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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18일 수요일

Melodiya / Vladimir Sofronitsky - Russian Piano School, Vol. 5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1901-1961)는 이제 전설이 되어버린 이름이다. 스탈린 치하의 심한 규제 덕분에 서구에 널리 알려지지 못했으나 길렐스와 리히터에 앞서 소련 피아노계를 대표했던 위대한 연주가였다. 특히 스크리아빈의 작품들에서는 단연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의 소중한 기록들을 2장의 음반에 간추렸다.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는 사무일 파인베르크, 마리아 유디나와 더불어 스탈린 시대의 러시아를 대표하는 명 피아니스트이다. 그는 한 세대 앞의 명 피아니스트 알렉산더 골덴바이저나 겐리프 네이가우스와 한 세대 후의 유명한 피아니스트 에밀 길렐스,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등을 잇는 중간 세대에 속해 있었고, 또 그들이 주로 활동했던 시기가 러시아에서는 가장 탄압이 심했던 스탈린 체제하였기 때문에 서방 세계에는 비교적 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음악이 지닌 가치는 이런 모든 제약을 넘어설 만큼 훌륭한 것이었다.

소프로니츠키는 1901년 5월 8일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물리학자였으며 그의 어머니는 유명한 초상화가인 블라디미르 보로비코프스키의 손녀(4촌)였다. 그러나 그의 가족이 1903년에 바르샤바로 이주하는 바람에 소프로니츠키는 그곳에서 요절한 천재 피아니스트 부유클리의 어머니이자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의 제자로 당시 바르샤바에 널리 알려져 있었던 교사 안나 레베데바-게체비치에게서 최초의 피아노 수업을 받았다. 이때부터 그는 러시아의 유명한 작곡가이자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교장을 지내고 있던 글라주노프의 관심을 끌기 시작하였는데, 이 거장은 소프로니츠키를 곧 폴란드의 명 피아니스트이자 쇼팽의 해석가로 유명한 알렉산데르 미하워프스키에게 보내 그에게서 피아노 수업을 받게 하였다. 그러나 1913년 그의 가족은 다시 거주지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겼고, 소프로니츠키는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의 2년간을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레오니드 A. 셰드린에게서 배운 후 1916년부터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명교사 레오니드 니콜라예프와 막시밀리안 스타인베르크 문하에서 수업을 마치게 된다. 1921년 마리아 유디나와 공동으로 안톤 루빈스타인 상을 수상하며 음악원을 졸업한 소프로니츠키는 모스크바에서는 이미 널리 알려진 피아니스트였다. 그는 음악원 재학 시절인 1920년에 스크리아빈의 사망 5주년을 기념하여 작곡가의 작품만으로 최초의 리사이틀을 열었고, 졸업 연주회에서도 스크리아빈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했다. 또 1922년에는 그의 집에서 스크리아빈의 소나타 제3번을 연주했는데, 이때 우연히 그 자리에 참석했던 작곡가의 미망인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독주 피아노 파트가 난해하기로 유명한 스크리아빈의 “불의 시”(프로메테우스)를 니콜라이 말코의 지휘로 협연하여 잊지 못할 연주를 들려주었던 것도 바로 그 시절이었다. 그 이후 소프로니츠키는 러시아 전역을 돌며 정열적인 연주회를 계속 개최했고 1928년에는 러시아를 떠나 잠깐 폴란드에 머물렀다가, 다시 파리로 옮겨서 약 2년간 머무르며 많은 연주회를 열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글라주노프와 다시 만났으며 라흐마니노프, 살리아핀의 연주회를 듣고 큰 감명을 받았고, 알프레드 코르토, 겐리프 네이가우스와 니콜라이 메트너, 프로코피에프 등과도 깊은 교분을 맺기 시작했다.

1930년 레닌그라드로 돌아온 소프로니츠키는 놀라울 정도로 방대한 레퍼토리로 연주 활동을 계속했는데 독일과 빈의 거장들의 작품들은 물론, 이탈리아의 바로크 작곡가 스카를라티로부터 현대 프랑스의 작곡가 풀랑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작품이 그의 레퍼토리에 포함되었다. 1937~38년 사이에 그가 개최했던 12번의 전설적인 연주회에서의 레퍼토리는 북스테후데부터 쇼스타코비치까지를 총망라한 것이었고, 이런 백과사전적인 연주회 프로그램은 오로지 안톤 루빈스타인의 그것에나 비교될 수 있을 따름이었다.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교편을 잡고 연주 활동도 활발히 하였으나 1941년 레닌그라드가 독일군에 포위되면서 사정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악화되었고 그의 연주 활동도 크게 위축되었다. 그는 그 시절의 연주회를 이렇게 회상했다. “푸시킨 극장의 연주회장은 실내온도가 영하 3도까지 떨어져 있었고 모든 청중들은 두꺼운 털 코트 아래서 움츠리고 있었다. 나는 손이 얼어붙어 장갑을 끼고 연주해야만 했는데, 그럼에도 청중들은 얼마나 황홀경에 빠져있었으며, 나는 얼마나 훌륭히 연주할 수 있었던가.” 1942년에는 극도로 지친 몸을 요양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거처를 옮겼다가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로 눌러앉았는데, 1946년에는 레닌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1954년부터는 대도시의 큰 연주 홀을 피해 시골의 작은 공간에서 소수의 청중과의 만남을 위해 모스크바를 떠나 러시아 전역을 여행했다. 1959년 초 몇 달간을 몸져누웠으나 그해 가을부터는 주위의 경고를 무시하고 다시 레코딩 작업을 계속했으며 콘서트홀로도 되돌아와 1960년 12월 5일에는 모스크바 음악원 소강당에서, 1961년 1월 7일에는 스크리아빈의 탄생 89주년을 맞아 스크리아빈 박물관에서 연주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그해 1월 9일 모스크바 음악원에서의 연주회를 끝으로 다시 청중 앞에 서지 못했고, 1961년 8월 29일 6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참된 예술은 일곱 조각의 갑옷으로 억제된, 붉게 끓어오르는 용암과도 같은 것이다.”라는 그의 표현처럼 소프로니츠키의 연주는 낭만적이고 영감에 가득 차 있으면서도 또 빈틈이 없고 정확하다. 뿐만 아니라 쓸데없는 과장이나 진부함이 전혀 없어 명확하면서도 자연스럽다. 그러나 골덴바이저나 네이가우스와는 달리 그의 활동은 소련 당국으로부터 심하게 규제되고 검열 받고 있었다. 당대 소비에트 최고의 피아니스트였음에도 해외여행은 극히 제한적으로만 허용되었고, 그것은 후기로 갈수록 점점 더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제한된 요소들로 말미암아 그의 존재는 한때 서구 음악계에서 완전히 잊혀있었지만 최근에 와서 그의 연주는 완전히 새롭게 평가되고 있으며, 수많은 그의 음반들이 어둠을 털고 서방세계에 소개되고 있다.

냉전기의 서방세계에서조차도 소프로니츠키는 스크리아빈의 음악에 정열적인 사고를 불어넣고, 또 그의 난해한 양식의 내면적 의미를 풀어냈던 명연주자로 널리 알려져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의 다른 연주들 예를 들자면 서방의 고전, 낭만음악에 대한 해석은 완전히 감추어진 채로 있었던 것이다.

이 음반에 수록된 그의 녹음 가운데 슈만의 F#단조 피아노 소나타는 녹음 자체도 귀할 뿐 아니라 그 연주도 매우 뛰어난데, 스케일이 크고 로맨틱하면서도 환상적인 아름다움과 힘찬 정열을 지닌 슈만의 음악세계를 잘 표현해낸 걸작이다. 또 쇼팽의 작품들에서는 로맨틱하고 기복이 크면서도 변화무쌍한 음악적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으며, 슈베르트의 Op. 90에 포함된 두 곡의 즉흥곡에서는 이 젊은 작곡가의 서정적이고 풍부한 악상을 거의 완벽하게 재현해내고 있다.

라흐마니노프가 1896년에 작곡한 6곡의 “악흥의 순간”에는 두 개의 뚜렷한 감정적 영상이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데, 우수와 슬픔이 한 손에, 낙관주의와 신념의 확고함이 주는 남성적인 힘은 다른 한 손에 실려 표현된다. 이런 이중적인 감정의 복잡함을 소프로니츠키는 너무나 잘 들여다보고 있다.

