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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20일 금요일

Melodiya / Emil Gilels - Russian Piano School, Vol. 7



전후에 활동했던 제1세대 소비에트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가운데 가장 빛나는 존재였던 에밀 길렐스는 그의 탁월한 동료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와 더불어 20세기 후반의 가장 뛰어난 피아니스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리히터, 오이스트라흐 등과 같이 우크라이나 혈통의 계보를 이어받은 음악가로, 1916년 10월 19일 오데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그의 집에서는 실내악 연주가 끊이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는 평생을 두고 계속되었던 그의 실내악 연주에 대한 애호와 무관하지 않다. 길렐스는 여섯 살이 되던 1922년부터 야코프 트카흐에게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는데, 그의 어린 시절의 이 스승은 위대한 바이올린의 거장 외젠 이자이의 듀오 파트너로 유명했을 뿐만 아니라, 파리에서 합창 지휘자와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했던 명 피아니스트 푸뇨의 제자였다. 예술가들은 때때로 소년 시절의 첫 스승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는데, 이때 무감각한 교사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예술가들이 낙담하고 심지어는 균형감마저도 상실하게 되는가를 생각하면 길렐스의 유년교육은 단순히 성공적이었던 것을 넘어서 거의 프로페셔널한 수준에까지 이르게 한 값진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이 푸뇨-트카흐와, 후일 네이가우스에게로 이어진 교육은 길렐스에게 항상 바흐로 귀착되는 고전적인 피아노 음악에 대해 넓은 안목과 깊은 확신을 갖게 했다.

길렐스의 첫 스승이었던 트카흐는 자신이 가르치던 시절에 이미 길렐스의 밝고 빛나는 미래를 예언했고, 오데사의 음악계는 길렐스가 스카를라티와 베토벤의 비창 소나타가 포함된 프로그램으로 13살 때 첫 공개 연주회를 개최하자마자 이 소년 피아니스트에게 비상한 관심을 집중시켰다.

1930년부터 길렐스는 오데사 음악원에 진학하여 베르타 라인크발트 교수 밑에서 배웠고, 일 년 후에는 우크라이나의 피아노 경연대회에 참가하여 성공적인 결과를 얻었다. 1932년 오데사에서 길렐스의 “열정 소나타” 연주를 들은 거장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은 “처음 몇 소절이 지나자...나는 그 소년이 비상한 재능을 지니고 있음을 느꼈는데...연주가 끝난 다음 나는 그 소년의 두 뺨에 키스한 후 그의 이름을 물어보았으며 그것을 적어놓았다.”고 말하고 있다.

1933년은 길렐스에게 인생의 이정표가 된 해로 그는 광대한 소비에트 연방의 모든 공화국이 참여한 제1회 전소련 음악경연대회에 참가하여 1등상을 획득했다. 그리고 이에 고무된 그의 스승 라인크발트 여사는 자신의 제자를 위대한 교사이자 대 피아니스트인 겐리프 네이가우스에게 보냈다. 길렐스는 1935~38년까지의 약 3년간을 네이가우스의 문하에서 배웠는데, 이 위대한 스승에게로 옮긴지 채 1년도 되기 전인 빈 국제콩쿠르에 참가하여 야코프 플리에르에 이어 제2위에 입상함으로써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이어서 1938년에는 브뤼셀에서 개최된 유명한 이자이 콩쿠르에서 1등상을 타냈고, 그것은 그의 이름이 서방에 널리 알려지는 도화선이 되었다. 이해의 그랑프리는 그의 인생에 있어서는 중대 사건이라고 할 만한 것으로, 이미 그 콩쿠르에 도전한 일이 있었던 4년 연상의 플리에르나 이탈리아의 명수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가 모두 3등과 7등에 그쳤던 사실과 그 콩쿠르의 심사위원들 중에는 로베르 카사드쉬, 발터 기제킹, 아르투르 루빈스타인과 사무일 파인베르크 등의 이름이 섞여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그 의미의 중요성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해부터 길렐스는 그의 스승 네이가우스의 조수로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소비에트 러시아 전역을 연주 여행하면서 감명 깊은 연주를 들려주었다. 이 눈부신 활동으로 인해 1939년에는 명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와 더불어 뉴욕의 만국박람회에 출연할 소련의 대표로 선정되었으나 이 꿈은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무산되고 말았으며 그들은 러시아를 떠날 수 없게 억류되었다. 이후로 그는 소련군 점령하의 도시들에서나 연주를 할 수 있었고,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로서 활동을 재개할 수 있게 되었을 뿐이었다. 1942년 길렐스는 공산당에 입당하였는데, 이는 자신이 국내외의 정치, 사회 제도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후로부터, 길렐스에게는 자유로운 예술 활동을 보장하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 많은 상이 주어졌다. 1946년 그는 스탈린상의 수상자가 되었으며 1954년에는 인민예술가의 칭호를 받았고, 1962년에는 레닌 상의 수상자로 선정되었는가 하면 1976년에는 사회주의 노동영웅의 칭호를 받기도 했다. 또 자유로운 해외여행도 허락되어 리히터보다 훨씬 먼저인 1948년부터 유럽 여러 곳에서 연주회를 가졌으며, 1956년에는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길렐스가 연주자로서 소련 이외의 지역에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낸 것은 1948년에 있었던 제3회 프라하의 봄 음악제부터였다. 이 음악제에서의 연주로 평론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았던 그는 1951년에는 피렌체의 5월 음악제에 파견될 11명의 소련 예술가들 중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고, 1952년에는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연주 여행했다. 또 1954년 2월에는 베를린에서 각국 외무장관들의 회담이 열리고 있던 시기에 소련 대사관에서 연주회를 갖기도 했다. 그리고 이즈음부터 길렐스의 초기 녹음 작업도 시작되었는데, 이 녹음들을 통해서 그의 놀라운 테크닉과 음악적 컨트롤, 또 발군의 음악성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1955년 제네바에서 있었던 미⦁소 문화교류협정에 참가했던 미국 측 대표였던 예후디 메뉴인은 길렐스의 미국 방문이 실현될 수 있도록 백방으로 노력했고, 메뉴인의 이런 개인적인 노력에 힘입어 그해 가을 길렐스는 소련의 명망 있는 연주자로서는 35년 만에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게 되었다. 그리고 10월 3일에는 필라델피아에서 유진 오먼디가 지휘하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함께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을 연주함으로써 역사적인 미국 연주 여행의 서막을 장식했다. 이 첫 연주는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는데, 오먼디는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 중의 한 사람”이라고 말했고, 필라델피아 “벌리틴”(Bulletin) 지의 막스 드 샤우엔제(Max de Schauensee)는 이 연주를 “좀처럼 듣기 힘든 아름다운 연주”라고 극찬했다. 또 길렐스가 그 다음 날 같은 곡을 뉴욕에서 다시 연주했을 때 뉴욕 타임스의 하워드 토브먼(Howard Taubman)은 길렐스를 “당당한 계보를 지닌 비르투오소”라고 지적하면서, “탑 그레이드의 피아니스트로서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피아니스트로 평가했다. 그러나 이 모든 놀라움과 찬사는 단지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길렐스는 금세기 후반의 가장 주도적인 피아니스트 중의 한 사람으로 눈부신 연주 활동을 계속했고, 그의 레퍼토리 중에서도 특히 베토벤의 협주곡과 소나타, 또 브람스의 협주곡들은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1985년 70세 생일을 1년도 채 못 남기고 타계했을 때 에밀 길렐스의 이름은 전 세계의 피아노 음악계에서는 이미 전설적인 이름이 되어있었다.

