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2일 화요일
Brilliant Classics / Legendary Russian Pianists CD8 Maria Grinberg & Tatiana Nikolayeva
CD8 Maria Grinberg & Tatiana Nikolayeva / 마리아 그린베르크, 타티아나 니콜라예바
01 Beethoven Piano Concerto No. 5 in Eb, Op. 73 'Emperor': I. Allegro /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02 Beethoven Piano Concerto No. 5 in Eb, Op. 73 'Emperor': II. Adagio un poco mosso
03 Beethoven Piano Concerto No. 5 in Eb, Op. 73 'Emperor': III. Rondo. Allegro
Maria Grinberg, piano / 마리아 그린베르크, 피아노
USSR State TV & Radio Symphony Orchestra / 소련 국립 TV-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Alexander Gauk, conductor / 알렉산더 가우크 지휘
04 Bach Keyboard Concerto No. 1 in d, BWV 1052: I. Allegro / 바흐 키보드 협주곡 1번 BWV 1052
05 Bach Keyboard Concerto No. 1 in d, BWV 1052: II. Adagio
06 Bach Keyboard Concerto No. 1 in d, BWV 1052: III. Allegro
Tatiana Nikolayeva, piano / 타티아나 니콜라예바, 피아노
USSR State TV & Radio Symphony Orchestra / 소련 국립 TV-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Gennady Rozhdestvensky, conductor / 겐나디 로제스트벤스키 지휘
Maria Grinberg (1908-78) / 마리아 그린베르크
Principal Teachers: David Aisberg, Felix Blumenfeld, Konstantin Igumnov / 다비드 아이스베르크, 펠릭스 블루멘펠트, 콘스탄틴 이굼노프 사사
Prize:
1935 - All-Union Competition, 2nd / 전소련 콩쿠르 2위
'I love her clarity of thought, which is as deeply personal as it is irrefutably logical. I love her flawless taste and the way she penetrates music's expressive structure. I love her beautifully charming sound, which is produced not as an end in itself, but as a medium of expression. And I love her technique, whose utter perfection is achieved without the flaw of super virtuosity' (Heinrich Neuhaus).
‘나는 그녀의 사상을 분명히 사랑하는데, 사려 깊게 논리적인 것만큼 깊이 개성적이다. 나는 그녀의 흠잡을 데 없는 풍미와 그녀가 음악의 표현 구조를 관통하는 방식을 사랑한다. 나는 그녀의 아름다운 매력적인 사운드를 사랑하는데,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표현의 수단으로 만들어진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테크닉을 사랑하는데, 뛰어난 기교의 결함 없이 완전한 완성이 이뤄진다(하인리히 네이가우스).’
Ukrainian-Jewish, another of the Odessa Collective, Maria Israilyevna Grinberg spent much of her working life in Moscow. In 1932 she was appointed a Soloist of the Moscow State "Philharmonie", and in 1959 went to the Gnessin Institute, becoming a professor in 1970. Despite token recognition, and friends in high places helping to right certain wrongs - Konstantin Igumnov, Heinrich Neuhaus, Kirill Kondrashin, David Oistrakh - her life was beleaguered, beginning with the 1937 Chopin Competition for which she'd been chosen as one of the four-strong Soviet contingent.
오데사 집단의 또 다른 우크라이나-유태계인 마리아 이즈라일레프나 그린베르크는 모스크바에서 일하는 삶의 대부분을 보냈다. 1932년 모스크바 연방 “필하모니”의 독주자로 임명되었으며, 1959년 그네신 음대로 가서 1970년에는 교수가 되었다. 형식적인 인식이었음에도 확실히 잘못된 것을 바로잡도록 돕는 높은 위치에 있는 친구들(콘스탄틴 이굼노프, 하인리히 네이가우스, 키릴 콘드라신, 다비드 오이스트라흐)로 인해 그녀의 인생은 4명의 강력한 소비에트 참가자들로 선정된 1937 쇼팽 콩쿠르로 시작하여 둘러싸였다.
