion held even in certain Moscow circles. 'For a long time,' Dmitri Paperno notes, 'Lyalik was underestimated in our homeland, considered basically an outstanding virtuoso pianist without a sufficiently expressed musical personality. It is enough [however] to listen to his Liszt, his Brahms, to much of his Beethoven, to realize that this is not so.' At his most spiritual, however, Berman could be, was often, an eloquent poet, a bard weaving tales, a wandering Slav remembering through smoke-circles. Goldenweiser (for whom he could little wrong), Neuhaus and Sofronitzky (his 'god') all recognized this. 'Berman's passion, tirelessness, endless giving, and love of his art were contagious. He taught us to believe that even if we didn't have, or might never have, great careers we would still end up with the greatest of gifts - the love of music' (Nadejda Vlaeva).

베르만은 ‘체호프의 연극에 나오는 인물처럼 [...] 밤색 머리털과 허약함을 지닌 덩치가 큰 사람이었다(2005년 2월 10일 <더 타임스>).’ - 스탈린의 깃발 아래에서 훈련된 레닌그라드 사람으로, 흐루시초프의 해빙기, 브레즈네프의 냉전, 고르바초프의 “경제구조 개혁(글라스노스트)과 언론 해방(페레스트로이카)”의 해와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해를 겪은 모스크바 사람이었으며, 당국의 노여움을 샀지만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의 하데스(죽은 자들의 나라), 반유대주의, 반 긴장완화에서 살아남은 유태인이었다. 어질고 쾌활하면서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고 [...] 내 예술로 행복과 기쁨을 주길’ 원하는(1982), 화성과 옥타브의 베르만은 (양손이 교차하는 쇼팽 소나타를 연주하면서) 파티를 벌이는 묘기만큼 거의 불가능한 것(그의 유명한 1963년 리스트 <스페인 랩소디> 녹음)으로 유명한 눈부시게 밝은 테크닉을 가진 피아니스트였다. 고도의 예술적 기교를 보여주면서 분명하게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냈지만 모든 사람의 취향은 아니었다. 1976년에 돌아온 많은 서방 사람들, 게르만 민족 특유의 편견을 가진 반낭만주의 복고주의자들은 그를 그림자, 부주의한 오류와 탁한 페달링을 지닌 아주 재밌는 돌팔이, ‘오히려 너무 자주 온갖 노력을 다하는(조안 치셀)’ 경향이 있는 다이내믹 과잉의 성향이 있는 스피드-파워광으로 보았다. 어느 정도 이것은 특정 모스크바 모임에서도 포착되었던 의견이었다. 드미트리 파페르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오랫동안 리알리크(라자르 베르만)는 충분히 뛰어난 음악적 개성이 없이도 두드러지는 거장 피아니스트로 간주되어 본국에서 과소평가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으려면 그의 리스트, 그의 브람스, 그의 중요한 베토벤을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가장 영적일 수도 있었던 베르만은 종종 달변인 시인, 이야기를 짜는 시인, 애연가 집단을 보면 기억나는 방황하는 슬라브인이었다. (약간 돌았을 수도 있는) 골덴바이저, 네이가우스, (그의 ‘신’) 소프로니츠키 모두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베르만의 열정, 지칠 줄 모르는 끝없는 기부, 그의 예술에 대한 사랑은 전염성이 있었다. 그는 우리에게 훌륭한 경력을 갖지 못했거나 결코 가질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최고의 재능으로 끝날 것이라고 믿도록 가르쳤다(나데이다 블라예바).’

Liszt: Apres une lecture du Dante, Fantasia quasi Sonata, S. 161 No. 7 (1839 rev. 1849) / 리스트 <단테를 읽고>
From the second book of "Annees de Pelerinage". Within it, Berman hears an 'inferno, people screaming, crying, suffering in pain, dying.'

<순례의 연보> 2권에 있는 곡. 베르만은 이 곡에서 ‘불바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울며 고통 받으면서 죽어가는 것’을 듣는다.

Liszt Mephisto Waltz No. 1 'Dance at the Village Inn', S. 514 (published 1862) / 리스트 메피스토 왈츠 1번 <마을 술집에서의 춤>
Transcribed by Liszt from the second of his "Two Episodes" from "Lenau's Faust" for orchestra (1859-61), this is one of the uncompromising battle-chargers of the repertory. Dedicated to Karl Tausig, the Mephisto Waltzes encapsulate the essence of Liszt the man for whom the devil and the gypsy sat equally at God's table.