길렐스 예술의 요체는 보다 서정적인 음악성을 지녔던 동료 리히터와는 달리 굳건하고 명확한 구조적 아름다움이었다. 이런 분명하고도 확고한 형식미를 통해 그는 베토벤이나 브람스와 같은 구조적이면서도 스케일이 큰 음악을 탁월하게 풀어낸다. 또 그의 테크닉은 탁월무비하여 어떤 음악을 연주하는지 구조적인 명확함과 화려하고 현란한 테크닉이 어우러져 눈부신 피아니즘을 이룬다. 이 음반에 수록된 부조니 편곡의 바흐 전주곡과 푸가 D장조나 베토벤의 32개 변주곡 C단조에서는 이런 그의 음악적 특징들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리스트의 피아노곡들은 그의 탁월한 테크닉과 장대한 표현력을 통해 종종 눈부신 아름다움을 방사해내는데, 여기에 수록된 스페인 광시곡은 그 가장 확실한 일례이다. 또 베버의 피아노 소나타 제2번에서도 낭만적 감정들의 범람이 아니라 보다 명확한 구성적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전혀 표제적 성격을 갖지 않는 프로코피에프의 “덧없는 환영”에서도 거친 로맨티시즘과 고전적 명료함 사이를 오르내리며 치밀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줌으로써 그가 러시아적 피아노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Track
01 Bach/Busoni Prelude & Fugue in D, BWV 532 / 바흐 프렐류드와 푸가 BWV 532 (부조니 편곡)
02 Beethoven 32 Variations on an original theme in c, WoO 80 / 베토벤 자작 주제에 의한 변주곡 WoO 80
03 Weber Sonata No. 2 in Ab, Op. 39: 1. Allegro moderato con spirito ed assai legato / 베버 소나타 2번
04 Weber Sonata No. 2 in Ab, Op. 39: 2. Andante
05 Weber Sonata No. 2 in Ab, Op. 39: 3. Presto assai
06 Weber Sonata No. 2 in Ab, Op. 39: 4. Rondo. Moderato e molto grazioso
07 Liszt Rhapsodie espagnole / 리스트 스페인 랩소디
08 Prokofiev Vision fugitives, Op. 22 No. 1 Lentamente / 프로코피에프 <덧없는 환영> 1, 3, 5, 11번
09 Prokofiev Vision fugitives, Op. 22 No. 3 Allegretto
10 Prokofiev Vision fugitives, Op. 22 No. 5 Molto giocoso
11 Prokofiev Vision fugitives, Op. 22 No. 11 Con vivacita

