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필

내 사진
I'm piano bachelor, piano music lover, CD collector and classical music information's translator. Also KakaoTalk character Tube mania!Naver Blog: http://blog.naver.com/neige1984Youtube Channel: https://www.youtube.com/channel/UCDPYLTc4mK7dOXYTQEOiPew?view_as=subscriber
레이블이 Pianist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Pianist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21년 2월 19일 금요일

American Pianist / Garrick (Olof) Ohlsson


https://en.wikipedia.org/wiki/Garrick_Ohlsson

http://en.chopin.nifc.pl/chopin/persons/detail/id/2872

https://www.facebook.com/GarrickOhlsson/timeline?ref=page_internal

http://www.allmusic.com/artist/garrick-ohlsson-mn0000756978

http://www.bach-cantatas.com/Bio/Ohlsson-Garrick.htm

http://www.opus3artists.com/artists/garrick-ohlsson

http://www.hyperion-records.co.uk/a.asp?a=A1853

http://gayinfluence.blogspot.kr/2013/05/garrick-ohlsson.html


건반악기의 표현력과 정통 피아니즘을 고수하는 이 시대 마지막 거장. 쇼팽 음악과 라흐마니노프 음악 등에 해박한 지식과 설득력 있는 해석으로 널리 알려진 정통 피아니스트. 쇼팽 콩쿠르 우승 이후에는 미국 출신의 피아니스트이면서도 폴란드의 국가적 영웅이 되다시피 했으며 르몽드 지는 ‘쇼팽 등 특히 낭만파 음악 해석에 있어 탁월한 기량을 자랑한다’고 격찬했다.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개릭 올슨은 낭만파 작곡가들의 작품 외에도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등 폭넓은 레퍼토리를 가진 연주자로 RCA, 버진 클래식스, 텔락, 넌서치 등 유수의 음반사에서 녹음 활동을 해왔다. 미국 태생으로 세계무대에서 인정받은 순수 미국인 연주자로서 밴 클라이번과 앙드레 프레빈 등의 뒤를 이어가고 있는 중견 연주자. 실업가의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다고 한다. 조기 수재 교육을 받은 뒤, 웨스트체스터 음악원에서 18세로 줄리아드 음악원에 진학. 1979년에 내한 공연을 가졌다.


올슨은 신장 190cm, 체중 240파운드(약 109kg)라는 거인으로, 좌우 양손 모두 1옥타브와 4도 내지 5도까지 닿는다고 한다. 이 야구 글러브와 같은 손으로 난곡을 쉽게 쳐 내는 모습은 정말 시원하다. 연주는 외모처럼 더할 나위 없이 건강하여 병적인 그늘 따위는 털끝만치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테크닉에 내맡긴 채 그냥 척척 친다는 것은 결코 아니고, 청년 음악가다운 상쾌한 서정도 충분히 나타내고 있다. 음색의 변화도 좋아서 터치로 컨트롤해서, 싱싱한 음악을 노래하게 하는 모습은 역시 보통의 테크니션은 아니다. - 음악사 대도감


타건이 강한 호쾌한 스타일로 유명했지만 초기에는 그 특질이 자칫 표현면에서 경박하다는 인상을 주었는데 최근의 연주에서는 성능 좋은 스포츠카와 같은 예전의 이미지가 많이 사라졌다. 1989년 카토비체(폴란드)에서 가진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 라이브 녹음(폴란드 방송 교향악단)에서는 차분하게 낭만적인 서정성을 추구하는 자세를 느낄 수 있어 그 변모가 인상적이다. 레퍼토리도 자신의 스타일을 세련되게 하기 위해 낭만주의의 대곡인 부조니의 피아노 협주곡(도흐나니/클리블랜드 관현악단 외, 네덜란드 필립스)을 녹음하는 등 의욕을 보이고 있다. - 노모토 이사오


“수정처럼 맑은 소리를 내는 피아니스트”라는 찬사를 받았다. - 1979년 5월 22일 경향신문



Garrick Ohlsson is a pianist with a flawless technique, a strong grasp of form, and a clean, non-romanticized style of performing.


뛰어난 테크닉, 강한 구성, 깔끔하고, 낭만적이지 않은 연주 스타일을 가진 피아니스트.


Garrick (Olof) Ohlsson was born on 3 April 1948 in White Plains, Bronxville, New York. Son of a Swedish father and Italina (Sicilian) mother, Garrick Ohlsson took up the piano at the age of eight at the Music Conservatory of Westchester, New York, with Thomas Lishman. After he saw Rubinstein in concert, he told interviewer Michael Steinberg, his choice of career was set. "I was blasted into orbit. And that's when I said in my mind...when other little boys say, 'I want to be a fireman,' that's what I want to do." In 1961, he entered the preparatory course of the Juilliard School when he was 13, where he studied with Sascha Gorodnitzki; from 1968 remaining at Juilliard for his bachelor's degree in music (earned in 1971), he studied with Rosina Lhévinne. Private studies with Olga Barabini (a pupil of Claudio Arrau and Josef Hofmann), Irma Wolpe, and Claudio Arrau rounded out Ohlsson's education. He made his first public appearance at the age of 12, in 1960. During his student days he was a whiz at math and languages (he speaks English, Polish, Italian, Spanish, French, German and Swedish).


개릭 올슨은 1948년 4월 3일 뉴욕 주 브롱스빌 화이트플레인스의 스웨덴계 아버지와 이탈리아계(시칠리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8세에 뉴욕 웨스트체스터 음악원에서 토머스 리쉬먼과 함께 공부.

9세에 콘서트에서 루빈스타인을 본 후 그는 그의 경력에 대한 선택이 설정되었다고 인터뷰 진행자인 마이클 스타인버그에게 말했다. “나는 궤도로 쏘아 올려졌다. 그리고 내가 내 마음에 말했을 때였다...다른 소년이 ‘나는 소방관이 되고 싶다’고 말할 때 그게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1960년 12세에 첫 공개 연주회.

1961년 13세에 줄리아드 학교 예비 과정에 입학해서 사샤 고로드니츠키 사사.

1968년부터 로지나 레빈 사사.

1971년 학사 학위.

올가 바라비니(클라우디오 아라우와 요제프 호프만의 제자), 이르마 볼페, 클라우디오 아라우와의 개인 교습은 올슨의 교육을 완성시켰다.

학생 시절에 수학과 언어(영어, 폴란드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웨덴어)에서 수재.


Although Ohlsson is especially noted for his performances of the works of Chopin, Mozart, Beethoven and Schubert, he has a broad range from Bach and Busoni to Copland and Gershwin. Writing in The New York Times, music critic Allan Kozinn has characterized Ohlsson's repertory as "huge."


올슨은 특히 쇼팽,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에 뛰어나지만 바흐와 부조니부터 코플랜드와 거슈윈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다.


After winning First Prizes at the 1966 Busoni Competition in Italy and 1968 Montréal Piano Competition, he made his New York recital debut on January 5, 1970. Later that year he gained international recognition when he became the first American pianist to win the prestigious quinquennial Chopin Competition in Warsaw. A Polish writer described Ohlsson as a "near-butterfly" for his ability to traverse the entire spectrum of 18 dynamic degrees discernible on the modern piano, from the thundering fortississimo to the finest pianississimo, with reference also to his height (6 foot, 4 inches), weight (225 lbs.), and strech of hands (an octave and 5th in the left hand and an octave and a 4th in the right hand).


부조니 콩쿠르와 몬트리올 콩쿠르 우승 후 1970년 1월 5일, 뉴욕 데뷔. 폴란드 작가는 그의 외모(6피트 4인치의 키, 225파운드의 체중, 도~솔까지 12도가 닿는 왼손, 도~파까지 11도가 닿는 오른손)에 대한 언급과 함께 우레와 같은 포르티시시모부터 더없이 아름다운 피아니시시모까지 현대 피아노로 식별 가능한 18개 동적도의 전체 스펙트럼을 가로지르는 그의 능력에 대해 “나비에 가깝다”고 묘사했다.


Working with impresario Sol Hurok, he went on his first grand tour of Europe in 1969. His performances at the Santa Cecilia Academy in Rome and the La Fenice in Venice were particularly well received. After his triumph at the Chopin Competition, Ohlsson became a very popular pianist with a heavy invitations overload. American newspapers wrote of him as a national hero; Sol Hurok organized a major US tour, consisting of over 40 concerts. Since that time, Mr. Ohlsson has continued to tour extensively, playing with the best conductors and orchestras in the world. In 1998 he inaugurated the Beijing Music Festival, performing with the Berlin Radio Orchestra under Rafael Frühbeck de Burgos. In 1999, in celebration of the 150th anniversary of Chopin's death, he gave a series of Chopin recitals at European festivals, including La Roque d'Anthéron, the Fêtes Romantiques de Nohant, and the Klavier-Festival Ruhr in Essen. Mr. Ohlsson often performs in Poland as a recitalist and soloist with symphonic orchestras. His playing is a favourite of Polish audiences, highly praised for the virtuosity and grandeur of his interpretations of Chopin, Liszt and Scriabin.


연출가 솔 휴록과 함께 작업하면서 1969년 유럽에서 첫 그랜드 투어. 로마의 ‘산타 체칠리아 아카데미’와 베니스의 오페라 극장 ‘라 페니체’에서의 연주가 특히 반응이 좋았다. 쇼팽 콩쿠르 우승 후 엄청난 초청을 받는 매우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되었다. 미국 신문은 그를 ‘국가 영웅’이라고 썼다. 솔 휴록은 40개 이상의 콘서트로 이루어진 주요 미국 투어를 조직했다. 그 이후 올슨은 세계의 최고 지휘자 및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면서 폭넓게 투어를 계속했다. 1998년 라파엘 브뤼벡 데 부르고스의 지휘로 베를린 라디오 오케스트라와 함께 베이징 음악제 개막 연주. 1999년 쇼팽 서거 150주기 기념 행사로 라 로크 당테롱, 노앙의 낭만적인 휴일, 에센의 루르 클라비어-페스티벌을 포함한 유럽 페스티벌에서 쇼팽 리사이틀 시리즈. 폴란드에서 종종 리사이틀리스트 및 솔로이스트로서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 폴란드 청중이 그의 연주를 좋아하며, 그의 쇼팽, 리스트, 스크리아빈 해석은 뛰어난 연주 기교와 장엄함으로 극찬 받는다.


In 1966 he won the Busoni Competition in Italy, and in 1968, the Montreal Piano Competition, but it was his 1970 victory in the Chopin Competition in Warsaw that launched his career. He was the first American winner, and his victory gained some of the same kind of attention as had Van Cliburn's Tchaikovsky Competition triumph a little over a decade earlier. A Warsaw critic called Ohlsson a "near-butterfly" of a pianist, and the young pianist had a distinctive image to go with his credentials.


1966년 이탈리아 부조니 콩쿠르와 1968년 몬트리올 콩쿠르에서 우승했지만 1970년 바르샤바 쇼팽 콩쿠르 우승은 그의 경력의 시작이었다. 그는 첫 미국인 우승자가 되었고, 그의 우승은 불과 12년 전에 밴 클라이번이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한 것과 같은 관심을 받았다. 바르샤바 비평가는 올슨을 “나비에 가까운” 피아니스트로 불렀고, 젊은 피아니스트는 그의 자격과 어울리는 독특한 이미지를 가졌다.


Garrich Ohlsson has made nearly a dozen tours of Poland, where he retains immense personal popularity. He has appeared with major symphony orchestras in Europe, USA, Japan, New Zealand Symphony Orchestra. In the late 1980's and early 1990's he appeared with the Cleveland Orchestra, Chicago Symphony Orchestra, Philadelphia Orchestra, Pittsburgh Symphony Orchestra, and San Francisco Symphony Orchestra in the USA; European engagements with the Münchner Philharmoniker, North German Radio Orchestra, Rotterdam Philharmonic Orchestra, all the London orchestras; City of London Festival, South Bank Summer Music, Promenade Concerts with BBC Symphony Orchestra; Festivals, recitals, concerts in Bergen, Prague, Sofia, Dubrovnik, Tivoli. He has also performed with symphony orchestras of Saint Louis Symphony Orchestra, Cincinnati Symphony Orchestra, Indianapolis Symphony Orchestra, Houston Symphony Orchestra, Baltimore Symphony, Pittsburgh Symphony Orchestra, Los Angeles Philharmonic Orchestra, Seattle Symphony Orchestra, Denver Symphony, National Symphony Orchestra (Washington D.C.), and Berkeley; and the National Arts Centre, Saint Paul Chamber Orchestra, and the London Philharmonic Orchestra at Lincoln Center.


개인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보유하고 있는 폴란드에서 12회에 가까운 투어를 가졌다. 유럽, 미국, 일본의 주요 심포니 오케스트라 및 뉴질랜드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반까지 미국에서는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피츠버그 심포니 오케스트라,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오케스트라, 유럽에서는 뮌헨 필하모닉, 북독일 라디오 오케스트라, 로테르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런던의 모든 오케스트라와 협연. 런던 시 페스티벌, 사우스뱅크 여름음악제,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하는 프롬나드 콘서트에 출연. 베르겐, 프라하, 소피아, 두브로브니크, 티볼리에서 페스티벌, 리사이틀 및 콘서트. 세인트루이스 심포니 오케스트라, 신시내티 심포니 오케스트라, 인디애나폴리스 심포니 오케스트라, 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볼티모어 심포니, 피츠버그 심포니 오케스트라,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시애틀 심포니 오케스트라, 덴버 심포니, 워싱턴 DC 국립 심포니 오케스트라, 버클리 오케스트라, 국립예술센터 오케스트라, 세인트폴 실내 오케스트라와 협연 및 링컨 센터에서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


Ohlsson played with Eugene Ormandy and the Philadelphia Orchestra, gave a solo recital in New York and played at the White House for President Nixon. In the early 1970s he toured Europe extensively, made a three-week tour of Japan and made his London orchestral debut playing Rachmaninov Piano Concerto No. 3 in D minor Op. 30. During the 1970s he made a huge number of appearances, playing around ninety concerts a season. He reduced this, but has continued to play regularly in North America, Europe, the Far East and New Zealand. Today he is in great demand, particularly in America, where in one season he can appear with all of the major orchestras. During the 1997–1998 season Ohlsson performed complete cycles of Chopin’s works in London, Paris and Warsaw and in the mid-1990s gave the cycle in New York and many other American cities. In the summer of 2003 he appeared at many music festivals including Tanglewood, Ravinia, Riverbend, and Mostly Mozart.


유진 오먼디의 지휘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협연.

뉴욕에서 독주회.

닉슨 대통령을 위해 백악관에서 연주.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으로 런던 데뷔.

1970년대 동안 한 시즌에 90여 회 이상 연주.

연주 횟수를 줄였으나 북아메리카, 유럽, 동아시아, 뉴질랜드에서 정기적으로 연주.

한 시즌에 모든 주요 오케스트라와 협연 가능한 미국에서 특히 수요가 많다.

1997~1998 시즌에 런던, 파리, 바르샤바에서 쇼팽 작품 전곡 연주.

1990년대 중반 뉴욕과 미국의 다른 다수 도시들에서도 전곡 연주.

2003년 여름에 탱글우드, 라비니아, 리버벤드, 모스틀리 모차르트를 포함하여 다수 음악제 출연.


Ohlsson has maintained a strong association with the music of Chopin, and has played the Polish master's complete piano works several times in recital and on recordings. His Chopin interpretations favor intense emotionalism over a languid, swooning salon style. Ohlsson is by no means exclusively a player of Chopin; however, his repertory extends from Haydn to 20th century masters and includes more than 80 works for piano and orchestra. He tours and appears as a guest soloist with orchestras around the world.


쇼팽의 음악과 강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폴란드 마스터의 피아노 작품 전집을 리사이틀과 녹음에서 여러 번 연주. 그의 쇼팽 해석은 나른하고 황홀해하는 살롱 스타일을 넘어 강렬한 감성주의를 선호한다. 올슨은 결코 쇼팽뿐인 연주자가 아니다. 그의 레퍼토리는 하이든부터 20세기 음악까지 폭넓고 80개 이상의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들을 포함한다. 연주 여행 및 전 세계의 오케스트라들과 함께 객원 솔로이스트로 출연. 특히 그의 쇼팽 연주를 존중하는 폴란드에서 12회 이상 투어.


During the 2002-2003 season, Ohlsson appeared as part of the Lincoln Center Great Performers series in New York, performing works by Busoni. A pianist completely consumed with musical life, Ohlsson has, when asked by an interviewer, been unable to remember what kind of car he drives.


2002~2003 시즌 동안 뉴욕 링컨 센터 ‘위대한 연주자들 시리즈’의 일부로 출연해서 부조니 작품 연주. 음악 인생으로 완전히 소비하는 피아니스트인 올슨은 인터뷰 진행자가 물었을 때 그가 운전하는 자동차의 종류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Ohlsson is an avid chamber musician and has collaborated with the Cleveland, Emerson, Guarneri, Takács and Tokyo string quartets, among other ensembles. In 2005-2006, Ohlsson toured with the Takács Quartet. Ohlsson is also a founding member of San Francisco's FOG Trio, together with violinist Jorja Fleezanis and cellist Michael Grebanier. Passionate about singing and singers, Mr. Ohlsson has appeared in recital with such legendary artists as Magda Olivero, Jessye Norman, and Ewa Podles. He also performs in partnership with violinist Hilary Hahn.


열렬한 실내악 연주자로 클리블랜드, 에머슨, 과르네리, 타카치, 도쿄 스트링 콰르텟 등과 협연.

2005~2006년 타카치 콰르텟과 투어.

바이올리니스트 조르자 플리자니스, 첼리스트 마이클 그레버니어와 함께 샌프란시스코의 포그 트리오 창단 멤버.