오케스트라를 위한 <레나우의 파우스트>(1859~61년)에서 그의 <2개의 에피소드> 중 두 번째 곡을 리스트가 편곡한 것으로, 이 곡은 레퍼토리의 단호한 군마들(많이 연주되는 곡들) 중의 하나이다. 카를 타우지히에게 헌정된 메피스토 왈츠들은 남자에게 신의 테이블에 대등하게 앉은 악마와 집시에 대한 리스트의 본질을 압축한다.

Liszt Etudes d'execution transcendante, S. 139 (third version, 1851) /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3판
Defining modern piano technique, the Transcendental Studies (dedicated to Czerny) tell a story of infinite selection and metamorphosis, the legend of the double-escapement concert-grand from straight-strung wood frame to cross-strung iron. The following comments were made by Busoni.

현대 피아노 테크닉을 정의하는, (체르니에게 헌정된) 초절기교 연습곡들은 무한한 선택과 변신, 연속하는 현이 달린 나무틀부터 현이 교차하는 철까지 이중 탈진기[脫進機) : 기어의 회전 속도를 고르게 하는 장치] 콘서트그랜드피아노의 전설에 대해 이야기한다. 부조니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Liszt Etudes d'execution transcendante, S. 139 No. 1 Preludio /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1번 <프렐류드>
'A prelude to test the instrument and the disposition of the performer after stepping on to the concert platform.'

‘콘서트 무대를 밟은 후에 악기와 연주자의 기질을 테스트하기 위한 전주곡.’

Liszt Etudes d'execution transcendante, S. 139 No. 3 Paysage /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3번 <풍경>
'A calm renunciation of everything worldly - taking breath during the contemplation of nature, a self-contemplation but not quite without passion.'

‘세상 모든 것의 조용한 포기 - 자연을 사색하는 동안 호흡하면서 명상을 하되 전혀 열정이 없는 것이 아니다.’

Liszt Etudes d'execution transcendante, S. 139 No. 6 Vision /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6번 <환영>
'The funeral of the first Napoleon advancing with solemn and imperial pomp.'

‘엄숙하면서도 황제처럼 화려하게 전진하는 첫 번째 나폴레옹의 장례식.’

Liszt Etudes d'execution transcendante, S. 139 No. 10 in f /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10번
'The title "Appassionata" would well suit.'

‘<열정>이란 제목이 잘 어울릴 것.’

Liszt Etudes d'execution transcendante, S. 139 No. 11 Harmonies du Soir /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11번 <밤의 선율>
'The bell-like magic of the pianoforte [extended] with flattering and impetuous charm.'

‘돋보이게 하는 충동적인 매력으로 확장된 종소리 같은 피아노의 마법.’

Liszt Etudes d'execution transcendante, S. 139 No. 12 Chasse-neige /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12번 <눈치우기>
'The noblest example, perhaps, among all music of a poetizing nature - a sublime and steady fall of snow which gradually buries landscape and people.'

‘점점 풍경과 사람들을 묻어버리는 절묘하면서도 계속 눈이 오는 시 같은 자연의 모든 음악 중에서 아마도 가장 고귀한 예가 될 것이다.’

Liszt Rhapsodie Espagnol, Folies d'Espagne et jota aragonesa, S. 254 (c 1863) / 리스트 스페인 랩소디 <폴리아 데스파뉴와 호타 아라고네사>
Appropriated from Emil Gilels, an adrenalin-racing Berman warhorse - from the early fifties to his US debut in Cleveland, 14 January 1976.

에밀 길렐스에게 적절한, 아드레날린(흥분, 공포, 분노 등의 감정을 느낄 때 분비되는 호르몬)으로 쿵쿵 뛰는, 클리블랜드에서 1976년 1월 14일 미국 데뷔를 가졌던 50대 초반의 베르만 노병.