Stephen Wigler's article 'Out of the Shadows' ("International Piano", January/February 2008) chronicles the pain she suffered. 'Shortly before the competition, Grinberg's husband, Stanislav Stande, and her father Israil, were arrested by the secret police and executed as "enemies of the people...Grinberg, who was then the mother of a three-month-old daughter, was replaced in Warsaw by another pianist and fired by the State concert management, thus making it impossible for her to perform in public. For almost ten years [throughout the war] she supported herself, her mother, her mother's elderly sister and her daughter by taking jobs of all kinds, including accompanying amateur dance groups and playing timpani and percussion in band and orchestra concerts.'
스티븐 위글러의 기사 <세상 밖으로>(2008년 1/2월 <인터내셔널 피아노>)는 그녀가 시달렸던 고통을 말한다. ‘콩쿠르 직전에 그린베르크의 남편인 스타니슬라프 스탄데와 그녀의 아버지 이즈라일은 비밀경찰에게 체포되어 “사람들의 적”으로 처형당했다....이후 3개월 된 딸의 어머니가 된 그린베르크는 바르샤바에서 또 다른 피아니스트로 대체되었고 연방 콘서트 매니지먼트에 의해 해고당했으므로 공개적으로 연주할 수 없었다. [전쟁을 거치면서] 거의 10년 동안 그녀는 아마추어 무용단 반주, 밴드와 오케스트라 콘서트의 팀파니와 퍼커션 연주 등 온갖 종류의 일을 하면서 그녀 자신, 그녀의 어머니, 그녀의 어머니의 언니, 그녀의 딸을 부양했다.’
Her comeback (following Stalin's death in 1953, and the discovery of a brain tumour a year later, which affected her sight) brought some sweet moments (in particular two tours to Holland in the early 60s, when critics compared her with Clara Haskil, Vladimir Horowitz and Arthur Rubinstein), but little if any national notice. 'Feminine, with a soft serious look,' is how Dmitri Paperno remembers her - a fragile, dignified woman of 'strong willpower both as a person and as a musician. Her intellect, refined taste, and ability to narrate music in her own way, modelling the shape of large works, made her concerts interesting and sometimes even outstanding [...] Her candour with students was uncommon: "How can you play this passage so smoothly? I have never managed it the way I wanted" (And this from Maria Grinberg, who with her small, clever hands played such pieces as Beethoven's "Hammerklavier" [...] and Rachmaninoff's Third Concerto!) [...] She was a remarkable teacher, if maybe too sensitive and sometimes intolerant when jury discussion turned to her students.'
그녀의 컴백(1953년 스탈린의 죽음 그리고 그녀의 시력에 영향을 준 1년 후의 뇌종양 발견 이후)은 한때 달콤한 순간들이 있었으나(특히 60대 초반에 네덜란드에서 가진 두 번의 투어 때 비평가들이 그녀를 클라라 하스킬,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아르투르 루빈스타인과 비교), 전국적인 주목이 거의 없었다. 드미트리 파페르노는 그녀를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부드러운 진지한 표정을 가진 여성적이면서도, 인간으로서 음악가로서 강한 의지를 지닌 연약하지만 품위 있는 여성이다. 그녀의 지성, 세련된 풍미, 대형 작품의 형성에 모범이 되면서 그녀 특유의 방식으로 음악을 진행하는 능력은 그녀의 콘서트를 흥미롭게 때로는 뛰어나게 만들었다. 학생들에 대한 그녀의 솔직함은 흔하지 않은 것이었다. - “어떻게 하면 이 패시지를 매우 부드럽게 연주할 수 있을까? 나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결코 그렇게 관리하지 않는단다.” (그리고 이제부터 작고 영민한 손을 가진 마리아 그린베르크는 베토벤의 <함머클라비어> 소나타, [...]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3번 같은 곡들을 연주했다! [...] 심사위원들이 논의하여 그녀의 제자들을 선정할 때 그녀는 매우 민감하면서도 때로는 용납하지 않는 훌륭한 교육자였다.’
Her discography of studio recordings, broadcasts and live concerts (most of them issued posthumously) testifies to remarkable diversity and stylistic sensitivity, from Bach to Bartok, Mozart to Medtner, Schubert to Stravinsky. A master-artist placing a premium on rhythm, phrasing, rubato, articulation, tone, 'thrown' projection and harmonic/tonal/dynamic theatre, blessed with slow movements to 'x-ray the soul' (Oleg Chernikov), she was a compelling Beethovenian. A sonata cycle was recorded by Melodiya in 1970.
