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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17일 일요일

Brilliant Classics / Legendary Russian Pianists CD23 Mikhail Pletnev & Andrei Gavrilov



CD23 Mikhail Pletnev & Andrei Gavrilov / 미하일 플레트네프, 안드레이 가브릴로프
01 Mozart Piano Concerto No. 9 in Eb, K. 271 'Jeunehomme': I. Allegro /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9번 <죄놈>
02 Mozart Piano Concerto No. 9 in Eb, K. 271 'Jeunehomme': II. Andantino
03 Mozart Piano Concerto No. 9 in Eb, K. 271 'Jeunehomme': III. Rondeau. Presto
Mikhail Pletnev, piano / 미하일 플레트네프, 피아노
State Chamber Orchestra / 국립 실내 오케스트라
Viktor Tretiakov, conductor / 빅토르 트레차코프 지휘

04 Beethoven Piano Concerto No. 3 in c, Op. 37: I. Allegro con brio /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
05 Beethoven Piano Concerto No. 3 in c, Op. 37: II. Largo
06 Beethoven Piano Concerto No. 3 in c, Op. 37: III. Rondo. Allegro
Andrei Gavrilov, piano / 안드레이 가브릴로프, 피아노
USSR State Symphony Orchestra / 소련 국립 심포니 오케스트라
Yuri Temirkanov, conductor / 유리 테미르카노프 지휘

Mikhail Pletnev (b. 1957) / 미하일 플레트네프
Principal Teachers: Evgeni Timakin, Yakov Flier, Lev Vlasenko / 에프게니 티마킨, 야코프 플리에르, 레프 블라센코 사사

Prizes:
1978 - Tchaikovsky Competition, 1st /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1위
2005 - Russian Federation Prize / 러시아 연방상
2005 - Grammy Award / 그래미상
2007 - Presidential Prize / 대통령상

'This young man is extraordinary talented [...] But why does [he] look so unhappy? You'd think it was sheer torment for him to play' (Sviatoslav Richter, 1986). Pletnev traces his pianistic lineage back to Konstantin Igumnov and Anan Esipova. Winning the sixth Tchaikovsky Competition - before a jury that included Lev Vlasenko, Evgeny Malinin, Victor Merzhanov, Eugene List and Halina Czerny-Stefanska - launched his international career, and his US debut followed in 1979. His aspirations as a conductor (he is also a composer and arranger) were fostered through Gorbachev, leading in 1990 to the founding of the Russian National Orchestra, the first privately subsidized ensemble of its kind in the country since before the Revolution. 'In the 21st century culture of oversupply and underdemand, it's small wonder that every second musician in the marketplace is sold by agents, impresarios and record companies as unique. It doesn't mean much. But just occasionally it does. And Mikhail Pletnev - arguably the most distinctive and idiosyncratically remarkable of living pianists - is a case in point' (Michael White, "New York Times", 16 March 2003).

‘이 청년은 비범한 재능이 있다. [...] 그런데 왜 [그가] 그렇게 불행해 보일까? 당신은 그가 연주하는 것이 순전한 고통이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1986년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플레트네프는 콘스탄틴 이굼노프와 안나 에시포바의 피아니스트 계보를 잇는다. 레프 블라센코, 에프게니 말리닌, 빅토르 메르자노프, 유진 리스트, 할리나 체르니-스테판스카 등이 심사위원으로 있었던 제6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국제 경력을 시작했으며 1979년에 미국 데뷔가 이어졌다. 지휘자로서의 포부(그는 작곡가이자 편곡자이기도 함)는 1990년에 러시안 내셔널 오케스트라 창설을 이끄는 것이 고르바초프를 통해 조성되었는데, 혁명 이전부터 러시아 최초로 사적인 보조금을 받은 앙상블이다. ‘공급과잉과 수요 부족의 21세기 문화에서 시장에 있는 모든 제2의 음악가가 에이전트, 기획자, 음반사에 의해 독자적으로 팔리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것은 많은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가끔은 그렇다. 그리고 주장하건대 가장 독특하면서 살아있는 피아니스트들 중에서 특색 있게 주목할 만한 미하일 플레트네프가 좋은 예이다(2003년 3월 16일 <뉴욕 타임스>의 마이클 화이트).’

Mozart Piano Concerto No. 9 in Eb, K. 271 "Jeunehomme" [Jenamy] (1777) /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9번 <죄놈>
The final solo keyboard concerto of Mozart's Salzburg period, and the first of his mature canon. 'One of the great wonders of the world' (Alfred Brendel). In March 2004 Michael Lorenz conjectured that the identity of the person for whom it was written may have been Victoire Jenamy (1749-1812), eldest offspring of his friend the French ballet-master Jean-Georges Noverre ("Mozart Experiment Aufklarung", Vienna 2006). The work arrests as much for the piano's presence at the start (anticipating Beethoven) as the held-back minuet episode foiling its rondo.