Brilliant Classics / Legendary Russian Pianists CD16-18 Emil Gilels



CD16 Emil Gilels / 에밀 길렐스
01 Chopin Nocturne No. 13 in c, Op. 48 No. 1 / 쇼팽 녹턴 13번
02 Chopin Sonata No. 2 in b flat, Op. 35: I. Grave - Doppio movimento / 쇼팽 소나타 2번
03 Chopin Sonata No. 2 in b flat, Op. 35: II. Scherzo
04 Chopin Sonata No. 2 in b flat, Op. 35: III. Marche funebre
05 Chopin Sonata No. 2 in b flat, Op. 35: IV. Presto
06 Chopin Polonaise No. 6 in Ab, Op. 53 'Heroic' / 쇼팽 폴로네즈 6번 <영웅>
07 Chopin Impromptu No. 2 in F#, Op. 36 / 쇼팽 즉흥곡 2번
08 Chopin Sonata No. 3 in b, Op. 58: I. Allegro maestoso / 쇼팽 소나타 3번
09 Chopin Sonata No. 3 in b, Op. 58: II. Scherzo. Molto vivace
10 Chopin Sonata No. 3 in b, Op. 58: III. Largo
11 Chopin Sonata No. 3 in b, Op. 58: IV. Finale



CD17 Emil Gilels / 에밀 길렐스
01 Prokofiev Sonata No. 2 in d, Op. 14: I. Allegro ma non troppo / 프로코피에프 소나타 2번
02 Prokofiev Sonata No. 2 in d, Op. 14: II. Scherzo. Allegro marcato
03 Prokofiev Sonata No. 2 in d, Op. 14: III. Andante
04 Prokofiev Sonata No. 2 in d, Op. 14: IV. Vivace
05 Prokofiev Sonata No. 3 in a, Op. 28 / 프로코피에프 소나타 3번
06 Prokofiev Sonata No. 8 in Bb, Op. 84: I. Andante dolce / 프로코피에프 소나타 8번
07 Prokofiev Sonata No. 8 in Bb, Op. 84: II. Andante sognando
08 Prokofiev Sonata No. 8 in Bb, Op. 84: III. Vivace
09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s. 1, 2, 3, 5, 6, 7, 11, 18, 14 & 17 / 프로코피에프 <덧없는 환영> 중 1, 2, 3, 5, 6, 7, 11, 18, 14, 17번
10 Prokofiev Toccata in d, Op. 11 / 프로코피에프 토카타
11 Prokofiev March from 'Love for Three Oranges' / 프로코피에프 3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 중 행진곡



CD18 Emil Gilels / 에밀 길렐스
01 Beethoven Sonata No. 29 in Bb, Op. 106 'Hammerklavier': I. Allegro / 베토벤 소나타 29번 <함머클라비어>
02 Beethoven Sonata No. 29 in Bb, Op. 106 'Hammerklavier': II. Scherzo. Assai vivace
03 Beethoven Sonata No. 29 in Bb, Op. 106 'Hammerklavier': III. Adagio sostenuto
04 Beethoven Sonata No. 29 in Bb, Op. 106 'Hammerklavier': IV. Introduzione. Largo - Fuga. Allegro risoluto

Emil Gilels (1916-85) / 에밀 길렐스
Principal Teachers: Yakov Tkach, Berta Reingbald, Heinrich Neuhaus / 야코프 트카흐, 베르타 라인크발트, 하인리히 네이가우스 사사

Prizes:
1933 - All-Union Competition in Moscow, 1st / 모스크바 제1회 전소련 콩쿠르 1위
1936 - Vienna Competition, 2nd / 비엔나 음대 콩쿠르 2위
1938 - Ysaye Competition in Brussels, 1st / 브뤼셀 이자이(현 퀸엘리자베스) 콩쿠르 1위
1973 - Robert Schumann Prize / 로베르트 슈만 상

'If I could be born a second time, I would do the same again - but better.' Half Lithuanian (his father was an accountant from Vilnius), 'devoured by music', Emil Gilels personified the unapproachable, Jovian-toned, Russian super-pianist: Straight back, stout chest, edge-of-the-stool seat, legs angled precisely to the pedals, faded sandy hair brushed severely back, tails arranged sweepingly and Jewish eyes staring expressionlessly from a broad Odessa face; his hands positioned quietly, firm, bony fingers doing just the necessary. He was a Soviet "grand seigneur" with the stage-walk of a general. The artist within - the man of sculpted climaxes and husky poetry, of chords and melodies shaped by life-experience - sent different message: mortal, understanding, communicative, 'bleeding with inner expression'.