1903년에 작곡된 스크리아빈의 소나타 제4번은 1893년에서 1943년까지의 20년간에 이르는 그의 소나타 작곡연대의 한 가운데 위치한 작품으로 안단테와 프레스토의 두 악장으로 되어 있고 아타카(attacca)라는 기호로 휴식 없이 바로 연결된다. 느린 제1악장은 시적이고 환상적이며 신비적인 아름다움을 지닌데 비해 빠른 제2악장은 정열적이고 대담하게 변화하는 리듬과 악상을 지니고 있다. 소프로니츠키 연주는 이처럼 완전히 대조적인 두 악장 사이의 차이를 탁월한 기교와 완전한 이해로 명확하게 인식시켜 주는 명연이다.

“비극적인 시”와 “왈츠”, “연습곡”에서도 소프로니츠키는 정열과 리리시즘이 교차하는 연주를 통해 낭만적 신비감을 조성해내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서는 기존의 음악적 전통을 타파하고 새로운 스타일을 주창한 세 음악가 라벨과 스트라빈스키, 프로코피에프의 음악적 이념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프로코피에프의 음악 세계는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 발표되었을 때 이에 대한 반발로 그가 즉시 “스키타이 조곡”을 발표했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스트라빈스키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여기에 수록된 Op. 31의 4곡의 “할머니의 이야기”와 그의 대표작 “덧없는 환영” Op. 17, 10개의 피아노를 위한 “에피소드” Op. 12에서도 볼 수 있듯이 프로코피에프의 음악의 가장 큰 특질은 서정주의이다. 소프로니츠키는 프로코피에프 음악의 이런 순수한 서정적인 특질들을 너무나도 잘 살려내고 있다.

CD1
01 Mozart Fantasia in c, K. 475 / 모차르트 환상곡 K. 475
02 Schubert Impromptu in Gb, Op. 90 No. 3 (played in G Major according to the first edition) / 슈베르트 즉흥곡 작품 90-3 (1판에 의하여 G장조로 연주)
03 Schubert Impromptu in Ab, Op. 90 No. 4 / 슈베르트 즉흥곡 작품 90-4
04 Schumann Sonata No. 1 in f#, Op. 11: 1. Introduzione. Un poco adagio - Allegro vivace / 슈만 소나타 1번
05 Schumann Sonata No. 1 in f#, Op. 11: 2. Aria
06 Schumann Sonata No. 1 in f#, Op. 11: 3. Scherzo e Intermezzo. Allegrissimo - Intermezzo - Tempo I
07 Schumann Sonata No. 1 in f#, Op. 11: 4. Finale. Allegro un poco maestoso - Presto - Piu allegro
08 Chopin Nocturne in F#, Op. 15 No. 2 / 쇼팽 녹턴 작품 15-2
09 Chopin Nocturne in F, Op. 15 No. 1 / 쇼팽 녹턴 작품 15-1
10 Chopin Scherzo No. 1 in b, Op. 20 / 쇼팽 스케르초 1번

CD2
01 Chopin Scherzo No. 2 in b flat, Op. 31 / 쇼팽 스케르초 2번
02 Rachmaninov Moments musicaux, Op. 16 No. 5 in Db / 라흐마니노프 <악흥의 순간> 5번
03 Rachmaninov Moments musicaux, Op. 16 No. 2 in Eb / 라흐마니노프 <악흥의 순간> 2번
04 Scriabin Sonata No. 4 in F#, Op. 30: 1. Andante / 스크리아빈 소나타 4번
05 Scriabin Sonata No. 4 in F#, Op. 30: 2. Prestissimo volando
06 Scriabin Poeme tragique, Op. 34 / 스크리아빈 <비극적인 시>
07 Scriabin Valse in Ab, Op. 38 / 스크리아빈 왈츠 작품 38
08 Scriabin Etude in b flat, Op. 8 No. 11 / 스크리아빈 에튀드 작품 8-11
09 Prokofiev 4 Tales of a Grandmother, Op. 31: 1. Moderato / 프로코피에프 4개의 <할머니의 이야기>
10 Prokofiev 4 Tales of a Grandmother, Op. 31: 2. Andantino
11 Prokofiev 4 Tales of a Grandmother, Op. 31: 3. Andante assai
12 Prokofiev 4 Tales of a Grandmother, Op. 31: 4. Sostenuto
13 Prokofiev Vision fugitive, Op. 22 No. 7 (Pittoresco. Arpa) / 프로코피에프 <덧없는 환영> 중 7번
14 Prokofiev Sarcasm, Op. 17 No. 3 (Allegro precipitato) / 프로코피에프 5개의 <풍자> 중 3번
15 Prokofiev Pieces, Op. 12 No. 2 Gavotte / 프로코피에프 10개의 에피소드 중 2번 가보트
16 Prokofiev Pieces, Op. 12 No. 3 Rigaudon / 프로코피에프 10개의 에피소드 중 3번 리고동
17 Prokofiev Pieces, Op. 12 No. 6 Legende / 프로코피에프 10개의 에피소드 중 6번 전설
18 Prokofiev Pieces, Op. 12 No. 7 Prelude in C / 프로코피에프 10개의 에피소드 중 7번 프렐류드
19 Prokofiev Pieces, Op. 12 No. 8 Allemande / 프로코피에프 10개의 에피소드 중 8번 알르망드
20 Prokofiev Pieces, Op. 12 No. 9 Scherzo humoristique / 프로코피에프 10개의 에피소드 중 9번 유머러스한 스케르초

Vladimir Vladimirovich Sofronitsky (1901-1961) /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소프로니츠키
"True art is like red-hot, boiling lava held in check by seven plates of armour." This was the motto that governed one of Russia's most admired musicians, Vladimir Sofronitsky. Often compared - not without justification - to the symbolist poet Alexander Block, he married the daughter of his idol, Alexander Scriabin, the pianist-composer and visionary with metaphysical leanings who died prematurely in 1915. The sense of poetry which he brought to his readings prompted Heinrich Neuhaus to comment: "His playing created an enhanced feeling of beauty, comparable to the magic and fragrance of spring flowers, lily of the valley or lilac, evoking vivid recollections of something that we have experienced so often and that we will experience over and over again, but each time as though it were for the first time."

“참된 예술은 일곱 조각의 갑옷으로 억제된, 붉게 끓어오르는 용암과도 같은 것이다.” 이것은 러시아의 가장 존경받았던 음악가들 중의 한 명인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의 말이다. 타당한 이유 없이 상징주의 시인 알렉산더 블록과 종종 비교되는 그는 그의 우상으로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이고 1915년에 일찍이 사망했으며 형이상학적인 성향을 가진 몽상가인 알렉산더 스크리아빈의 딸과 결혼했다. 그가 악보에 가져온 시적 감각에 대해 하인리히 네이가우스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 “그의 연주는 우리가 자주 경험하고 또 반복해서 경험할 것이지만 각각 처음인 것처럼 뭔가 생생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봄꽃들, 골짜기의 백합이나 라일락의 마술과 향기에 비견될 수 있는 향상된 아름다움을 만들었다.”

Born in St Petersburg on 8 May (old style 25 April) 1901, Sofronitsky had an interesting family background. His father was a physicist, and his mother the great-niece of the well-known portraitist, Vladimir Borovikovsky. In 1903 the family moved to Warsaw, where the boy received his first piano instruction from Anna Lebedeva-Getzevich (mother of the sadly short lived pianist Buyukli), who had studied with Nikolai Rubinstein, founder and first director of the Moscow Conservatory. By that time, Sofronitsky had attracted the attention of Alexander Glazunov, director of the St Petersburg Conservatory, who sent him to the Polish pianist Alexander Michalowski. Back in his native city, he entered the piano class of Leonid Nikolayev in 1916, simultaneously studying composition with Maximilian Steinberg, a pupil of Rimsky-Korsakov. At the age of 18, he performed in public for the first time. In 1921, he passed his examinations with flying colours alongside fellow student Maria Yudina. One year before, he had given his first recital of works by Scriabin to mark the fifth anniversary of the composer's death. He went on to include Scriabin's only piano concerto in his examination programme, and in 1922 he performed the third sonata in his own home. Tatiana Schloezer, the composer's widow, who was present on the occasion, was deeply moved and admitted that after her husband's death no pianist had ever played the music in this way. Similarly, it was Sofronitsky who in 1922 assumed the fiendishly difficult piano part when Scriabin's "Poeme du feu" ("Prometheus") was given a memorable performance under the direction of Nikolai Maiko.