성악과 성악가들에 대한 열정으로 전설적인 성악가 에바 포들레스, 마그다 올리베로, 제시 노먼과 협연.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과도 협연.


During the summer of 2006, Garrick Ohlsson presented the complete cycle of L.v. Beethoven piano sonatas in both the Ravinia and Tanglewood festivals, a cycle he performed for the first time in the summer of 2005 at Switzerland's prestigious Verbier Festival. In 2006-2007, he opened the Mostly Mozart Festival in New York in a live, nationally televised performance. He also appeared in North America and Canada with the Atlanta Symphony Orchestra, Detroit Symphony Orchestra, Milwaukee Symphony Orchestra, Montreal Symphony Orchestra, New Jersey Symphony Orchestra, and Pittsburgh Symphony Orchestra, among others. A series of recitals in Anchorage, Boston, Cleveland, Florida, Los Angeles, Ottawa, and San Francisco culminated in three recitals of L.v. Beethoven sonatas at Lincoln Center, and a performance of L.v. Beethoven's "Emperor" concerto at Carnegie Hall with Orchestra of St. Luke's. In Europe, he performed at the BBC Proms with the Budapest Festival Orchestra, at the Warsaw Chopin Festival, with the Czech Philharmonic, with the BBC Philharmonic, and in recital in Spain and Italy.


2006년 여름 동안 라비니아 페스티벌과 탱글우드 페스티벌에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 (최초 전곡 연주는 2005년 여름의 스위스 베르비에 페스티벌)

2006~2007 시즌, 전국적으로 텔레비전 생중계된 뉴욕 “모스틀리 모차르트 페스티벌”에서 개막 연주. 애틀랜타 심포니 오케스트라, 디트로이트 심포니 오케스트라, 밀워키 심포니 오케스트라, 몬트리올 심포니 오케스트라, 뉴저지 심포니 오케스트라, 피츠버그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과 함께 북아메리카와 캐나다에서 협연. 앵커리지, 보스턴, 클리블랜드, 플로리다, 로스앤젤레스, 오타와, 샌프란시스코에서의 리사이틀 시리즈는 링컨 센터에서의 베토벤 소나타 리사이틀 3회, 세인트루크 오케스트라와 함께 카네기홀에서의 베토벤 “황제” 협연으로 끝났다. 유럽에서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BBC 프롬스에서 협연, 바르샤바 쇼팽 페스티벌에서 연주, 체코 필하모닉과 협연, BBC 필하모닉과 협연 및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 리사이틀.


In the 2007-2008 season, Garrick Ohlsson appeared with the Atlanta Symphony Orchestra, Baltimore Symphony Orchestra, Boston Symphony Orchestra, Houston Symphony Orchestra, San Francisco Symphony Orchestra, and Toronto Symphony Orchestra, among others. Special projects included performances in Berkeley and Los Angeles with Mark Morris Dance Group and pianist Yoko Nozaki in Mozart Dances; performances with the Russian National Orchestra and Vladimir Jurowski in California and at New York's Lincoln Center; and a Florida tour with the Pittsburgh Symphony Orchestra. Additionally, he performed with the Warsaw Philharmonic Symphony Orchestra, RTVE Madrid, MDR Sinfonieorchester Leipzig, and Sydney Symphony Orchestra with Vladimir Ashkenazy.


2007~2008 시즌 애틀랜타 심포니 오케스트라, 볼티모어 심포니 오케스트라,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오케스트라, 토론토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과 협연. 특별 프로젝트는 버클리와 로스앤젤레스에서 마크 모리스 댄스 그룹 및 피아니스트 요코 노자키와 함께 “모차르트 춤곡들” 협연, 캘리포니아와 뉴욕 링컨 센터에서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의 지휘로 러시안 내셔널 오케스트라와 협연, 피츠버그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플로리다 투어를 포함한다. 게다가 바르샤바 필하모닉 심포니 오케스트라, RTVE 마드리드 오케스트라, MDR 라이프치히 심포니 오케스트라, 시드니 심포니 오케스트라(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지휘)와도 협연.


In the 2008-2009 season, Garrick Ohlsson appeared in North America with the Atlanta Symphony Orchestra, Philadelphia Orchestra, Pittsburgh Symphony Orchestra, Saint Louis Symphony Orchestra, and the National Symphony Orchestra, among others. He performed Prokofiev's Fifth Piano Concerto with Michael Tilson Thomas and the San Francisco Symphony Orchestra, followed by a west coast tour including Seattle and Los Angeles' Disney Hall. With pianist Yoko Nozaki, Ohlsson reprised their performances with Mark Morris Dance Group in the critically acclaimed Mozart Dances. With contralto Ewa Podleś, he embarked on a tour of North America, followed by the release of their live-recorded recital from London's Wigmore Hall, a project he will revisit with her in the same hall in December 2009. A recital project focusing on the piano music of Scriabin and Russian contemporaries, which began in San Francisco and San Diego in the spring of 2008, continued through the 2008-2009 season and included performances at New York's 92nd Street Y. In Europe, Ohlsson performed with the Salzburg Mozarteum and Hugh Wolff, Hallé Orchestra with both Mark Elder and Edward Gardner, and Deutsche Symphony Berlin.


2008~2009 시즌 애틀랜타 심포니 오케스트라,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피츠버그 심포니 오케스트라, 세인트루이스 심포니 오케스트라, 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과 함께 북아메리카에서 연주. 마이클 틸슨 토머스의 지휘로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한 프로코피에프 피아노 협주곡 5번 협연은 시애틀과 로스앤젤레스의 디즈니 홀을 포함한 서부 해안 투어로 이어졌다. 피아니스트 요코 노자키와 함께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은 “모차르트 춤곡들” 공연에서 마크 모리스 댄스 그룹과 함께 재공연. 2008년 봄에 샌프란시스코와 샌디에이고에서 시작한 스크리아빈과 러시아 현대 피아노음악에 집중된 리사이틀 프로젝트는 2008~2009 시즌에 걸쳐 계속되었고 뉴욕 92번가 Y에서의 연주를 포함한다. 유럽에서는 휴 울프의 지휘로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에서 협연, 마크 엘더와 에드워드 가드너의 지휘로 할레 오케스트라와 협연, 베를린 도이체 심포니와 협연.


Highlights during the 2009-2010 season include Martinu's rarely performed Concerto No. 4 with the New York Philharmonic Orchestra and the BBC Scottish Symphony Orchestra as well as appearances with the San Francisco Symphony Orchestra, Houston Symphony Orchestra, Atlanta Symphony Orchestra, Vancouver Symphony Orchestra, Indianapolis Symphony Orchestra, San Diego Symphony Orchestra, Milwaukee Symphony Orchestra, Minneapolis Symphony Orchestra and Baltimore Symphony Orchestra.


2009~2010 시즌 동안의 하이라이트는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오케스트라, 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애틀랜타 심포니 오케스트라, 밴쿠버 심포니 오케스트라, 인디애나폴리스 심포니 오케스트라, 샌디에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밀워키 심포니 오케스트라, 미니애폴리스 심포니 오케스트라, 볼티모어 심포니 오케스트라뿐만 아니라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마르티누의 보기 드문 협주곡 4번 협연 및 BBC 스코티시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을 포함한다.


In 2010, he visited Australia and gave concerts in Melbourne.


2010년 오스트레일리아 방문 및 멜버른에서 콘서트.


Mr. Ohlsson brought Busoni's rarely programmed piano concerto to the National Symphony (Washington) and London's Barbican with the BBC Symphony Orchestra in the fall of 2014. 2015 marked the centenary of the death of Alexander Scriabin whose piano music Mr. Ohlsson presented in a series of recitals in London, San Francisco, Chicago and New York. He also returned to the orchestras of San Francisco, Detroit, Dallas, Houston, Baltimore, Minnesota, BBC Scotland and Prague where he is a frequent guest. 


2014년 가을, 워싱턴 DC 국립 심포니 및 런던 바비칸 센터에서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부조니의 보기 드문 피아노 협주곡 연주. 2015년 알렉산더 스크리아빈 서거 100주기를 기념하여 런던,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뉴욕에서 스크리아빈 리사이틀 시리즈. 또한 그가 게스트로 자주 출연하는 샌프란시스코, 디트로이트, 댈러스, 휴스턴, 볼티모어, 미네소타, BBC 스코틀랜드, 프라하의 오케스트라들과 재협연.


The 2015-2016 season includes recitals in Berkeley, New York, Indianapolis, Brisbane, Seattle, La Jolla, Evanston, Forth Worth, Lincoln and Costa Mesa. In return visits to Australia he will appear in Perth, Brisbane, Sydney, Melbourne and Adelaide and for the first time with the New Zealand Symphony in Wellington and Auckland. With concerti as diverse as Beethoven, Brahms, Barber and Busoni he can be heard with orchestras in Boston, Los Angeles, Ottawa, Nashville, Indianapolis, Oregon, Warsaw, St. Petersburg, Manchester (UK) and Lugano (Switzerland).


2015~2016 시즌은 버클리, 뉴욕, 인디애나폴리스, 브리즈번, 시애틀, 라호이아, 에번스턴, 포트워스, 링컨, 코스타 메사에서의 리사이틀을 포함한다. 오스트리아 재방문에서 퍼스, 브리즈번, 시드니, 멜버른, 애들레이드에서 연주하고 웰링턴과 오클랜드에서 뉴질랜드 심포니와 함께 처음으로 협연. 베토벤, 브람스, 바버, 부조니만큼 다양한 협주곡들과 함께 보스턴, 로스앤젤레스, 오타와, 내슈빌, 인디애나폴리스, 오리건, 바르샤바, 상트페테르부르크, 영국 맨체스터, 스위스 루가노에서 협연.


Among his many recordings, Ohlsson undertook a survey of Chopin's complete piano music—including sonatas, preludes, etudes, ballades, rondos, scherzos, variations, polonaises, nocturnes, waltzes, mazurkas, concertos, and others. In 1989, he recorded Busoni's five movement Piano Concerto in C major, Op. 39 with the Cleveland Orchestra under Christoph von Dohnányi.


다수 녹음들 중에서도 소나타, 전주곡, 연습곡, 발라드, 론도, 스케르초, 변주곡, 폴로네즈, 녹턴, 왈츠, 마주르카, 협주곡 등 쇼팽 피아노 전곡 조사에 착수. 1989년 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의 지휘로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와 함께 5악장 구성의 부조니 피아노 협주곡 녹음.


Mr. Ohlsson can be heard on the Arabesque, RCA Victor Red Seal, Angel, BMG, Delos, Hänssler, Nonesuch, Telarc, Hyperion and Virgin Classics labels. His ten-disc set of the complete Beethoven sonatas, for Bridge Records, has garnered critical acclaim, including a GRAMMY® for Vol. 3. His recording of Rachmaninoff’s Concerto No. 3, with the Atlanta Symphony and Robert Spano, was released in 2011. In the fall of 2008 the English label Hyperion re-released his 16-disc set of the complete works of Chopin followed in 2010 by all the Brahms piano variations, "Goyescas" by Enrique Granados, and music of Charles Tomlinson Griffes. Most recently on that label are Scriabin's Complete Poèmes and ètudes by Debussy, Bartok and Prokofiev. The latest CDs in his ongoing association with Bridge Records are "Close Connections", a recital of 20th-Century pieces, and two CDs of works by Liszt. In recognition of the Chopin bicentenary in 2010, Mr. Ohlsson was featured in a documentary "The Art of Chopin" co-produced by Polish, French, British and Chinese television stations. Most recently, both Brahms concerti and Tchaikovsky's second piano concerto were released on "live" performance recordings with the Melbourne and Sydney Symphonies on their own recording labels, and Mr. Ohlsson was featured on Dvorak's piano concerto in the Czech Philharmonic's live recordings of the composer's complete symphonies & concertos, released July of 2014 on the Decca label.


아라베스크, RCA 빅터 레드 실, 앤젤, BMG, 델로스, 핸슬러, 넌서치, 텔락, 하이페리언, 버진 클래식스 레이블에서 녹음.

베토벤 소나타 전곡 녹음은 그래미 상을 받은 3집 음반을 포함하여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2008년 가을, 잉글랜드 레이블 하이페리언에서 쇼팽 작품 전집 16장 재발매.

2010년 브람스 피아노 변주곡 전곡, 엔리케 그라나도스의 고예스카스, 찰스 톰린슨 그리프스의 음악 녹음.

2010년 쇼팽 탄생 200주년으로 폴란드, 프랑스, 영국, 중국 방송국 합작 다큐멘터리 <쇼팽의 예술>에서 연주.

2011년 로버트 스파노의 지휘로 애틀랜타 심포니와 협연한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3번 음반 발매.

스크리아빈의 포엠 전곡 및 드뷔시, 바르톡, 프로코피에프 에튀드 녹음.

브리지 레코드와의 지속적인 관계인 최근 음반들로는 20세기 작품 리사이틀인 <클로즈 커넥션스> 및 리스트 작품을 녹음한 두 장의 음반이 있다.

멜버른 및 시드니 심포니와 협연한 브람스 협주곡들과 차이코프스키 2번 협주곡 모두 실황 연주 녹음이 그들의 소속 레이블에서 발매.

체코 필하모닉의 작곡가의 교향곡 및 협주곡 전곡 실황 녹음에서의 드보르작 피아노 협주곡 연주는 2014년 7월, 데카 레이블에서 발매.



A 2003 profile in the New York Times by James Oestreich mentioned that Ohlsson lives in San Francisco with his companion, Robert Guter, an historic preservationist. While Ohlsson doesn't like being labelled solely as a gay pianist, he doesn't pretend to be otherwise. He is out and proud, and “I'm no coward,” he says.


제임스 외스트라이히에 의해 뉴욕 타임스에서 2003년 프로필은 올슨이 그의 동반자인 역사 환경 운동가 로버트 구터와 함께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음을 언급했다. 올슨은 게이 피아니스트로만 표시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렇지 않은 척하지 않는다. 그는 대놓고 자랑하고, “나는 겁쟁이가 아니라고” 말한다.


No coward, indeed. As proof, in 2013, Ohlsson released Close Connections, a disc on which most of the music was written by gay male composers. I received this album as a Christmas gift, and I’m embarrassed that I’m just now listening to it (sorry, Rob!). It contains Triptych (1969), a solo piano piece by Louis Weingarden (1943-1989) written for Ohlsson. Weingarden also wrote a piano concerto (1974) for Ohlsson, and that composition was nominated for the Pulitzer Prize in 1977. Weingarden and Ohlsson were good friends, even roommates for a time. Also on this disc is Handwork, a piece for solo piano commissioned by Ohlsson in 1986, written by gay composer William Hibbard (1939-1989). Robert Helps (1928-2001), another gay composer, is represented by the solo piano composition “Shall We Dance”.


정말 겁쟁이가 아니다. 그 증거로 2013년에 올슨은 게이 작곡가들의 작품을 녹음한 <클로즈 커넥션스> 음반을 발매했다. 나는 이 앨범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았고, 내가 지금 그것을 듣고 있는 것에 당황했다. (미안해, 로버트!) 그것은 올슨을 위해 루이 웨인가든(1943~1989)이 작곡한 <트립틱>(1969)을 포함한다. 웨인가든은 또한 올슨을 위해 <피아노 협주곡>(1974)을 작곡했고, 1977년 퓰리처 상 후보에 올랐다. 웨인가든과 올슨은 좋은 친구이고 한동안 룸메이트였다. 또한 이 디스크에는 게이 작곡가 윌리엄 히버드(1939~1989)가 올슨의 위촉으로 작곡한 독주 피아노 작품 <핸드워크>(1986)가 있다. 로버트 헬프스(1928~2001)는 또 다른 게이 작곡가로 독주 피아노 작품 <쉘 위 댄스>가 대표적이다.



Awards

1966 - 18th Busoni International Piano Competition in Bolzano, Italy 1st prize / 이탈리아 볼차노 제18회 부조니 국제피아노콩쿠르 1위

1968 - 4th Montreal International Musical Competition in Canada 1st prize / 캐나다 제4회 몬트리올 국제음악콩쿠르 1위

1970 - 8th Chopin International Piano Competition in Warsaw, Poland 1st prize, Gold Medal and Polish Radio Prize for the Best Performance of Mazurkas / 폴란드 바르샤바 제8회 쇼팽 국제피아노콩쿠르 1위, 금메달 및 마주르카 특별상

1994 - Avery Fisher Prize / 에이버리 피셔 상

1998 - University Musical Society Distinguished Artist Award in Ann Arbor, Michigan (USA) / 미국 미시건 주 앤아버 시 대학음악협회 "두각을 나타낸 연주자"상

2008 - Grammy Award for Best Instrumental Soloist Performance (without Orchestra) for his Beethoven Sonatas, Vol. 3 (Bridge Records, Inc.) / 베토벤 소나타 3집 음반(브리지 레코드 발매)으로 그래미 상 최우수 기악 독주 부문 수상 (2월)

2014 - Jean Gimbel Lane Prize in Piano Performance from the Northwestern University Bienen School of Music / 노스웨스턴 대학교 비에넨 음악학교로부터 피아노 연주로 "장 짐벨 레인" 상








Eumyeon Piano Magazine (May 2004) Interview with Garrich Ohlsson in Paris (30 March 2004)

순수하고 자유로움에서 오는 행복함

‘브람스 협주곡 1번은 오케스트라와 피아노가 매우 무겁게 쓰여졌고, 피아니스트에게 투쟁을 요하는 작품이다. 1악장의 주요 주제는 오케스트라와 피아노 사이의 커다란 투쟁이다. 2악장은 매우 정신적이며, 숭고하다. 3악장은 우선 너무 빠르지 않게 연주해야 한다. 너무 빠르게 연주하면 화성적인 진행감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 음악평론가 김동준 글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진행된 쿠르트 마주어의 브람스 전곡 연주 프로젝트 피아니스트로 개릭 올슨이 초대되었다. 4월 1일과 2일 이틀 동안 개릭 올슨은 쿠르트 마주어가 지휘하는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와 두 곡의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했다. 첫날 연주에서는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1번 d단조’를 교향곡 다음에 연주하는, 그러니까 협주곡을 마지막으로 연주하는 다소 이례적인 구성을 보여주었다.