‘내가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나는 같은 것을 할 것이다. - 그러나 더 좋게 할 것이다.’ 반 리투아니아인(그의 아버지는 빌뉴스 출신 회계사)으로 ‘음악에 사로잡힌’ 에밀 길렐스는 접근할 수 없는 주피터 신의 음색을 지닌 러시아의 슈퍼 피아니스트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 곧은 등, 튼튼한 가슴, 의자의 가장자리, 페달에 정확하게 기울어진 다리, 뒤로 엄격하게 빗어 넘긴 희미해진 갈색 머리, 일률적으로 배열된 연미복, 넓은 오데사 얼굴에서 무표정하게 응하는 유태인의 눈 - 그의 손은 필요한 것을 하면서 단단하고 앙상한 손가락들을 조용하게 만들었다. 그는 일반적으로 무대를 거니는 소비에트의 “귀하신 분”(비꼬는 표현)이었다. 조각된 클라이맥스와 당찬 시, 인생 경험으로 형성된 화음과 멜로디의 남자인 아티스트는 인간, 이해, 의사소통, ‘내면의 표현으로 인한 출혈’ 등 다양한 메시지를 보냈다.

He made slips, and had his memory lapses, but at full throttle, his playing defined might and passion, the instrument powered into a jangling, roaring, heroic titan while still capable of lyric gear and the most rarefied of dynamics and pedallings. Gilels was a pianist of unique sound-print, rooted, through Russia's teaching lines, in a tradition reaching back to Chopin and Clementi.

그는 실수로 기억력을 잃어버렸지만, 전속력으로 그의 연주는 힘과 열정, 신경이 곤두선 으르렁거리는 영웅적인 티탄에 집중된 악기를 정의한 반면 여전히 서정적인 장치, 가장 특별한 다이내믹과 페달링이 가능했다. 길렐스는 쇼팽과 클레멘티에게 전해지는 전통에서 러시아의 가르침을 통해 뿌리내린 독특한 소리를 남긴 피아니스트이다.

In a striking epitaph from November 2003, Valery Afanassiev turns to Beckett: 'Not one person in a hundred knows how to be silent and listen, no, nor even to conceive what such a thing means. Yes, only then can you detect, beyond the fatuous clamour, the silence of which the universe is made'. 'Silence,' Afanassiev continues (the English is his), 'is out of our reach because we have forgotten how to listen to it. As if brushing it aside, we fill in the pauses that turn up here and there. Silence withdraws into itself, punishing us for our nonchalant scorn [...] Like nobody else, Emil Grigorievich knew how to worship and handle silence. Even his way of speaking testified to this knowledge, for he often interrupted his speech to let the people around him meditate on what had been said and also listen to silence.

2003년 11월의 빼어난 비문에서, 발레리 아파나시에프가 극작가 베케트에게 의지한다. - ‘100명 중 한 명도 침묵하고 듣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아니, 그런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조차 못한다. 그렇다, 그때만 끔찍한 울부짖음을 넘어 우주가 만들어지는 침묵을 감지할 수 있다.’ (영어를 잘 하는) 아파나시예프가 계속한다. ‘침묵은 우리가 듣는 방법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도달 범위를 벗어났다. 따로 닦는 것처럼, 우리는 여기저기서 멈추는 것을 채운다. 침묵은 그 자체로 침잠하여 우리의 무심한 경멸로 우리를 처벌한다. [...] 다른 어느 누구처럼 에밀 그리고리에비치는 침묵을 경외하여 다루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의 말하는 방식조차도 이 지식에 대해 증명했는데, 그가 주변 사람들이 말한 것을 생각하게 하고 침묵도 듣게 하기 위해 그의 말을 종종 중단했기 때문이다.

'Not only did he speak musically but music literally spoke through his voice, his manners, his thoughts, it never forsook him, not for an instant - a beautiful example of requited love. Even in his jokes one could hear music - something akin to the technique "perle" which was one of his numerous fortes [...] I once asked Emil Grigorievich how to play trills. He said they should be played slowly: even in trills one should be able to hear silence, its serene, unruffled presence. Garrulous trills are obnoxious.'

‘그는 음악적으로 말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목소리, 그의 방식, 그의 생각을 통해 완전히 말했으며 잠깐 동안이 아니라 절대 버리지 않았는데, 상대방의 마음을 얻게 된 사랑의 아름다운 예가 되었다. 그의 농담에서조차도 음악을 들을 수 있었는데, 그의 수많은 포르테(세게) 중 하나였던 “완벽한” 테크닉에 가까운 것이었다. [...] 나는 에밀 그리고리에비치에게 트릴(떤꾸밈음)을 연주하는 방법을 한 번 물어봤다. 그는 트릴이란 천천히 연주되어야 하는데 트릴에서조차도 침묵, 그 고요하면서도 침착한 존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수다스러운 트릴은 불쾌하다.’