Emil Grigoryevich Gilels (1916-1985) / 에밀 그리고리에비치 길렐스
Of Ukrainian stock like Sviatoslav Richter and trained by the same teacher (Heinrich Neuhaus in Moscow), Emil Gilels was born in Odessa on 19 October (old style 6 October) 1916. One year younger than Richter, he died in Moscow on 14 October 1985. In his parental home, chamber music was a perennial feature, which explains his lifelong penchant for ensemble playing. At the age of six, he took piano lessons with Jakov Tkach, a pupil of the French pianist Pugno (Raoul Stephane, 1852-1914) who had included Russia in his recital tours. Young people are often profoundly influenced by their first teachers, and countless talented artists have been discouraged or even thrown off balance by insensitive piano teachers. Fortunately, there are examples to the contrary, especially at the professional level. In the case of Emil Gilels, the Pugno-Tkach-Neuhaus line of tradition accounted for his strong commitment to "classical" keyboard music in the widest sense - all the way back to Bach. After all, Pugno had been organist and choirmaster in Paris as well as duo partner for the violin virtuoso Eugene Ysaye (the competition initiated by the latter was to prove crucial for Gilels' international career). In our case, the first teacher predicted a brilliant future for his protege. The musical world immediately took notice when the 13-year-old boy gave his first public recital, the programme including sonatas by Scarlatti and Beethoven's "Pathetique". In 1930 he entered the Odessa Conservatory to study with Berta M. Reingbald. One year later he took part in the Ukrainian Piano Competition with marked success. In 1932, Artur Rubinstein heard him perform the Appassionata in Odessa, an episode he later recalled as follows: "After the first few bars ... I sensed that this was a case of extraordinary talent ... I kissed the boy on both cheeks, asked for his name and made a note of it." In 1933, Gilels scored something of a "continental" triumph, for the participants in the "First All-Union Competition of Musical Performers" came from all constituent republics of the vast Soviet Union. It was Gilels who carried off the first prize. This emboldened his teacher, Mrs Reingbald, to present her protege to the great Neuhaus. Gilels went on to study with him from 1935 to 1938. Within a year or so he won international laurels, picking up a second prize in Vienna (the first prize went to Yakov Flier, a pianist born four years earlier, whose teacher Konstantin Igumnov was - like Goldenweiser - a product of the Czerny school via Pavel Pabst and Anton Door). His career reached a first high point when he won the top honours at the 1938 Ysaye Competition in Brussels in brilliant fashion, an achievement that takes on added significance in the light of the fact that outstanding players such as Yakov Flier and Arturo Benedetti Michelangeli finished third and seventh, respectively, and that the high-powered jury included Robert Casadesus, Walter Gieseking and Artur Rubinstein, with Samuil Feinberg representing the USSR.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와 같은 우크라이나 혈통으로 같은 스승(모스크바에서 하인리히 네이가우스)을 사사했던 에밀 길렐스는 1916년 10월 19일(구력으로는 10월 6일) 오데사에서 태어났다. 리히터보다 한 살 더 어렸던 그는 1985 년 10월 14일 모스크바에서 타계했다. 어릴 때 그의 집에서는 실내악 연주가 끊이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는 평생을 두고 계속되었던 그의 실내악 연주에 대한 애호와 무관하지 않다. 그는 6세에 러시아에서 리사이틀 투어를 가졌던 프랑스 피아니스트 라울 스테판 푸뇨(1852~1914)의 제자인 야코프 트카흐를 사사했다. 예술가들은 때때로 소년 시절의 첫 스승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는데, 이때 무감각한 교사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예술가들이 낙담하고 심지어는 균형감마저도 상실하게 되는가를 생각하면 길렐스의 유년교육은 단순히 성공적이었던 것을 넘어서 거의 프로페셔널한 수준에까지 이르게 한 값진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푸뇨-트카흐-네이가우스에게로 이어진 교육은 길렐스에게 항상 바흐로 귀착되는 고전적인 피아노 음악에 대해 넓은 안목과 깊은 확신을 갖게 했다. 어쨌든 푸뇨는 위대한 바이올린의 거장 외젠 이자이(후자에 의한 콩쿠르는 길렐스의 국제 경력에 결정적인 것으로 입증됨)의 듀오 파트너로 유명했을 뿐만 아니라, 파리에서 오르가니스트와 합창 지휘자로 활동했던 명 피아니스트 푸뇨의 제자였다. 길렐스의 첫 스승이었던 트카흐는 자신이 가르치던 시절에 이미 길렐스의 밝고 빛나는 미래를 예언했다. 오데사의 음악계는 길렐스가 스카를라티와 베토벤의 비창 소나타가 포함된 프로그램으로 13세 때 첫 공개 연주회를 개최하자마자 이 소년 피아니스트에게 비상한 관심을 집중시켰다. 1930년부터 길렐스는 오데사 음악원에 진학하여 베르타 라인크발트 교수 밑에서 배웠다. 일 년 후에는 우크라이나의 피아노 경연대회에 참가하여 성공적인 결과를 얻었다. 1932년 오데사에서 길렐스의 <열정 소나타> 연주를 들은 거장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처음 몇 소절이 지나자...나는 그 소년이 비상한 재능을 지니고 있음을 느꼈는데...연주가 끝난 다음 나는 그 소년의 두 뺨에 키스한 후 그의 이름을 물어보았으며 그것을 적어놓았다.” 1933년은 길렐스에게 인생의 이정표가 된 해로 그는 광대한 소비에트 연방의 모든 공화국이 참여한 제1회 전 소련 음악경연대회에 참가하여 1등상을 획득했다. 그리고 이에 고무된 그의 스승 라인크발트 여사는 자신의 제자를 위대한 교사이자 대 피아니스트인 겐리프 네이가우스에게 보냈다. 길렐스는 1935~1938년까지의 약 3년간을 네이가우스의 문하에서 배웠다. 이 위대한 스승에게로 옮긴지 채 1년도 되기 전인 빈 국제콩쿠르에 참가하여 2위(당시의 1위는 야코프 플리에르였는데, 그보다 4살 더 많고 콘스탄틴 이굼노프의 제자였다. - 골덴바이저처럼 - 체르니의 제자였던 안톤 도르에게 배운 파벨 파브스트의 피아노 클래스)에 입상함으로써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이어서 1938년에는 브뤼셀에서 개최된 유명한 이자이 콩쿠르(현재 퀸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1등상을 타냈고, 그것은 그의 이름이 서방에 널리 알려지는 도화선이 되었다. 이해의 그랑프리는 그의 인생에 있어서는 중대 사건이라고 할 만한 것으로, 이미 그 콩쿠르에 도전한 일이 있었던 4년 연상의 플리에르나 이탈리아의 명수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가 모두 3등과 7등에 그쳤던 사실과 그 콩쿠르의 심사위원들 중에는 로베르 카사드쉬, 발터 기제킹, 아르투르 루빈스타인과 사무일 파인베르크 등의 이름이 섞여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그 의미의 중요성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Before long, the Soviet authorities realized that Gilels could be used to further the regime's interests at home and abroad, and so they showered him with awards which were then in great demand: the Stalin Prize (1946), the title "People's Artist" (1954) and the Lenin Prize (1962). He was allowed to tour "the West" long before Richter, making regular concert appearances across Europe from 1945 and visiting the United States for the first time in 1956. In 1951, aged only 35, he was appointed professor at the Moscow Conservatory, where he had been teaching from 1938.

얼마 후 소비에트 당국은 길렐스가 국내외의 정권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 결과 1946년 스탈린상, 1954년 인민예술가의 칭호, 1962년 레닌 상을 수여했다. 그는 리히터보다 훨씬 먼저인 1945년부터 유럽 여러 곳에서 연주회를 가졌으며, 1956년에는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1951년에는 불과 35세에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로 임명되었는데, 1938년부터 거기에서 가르치고 있었다.