개릭 올슨은 음반을 통해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실황 연주의 생생함과 흥분감을 느끼게 했다. 브람스 협주곡 1번에서는 곡의 웅장함과 고통스러운 투쟁에서 승리하는 모습을, 그리고 협주곡 2번에서는 실내악적인 구성의 요소가 많은 이 작품을 뛰어나게 아름답게 연주했다. 특히 둘째 날 협주곡 2번에서는 연주자의 의식이나 의지가 느껴지지 않는, 마치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자유로운 연주를 들려주어 음악을 듣는다는 행위의 순수한 행복감을 느끼게 했다.


- 당신은 현재 뉴욕에서 살고 있는가.


아니다. 현재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살고 있다. 뉴욕에서 태어나서 오랫동안 살았지만 지금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살고 있다.


- 파리에서는 자주 연주를 하는가.


자주 연주를 하는 편은 아니다. 1970년대와 80년대에 파리에서 연주를 자주 했었는데, 그 이후에는 파리에서 자주 연주를 할 기회가 없었다. 쇼팽 전곡 연주를 뉴욕 · 토론토 · 런던에서 했는데, 런던에서 전곡 연주를 마치고 나서 파리의 살 가보에서도 전곡 연주를 했다.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와의 연주도 이번이 처음이다. 연주 경력은 각각의 피아니스트들이 각 국가나 도시마다 다르게 쌓아가게 된다.


- 언제 처음으로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했는가.


우선 협주곡 1번 d단조를 1971년에 처음으로 연주했다. 그리고 협주곡 2번을 1973년에 처음으로 연주했다.


-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을 처음 연주한 이후 당신의 해석은 어떻게 변모되었는가.


많은 것이 변했다. 젊은 시절에는 두 협주곡에 대해서 아주 잘 알지는 못했다. 두 개의 협주곡은 서로 매우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우선 첫 번째 협주곡을 나는 클라우디오 아라우의 제자였던 올가 바라비니와 매우 집중적으로 공부했고, 연주할 준비가 잘 되었었다. 그래서 여러 오케스트라와 연주를 했고, 피아니스트로서 나의 경력을 쌓아나갈 수 있었다. 그래서 브람스의 협주곡 2번도 공부했고, 연주하기 시작했다. 1973~1974년에는 클라우디오 아라우와 직접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아라우는 작품에 대한 해석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들에 대해서 많은 조언을 해주었고 나에게 커다란 도움이 됐다. 그러면서 작품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도 자연스럽게 변해갔다. 협주곡 1번의 경우는 당시 뉴욕 필하모닉을 지휘하는 쿠르트 마주어와 함께 연주하면서도 해석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다. 쿠르트 마주어와는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투어를 했던 일도 있었다. 그리고 브람스 협주곡을 함께 연주했던 지휘자 가운데는 루돌프 켐페가 기억나며, 클라우스 텐슈테트와의 연주도 잊을 수가 없다. 함께 연주를 한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음악에 대한 열정과 감정을 나눌 수가 있다. 그런 면에서 나는 함께 연주한 위대한 지휘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브람스의 두 개의 협주곡의 문제는 매우 다르다. 우선 협주곡 1번은 오케스트라와 피아노가 매우 무겁게 쓰여졌고, 피아니스트에게 투쟁을 요하는 작품이다. 예를 들면 1악장의 주요 주제는 오케스트라와 피아노 사이의 커다란 투쟁이다. 2악장은 매우 정신적이며, 숭고하다. 3악장은 우선 너무 빠르지 않게 연주해야 한다. 너무 빠르게 연주하면 화성적인 진행감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브람스의 협주곡 3악장을 연주할 때에 편안함을 느낀다. 왜냐하면 나의 손에 잘 맞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피아노 작품들이 나의 손에 잘 맞는 것은 아니다. 협주곡 2번의 문제점은 1번과는 매우 다르다. 분명히 2번 협주곡은 1번 협주곡에 비해서 가볍게 쓰여졌다. 그러나 3도 · 6도의 진행 등 해결해야 하는 다른 어려움이 있다. 그리고 오케스트라와 실내악적인 조화를 이루어야만 한다.


- 이번 연주 이전에 쿠르트 마주어와 함께 연주했던 연주회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다.


나는 이미 쿠르트 마주어와 브람스의 두 곡의 협주곡을 연주했다. 첫 번째 연주회는 1980년 라이프치히에서였다. 쿠르트 마주어와 처음으로 연주했던 곡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이었고, ‘리스트의 협주곡 1번’을 그 다음으로 함께 연주했다. 그 이후에 쿠르트 마주어와 함께 뉴욕 · 부에노스아이레스 등의 투어를 함께 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라이프치히에서 하루 저녁에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2곡을 연주했다. 그 이후에도 다시 뉴욕과 런던 등에서 브람스의 협주곡과 다른 작곡가의 협주곡을 함께 연주하고 나서 브람스의 협주곡을 녹음했다. 쿠르트 마주어와 함께 연주하는 일은 커다란 즐거움이다.


- 협주곡을 연주할 때에 당신이 생각하는 좋은 지휘자는 어떤 지휘자인가.


좋은 지휘자는 많이 있다. 우선 브람스의 협주곡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진정으로 교향곡을 잘 지휘하는 지휘자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브람스 협주곡은 정말로 교향곡적인 구성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우선 쿠르트 마주어의 이름을 들어야겠다. 그리고 볼프강 자발리쉬와 함께 브람스를 연주하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그가 지휘한 작품 대부분을 좋아한다. 유진 오먼디 역시 훌륭한 지휘자이다. 오자와 세이지 역시 뛰어난 지휘자이다. 그는 유연함을 갖춘 지휘자이다. 지휘자는 독주자에게 봉사하는 사람이 결코 아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음악에 봉사하는 사람일 뿐이다. 간혹 음악적으로 비논리적인 피아니스트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지휘자는 독주자의 연주를 들을 줄 알아야 하고 함께 의논할 수 있어야 한다. 젊은 지휘자와 연주할 때 그 지휘자가 나의 연주를 듣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한다. ‘마에스트로, 나는 당신을 따라가야만 하고, 그렇게 할 수도 있소.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는 함께 음악을 만들어야 하오.’


공동 작업이라는 개념은 분명히 어느 한쪽이 명령을 하고, 어느 한쪽이 따라가는 것은 아니다. 함께 춤을 출 때에 리드를 하는 쪽은 분명히 어느 한쪽만은 아니다. 나의 음악적인 아이디어를 이해하고, 나 역시 지휘자의 음악적인 아이디어를 이해할 수 있다면 가장 좋다. 물론 가끔 그렇지 못할 경우도 있다. 그리고 서로 의견이 같지 않더라도 나는 좀 더 유연한 자세로 임한다. 시간이 많지 않을 경우 서로 싸우는 것은 음악을 위해서는 나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주는 아니지만 간혹 정말로 좋아할 수 없는 지휘자를 만났을 경우에는 연주를 마치고 감사의 인사를 하지만, 절대로 다시는 함께 연주하지 않는다. 나는 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 1970년 바르샤바 쇼팽 콩쿠르에서의 우승(*개릭 올슨은 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바르샤바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이 당신의 삶을 바꾸어놓았는가? 그리고 동시에 쇼팽(*개릭 올슨은 최근 뉴욕 링컨 센터 등에서 쇼팽의 피아노 작품 전곡을 연주)은 당신이 가장 열정을 갖고 있는 작곡가인 것으로 알고 있다.


분명히 그렇다.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하기 전에도 나는 미래가 밝은 젊은 피아니스트였고, 계속해서 연주회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쇼팽 콩쿠르가 있었던 1970년에는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도 있었다.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는 바흐 · 모차르트 · 리스트 · 차이코프스키 등 모든 작품을 연주해야 하는 콩쿠르이다. 나는 이미 이전에 부조니와 몬트리올 콩쿠르에서 우승을 한 상태였기에, 마라톤 콩쿠르 같은 차이코프스키보다는 쇼팽 콩쿠르를 택했다. 쇼팽 콩쿠르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쇼팽만을 연주하면 되기 때문이었다. 콩쿠르에 나갈 때에 결코 ‘나는 이겨야만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항상 자신보다 뛰어난 피아니스트는 존재하고 또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나는 이기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낫다.


당시 나는 쇼팽 콩쿠르와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사이에서, 쇼팽 콩쿠르는 이기지 못하더라도 분명 음악적으로 중요한 경험이 될 것 같았기 때문에 쇼팽 콩쿠르를 택했다. 바르샤바 쇼팽 콩쿠르 우승을 통해서 나는 전 세계 주요 도시에 데뷔할 수가 있었고, 콘서트 피아니스트로서 경력을 쌓아갈 수 있었다. 뉴욕 · 런던 · 도쿄 · 파리 등의 당시 모든 연주회는 매진되었고, 사람들이 나에게 ‘우리들은 당신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다. 당신은 중요한 예술가 가운데 한 명이다’라고 말했다. 물론 나는 아직 젊었다.


쇼팽은 내 평생 동안 열정을 기울이고 있는 작곡가 가운데 한 명이다. 쇼팽 콩쿠르 역시 쇼팽에 대한 나의 이해를 깊어지게 했다. 쇼팽 콩쿠르를 위해서 피아노 소나타 가운데 한 곡, 협주곡 가운데 한 곡 등의 주요 작품을 포함해서 다양한 쇼팽의 작품들을 연주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나는 모든 소나타와 협주곡을 공부했다. 쇼팽에 완전히 미쳤었기 때문이었다. 우승을 했을 때 많은 기자들이 나에게 쇼팽의 작품들이 당신을 지치게 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 반대였다. 콩쿠르 동안에도 쇼팽을 연주할수록 쇼팽에 대한 열정이 커져갔다. 그의 피아노 작품들은 정말로 뛰어나기 때문이다. 콩쿠르 이후에 나는 쇼팽을 더 자주 연주했고, 결국 쇼팽의 모든 피아노 작품들을 녹음했다. 좋은 연주를 위해서는 경험이 필요하며, 그 작품과 함께 살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나는 운 좋게도 쇼팽 해석에 관해 뛰어난 스승들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가 있었다. 우리들 피아니스트들은 쇼팽의 작품들을 통해서 피아니스트로 성숙할 수가 있는 것이다.


- 당신의 쇼팽 해석에 관해서 가장 영향을 준 피아니스트는 누구인가.


우선 내가 어렸을 적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호로비츠와 루빈스타인이었다. 나는 호로비츠와 루빈스타인의 연주회에 무척 많이 갔었다. 당시 나는 10대였는데, 이 두 피아니스트의 연주가 가장 흥미로웠다. 두 피아니스트는 서로 너무나 달랐다. 루빈스타인은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귀족적이며 아름다운 소리를 지니고 있었고, 마치 오후의 햇살 같았다. 그러나 호로비츠는 창백하고 흥미로우며 관능적이고 밤의 불빛 같았고 악마 같았다. 그리고 간혹은 미치광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당시 나는 이 두 피아니스트의 연주회를 들으며 두 명의 피아니스트는 완전히 다른데 어떻게 둘 다 위대한 피아니스트로 존재할 수가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러한 방식의 질문은 지금의 젊은 피아니스트들에게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특히 쇼팽의 작품 해석에 관해서는 말이다. 쇼팽은 베토벤처럼 건축적이기만 한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루빈스타인과 호로비츠의 쇼팽 해석에 과연 어떠한 공통점이 존재하는지 많은 생각을 해보았었다. 물론 나는 당시 뛰어난 젊은 피아니스트였던 아쉬케나지나 길렐스 · 리흐테르와 같은 거장 피아니스트의 연주회도 많이 들었다. 라흐마니노프의 쇼팽 연주도 매우 흥미롭고 아름다웠다. 나는 많은 피아니스트들의 쇼팽 해석의 전통을 이해하게 됐다. 몇몇 프랑스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도 나에게 커다란 흥미를 주었다. 아무튼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쇼팽 해석에 대해서 내가 이해한 것은 매우 간단한 것이었다. 그것은 쇼팽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는 반드시 마술적인 무엇인가를 작품에 부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색채이든 향기이든, 그런 특별한 요소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바흐적인 구조가 상실되어 있는 쇼팽은 더더욱 끔찍하다. 단순히 음악적인 구조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리고 단순한 색채만으로 작품을 해석하려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쇼팽은 가장 고전적인 동시에 낭만적인 작곡가였고, 또한 가장 낭만적이면서 고전적인 작곡가이다. 그렇기에 그러한 요소들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빠지게 된다면 쇼팽의 작품 해석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 당신이 생각하는 위대한 해석은 어떤 것인가.


나는 행운아이다. 단지 커다란 손을 타고났을 뿐만 아니라 어렸을 적부터 피아노를 연주하기에 아무런 저항감이나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신경에 관련된 부분도 피아노 연주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연주를 듣고 나서는 ‘당신처럼 커다란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섬세하게 연주할 수 있는지요’라고 말하는 것을 종종 듣기도 한다.


위대한 해석을 한다는 것은 우선 악보를 정확하게 연주하는 데서 출발한다. 연주상의 어려움을 잘 해결하고 작품의 특성들을 지키는 것 역시 악보를 정확하게 연주하는 것에 속한다. 단지 아름답게 연주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가 않다. 작품과 함께 살아야 하며, 마치 연기를 하는 배우와 같아야 한다. 위대한 연기자는 서로 다른 희곡들을 다르게 연기한다. 루빈스타인이 브람스를 연주할 때에 마치 베토벤을 연주하는 것처럼 소리를 내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간혹 연주를 통해서 청중과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설명하기 힘든 기적과 같은 일은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내가 음악을 연주하면서 추구하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푸르트뱅글러는 브람스의 교향곡을 실황으로 많이 녹음했는데, 그의 지휘는 정말로 훌륭하다. 특히 1952년의 그의 브람스 교향곡 실황 녹음은 나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물론 내가 푸르트뱅글러가 본 것과 같은 것을 보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위대한 작품은 그 자체로 위대하지만, 푸르트뱅글러와 같이 강렬한 인격의 소유자는 마치 자신이 작곡가인 것처럼 작품을 바라보며 해석한다. 그것은 단순히 음악적인 구조를 꿰뚫고 있다고 해서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는 브람스 교향곡은 무엇인가 다른 것으로 바꾸어놓았다. 나에게 있어 위대한 해석이란 이러한 것이다. 물론 다른 스타일을 지닌 다른 지휘자도 푸르트뱅글러와 같은 위대한 해석을 할 수 있다. 결국 해석이란 이러한 방식도 또 다른 방식도 가능한 것이며, 언제나 가능성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호로비츠와 루빈스타인은 서로 너무나 다르지만 그 둘은 모두 위대한 피아니스트이자 위대한 해석자였다. 베토벤 소나타에 있어서 리흐테르 · 길렐스 · 아라우 이들은 모두 다르게 연주했지만 모두 위대한 해석자였다. 그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이다. 결국 위대한 해석을 이루는 요소들을 설명한다는 것은 어려운 질문이다.


- 당신은 젊은 피아니스트들의 연주회를 들으러 종종 가곤 하는가.


솔직히 나는 다른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를 들을 기회가 많지 않다. 나는 늘 연주를 위해서 여행을 하는데, 예를 들어 이번 파리 일정도 연습과 오케스트라와의 리허설로 바쁜 가운데, 오늘 저녁에는 자유시간이 있지만 다른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들으러 가고 싶지는 않다(웃음). 그러나 만일 시간이 허락된다면 내가 흥미를 가지고 있는 피아니스트들, 예를 들어 안드라스 쉬프 ·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 라두 루푸 등의 연주회에는 가고 싶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피아노 연주회를 피해서 현악4중주나 오페라 연주회에 갈 것이다.


- 과거와는 달리 국제 콩쿠르의 수가 매우 많고, 콩쿠르를 통해서 자신을 알리려는 젊은 피아니스트의 수 역시 매우 많아지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서 당신은 어떠한 생각을 갖고 있는가.


국제 콩쿠르에서 1등을 한다는 것은 매우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출발일 뿐이다. 또 다른 어려움은 요즘은 국제 콩쿠르의 수가 너무나 많고, 경쟁이 너무나 치열하다는 것이다. 내가 젊었을 때에도 어려움은 있었지만, 요즘의 젊은 피아니스트들이 더 힘들고, 경쟁이 치열하다. 내가 바르샤바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했을 당시에는 3개의 국제 콩쿠르, 그러니까 쇼팽 콩쿠르와 퀸엘리자베스 콩쿠르,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정도가 있었다. 물론 밴 클라이번 콩쿠르와 리즈 콩쿠르 등이 점점 성장하고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요즘에는 각 주요 도시마다 국제 콩쿠르가 있고, 해마다 누가 우승을 했는지조차도 알기가 어렵다. 이 이야기가 유용할지는 모르겠지만, 간혹 콩쿠르 심사를 하게 될 경우 나는 젊은 피아니스트들을 격려하려고 노력한다. 한 번은 공연 기획과 관련된 사람이 나에게 와서 어떤 젊은 피아니스트에 대해서 ‘그가 천재인가?’라고 물었을 때에, 나는 ‘재능이 무척 많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저런, 요즘은 모두가 천재이다’라고 답했다(웃음).