스튜디오 녹음, 방송, 라이브 콘서트(대부분은 사후에 발행됨)의 음반 목록들은 바흐에서 버르토크, 모차르트에서 메트너, 슈베르트에서 스트라빈스키에 이르기까지 놀라운 다양성과 민감한 스타일을 보여준다. 리듬, 프레이징, 루바토, 아티큘레이션, 음색, ‘던져진’ 계획, ‘영혼을 엑스레이하기’ 위해 느린 악장들에 축복을 베푼 화성적인/음색의/다이내믹한 연극을 특히 중요하게 여기는 거장-아티스트(올렉 체르니코프)인 그녀는 강렬한 베토베니안(베토벤 스페셜리스트)이다. 베토벤 소나타 전곡은 1970년에 멜로디야 레이블에서 녹음되었다.
Beethoven Piano Concerto No. 5 in Eb, Op. 73 (1809-10) /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The composer wrote the concerto as he sheltered from Napoleon's cannons in the basement cellar of a friend.: 'What a destructive, disorderly life I see and hear around me, nothing but drums, cannons and human misery in every form.' Unlike their Western sisters, Russian women aren't frightened of the concerto.
작곡가는 친구의 지하실에서 나폴레옹의 대포를 피하면서 이 협주곡을 썼다. ‘주위에서는 온통 파괴적이고 무질서한 행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온통 북소리, 대포소리, 모든 형태의 비인간적인 처참함뿐입니다.’ 서방의 여성들과는 달리 러시아 여성들은 이 협주곡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Tatiana Nikolayeva (1924-93) / 타티아나 니콜라예바
Principal Teacher: Alexander Goldenweiser / 알렉산더 골덴바이저 사사
Prizes:
1945 - Scriabin Competition, 1st / 스크리아빈 콩쿠르 1위
1948 - People's International Competition in Prague, 2nd / 프라하 제1회 인민 국제 콩쿠르 2위
1950 - Bach Competition in Leipzig, 1st / 라이프치히 제1회 바흐 콩쿠르 1위
1971 - Robert Schumann Prize / 로베르트 슈만 상
1991 - Gramophone Award / 그라모폰 상
A religious "babushka" figure enjoying in old age (especially in the UK) a Myra Hess-like popularity with audiences, Nikolayeva caught the attention of the West and Far East only in the 1980s. But for well over a generation before that the Soviet Union and Warsaw Pact recognized her work. Recepient of a State Prize in 1951, she was appointed to the Moscow Conservatory in 1959, becoming a professor six years later. 'The biggest difference between Nikolayeva and most of the professors,' her protege Nikolai Lugansky remembers, 'was her individuality; she was an extraordinary person. When I think of her, I think of Nielsen's "Inextinguishable" - that's what she was. So many things changed in Russia during her lifetime [Stalin to Yeltsin, USSR to Federation], but she had the most tremendous spirit. She was someone who really loved life - she was everywhere, giving recitals, concertos, sitting on juries, giving masterclasses, and of course teaching.' She was, he says, 'a wonderful teacher and mentor. I learned a lot from her, and I adored her. She was an extraordinary person whose freedom of mind and spirit were absolute. She was not a technician, although her technique was beyond question; she believed that technique was a response to a musical demand, and that the important thing was how we think about music, how we listen to music. [Her] influence was not limited to lessons: I went to her concerts, we played music together, we listened at home to a lot of music. She brought records and always asked me to listen to them. This was my interaction with someone who was dear and close. This was how she taught, so I continue to learn in this way after her death'.