Ferruccio Busoni, a precociously gifted Italian musician who spent most of his life in Germany (he died in Berlin), was only one year older than Mozart when he was admitted as a full member to the venerable and prestigious Academy of Music in Bologna at the age of 16. Born in Tuscany, he studied in Graz and Leipzig (in 1885 and 1886-88, respectively). In Leipzig, he took advantage of the opportunity to immerse himself in the works of Bach, an activity reflected in sundry arrangements, transcriptions and studies, the first edition comprising seven volumes and the second edition no less than 25 volumes. Busoni regarded the transcribing of the mostly five-part organ literature and specifically the assignment of the pedal part to the player's left hand as a very intriguing task for composers and performers alike, as a genuine challenge for the cognoscenti.

독일에서 일생을 보낸(베를린에서 사망) 조숙한 재능을 지닌 이탈리아 음악가 페루치오 부조니는 모차르트보다 불과 한 살 더 많았을 뿐이었는데, 16세에 유서 깊고 권위 있는 볼로냐 음악원에 정회원으로 입학했다. 토스카나에서 태어난 그는 1885년 그라츠, 1886~88년 라이프치히에서 공부했다. 라이프치히에서 그는 여러 가지 필사본, 편곡, 연구(7권으로 구성된 초판과 25권보다 적은 2판)에 반영된 활동으로 바흐의 작품들에 전념할 수 있는 기회를 활용했다. 부조니는 (예술, 문학 등 특정한 주제에 대한) 전문가에 대한 진정한 도전으로서, 대개 다섯 부분으로 된 오르간 문헌을 편곡하고 특별히 페달 부분을 연주자의 왼손에 할당하는 것을 작곡가와 연주자 모두에게 매우 흥미로운 작업으로 여겼다.

Bach's Prelude and Fugue in D major, BWV 532, which date from his first Weimar period or even from his Arnstadt years (c. 1709), reveal a kinship to works from his own pen and older pieces by other composers. The Prelude, provided with the sumptuous garb of a French-style overture, recalls Bach's keyboard sonata in the same key while the design of the semiquaver-dominated Fugue theme is reminiscent of a fugue in the same key by Johann Pachelbel, a South German composer who was a major source of inspiration to Bach. The closing section of the second movement resembles the beginning of the first, adding to the general sense of unity and symmetry.

바흐 <프렐류드와 푸가> BWV 532는 그의 바이마르 1기 또는 아른슈타트에서 살던 해(1709년경)에 작곡되었는데, 그가 직접 쓴 작품들과 다른 작곡가들의 더 오래된 곡들에서의 연대감을 보여준다. 프랑스풍 서곡의 화려한 옷이 함께 제공된 프렐류드는 바흐의 같은 조성의 키보드 소나타를 생각나게 하는 반면, 16분음표 위주인 푸가 주제는 남부 독일 작곡가로 바흐에게서 주로 영감을 얻었던 요한 파헬벨의 같은 조성의 푸가를 연상케 한다. 2악장(푸가)의 끝나는 부분은 1악장(프렐류드)의 시작하는 부분과 닮아있으며, 통일성과 대칭성의 일반적인 의미를 더한다. 

Bach/Busoni Prelude in D, BWV 532 Opening / 바흐 프렐류드 BWV 532 (부조니 편곡) 오프닝

Bach/Busoni Fugue in D, BWV 532 Ending / 바흐 푸가 BWV 532 (부조니 편곡) 엔딩

Bach Keyboard Sonata in D, BWV 963: I. Allegro maestoso / 바흐 키보드 소나타 1악장 BWV 963 오프닝

Bach/Busoni Fugue in D, BWV 532 Opening / 바흐 푸가 BWV 532 (부조니 편곡) 오프닝

Pachelbel Fugue in D, P. 133 Opening / 파헬벨 푸가 P. 133 오프닝

Apart from his 32 sonatas, Ludwig van Beethoven mainly contributed sets of variations to the piano repertoire. Among these sets, those on an original theme (1806) occupy a special place, for here the composer (like Brahms later on) employs a favourite device of the older masters (including Bach) by choosing an eight-bar chaconne theme, an ostinato ground bass in slow 3-beat time moving further downwards bar after bar. The archaic form notwithstanding, Beethoven also draws on the world of his F minor sonata "Appassionata" written the year before in order to inject an element of romantic passion. Apart from being a set of variations, the work fits the three-part structure associated with large forms: increasingly agitated mood - serene middle section (from Variation 12) - renewed onward sweep (from Variation 17).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32곡의 소나타 외에도 피아노 레퍼토리에서 변주곡에 주로 기여했다. 변주곡들 중에서 자작 주제에 의한 것들(1806년)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마디 다음의 마디 아래쪽으로 더 멀리 이동하는 느린 3박자에서 베이스에 깔려있는 오스티나토(고집스럽게 반복되는 음형)인 8마디의 샤콘느 주제를 선택함으로써 여기서 (나중에 브람스 같은) 작곡가는 (바흐를 포함한) 옛 거장들이 선호하는 묘안을 사용한다. 오래된 형식임에도 베토벤은 낭만적인 열정의 요소를 넣기 위해 그 전 해에 쓴 <열정 소나타>의 세계에도 의지한다. 변주곡 세트가 되는 것 외에도, 이 작품은 큰 형식들을 가진 3부분 구조에 적합하다. - 점점 불안해하는 분위기 - 고요한 중간부(변주 12부터) - 새로워진 앞으로 나아가는 움직임(변주 17부터).