나는 그 얘기를 듣고 나 자신에게 같은 질문을 던져 보았다. 분명히 콩쿠르는 국제적인 경력을 쌓게 해주지만, 그렇게 경력을 쌓아가는 동안에 여러 가지 스트레스를 극복하면서 음악적으로도 성장해갈 수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면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신동이라고 하더라도 곧 잊히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바이올린 분야에서 더욱 두드러지는 것 같다. 뛰어난 젊은 피아니스트들은 16세이면 이미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연주를 시작한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신동이라 하더라도 매일 저녁 완벽하게 연주할 수는 없는 일이다. 청중은 그들의 연주를 한두 번 듣고는 곧 새로운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를 들으러 갈 것이다. 물론 완벽하고 뛰어난 연주를 하는 젊은 연주자들의 연주를 들으면 흥분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17세의 나이에 믿을 수 없는 연주를 하는 피아니스트들이 존재하는 것이 바로 오늘날이다. 그러나 그의 나머지 인생이 음악적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음악과 함께 성장하고 성숙해지기가 힘든 것이 또한 현실이다.


- 당신은 학생들을 지도하는가.


가르치는 일은 하고 있지 않다. 간혹 공개나 비공개적인 마스터클래스를 하는 경우는 있지만 정기적으로 가르치는 일은 하고 있지 않다. 나는 석 달에 한 번 두 시간 정도의 레슨을 해주는 그런 선생이 되고 싶지는 않다. 가르친다는 일은 커다란 책임이 요구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 이 인터뷰는 3월 30일 파리의 라디오 프랑스 홀에서 이루어졌다.


음연 피아노 잡지 2004년 5월호에 나오는 인터뷰는 내가 돈을 주고 산 정보이다.

2019년 1월 4일 금요일

Russian Pianist - Valery Kamyshov


http://allpianists.ru/kamyshov.html

Valery Konstantinovich Kamyshov (Валерий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Камышов) was born on 22 June 1943 in Fergana, Uzbekistan. He studied with Yakov Flier at the Moscow Conservatory, graduating in 1966. He was also Flier's post-graduate student till 1968.

발레리 콘스탄티노비치 카미쇼프는 1943년 6월 22일 우즈베키스탄 페르가나에서 태어났다.
1966년까지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야코프 플리에르 사사.
1968년까지 대학원에서도 플리에르 사사.

1961 - All-Union Competition 2nd prize / 전소련 콩쿠르 2위
1962 - 2nd Tchaikovsky International Music Competition in Moscow, Russia 5th prize / 러시아 모스크바 제2회 차이코프스키 국제음악콩쿠르 5위
1968 - Queen Elisabeth International Music Competition in Brussels, Belgium 2nd prize / 벨기에 브뤼셀 퀸엘리자베스 국제음악콩쿠르 2위

정보가 워낙 없다.

2018년 11월 3일 토요일

American Pianist - Andrew Tyson


http://www.andrewtysonpiano.com
https://ko-kr.facebook.com/andrewtysonpiano/
http://www.yca.org/artist/andrew-tyson/
https://styriarte.com/en/artists/andrew-tyson/

Profile
Andrew Tyson was born on 19 December 1986 in Durham, North Carolina. He started studying music seriously "rather late," at 15, a tender age in most professions but one that confers late-bloomer status in the classical music world. He has said that this late start resulted in a struggle with some technical matters. He made his orchestral debut at the age of 15 at the Eastern Music Festival with the Guilford Symphony Orchestra as winner of the festival's concerto competition. He studied with Dr. Thomas Otten of the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He earned his Bachelor's degree from the Curtis Institute of Music working with Claude Frank in 2010. He later earned his Master's degree and Artist Diploma at The Juilliard School with Robert McDonald.

앤드류 타이슨은 1986년 12월 19일 노스캐롤라이나 주 더럼에서 태어났다.
클래식 음악계에서 늦게 꽃이 피는 상태를 제외하고 대부분 어린 나이에 전문적으로 공부하지만, 15세에 “오히려 늦게” 진지하게 음악을 공부하기 시작.
그는 이 늦은 시작이 몇 가지 기술적인 문제들과의 투쟁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15세에 길포드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이스턴 음악제에서 이 페스티벌의 협주곡 콩쿠르 우승자로서 오케스트라 데뷔.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에서 토머스 오텐 박사 사사.
커티스 음대에서 클로드 프랑크를 사사하고 2010년 졸업 및 학사 학위.
줄리아드 음대에서 로버트 맥도널드 사사, 석사 학위 및 연주자 과정.

He has appeared in concerts throughout the United States, in Puerto Rico, Mexico, Portugal, Belgium, Luxembourg, Paris, Valencia, Berlin, Copenhagen and Warsaw. He is the recipient of many awards, including both the Festorazzi Award for Piano and the Edward Aldwell Award for Excellence in Musical Studies from The Curtis Institute of Music.

미국, 푸에르토리코, 멕시코, 포르투갈, 벨기에, 룩셈부르크, 파리, 발렌시아, 베를린, 코펜하겐, 바르샤바에서 콘서트.
페스탈로치 피아노 어워드 수상.
커티스 음대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에드워드 앨드웰 어워드 수상.

He is emerging as a distinctive and important new musical voice. He is consistently recognized for his commanding and expressive performances, replete with imaginative interpretations and exceptional artistry. A 2013 Avery Fisher Career Grant recipient, Mr. Tyson returns to the UK this season, performing in chamber music concerts with the Hallé Soloists in Leeds and Birmingham, giving solo recitals in Leeds and Manchester, and appearing as soloist for the third time with the Hallé Orchestra in Manchester, Hanley, and Blackburn. He has also been re-engaged to perform with the Chamber Orchestra of the Triangle and at Rockefeller University, and appears with the North Carolina Symphony and Omaha Symphony. His recital appearances include the Buffalo Chamber Music Society, Alys Stephens Performing Arts Center, Musiekzentrum de Bijloke Gent, Palais des Beaux-Arts in Brussels, the Morgan Library and Museum, and the University of Georgia, as well as performances in Azerbaijan, Estonia, Latvia, and Lithuania.

독특하고 중요한 새로운 음악적인 목소리로 부상하고 있다.
창의적인 해석과 뛰어난 예술성이 충만한 위풍당당하고 표현적인 연주로 꾸준히 인정받고 있다.
2013 에이버리 피셔 경력 발전상 수상.
영국을 재방문해서 리즈와 버밍엄에서 할레 솔로이스츠와 실내악 콘서트.
리즈와 맨체스터에서 독주회.
맨체스터, 핸리, 블랙번에서 할레 오케스트라와 3회 협연.
트라이앵글 실내 오케스트라의 협연 및 록펠러 대학교에서의 연주 재계약.
노스캐롤라이나 심포니, 오마하 심포니와 협연.
아제르바이잔,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서 연주했을 뿐만 아니라 버팔러 실내악 협회, 에일리스 스티븐스 공연예술센터, 헨트 베일로케 음악센터, 브뤼셀의 팔레 데 보자르, 모건 도서관 및 박물관, 조지아 대학교에서 리사이틀.

Chamber music has also been an important part of his life. He attended the Taos School of Music and worked closely with the Borromeo, Brentano and St. Lawrence String Quartets. He has also performed with artists including violist Roberto Díaz, cellist Ralph Kirshbaum, violinist Joseph Silverstein and Ray Chen. He has toured New Zealand with MELERensemble, a piano quartet. He appeared in Europe with violinist Benjamin Beilman and cellist Jeong-Hyoun Lee in venues including the Auditorium du Louvre, Paris and London's Wigmore Hall. In June 2010 he participated in a two week tour of Europe as a part of "Curtis on Tour" performing with violinist Pamela Frank.

실내악도 그의 인생에서 주요한 부분이다.
타오스 음악학교에 참가해서 보로메오 스트링 콰르텟, 브렌타노 스트링 콰르텟, 세인트 로렌스 스트링 콰르텟과 협연.
비올리스트 로베르토 디아스, 첼리스트 랄프 커쉬바움, 바이올리니스트 조셉 실버스타인, 레이 첸을 포함한 포함한 아티스트들과도 협연.
피아노 콰르텟 멜레앙상블과 함께 뉴질랜드 투어.
유럽에서는 파리 루브르 강당과 런던 위그모어 홀을 포함하는 공연장에서 바이올리니스트 벤저민 베일만, 첼리스트 이정현과 함께 출연.
2010년 6월 바이올리니스트 파멜라 프랭크와 협연하면서 <커티스 온 투어>의 일부로서 유럽에서의 2주일 투어 참가.

A Laureate at the 2012 Leeds International Piano Competition, Mr. Tyson also picked up the new Terence Judd-Hallé Orchestra Prize, awarded to the pianist chosen by the orchestra and conductor Sir Mark Elder.  This Prize brought an engagement with the Hallé Orchestra, which was so acclaimed that he was re-engaged the following three seasons, including three performances of three different concertos in 2017.

2012 리즈 국제피아노콩쿠르 입상자인 그는 신설된 상인 테렌스 주드-할레 오케스트라 특별상을 받았다. 오케스트라와 지휘자 마크 엘더 경에 의해 선정된 피아니스트에게 수여하는 이 상으로 극찬 받아서 할레 오케스트라와 계약했고, 2017년까지 3회의 다른 협주곡 연주를 포함하는 차기 세 시즌 재계약으로 이어졌다.

In 2013, he gave his New York recital debut in the Rhoda Walker Teagle Concert at Merkin Hall and his Washington DC debut at the Kennedy Center's Terrace Theater.

2013년 머킨 홀의 로다 워커 티글 콘서트에서 뉴욕 리사이틀 데뷔 및 케네디 센터 테라스 극장에서 워싱턴 DC 데뷔.

He is represented on disc by the complete Chopin Preludes which was released in October 2014 on the Zig-Zag Territoires label to critical acclaim with further discs planned.

2014년 10월 쇼팽 전주곡들을 지그재그 테리토리 레이블과 함께 음반에 실었으며, 다음 음반 작업도 활발히 진행.

In summer 2015, he was awarded First Prize at the Géza Anda Competition in Zürich, as well as the Mozart and Audience Prizes. These victories result in performances of upwards of 100 concerts throughout Europe over the course of the next three years under the auspices of the Géza Anda Foundation. In 2015, he appeared in Russia performing Mozart's Concerto No. 25 with the Moscow Virtuosi Chamber Orchestra and Vladimir Spivakov.

2015년 여름 취리히의 게자 안다 콩쿠르에서 1위를 수상함과 동시에 모차르트 상, 청중상을 모두 휩쓸며 화려한 수상 경력의 시작을 알렸다.
이번 수상을 계기로 게자 안다 재단에서 지원하여 3년 동안 약 100회의 공연을 유럽 전역에서 펼치게 된다.
2015년 러시아에서 블라디미르 스피바코프의 지휘로 모스크바 비르투오시 실내 오케스트라와 함께 모차르트 협주곡 25번 협연.

His busy 2016-2017 season brings him recital and concerto performances around the globe, in the United Kingdom, Switzerland, Germany, France, Croatia, Russia, and throughout Australia in a duo recital tour with violinist Benjamin Beilman in the Music Viva Festival. Highlights of his solo recitals abroad include Wigmore Hall, Lucerne Piano Festival, Beethovenfest in Bonn, International Music Festival of Colmar, and the Dubrovnik Festival. He also appears as soloist with the Bern Symphony Orchestra, the Royal Philharmonic Orchestra of Liège, and NDR Radiophilharmonie in Hannover. He appears in the US at Carnegie's Weill Recital Hall, as winner of Juilliard's prestigious Leo B. Ruiz Memorial Recital, as well as at Lincoln Center's Mostly Mozart Festival, Merkin Concert Hall, the Artist Series Concerts of Sarasota, SILL (Sarasota Institute of Lifetime Learning) Music Mondays, FPC (First Presbyterian Church) Concerts, and as soloist with the Louisville Orchestra and the Owensboro Symphony.

2016~2017 시즌은 전 세계에 걸쳐 영국, 스위스, 독일, 프랑스, 크로아티아, 러시아에서 리사이틀과 협주곡 연주로 바쁘다.
오스트레일리아 무지카 비바 페스티벌에서 바이올리니스트 벤저민 베일만과 함께 듀오 리사이틀 투어.
위그모어 홀, 루체른 피아노 페스티벌, 본 베토벤 페스티벌, 콜마르 국제 음악제, 두브로브니크 페스티벌을 포함하여 해외에서 독주회.
베른 심포니 오케스트라, 리에주 왕립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하노버 NDR 라디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
링컨 센터의 모스틀리 모차르트 페스티벌, 머킨 콘서트홀, 새러소타의 아티스트 시리즈 콘서트, 새러소타 평생학습연구소의 월요 음악회, 제1장로교회 콘서트 시리즈뿐만 아니라 줄리아드 음대의 권위 있는 레오 루이즈 기념 리사이틀 수상자로서 카네기홀의 바일 리사이틀 홀에 출연.
루이스빌 오케스트라, 오언즈버러 심포니와 협연.

Orchestras
Durham Symphony in North Carolina / 노스캐롤라이나 주 더럼 심포니
Raleigh Symphony in North Carolina / 노스캐롤라이나 주 롤리 심포니
Chapel Hill Philharmonia in North Carolina / 노스캐롤라이나 주 채플힐 필하모니아
Old York Road Symphony in Pennsylvania / 펜실베이니아 주 올드 요크 로드 심포니
Frost Symphony Orchestra of the University of Miami / 마이애미 대학교 프로스트 심포니 오케스트라
Chamber Orchestra of the Triangle in North Carolina / 노스캐롤라이나 주 트라이앵글 실내 오케스트라
Orchestra of St. Luke's at Alice Tully Hall / 앨리스 툴리 홀에서 세인트루크 오케스트라
Colorado Symphony / 콜로라도 심포니
Hilton Head Symphony / 힐턴 헤드 심포니
National Orchestra of Belgium under Marin Alsop / 벨기에 국립 오케스트라 (마린 올솝 지휘)
Orchestre Royal de Chambre de Wallonie / 왈로니아 왕립 실내 오케스트라
Edmonton Symphony Orchestra in Canada / 캐나다 에드먼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Las Vegas Philharmonic / 라스베가스 필하모닉
SWR Symphony Orchestra Stuttgart / 슈투트가르트 SWR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North Carolina Symphony / 노스캐롤라이나 심포니

Festivals
Brevard Music Festival / 브레바드 음악제
Festival de Sintra in Portugal / 포르투갈 신트라 페스티벌
Festival Cultural de Mayo in Guadalajara, Mexico / 멕시코 과달라하라의 마요 문화제
Brussels Piano Festival / 브뤼셀 피아노 페스티벌
El Paso Chopin Music Festival in Texas / 텍사스 주 엘파소 쇼팽 음악제
Caramoor Festival in New York / 뉴욕 카라무어 페스티벌
International Keyboard Institute in New York / 뉴욕 국제키보드협회
International Festival of Arts "Art November" in Moscow / 모스크바 <아트 11월> 국제 예술제
Dubrovnik Festival in Croatia /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페스티벌

Venues
Caramoor's Rising Stars in New York / 뉴욕 주 카라무어의 라이징 스타스
Coolidge Auditorium at the Library of Congress in Washington DC / 워싱턴 DC 의회 도서관의 쿨리지 강당
National Chopin Foundation in Miami / 마이애미의 국립 쇼팽 재단
Falany Performing Arts Center in Georgia, USA / 조지아 주의 팔라니 공연예술센터
University of Florida Performing Arts / 플로리다 공연예술대학교
Paul Klee Zentrum in Bern / 베른의 파울 클레 첸트룸
Filharmonia Narodowa in Warsaw / 바르샤바의 나로도바 필하모니아
Duke Performances in North Carlina / 노스캐롤라이나 주 듀크 퍼포먼시즈
Isabella Stewart Gardner Museum /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

Reviews
His Beethoven performances have been praised by the New York Times as full of "passion and poetry".

뉴욕 타임스에 의해 베토벤 연주가 “열정과 시”로 가득 차 있다는 찬사를 받았다.

He was praised as a pianist whose "interpretations recalled the virtuosic style from the turn of the 19th and 20th centuries" by the Chopin Express at the 16th International Chopin Piano Competition

제16회 쇼팽 국제피아노콩쿠르에서 쇼팽 익스프레스에 의해 “19세기와 20세기의 방식으로부터 거장의 스타일을 상기시키는 연주”의 피아니스트라는 찬사를 받았다.

"A real poet of the piano." - BBC Radio 3

“피아노계의 진정한 시인.” - BBC 라디오 3.

He was hailed by the Philadelphia Inquirer as a pianist "whose tone covered everything from sensitive to brawny" after a performance of César Franck's Piano Quintet.

프랑크 피아노 퀸텟 연주 후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에 의해 “세심함부터 강한 것까지 모든 것을 덮는 음색을 가진” 피아니스트로 묘사되었다.

