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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23일 월요일

Melodiya / Maria Grinberg - Russian Piano School, Vol. 14



러시아에서 서유럽의 문물과 더불어 음악이 본격적으로 유입된 시기부터 현재까지, 유태계 러시아인들의 음악 활동은 실로 눈부시다.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최초로 서구식 음악원(콘서바토리)을 설립한 것도 유태인 형제인 안톤과 니콜라이 루빈스타인 형제였으며 연주, 작곡, 교육에 이르기까지 유태계 음악인들의 위치는 러시아에서 거의 절대적인 것이다. 마리아 그린베르크 역시 유태계 가정에서 태어났으며(우크라이나 오데사 출생) 8살의 나이에 어머니에게서 첫 피아노 레슨을 받는 등 음악적인 분위기에서 자랐다. 오데사 음악원에서 레셰티츠키의 제자인 다비드 아이스베르크를 사사한 후, 그린베르크는 1925년 모스크바로 옮겨 역시 유태계인 펠릭스 블루멘펠트의 클래스에서 공부하게 되는데, 블루멘펠트는 그때 이미 호로비츠와 시몬 바레레 등을 길러낸 명교수로 자리 잡고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양쪽에서 교수를 지낸 블루멘펠트는 작곡과 지휘로도 명성이 높았는데, 그린베르크는 블루멘펠트의 또 다른 제자였던 호로비츠의 오데사 연주를 듣고 블루멘펠트에게 가르침을 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음악 전반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특히 지휘자로서 오케스트레이션에 정통했던 블루멘펠트는 제자들로 하여금 피아노라는 악기에서 오케스트라 각 악기의 음색을 끄집어내는 보다 입체적인 영감과 상상력을 요구하는 가르침으로 유명했으며, 그린베르크는 그에게서 철저한 연주자로서의 무대 정신과, 다각도의 해석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조절하는 방법을 배웠다. 또 블루멘펠트 사후에 배운 콘스탄틴 이굼노프에게서는 시대에 따른 다양하고 예민한 피아노의 음색 조절과 디테일의 프로페셔널한 완성에 대한 가르침을 얻었다고 그녀는 증언하고 있다.

이렇게 훌륭한 스승들을 거친 그린베르크는 1935년 제2회 전 소련 콩쿠르에서 2위를 차지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녀가 걸어야 했던 길은 고달프고 역경에 가득 찬 것이었다. 사람에 따라 어려서부터 예술적인 완성도가 충실하고 성숙한 천재형의 음악가가 있는가 하면, 대기만성형의 연주가도 있다. 그린베르크는 후자에 속하는 예술가였지만, 끊임없는 노력과 실패에 의한 시행착오에서 얻어진 그녀의 연주력과 다양한 레퍼토리들은 어느 피아니스트의 그것보다도 충실할 수밖에 없었다.

그린베르크의 피아니즘은 한 마디로 평하자면 신선하고 확고한 표정의 인토네이션이 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피아니스트에 있어서 인토네이션(억양)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우선 복잡한 텍스처 안에서 모든 성부를 듣고 컨트롤할 수 있는 예민한 귀와, 작품 전반에 대한 폭넓은 지식, 그리고 꾸준하고 인내심 있는 훈련(연습)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린베르크는 이런 요소를 갖고 있는 예술가이다. 거기에 피아니스트와 작품, 작품과 청중, 청중과 피아니스트 사이의 거리감을 일절 허용치 않는 무대에서의 무서운 집중력까지 합쳐져 그린베르크의 완벽에 가까운 예술이 탄생한 것이다.

이런 부류에 속하는 연주가의 레퍼토리는, 연주자 자신이 자연스럽게 작품 안에서 숨 쉴 수 있고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작곡가일 때 더욱 좋은 결과를 낳는다고 생각되는데 그린베르크의 경우 그것은 모차르트, 베토벤을 포함하는 고전파 작곡가들의 작품이다. 70년대에 만들어진 베토벤의 32개의 소나타 전곡 녹음은 그런 점에서 그녀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린베르크는 실로 자연스럽고, 구태의연한 표정을 배제한 새로운 거인적인 베토벤 상을 만들어내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1959년부터 모스크바의 그네신 아카데미에서 교수로도 일했던 그린베르크는 세상을 떠나기까지 계속된 연주와 녹음 활동을 펼쳤는데, 특히 이 음반에도 실린 솔레르, 세이하스, 텔레만 등 18세기 작곡가들의 작품에 관심을 기울였다. 또 비제, 리아도프, 글라주노프의 잊힌 피아노 작품들을 발굴해낸 공로도 러시아 음악계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앞머리에 소개되는 세이하스와 솔레르는 다음에 실려 있는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의 제자들이다. 세이하스는 포르투갈의 코임브라 출신이며 솔레르는 스페인인이었지만 두 사람은 모든 생애의 후반을 스페인에서 보낸 거장 스카를라티의 영향을 받아 그와 경향이 비슷한 짤막한 형식의 클라비어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당연한 결과이겠지만 세 사람의 작품들은 상당 부분 서로 닮아있다. 도약음, 중음, 3도 진행, 반복되는 시퀀스 등등. 앞의 두 사람이 스페인 기타 주법을 연상시키는 아르페지오를 좀 더 사용했다는 점이 다른 정도일까? 오히려 연대가 앞선 스카를라티 쪽이 대담한 화성 진행을 통해 현대적인 울림을 느끼게 하는 것도 재미있다.