1901년 5월 8일(구력으로는 4월 25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소프로니츠키는 흥미로운 가족 배경을 가졌다. 그의 아버지는 물리학자였으며 그의 어머니는 유명한 초상화가인 블라디미르 보로비코프스키의 조카딸(4촌)이었다. 1903년에 그의 가족은 바르샤바로 이주했고, 소년은 그곳에서 모스크바 음악원의 창설자이자 초대 교장이었던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의 제자인 안나 레베데바-게체비치(슬프게도 요절했던 피아니스트 부유클리의 어머니)에게서 최초의 피아노 수업을 받았다. 당시에 소프로니츠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장 알렉산더 글라주노프에 의해 주목받았고, 글라주노프는 소프로니츠키를 폴란드 피아니스트 알렉산데르 미하워프스키에게 보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1916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레오니드 니콜라예프에게서 피아노,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제자인 막시밀리안 스타인베르크에게서 작곡을 사사했다. 18세에 그는 처음으로 첫 공개 연주회를 가졌다. 1921년에 그는 동창생 마리나 유디나와 함께 우수한 성적(안톤 루빈스타인 상 공동 수상)으로 졸업했다. 1년 전에 그는 스크리아빈의 사망 5주년을 기념하여 작곡가의 작품만으로 최초의 리사이틀을 열었다. 그는 졸업 연주회에서 스크리아빈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했으며, 1922년에는 그의 집에서 스크리아빈의 소나타 제3번을 연주했다. 이때 우연히 그 자리에 참석했던 작곡가의 미망인인 타티아나 쉴뢰처는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이런 방식으로 음악을 연주한 피아니스트가 남편 사후에 없다고 최고의 해석이라는 찬사를 보내면서 인정했다. 독주 피아노 파트가 난해하기로 유명한 스크리아빈의 <불의 시>(프로메테우스)를 니콜라이 말코의 지휘로 협연하여 잊지 못할 연주를 들려주었던 것도 바로 그 시절이었다.

Following a period of intensive concertizing in Russian towns the artist left his country in 1928 to spend a short time in Poland and then two years in France. In Paris, he immediately created a stir, gaining the admiration of Prokofiev, 10 years his senior, whom he befriended, remaining in close touch with him after the latter's return to Russia. Another important encounter brought him into contact with the composer Nikolai Medtner, whose pronounced flair for rhythm and agogic accents impressed him deeply. By the time he returned to what was now Leningrad in 1930, his repertoire had been greatly expanded. Apart from the German and Viennese masters, Sofronitsky was also playing Scarlatti and modern French composers, including Poulenc. During the 1937-38 season he gave a legendary series of 12 recitals devoted to composers ranging from Buxtehude to Shostakovich - an encyclopaedic undertaking comparable only to Anton Rubinstein's "historical recitals".

1928년에는 러시아를 떠나 잠깐 폴란드에 머물렀다가, 다시 파리로 옮겨서 약 2년간 머무르며 많은 연주회를 열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파리에서 그는 10년 선배인 프로코피에프의 찬사를 받으면서 곧 후끈 달아올랐는데, 프로코피에프와 교분을 맺은 소프로니츠키는 러시아로 돌아온 후에도 프로코피에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또 다른 중요한 만남은 그에게 작곡가 니콜라이 메트너와의 접촉을 가져왔는데, 소프로니츠키는 그의 리듬과 완급법(緩急法)에 의한 악센트(음의 강도를 높이지 않고 음을 약간 연장시킴으로써 생기는 악센트)에 대한 재능에 깊이 감명 받았다. 1930년 레닌그라드로 돌아온 소프로니츠키는 놀라울 정도로 방대한 레퍼토리로 연주 활동을 계속했다. 독일과 빈의 거장들의 작품들은 물론, 스카를라티로부터 풀랑크를 포함하는 현대 프랑스의 작곡가들도 연주했다. 1937~38년 사이에 그가 개최했던 12번의 전설적인 연주회에서의 레퍼토리는 북스테후데부터 쇼스타코비치까지를 총망라한 것이었고, 이런 백과사전적인 연주회 프로그램은 오로지 안톤 루빈스타인의 “역사적인 리사이틀”에나 비교될 수 있을 따름이었다.

While the city was besieged by Hitler's armies, the situation became almost unbearable. "The temperature in the hall of the Pushkin Theatre was three degrees below freezing. The audience were wrapped in fur coats. I was playing with fingerless mittens on my hands. But how enraptured they were, and how well I played!"

레닌그라드가 히틀러의 독일군에 포위되면서 사정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악화되었다. “푸시킨 극장의 연주회장은 실내온도가 영하 3도까지 떨어져 있었다. 모든 청중들은 두꺼운 털 코트 아래서 움츠리고 있었다. 나는 손이 얼어붙어 손가락이 뚫린 장갑을 끼고 연주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청중들은 얼마나 황홀경에 빠져있었으며, 나는 얼마나 훌륭히 연주할 수 있었던가!”

From the autumn of 1942 until his death, Sofronitsky taught at the Moscow Conservatory. As well as giving concerts in large halls (e.g. the Leningrad Philharmonic Hall), he performed in the more intimate atmosphere of the Scriabin Museum. He made a guest appearance during the Potsdam Conference of the Allied victor powers (1945), undertook a five-night Chopin cycle in 1949, the centenary year of the composer's death, and gave a memorable recital in 1953 to mark the 125th anniversary of Franz Schubert's death. But his appearances became less and less frequent, and from 1955 he confined his activities to recitals in the museum. He died in Moscow on 29 August 1961.

1942년 가을에 타계할 때까지 소프로니츠키는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가르쳤다.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홀 같은) 대형 홀들에서 연주회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스크리아빈 박물관의 더 친숙한 환경에서 연주하기도 했다. 1945년에는 스탈린에 의해 포츠담 회담에 급히 파견되어 연합국 지도자 앞에서 연주를 선보인 바 있고, 1949년 모스크바 음악원 대강당에서 폴란드 작곡가 타계 100주기를 기념하기 위해 모스크바 음악원 대강당에서 연이어 5회의 쇼팽 리사이틀을 가졌으며, 1953년에는 슈베르트 타계 125주기를 기념하기 위해 비엔나 작곡가의 작품으로 헌정된 리사이틀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점점 청중 앞에 서지 못했고 1955년부터 그의 활동을 박물관의 리사이틀에 한정시켰다. 그는 1961년 8월 29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Unlike Goldenweiser and Neuhaus, Sofronitsky made no attempt to come to an arrangement with Soviet officialdom, and so restrictions were inevitable. Although he was regarded as one of the country's foremost virtuosos, the authorities rarely allowed him to perform in Western countries. Relegated to a middle-level teaching job without executive responsibilities, this sensitive and increasingly frustrated musician became addicted to alcohol and drugs. Sofronitsky is an artist well worth discovering in Western Europe, all the more so as the spiritual quality of his style may convey an idea of the fascination which his idol and father-in-law, Alexander Scriabin, must have exercised with his playing. But his interpretations of West European classical and Romantic composers are no less intriguing.

골덴바이저나 네이가우스와는 달리 소프로니츠키의 활동은 소련 당국으로부터 심하게 규제되고 검열 받고 있었다. 당대 소비에트 최고의 피아니스트였음에도 서방 국가들에서 연주하는 것은 극히 제한적으로만 허용되었다. 간부들의 책임이 없는 중간 수준의 교육 직종으로 이전됨에 따라, 이 민감하고 점점 좌절된 음악가는 알코올과 약물에 빠져 들었다. 소프로니츠키는 서유럽에서 발견될 가치가 있는 아티스트인데, 더욱더 그의 스타일의 정신적인 특질이 그의 우상이자 장인인 알렉산더 스크리아빈이 그의 연주로 단련시켰을 것이 틀림없는 매력에 대한 아이디어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방의 고전, 낭만음악에 대한 그의 해석은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다.

Our two CDs devoted to Sofronitsky feature (apart from works by Prokofiev) a complete live recording of one of the pianist's last recitals (Moscow 1960). The fact that he chose the Fantasia in C minor, K. 475, which Wolfgang Amadeus Mozart composed in 1785, to open his programme says a great deal about the performer as this work marks a culminating point of Mozart's expressive pianistic art and may serve as a striking example of his extraordinary powers of improvision. Although the musical shapes change all the time, the same basic idea - a tragic one in this case - remains present throughout. Reportedly, the maestro occasionally refrained from notating works for his own use because he had the music in his head, and he felt so supremely confident that while performing the piece from memory he could think out a new sonata in his head, as he once told his father in a letter. In this particular case he noted down an apparent improvisation so that he might dedicate it to his pupil, Therese von Trattner. The introductory Adagio, which may be described as pensive or even brooding, is remarkable for its extremely bold modulations to the most distant keys. Perhaps these abrupt harmonic changes were the reason why Mozart failed to insert accidentals although the piece is clearly in C minor.