Beethoven 32 Variations on an original theme in c, WoO 80: Theme / 베토벤 자작 주제에 의한 32개 변주곡에서 8마디의 샤콘느 주제

Beethoven 32 Variations on an original theme in c, WoO 80: Variation 1 (increasingly agitated mood) / 베토벤 자작 주제에 의한 32개 변주곡에서 변주 1 (점점 불안해하는 분위기)

Beethoven 32 Variations on an original theme in c, WoO 80: Variation 12 (serene middle section) / 베토벤 자작 주제에 의한 32개 변주곡에서 변주 12 (고요한 중간부)

Beethoven 32 Variations on an original theme in c, WoO 80: Variation 17 (renewed onward sweep) / 베토벤 자작 주제에 의한 32개 변주곡에서 변주 17 (새로워진 앞으로 나아가는 움직임)

Carl Maria von Weber was a brilliant pianist admired for his prodigious powers of improvisation and a bold operatic innovator who paved the way for Wagner, but throughout his life he was dogged by misfortune. His four keyboard sonatas, all of them written within the space of ten years (1812-22), are notable for the free treatment of the musical material. Since Weber showed little regard for sonata form and cyclic cohesion, his sonatas must not be judged by using Beethoven's as a yardstick. As an expression of his spontaneous attitude to music-making, Weber first composed the movements which suited his temperament best. For example, the minuet (as he called the scherzo in mock archaic style) and the rondo of his most important sonata, Op. 39, in A flat major, were written in Prague in 1814. The remaining parts were added in Berlin in 1816. The work owes its peculiar charm to the fluctuation between "orchestral" and pianistic writing. Usually, Weber presents his themes in what resembles a reduced orchestral score. The melody of the Andante gives the impression of being played by a clarinet against the background of pizzicato strings.

카를 마리아 폰 베버는 즉흥 연주에 대한 놀랄 만한 재능으로 찬사 받는 훌륭한 피아니스트로 바그너를 위한 길을 닦은 대담한 오페라 혁신자였지만 평생 동안 불행했다. 그의 4개의 키보드 소나타는 모두 10년 (1812~22) 이내에 쓰였고, 음악적인 소재를 자유롭게 다룬 것으로 유명하다. 베버는 소나타 형식과 순환하는 결합에 대해 거의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소나타들은 베토벤을 척도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음악을 만드는 것에 대해 마음에서 우러나온 태도의 표현으로써, 베버는 처음에는 그의 기질에 적합한 악장들을 작곡했다. 예를 들어, 그의 가장 중요한 소나타 2번에서 (그가 스케르초를 가장된 옛 스타일로 부르는 것 같은) 3악장 미뉴에트와 4악장 론도는 1814년에 프라하에서 작곡되었다. 나머지 부분들은 1816년 베를린에서 추가되었다. 이 작품은 “오케스트라적”이고 피아니스틱한 곡 사이의 변화로 인해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보통 베버는 축소된 오케스트라 총보와 비슷한 것에서 그의 주제들을 제시한다. 2악장 안단테(느리게)의 멜로디는 피치카토(바이올린이나 비올라, 첼로 등의 찰현악기에서 활을 사용하지 않고 현을 손가락으로 퉁겨 연주하는 주법)로 연주하는 현악기들의 배경에 대항하여 클라리넷이 연주한다는 인상을 준다.

Weber Sonata No. 2 in Ab, Op. 39: II. Andante / 베버 소나타 2번 2악장 오프닝

Franz Liszt's image is that of a professed (rather than genuine) Hungarian, cosmopolitan and self-appointed "apostle of gypsy music". His interest in Spain initially found expression in a well-received one-act opera, "Don Sancho", written at an early age. There followed an affair with the Spanish dancer Lola Montez, who was later responsible for the abdication of a Bavarian King, and a possibly platonic, but artistically productive relationship with George Sand, the Parisian "femme scandaleuse" and woman of letters who later lived with Chopin. Taken with her androgynous charm, he dedicated a "rondeau fantastique sur un theme espagnol" to her in 1836. Entitled "El contrabandista" (The Smuggler) and recalling the milieu of Bizet's Carmen, this piano piece was based on a song by the Spanish tenor Manuel Garcia, which Liszt had heard performed by the latter's famous daughter, Maria Malibran. Sand responded by using the title of the song (translated into French) for her short story "Le Contrebandier". But the most enduring Spanish-flavoured work to flow from his pen was his "Rhapsodie espagnole. Folies d'Espagne et Jota aragonesa". Written around 1863 in the idyllic town of Weimar, it was an improved version of a "Grand Concert Fantasia on Spanish Airs" using the same themes and composed during his last tour of Spain in 1845. The tempo pattern of the Spanish Rhapsody is similar to that of his "Hungarian Rhapsodies". A slow opening in two sections - introduction and first part - helps to make the swift second part even more effective. The "Folia" (originally a Portuguese folk tune about a girl driven to insanity by lovesickness that has been used and modified by composers of all ages and nations - from Corelli to Rachmaninov in his alleged "Corelli Variations") is first heard in a unison C sharp minor passage softly intoned in the bass. After a build-up handled with great mastery, which is even more stunning than in the late "Hungarian Rhapsodies", a sparkling Jota aragonesa in D major takes over, its effect being enhanced by a sensual six-eight cantilena. But Liszt has yet another trump card up his sleeve. The gloomy theme of the Folia returns at the beginning of the coda, but transformed into a radiant major-key version.