The way Emil Grigorievch practised the instrument also reveals his intimate bond with silence. In contrast to Richter, who repeated the same passage over and over again, he never made his neighbours wonder 'Will he ever drop with exhaustion?' [...] He taught me to hear not only music but also life itself; or rather, he taught me to hear music in life [...] Several times a year, Emil Grigorievich asked [his son-in-law, Peter] to depose flowers on the tombs of the composers buried at the Novodevichye Cemetery in Moscow. I know several people who, upon arriving in a city they have never visited, rush towards the nearest cemetery: they are tomb collectors. But those who can hear cemeteries, their silence and music, are few and far between.'

‘에밀 그리고리에비치가 악기를 연습하는 방식도 침묵과의 친밀한 관계를 드러낸다. 같은 패시지를 몇 번이고 반복했던 리히터와는 달리, 그는 이웃들이 ‘그가 피로로 쓰러질 것인가?’ 궁금하게 했다. [...] 그는 내게 음악뿐만 아니라 인생 자체도 듣도록 가르쳐주었는데, 더 정확히 그는 내게 인생에서 음악을 듣도록 가르쳤다. [...] 1년에 몇 번씩이나 에밀 그리고리에비치는 [그의 사위 페테르에게] 모스크바의 노보데비치 묘지에 묻힌 작곡가들의 무덤에서 꽃을 빼라고 요청했다. 나는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도시에 도착했을 때 가장 가까운 공동묘지로 달려드는 여러 사람들을 알고 있는데, 그들은 무덤 수집가이다. 그러나 공동묘지, 그들의 침묵과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은 흔치 않다.’

Gilels gave his public debut in Odessa in May 1929, with a recital programme including Beethoven's "Pathetique". His great competition wins of the 30s attracted the notice of Stalin - and spotlit the kind of music he was to make his own. Not Mussorgsky's "Pictures" (he left that to Richter and Yudina) but epic warhorses such as Brahms' "Handel" and "Paganini Variations", and the Liszt-Busoni "Figaro Fantasy" (which he learnt in 40 days and recorded in 1935). To go and win before the 28-strong jury of the 1938 Ysaye Competition (in which Michelangeli was placed seventh) was to take on the world. The peerage of the age was there to judge: Sir Arthur Bliss, Jean-Claude Casadesus, Samuil Feinberg, Ignaz Friedman, Walter Gieseking, Raoul Koczalski, Vladimir Orloff, Arthur Rubinstein, Olga Samaroff-Stokowski, Emil von Sauer and Carlo Zecchi. Only Hofmann and Rachmaninoff (who considered Gilels his 'disciple in piano art') were absent.

길렐스는 베토벤 소나타 8번 <비창>을 포함한 리사이틀 프로그램으로 1929년 5월 오데사에서 공개 데뷔했다. 그의 30년대 대형 콩쿠르 우승들은 스탈린의 주목을 끌었으며, 그가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던 음악의 일종을 주목했다. (그가 리히터와 유디나에게 남겼던) 무소르그스키 <전람회의 그림>이 아니라 브람스의 <헨델 변주곡>과 <파가니니 변주곡>, (그가 40일 만에 익혀 1935년에 녹음했던) 리스트 <피가로 환상곡>(부조니 편곡)처럼 서사시의 노병들이었다. 1938 이자이 콩쿠르(현재 퀸엘리자베스 콩쿠르로 당시에 미켈란젤리는 7위에 입상)에서 28명의 강력한 심사위원들 앞에 나가 우승하는 것은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었다. 그 시대의 귀족으로는 아서 블리스, 장-클로드 카사드쉬, 사무일 파인베르크, 이그나츠 프리드만, 발터 기제킹, 라울 코찰스키, 블라디미르 오를로프,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올가 사마로프-스토코프스키, 에밀 폰 자우어, 카를로 제키 등의 심사위원들이 있었다. 호프만과 (길렐스를 그의 ‘피아노 예술의 사도’로 여겼던) 라흐마니노프만이 불참했다.