이 두 장의 녹음은 (프로코피에프의 작품 외에) 피아니스트의 마지막 리사이틀(1960년 모스크바) 중 하나의 완전한 녹음에 헌정되었다. 그가 프로그램을 여는 곡으로 모차르트가 1785년에 작곡한 환상곡 K. 475를 선택했다는 사실은 이 작품이 모차르트의 표현적인 피아니스틱한 예술의 절정을 이룬 작품이고 모차르트의 즉흥 연주에 대한 탁월한 힘에 대한 빼어난 예가 될 수 있다고 나타내는 것처럼 연주자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음악의 형태가 항상 바뀌지만, 동일한 기본 개념, 이 경우 비극적인 개념이 계속 남아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마에스트로(모차르트)는 음악을 머릿속에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때때로 자신의 사용을 위한 작품 표기를 자제했고, 그는 아버지에게 편지로 한 번 말했던 것처럼, 자신감이 너무 강해서 외워서 곡을 연주하는 동안 머릿속에서 새로운 소나타를 계획할 수 있었다. 이 특별한 경우에 그는 그의 제자 테레제 폰 트라트너에게 이 곡을 헌정할 수 있도록 명백한 즉흥 연주를 적어 두었다. 수심어리거나 우울하다고도 표현될 수 있는 도입부의 아다지오(느리게)는 가장 먼 조성에 대한 극히 대담한 전조로 탁월하다. 아마도 이 갑작스런 변화로 인해 모차르트가 명백히 C단조인 곡이지만 우연히 삽입하는데 실패했을 것이다.

Mozart Fantasia in c, K. 475 Opening / 모차르트 환상곡 K. 475에서 C단조로 시작했다가 가장 먼 B장조로 바뀌는 부분

Franz Schubert's "Impromptus" are also in the nature of improvisations, as the title suggests. The composer wrote eight extended pieces of this kind in the year preceding his death, i.e. just before embarking on the song cycle Die Winterreise (The Winter Journey). It was not Schubert himself who designated these pieces as "Impromptus", but his publisher, Haslinger, who had only the first two items printed during the composer's lifetime. No.3, originally in G flat major, appeared posthumously, transposed to the key of G major in the first edition (probably to accommodate the needs of amateur performers). A soaring melody of quiet and almost exalted lyricism is presented by persistent arpeggio figures in the middle register over long-sustained basses, creating a sense of timelessness as exuded by some of Chopin's nocturnes. In kinetic terms, No.4 offers a stark contrast with its cascading semiquaver figures, the elegiac middle section evoking a different mood.

프란츠 슈베르트의 즉흥곡들 또한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즉흥 연주의 성격을 띠고 있다. 작곡가는 죽기 이전, 즉 연가곡 <겨울 나그네>에 착수하기 직전에 이런 종류의 곡들을 8개 썼다. 이 곡들을 <즉흥곡>으로 명명한 사람은 슈베르트 그 자신이 아니라 작곡가의 평생 동안 첫 두 곡만을 인쇄했던 출판업자 토비아스 하슬링어였다. 사후에 등장한 즉흥곡 3번은 (아마도 아마추어 연주자들의 요구를 수용하기 위해) 원래 내림G장조였지만, 1판에서 G장조로 바뀌었다. 조용하고 거의 고귀한 서정성을 떠오르게 하는 멜로디는 오랫동안 지속되는 베이스를 통해 중음에서 계속되는 아르페지오(펼침화음) 연주에 의해 나타나는데, 쇼팽의 녹턴에서 스며 나오는 영원한 느낌을 준다. 동적인 측면에서 즉흥곡 4번은 폭포처럼 흐르는 16분음표들, 다른 분위기를 불러일으키는 비가의 중간부로 극명한 대조를 제공한다.

Schubert Impromptu in Gb, Op. 90 No. 3 Opening / 슈베르트 즉흥곡 작품 90-3 오프닝에서 아르페지오의 중간 성부(빨간 네모)와 오랫동안 지속되는 베이스(파란 네모)

Schubert Impromptu in Ab, Op. 90 No. 4 Opening / 슈베르트 즉흥곡 작품 90-4 오프닝에서 폭포처럼 흐르는 16분음표들

Schubert Impromptu in Ab, Op. 90 No. 4 Middle Section / 슈베르트 즉흥곡 작품 90-4 중간부의 비가 같은 분위기

Strictly speaking, Robert Schumann composed six piano sonatas, but the last three, Op. 118, intended "for the young", i. e, his daughters Marie, Elise and Julie, are usually left out of consideration because they do not fit in with the others in terms of form and substance. Op. 11, dating from 1834-35, carries the title "Sonata for pianoforte. Dedicated to Clara by Florestan and Eusebius". Clara Wieck, the daughter of his piano teacher, had previously been little more than a child in his eyes, but after her return from a concert trip to Paris (she was then 16 years old) in 1835 Schumann (who was nine years older and engaged to another woman) realized all of a sudden that she would be his destiny. It was in this mood that he wrote down his Op. 11, a "pure-outpouring of love for you", as he confided to her later on. In the slow introduction, he gives thematic expression to the two opposing facets of his own personality, fiery and gentle, by quoting from his "Davidsbundlertanze". For the introductory Allegro proper he chooses motives from the "Geisterballett", Op. 5, of his adored Clara (printed in the same year). The Aria is surprisingly restrained in its emotional content ("senza espressione"). In this way the Romantic composer avoids excessive rhetoric after the extended opening movement. The scherzo encloses two trios (the second being an "intermezzo" in a polonaise rhythm). The somewhat rambling finale restores a sense of improvisation.

엄밀히 말하면, 로베르트 슈만은 6개의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했지만, 마지막 3곡인 작품 118은 예를 들어 그의 딸들인 마리, 엘리제, 율리 같은 “어린이들을 위한” 것이었는데, 형식과 내용면에서 다른 것들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대개 고려되지 않는다. 1834~34년에 지어진 소나타 1번은 “플로레스탄과 에우제비우스에 의해 클라라에게 헌정된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소나타”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슈만의 피아노 교사의 딸이었던 클라라 비크는 이전에 그의 눈에는 어린아이였지만, 1835년에 (그녀가 16세였을 때) 파리로 가는 연주 여행에서 돌아온 후 (9세 연상이었고 또 다른 여자와 약혼했던) 슈만은 갑자기 그녀가 그의 운명이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나중에 그녀에게 털어놓았던 것처럼, “당신에 대해 분출하는 순수한 사랑”이라고 그의 소나타 1번에 적어두었던 것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였다. 1악장의 느린 도입부에서 그는 <다비드동맹무곡집>에서 인용된 그의 성격인 불같고 부드러운 두 가지 반대 양상에 주제 표현을 준다. 도입부의 알레그로(빠르게)에 알맞게 그는 (같은 해에 인쇄된) 그의 사랑하는 클라라의 4개의 성격 소품 중 <유령의 발레> Op. 5 No. 4에서 모티브를 선택한다. 2악장 아리아는 놀랍게도 감정적인 내용(자유로운 표정으로)에 묶여있다. 이런 방식으로 낭만파 작곡가는 확장된 1악장 후에 과도한 미사여구를 피한다. 3악장 스케르초는 2개의 트리오(두 번째 트리오는 폴로네즈 리듬으로 된 “인터메조”)를 포함한다. 다소 잔인한 4악장 피날레는 즉흥 연주의 느낌을 회복한다.