프란츠 리스트는 공언된(진짜가 아닌) 헝가리인, 코스모폴리탄(세계인), 자칭 “집시 음악의 주창자”의 이미지이다. 스페인에 대한 그의 관심은 초기에 쓰인 호평 받은 단막 오페라 <돈 산초>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다. 나중에 바이에른 왕의 퇴위에 책임을 졌던 스페인 무용수이자 매춘부인 롤라 몬테스와 바람피웠고 아마도 플라토닉(정신적인 사랑)이었지만, 파리 사교계의 “스캔들 메이커”이자 쇼팽과 나중에 함께 살았던 편지 속 여성인 조르쥬 상과의 예술적으로 풍요로운 관계가 있었다. 그녀의 중성적인 매력에 사로잡힌 그는 1836년에 그녀에게 <스페인 주제에 의한 환상적인 론도>를 헌정했다. <엘 콘트라반디스타>(밀수업자)라는 제목으로 비제 오페라 <카르멘>의 분위기를 상기시키는 이 피아노곡은 스페인 테너 마누엘 가르시아의 노래를 토대로 하고 있는데, 리스트는 이 테너의 유명한 딸 마리아 말리브란이 연주하는 것을 들었다. 조르쥬 상은 그녀의 단편 소설 <르 콩트르방디에>로 노래의 제목(프랑스어로 번역)을 사용하여 응답했다. 그러나 그의 펜에서 나온 가장 오래간 스페인풍 작품은 <스페인 랩소디 - 폴리아 데스파뉴와 호타 아라고네사>였다. 목가적인 바이마르 마을에서 1863년경에 쓰인 이 곡은 동일한 주제를 사용하는 <스페인 민요에 의한 그랜드 판타지아>의 향상된 버전으로 1845년에 스페인을 마지막으로 여행하는 동안 작곡되었다. <스페인 랩소디>의 템포 패턴은 그의 <헝가리 랩소디> 템포 패턴과 비슷하다. 두 섹션(서주와 첫 번째 파트)에서 느리게 시작하는 것은 두 번째 파트를 더욱 효과적으로 만드는데 도움이 된다. “폴리아”(그가 주장하는 <코렐리 변주곡>에서 코렐리부터 라흐마니노프에 이르기까지 모든 연령대와 국가의 작곡가들에 의해 사용되고 변경된, 상사병에 걸려 정신 이상에 빠진 소녀에 관한 포르투갈 민속 음악)는 베이스에서 부드럽게 울려 퍼진 C#단조의 유니즌 패시지에서 처음으로 들린다. 나중의 <헝가리 랩소디>에서보다 더 빛나는 위대한 경지로 강화된 후, D장조의 반짝거리는 “호타 아라고네사”는 관능적인 6/8박자의 칸틸레나(서정적인 선율)에 의해 강화된 효과를 이어간다. 그러나 리스트는 아직 옷소매에 또 다른 트럼프 카드를 가지고 있다. “폴리아”의 우울한 주제는 코다의 시작으로 돌아오지만, 빛나는 장조 버전으로 변모했다.

Liszt Rhapsody Espagnole: Folies d'Espagne / 리스트 <스페인 랩소디> 중 “폴리아 데스파뉴”

Liszt Rhapsody Espagnole: Jota aragonesa / 리스트 <스페인 랩소디> 중 “호타 아라고네사”

Liszt Rhapsody Espagnole's six-eight cantilena / 리스트 <스페인 랩소디> 중 6/8박자의 칸틸레나

Liszt Rhapsody Espagnole: Folia's radiant major-key version / 리스트 <스페인 랩소디> 중 폴리아의 빛나는 장조 버전

"Mimolyot" literally means "flying past". The reference here is to Sergei Prokofiev's "Visions fugitives", Op. 22, a bewildering mosaic of associations, recollections, perceptions, hopes and anxieties, but as brief as the dreams of the night, which merely seem long to us. Terse, colourful, kaleidoscopic and aphoristic - all these qualities apply to the 20 pieces which the young, iconoclastic composer wrote in St Petersburg. There is not one tedious moment in this score, which is unpredictable throughout. The unusual title "Mimolyotnosti - Visions fugitives" was coined by a Russian Symbolist poet, Konstantin Balmont (some of his works were set by Stravinsky), whose verse betrays the influence of his older French soul-mate, Charles Baudelaire. The latter's "Poemes en proses", brief impressions of nature, society and human life, may be seen as a source of inspiration, but the same can be said of his synaesthetic linkages in "Les fleurs du mal". This was not to be the composer's only creative encounter with Symbolism. His opera "The Fiery Angel" is based on the identically titled novel of another Russian Symbolist, Valerian Bryussov. The thematic material of this highly expressive opera later found its way into his Third Symphony.

“미몰리오트”는 말 그대로 “잠깐 동안의 비행”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언급하는 것은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의 <덧없는 환영> Op. 22로인데 연상, 기억, 인식, 희망, 불안이 뒤범벅된 모자이크이지만, 단지 우리에게 긴 것처럼 보이는 밤의 꿈들처럼 짧다. 간결하고, 다채롭고, 만화경 같고, 금언적인 이 모든 특성은 젊고 기존의 음악적 전통을 타파하는 작곡가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쓴 20개의 곡에 적용된다. 이 악보에는 지루한 순간이 하나도 없으며 예측할 수 없다. 특이한 제목인 “미몰리오트노스티 - 비지옹 퓌지티브”는 러시아 상징주의 시인 콘스탄틴 발몬트(그의 일부 작품들은 스트라빈스키가 음악으로 제작)가 처음으로 썼는데, 그의 운문은 그보다 나이가 더 많은 마음이 잘 맞는 프랑스 친구 샤를 보들레르의 영향이 드러난다. 후자(보들레르)의 <산문시>는 즉 자연, 사회, 인생에 대한 짧은 인상은 영감의 원천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악(惡)의 꽃>에서의 공감각적인 결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작곡가에게 있어 상징주의와의 유일한 창의적인 만남이 아니었다. 그의 오페라 <불의 천사>는 또 다른 러시아 상징주의 시인 발레리 브류소프의 동명 소설(불꽃의 천사)을 토대로 한 것이다. 이 표현력이 뛰어난 오페라의 주제와 관련된 소재는 나중에 그의 교향곡 3번에 들어갔다.

Correspondances - Charles Baudelaire
La Nature est un temple où de vivants piliers
Laissent parfois sortir de confuses paroles;
L'homme y passe à travers des forêts de symboles
Qui l'observent avec des regards familiers.

Comme de longs échos qui de loin se confondent
Dans une ténébreuse et profonde unité,
Vaste comme la nuit et comme la clarté,
Les parfums, les couleurs et les sons se répondent.

II est des parfums frais comme des chairs d'enfants,
Doux comme les hautbois, verts comme les prairies,
— Et d'autres, corrompus, riches et triomphants,

Ayant l'expansion des choses infinies,
Comme l'ambre, le musc, le benjoin et l'encens,
Qui chantent les transports de l'esprit et des sens.