모차르트의 잘츠부르크 시기의 마지막 솔로 키보드 협주곡과 성숙한 캐논의 첫 번째 곡. ‘세계의 위대한 놀라움 중 하나(알프레드 브렌델).’ 2004년 3월에 음악학자 미하엘 로렌츠는 모차르트가 이 곡을 그의 친구이자 프랑스 발레 안무가 장-조르주 노베르의 장녀인 피아니스트 빅투아르 제나미(1749~1812)를 위해 썼다는 사실을 밝혀냈다(<모차르트 계몽 실험>, 2006년 비엔나). 이 작품은 론도를 방해하는 억제된 미뉴에트 에피소드만큼 (베토벤을 예상하는) 시작에서 피아노의 존재를 위해 많은 것을 저지한다.

Andrei Gavrilov (b. 1955) / 안드레이 가브릴로프
Principal Teachers: Assanetta Eguiserian (his mother), Tatiana Kestner, Lev Naumov / 아사네타 이퀴제리안(어머니), 타티아나 케스트너, 레프 나우모프 사사

Prize:
1974 - Tchaikovsky Competition, 1st /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1위

'The teenage superstar with the world at his feet [who] crashed and burned' (Stephen Moss, "The Guardian", 21 December 2006). Descendent of both Neuhaus' line (through his mother and Lev Naumov) and Goldenweiser's (through Tatiana Kestner), Gavrilov's life has run the gamut from championship highs to personal conflict and political controversy. An intricately complex poet and firebrand of 'diabolical talent' (Sviatoslav Richter), tensioned by 'emotional richness' and 'ungovernable temperament' (his words), fabled for his keyboard voicing, unabashed imagery and Russo-Olympian technique, he came to prominence in 1974, winning the Tchaikovsky Competition, aged still 18, and substituting for Richter at the Salzburg Festival. A visceral, all-devouring Abbey Road reading of Prokofiev's First Concerto under Sir Simon Rattle, taped in July 1977, taking 'all the corners hair-raisingly on two wheels' (David Faning), understandably astonished. Star collaborations followed (Vladimir Ashkenazy, Riccardo Muti, Neville Marriner), as well as solo and chamber discs (from Bach and Handel to double-piano Stravinsky with Vladimir Ashkenazy and Hindemith and Schnittke with Gidon Kremer).

‘발밑에 있는 세상을 가진 10대 슈퍼스타가 추락했다(2006년 12월 21일 <가디언>에서 스티븐 모스).’ (그의 어머니와 레프 나우모프를 통한) 네이가우스 라인과 (타티아나 케스트너를 통한) 골덴바이저 라인의 계보를 모두 이어받은 가브릴로프의 인생은 콩쿠르 우승부터 개인적인 갈등과 정치적인 논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악마적인 재능’(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의 복잡한 시인이자 선동가로, ‘감정의 풍부함’과 ‘억누를 수 없는 기질’(그의 말)로 긴장시키며, 자신의 건반 소리와 대단한 형상화와 러시아의 신과 같은 테크닉으로 전설적인 그는 1974년 18세에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유명해졌으며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리히터를 대신해서 연주했다. 사이먼 래틀 경의 지휘로 애비로드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프로코피에프 협주곡 1번의 본능적으로 집어삼키는 연주는 1977년 7월에 녹음되었는데, ‘두 개의 바퀴로 소름 끼치게 구석을 모두’(데이비드 패닝) 차지하며, 당연히 깜짝 놀라게 했다. 스타 지휘자들과의 협연(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리카르도 무티, 네빌 마리너)이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독주 음반과 실내악 음반(바흐와 헨델부터 2대의 피아노를 위한 스트라빈스키 작품을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와 녹음했으며,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와는 힌데미트와 슈니트케를 녹음)도 뒤따랐다.

Life turned unpleasant for Gavrilov in 1979. 'His career,' Bryce Morrison chronicles, 'was effectively terminated when on returning [from Japan] to the USSR, he was accused of anti-Soviet bias and of open criticism of the musical-political establishment. It was not until 1984, after severe privation, that [he] was able to resume his international appearances. However [...] references to undue aggression and an overbearing keyboard manner became frequent.' 'A story of abandoned concerts, loss of confidence, the end of the DG deal, a broken marriage [...] a personal and artistic implosion' (Stephen Moss).

1979년에는 가브릴로프의 인생에 불행이 닥쳤다. 브라이스 모리슨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일본에서] 소련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경력은 사실상 끝났으며 반 소비에트 성향과 음악적-정치적 지배층에 대한 공개적 비판으로 기소되었다. 1984년까지 심각한 상황에 처한 이후로, [그는] 국제적인 등장을 재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 과도한 공격성과 강압적인 연주 방식은 빈번해졌다.’ ‘버려진 콘서트, 자신감의 상실, DG 계약의 끝, 깨진 결혼 [...] 개인적이자 예술적인 파열(스티븐 모스).’