알려지지 않은 많은 작품들을 재조명해낸 피아니스트답게 그린베르크는 미완성이며 바이올린 소나타의 느린 악장으로 추정되고 있던 모차르트의 환상곡 K. 376을 되살려 연주했다. 완성된 버전은 모차르트와 하이든의 친구였고 작곡가였던 아베 막시밀리안 슈타들러에 의한 것인데 자유로운 소나타 형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의 다른 작품, 예를 들면 같은 조성의 K. 475 환상곡과 비교하여 어쩐지 바로크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점이 주목된다.

슈만의 분테블래터 작품 99(직역하면 “여러 가지 색의 이파리들”이며 한국에서는 “갖가지 작품”으로 소개됨)는 모두 14곡으로 짜여있으며 각각 작곡 연대가 다른 소품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1843년 이전, 즉 슈만이 정신질환으로 고통을 겪기 전의 작품들이기 때문에 젊은이다운 열정과 패기, 뜨거운 사랑들이 서로 분위기가 다른 페이지마다에 넘쳐흐르고 있다. 그린베르크는 약간 수줍은 듯하면서도 소품의 성격에 맞는 알맞은 스케일로 한 곡도 소홀함이 없는 연주를 들려준다.

브람스의 슈만 주제에 의한 변주곡 작품 9는 앞서 들은 슈만의 작품 중 No. 4(15번 트랙)의 멜로디를 주제로 택한 것이다. 성격 변주곡의 대가였던 브람스의 모습은 그의 초기 작품인 탓에 찾아보기 어려우나, 후에 “헨델 변주곡”이나 “파가니니 변주곡”의 대가다운 솜씨를 군데군데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 무엇보다 슈만과 그의 가족에 존경심을 가졌던 브람스인 만큼 이 작품에도 슈만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이어지는 왈츠 작품 39는 원래 연탄 곡이었던 것을 브람스 자신이 솔로용으로 편곡한 것이다. 전곡은 16개의 짧은 왈츠로 이루어져 있으며, 당시 유행했던 비엔나 왈츠의 영향보다는 그 원조인 랜틀러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 브람스의 작품으로서는 드물게 가볍고 편한 마음으로 감상할 수 있는 곡이지만, 그린베르크는 특유의 완벽주의 기질로 순음악적인 해석을 꾀하고 있다. 게다가 실제 연주를 들어보면 메마른 완벽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넉넉한 여유를 갖고 있으면서도 여성적이고 섬세한 연주에서 다시금 대가의 솜씨를 짐작케 한다.

★ 필자 : 김주영 (피아니스트)
서울 출생. 서울 음대 기악과 졸업. 러시아 모스크바 음악원 아스피란트(박사) 과정 졸업.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사무엘 파인베르크의 제자인 지나이다 이그나체바 교수를 사사. 유학 중 모스크바 프로코피에프 콩쿠르, 파리 인터내셔널 그랜드 콩쿠르 등에서 입상.

Track
01 Seixas Menuet in f / 세이하스 미뉴에트 f단조
02 Seixas Toccata in f / 세이하스 토카타 f단조
03 Soler Sonata No. 12 in F# / 솔레르 소나타 12번
04 Soler Sonata No. 2 in c# / 솔레르 소나타 2번
05 Soler Sonata No. 11 in g / 솔레르 소나타 11번
06 Scarlatti Sonata in f, K. 69 / 스카를라티 소나타 K. 69
07 Scarlatti Sonata in A, K. 113 / 스카를라티 소나타 K. 113
08 Scarlatti Sonata in c, K. 11 / 스카를라티 소나타 K. 11
09 Scarlatti Sonata in c, K. 22 / 스카를라티 소나타 K. 22
10 Mozart Fantasia in c, K. 396 / 모차르트 환상곡 K. 396
11 Schumann Bunte Blatter, Op. 99 No. 10 Prelude. Energisch / 슈만 <갖가지 소품> 10, 1, 2, 3, 4, 5, 6, 7, 8, 13번
12 Schumann Bunte Blatter, Op. 99 No. 1 Nicht schnell, mit Innigkeit
13 Schumann Bunte Blatter, Op. 99 No. 2 Sehr rasch
14 Schumann Bunte Blatter, Op. 99 No. 3 Frisch
15 Schumann Bunte Blatter, Op. 99 No. 4 Ziemlich langsam
16 Schumann Bunte Blatter, Op. 99 No. 5 Schnell
17 Schumann Bunte Blatter, Op. 99 No. 6 Ziemlich langsam, sehr gesangvoll
18 Schumann Bunte Blatter, Op. 99 No. 7 Sehr langsam
19 Schumann Bunte Blatter, Op. 99 No. 8 Langsam
20 Schumann Bunte Blatter, Op. 99 No. 13 Scherzo. Lebhaft
21 Brahms Variations on a Theme by Robert Schumann in f#, Op. 9 / 브람스 <로베르트 슈만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 작품 9
22 Brahms Waltzes, Op. 39 No. 1 in B / 브람스 왈츠 1, 3, 7, 16, 6, 15번
23 Brahms Waltzes, Op. 39 No. 3 in g#
24 Brahms Waltzes, Op. 39 No. 7 in c#
25 Brahms Waltzes, Op. 39 No. 16 in c#
26 Brahms Waltzes, Op. 39 No. 6 in C#
27 Brahms Waltzes, Op. 39 No. 15 in Ab

The Flamboyant Maria Izrailevna Grinberg (1908-1978) / 눈부신(화려한) 마리아 이즈라일레프나 그린베르크
The daughter of Russian Jew, Maria Grinberg was born in Odessa in 1908, and it was here, at the age of eight, that she received her first piano lessons from her mother.