Competitions
2001 - Eastern Music Festival Concerto Competition in Greensboro, North Carolina (USA) /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그린즈버러 시 이스턴 음악제 협주곡 콩쿠르 우승
2005 - MTNA Senior Piano Competition at National Student Competition in Seattle, Washington (USA) 2nd prize / 미국 워싱턴 주 시애틀 전국음악교사협회 전국학생콩쿠르 [시니어 피아노 부문] 2위 (4월)
2008 - 59th Kościuszko Foundation Chopin Piano Competition in New York City, USA 2nd prize / 미국 뉴욕시 제59회 코시치우쉬코 재단 쇼팽 국제피아노콩쿠르 2위
2010 - 8th National Chopin Piano Competition in Miami, Florida (USA) 5th prize (4th was not awarded) / 미국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 제8회 쇼팽 전국피아노콩쿠르 4위 없는 5위 (2월)
2010 - 16th Chopin International Piano Competition in Warsaw, Poland Semifinalist (Top 20) / 폴란드 바르샤바 제16회 쇼팽 국제피아노콩쿠르 세미파이널리스트 (10월)
2011 - Gina Bachauer Piano Competition at Juilliard School in New York, USA winner ex-aequo with Oskar Jezior (Poland) and Arthur Rubinstein Prize in Piano / 미국 뉴욕 줄리아드 음대 지나 박하우어 피아노 콩쿠르 - 오스카르 예지오르(폴란드)와 함께 공동 우승 및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특별상 (4월)
2011 - 51st Young Concert Artists International Auditions in New York, USA winner, Paul A. Fish Memorial Prize, John Browning Memorial Prize, Performance Prize for the Brownville Concert Series, Performance Prize for the Lied Center of Kansas and Bronder Prize for Piano of Saint Vincent College / 미국 뉴욕 제51회 신예연주가 콩쿠르 우승, 폴 피쉬 기념상, 존 브라우닝 기념상, 브라운빌 콘서트 시리즈 연주 특별상, 캔자스 리트 센터 연주 특별상 및 세인트 빈센트 대학교 연주를 위한 브론더 특별상 (12월)
2012 - 17th Hilton Head International Piano Competition in South Carolina, USA Medalist (Top 6) /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제17회 힐턴 헤드 국제피아노콩쿠르 세미파이널리스트 (3월)
2012 - 17th Leeds International Piano Competition in England 5th prize and Terence Judd-Hallé Orchestra Prize, awarded to the pianist chosen by the orchestra and conductor Sir Mark Elder / 잉글랜드 제17회 리즈 국제피아노콩쿠르 5위 및 (오케스트라와 지휘자 마크 엘더 경에 의해 선정된 피아니스트에게 수여하는) 테렌스 주드-할레 오케스트라 특별상 (9월)
2013 - Queen Elisabeth International Music Competition in Brussels, Belgium 6th prize / 벨기에 브뤼셀 퀸엘리자베스 국제음악콩쿠르 6위 (6월)
2015 - 5th International German Piano Award in Frankfurt am Main, Germany Semifinalist (Top 10) / 독일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제5회 저먼 국제 피아노 어워드 세미파이널리스트 (4월)
2015 - 13th Concours Geza Anda in Zurich, Switzerland 1st prize, Mozart Prize and Audience Prize / 스위스 취리히 제13회 게자 안다 국제피아노콩쿠르 1위, 모차르트 특별상 및 청중상 (6월)

2018년 7월 19일 목요일

Duo Crommelynck [Patrick Crommelynck & Taeko Kuwata]


https://en.wikipedia.org/wiki/Duo_Crommelynck
https://www.claves.ch/collections/duo-crommelynck

Founded in 1974, the Duo Crommelynck met in Vienna, married, and rapidly gained recognition as one of the leading piano duos of the day. Many composers wrote for them and they made frequent tours and recordings, leaving a shocked music world upon their suicide.

1974년에 결성된 듀오 크로멜링크(크롬랭크라고도 함)는 비엔나에서 만나서 결혼하여 오늘날 최고의 피아노 듀오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 많은 작곡가들이 그들을 위해 곡을 썼으며 그들은 자주 연주여행을 다니고 녹음을 많이 했는데, 동반 자살로 음악계에 충격으로 남아있다.

Duo Crommelynck was the name of a notable classical piano duo team active from 1974 to 1994. It consisted of the Belgian Patrick Crommelynck and his Japanese-born wife Taeko Kuwata. In 1994, at the height of their fame, they committed suicide.

듀오 크로멜링크는 1974~1994년 활동했던 주목할 만한 클래식 피아노 듀오 팀의 이름이었다. 벨기에인 파트리크 크로멜링크와 그의 일본인 아내 다에코 구와타로 구성되었다. 1994년 최정상에서 그들은 동반 자살하였다.

Biography
Patrick Crommelynck was born in Brussels in 1942 (Some sources say Patrick Crommelynck was born in 1945 or 1947), Taeko Kuwata in Tokyo in 1945. Patrick studied with Stefan Askenase at the Brussels Conservatory, with Victor Merzhanov at the Moscow Conservatory, and with Dieter Weber in Vienna, where he met Taeko Kuwata, who was another of Weber's students. They married and formed their duo in 1974. They came to attention with their two-piano version of Brahms's 4th Symphony. They achieved considerable praise and recognition and were considered one of the world's leading piano duos. They toured widely and a number of composers wrote works for them. These included André Tchaikowsky's Invention 5b, dedicated to Patrick, and another André Tchaikowsky composition Tango and then Mazurka were arranged for the duo.

파트리크 크로멜링크는 1942년 브뤼셀에서 태어났다. (몇몇 출처에서는 파트리크 크로멜링크가 1945년이나 1947년에 태어났다고 말한다.) 다에코 구와다는 1945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파트리크는 브뤼셀 음악원에서 스테판 아스케나제,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빅토르 메르자노프, 비엔나에서 디터 베버를 사사했다. 그는 비엔나에서 베버의 또 다른 제자였던 다에코 구와타를 만났다. 그들은 결혼하여 1974년에 듀오를 결성하였다. 그들은 브람스 교향곡 4번의 2대의 피아노 버전으로 주목받았다. 이들은 상당한 찬사와 인정을 받았으며 세계 최고의 피아노 듀오 중 하나로 여겨졌다. 그들은 폭넓게 연주여행했으며 많은 작곡가들이 그들을 위한 작품들을 썼다. 이런 곡들에는 파트리크에게 헌정된 앙드레 차이코프스키의 인벤션 5b가 있으며 앙드레 차이코프스키의 또 다른 작품인 탱고와 이어서 마주르카가 이들 듀오를 위해 편곡되었다.

Duo Crommelynck made a number of recordings for the Swiss Claves label. They recorded music by Auric, Bizet, Brahms, Debussy, Dvořák, Fauré, Messager, Milhaud, Poulenc, Ravel, Schubert, Smetana, Johann Strauss II, and Tchaikovsky. These included 2-piano arrangements of Tchaikovsky's Pathétique Symphony, Dvořák's New World Symphony, and Smetana's Vltava from Má vlast. Their three-disc set of the four-hand piano works of Schubert won a Grand Prix du Disque from the Académie Charles Cros. They also recorded an entire CD of fragments and unfinished pieces by Mozart.

듀오 크로멜링크는 스위스의 클라브 레이블에서 많은 음반들을 남겼다. 그들은 오리크, 비제, 브람스, 드뷔시, 드보르작, 포레, 메사제, 미요, 풀랑크, 라벨, 슈베르트, 스메타나, 요한 슈트라우스 2세, 차이코프스키 등의 음악을 녹음했다. 그들의 음반에는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6번 <비창>, 드보르작 교향곡 9번 <신세계>, 스메타나 교향시 <나의 조국> 중 블타바가 포함되어 있다. 슈베르트 4개의 손을 위한 작품들을 녹음한 세 장의 음반은 프랑스 아카데미 샤를 크로가 탁월한 레코딩 업적을 세운 음악인에게 수여하는 그랑프리 뒤 디스크를 수상했다. 그들은 모차르트의 미완성 단편 작품들을 녹음한 전집 음반도 발매했다.

Joint Suicides
During the weekend of 9–10 July 1994, at the height of their joint careers, they took their own lives in Brussels after an apparent crisis in their relationship. Patrick hanged himself first and his body was discovered by Taeko, who also decided to end her own life in the same way. Their bodies were discovered on Monday 11 July.

1994년 7월 9~10일 주말 동안, 듀오 활동의 절정에서 그들의 관계가 명백한 위기를 겪은 후 목숨을 끊었다. 파트리크가 먼저 목매달았는데 그의 시신을 발견한 다에코도 같은 방식으로 자살했다. 그들의 시신은 7월 11일 월요일에 발견되었다.

The Athénée Royal de Woluwe-Saint-Pierre, a Brussels school founded in 1956, was renamed Athénée Royal Crommelynck, de Woluwe-Saint-Pierre after their death, in commemoration not only of them but also of other famous Crommelyncks, including the dramatist Fernand Crommelynck.

1956년에 창설된 브뤼셀의 아테네 로얄 드 올우웨-생-피에르 학교는 이들의 죽음 이후 이들뿐만 아니라 다른 유명한 크로멜링크 가의 극작가 페르낭 크롬랭크를 기념하여 아테네 로얄 크롬랭크 드 올우웨-생-피에르로 교명을 바꿨다.

2018년 4월 29일 일요일

Canadian Pianist - Viviana Sofronitsky


https://en.wikipedia.org/wiki/Viviana_Sofronitsky
https://ru.wikipedia.org/wiki/Софроницкая,_Вивиана_Владимировна
http://www.sofronitsky.com/en/
https://www.facebook.com/viviana.sofronitsky
https://www.allmusic.com/artist/viviana-sofronitsky-mn0001660400
http://www.respublika.cz/kultura/meropriyatiya/62164-roskoshnye-royali-naravne-s-avtomobilyami-porsche

Profile
Viviana Sofronitsky [Viviana Vladimirovna Sofronitskaya] (Russian: Вивиана Владимировна Софроницкая) is a Russian-born Canadian classical pianist. She was born in Moscow in 1960, her father was the noted Soviet-Russian pianist Vladimir Sofronitsky. She has followed in the footsteps of her father Vladimir Sofronitsky, a distinguished Russian pianist.

비비아나 소프로니츠키(비비아나 블라디미로프나 소프로니츠카야)는 러시아에서 출생한 캐나다의 클래식 피아니스트이다. 1960년 모스크바에서 출생했고, 그녀의 아버지는 유명한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이다. 그녀는 뛰어난 러시아 피아니스트였던 아버지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의 발자취를 따랐다.

She studied at the Central School of Music until 1979. She studied at the Moscow Conservatory as a pianist (Margarita Fedorova's class) and organist (class Natalia Gureeva-Vedernikova) from Semtepber 1979 to June 1989. After graduate school worked as a soloist-organist of the Belarusian Philharmonic in Polotsk. In Soviet Union, she worked as organist and harpsichordist in the ensemble of ancient music "Madrigal" led by Alexei Lubimov and the ensemble "The Academy of Ancient Music" directed by Alexei Lubimov and Tatiana Grindenko. At the same time she gave solo concerts in Moscow, Leningrad, Kiev, Minsk, Sverdlovsk, and so on.

모스크바 음악원 부속 중앙음악학교에서 음악 공부 및 1979년 졸업.
1979년 9월~1989년 6월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피아노(마르가리타 페도로바 사사)와 오르간(나탈리아 구레예바-베데르니코바 사사) 공부 및 박사 학위.
졸업 후 폴로츠크에서 벨로루시 필하모닉에서 솔로이스트 겸 오르가니스트로 일했다.
소련에서 고음악 앙상블 “마드리갈”(알렉세이 루비모프 감독)과 고음악 아카데미(알렉세이 루비모프 및 타티아나 그린덴코 감독)에서 오르간 및 하프시코드 연주자로 일했다.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키예프, 민스크, 스베르들로프스크 등지에서 독주회.

In 1989, Sofronitsky moved to the United States, where she worked at the Oberlin College Conservatory of Music in Ohio. In 1990, she moved to Canada, where she pursued an active career in performance and recording in Toronto, partnered with various members of the Tafelmusik Baroque Orchestra. She was a founder and the first Artistic Director of the Academy Concert Series in Toronto. Sofronitsky has been a Canadian citizen since 1994.

1989년 도미하여 오하이오 주 오벌린 음악원에서 작업.
1990년 캐나다로 이주하여 타펠무지크 바로크 오케스트라의 여러 단원들과 함께 협연하면서 토론토에서 연주 및 녹음 활동.
토론토에서 아카데미 콘서트 시리즈의 창단자이자 초대 예술 감독.
1994년부터 캐나다 시민권자.

In 1999 she received historical performance degrees in harpsichord, fortepiano and early music teaching from the Royal Conservatory in The Hague.

1999년 헤이그 왕립 음악원에서 하프시코드, 포르테피아노, 고음악 교수법으로 시대악기 연주 학위 취득.

Since 2001 she has lived in the Czech Republic, married to fortepiano builder (a manufacturer of fortepiano replicas that Sofronitsky collects and plays) Paul McNulty, performing and recording on his highly prized instruments an expanded repertoire from C.P.E. Bach to Liszt. She is a creative director from 30 August 2001 in Prague. She moved to Divišov since September 2001.

2001년부터 체코에 거주.
그녀가 수집하고 연주하는 포르테피아노 모형 제작자 폴 맥널티와 결혼했는데, 카를 필립 에마누엘 바흐부터 리스트까지 확장된 레퍼토리를 그의 높이 평가된 악기로 연주 및 녹음.
2001년 8월 30일부터 프라하에서 광고 제작 감독.
2001년 9월 디비쇼프로 이주.

Viviana Sofronitsky and Paul McNulty in their workshop / 작업장에서의 비비아나 소프로니츠키와 폴 맥널티 부부.

Viviana is a constant participant of international music festivals: "Utrecht Oude Muziek Festival" and "Muziek Netwerk" (Netherlands), "Leipzig Bach Festival", "Klang & Raum Music Festival" Irsee (Germany), "Festival van Vlaanderen", (Belgium), Musica Antiqua Bruges, (Belgium), "Berliner Tage für Alte Music", (Germany), Bratislava Hammerklavier Festival (Slovakia), "Chopin Festival" (Poland), Tage Alter Musik Osnabruck (Germany), "Midis-Minimes" (Belgium), "Oslo Chamber Music Festival" (Norway), "Vendsyssel Festival" (Denmark), "Piano Folia Festival", Le Touquet (France), Printemps des Arts, Nantes (France)

여러 국제 음악제에 꾸준히 참가.
네덜란드 - 위트레흐트 우데 무지크 페스티발, 무지크 네트베르크
독일 - 라이프치히 바흐 페스티발, 이르제 <클랑 운트 라움 음악제>, 베를리너 타게 퓌르 알테 무지크, 타게 알터 무지크 오스나브루크
벨기에 - 플랑드르 페스티발, 무지카 안티쿠아 브뤼허, 미디스-미니메스
슬로바키아 - 브라티슬라바 함머클라비어 페스티발
폴란드 - 쇼팽 페스티벌
노르웨이 - 옹슬로 실내악 페스티벌
덴마크 - 벤시셀 페스티발
프랑스 - 피아노 폴리아 페스티발, 르 투케, 낭트 <예술의 봄>

Viviana has toured and performed all over the world with unique instruments, made her husband, Paul McNulty, on samples Stein 1788, 1792 by Walter, Graf 1819, Pleyel 1830. She performs on a two-manual harpsichord by Yves Beaupré, a Viennese fortepiano by F. Teller, and copies of fortepianos by Stein, Walter, Graf, Pleyel, and Boisselot. Her collection of top-quality new pianos includes Mozart's and Beethoven's favorites Walter and Stein, Schubert's Graf, Chopin's Pleyel and Liszt's Boisselot.

남편 폴 맥널티가 제작한 독특한 악기들(발터에 의한 슈타인 1788, 1792, 그라프 1819, 플레이엘 1840)로 전 세계 연주 여행.
이브 보프레에 의해 손수 제작된 2대의 하프시코드, F. 텔러가 제작한 비엔나 포르테피아노, 슈타인, 발터, 그라프, 플레이엘, 부아슬로에 의한 포르테피아노 복제품으로 연주.
그녀의 새로운 고품질 피아노 수집품들은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선호했던 발터와 슈타인, 슈베르트의 그라프, 쇼팽의 플레이엘, 리스트의 부아슬로를 포함한다.

Viviana Sofronitsky explores the rich, complete world of sound available to classic and romantic composers with their then-new pianos! Viviana performs with two, three, four or five pianos on stage, allowing the audience to immerse themselves in the music performed on instruments as strong and colourful as they were at the time when they inspired young classical and romantic composers to write their masterpieces. The pianos used in the performance are newly built "clones" of the favourite instruments of great composers, produced by the world's most prolific modern fortepiano maker, Paul McNulty. Her recent London Wigmore Hall performance with 5 pianos on stage was acclaimed a "revelation".

그들의 새로운 피아노로 고전파와 낭만파 작곡가들의 소리를 낼 수 있는 풍부하고 완성된 세계를 탐험한다! 비비아나는 그들이 그들의 걸작을 쓰기 위해 젊은 고전파와 낭만파 작곡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을 때 강하고 화려한 만큼 악기들로 연주되는 음악에서 청중들을 몰두하게 하면서 무대에서 2, 3, 4 또는 5대의 피아노로 연주한다. 연주에 사용되는 피아노들은 세계에서 현대 포르테피아노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제작자 폴 맥널티에 의한, 위대한 작곡가들이 선호했던 악기들의 새롭게 제작된 “복제품들”이다. 런던 위그모어 홀 무대에서 5대의 피아노와 함께 했던 연주는 “뜻밖의 일”로 환호 받았다.

She was devoted to articles in journals Audiophile Audition, to review MusicWeb International, and others. Viviana Sofronitsky gives masterclasses, lectures and she is a member of jury in international competitions and has featured often in European and American broadcasts. (She stands on the radio to Germany, France, Belgium, Denmark, the United States and Canada.)

<오디오필 오디션>에 기사를 쓰고 <뮤직웹 인터내셔널>에 리뷰를 쓰는 일 등에 열성적이다.
마스터클래스와 강연을 가지며 국제 콩쿠르들에서 심사위원 역임.
종종 유럽과 미국(독일, 프랑스, 벨기에, 덴마크, 미국, 캐나다)의 방송국들에서 연주.

Viviana Sofronitsky has recorded with "AVI", "ETCetera", "Centaur", "Suoni e colori", "Globe", "Pro Musica Camerata" (11CD of complete Mozart concertos) and "Passacaille" labels.

AVI, ET체테라, 켄타우르, 수오니 에 콜로리, 글로브, 프로 무지카 카메라타(모차르트 협주곡 전곡), 파사카유 레이블에서 음반 발매.

She performed at leading concert halls including Wigmore Hall in London and Triphony Sumida Hall in Japan and others.

런던 위그모어 홀, 일본 트리포니 스미다 홀 등을 포함한 주요 콘서트홀들에서 연주.