교감(交感) [상응(相應)] - 샤를 보들레르
자연은 하나의 신전, 거기에 살아있는 기둥들은
때때로 어렴풋한 얘기들을 들려주고
사람이 상징의 숲을 통해 그곳을 지나가면
숲은 다정한 눈길로 그를 지켜본다

밤처럼, 그리고 빛처럼 광막한
어둡고 그윽한 조화 속에서
저 멀리 어울리는 긴 메아리처럼
향기와 색채와 소리가 서로 화답한다 (공감각과 유사한 표현)

어린아이의 살결처럼 신선하고,
오보에처럼 부드럽고, 초원처럼 푸른 향기가 있고 (공감각적 표현)
— 또 썩고, 짙은 독한 향기들도 있어

용연향(龍涎香), 사향(麝香), 안식향(安息香), 훈향(薰香)처럼
무한한 것으로 퍼져나가
정신과 감각의 환희를 노래한다.

[프로코피에프의 초자연적이며 환상적인 오페라 <불의 천사>는 작곡가 생전에는 공연된 적이 없는 작품으로, 영적인 광란과 마력적인 욕망(“불의 천사” 마디에르의 환각)에 사로잡힌 여주인공 레나타, 마디에르의 화신으로 생각되는 하인리히 백작, 그리고 레나타를 사랑하는 비운의 기사 루프레히트의 삼각관계를 다룬다. 프로코피에프의 교향곡 3번은 이 오페라의 관현악 발췌곡이다.]


탁월무비란 단어가 찾아봐도 안 나와서 무비(無比)하다를 따로 찾아보니 아주 뛰어나서 비길 데가 없다는 의미. 길렐스가 처음 유럽에서 연주한 시기가 한글에서는 1948년이고 영어에서는 1945년이라고 나온다. 번역하다가 이런 게 나오면 거기서 괜히 시간을 까먹는다. 한글 정보에서는 1948년이 처음이라고 한 이유가 프라하 축제 때문인데, 구글에서 영어로 찾아보면 1945년 세계대전 종료 직후 유럽에서 연주했다고 나온다. 러시아 피아니스트들의 프로필을 써보면 어떤 스승을 거쳤는지에 대한 계보가 나와서 약간 복잡하기도 한데,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런 것 정리하는 게 즐거울 때도 있다. 번역하다 보니 보들레르란 프랑스 시인이 몇 번 나오는데 어떤 시를 찾아봐야 할지 고민을 좀 하게 된다. 보들레르가 “시는 읊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에서 공감각적인 표현이 나타나는 시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찾아보니 대표적인 시가 <교감>(또는 상응)이었다. 공감각적인 표현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면서 문학을 배우는 고등학생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프랑스어 원문 옆에 한글을 나란히 놓지 않은 이유는 어순에 따라서 번역에 의해 행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정리하면서 단지 영어 내지만 번역하면 될 줄 알았는데 어쩔 수 없이 공부할 거리가 생겼다. 에밀 길렐스는 이자이 콩쿠르 피아노 부문 초대 우승자이다. 그 외에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심사위원장(1~4회)과 퀸엘리자베스 콩쿠르 심사위원(1956~1983년 동안 빠짐없이 참석)을 지냈다. 훈장 수상 내역은 러시아어로 된 위키페디아에서 찾았다. 길렐스는 2016년 그라모폰지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

Heinrich Neuhaus, Berta Reingbald and Emil Gilels / 하인리히 네이가우스, 베르타 라인크발트와 함께 한 에밀 길렐스

Pianists Emil Gilels (left) and Yakov Flier who took first and third prizes respectively at the Queen Elisabeth International Music Competition in Brussels, Belgium. Pravda newspaper (Soviet Union). May 1938. / 1938 퀸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의 에밀 길렐스(1위)와 야코프 플리에르(3위)

Awards
1931 - National Piano Competition of the Ukraine 1st prize / 우크라이나 전국피아노콩쿠르 1위
1933 - 1st All-Soviet Union Music Competition 1st prize / 제1회 전 소련 음악 콩쿠르 1위
1936 - International Vienna Music Academy Competition in Austria 2nd prize / 오스트리아 비엔나 음대 국제피아노콩쿠르 2위
1937 - Order of the Badge of Honour / 존경표장
1938 - Eugène Ysaÿe International Music Competition (now Queen Elisabeth International Music Competition) in Brussels, Belgium 1st prize / 벨기에 브뤼셀 "외젠 이자이" 국제음악콩쿠르(현재 퀸엘리자베스 국제음악콩쿠르) 1위
1945 (?) - Medal "For Valiant Labor in the Great Patriotic War of 1941-1945" / 1941년-1945년 대조국전쟁 용맹노동 메달
1946 - Stalin Prize of the first degree for concert and performing activities in USSR / 소련 스탈린 상
1946 - Order of Red Banner of Labor / 노동적기장
1947 - Honour Artist of Russian Soviet Federative Socialist Republic / 러시아 연방 공훈예술가
1947 - Medal "In Memory of the 800th Anniversary of Moscow" / 모스크바 800주년 기념 메달
1954 - People's Artist of the USSR / 소련 인민예술가
1961, 1966, 1976 - Three Orders of Lenin in USSR / 소련 레닌 훈장
1962 - Lenin Prize for concert and performing activities in USSR / 소련 레닌 상
1967 (?) - Gold Medal of the City of Paris in France / 프랑스 파리시 금메달
1967 - Order of Commandeur Mérite Culturel et Artistique de Paris in France / 프랑스 파리 문화예술 공로훈장 1급 코망되르 훈장
1968 - Order of Leopold I in Belgium / 벨기에 국왕 레오폴트 1세 훈장
1969 - Honorary Member at the Royal Academy of Music in London, England / 잉글랜드 런던 왕립 음대 명예회원
1970 - Honorary Professor at the Franz Liszt Academy of Music in Budapest, Hungary / 헝가리 부다페스트 리스트 음악원 명예교수
1973 - The Robert Schumann Award in Germany / 독일 로베르트 슈만 상
1973 - The Brahms Medal in Hamburg, Germany / 독일 함부르크 브람스 메달
1976 - Hero of Socialist Labour / 사회주의 노동영웅
1980 - Honorary Member at the Accademia Nazionale di Santa Cecilia in Rome, Italy / 이탈리아 로마 산타 체칠리아 국립 음악원 명예회원
1981 - Order of the Friendship of Peoples / 인민우호장