러시아 유태인의 딸인 마리아 그린베르크는 1908년 오데사에서 태어났으며, 8세 때 어머니로부터 처음으로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Lessons with a Pupil of Leschetizky and Improvisations in a Dance Studio / 레셰티츠키의 제자와의 레슨과 댄스 스튜디오에서의 즉흥 연주
In 1917 Maria Grinberg began systematic lessons with a pupil of Theodor Leschetizky, David Aysberg, who groomed her for entry to the Odessa Conservatory in 1923. She had already made her professional debut three years earlier at a concert in the city's opera house, when the programme had included the Grieg Concerto and Mozart's D minor Concerto and Rondo "alla Turca". Between 1920 and 1925 Maria Grinberg played in the most varied ensembles. Among her fellow performers was the young David Oistrakh, who, like her, was born in Odessa in 1908. During her studies she actively and openly explored other musical avenues, taking advantage of an opportunity, for example, to demonstrate her improvisatory skills at the piano by working in a studio devoted to character dance.

1917년 마리아 그린베르크는 테오도르 레셰티츠키의 제자인 다비드 아이스베르크에게서 체계적인 레슨을 받기 시작했는데, 아이스베르크는 1923년에 그녀가 오데사 음악원에 입학할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 그녀는 이미 3년 전에 오데사의 오페라 하우스에서 콘서트를 가졌는데,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과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 터키 행진곡을 포함하는 프로그램이었다. 1920~1925년 동안 마리아 그린베르크는 다양한 앙상블에서 연주했다. 그녀의 동료 연주자들 중에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1908년에 오데사에서 태어난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도 있었다. 그녀는 공부하는 동안 적극적으로 터놓고 다른 음악적인 길을 탐구했는데, 예를 들어 성격적인 춤곡들에 몰두하는 스튜디오에서 일하면서 피아노에서 즉흥 연주에 대한 재주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활용했다.

The St Petersburg Tradition and Igumnov /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전통과 이굼노프
In September 1925 Maria Grinberg moved to Moscow, where she was initially taught by Felix Blumenfeld, a pupil of Rimsky-Korsakov, who later worked as a conductor at the Mariinsky Theatre in St Petersburg. A brilliant pianist, Blumenfeld also conducted the first of Diaghilev's Russian seasons in Paris in 1908 and from then on was much sought after as a teacher. Among his other pupils was Vladimir Horowitz. Following his death in 1931, Maria Grinberg transferred to Konstantin Igumnov and immediately won first prize at the Moscow Conservatory for the best performance of Beethoven's Third Piano Concerto. Shortly afterwards - she was now twenty-six - she gave up her regular studies at the Conservatory in order to complete a two-year course with Igumnov. In 1935 she was second prize in the Second All-Union Performers' Competition and later that same year began her long association with Moscow Radio. She first appeared in Leningrad in 1936, and throughout the 1940s and 1950s performed in virtually all the major Soviet towns and cities, appearing not only in solo recitals but also on the concert platform with conductors of the stature of Kurt Sanderling, Alexander Gauk and Hermann Abendroth, as well as with the Borodin Quarter, the Bolshoi Theatre String Quartet and the wife of Sviatoslav Richter, the soprano Nina Dorliac.

1925년 9월에 마리아 그린베르크는 모스크바로 건너가서, 나중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에서 지휘자로 일했던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제자 펠릭스 블루멘펠트를 처음 사사했다. 훌륭한 피아니스트인 블루멘펠트는 1908년 파리에서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시즌 중 첫 번째 공연을 지휘하기도 했으며, 이후로는 교육자로서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의 다른 제자들 중에는 블라디미르 호로비츠가 있었다. 1931년 블루멘펠트가 사망함에 따라 마리아 그린베르크는 콘스탄틴 이굼노프에게로 옮겼으며, 곧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제3번의 최우수 연주로 1등상을 받았다. 얼마 후 이제 20세가 된 그녀는 이굼노프와의 2년 과정을 완성하기 위해 음악원에서의 정규 학업을 포기했다. 1935년에 그녀는 전 소련 콩쿠르에서 2등상을 받았고 나중에 같은 해에 모스크바 라디오와의 오랜 관계를 맺었다. 그녀는 1936년 레닌그라드에 처음 출연했고, 1940년대와 1950년대를 거쳐 사실상 소련의 주요 마을과 주요 도시에서 연주했는데, 독주회뿐만 아니라 쿠르트 잔데를링, 알렉산더 가우크, 헤르만 아벤트로트 같은 위상을 가진 지휘자들, 보로딘 콰르텟, 볼쇼이 극장 스트링 콰르텟, 스비아토슬라프의 아내(가 아니라 동반자라고 해야 맞음)인 소프라노 니나 도를리아크와도 협연했다.