Clara Schumann 4 Pièces caractéristiques, Op. 5 No. 4 "Ballet des Revenants" Opening / 클라라 슈만 4개의 성격 소품 중 4번 <유령의 발레> 오프닝

Robert Schumann Sonata No. 1 Allegro of 1st movement / 로베르트 슈만 소나타 1번 1악장에서 알레그로 부분

Robert Schumann Sonata No. 1 Aria / 로베르트 슈만 소나타 1번 2악장 아리아

Robert Schumann Sonata No. 1 Intermezzo in a polonaise rhythm of Scherzo / 로베르트 슈만 소나타 1번 3악장 스케르초 중에서 인터메조 부분에 나오는 폴로네즈 리듬

Admittedly, Frederic Chopin was not the inventor of the nocturne. The credit must go to an Irishman, John Field, who lived in St Petersburg for a while, even adopting a Russian patronymic and counting among his pupils Alexander Dubuc who would later become the teacher of Mili Balakirev, guiding light of the "Russian Five". But the nocturnes of the Franco-Polish genius are not confined to the usual evocation of moonlight and candlelight, of gentle or impassioned eroticism, but conjure up very different states of mind: nightmares, painful recollections, premonitions of doom and even a yearning for death. The three nocturnes, Op. 15, dating from 1830-33, were dedicated to Ferdinand Hiller, the influential pianist from Cologne who later won renown as a conductor. No.1, occasionally described as a "shepherd's song with storm", combines a pastoral outer section of tranquil simplicity with a veritable storm scene (in F minor). By contrast, the following nocturne in F sharp major features an enchanting and richly embellished cantilena, opening up like a nocturnal flower. The faster middle section fascinates the listener with its double metrical pattern inspired by Schumann, the melody being woven, with a fraction of anticipation, into the quintuples of the right hand at the octave.

틀림없이 쇼팽은 녹턴의 창시자가 아니었다. 그 믿음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잠깐 살았던 아일랜드의 존 필드에게 가야 하는데, 그는 러시아의 아버지[남자 조상]의 이름을 딴 이름을 채택하고 넣었으며, 그의 제자들 중에 알렉산더 뒤비크는 나중에 <러시아 5인조>의 모범인 밀리 발라키레프의 스승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폴란드 천재의 녹턴은 달빛과 촛불, 또는 부드럽거나 열정적인 에로티시즘에 대한 일반적인 환기에 국한되지 않고 마음의 매우 다른 상태들(악몽, 고통스러운 기억, 운명에 대한 예언, 심지어는 죽음에 대한 갈망)을 떠올리게 한다. 1830~33년에 작곡된 3개의 녹턴 Op. 15는 나중에 지휘자가 되어 명성을 얻은 쾰른 출신의 영향력 있는 피아니스트 페르디난트 힐러에게 헌정되었다. 1번은 때때로 “폭풍우와 함께 있는 양치기의 노래”로 표현되는데, 조용하고 평화로운 목가적 인 외부와 진정한 폭풍우 장면(F단조)을 결합한다. 대조적으로 이어지는 녹턴 F#장조는 밤에 피는 꽃처럼 시작하면서 매혹적이고 풍부하게 꾸며진 칸틸레나(서정적인 선율)가 특징이다. 더 빠른 중간부는 옥타브(8도)에서 오른손의 다섯잇단음표로 예상되는 것의 일부와 함께 엮인 멜로디로, 슈만에 영감 받은 이중 운율 패턴으로 청취자를 사로잡는다.

Chopin Nocturne No. 4 Opening (F major) / 쇼팽 녹턴 4번 오프닝 (F장조)

Chopin Nocturne No. 4 Storm Scene (F minor) / 쇼팽 녹턴 4번 폭풍우 장면 (F단조)

Chopin Nocturne No. 5 Opening / 쇼팽 녹턴 5번 오프닝

Chopin Nocturne No. 5 Middle Section / 쇼팽 녹턴 5번 중간부

Chopin's four scherzos have little in common with the genre created by Beethoven apart from the fact that they share the tripartite time pattern and structure (with a central trio). There is hardly a touch of humour, let alone boisterousness, in these pieces (except in No.4). The scherzos in B minor and B flat minor are the most effective items. Op. 20 combines a turbulent main theme of almost sullen character, which provides a foretaste of Brahms, with a flowing cantilena that can be traced back to a Polish Christmas carol and that the composer temporarily assigns to the rich-sounding tenor register. The B minor scherzo was written in 1832, Chopin having arrived in Paris in the autumn of the preceding year. He went on to give his first recital in the salon of Ignaz Pleyel, founder of a piano factory which henceforth provided him with instruments. In addition, he befriended Berlioz, Mendelssohn, Hiller and Heinrich Heine.

쇼팽의 스케르초 4곡은 3박자 패턴과 (중간에 트리오가 있는) 구조를 공유한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베토벤이 만든 장르와의 공통점이 거의 없다. 이 곡들에는 (4번을 제외하고) 떠들썩하게 하는 유머 감각이 거의 없다. 스케르초 1번과 2번은 가장 효과적인 작품이다. 스케르초 1번은 브람스의 예고편을 제공하는 거의 침울한 성격의 격렬한 메인 테마와 폴란드 크리스마스 캐럴 <잘 자라 아기 예수>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고 작곡가가 일시적으로 풍부하게 들리는 테너 성부를 지정하는 거침없이 이어지는 칸틸레나(서정적인 선율)를 결합한다. 스케르초 1번은 1832년에 작곡되었는데, 쇼팽은 그 전해 가을에 파리에 도착했다. 이그나츠 플레이엘의 살롱에서 첫 리사이틀을 가졌는데, 플레이엘은 이후에 피아노 공장을 설립하여 쇼팽에게 악기를 제공했다. 또한 그는 베를리오즈, 멘델스존, 힐러, 하인리히 하이네와도 친해졌다.

Chopin Scherzo No. 1 Opening / 쇼팽 스케르초 1번 오프닝

Chopin Scherzo No. 1 Middle Section (Polish Christmas carol) / 쇼팽 스케르초 1번에서 폴란드 크리스마스 캐럴 <잘 자라 아기 예수> 선율이 나오는 중간부

The Scherzo in B flat minor, a more complex item, has remained the most popular of the set. Unusual in design, it represents a blend of scherzo and sonata form. It comprises three main sections - exposition, trio and recapitulation - two of which are repeated almost literally, with the themes presented (twice) in the exposition even undergoing some kind of development before the recapitulation. As a result, the piece runs to no less than 786 bars. The principal subject is made up of two parts: a question softly played in unison and a thundering chordal reply. The subsidiary idea is an intensely expressive cantilena over a rolling D flat major foundation, which Chopin uses to bring the exposition to a climax. But he dispenses with it in the recapitulation, thus hastening the musical proceedings. The central section of the three-part trio is dominated by a triplet motive which subsequently leaves its imprint on the development. The effective coda closes with weighty chromatic chords.

스케르초 2번은 쇼팽의 스케르초 전곡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곡이 되었다. 흔치 않은 구성으로, 스케르초와 소나타 형식의 조화를 나타낸다. 제시부, 트리오, 재현부의 3부분으로 구성되는데, 그 중 둘은 재현부 전에 나오는 일종의 발전부를 거치면서 제시부에서 (두 번) 나타나는 주제들로 거의 그대로 반복된다. 그 결과 이 곡은 자그마치 786마디이다. 주요 주제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 유니즌으로 부드럽게 연주되는 질문과 우레 같은 화음의 대답이다. 부수적인 아이디어는 쇼팽이 제시부를 절정으로 가져오기 위해 사용하는 기복 있는 내림D장조 토대 위에 격하게 표현하는 칸틸레나(서정적인 선율)이다. 그러나 그는 재현부에서 그것을 생략하고, 따라서 음악 진행을 서두른다. 3부 형식 트리오의 중간부는 셋잇단음표 모티브에 의해 지배되며 이후 발전부에 남긴다. 효과적인 코다는 무거운 반음계 화음으로 마무리한다.

Chopin Scherzo No. 2 Opening / 쇼팽 스케르초 2번 오프닝에서 부드럽게 연주되는 질문(빨간 네모)과 우레 같은 화음의 대답(파란 네모)

Chopin Scherzo No. 2 Cantilena over a rolling D flat major foundation / 쇼팽 스케르초 2번에서 왼손의 내림D장조 토대 위에 있는 오른손의 칸틸레나

Chopin Scherzo No. 2 Triplet motive of Trio / 쇼팽 스케르초 2번 트리오 부분에 나오는 셋잇단음표 모티브

Chopin Scherzo No. 2 Ending / 쇼팽 스케르초 2번 엔딩에서 무거운 반음계 화음이 나오는 코다

"Moments musicaux" was the title first given to Schubert's Op, 94. Sergei Rachmaninov wrote six such pieces, Op, 16, in 1896. Two emotional states are prevalent in this cycle: elegy and sadness on the one hand, and a virile sense of optimism and determination on the other. No. 5 in D flat major belongs to the composer's diatonic pieces which provide an essential lyrical contrast to his dramatic episodes or passionate outpourings. The song-like (and easily memorable) theme, which unfolds at a measured pace (Adagio sostenuto), remains wedded to the D flat major scale. No.2 in E flat minor represents the darker side of Rachmaninov's piano writing, imbued as it is with poignant and dramatic feelings of deep distress and hopelessness.