헌신적인 “바부시카”(러시아인 할머니)로 노년기에 (특히 영국에서) 청중들에게 마이라 헤스 같은 인기를 끌었던 인물인 니콜라예바는 1980년대만 해도 서방과 동아시아의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그 이전 세대를 훨씬 넘어 소련과 바르샤바 협약은 그녀의 업적을 인정했다. 1951년 스탈린상을 받았으며, 1959년 모스크바 음악원에 지명되어 6년 후 교수가 되었다. 그녀의 제자 니콜라이 루간스키는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니콜라예바와 대부분의 교수들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그녀의 개성이었는데, 그녀는 비범한 사람이었다. 내가 그녀를 생각할 때, 나는 닐센 교향곡 4번 <불멸>을 생각하는데, 그게 바로 그녀였다. 그녀의 평생 동안 러시아에서 많은 것들이 바뀌었지만[스탈린에서 옐친으로, 소련에서 러시아 연방으로], 그녀는 가장 엄청난 정신을 가졌다. 그녀는 인생을 정말로 사랑한 사람이었다. - 그녀는 리사이틀과 협연을 가지고 심사위원을 지내며 마스터클래스는 물론 가르치면서 사방에 존재했다. 그녀는 훌륭한 선생님이자 멘토였다. 나는 그녀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으며 그녀를 존경했다. 그녀는 마음과 정신의 자유가 절대적인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기술은 의문의 여지가 없었지만 기술자는 아니었다. - 그녀는 기술이 음악적 요구에 대한 반응이며 우리가 음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우리가 음악을 어떻게 듣는지가 중요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녀의] 영향은 레슨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 나는 그녀의 콘서트에 갔고, 우리는 함께 연주했으며, 우리는 집에서 많은 음악을 들었다. 그녀는 음반들을 가져와서 항상 내게 들을 것을 요청했다. 이것은 친애하는 가까운 누군가와 나의 상호작용이었다. 이것은 그녀가 나를 가르쳤던 방법이었으므로 나는 그녀가 죽은 후에 이런 식으로 배우는 것을 계속한다.’ 그가 말한다.
Nikolayeva and Shostakovich had a close friendship ("creative and personal") beginning in 1950 when he was on the jury of the Bach Competition. It was for her that he wrote his Op. 87 Preludes and Fugues, which she premiered in Leningrad, 23 December 1952, and recorded three times as well as making a video recording for BBC Scotland in 1992. She left many recordings testifying to the breadth of her art. Shostakovich and 'Steinway' Bach may have been the beginning and end of her life (she played the Op. 87 cycle in her last recital, in San Francisco, November 1993, suffering a cerebral haemorrhage during the first half.) But Beethoven's 'New Testament' (the sonatas, recorded live at the Moscow Conservatory in 1983) was equally critical.
니콜라예바와 쇼스타코비치는 그가 바흐 콩쿠르 심사위원이었던 1950년부터 (“창조적이고 개성적인”) 긴밀한 우정을 가졌다. 그가 그녀를 위해 쓴 프렐류드와 푸가는 1952년 12월 23일 레닌그라드에서 초연되었으며 1992년 BBC 스코틀랜드에서 비디오로 녹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 번이나 녹음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예술의 폭을 입증하는 많은 녹음들을 남겼다. 쇼스타코비치와 ‘스타인웨이’ 바흐는 그녀의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1993년 11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진 마지막 리사이틀에서 쇼스타코비치의 프렐류드와 푸가를 연주했는데, 연주회 도중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러나 베토벤의 ‘신약성서’(1983년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실황으로 녹음된 베토벤 소나타들) 역시 마찬가지로 중요했다.
She was the first to tape the original, uncut version of Tchaikovsky's Second Concerto and Concert Fantasy (with Kirill Kondrashin, circa 1951) - displaying for one latter-day critic 'scorching technique, a fiery and gripping temperament [and] fearlessly passionate commitment in every note'. (She also recorded the B flat minor in Leipzig with Kurt Mazur, reputedly his first studio visit.) Later recordings included her own First Piano Concerto, Boris Lyatoshinsky's "Slavonic Concerto" under the composer, Medtner's First and Third Concertos, Richard Strauss' "Parergon" and Stravinsky's "Capriccio". In 1986 she joined Lugansky and Virsaladze for Mozart's Double and Triple Concertos. When not absorbed in polyphony or the large-scale, she could let slip a deft hand and intimate charm: her way with Liadov (preserved in 1976) was atmospheric.