Teaching & First Foreign Tour & Beethoven / 교편과 첫 외국 투어와 베토벤
Between September 1959 and her death twenty years later, Maria Grinberg taught at the Gnesin Institute, where she became a professor in 1970. She undertook her first foreign tour at the end of 1958, when she visited Czechoslovakia. There followed visits to Bulgaria in 1959, to Poland in 1962 and 1963, and to the German Democratic Republic in 1963 and 1966, when the accent was firmly on Beethoven. In 1967 and 1968 she appeared in several Dutch cities within the framework of a Beethoven cycle, and in 1969 she performed Beethoven's Second Piano Concerto at the Leipzig Gewandhaus under Kurt Masur. Beethoven also figured on the programme of her final orchestral concert in November 1975, when she performed his Third Piano Concerto in the Great Hall of the Leningrad Philharmonic. Maria Grinberg gave her final solo recital in January 1978, six months before her death, when she played works by Mozart and Mendelssohn in the Great Hall of the Moscow Conservatory. She died in Tallin on 14 January 1978 and was buried in Moscow.

1959년 9월부터 그녀가 사망하는 20년 후까지, 마리아 그린베르크는 그네신 음대에서 가르쳤는데 1970년에는 정교수가 되었다. 그녀는 1958년 말에 첫 외국 투어를 가졌는데, 체코슬로바키아를 방문했다. 이어서 1959년에는 불가리아, 1962년과 1963년에는 폴란드, 1963년과 1966년에는 동독을 방문했는데, 베토벤에 전념했던 시기였다. 1967년과 1968년에 그녀는 베토벤 완주라는 테두리 안에서 네덜란드의 여러 도시들을 방문했으며, 1969년에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에서 쿠르트 마주어의 지휘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을 협연했다. 베토벤은 1975년 11월에 가졌던 그녀의 마지막 오케스트라 콘서트 프로그램에서도 계획되었는데,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대강당에서 피아노 협주곡 제3번을 협연했다. 마리아 그린베르크는 1978년 1월에 마지막 독주회를 가졌는데, 그녀가 사망하기 6개월 전에는 모스크바 음악원 대강당에서 모차르트와 멘델스존의 작품들을 연주했다. 그녀는 1978년 1월 14일 탈린에서 사망했으며 모스크바에 묻혔다.

An Original Choice / 참신한 선택
Among Russian pianists, Maria Grinberg commands attention not least by dint of her unusual repertory, of which the present recording offers a representative cross-section that takes us from Spain to Vienna by a somewhat circuitous route. Carlos de Seixas was born in Coimbra almost three hundred years ago. His life bears striking parallels to that of the Italian composer Domenico Scarlatti, except that Seixas never left his native Portugal. Like Scarlatti, he studied with his father and held an appointment at the Lisbon Court chapel, where Scarlatti was later to conduct. Seixas was an organist by profession, initially at Coimbra Cathedral and, from 1720, at the royal chapel in the capital. Although his official duties must have required him to write large amounts of sacred music, only eight choral works have survived in addition to a number of organ pieces, of which his toccatas have acquired a certain popularity, not least because they are preeminently suited to performances on a modern concert grand.

러시아 피아니스트들 사이에서 마리아 그린베르크는 그녀의 특이한 레퍼토리 때문에 주목받았는데, 현재의 녹음은 우회적인 경로로 스페인부터 비엔나까지 우리를 안내하는 대표적인 단면을 제공한다. 카를로스 데 세이하스는 거의 300년 전에 코임브라에서 태어났다. 세이하스의 인생은 그가 조국 포르투갈을 결코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제외하면, 이탈리아 작곡가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의 것과 현저히 닮아 있다. 스카를라티처럼 그는 아버지에게서 배웠고 스카를라티가 나중에 지휘했던 장소인 리스본 왕실 예배당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세이하스는 코임브라 대성당에서 처음으로 직업 오르가니스트였고, 1920년부터는 수도(리스본)의 왕실 예배당에서 오르가니스트였다. 그의 공식 직무로 인해 많은 양의 종교 음악을 써야 했음에도, 많은 오르간 작품 이외에도 8곡의 합창곡만이 남아있는데, 그 중 그의 토카타는 현대 콘서트그랜드피아노에서의 연주에 탁월한 효과가 있기 때문에 확실한 인기를 얻었다.

In the Gloomy Escorial / 음울한 에스코리알
Like Phliip II of Spain in Verdi's "Don Carlos", the Catalan composer Antonio Soler died in the gloomy Escorial. He entered the choir school at Montserrat at the age of six and trained as an organist and composer. He, too, came into contact with Domenico Scarlatti: in 1752 he joined the Escorial community of Jeronymite monks and studied with the then elderly composer in Madrid, where the Jeronymites had an annexe. Soler contributed to a relatively wide range of musical genres, writing not only villancicos, sacred works and chamber music but also pieces for the organ and harpsichord. Among his keyboard pieces are six highly regarded double organ concertos and some 149 harpsichord sonatas stylistically reminiscent of those of Domenico Scarlatti.