Gilels' repertoire embraced more than 400 works, from the Baroque to the moderns (during the Second World War he played Stravinsky's "Petrushka" transcription in Leningrad, and premiered Prokofiev's Eighth Sonata in Moscow). He appeared in the USA in 1955, and in the UK four years later. Both were politically charged Cold War tours. At the end of the American visit he taped the Tchaikovsky B flat minor with Fritz Reiner in Chicago, an account of visceral theatre, leonine attack and flying fingers, plunging deep into the keyboard: 33 minutes of history in the shops within a month. In his youth, despite wonderfully tender cantos, Gilels had the reputation of an athletic speed-merchant. 'When I played it felt like a gust of fresh air.' Later his passion gave way to pathos, most clearly apparent from his handling of Brahms' Second Concerto - 45 minutes with Fritz Reiner (1958), 52 with Eugen Jochum (1972).

길렐스의 레퍼토리는 바로크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400개 이상의 작품들을 수용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그는 레닌그라드에서 스트라빈스키 <페트루슈카> 편곡을 연주했으며 모스크바에서 프로코피에프 소나타 8번을 초연했다.) 그는 1955년에 미국에 등장했으며 4년 후 영국 투어를 가졌다. 둘 다 정치적으로 냉전 시대의 투어였다. 미국 방문이 끝나고 그는 시카고의 프리츠 라이너와 함께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녹음했는데, 본능적인 연극, 사자 같은 공격, 손가락이 날아다니는 연주로 건반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 한 달 이내에 상점에 나왔는데 (연주 시간이) 역사적인 33분이었다. 어린 시절에 놀랍도록 부드러운 노래였음에도, 길렐스는 탄탄한 스피드광으로 명성을 얻었다. ‘내가 연주했을 때 휙 부는 신선한 공기가 느껴졌다.’ 나중에 그의 열정은 파토스(연민을 자아내는 힘)에 무너졌는데, 그의 브람스 협주곡 2번 연주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 프리츠 라이너와의 녹음(1958)은 45분, 오이겐 요훔과의 녹음(1972)은 52분이다.

Lending weight to the Western conception of him as a 'socialist symbol', the political decorations were many: Stalin Prize (1946), People's Artist of the USSR (1954), Order of Lenin (1961, 1966), Lenin Prize (1962). In 1958 he chaired the first International Tchaikovsky Competition (won by Van Cliburn), likewise the next three, presiding over a jury including Sir Arthur Bliss, Dmitri Kabalevsky, Heinrich Neuhaus, Lev Oborin, Sviatoslav Richter, Pavel Serebryakov and Carlo Zecchi. He taught at the Moscow Conservatory from 1938 until his death, accepting a professorship in 1959. 'Gilels [...] loudly and imperiously proclaims "Yes!" to life. His voice is clear to anyone [... his art] helps us to live' (Heinrich Neuhaus).

그에 대한 서방의 이해를 ‘사회주의 상징’으로 입증하는 그의 정치적인 장식들로는 스탈린 상(1946), 소련 인민에술가(1954), 레닌 훈장(1961, 1966), 레닌 상(1962) 등 많이 있다. 1958년에 그는 (밴 클라이번이 우승했던) 초대 차이코프스키 국제음악콩쿠르의 심사위원장이었는데, 다음 세 개의 대회들과 마찬가지로 아서 블리스 경, 드미트리 카발레프스키, 하인리히 네이가우스, 레프 오보린,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파벨 세레브리야코프, 카를로 제키 등의 심사위원들을 주재했다. 그는 1938년부터 죽을 때까지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가르쳤으며, 1959년에는 교수직을 수락했다. ‘길렐스는 [...] 인생에 큰소리로 도도하게 “그렇다!”고 선언한다. 그의 목소리는 누구에게나 분명하다. [...그의 예술은] 우리가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하인리히 네이가우스).’

Chopin Nocturne in c, Op. 48 No. 1 (1841) / 쇼팽 녹턴 13번
A fantasy-ballade drawing together slow march, "maggiore" chorale, "doppio movimento", and miraculous die-away: the grandest, most imposing and theatrical of the nocturnes.

느린 행진곡, “장조의” 코랄, “도피오 모비멘토”(앞의 빠르기보다 2배의 속도로), 녹턴의 가장 위대하고 가장 인상적이며 연극조인 것들이 기적적으로 점점 소멸하는 것을 함께 그리는 발라드풍의 환상곡.