Sculpture of the U.S. pianist Van Cliburn in Museon Art Park in Moscow / 모스크바 무세온 아트 파크에 있는 밴 클라이번의 조각상

Van Cliburn and Emil Gilels / 밴 클라이번과 함께 한 에밀 길렐스

Lev Vlassenko, Van Cliburn and Emil Gilels in 1958 / 제1회 차이코프스키에서 레프 블라센코(2위), 밴 클라이번(1위)과 함께 한 에밀 길렐스


Nikita Khrushchev congratulates Van Cliburn after he receives the Gold Medal at the I International Tchaikovsky Competition in 1958. / 밴 클라이번의 금메달을 축하하는 니키타 흐루시초프

Nikita Khrushchev (middle) poses with the two first prize ex-aequo of the II International Tchaikovsky Competition in piano: Vladimir Ashkenazy and John Ogdon (1962). / 제2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공동 우승자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와 존 오그던 사이에 있는 니키타 흐루시초프

Misha Dichter, Emil Gilels and Grigory Sokolov in 1966 / 제3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미샤 디히터(2위), 그리고리 소콜로프(1위)와 함께 한 에밀 길렐스

Chief juror of the 4th Tchaikovsky International Piano Competition Emil Gilels left presents the award to British pianist John Lill / 제4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존 릴에게 시상하는 심사위원장 에밀 길렐스

Competition Jury (or Chairman) Career & Winners
1956 - Queen Elisabeth Jury - Vladimir Ashkenazy / 퀸엘리자베스 -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러시아, 유태계)
1958 - 1st Tchaikovsky Chairman - Van Cliburn / 차이코프스키 - 밴 클라이번 (미국)
1960 - Queen Elisabeth Jury - Malcolm Frager / 퀸엘리자베스 - 맬컴 프레이저 (미국, 유태계)
1962 - 2nd Tchaikovsky Chairman - John Ogdon & Vladimir Ashkenazy / 차이코프스키 - 존 오그던 (영국),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공동 우승
1964 - Queen Elisabeth Jury - Evgeny Mogilevsky / 퀸엘리자베스 - 에프게니 모길레프스키 (러시아, 유태계)
1966 - 3rd Tchaikovsky Chairman - Grigory Sokolov / 차이코프스키 - 그리고리 소콜로프 (러시아, 유태계, 역대 최연소 만장일치 우승)
1968 - Queen Elisabeth Jury - Ekaterina Novitskaya / 퀸엘리자베스 - 에카테리나 노비츠카야 (러시아)
1970 - 4th Tchaikovsky Chairman - John Lill & Vladimir Krainev / 차이코프스키 - 존 릴 (영국), 블라디미르 크라이네프 (러시아, 유태계) 공동 우승
1972 - Queen Elisabeth Jury - Valery Afanassiev / 퀸엘리자베스 - 발레리 아파나시에프 (러시아)
1975 - Queen Elisabeth Jury - Mikhail Faerman / 퀸엘리자베스 - 미하일 파에르만 (러시아, 유태계)
1978 - Queen Elisabeth Jury - Abdel Rahman El Bacha / 퀸엘리자베스 - 압델 라흐만 엘 바샤 (레바논, 만장일치 우승)
1983 - Queen Elisabeth Jury - Pierre-Alain Volondat / 퀸엘리자베스 - 피에르-알랭 볼롱다 (프랑스)

Clavierissimo — Emil Gilels by Efimov, 1958 / 클라비에리시모 - 1958년 에피모프의 그림

Gramophone Hall of Fame Pianists/Harpsichordists
01 Leif Ove ANDSNES / 레이프 오베 안스네스 (노르웨이)
02 Martha ARGERICH / 마르타 아르헤리치 (아르헨티나, 유태계)
03 Claudio ARRAU / 클라우디오 아라우 (칠레)
04 Vladimir ASHKENAZY /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러시아, 유태계)
05 Alfred BRENDEL / 알프레드 브렌델 (오스트리아)
06 Emil GILELS / 에밀 길렐스 (러시아, 유태계)
07 Glenn GOULD / 글렌 굴드 (캐나다)
08 Friedrich GULDA / 프리드리히 굴다 (오스트리아)
09 Marc-André HAMELIN / 마르크-앙드레 아믈랭 (캐나다)
10 Angela HEWITT / 안젤라 휴이트 (캐나다)
11 Vladimir HOROWITZ /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러시아, 유태계)
12 Stephen HOUGH / 스티븐 허프 (영국)
13 Wilhelm KEMPFF / 빌헬름 켐프 (독일)
14 Evgeny KISSIN / 에프게니 키신 (러시아, 유태계)
15 Gustav LEONHARDT / 구스타프 레온하르트 (네덜란드, 하프시코드)
16 Lang LANG / 랑랑 (중국)
17 Dinu LIPATTI / 디누 리파티 (루마니아)
18 Radu LUPU / 라두 루푸 (루마니아, 유태계)
19 Arturo Benedetti MICHELANGELI /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 (이탈리아)
20 Murray PERAHIA / 머레이 페라이어 (미국, 유태계)
21 Maurizio POLLINI / 마우리치오 폴리니 (이탈리아)
22 Sergey RACHMANINOV /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러시아)
23 Sviatoslav RICHTER /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러시아)
24 Arthur RUBINSTEIN /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폴란드, 유태계)
25 András SCHIFF / 안드라스 쉬프 (헝가리, 유태계)
26 Artur SCHNABEL / 아르투르 슈나벨 (오스트리아, 유태계)
27 Grigory SOKOLOV / 그리고리 소콜로프 (러시아, 유태계)
28 Mitsuko UCHIDA / 미츠코 우치다 (일본)

댓글 1개:

  1. http://uploaded.net/file/e7wk8i3h/from/aa33kn

    http://uploaded.net/file/ajo2i7sk/Mel.RPS07.r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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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gle Drive / 2024. 11. Geneva Competition Winners 6

1957년 공동 2위 Maurizio Pollini (Italy) / 마우리치오 폴리니 (이탈리아) 01 Maurizio Pollini - Beethoven Complete Piano Sonatas 마우리치오 폴리니 -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집 8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