베르디의 오페라 <돈 카를로스>에 나오는 스페인 국왕 필립 2세처럼, 카탈로니아의 작곡가 안토니오 솔레르는 음울한 에스코리알(마드리드 근교에 있는 건축물로, 왕궁, 역대 왕의 묘소, 예배당, 수도원 등이 있음)에서 사망했다. 그는 6세에 몬체라트에 있는 합창단 학교에 들어갔으며 오르가니스트와 작곡가로서 훈련 받았다. 그도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와 만났다. - 1752년에 그는 헤로니미테(예로니모 은수회) 수도승들의 에스코리알 공동체에 합류했으며 헤로니미테의 별관이 있는 마드리드에서 나이가 더 많은 작곡가를 사사했다. 솔레르는 빌란시코스(스페인 크리스마스 캐럴), 중교 음악, 실내악뿐만 아니라 오르간과 하프시코드를 위한 곡들을 쓰면서 비교적 다양한 음악 장르에 기여했다. 그의 키보드 곡들 중에는 6개의 높이 평가받는 두 대의 오르간을 위한 협주곡과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의 스타일을 연상케 하는 약 149개의 하프시코드 소나타가 있다.

Written for a Princess / 왕녀를 위해 작곡되다
Unlike Carlos Seixas, Domenico Scarlatti is widely regarded as one of the great Classical composers. Also known as "the Younger" to distinguish him from his father, Alessandro, who is remembered as an opera composer and as "maestro di cappella" to the Neapolitan Court, Domenico was born in the same year as Bach and Handel and has gone down in the history of music as the composer of no fewer than 555 single-movement harpsichord sonatas in binary form, a genre that he helped to pioneer. He studied with his father and later travelled to Venice, where he met Handel. After a period spent in Rome, where he held a whole series of appointments (including one at the Vatican), he finally moved to Lisbon in the early 1720s, where he taught the Infanta Maria Barbara. When the latter married into the Spanish royal family, she took her teacher with her, so that Scarlatti spent the last three decades of his life, from 1729 until 1757, in Seville and Madrid. The majority of his sonatas were written for the highly gifted Infanta and later Queen of Spain. (That young princesses were no less gifted musically than ruling monarchs such as King Frederick the Great of Prussia, who was not only a virtuoso flautist but a talented composer in his own right, should come as no surprise: after all, they had plenty of time on their hands.) Although the writing is generally in two parts, Scarlatti's sonatas none less not infrequently involve virtuoso passagework and testing intervals, with the transparent textures proving treacherous rather than accommodating: every unevenness is instantly audible. Intended for the harpsichord, these works were immediately claimed by the fortepiano, which had been developed by Bartolomeo Christofori in the years around 1700, but the modern concert piano is perhaps even better equipped to show off the full range of their dynamic nuances to the greatest possible advantage.

카를로스 세이하스와 달리 도메니코 스카를라티는 위대한 클래식 작곡가들 중의 한 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오페라 작곡가이자 나폴리 궁정의 “마에스트로 디 카펠라”로 기억되는 그의 아버지 알레산드로와 구별하기 위해 “더 어린” 스카를라티로 알려진 도메니코는 바흐, 헨델과 같은 해에 태어났는데 음악사에서 555여 개의 2부 형식으로 된 단악장 하프시코드 소나타의 작곡가로 기록되었는데, 이 장르는 그가 개척한 것이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공부하고 베니스로 여행을 갔는데, 거기에서 그는 헨델을 만났다. 그가 일련의 직책(바티칸에서의 한때를 포함)을 맡고 있었던 로마에서 보냈던 시기 이후, 마침내 1720년대에 리스본으로 이동했는데, 거기에서 마리아 바르바라 공주를 가르쳤다. 후자는 스페인의 왕가와 결혼했는데, 그녀가 스승을 데리고 갔기 때문에, 스카를라티는 1729년부터 1757년까지 세비야와 마드리드에서 그의 생애의 마지막 30년을 보냈다. 그의 소나타의 대다수는 매우 재능 있는 왕녀이자 나중의 스페인 왕비를 위해 쓰였다. (그 젊은 공주가 비르투오소 플루티스트였을 뿐만 아니라 당당히 재능 있는 작곡가였던 프로이센 왕국의 프레데리크 왕 같은 절대 군주보다는 음악에 대한 재능이 덜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어야 한다. - 결국 그들은 많은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작품은 일반적으로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스카를라티의 소나타는 잘 협조한다기보다는 위험하다는 것을 제공하는 투명한 텍스처와 함께 비르투오소 패시지워크와 곤란한 음정을 자주 포함하지 않는다. - 모든 얼룩이 즉시 들린다. 하프시코드를 위해 만들어진 이 작품들은 바로 1700년경에 바르톨로메오 크리스토포리가 개발한 포르테피아노에 의해 즉각적으로 요구되었지만, 현대의 콘서트피아노는 가장 가능한 이점까지 역동적인 뉘앙스를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장비를 더 잘 갖추고 있을 것이다.