Awards
1999 - Bach Tage Berlin Competition in Germany 1st prize and a prize for the best performance / 독일 베를린 바흐의 날들 콩쿠르 1위 및 최우수 연주 특별상
1999 - Musica Antiqua Competition at the Festival van Vlaanderen in Brugge, Belgium / 벨기에 브뤼허 플랑드르 페스티벌 무지카 안티쿠아 콩쿠르 1위

Her Favorite Phrases / 좋아하는 문구들
"I think that instruments from every period have effects and colors that cannot be reproduced on today's pianos - that compositions were always conceived with the instruments of their time in mind and only on those can they achieve their full effect; played on today's instrument they sound at a disadvantage (unvorteilhaft)." Anton Rubinstein 1892.

“나는 모든 시대악기가 오늘날의 피아노들이 복제할 수 없는 효과들과 색깔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 그 작품들은 항상 마음속에 그들의 시대악기와 함께 상상되고, 불리한 점에서 그들이 소리 내는 오늘날의 악기에서 연주되는 그것들의 가득 찬 효과에서만 달성될 수 있다.” - 1892년 안톤 루빈스타인.

I think it is important to point out that Anton Rubinstein, like Brahms and Liszt, knew all kinds of piano right from his youth - Arthur Rubinstein would not have been able to make such a statement, having played nothing but Steinways and Bechsteins his whole life. (Malcolm Bilson)

나는 브람스와 리스트처럼 안톤 루빈스타인이 젊었을 때 모든 종류의 피아노를 바로 알았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안톤 루빈스타인은 그의 삶 전체에서 스타인웨이와 베흐슈타인만 연주하면서 그러한 상태를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맬컴 빌슨)





비비아나 소프로니츠키는 프라하에서 포르쉐 자동차 모델이기도 했다.

2018년 4월 27일 금요일

Russian Pianist - Vladimir Sofronitsky


https://en.wikipedia.org/wiki/Vladimir_Sofronitsky
https://ru.wikipedia.org/wiki/%D0%A1%D0%BE%D1%84%D1%80%D0%BE%D0%BD%D0%B8%D1%86%D0%BA%D0%B8%D0%B9,_%D0%92%D0%BB%D0%B0%D0%B4%D0%B8%D0%BC%D0%B8%D1%80_%D0%92%D0%BB%D0%B0%D0%B4%D0%B8%D0%BC%D0%B8%D1%80%D0%BE%D0%B2%D0%B8%D1%87
https://vk.com/pages?oid=-38222429&p=%D0%A1%D0%BE%D1%84%D1%80%D0%BE%D0%BD%D0%B8%D1%86%D0%BA%D0%B8%D0%B9_%D0%92%D0%BB%D0%B0%D0%B4%D0%B8%D0%BC%D0%B8%D1%80_%D0%92%D0%BB%D0%B0%D0%B4%D0%B8%D0%BC%D0%B8%D1%80%D0%BE%D0%B2%D0%B8%D1%87
http://mosconcert.com/calendar/851.html
http://www.allmusic.com/artist/vladimir-sofronitsky-mn0001725151
http://www.sofronitsky.ru/en/
http://www.naxos.com/person/Vladimir_Sofronitsky/43886.htm
http://www.bach-cantatas.com/Bio/Sofronitsky-Vladimir.htm
http://www.mosconsv.ru/ru/person.aspx?id=130953
http://pianist.web2020.co.kr/bbs/articles/408

Biography
Vladimir Vladimirovich Sofronitsky (or Sofronitzky, Влади́мир Влади́мирович Софрони́цкий, Vladimir Sofronitskij) was born on 8 May [O.S. April 25] 1901 in St. Petersburg. His father Vladimir N. Sofronitsky (1869-1942) was a professor of mathematics and physics of the Smolny Institute for Noble Maidens. His mother was a great-niece of the famous portrait painter Vladimir Borovikovsky (1875-1935) and granddaughter of the poet L. I. Borovikovsky and daughter of a lawyer and poet A. Borovikovsky. Sofronitsky and his twin sister Vera were the youngest of six children.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소프로니츠키는 1901년 5월 8일(러시아 구력으로는 4월 25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블라디미르 N. 소프로니츠키(1869~1942)는 스몰니 노블 메이든스 기관의 수학과 물리학 교수였다. 어머니는 유명한 초상화가 블라디미르 보로비코프스키(1875~1935)의 조카딸이자 시인 L. I. 보로비코프스키의 손녀였으며 변호사이자 시인이었던 A. 보로비코프스키의 딸이었다. 소프로니츠키와 그의 쌍둥이 누이 베라는 6남매 중에서 가장 어렸다.

In 1903, his family moved to Warsaw, where he started piano lessons with Anna Lebedeva-Getcevich (a student of Nikolai Rubinstein) from 1908. Nine-year-old Vladimir made his debut in Warsaw at one of the concerts showcasing Lebedeva-Getsevich's pupils in 1910. As a youth, Sofronitsky was noticed by the director of the St. Petersburg Conservatory, Alexander Glazunov, who sent him to study with Polish pianist Aleksander Michałowski.

1903년 그의 가족은 바르샤바로 이주했고, 1908년부터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의 제자인) 안나 레베데바-게체비치와 함께 피아노 레슨을 시작했다. 9세의 블라디미르는 1910년 바르샤바에서 레베데바-게체비치의 제자 연주회 중 하나로 데뷔했다. 어릴 때 소프로니츠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장 알렉산더 글라주노프에 의해 주목받았고, 글라주노프는 소프로니츠키를 폴란드 피아니스트 알렉산데르 미하워프스키에게 보냈다.

When Sofronitsky's family returned to St Petersburg in September 1913 he continued to study with Michałowski by commuting to Warsaw every month until the outbreak of World War I. He then studied for a year with Leonid Shchedrin before entering the Petrograd (now St. Petersburg) Conservatory in 1915.

소프로니츠키의 가족이 1913년 9월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을 때 그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매달 바르샤바에서 미하워프스키에게 계속 배웠다. 그는 이후 페트로그라드(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기 전인 1915년에 레오니드 셰드린에게 1년 동안 배웠다.

Vladimir Sofronitsky in 1914 / 1914년의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

From 1916 to 1921, Sofronitsky studied in the Petrograd (now St. Petersburg) Conservatory under Leonid Nikolayev, where Dmitri Shostakovich, Maria Yudina, and Elena Scriabina, the eldest daughter of the deceased Alexander Scriabin, were among his classmates. Maria Yudina would report that he was already playing with remarkable interpretive insight and virtuosic skills. Sofronitsky also took classes in composition at the conservatory from Maximilian Steinberg, a pupil of Rimsky-Korsakov. He was best known as an interpreter of the Russian composer Alexander Scriabin, whose daughter he married. He met Elena Alexandrovna Skryabina (1900-1990), the eldest daughter of the composer Alexander Scriabin in 1917 and married her in 1920. While he had already divulged a sympathy for the piano music of the recently deceased mystic composer - as attested by Yudina - he now had a greater intellectual and emotional connection to Scriabin's works through his wife and through the Scriabin in-laws. Sofronitsky was also acclaimed as an outstanding pianist by the composer Alexander Glazunov and the musicologist and critic Alexander Ossovsky. His performances were highly esteemed by Heinrich Neuhaus, Vladimir Horowitz and Egon Petri, as well as by former classmates Maria Yudina and Dmitry Shostakovich. His other pupils at the Conservatory at this time included Vladimir Horowitz and Simon Barere, with whom Sofronitsky played two-piano recitals.

1916~1921년 소프로니츠키는 페트로그라드(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레오니드 니콜라예프를 사사했다. 페트로그라드 음악원에서 그의 급우들 중에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마리아 유디나, 엘레나 스크리아비나(고인이 된 알렉산더 스크리아빈의 장녀)가 있었다. 마리아 유디나는 그가 이미 놀라운 연주의 통찰력과 거장적인 기교로 연주하고 있었다고 보고하곤 했다. 소프로니츠키는 음악원에서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제자였던) 막시밀리안 스타인베르크로부터 작곡 수업을 듣기도 했다. 그는 러시아 작곡가 스크리아빈의 해석자이자 스크리아빈의 딸과 결혼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1917년에 스크리아빈의 맏딸 엘레나 알렉산드로프나 스크리아비나(1900~1990)를 만났고 1920년에 결혼했다. 그가 이미 최근에 고인이 된 신비주의 작곡가의 피아노 음악에 대한 동정을 언급한 동안 - 유디나에 의한 증언으로서 - 그는 현재 스크리아빈의 딸과 장인 스크리아빈을 통하여 스크리아빈의 작품들에 대해서 더 지적이고 감정적인 관계를 가졌다. 소프로니츠키는 작곡가 알렉산더 글라주노프와 음악학자 겸 비평가인 알렉산더 오소프스키에 의해 뛰어난 피아니스트로 찬사 받았다. 그의 연주들은 이전의 급우들이었던 마리아 유디나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뿐만 아니라 겐리흐 네이가우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에곤 페트리에 의해 높이 평가받았다. 당시에 소프로니츠키와 같은 음악원을 다녔던 다른 사람들로는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소프로니츠키와 2대의 피아노를 위한 리사이틀을 가졌던) 시몬 바레레가 있었다.

Although he had played in public in Warsaw as a child, Sofronitsky began his adult concert career in 1919 (He gave the first solo concert in St. Petersburg Music School No. 6 on 26 May 1919.) whilst still a student and the following year married class-mate Elena Scriabina, the daughter of Alexander Scriabin. A son was born a year later, to whom Glazunov became godfather. In the year of his marriage, Sofronitsky gave his first recital solely of the music of Alexander Scriabin to commemorate the fifth anniversary of the composer's death and played his Piano Concerto at his graduation concert. In 1922 Sofronitsky played the piano part in a performance of Scriabin's Prometheus conducted by Nikolai Malko. He gave the first solo concert in the Great Hall of the Petrograd Philharmonic on 24 May 1922.

그는 어린 시절 바르샤바에서 대중 앞에서 연주했지만 1919년에 성인으로서의 연주 경력을 시작했다. (1919년 5월 26일 상트페테르부르크 제6음악학교에서 첫 독주회를 가졌다.) 1920년에는 알렉산더 스크리아빈의 딸인 학교 동기 엘레나 스크리아비나와 결혼했다. 1921년에는 아들이 태어났고, 글라주노프가 아들의 대부가 되었다. 결혼 생활 동안 소프로니츠키는 작곡가 타계 5주기를 추모하기 위해 알렉산더 스크리아빈의 음악으로만 리사이틀에서 연주했고 졸업 연주회에서 스크리아빈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했다. 1922년 소프로니츠키는 니콜라이 말코의 지휘로 스크리아빈의 <프로메테우스>의 피아노 파트를 연주했다. 1022년 5월 24일에는 페트로그라드 필하모닉 대강당에서 첫 독주회를 가졌다.

Vladimir Sofronitsky in 1928, painted by Emil Wiesel /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 1928년 에밀 비젤 그림.

Sofronitsky graduated from the conservatory in 1921, giving, among other works in his recital, a performance of the Liszt Sonata in B minor, which much of the faculty and student body found both thrilling and thought-provoking. Throughout most of the 1920s, Sofronitsky built up a brilliant career as a concert pianist in Russia. His first tour abroad came on 8 March 1928 and after playing in Paris, he decided to stay on. In the end, he remained two years, then returned to his Leningrad. Sofronitsky joined the faculty at the Leningrad Conservatory in 1936 and remained there until the Nazis' infamous siege of the city. In June 1938 he received the scientific degree of Doctor of Music. He escaped by plane to Moscow in 1942 and immediately began teaching at the conservatory there. He gave many performances at the Scriabin Museum in Moscow, especially during the latter part of his career. He gradually developed alcohol and drug addictions, and in his last years his pianistic skills declined noticeably.

소프로니츠키는 그의 졸업 연주회에서 리스트 소나타 외에 다른 작품들을 연주하면서 1921년 음악원을 졸업했는데, 교수진과 학생 대다수는 모두 황홀해했고 진지하게 생각했다. 1920년대에 걸쳐 소프로니츠키는 러시아에서 콘서트 피아니스트로서 화려한 경력을 착수했다. 그의 첫 해외 투어는 1928년 3월 8일부터였고, 이후에도 파리에서 연주하면서 머물기로 결정했다. 결국 그는 2년 동안 머물렀고, 이후 레닌그라드로 돌아왔다. 소프로니츠키는 1936년 레닌그라드 음악원 교수가 되었고 나치의 악명 높은 도시 공격이 발생할 때까지 거기에 남았다. 1938년 6월에 그는 음악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1942년에 비행기로 모스크바로 탈출했고 거기에 있는 음악원에서 곧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는 모스크바의 스크리아빈 박물관에서, 특히 그의 경력의 후반부 동안 많은 연주를 가졌다. 그는 점점 알코올과 약물 중독이 되었고, 말년에 그의 피아니스틱한 기교들은 눈에 띄게 쇠퇴했다.

During the 1920s Sofronitsky gave a large number of concerts in Russia, and in 1928 he and his wife visited Warsaw on their way to Paris where they spent two years, becoming friendly with Sergei Prokofiev and Nikolai Medtner. In Warsaw, Sofronitsky gave a concert and met with his teacher Aleksander Michałowski, then moved to Paris, attending concerts of Rachmaninov, Feodor Chaliapin, Ignacy Jan Paderewski, Walter Gieseking and others.

1920년대 동안 소프로니츠키는 러시아에서 많은 콘서트를 가졌고, 1928년 그와 그의 아내는 파리로 가는 도중에 바르샤바를 방문했다. 그들은 파리에서 2년 동안 보냈고,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와 니콜라이 메트너와 가까워졌다. 바르샤바에서 소프로니츠키는 콘서트를 가졌고 그의 스승 알렉산데르 미하워프스키를 만났고 파리로 이동했는데, 파리에서 가졌던 콘서트에는 라흐마니노프, 오페라 가수 표도르 샬리아핀,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 피아니스트 발터 기제킹 등이 참석했다.

Sofronitsky returned to Leningrad on 27 January 1930 but had by now separated from his wife. The following years were spent broadening his already wide repertoire considerably. Sofronitsky's name would forever be linked with Scriabin, but he was now playing the Viennese classics, Baroque music, works by Schumann and music of the composers he had met in France. He only appeared in the West on one occasion, when he was suddenly put on an airplane and sent by Stalin to play at the Potsdam conference in 1945.

소프로니츠키는 1930년 1월 27일 레닌그라드로 돌아왔지만 그의 아내와 떨어졌다. 1931년에는 그의 이미 폭넓은 레퍼토리를 상당히 넓히는 데에 소비했다. 소프로니츠키의 이름은 스크리아빈과 함께 영원히 연결될 것이었지만, 그는 비엔나 클래식, 바로크 음악, 슈만의 작품들, 프랑스에서 그가 만났던 작곡가들의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가 서방에 유일하게 등장한 적이 딱 한 번 있었는데, 1945년 포츠담 회담에서의 연주를 위해 스탈린에 의해 급히 비행기에 태워 보내졌다.

Vladimir Sofronitsky at the piano, painted by Pyotr Konchalovsky 1932 / 피아노 앞의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 1932년 표트르 콘찰로프스키 그림.

In the 1937–1938 season Sofronitsky gave a series of twelve recitals encompassing the history of keyboard music from Buxtehude to Shostakovich. Nothing had been heard like it in Russia since the great days of Anton Rubinstein's famous Historic Recitals.  In 1939 he became a Professor at the Leningrad Conservatory. At the beginning of the Second World War he was trapped in Leningrad in autumn 1941, where on 12 December 1941 he played a concert at the hall of the Pushkin Theater at -3C, wearing gloves with the fingers cut off: "But how I played!" He recalled. In April 1942 he was evacuated via the "Air Bridge" from starving Leningrad, and brought to Moscow where he lived with his estranged wife and children.

1937~1938 시즌에 소프로니츠키는 북스테후데부터 쇼스타코비치까지 건반 음악사를 망라하는 12회의 리사이틀 시리즈를 가졌다. 안톤 루빈스타인의 유명한 <역사적인 리사이틀>의 중요한 날들 이후로 러시아에서 그와 같은 연주는 없었다. 1939년 그는 레닌그라드 음악원 교수가 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했을 때 1941년 가을에 그는 레닌그라드에 갇혔고, 1941년 12월 12일 손가락이 잘린 장갑을 끼고 영하 3도의 날씨에 푸쉬킨 극장에서 콘서트를 가졌다. - “그러나 나는 연주했다!”고 그는 회상했다. 1942년 4월 그는 굶주리는 레닌그라드로부터 <에어 브리지>를 경유하여 대피했고 모스크바에 도착했으며, 그의 별거 중이었던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살았다.

In November 1942 he became a professor at the Moscow conservatory, where he met and later married his student, Valentina Duschinova (Sofronitsky). He played concerts mostly in Moscow, and, after the war, in Leningrad, becoming widely regarded as the best pianist in Russia. In 1949 he gave five recitals of Chopin's works on consecutive nights in the Great Hall of the Moscow Conservatory to mark the centenary year of the Polish composer's death. In 1953, to mark the 125th centenary of Schubert's death, Sofronitsky gave a recital devoted to the Viennese composer's works. Sofronitsky was a highly inspired performer, and each of his performances was regarded as a unique event. His performances at the time were called the fans of his art differently: "musical hypnosis", "poetic nirvana", "spiritual liturgy." He hated recordings and regarded them as "my corpses", nevertheless his live recordings give a sense of his astonishing musical power.