<악흥의 한때>는 슈베르트에 의해 Op. 94에 처음 제목이 주어졌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는 1896년에 그런 여섯 개의 곡을 Op. 16에 썼다. 이 곡에는 두 개의 뚜렷한 감정적 영상이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데, 우수와 슬픔이 한 손에, 낙관주의와 신념의 확고함이 주는 남성적인 힘은 다른 한 손에 실려 표현된다. 5번은 그의 극적인 에피소드나 용솟음치는 정열과 대조되는 서정적인 요소를 제공하는 작곡가의 온음계 곡들에 속한다. 신중한 속도(충분히 느리게)로 펼쳐지는 노래 같은 (그리고 기억에 남을만한) 주제는 내림D장조 스케일과 결부되어 있다. 2번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곡의 어두운 면을 나타내며, 깊은 고통과 절망감이 있는 격렬하고 극적인 느낌으로 곡을 채운다.

The year 1903 was an extremely productive one in the life of Alexander Scriabin, largely as a result of external circumstances. He withdrew from teaching to devote all his energies to composition and began to live with his future wife, Tatiana Schloezer, who strengthened him in his metaphysical leanings. Almost half a hundred works were composed during that blissful year. The fourth sonata marks the central point of the composer's 20-year preoccupation with the piano sonata (No.1 dates from 1893, No. 10 from 1913). Just as in his second sonata, Scriabin limits himself to two movements with almost identical tempo markings: Andante and Presto (heightened to Prestissimo in No.4 with the word "volante" - flying - added). The two movements are played without a break attacca fashion. (The following six sonatas are all in one movement).

1903년은 알렉산더 스크리아빈의 인생에서 극도로 생산적인 것이었는데, 주로 외부 환경의 결과였다. 그는 작곡에 모든 열정을 쏟기 위해 교편에서 물러났으며 형이상학적인 성향을 강화시킨 미래의 아내인 타티아나 쉴뢰처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그 행복한 나날 동안에 거의 50개의 작품이 작곡되었다. 소나타 제4번은 1893년에서 1943년까지의 20년간에 이르는 그의 소나타 작곡연대의 한 가운데 위치한 작품(1893년 1번, 1913년 10번 작곡)이다. 2번 소나타와 마찬가지로 스크리아빈은 거의 동일한 템포의 악장 두 개로 제한한다. - 안단테(느리게)와 프레스토(매우 빠르게)인데, 4번에서는 프레스티시모(가장 빠르게)가 “볼란테”(하늘을 날듯이 빠르고 경쾌한)로 강조된다. 두 개의 악장은 아타카라는 기호로 휴식 없이 바로 연결된다. (다음 6개의 소나타 5~10번은 모두 단악장이다.)

In the flush of his new-found happiness (Beethoven's setting of the words "Neue Liebe, neues Leben" comes to mind here), Scriabin finished his fourth sonata in a matter of two days. It may be seen as a direct precursor of the "Poeme de l'extase", on which the composer was to embark two years later. Given the fact that there is no pause between movements, the work looks ahead to the one movement structure of Scriabin's later sonatas and seems like a mighty crescendo of activity and creative exhilaration. Numerous thematic interrelationships contribute to the overall sense of unity. For the first time, the composer expressly included the instructions "mysterieusement" or "misterioso" (frequently coupled with "appel" as a mystic order) even though the motives and figures concerned had occurred earlier (but without such comments). Longing, flight and ecstasy are the three central moods. The composer himself explained his programme as follows: The Andante reflects the longing for a distant, blue-shimmering star while the Prestissimo depicts the delirious flight towards the longed-for destination. The harmonically piquant prologue anticipates the theme of longing from the "Poeme de l'extase". There follows a brilliant evocation of what almost seems like an intergalactic flight with subtle rhythmic patterns and crashing repetitive chords. Against this vibrant chordal background, the theme of longing from the introduction makes its "fiery" and "jubilant" appearance (marked "focosamente", "giubiloso").

(베토벤의 가곡 <새로운 사랑, 새로운 삶>의 설정이 여기 마음에 떠오르는) 그의 새로 발견된 행복이 한창일 때, 스크리아빈은 이틀 만에 소나타 4번을 완성했다. 그것은 작곡가가 2년 후에 착수하는 교향곡 제4번 <법열의 시>의 직접적인 전조로 볼 수 있다. 악장들 사이에는 쉬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 작품은 스크리아빈의 후기 소나타들의 단악장 구조를 내다보며, 활동과 창조적인 흥분의 강력한 크레셴도(최고조)처럼 보인다. 수많은 주제적 상호 관계가 전반적인 일치감에 기여한다. 관련 모티브와 형태가 일찍 발생했음에도 (그러나 그런 언급이 없이) 처음으로 작곡가는 분명히 (신비한 명령으로 “아펠”(부르는 신호)과 자주 결합된) “미스테리외즈망”(불가사의하게)나 “미스테리오소”(신비하게)를 종종 포함했다. 갈망, 비행, 황홀경은 세 가지 중심 분위기이다. 작곡가 자신이 그의 프로그램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1악장 안단테는 멀리 희미하게 빛나는 푸른 별에 대한 갈망인 반면, 2악장 프레스티시모는 오래 기다려온 목적지를 향한 비행을 묘사한다. 화성적으로 톡 쏘는 듯한 프롤로그는 <법열의 시>에서 갈망의 주제를 예상한다. 미묘한 리드미컬한 패턴과 반복적인 화음의 충돌로 거의 은하계 비행과 같이 보이는 것의 화려한 환기가 이어진다. 이 활기찬 화음의 배경에 대항하여, 도입부에서 갈망에 대한 주제는 “불같은” “승리감에 넘치는” (“열렬하게 또는 격동하여”, “기쁘게”로 표시된) 등장을 만든다.

Scriabin Sonata No. 4 Prestissimo Opening / 스크리아빈 소나타 4번 2악장 오프닝

Scriabin Sonata No. 4 Focosamente giubiloso / 스크리아빈 소나타 4번 2악장에서 “열렬하게 기쁘게” 표시된 부분

The year 1903, which brought fourth this sonata, was also the year in which the piano poem originated. Liszt's symphonic poem was transferred to the solo instrument. The "Poeme tragique", Op. 34, the first such work with a specific title, comes between two interesting companion pieces, the second of the two poems, Op. 32, which the composer himself described as a "Byron poem" (but without any suggestion of world-weariness), and the "Satanical Poem", another piece dating from 1903. In Scriabin's musical idiom, the defiant, tragic and diabolical elements have no negative connotations, but are seen in a dialectical sense as necessary counterparts of their opposites. What becomes apparent here is that Scriabin, in much the same way as Nietzsche, regards tragedy as an opportunity to prove oneself ("What does not kill me, will make me stronger").

4번 소나타를 작곡했던 1903년은 피아노 시가 기원한 해이기도 했다. 리스트의 교향시가 독주 악기로 옮겨졌다. 특정 제목을 가진 첫 작품 <비극적인 시> Op. 34가 두 개의 흥미로운 동반 작품들 사이에 오고, 작곡가 자신이 “바이런의 시”로 표현했던 (그러나 염세적이라고 암시하지 않았던) 두 개의 시 Op. 32 중에서 두 번째 곡, 1903년에 쓰인 또 다른 곡 <사탄의 시>. 스크리아빈의 음악적인 어법에서 반항적이고 비극적이며 악마적인 요소는 부정적 의미가 없지만, 그것들은 변증법적 의미에서 상대방의 필요한 대응자로 간주된다. 여기서 분명해지는 것은 스크리아빈이 니체와 거의 같은 방식(“시련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으로 비극을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로 여긴다는 것이다.

While Scriabin's poems were inspired by Liszt, his waltzes and etudes owe a great debt to Chopin. Admittedly, his output includes only four waltzes (or rather "valses") - and only four impromptus for that matter - but it is interesting to note that his programmatic Opus 1 was a waltz, after all. This "Chopinesque" form epitomizes the stylistic components of Scriabin's early and middle period: elegance, motion (see flight motive), exhilaration to the point of ecstasy, and latent eroticism. The Waltz in A flat major, Op. 38, yet another piece from the productive year 1903, belongs to the middle period, a phase of transition to the late style, in which the composer was still writing in a tonal idiom and showed himself at the height of his inspiration. It is the most exquisite waltz from his pen: dreamy, ethereal, full of lyrical charm and pastel-like shades of expression.