In the Shadow of Great Works / 위대한 작품들의 그늘에서
Scarlatti died in Madrid in 1757. The previous year had seen the birth in Salzburg of Wolfgang Amadeus Mozart, whose career as a composer was given its first significant boost in London in 1764, when he received the blessing of Johann Sebastian's youngest son, Johann Christian Bach. Among the impressive list of pieces that he wrote for the piano are twenty-one rondos, fantasias and miscellaneous works, of which only a handful can stand comparison with his finest sonatas, concertos and chamber works. Among these few pieces is his C minor Fantasia K. 475 of 1785. Yet the C minor Fantasia performed here by Maria Grinberg is another piece in the same key, K. 396, a work that is virtually never heard (the reader will recall the pianist's predilection for wayward works): it remains a fragment and was evidently conceived as the slow movement of a violin sonata, since it is only in this form that the autograph score survives. A performing version was prepared by the Abbe Maximilian Stadler, who was a friend not only of Mozart but of Haydn, too, and who was also a noted church composer in his own right. (His oratorio "Die Befreyung von Jerusalem" was highly successful in its day.)

스카를라티는 1757년 마드리드에서 사망했다. 바로 그 전해에는 잘츠부르크에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태어났다. 그의 작곡가로서의 경력은 1764년에 런던에서 엄청난 효과가 있었는데, 그가 요한 제바스티안의 막내아들인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의 축복을 받았을 때였다. 그가 피아노를 위해 쓴 인상적인 곡들 중에는 21개의 론도, 환상곡, 기타 작품들이 있으며, 그 중 소수만이 그의 훌륭한 소나타, 협주곡, 실내악 작품들과 비견될 수 있다. 이 소수의 곡에는 1785년에 작곡한 환상곡 K. 475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마리아 그린베르크가 연주한 환상곡은 같은 조성인 K. 396으로 사실상 거의 연주되지 않는다. (독자는 피아니스트가 특히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을 재조명했다는 것을 상기할 것이다.) - 이 곡은 단편으로 남아있으며 바이올린 소나타의 느린 악장으로 여겨졌는데, 자필 서명이 남아있는 것은 이 형식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연주 버전은 모차르트의 친구일 뿐만 아니라 하이든의 친구이기도 했던 아베 막시밀리안 슈타들러에 의해 준비된 것으로, 그는 당당히 유명한 교회 작곡가이기도 했다. (그의 오라토리오 <예루살렘으로부터의 해방>은 당시에 매우 성공적이었다.)

A Saxon Trade Centre & Bach's Chief Sphere / 색슨 무역 중심과 바흐의 최고 분야
Robert Schumann studied law and the piano in Leipzig, the latter (under his future father-in-law Friedrich Wieck) with more enthusiasm than the former. But an injury sustained to his right hand and possibly caused by a mechanical aid used in practising the instrument put paid to his career as a virtuoso and encouraged him to pursue alternative means of earning his living. From his father, a publisher, he inherited a journalist's gift for writing and in 1834 founded the "Neue Zeitschrift für Musik", to which many composers, including Brahms, owed their start in life. He also turned to composition. Among the works that he wrote for the piano between 1836 and 1843 are thirteen pieces that constitute a kind of musical diary not only of his inner change of direction but also of his relationship with Clara Wieck, from its initial stirrings and subsequently all-consuming passion to his marriage with her in 1840. These events unfolded on the banks of the Elster and Pleiße in Leipzig. In 1844 the composer's sense of inner unrest was compounded by outward upheavals in the form of an uncertain future that took him first to Dresden and then to Düsseldorf, where ten years later, he attempted to take his own life by throwing himself in the Rhine. Two years previously he had sifted through the earlier set of thirteen piano pieces, adding a fourteenth from 1849 and publishing them as his Op. 99 under the title "Bunte Blätter" (Variegated Leaves), a title chosen to reflect the fact that the pieces were initially intended to be issued separately with different coloured wrappers.

로베르트 슈만은 라이프치히에서 법학과 피아노를 공부했는데, 후자(미래에 장인이 되는 프리드리히 비크의 밑에서)는 전자보다 열정이 넘친다. 그러나 오른손에 부상을 당했고 아마도 악기를 연습하는 데에 사용된 연습 기계로 인한 것으로 그의 비르투오소로서의 경력을 좌절시켰을 것이고 그에게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대안을 추구하도록 장려했다. 그는 출판업자인 아버지로부터 저널리스트의 글 쓰는 재능을 물려받았고 1934년에 브람스를 비롯한 많은 작곡가들이 인생에서 시작해야 할 <음악신보>를 물려받았다. 그는 또한 작곡으로 돌렸다. 그가 1836년과 1843년 사이에 피아노를 위해 쓴 작품들 중에는 그의 내적 변화의 방향뿐만 아니라 초기의 흥분과 결국 온통 마음을 다 빼앗는 열정부터 1840년 그녀와의 결혼까지 클라라 비크와의 관계에 대한 음악적인 일기의 일종을 구성하는 13개의 곡들이 있다. 이 사건들은 라이프치히의 엘스터와 플라이세 강 유역에서 펼쳐졌다. 1844년 작곡가의 내면의 불안감은 드레스덴과 이후 뒤셀도르프로 그를 처음 데려갔던 불확실한 미래의 형태로 외관상 대변동으로 인해 악화되었는데, 그는 10년 후 뒤셀도르프의 라인 강에서 투신자살을 시도했다. 2년 전에 그는 13개의 피아노곡을 걸러냈는데, 1849년부터 14개를 추가하여 <갖가지 작품>(여러 가지 색의 이파리들)의 제목(Op. 99)으로 출판했다. 이 곡들은 초기에 다른 색깔의 커버로 개별적으로 발행되도록 의도된 사실을 반영하기 위해 선택된 제목이었다.