Gavrilov's own account of events is different from Morrison's, but scarcely more comforting. 'I was becoming rich and independent. I was driving a Mercedes that was better than Leonid Brezhnev's. I was constantly watched and constantly threatened. By the end, the militia people watching me had a licence to kill. One showed me a paper signed by Yuri Andropov [Chairman of the Supreme Soviet], which said the authorities wouldn't mind if a fatal accident happened to Mr. Gavrilov' ("The Gardian"). Offered a hand by Gorbachov, Gavrilov left Moscow in 1985, going first to London, then Germany.

가브릴로프의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모리슨의 것과는 다르지만, 거의 더 편안하지 않다. ‘나는 부자가 되어 독립하고 있었다. 나는 레오니드 브레즈네프의 차보다 더 좋은 메르세데스를 몰고 있었다. 나는 끊임없이 감시당했으며 끊임없이 위협을 받았다. 결국 나를 감시하고 있는 민병대 사람들은 살인 면허를 가지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소련 공산당 서기장] 유리 안드로포프가 서명한 서류를 내게 보여줬는데, 당국은 가브릴로프에게 치명적인 사고가 발생했는지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가디언).’ 가브릴로프는 1984년에 (당시 정권 2인자였던) 고르바초프에게 편지로 호소한 끝에 힘겹게 서방 연주 여행을 허가받았다. 1985년 런던을 다시 찾은 그는 고르바초프에게 서방 체류를 요청, 그해 뉴욕 카네기홀에서 성공적으로 데뷔 이후 1989년 독일에 정착했다.

In "Russia's Great Modern Pianists", he speaks warmly of Richter - 'my idol'. 'We often interpret the notion of influence in the negative sense of the word, that is, meaning overwhelming an individual [and encouraging] imitation. But this is not the case with me. Richter's influence has never showed itself [in this way]. It has been rather a guiding and directing force. Richter is not even a "school". It is a kind of biofield in which you start feeling and thinking differently.' The great man first heard him in July 1976 at Grange de Meslay, writing in his notebook: 'Temperament (lost of people think he makes a bit too much of it, but for my own part I thought that what he did was just right), stature, brilliant technique, it all came together to make me think that we're dealing here with the most gifted pianist of his generation.'

마르크 질베르퀴트의 책 <러시아의 위대한 현대 피아니스트들>에서 그는 리히터에 대해 ‘나의 우상’이라고 따뜻하게 말한다. ‘우리는 단어의 부정적인 의미, 즉 개성적인 [그리고 힘을 북돋아주는] 상상을 압도한다는 의미에 영향을 미치는 생각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경우와 다르다. 리히터의 영향은 [이런 방식으로] 그 자체를 본 적이 없다. 오히려 안내하고 지도하는 힘이었다. 리히터는 “스쿨”이 아니다. 당신이 다르게 느끼고 생각하기 시작하는 일종의 바이오필드(생명체를 둘러싸거나 침투하는 에너지 또는 생명력으로 간주되는 분야)이다.’ 위대한 남자는 1976년 7월에 그랑주 드 메슬레에서 처음으로 그의 연주를 들었는데, 수첩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 ‘기질(많은 사람들은 그가 기질을 좀 너무 많이 만든다고 생각하지만, 딴사람은 모르거니와 나로서는 그가 옳았다고 생각했다.), 위상, 화려한 테크닉, 우리가 여기서 그와 동세대의 가장 재능 있는 피아니스트를 다루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것을 모두 합친 것이었다.’

For Gavrilov himself, 'Crisis, in principle, is always present, [I'm] a highly emotional, impulsive person, so that one day is not like another with me. I can give way to despair, ten times a day, to emotional crisis [...] maybe it's the fate of all artistic people to be constantly tormented?'

가브릴로프 자신에게 있어 ‘위기는 원칙적으로 항상 존재한다. [나는] 어느 날은 나 같지 않게 대단히 감정적이면서도 충동적인 사람이다. 감정적인 위기로 하루에 10번 절망감에 무너질 수도 있는데 [...] 어쩌면 끊임없이 괴로워하는 게 모든 예술인들의 운명일까?’

Beethoven Piano Concerto No. 3 in c, Op. 37 (1796-1804) /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
'Not as significant' as Mozart's in the same key (Brahms, 1896). 'Beethoven the tone-poet [...] I sometimes think this Concerto is as much a self-portrait of Beethoven at thirty as the "Eroica" is of Beethoven at thirty-three' (Marion Scott, 1934). 'A turning-point in the history of the classical concerto' (Donald Tovey, 1936).

같은 조성의 모차르트 협주곡 24번만큼 ‘중요하지 않다(1896년 브람스).’ ‘음시의 시인 베토벤 [...] 나는 때때로 이 협주곡이 베토벤의 33세 때 작품인 <에로이카> 변주곡 못지않은 30대 베토벤의 자화상이라고 생각한다(1934년 바이올리니스트 마리온 스콧).’ ‘고전 협주곡 역사의 전환점(1936년 영국 저술가 도널드 토베이).’

댓글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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