1942년 11월, 그는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가 되었고 나중에 결혼하게 되는 그의 제자 발렌티나 두쉬노바 (소프로니츠키)를 만났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대부분 콘서트를 가졌고, 전쟁 이후 레닌그라드에서 러시아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널리 알려졌다. 1949년 그는 모스크바 음악원 대강당에서 폴란드 작곡가 타계 100주기를 기념하기 위해 모스크바 음악원 대강당에서 연이어 5회의 쇼팽 리사이틀을 가졌다. 1953년에는 슈베르트 타계 125주기를 기념하기 위해 비엔나 작곡가의 작품으로 헌정된 리사이틀을 가졌다. 소프로니츠키는 매우 탁월한 연주자였고, 그의 연주들은 각각 독특한 이벤트로 간주되었다. 당시 그의 연주들은 그의 팬들로부터 “음악적인 최면 상태”, “시적인 해탈”, “성스러운 예배식” 등 다양하게 불렸다. 그는 녹음을 싫어했고 그것들을 “나의 시체들”로 여겼지만, 그럼에도 그의 실황 녹음들은 그의 깜짝 놀랄 만한 음악적인 힘의 감각을 느끼게 한다.

A solitary figure, Vladimir Sofronitsky hated teaching at the Moscow Conservatory and rarely became close to his associates. He lived in a private world of music and avoided intrigues. Simple and sensitive as a child, he spent a secluded life among his closest friends. Audiences at his concerts would often perceive some kind of revelation or magic in his performances, particularly in the music of Scriabin. He was undoubtedly one of the greatest of Russian pianists, and it was only his inability to perform in the West and his death at a comparatively early age that prevented his name gaining the recognition it deserved. Despite his attitude of non-participation - and thus only for his music performances - he was awarded the highest decoration in Russia: The Order of Lenin on 28 December 1946.

고독한 인물 소프로니츠키는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가르치는 것을 싫어했고 그의 동료들과 거의 가깝지 않게 되었다. 소프로니츠키는 개인적인 음악 세계에 빠져 살았고 관심을 피했다. 그는 그의 가까운 친구들 사이에서 남들과 거의 접촉을 하지 않는 단순하고 예민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콘서트에서 청중들은 종종 그의 연주, 특히 스크리아빈의 음악에서 발현 또는 마법의 일종을 목격했다. 그는 의심의 여지없이 러시아의 위대한 피아니스트들 중의 한 명이고, 서방에서 연주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뿐이며, 마땅히 인정받는 것을 방해한 것은 비교적 이른 나이에 사망한 것이었다. 그의 무관심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 그렇게 그의 음악 연주들에 대해서 유일했지만 - 그는 1946년 12월 28일 러시아에서 최고 훈장인 레닌 훈장을 받았다.

Sofronitsky led an active concert life until his last years. His last year of concert activity was 1960. His final performance took place on January 9, 1961, in the Small Hall of the Moscow Conservatory. He died from cancer on 29 August 1961. He was buried at the Novodevichy cemetery (plot number 8) in Moscow on 31 August 1961. He had children from his first marriage - Alexander (born in 1921) and Roxana (born in 1937), the second - Viviana (born in 1960).

소프로니츠키는 그의 말년까지 활발한 연주 인생을 보냈다. 그의 마지막 연주 활동은 1960년이었다. 그의 마지막 연주는 1961년 1월 9일로, 모스크바 음악원 소강당에서였다. 그는 1961년 8월 26일 모스크바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그는 1961년 8월 31일 모스크바 노보데비치 묘지 8번 자리에 묻혔다. 유족으로는 첫 번째 아내에게서 태어난 알렉산더(1921년생)과 록사나(1937년생), 두 번째 아내에게서 태어난 비비아나(1960년생)가 있었다.

His daughter (through his second wife) is the Canadian classical pianist Viviana Sofronitsky. / (두 번째 아내 사이에서 태어난) 그의 딸은 캐나다의 클래식 피아니스트 비비아나 소프로니츠키이다.

Sofronitsky's health had deteriorated as a result of a heart condition and the privations he had experienced during World War II. In 1954 he gave his last performance in Leningrad and the following year his last in the Great Hall of the Moscow Conservatory. During the last few years of his life Sofronitsky gave concerts in the more intimate surroundings of the Scriabin Museum and Small Hall of the Moscow Conservatory. During 1957 he was too ill to perform, but was back on stage the following year; however 1959 saw him bed-ridden again and cancer was diagnosed. Knowing that time was short for him, Sofronitsky played nine recitals in ten weeks from October to December 1959. It is often reported that in his final years Sofronitsky became addicted to drugs and alcohol, but little or no evidence has been supplied to support this. He was only sixty when he died.

소프로니츠키의 건강은 2차 세계대전 동안 경험했던 심장 질환과 궁핍함으로 인해 악화되었다. 1954년 레닌그라드에서 그의 마지막으로 연주했고 1955년 모스크바 음악원 대강당에서 마지막으로 연주했다. 인생의 말년에 소프로니츠키는 스크리아빈 박물관과 모스크바 음악원 소강당의 더 친숙한 환경에서 콘서트를 가졌다. 1957년 동안 그는 너무 아파서 연주할 수 없었지만, 1958년 무대로 복귀했다. - 그러나 1959년 다시 침대에 몸져누웠고 암이 진단되었다. 그 시기가 그에게 짧다는 것을 알면서, 소프로니츠키는 1959년 10월~12월에 10주 동안 9회의 리사이틀을 가졌다. 소프로니츠키가 말년에 약물과 알코올 중독이 되었다고 종종 보고되었지만, 이것을 지지하기 위해 제공된 증거가 적거나 없다. 그는 불과 60세에 사망했다.

Sofronitsky made a fair number of recordings in the last two decades of his life, but a relatively small number overall compared with the titanic efforts of his younger countrymen Sviatoslav Richter and Emil Gilels. Drawn principally to Romantic repertoire, Sofronitsky recorded a large number of Scriabin works and also compositions by Beethoven, Schubert, Chopin, Schumann, Liszt, Lyadov, Rachmaninoff, Medtner, Prokofiev, and others.

소프로니츠키는 그의 인생의 마지막 20년 동안 상당수의 녹음을 남겼지만, 그보다 더 어린, 같은 나라 사람들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와 에밀 길렐스의 엄청난 성과들과 비교해서 전체적으로 소수이다. 낭만파 레퍼토리가 주를 이루는 그는 스크리아빈의 작품들을 많이 녹음했고 베토벤, 슈베르트, 쇼팽, 슈만, 리스트, 리아도프, 라흐마니노프, 메트너, 프로코피에프 등의 작품들도 녹음했다.

Repertoire
Having met Scriabin's daughter only after her father's death, Sofronitsky never met the composer. Nevertheless, his wife vouched that the pianist was the most authentic interpreter of her late father's works. The other composer with whom Sofronitsky had the greatest affinity is Frédéric Chopin. He once told an interviewer: "A love for Chopin has followed me through the course of my entire life." Beyond Chopin and Scriabin, Sofronitsky had a wide repertoire spanning major composers from Johann Sebastian Bach to Nikolai Medtner and reaching as far as the works of Boris Goltz (1913–1942), with a focus on 19th-century Romantic composers and early 20th-century Russians.

스크리아빈의 사후에 스크리아빈의 딸과 만남을 가졌지만, 소프로니츠키는 작곡가를 결코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의 아내는 이 피아니스트가 그녀의 작고한 아버지의 작품들의 가장 믿음직한 해석자라고 인정했다. 소프로니츠키가 가장 좋아했던 다른 작곡가는 쇼팽이다. 그는 인터뷰 진행자에게 한 번 말한 적이 있었다. “쇼팽에 대한 사랑은 제 전체 인생의 과정을 통하여 저를 따라왔습니다.” 쇼팽과 스크리아빈을 넘어, 소프로니츠키는 19세기 낭만파 작곡가들과 20세기 초 러시아 작곡가들에 대한 집중과 함께, 보리스 골츠(1913~1942)의 작품들만큼 먼 것에 도달하면서 바흐부터 메트너까지 주요 작곡가들의 레퍼토리까지 뻗어있었다.

Recognition and recordings / 인정과 녹음들
Sofronitsky was held in the highest esteem by his colleagues, including Sviatoslav Richter, Emil Gilels and Heinrich Neuhaus. He was a friend of Prokofiev and Shostakovich, and had a profound influence upon many Russian musicians, from Vladimir Horowitz to Evgeny Kissin.

소프로니츠키는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에밀 길렐스, 겐리흐 네이가우스를 포함한 그의 동료들로부터 높이 평가받았다. 그는 프로코피에프와 쇼스타코비치의 친구였고,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부터 에프게니 키신까지 많은 러시아 음악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Although little known in the West, never having toured or recorded there, Sofronitsky was held in the highest regard in his native land. Sviatoslav Richter and Emil Gilels looked up to Sofronitsky as their master, and famously, when Sofronitsky once drunkenly proclaimed that Richter was a genius, in return Richter toasted him and proclaimed him a god. Upon hearing of Sofronitsky's death, Gilels was reputed to have said that "the greatest pianist in the world has died."

투어나 녹음을 가지지 않았던 서방에 덜 알려져 있었지만, 소프로니츠키는 그의 조국에서는 높이 여겨졌다.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와 에밀 길렐스는 소프로니츠키를 그들의 참된 스승으로 추앙했고, 유명한 일화로 소프로니츠키가 취해서 리히터가 천재라고 외쳤더니 답례로 리히터가 그에게 건배를 했고, 그를 신이라고 추앙했다. 소프로니츠키의 부고에 대한 소식을 듣고, 길렐스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사망했다”고 평가했다.

Sofronitsky's recordings have not been issued systematically in the West. One noteworthy release, in BMG's "Russian Piano School" series, contains a complete concert, including a mercurial and highly praised account of Schumann's Piano Sonata No. 1, Op. 11. His issue in Philips' Great Pianists of the Twentieth Century features Chopin mazurkas and waltzes on the first CD and some of his legendary Scriabin on the second, including the 2nd (first movement), 3rd, 4th, and 9th sonatas and a performance of Vers la flamme. Denon Classics' (Japan) Vladimir Sofronitsky Edition is a series of 15 CDs, ten of which remain in print. Other Sofronitsky recordings have been issued by such labels as Arkadia, Arlecchino, Chant du Monde, Multisonic, Urania, and, most notably, Vista Vera, which has released seventeen volumes of Sofronitsky recordings as of April, 2010.

소프로니츠키의 녹음들은 서방에서는 체계적으로 출반되지 않았다. 주목할 만한 발매 음반인, BMG 레이블의 <러시안 피아노 스쿨> 시리즈는 변덕스럽고 극찬 받은 슈만 피아노 소나타 1번 연주를 포함하여 모든 콘서트를 수록한다. 그의 필립스 레이블 <20세기의 위대한 피아니스트들> 시리즈는 첫 CD에서 쇼팽 마주르카와 왈츠, 두 번째 CD에서는 그의 전설적인 스크리아빈 소나타 2번 1악장, 3번 소나타, 4번 소나타, 9번 소나타, <불꽃을 향하여>를 포함한다. 일본 데논 클래식스 레이블의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 에디션은 15장 시리즈이고 인쇄된 것이 10부가 남아 있다. 다른 녹음들은 아르카디아, 아를레키노, 샹 뒤 몽드, 멀티소닉, 우라니아, 비스타 베라(2010년 4월 17개의 볼륨 발매) 레이블에서 나왔다.

He was awarded a Stalin Prize of the first class for a concert and performing activities on 19 March 1943 and proclaimed an Honoured Artist of the RSFSR in 1942.

콘서트와 연주 활동으로 1943년 3월 19일 스탈린 1급 훈장 수상 및 1942년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공훈예술가.

Vladimir Sofronitsky was among the greatest Russian pianists of the twentieth century, and, while he had become a somewhat less prominent figure following his death, he must be still considered in the company of Richter, Gilels, and Yudina. In his time, Sofronitsky became widely recognized as the leading interpreter of and authority on the music of Scriabin in Eastern Europe. He was also highly praised for his interpretations of the piano works of Robert Schumann and he was a highly respected teacher.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는 20세기의 위대한 러시아 피아니스트들 중의 한 명이다. 반면에 그는 사후에 덜 저명한 인물이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리히터, 길렐스, 유디나와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소프로니츠키가 살아있을 당시에 동유럽에서 스크리아빈 음악의 뛰어난 해석자이자 권위자로 널리 인정받았다. 그는 슈만 작품 연주로도 극찬 받았고 높이 존경받는 교육자였다.

Sofronitsky made a fair number of recordings in the last two decades of his life, but a relatively paltry number compared with the efforts of Richter and Gilels. Not surprisingly, Sofronitsky recorded a large number of Scriabin works and also compositions by Chopin, Rachmaninov, Schumann, Prokofiev, and others. His recorded performances from the 1940s are generally more representative than those from the last decade.

소프로니츠키는 그의 인생 후반 20년 동안 상당수의 녹음들을 남겼지만, 리히터와 길렐스의 성과와 비교해서 얼마 안 된다. 놀랄 것도 없이, 소프로니츠키는 스크리아빈의 많은 작품들을 녹음했고 쇼팽, 라흐마니노프, 슈만, 프로코피에프 등의 작품들도 녹음했다. 그의 1940년대 연주 녹음들은 일반적으로 마지막 10년의 녹음들보다 더 대표적이다.

In his time Sofronitsky was considered to be the greatest pianist in Russia, a "living legend". Every Sofronitsky recital was a spiritual event for the public. He was a true poet of the piano, full of improvisatory spirit and inspiration. He had an all-encompassing technique and his playing embodied a wide range of colors and textures, but these things could be said about many first rate pianists. When at his best Sofronitsky's music making seemed to transcend the bounds of normal expression and enter a new realm in which his every emotion would project from within the music and onto his audience. It is this indefinable spirituality of his playing that sets him apart.

소프로니츠키가 살아있을 때 러시아에서 위대한 피아니스트, “살아있는 전설”로 여겨졌다. 소프로니츠키의 모든 리사이틀은 대중에게 성스러운 이벤트였다. 그는 즉흥적인 영혼과 영감으로 가득 찬 피아노의 진정한 시인이었다. 그는 모두를 아우르는 테크닉을 가졌고 그의 연주는 폭넓은 색깔들과 구조들을 표현했지만, 이러한 것들은 많은 일류 피아니스트들에 대해서 말해질 수 있었다. 소프로니츠키가 음악 만들기에 최선을 다할 때는 정상적인 표현의 선을 초월하고 그의 음악과 그의 청중으로부터 구상하는 그의 모든 감정에 있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이것은 그를 돋보이게 만드는 그의 연주의 정의하기 힘든 정신적인 것이다.

Sofronistky made his first commercial recordings in June 1937, but most of his recordings from the 1950s and 1960s come from live performances. As he never performed or recorded outside Russia after his tour in France in 1929, Vladimir Sofronitsky's art remained unknown to the Western public until recent years, when some of his recordings started to appear. Unfortunately, his recordings have not been issued systematically in the West.

소프로니츠키는 1937년 6월 첫 상업 녹음을 했지만, 1950년대와 1960년대 녹음의 대부분은 실황이다. 1929년 프랑스 투어 이후 그가 러시아 외부에서 연주하거나 녹음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의 예술은 그의 녹음 중 일부가 나타날 때까지 서방의 대중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었다. 불행하게도 그의 녹음들은 서방에서 체계적으로 출반되지 않았다.

Interesting facts / 흥미로운 사실들
Sofronitsky was also known as the author of palindromes - phrases-shifters that can be read the same way at the end and the beginning. Some of his findings: "Do not send Chopin", "A Leaf - force", "Hill", thin it, but the spirit of lih", "David, go to hell!", "He's in hell for a long time", "Lesch on the shelf bug found", "he sang about Kiel great", "Argentina beckons Negro", "great is Anna like a lion", "But the invisible angel, frost pattern went to the temple, and Wondrous is he", "great Oborin, he was shy and Leo", and many others.

소프로니츠키는 또한 회문(回文: madam이나 nurses run처럼 앞에서부터 읽으나 뒤에서부터 읽으나 동일한 단어나 구)의 저자로도 유명했다. (러시아어를 번역한 것이라서 예는 생략)


2000년 7월 27일 (목) KBS FM 이미선의 가정음악 - 음악원고 <전설 속의 피아니스트 1>
스크리아빈의 연주의 최고 권위자를 들라면 그 누구보다도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알렉산더 골덴바이저나 겐리크 네이가우스. 그리고 얼마 전 타계한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와 에밀 길렐스의 사이를 잇는 중간세대의 피아니스트로, 마리아 유디나, 그리고 사무일 파인베르그(Feinberg)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피아니스트였지요.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는 주로 활동했던 시기가 러시아에서는 가장 탄압이 심했던 스탈린 체제하였기 때문에 서방세계에는 비교적 덜 알려진 피아니스트이지만 그의 음악이 지닌 가치는 이런 모든 제약을 넘어설 만큼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1901년 5월 8일 러시아의 상트 페쩨르부르그에서 물리학자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소프로니츠키는 그의 가족이 1903년 폴란드 바르샤바로 이주하는 바람에 최초의 피아노 교육을 폴란드의 피아니스트 레베데바-게체비치에게서 받게 됩니다. 이때부터 소프로니츠키는 상트 페쩨르부르그 음악원의 교장을 지내고 있던 작곡가 글라주노프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는데, 글라주노프는 그를 곧 폴란드의 명 피아니스트이자 쇼팽의 해석가로 유명한 알렉산더 미하일로프스키에게 보내어 그에게서 피아노 수업을 받게 하지요. 1913년 다시 상트 페쩨르부르그로 이사한 소프로니츠키는 레오니드 니콜라예프와 막시밀리안 스타인베르그 문하에서 수업을 마치게 됩니다.