The "Bunte Blätter" Reordered / 순서가 바뀐 “갖가지 작품”
Typical of Maria Grinberg's idiosyncratic artistry is her reordering of the original sequence of pieces and her rejection of four of the fourteen works, including the final addition. (In her defence, it may be argued that all four of these pieces - "Novellette, Marsch, Abendmusik" and "Geschwindmarsch" - are self-contained works.) It seems legitimate to preface the set with No. 10, "Präludium", and to follow it up with what were originally the first three pieces in the collection.

마리아 그린베르크의 전형적인 특유의 예술성은 그녀가 원래의 작품 순서를 재정렬한 것과 마지막 추가를 포함하여 14개의 작품 중 4개를 거부한 것이다. (그녀의 변론에서, 이 작품들 중 4개 모두 - 노벨레테, 행진, 밤의 음악, 빠른 행진곡 - 독립된 작품이라고 주장될 수 있다.) 10번 <프렐류드>로 세트를 시작하고 컬렉션의 첫 세 개의 곡을 따라가면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Schumann's own description of these works as "little pieces" underestimates their importance. For all that it evokes spontaneous parallels with his "Abend für die Jugend", the Op. 99 set goes far beyond this last-named collection. Fascinating passagework in No. 1 and widely arching melodic lines with a virtuoso accompaniment in No. 2 recall the contemporary "Kreisleriana" of 1838, while No. 3 is a vigorous, hedonistic piece. Heartfelt poetry and affecting lyricism characterise the next five pieces, the second of which (No. 5 in B minor) belongs, like No. 2, to the world of night. To end the set, Grinberg rejects the later and somewhat mannered "Geschwindmarsch" (No. 14), replacing it with the last of the early "Bunte Blätter, Scherzo" (No. 13). In this way she finds a compromise between Schumann's dramaturgical framework and the variegated colours of autumn leaves dancing in wind-swept, tree-lined avenues, and in doing so produces a plenitude of fascinating atmospheric miniatures. We shall shortly encounter two of these pieces again.

“소품들”로서 이 작품에 대해 슈만 자신은 이 곡들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한다. 그의 <어린이를 위한 밤>과 함께 자발적인 유사한 것들을 떠오르게 하는 것임에도, Op. 99는 이 마지막으로 명명된 컬렉션을 훨씬 뛰어넘는다. 1번의 매력적인 패시지워크와 2번의 비르투오소 반주와 함께 폭넓게 이어지는 멜로딕 라인은 1838년의 현대 <크라이슬레리아나>를 상기시키는 반면, 3번은 활기찬 쾌락주의적인 곡이다. 진심어린 시취와 깊은 슬픔(연민)을 유발하는 서정주의는 다음 5개의 곡들을 특징짓는데, 그 중 두 번째 곡(5번)은 2번처럼 밤의 세계에 속한다. 이 세트를 끝내기 위해 그린베르크는 초기의 <분테블래터, 스케르초>(13번)의 마지막으로 대체하면서, 나중의 다소 자연스럽지 못한 <빠른 행진곡>(14번)을 거부한다. 이런 방식으로 그녀는 슈만의 극작의 뼈대와 바람받이의 가로수 길에서 춤추는 여러 가지 색깔의 단풍 사이에서 타협점을 모색하고, 그렇게 하면서 풍부한 매력적인 분위기의 소품들을 만든다. 우리는 곧 이 두 곡들 중에서 두 곡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Variety and Skill / 다양함과 재주
In Johannes Brahms, whom he had once hailed ecstatically as the new Messiah in the pages of his "Neue Zeitschrift für Musik", Schumann found a worthy successor as a composer of symphonies, lieder, chamber and, principally, piano music. Above all, Brahms seemed uniquely suited to developing Schumann's omnipresent variation principle and raising it to new heights of perfection. Brahms' second set of variations dates from 1854 - a fateful year in Schumann's life - and is based on a wistful theme from the older composer's Op. 99 collection, namely, the first of the subgroup of pieces headed "Fünf Albumblätter", No. 4 (Ziemlich langsam) in F sharp minor. Clara Schumann had already written a set of variations on this affecting theme in 1853, inspiring the young Brahms to weave several stylistic and textural reminiscences of Schumann into his own set of sixteen variations. With the exception of four variations in B minor (No. 9), D major (No. 10), G flat major (No. 15) and F sharp major (No. 16), all the variations are in the home key of F sharp minor. The listener will also be struck by various contrapuntal masterstrokes on the part of the twenty-year-old composer, all of them acts of homage to Schumann's genius and yet not entirely free from feelings of guilt.