스크리아빈의 시들이 리스트로부터 영감을 얻었지만, 그의 왈츠와 에튀드는 쇼팽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비극적인 시”와 “왈츠”, “연습곡”에서도 소프로니츠키는 정열과 리리시즘이 교차하는 연주를 통해 낭만적 신비감을 조성해내고 있다. 물론 그의 작품에는 4개의 왈츠(라기보다는 “발스”)가 포함되어 있다. - 그러나 그의 계획에 따른 작품 1이 결국 왈츠였다는 것을 아는 것이 흥미롭다. 이 “쇼피네스크”(쇼팽 같은) 형식은 스크리아빈 초기와 중기의 양식적인 구성 요소들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 우아함, 움직임(비행 모티브 참조), 황홀함에 대한 시점의 흥분, 잠재적인 에로티시즘. 왈츠 Op. 38은 생산적인 해인 1903년에 완성된 또 다른 작품으로 중기에 속하는데, 작곡가가 여전히 음색의 어법을 쓰는 후기 스타일로의 전환 단계로, 영감의 절정에 있는 그 자신을 보여줬다. 그것은 그가 쓴 가장 미묘한 왈츠이다. - 꿈결 같은, 천상의, 서정적인 매력과 파스텔 같은 섬세한 표현으로 가득 차 있다.

Ten years earlier Scriabin had composed his Etude in B flat minor, No. 11 from Op. 8, another early collection (1894) with echoes of Chopin that dates from the same period as the 24 Preludes, Op. 11. With its poignant outbursts and headlong ascending figures, No. 11 is not really characteristic of this mostly high-spirited and inspiring composer. It is a tale of utter exhaustion and grief that has passed from despair to listlessness. The following D sharp minor Etude, a popular piece in a more optimistic vein, provides a sharp contrast so that the two items should really be looked upon as a diptych. However, the choice of this etude is highly significant in that it reflects Sofronitsky's feeling of sadness, for it marked the end of his legendary Moscow recital in 1960.

10년 전 스크리아빈은 24개 프렐류드 Op. 11과 같은 시기로 쇼팽의 메아리가 있는 또 다른 초기 컬렉션(1894)인 에튀드 Op. 8 No. 11을 작곡했다. 슬픔의 분출과 저돌적으로 올라가는 특징으로, 에튀드 11번은 실제로 주로 활기차고 고무적인 작곡가의 특징이 아니다. 절망에서 무기력함으로 넘어간 기진맥진함과 비탄에 대한 이야기이다. 다음의 에튀드 12번은 (11번보다는) 더 낙관적인 기분의 인기 있는 곡으로, 두 곡이 정말 어둡게 보일 정도로 선명한 대조를 제공한다. 그러나 에튀드 11번의 선택은 소프로니츠키의 슬픔에 대한 느낌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데, 1960년에 전설적인 모스크바 리사이틀이 끝났기 때문이다.

The three iconoclastic figures who dominated the World War I period Ravel, Stravinsky and Sergei Prokofiev - were not without an element of snobbery. Prokofiev regarded Stravinsky, who was nine years older, as the bane of his life, The famous riot caused by "Le sacre du printemps" prompted him to respond with the Scythian Suite. This proved so successful that an American publisher immediately commissioned a number of piano works from the supposed apostle of primitivism. He complied by coming up with his pieces, Op. 32, and - surprisingly - the "Tales of the Old Grandmother", Op. 31 (1918). Profoundly disappointed by the lyrical content of the latter piece, the publisher not even considered printing it. Here is the motto which Prokofiev, who remained a lyricist at heart throughout his life, placed ahead of his "Babushka": "Some memories have almost vanished from her mind, others remain graven on it for ever." Suffused with tender melancholy, the piece exudes the kindness and wisdom of old age. All four pieces are in a minor key and in a calm narrative style. This is the first fully developed example of Prokofiev's "fourth stylistic idiom", which was to play an increasingly important role later on. There are not many 20th-century piano works suitable for instruction and domestic music-making, but these "Tales" surely belong to them.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서는 기존의 음악적 전통을 타파하고 새로운 스타일을 주창한 세 음악가 라벨과 스트라빈스키, 프로코피에프의 음악적 이념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프로코피에프의 음악 세계는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 발표되었을 때 이에 대한 반발로 그가 즉시 <스키타이 조곡>을 발표했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스트라빈스키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것은 미국 출판업자가 원시주의 주창자들로부터 많은 피아노 작품들을 즉각 위촉한 결과로 매우 성공적이었다. 프로코피에프는 다가올 4개의 소품 Op. 32와 - 놀랍게도 - 4개의 <할머니의 이야기>를 엮었다. 후자(할머니의 이야기)의 서정적인 내용에 완전히 실망한 출판사는 그것을 인쇄하는 것을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여기 그의 “바부쉬카”(할머니)보다 앞서 나섰던 인생을 통해 내심으로는 서정주의자로 남았던 프로코피에프가 말했던 모토가 있다. - “어떤 추억은 그녀(할머니)의 마음에서 거의 사라졌으며, 다른 추억들은 그것을 영원히 새기고 있다.” 부드럽고 우울함에 빠진 이 곡은 노년의 친절함과 지혜를 물씬 풍긴다. 네 곡은 모두 단조로 조용히 이야기하는 스타일이다. 이것은 프로코피에프의 “제4의 양식의 언어”의 최초로 완전히 발전한 사례이며, 나중에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가르침과 국내 음악 제작에 적합한 20세기 피아노 작품들은 많지만, 이 <할머니의 이야기>는 확실히 그것들에 속한다.

The composer himself translated the title of his 20 "Mimolyotnosty" (Russian for "flying past") into Visions fugitives (French was widely spoken in middle-class circles at the time). The motto was drawn from the symbolist Konstantin Balmont (some of whose works were set to music by Stravinsky): "In every fleeting vision I see worlds replete with the colourful play of the rainbow." Reminiscent of the terse and keenly observant "Poemes en prose" by Charles Baudelaire, these pieces are a succession of snapshots of aphoristic brevity revealing the composer's desire to write in an unsophisticated tonal idiom (even before the "Tales" of 1915-17). Anyone familiar with the "Scythian Suite", which dates from the same period, will recognize that Op. 22 was a necessary foil to such unmitigated savagery. In compositional terms, No.7, "Pittoresco", subtitled "Arpa" (Harp), is unusual in that Prokofiev skilfully imitates the Aeolic harp (impressionistic effects) and various bells (indispensable for Russians, with allusions to Mussorgsky's "Great Gate of Kiev").

작곡가 자신이 그의 20개의 미몰리오트노스티(“잠깐 동안의 비행”에 대한 러시아어)를 “비지옹 퓌지티브”로 번역했다. (당시 프랑스어는 중산층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이 모토는 (스트라빈스키의 몇몇 음악 작품에 나타나는) 상징주의자 콘스탄틴 발몬트에서 얻어졌다. - “모든 덧없는 영상으로부터 나는 무지개의 다채로운 조화로 가득 찬 세계를 본다.” 샤를 보들레르의 간결하고 예민하게 관찰하는 <산문시>를 연상케 하는 이 곡들은 (1915~17년 <할머니의 이야기> 이전에도) 작곡가의 단순한 음색의 언어를 써넣으려는 열망을 드러내면서 금언적인 간결성을 담은 스냅샷(짤막한 묘사들)의 연속이다.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스키타이 모음곡>에 친숙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덧없는 환영>이 그런 완전히 야만적인 것을 감추는 데에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작곡 용어들 중에서 <아르파>(하프)라는 표제가 붙어 있는 7번 “피토레스코”(회화적으로)는 애올리언 하프(인상주의적인 효과)를 교묘하게 모방하고 (무소르그스키의 <키예프의 대문>에 대한 암시와 함께, 러시아인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다양한 종들을 교묘하게 모방한다는 점에서 흔치 않다.

"People raised their hands - to cover their ears, express their enthusiasm or show their sympathy (or the poor composer who had once shown such promise." Prokofiev was talking here about the response to his 5 "Sarcasms", Op. 17, which had been written even earlier (1912-14). Here he showed himself to be an innovator ready to shock his audience, and a master of jocular expression, which he divided into three categories: "jesting, laughter, mockery". Op.17 clearly belongs to the last, the most pungent category. No.3 throws the pianist into confusion at first sight (to be taken literally here) because different accidentals F sharp minor and B flat minor - are assigned to the right and left hand. Emerging from a mysterious pianissimo, the musical development takes us through violent hammering chords and a sigh-like ("singhiozzando") descending line to a wistful episode, but the peaceful mood is shattered by a restatement of the opening motif in even more brutal form. The truly sarcastic piece ends pianissimo, just as it began.