Chopin Sonata No. 2 in b flat, Op. 35 "Funeral March" (1837/39) / 쇼팽 소나타 2번 <장송 행진곡>
'When I play the music of earlier composers, I want to breathe the same air they breathed in those days; I imagine very vividly how these composers lived at that time, and I live in these flights of my imagination. This makes it easier for me to find the correct musical idiom for the performance of their works' ("Recorded Sound", July 1981).

‘이전 작곡가들의 음악을 연주할 때, 나는 그들이 그 당시 숨을 쉴 때와 같은 공기를 마시고 싶다. 나는 이 작곡가들이 그 당시 어떻게 살았는지 매우 생생하게 상상하며, 나는 이 상상의 비행에 산다. 이것은 내가 그들의 작품을 연주하기 위한 올바른 음악적 작풍을 보다 쉽게 찾을 수 있게 한다.’ (1981년 7월 <레코디드 사운드>)

Chopin Polonaise in Ab, Op. 53 (1842-43) / 쇼팽 폴로네즈 6번 <영웅>
Martial, majestic, poetic. 'The possibilities of the polonaise as a "genre" are exhausted in this grandiose tone-poem' (Arthur Hedley).

호전적이고 위풍당당하며 시적이다. ‘폴로네즈의 “장르”로서의 가능성들이 이 웅대한 음시(시적 내용을 음악화한 곡)에서 소진된다(아서 헤들리).’

Chopin Impromptu No. 2 in F#, Op. 36 (1839) / 쇼팽 즉흥곡 2번
'The fresh atmosphere of a Sunday morning rather than the dusky mystery of evening' (Alfred Cortot).

‘어스름한 저녁의 신비라기보다는 일요일 아침의 신선한 분위기(알프레드 코르토).’

Chopin Sonata No. 3 in b, Op. 58 (1844) / 쇼팽 소나타 3번
The first great B minor sonata of the High Romantics, embracing the proud, the mercurial, the hallowed, the volcanic. 'Colour, grace, passion, reverie - all are here at the command of a composer who had reached the heights of his powers' (Arthur Hedley).

자랑스러움, 활달함, 신성함, 화산 작용을 받아들이는 낭만파 절정기의 첫 위대한 b단조 소나타. ‘색채, 우아함, 열정, 꿈 - 여기 모든 것이 엄청난 힘에 이른 작곡가의 명령에 있다(아서 헤들리).’

Prokofiev Sonatas / 프로코피에프의 소나타들
'Without being presumptuous, I may say that I never follow anyone else's ideas. In everything I write, I follow two major principles: clarity and brevity, avoiding everything superfluous in the expression of my ideas.'

‘나는 예상하지 못한 채 다른 사람의 생각을 절대 따르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내가 쓰는 모든 것에 나는 두 가지 주요 원칙, 즉 명확성과 간결성을 따르며 내 생각의 표현에 불필요한 모든 것을 피한다.’

Prokofiev Sonata No. 2 in d, Op. 14 (1912) / 프로코피에프 소나타 2번
Premiered by the composer in the Small Hall of the Moscow Conservatoire, 23 January/5 February 1914. Crude thought the critics, a 'true picture of the modern "football" generation.' Worse was to come in New York (Aeolian Hall, 20 November 1918). 'Russian chaos in music,' 'a herd of mammoths charging across an Asiatic plateau.'

1914년 1월 23일/2월 5일 모스크바 음악원 소강당에서 작곡가가 초연. 비평가들은 그저 ‘현대 “축구” 세대의 진정한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뉴욕(애올리언 홀, 1918년 11월 20일)에서는 ‘러시아의 혼돈의 음악’, ‘아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매머드 떼’로 표현하는 등 더 심했다.

Prokofiev Sonata No. 3 in a, Op. 28 "From Old Notebooks" (1907-17) / 프로코피에프 소나타 3번 <옛 노트에서>
A re-working of earlier materials, dedicated to the dilettante poet Boris Verin (Dmitri Bashkirov), and premiered by the composer in Petrograd, 15 April 1918.

구작을 개정하였는데 발전부와 재현부를 약간 변경했을 뿐 구상은 그대로 하고, 피아노에 적합한 알맞고 세련된 기법으로 손질하여 딜레탕트(호사가) 시인 보리스 베린에게 헌정했으며(드미트리 바쉬키로프), 1918년 4월 15일 페트로그라드에서 작곡가 자신이 초연했다.