슈만은 그의 <음악신보>에서 요하네스 브람스에게 도취되어 새로운 메시아로 표현했는데 교향곡, 가곡, 실내악, 주로 피아노 음악에서 가치 있는 후계자를 발견했다. 무엇보다도 브람스는 슈만의 보편적인 변주곡의 원리를 발전시키고 그것을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데에 특별히 적합한 것처럼 보였다. 브람스의 두 번째 변주곡 세트는 1854년으로 - 슈만의 인생에서 운명적인 해 - 더 나이가 많은 작곡가인 슈만의 Op. 99 컬렉션으로부터 동경하는 주제를 토대로 하는데, 컬렉션 안에 있는 하위그룹 중 첫 번째인 <5개의 단편> 중 4곡(매우 느리게)이다. 클라라 슈만은 이미 1853년에 이 깊은 슬픔(연민)을 유발하는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썼는데, 젊은 브람스에게 여러 가지 스타일과 슈만의 구성에 대한 회상들을 그의 16개 변주곡 세트에 짜서 넣도록 영감을 주었다. 4개의 변주곡 9번(B단조), 10번(D장조), 15번(내림G장조), 16번(내림F장조)을 제외한 모든 변주곡들이 올림F단조이다. 청취자는 22세 작곡가가 만든 다양한 대위법적으로 절묘한 작품에도 감명 받을 것인데, 이 곡 모두 슈만의 천재성에 경의를 나타내지만 죄의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Brahms Variations on a Theme by Robert Schumann in f#, Op. 9: Theme by Schumann Bunte Blatter, Op. 99 No. 4 Ziemlich langsam / 브람스 <로베르트 슈만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 중 슈만의 분테블래터 4번의 주제 (클라라 슈만의 변주곡에서도 등장)

Charm and Verve for Four or Two Hands / 4개 또는 2개의 손을 위한 작품에 대한 매력과 열정
A little over a decade later, Brahms moved to Vienna, which he regarded henceforth as his adoptive home. It was to his friend, the influential music critic and sworn enemy of the New German School, Eduard Hanslick, that he dedicated sixteen waltzes for piano duet: "I thought of the beautiful young ladies with whom you play duets." Brahms himself described these waltzes as "little and innocent" and recalled Schubert in this context, but there are also clear reminiscences of Schumann's "Faschingsschwank" and of Beethoven. Since young and pretty performers are not always available, Brahms immediately decided to transcribe the duets for piano solo, and it is to this version that these pieces owe their present, undiminished popularity. No. 1 hints at a theme from Schumann's "Papillons"; No. 3 in G sharp minor adds a tender Ländler-like note to the otherwise spirited tone; and No. 7 - an Andante in C sharp minor - creates an oasis of calm. For the version for piano solo, No. 16 was transposed from D minor to C sharp minor: two melodic lines are offset against each other, with Brahms, as a master of unobtrusive counterpoint, inverting upper and lower voices. No. 6 in C sharp major is a study in pizzicato and is followed in this recording by No. 15, the velvety textures and emotional intensity of which (an intensity achieved by the composer's use of parellel sixths) immediately made this waltz the most popular piece in the set. Its transposition from A to A flat major at least makes it easier from the player's point of view.

10년 남짓이 지난 후, 브람스는 이후에 그가 입양된 집으로 여겼던 비엔나로 옮겼다. 그가 4개의 손을 위한 16개 왈츠를 헌정한 사람은 영향력 있는 음악 평론가이자 새로운 저먼 스쿨의 숙적인 에두아르트 한슬리크였다. - “당신과 함께 피아노로 듀오를 연주하는 아름다운 숙녀들을 생각했습니다.” 브람스 자신은 이 왈츠들을 “작고 순수한” 것으로 표현했으며 이런 맥락에서 슈베르트를 상기했지만, 슈베르트의 <빈의 사육제>와 베토벤이 분명히 연상된다. 젊고 예쁜 연주자들이 언제나 시간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브람스는 즉시 듀오곡을 피아노 독주를 위해 편곡하기로 결정했고, 현재 이 곡들은 인기가 줄어들지 않았기 때문에 이 버전에 있다. 1번은 슈만의 <나비>의 주제를 암시한다. - 3번은 우아한 랜틀러 같은 음을 그렇지 않은 활기찬 음색에 더한다. - 그리고 7번 안단테(느리게)는 고요한 오아시스를 만든다. 피아노 독주 버전에서는 16번이 D단조에서 올림C단조로 바뀌었다. - 2개의 멜로딕 라인은 각각 상쇄되는데, 브람스와 함께 눈에 잘 띄지 않는 대위법의 마스터로서 윗성부와 아랫성부를 반전시킨다. 6번은 피치카토 주법에 대한 연구이고 이 녹음에서 15번으로 이어지는데, (작곡가의 6도 음정 병행으로 인해 달성된 강도의) 매우 부드러운 질감과 감정의 강도로 즉시 이 왈츠는 이 세트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곡이 되었다. A장조(4개의 손을 위한 버전)에서 내림A장조(독주 버전)로의 전환은 적어도 연주자의 관점에서 보다 편안하게 만든다.

Brahms Waltz in C#, Op. 39 No. 6 / 브람스 왈츠 6번의 스타카토 진행

Brahms Waltz in Ab, Op. 39 No. 15 / 브람스 왈츠 15번의 6도 음정 병행


오랜만에 러시안 피아노 스쿨을 공부하면서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솔레르는 스카를라티의 제자였는데 스카를라티랑 스타일이 비슷해서 그냥 들어보면 솔레르인지 스카를라티인지 구분이 안 간다고 피아노 문헌 시간에 비교감상을 한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한글 정보에서 해석을 조금 보태서 썼다. 그래봤자 한두 문장... 슈만의 자살 시도는 가족력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슈만의 음악의 특징은 비극을 잉태한 아름다움이라고 한다.

댓글 2개:

  1. https://classicalpippo9.com/2017/10/24/russian-pianist-school-vol-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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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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