“사람들은 그들의 귀를 막거나 열정을 표현하거나 동정심을 표하는 등 (또는 그러한 약속을 한때 보여준 가난한 작곡가에게) 손을 들었다.” 프로코피에프는 이전에 쓰였던 그의 5개의 <풍자> Op. 17(1912~14)에 대한 반응에 대해 여기서 말하고 있었다. 여기서 그는 청중을 놀라게 할 준비가 되어 있는 혁신자이자 유머러스한 표현의 대가로 그 자신을 보여줬는데, 그를 3가지 카테고리로 나눴다. - “농담, 웃음, 조롱”. <풍자>는 최후의, 가장 신랄한 범주에 속한다. 3번은 피아니스트를 (문자 그대로 여기에 표시되는) 첫눈에 혼란에 빠뜨리는데, 우연한 다른 조성인 F#단조와 내림B단조가 오른손과 왼손에 할당되기 때문이다. 불가사의한 피아니시모(매우 여리게)에서 벗어나면서, 음악적인 발전은 격렬한 쾅쾅거리는 화음과 한숨 같은(흐느끼듯이) 하강하는 선율을 통해 우리를 아쉬워하는 에피소드로 데려가 주지만, 평화로운 분위기는 더 잔인한 형태로 오프닝 모티브의 수정에 의해 산산조각이 난다. 진정으로 비꼬는 작품은 처음 시작했던 것처럼 피아니시모로 끝난다.

Prokofiev Sarcasm, Op. 17 No. 3 Opening motifs / 프로코피에프 풍자 3번의 오프닝 모티프에서 오른손(F#단조, 빨간 네모)과 왼손(내림B단조, 파란 네모)의 서로 다른 조성

Prokofiev Sarcasm, Op. 17 No. 3 singhiozzando / 프로코피에프 풍자 3번에서 흐느끼듯이 하강하는 선율

Referring to the "Pieces", Op. 12, Boris Assafiev spoke of that "vibrant, lucid, sincere and immediate boldness which we have abandoned in the recent period to meekly accept music which owes its existence not to inner impulses, but to their stylization."

<10개의 에피소드> Op. 12를 참조하면서 보리스 아사피에프는 “우리가 최근에 순순히 포기한 활기차고, 명쾌하고, 진실하며, 즉각적인 담대함은 내면의 충동이 아닌 양식화 덕택인 음악을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The works originated between 1906 and 1913, partly as portraits of fellow students (cf. Schumann). The composer introduced a number of them to the public during an "Evening devoted to contemporary music" in February 1914. No.2, "Gavotte", a stylistic exercise demanded by his teacher, Anatoli Liadov, bears an amazing resemblance to Tchaikovsky's Romance in F minor (which he dedicated to his fiancee, the singer Desiree Artot). This piece was the first in which Prokofiev indulged his passion for old dances. Other items reflecting this penchant are the partly bitonal Rigaudon (No.3, cf. Grieg's Holberg Suite) and the half-comic, half-grotesque Allemande (No.8), which recalls the writing for wind instruments and features a bizarre theme spanning two octaves within a single bar. Here the composer's flair for the "grotesque" comes into its own for the first time. The "young rebel" treated the time-honoured prototypes with the sledgehammer rather than with caution and understanding, choosing glaring neon light instead of satin or pink colours. When Debussy heard Prokofiev's pieces in 1913, he took a special liking to No.6, "Legend", the only slow item among the 10 pieces (with recollections of his "Tales" and "Memories"). This three-part Andantino, which is extremely colourful and varied in harmonic terms, surprisingly contains a central section marked "Andante religioso", but otherwise calls for extreme rubato effects, with new tempos and agogic accents demanded in virtually every bar. The following Prelude in C major, one of the most frequently arranged pieces of all Russian composers, was subtitled "Harp" by the composer, which explains why it is often played on King David's instrument when not performed in the original version. The last two pieces of the set typify the scherzoso element of Prokofiev's late style. This CD includes No.9, a "Humoristic Scherzo" dedicated to Nikolai N. Tcherepnin, who had been a pupil of Rimsky-Korsakov and later made his mark as a successful composer in France. At the time of composition, he was professor at the St Petersburg Conservatory, where he had established a conducting class attended by Alexander Gauk, Nikolai Maiko and Prokofiev. The piece was meant to imitate the timbre of the bassoon.

이 작품은 부분적으로는 동창생들의 초상화로서(슈만과 비교하라), 1906년과 1913년 사이에 시작되었다. 작곡가는 1914년 2월 <현대음악에 헌정하는 밤> 동안 대중에게 이 곡을 많이 소개했다. 2번 <가보트>는 그의 스승 아나톨리 리아도프가 요구한 스타일을 연습한 것으로, 차이코프스키의 (피앙세이자 가수였던 데지레 아르토에게 헌정했던) 로망스와 굉장히 흡사하다. 이 곡은 프로코피에프가 그의 옛 무곡에 대한 열정에 빠지게 한 최초의 곡이다. 이 경향을 반영하는 다른 곡들은 부분적으로 두 개의 가락을 함께 쓰는 3번 <리고동>(그리그의 홀베르크 모음곡과 비교하라), 관악기들을 위한 곡을 생각나게 하고 한 마디에서 두 옥타브에 걸쳐 반은 웃기고 반은 그로테스크한 기괴한 주제를 특징으로 하는 8번 <알르망드>이다. 여기서 “그로테스크”에 대한 작곡가의 감각이 처음으로 나온다. “젊은 반란군”은 (광택이 고운) 새틴이나 핑크 색상 대신에 눈부신 네온 불빛을 선택하면서, 신중하고 이해심이 있기보다는 큰 망치로 전통 있는 원형(原型)을 다뤘다. 드뷔시가 1913년에 프로코피에프의 곡을 들었을 때, 그는 (그의 “이야기”와 “추억”에 대한 회고록과 함께) 10개의 곡들 중에서 유일하게 느린 6번 <전설>에 특별한 호응을 얻었다. 이 매우 다채롭고 화성면에서 다양한 3부분으로 된 안단티노(조금 느리게)는 놀랍게도 “안단테 렐리지오소”(느리고 경건하게)로 표시된 중간부를 포함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사실상 모든 마디에서 새로운 템포와 완급법(緩急法)에 의한 악센트(음의 강도를 높이지 않고 음을 약간 연장시킴으로써 생기는 악센트)와 함께 극단적인 루바토(자유로운 템포) 효과가 필요하다. 다음의 프렐류드 C장조는 모든 러시아 작곡가들에 의해 가장 자주 편곡된 곡들 중의 하나이며, 작곡가에 의해 <하프>라는 표제가 붙었는데, 원곡 버전으로 연주되지 않을 때 다윗 왕의 악기로 자주 연주되는 이유를 설명하기 때문이다. 10개의 에피소드 중 마지막 두 곡은 프로코피에프의 후기 스타일인 스케르초소(악보에서 재미있게 또는 익살스럽게 연주하라는 말) 요소를 대표한다. 이 음반에는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제자로 나중에 프랑스에서 작곡가로 성공한 니콜라이 체레프닌에게 헌정된 9번 <유머러스한 스케르초>가 포함되어 있다. 작곡 당시에 체레프닌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교수였는데, 그가 만든 지휘 교실에 알렉산더 가우크, 니콜라이 말코, 프로코피에프가 프로코피에프가 참석했다. 이 곡은 바순의 음색을 모방한 것이었다.

Prokofiev Pieces, Op. 12 No. 2 Gavotte Opening / 프로코피에프 10개의 에피소드 중 2번 가보트 오프닝

Tchaikovsky Romance in f, Op. 5 Opening / 차이코프스키 로망스 오프닝


소프로니츠키의 스크리아빈은 음침하다고들 하는데 옛날에 특히 겨울에 스크리아빈을 들을 때 나는 그 음침하고 스산한 느낌을 좋아했다. 전에 소프로니츠키의 프로필을 써뒀기 때문에 영어에 없는 내용을 더 보충할 수 있었다.

댓글 1개:

  1. https://yadi.sk/d/1e9YSFmqU6Skc

    http://uploaded.net/file/37xd034b/from/aa33kn

    http://uploaded.net/file/yhxd2398/Mel.RPS05.r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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