1920년에 스크리아빈의 서거 5주년을 기념해서 스크리아빈의 작품만으로 최초의 리사이틀을 개최했고, 졸업 연주 때에도 스크리아빈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했고, 또 독주 피아노 파트가 난해하기로 유명한 스크리아빈의 “불의 시(프로메테우스)”를 니콜라이 말코의 지휘로 협연하여 잊지 못할 연주를 들려주었던 것도 바로 그 시절이었습니다. 1921년 소프로니츠키는 마리아 유디나와 공동으로 안톤 루빈슈타인 상을 수상하며 졸업을 하는데, 당시 모스크바에서 그는 이미 널리 알려진 피아니스트가 되어 버렸지요.

“참된 예술은 일곱 겹으로 된 갑옷으로 억제된, 붉게 끓어오르는 용암과도 같은 것이다”라는 그의 표현처럼, 그의 연주는 낭만적이고 음악적 영감이 풍부하면서도 또 빈틈이 없고 정확하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쓸데없는 과장이나 진부함이 전혀 없어 정확하면서도 자연스럽습니다.

2000년 7월 28일 (금) KBS FM 이미선의 가정음악 음악원고 <전설 속의 피아니스트 2>
러시아 전역을 돌며 정열적인 연주회를 개최하고 글라주노프, 라흐마니노프, 샬리아핀, 코르토, 네이가우스, 니콜라이 메트너, 프로코피에프와 교분을 쌓기 시작한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는 1930년 상트 페쩨르부르그로 돌아옵니다.

상트 페쩨르부르그로 돌아온 소프로니츠키는 독일과 빈의 거장들의 작품은 물론이고, 이탈리아의 바로크 작곡가인 스카를라티로부터, 프랑스의 현대 작곡가인 프란시스 풀랑크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작품들을 그의 연주 레퍼토리로 삼게 됩니다. 1937년부터 1938년 사이 그가 개최했던 열 두 번의 전설적인 연주회에서는 북스테후데에서부터 쇼스타코비치에 이르는 넓은 레퍼토리를 포함하고 있었지요.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소프로니츠키는 상트 페쩨르부르그 음악원에서 교편을 잡고 연주활동도 활발히 하게 됩니다. 하지만 1941년 상트 페쩨르부르그가 독일군에게 포위되면서 그의 연주활동은 크게 위축됩니다. 그는 그 시절의 연주회를 이렇게 회상하지요.

“푸쉬킨 극장의 연주회장은 실내온도가 영하 3도까지 떨어져 있었고, 모든 청중은 두꺼운 털코트를 입고도 덜덜 떨고 있었습니다. 나는 손이 얼어붙어 장갑을 끼고 연주해야만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중들은 얼마나 연주에 도취해 있었는지, 그리고 나도 훌륭히 연주를 할 수 있었지요.”

1942년 요양차 모스크바로 거처를 옮긴 소프로니츠키는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로 정착하게 되고, 1946년 레닌 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1954년부터는 대도시의 큰 공연장을 피해 시골의 작은 공간에서 소수의 청중과의 만남을 위해 모스크바를 떠나 러시아 전역을 여행하게 되지요.

1959년 몇 달 간 몸져누웠으나 다시 레코딩 작업과 연주에 몰두한 소프로니츠키는 1960년 12월 5일 모스크바 음악원 소강당에서, 1961년 1월 7일에는 스크리아빈 탄생 89주년을 맞아 스크리아빈 박물관에서 연주회를 개최합니다. 그러나 1월 9일 모스크바 음악원에서의 연주를 끝으로 다시는 청중 앞에 서지 못했고 1961년 8월 29일 약물 과다 복용으로 60세의 생애를 마감합니다.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는 골덴바이저나 네이가우스와는 달리 활동을 소련 당국으로부터 심하게 규제되고 검열받았습니다. 당대 소비에트 최고의 피아니스트였음에도 불구하고 해외여행은 극히 제한적으로만 허용되었구요, 그리고 그것은 후기로 갈수록 점점 더 심해져서 그의 존재는 서구 음악계에서 완전히 잊히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최근에 와서 그의 음반이 CD로 복각되고 그의 연주의 가치가 높이 인정되면서 수많은 그의 음반들이 전 세계에 소개되고 있지요.

KBS FM 당신의 밤과 음악 - 허원숙의 <피아니스트 플러스> 코너 2007년 7월 7일 원고...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 (1)  “피아노의 신”
이 시간에 많은 천재 피아니스트들을 소개해 드렸는데요, 오늘은 천재를 넘어서 피아노의 신이라는 찬사를 받은 피아니스트의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러시아의 피아니스트라면 골덴바이저, 네이가우스의 세대와 그 후의 에밀 길렐스,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 세대가 있는데 그 사이를 잇는 중간세대에 속한 피아니스트입니다.

리히터와 길렐스는 이 사람을 그들의 master, 참된 스승이라고 추앙했고요, 리히터는 특히나 이 분을 신(神)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바로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인데요.

소프로니츠키라면 우선, 스크리아빈의 최고의 해석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호로비츠도 스크리아빈의 연주가 탁월하지만, 특히나 소프로니츠키에게는 호로비츠에게서는 찾기 힘든 어둡고 부서질 것 같은 섬세한 우수가 담겨있지요.

그렇게 되기까지, 소프로니츠키는 어린 시절부터 스크리아빈의 추종자였었고, 1920년에는 스크리아빈의 서거 5주년 기념으로 스크리아빈의 곡만으로 그의 첫 독주회를 꾸밀 만큼 스크리아빈을 사랑한 피아니스트였는데, 또한 스크리아빈의 맏딸 엘레나 스크리아비나와 결혼을 해서 명실상부한 스크리아빈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장인의 사위 사랑이 대단했겠구나 하고 생각하시겠지만, 스크리아빈은 소프로니츠키가 14살이었을 때 이미 저 제상으로 떠났으니까 장인과 사위의 직접적인 대면은 없었던 거죠.

소프로니츠키라면 아주 낯선 피아니스트로 여겨지는데, 그 이유는 소프로니츠키가 활동했던 시기가 러시아에서는 가장 탄압이 심했던 스탈린시대였기 때문이었죠. 그런 시대에 연주가로서 활동을 하다보니 거의 러시아 안에만 갇혀서 활동을 해서 서방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태로 생애를 마쳤는데, 이 분이 다시 조명을 받기 시작한 것은 그의 훌륭한 연주를 담은 실황 음반이 서방으로 전해지면서 시작되어서 비로소 사후에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소프로니츠키는 1901년 5월 8일 러시아의 상트 페쩨르부르그에서 태어났는데요, 아버지는 물리학 선생님이셨고, 어머니는 유명한 초상화가인 블라디미르 보로비코프스키의 손녀였다고 합니다. 러시아에서 태어났는데 2살 때 가족이 바르샤바로 이주하는 바람에 바르샤바의 유명한 피아노 교사인 레베데바-게체비치에게서 최초의 피아노 수업을 받았습니다.

어린 소프로니츠키의 재능은 당시 상트 페쩨르부르그 음악원의 교장이면서 작곡가였던 글라주노프의 눈에 띄어서 글라주노프는 소프로니츠키에게 아주 좋은 선생님을 소개했는데, 그 분이 바로 당시 폴란드의 명 피아니스트이자 쇼팽의 해석가로 유명한 알렉산더 미카일로프스키이죠. 9살 때부터 미카일로프스키에게 피아노 수업을 받은 소프로니츠키가 후에 쇼팽의 탁월한 해석가가 된 것은 두말 할 나위가 없겠죠?

하지만 1913년에 가족들이 다시 상트 페쩨르부르그로 이주해서 소프로니츠키는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중의 2년간을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셰드린에게 배운 후에 1916년 상트 페쩨르부르그 음악원에서 명교사 니콜라예프 문하에서 수업을 마치게 됩니다. 당시의 니콜라예프의 클래스에는 얼마 전에 소개해 드린 마리아 유디나도 있었고요, 또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도 같이 있었는데, 선생님의 소프로니츠키에 대한 사랑이 각별해서 쇼스타코비치의 증언이라는 책에 보면, 질투 나는 장면도 있었다고 해요.

예를 들어서 마리아 유디나와 같은 때 졸업 연주회를 했는데, 둘이 다 똑같이 리스트의 소나타 B 단조를 연주했대요. 소프로니츠키가 등장할 때가 되었는데 니콜라예프 선생님이 무대에 등장해서는, 오늘 소프로니츠키가 몸이 안 좋아서 이해해 달라고 하면서 연주회가 시작되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너무 잘했다는 거예요. 섭섭한 쇼스타코비치는 “나는 지난 번에 목에 기부스하고도 연주했는데, 이렇게 하는 법이 어디 있냐”면서, 아프면 연주를 하지 말던지, 아니면 연주할 거면 아프다 말을 하지 말든지, 동정점수를 받으려는 거냐 뭐냐... 그런 식으로 푸념을 늘어놓는 구절이 있어요. 어쨌든 니콜라예프는 이 애제자 소프로니츠키를 블라디미르의 애칭인 보보쉬카라고 부르면서 각별히 아껴주었다고 하죠.

아무튼 1921년 마리아 유디나와 공동으로 안톤 루빈슈타인 상을 수상하며 음악원을 졸업하고는 곧 연주 활동을 시작했는데, 연주 활동을 시작하자마자 인기가 거침없이 폭발해서 이미 모스크바에서 널리 알려진 피아니스트가 되었다고 합니다.

소프로니츠키의 스크리아빈 연주는 비록 스크리아빈에게는 직접적인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1922년 스크리아빈 소나타 3번을 연주하는 것을 본 스크리아빈의 미망인으로부터 최고의 해석이라는 찬사와 인정을 받음으로 더 빛을 발했는데요, 그 이후에 소프로니츠키는 러시아 전역을 돌면서 정열적인 연주회를 개최했고, 그 이후로는 1928년에 잠시 폴란드에 갔다가 파리에서 약 2년간 머무르면서 많은 연주회를 열어 대성공을 거두고, 글라주노프와 다시 재회하고 라흐마니노프, 샬리아핀 같은 거장의 연주를 듣고 감명을 받고, 알프레드 코르토나 겐리크 네이가우스, 니콜라이 메트너,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같은 작곡가들과 깊은 교분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 이후로는 러시아에만 머물면서 평생을 러시아 안에서만 활동하는 피아니스트가 되었지요. 사실 요즘은 인터넷이나 음반 산업이 발달해서 좀 덜 하긴 하지만, 콘서트 피아니스트라는 직업은 모바일, 기동성이 생명인데요, 이렇게 세계적인 인물이 한 나라, 그것도 폐쇄적인 나라에 갇혀서 평생을 지냈다는 것은 엄청난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KBS FM 당신의 밤과 음악 - 허원숙의 <피아니스트 플러스> 코너 2007년 7월 14일 원고...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 (2)  “장갑 끼고, 군복입고...”
1930년 파리에서 돌아온 소프로니츠키는 본격적으로 연주활동을 시작했는데요, 그 레퍼토리가 바로크 작곡가 북스데후데에서부터 시작해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낭만 작곡가 전부, 프랑스의 풀랑크 그리고 스크리아빈,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에프의 곡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시대의 작품을 총망라한 것이었죠. 이런 프로그램을 두고 백과사전적인 연주회 프로그램이라고 말하는데, 당시 이런 레퍼토리를 가진 연주자는 안톤 루빈슈타인이 유일했다고 합니다.

소프로니츠키는 1939년에 상트 페쩨르부르그 음악원에 자리를 잡고, 교육과 연주활동을 병행했는데요, 2차 대전이 일어나면서 1941년에 레닌그라드가 독일군에 포위되면서 상황이 힘들게 되면서 연주활동도 많이 위축이 되어버렸어요.

1941년 12월 12일에 있었던 연주회를 회상하던 소프로니츠키의 말을 들어보면, 연주회가 있었던 푸쉬킨 극장의 연주회장은 실내 온도가 영하 3도였다고 해요. 청중들은 두꺼운 털코트를 입고도 떨면서 연주회장에 앉아있었는데, 소프로니츠키는 피아노를 쳐야하는데 손가락이 얼어붙어서, 손가락 끝을 잘라낸 장갑을 끼고서 연주를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해요. 하지만 놀랍게도 그 연주회는 정말 황홀했고 또 훌륭한 연주회가 되었다고 합니다.

전쟁의 나쁜 상황에서 레닌그라드에서는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했고요, 소프로니츠키는 몸이 극도로 약해져서 요양차 모스크바로 거처를 옮겼는데, 1943년부터는 모스크바 음악원에 교수로 임명되어서 음악활동을 계속할 수 있게 되지요.

하지만 아무리 활동을 할 수 있다고 해도, 당시의 러시아는 정말 참담하기 이를 데가 없었지요, 쇼스타코비치의 증언이라는 책을 보면, 예술가라는 사람들은 정치가들이 자기들의 필요에 의해서 평생을 이용당하는 사람들이라고 쓰여 있고요, 또 자신이 마음속에 감춰둔 속내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는지가 잘 나와 있는데, 사실 그 책도 쇼스타코비치가 자신의 사후에 출판하기를 원해서 책의 원고를 스위스 은행 금고에 몰래 감춰두었다가 출판했다는 것을 보면, 얼마나 당시 상황이 힘들었는지 알 수 있죠. 소프로니츠키도 바로 이 시대의 사람이었는데요.

1945년 스탈린은 소프로니츠키에게 명령을 합니다. 포츠담 회의에 참석해서 연주를 하고 오라는 것이었죠. 거역할 수 없는 스탈린의 명령을 받은 소프로니츠키는 군복을 입고 포츠담에 가야만 했구요, 당연히 군인 복장으로 연주를 해야만 했지요. 그리고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와서는 그 일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해요.

사무엘 파인베르그, 마리아 유디나와 더불어 스탈린 시대의 러시아를 대표하는 명피아니스트 소프로니츠키는 1946년 레닌상을 수상했고요, 1954년부터는 대도시의 큰 연주회장을 벗어나서 시골의 작은 공간에서 소수의 청중들을 위해서 연주회를 개최하면서 러시아 전역을 여행하기 시작했고요, 그 때부터 숨지기 직전까지 인기가 절정이었는데요.

이렇게 연주가로서의 삶을 산 소프로니츠키의 인생은 정말 행복했을까...

소프로니츠키는 어떤 돌출행동을 할 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는 점에서 마리아 유디나와 닮았다고들 말을 하죠. 알코올, 마약, 복잡한 남녀관계, 또 그 밖에도 성가신 일들이 그의 삶에 다 들어있었고요, 그러다보니까 어떤 때에는 공연 전에 코냑 한 병을 다 마시고 나가떨어지기도 했다고 해요. 연주회는? 물론, 취소되었죠.

이렇게 무절제한 순간도 있었지만, 소프로니츠키는 겐리흐 네이가우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에곤 페트리,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 같은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존경을 받는 피아니스트였어요. 리히터와 길렐스는 소프로니츠키를 그들의 master라고 추앙했고요, 리히터는 피아노의 신이라고까지 말을 했죠. 그리고 또 소프로니츠키의 제자였던 라자르 베르만은 “소프로니츠키 선생님은 진정함의 극치로서, 나를 음악의 혼에 가까이 다가서게 한 사람”이라는 말을 했고요.

“참된 예술은 일곱 겹의 갑옷으로 억제된, 붉게 끓어오르는 용암과도 같은 것이다”라는 그의 표현처럼, 소프로니츠키의 연주는 낭만적이고 영감에 가득 차 있는 피아니스트이지만, 정확하고 빈틈이 없고, 쓸 데 없이 과장을 하거나 진부한 표현도 없고 자연스럽지요. 그래서 그의 연주를 듣다보면 연주회장이 아니라, 속세를 떠나 제사장이 신탁을 받는 집회에 참석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해요. 그만큼 은밀하고 신비스럽고 섬세하죠.

(저는 개인적으로 처음 소프로니츠키의 연주를 접한 때가 1992년이었는데, 리스트 소나타 실황 음반을 듣고 너무 무서워서 방구석에서 울면서 덜덜 떨었던 기억이 있어요. 시간제약으로 방송은 못 하지만 기회 되면 꼭 들어보세요)

소프로츠키는 즉흥성이 강한 피아니스트답게  “레코딩은 나의 시체이다”라고 말하면서 스튜디오 녹음을 혐오하고 실황을 고집한 피아니스트였죠. 하지만 스튜디오 녹음도 있기는 합니다.

이렇게 활발한 활동을 하던 소프로니츠키는 1959년 초에 몇 달 간을 몸져누웠다가 그 해 가을부터는 주위의 경고를 무시하고 다시 레코딩 작업을 계속했고 또 콘서트홀로 돌아와 1960년 12월 5일 모스크바 음악원 소강당에서 연주회를 개최합니다.

그리고 1961년 1월 9일 스크리아빈 탄생 89주년을 맞아 스크리아빈 박물관에서 연주회를 개최하는데요, 바로 이 연주를 끝으로 다시는 청중 앞에 서지 못했고 그 해 8월 29일 60세를 일기로 타계합니다. 사인은 암이었고요.

소프로니츠키의 사망 소식을 듣고 에밀 길렐스는 “이 세상의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죽었다”고 슬퍼했다고 합니다.


소프로니츠키의 프로필에 쓸 자료들을 모으다가 허원숙 선생님의 사이트를 알게 되었는데, 이분의 사이트 게시판에 나와 있는 글들을 읽는 게 더 간단하고 이해하기 쉽다. 소프로니츠키의 연주는 음침하다고들 하는데, 그게 스크리아빈과 묘하게 어울리는 것 같다. 그 음침한 사운드를 한때 좋아했던 기억이 나기도 한다. 소프로니츠키의 음반들을 정리하는 데에 3일 이상 걸렸는데, 음반 정보들을 찾다가 소프로니츠키가 콩쿠르를 나간 경력이 없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Google Drive / 2026. 09. Jean Sibelius Violin Competition Winners 2

제5회 1985 공동 1위 Leonidas Kavakos (Greece) / 레오니다스 카바코스 (그리스) 01 Leonidas Kavakos - Brahms Violin Concerto, Hungarian Dances & Bartok Rha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