Prokofiev Sonata No. 8 in Bb, Op. 84 (1939-44) / 프로코피에프 소나타 8번
Third of the 'war sonatas', premiered by Emil Gilels in Moscow, 30 December 1944. 'Of all Prokofiev's sonatas, this is the richest. It has a complex inner life, profound and full of contrasts. At times it seems to grow numb, as if abandoning itself to the relentless march of time. If is sometimes inaccessible, this is because of its richness, like a tree that is heavy with fruit' (Sviatoslav Richter).

1944년 12월 30일 모스크바에서 에밀 길렐스가 초연한 <전쟁 소나타> 중 세 번째 곡. ‘이 곡은 프로코피에프의 모든 소나타들 중에서 가장 풍요롭다. 복잡한 내면의 삶을 가지고 있으며 심오하고 대조적이다. 시간의 가차 없는 흐름에 그 자체를 버리는 것처럼 때로는 무감각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때로는 접근하기 어렵다면, 풍요로움으로 인해 열매의 무게를 견뎌야 하는 나무와도 같기 때문이다(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이 곡은 프로코피에프의 모든 소나타 중에서 가장 풍요롭다. 대단히 복잡하고 심오하며 대조가 강한 생명력을 지닌 작품인 것이다. 어떤 대목에서는 마치 시간의 가차없는 흐름에 몸을 내맡기기라도 하듯 음악이 둔해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또 어떤 대목은 접근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곡의 풍요로움에 기인하는 것이다. 마치 나무가 열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듯이 말이다.)]

Prokofiev Toccata in d, Op. 11 (1912) / 프로코피에프 토카타
Premiered by Prokofiev in Petrograd, 10 December 1916.

1916년 12월 10일 페트로그라드에서 프로코피에프가 초연하였다.

Prokofiev: The Love of Three Oranges, Op. 33 Act II - March (1919) / 프로코피에프 오페라 <3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 2막 중 행진곡
Premiered under the composer's direction in Chicago, 30 December 1921. 'The Chicago audience was both proud and bewildered. Proud of having first attended a "modern opera", but bewildered by the unusual music, and by the fact that this enterprise coast some $250,000, as reported in the newspapers. "Those oranges," someone said, "were the most expensive in the world!"' The critics were hostile. 'God's sake, what reviews! I felt as if a pack of mad hounds had been let loose and torn my pants to shreds.'

1921년 12월 30일 시카고에서 작곡가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시카고 청중은 자랑스러우면서도 어리둥절했다. “현대 오페라”에 처음 참석한 것은 자랑스러웠지만, 특이한 음악인 데다가 신문에서 보도된 대로 25만 달러를 상회한다는 사실로 인해 어리둥절했다. “그 오렌지들은 세계에서 가장 비쌌다!” 누군가가 말했다.’ 비평가들은 적대적이었다. ‘맙소사, 리뷰는 무슨! 미친 사냥개 무리가 내 바지를 헐렁하게 해서 갈가리 찢어버린 것처럼 느껴졌다고.’

Beethoven Sonata No. 29 in Bb, Op. 106 "Hammerklavier" (1817-18) / 베토벤 소나타 29번 <함머클라비어>
'In this work, in one creation of the spirit, a mortal man has portrayed and sublimated all the facts of life, its rigours, injustices, joys, its heavenly consolations, the temporal and the eternal, the conceivable and the inconceivable' (Edwin Fischer). This performance comes from Gilels' last concert in Moscow, on 26 January 1984. A year later in Helsinki, 12 September 1985, it signed off his career. 'The most powerful composition for the pianoforte of all time' (Ferruccio Busoni).

‘이 작품의 영혼 창조에서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 남자는 인생의 사실들, 그 엄격함, 불의, 기쁨, 천상의 위안, 현세와 영원, 생각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모든 것을 묘사하고 승화시켰다(에트빈 피셔).’ 이 연주는 길렐스가 1984년 1월 26일에 가졌던 마지막 모스크바 콘서트에서 나온다. 1년 후인 1985년 9월 12일, 헬싱키에서 그의 경력이 끝났다. ‘모든 시대의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가장 강력한 작품(페루치오 부조니).’

(리히터의 프로코피에프 소나타 8번 설명은 전에 번역했던 <러시안 피아노 스쿨> 음반을 참고한 것으로 번역을 그대로 여기로 옮긴 것이 아니라 약간 다르게 수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