그녀는 (1951년경에 키릴 콘드라신의 지휘로) 차이코프스키 협주곡 2번과 콘서트 판타지를 순수한 원본으로 최초 녹음했다. - 근래의 비평가는 ‘뜨거운 테크닉, 불같이 사로잡는 기질과 모든 음에서 대담하면서도 열정적인 전념’을 표출했다. (그녀는 소문에 의하면 첫 스튜디오 방문에서 쿠르트 마주어의 지휘로 라이프치히에서 차이코프스키 협주곡 1번을 녹음했다.) 나중의 녹음들로는 그녀의 자작곡인 피아노 협주곡 1번, 보리스 리아토신스키 <슬라브 협주곡>(작곡가 자신의 지휘), 메트너 협주곡 1번과 3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가정 교향곡 부록>, 스트라빈스키 <카프리치오> 등이 있었다. 1986년에는 루간스키, 비르살라제와 함께 모차르트 2대의 피아노 협주곡과 3대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했다. 폴리포니(다성음악)나 대규모에 흡수되지 않는다면, 그녀는 날랜 손과 친밀한 매력을 드러낼 수 있었는데, (1976년 보존된) 리아도프와 함께 했던 그녀의 방식은 분위기 있었다.
Around the time of the Union breakup, before Boris Berezovsky, Nikolai Demidenko, Andrei Gavrilov, Evgeny Kissin, Nikolai Lugansky, Oleg Marshev, Mikhail Pletnev, Konstantin Scherbakov and Arcadi Volodos came to be the bright new Russian brigade, Westerners were effusing about Nikolayeva. Not all her compatriots and contemporaries were as generous - Richter in particular. On listening to her Bach, French Suite No. 5: 'A famous artist; even so her performance is so unconvincing that I keep realizing that I'm not listening'. And in 1988 to Beethoven's "Diabelli" Variations: 'She understands virtually nothing of what she's playing. Such tempi are harmful to your health; the rest is boring and prosaic'. Dmitri Paperno, from 1937 her classmate in the 'prewar Goldenweiser Old Guard', is kinder. 'With all her dignity [ignoring the back-biting], Tatiana had never been arrogant with anyone, maybe just less smiling with some.'
소련 해체가 일어날 무렵 보리스 베레조프스키 이전에 니콜라이 데미덴코, 안드레이 가브릴로프, 에프게니 키신, 니콜라이 루간스키, 올렉 마르셰프, 미하일 플레트네프, 콘스탄틴 셰르바코프, 아르카디 볼로도스가 러시아의 새로운 여단으로 부상했으며, 서방 사람들은 니콜라예바에 대해서 토로하고 있었다. 그녀의 동포와 동시대인 모두가 관대한 것은 아니었는데, 특히 리히터가 그랬다. 그녀의 바흐 프랑스 모음곡 5번 연주를 들으면서 ‘유명한 아티스트임에도 그녀의 연주는 납득하기 어려워서 내가 (그녀의 연주를) 듣고 있지 않다는 것을 계속 깨닫는다.’ 그리고 1988년 베토벤 <디아벨리> 변주곡 연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그녀는 자신이 연주하는 것에 대해 사실상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템포는 건강에 해로운데, 나머지가 지루하고 따분하다.’ 1937년부터 그녀의 동급생이었던 ‘전쟁 이전 골덴바이저 보수파’ 드미트리 파페르노는 보다 친절하다. ‘[험담을 무시하면서] 그녀의 모든 존엄성으로, 타티아나는 결코 누군가에 오만하지 않았으며, 어쩌면 덜 미소 짓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J.S. Bach Keyboard Concerto No. 1 in d, BWV 1052 (1735-40) / 바흐 키보드 협주곡 1번 BWV 1052
A Leipzig transcription/reconstruction, published in 1838, of a lost violin or viola d'amore concerto, its virtuosic material may also be familiar from the cantatas BWV 146, 'Wir mussen durch viel Trubsal' (c. 1726-28) and BWV 188, 'Ich habe meine Zuversicht' (c.1728). Brahms wrote a cadenza for it, published in 1927. Bach on the piano has never been an aesthetic or moral issue for Russians.
1838년에 출판된 라이프치히 편곡/재구성 악보는 잃어버린 바이올린이나 비올라 다모레[6~7 가닥의 현(絃) 이외에, 지판(指板) 아래에 같은 수 이상의 금속 공명현(共鳴弦)이 쳐진 옛 악기] 협주곡이기도 한데, 고도의 기교를 보여주는 소재는 칸타타 BWV 146 <우리는 많은 고난을 겪게 되리라>(1726~28년경), BWV 188 <나는 굳게 믿노라>(1728년경)와도 익숙할 것이다. 브람스가 이 곡을 위해 쓴 카덴차는 1927년에 출판되었다. 피아노에서 바흐는 러시아인들에게 결코 미학적이거나 도덕적인 문제가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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