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도노호의 제7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일기 18 - 1982년 7월 8일
My Final
I am writing this two days after my performance in the finals, and the announcement of the competition result. I would like to start by saying that Thursday was the most important, overwhelming and thrilling day of my whole professional life thus far.
나는 결선에서의 내 연주와 콩쿠르 결과 발표 이후 이틀 동안 이 글을 쓰고 있다. 나는 목요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시작하고 싶은데, 지금까지 내 모든 전문 직업을 압도하는 스릴 넘치는 하루였다.
There were many contributing factors, not least of which was that they gave me the joint Silver Medal.
많은 공헌 요소가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은메달을 공동으로 수여한 것이다.
However, there were many others, particularly the relationship I have developed with the Moscow public, which I cannot put into words. They have tried to invade the dressing room, screamed, crowded round the car, stamped, cheered, cried, bombarded me with flowers, and yelled my name out for a continuous 5 hours between the finals performances, which finished at 10.30 p.m., and the jury announcement, which was at about 4.00 a.m. I cannot begin to understand it, and I am emotionally overcome by it, but of course I love it, and I hope this competition gives me the opportunity to come back and play for these people again and again. [16]
그러나 많은 사람들, 특히 러시아 국민과 함께 발전했던 관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들은 밤 10시 30분에 끝난 내 결선 연주와 새벽 4시쯤에 있었던 심사위원 발표 사이의 5시간 동안 탈의실에 난입하려고 했는데 비명을 지르고 차 주변에 붐비고 발을 구르고 환호하고 울고 내게 꽃다발 세례를 퍼부었으며 계속 내 이름을 외쳤다. 나는 그것을 이해하기 시작할 수 없었고, 감정적으로 극복되었지만, 물론 나는 그것을 사랑하며, 이 콩쿠르가 내게 이 사람들을 위해 몇 번이고 돌아와서 연주할 기회를 제공하기를 바란다. [16]
Other contributory factors were the support from my British friends, who were locked in the dressing room with me, along with a few particularly audacious Russians and several bottles of Sovietskaya Champanskaya. The orchestra and conductor were in the event fantastic, and enormously supportive.
다른 기여 요인은 특히 대담한 러시아인 몇 명과 소비에츠카야 참판스카야(소련산 샴페인) 병 몇 개과 더불어 나와 함께 탈의실에 갇혀있었던 영국인 친구들의 지원이었다. 오케스트라와 지휘자는 결선에서 환상적이었으며, 엄청난 지지를 받았다.
However, the main thing in my mind is the impact of having got this far in a competition that I always regarded with fear and dread, in the country to which I have felt close all my life, despite the intensity of the Cold War and the propaganda I had experienced for years from family, school, university, media, movies and from virtually every direction. It is an indescribable feeling, and one tinged with so many inexplicable and contradictory emotions.
그러나 내 마음 속의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가족, 학교, 대학교, 미디어, 영화, 거의 모든 방향에서 수년간 경험해온 냉전과 선전의 강도에도 불구하고, 내가 평생 동안 가까이에서 느꼈던 나라에서 항상 두렵게 여겼던 콩쿠르에서 지금까지 얻은 영향이다. 그것은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며, 너무 많이 설명할 수 없으면서도 모순된 감정들로 물든 것이다.
I have always regarded competitions with suspicion, and nothing in my previous experiences of them have done anything to change that. Maybe, even now, I am totally against the notion of cultural competitive events. But I have a positive result from this adventure into the terrifying unknown, and I am so glad I took the plunge, and not just because of the inevitable huge career boost.
나는 항상 콩쿠르를 의심의 눈초리로 봤으며, 이전의 경험들에서 그 어떤 것도 변화시키지 못했다. 어쩌면, 지금도 나는 문화적인 경쟁 이벤트의 개념에 완전히 반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모험에서 무서운 미지의 것에 대한 긍정적인 결과를 얻었고, 결단을 내리게 되어 정말 기쁘며, 필연적인 거대한 경력 향상 때문만이 아니다.
The day started with the rehearsal with the orchestra, which I had planned in great detail on the basis of the lack of time. I did not know the conductor, Vladimir Fedoseev [17], but we got along fine (with an interpreter) and he was very cooperative. I addressed as few places in the Tchaikovsky Concerto as I could reduce it to – including begging them not to accelerate at the end of the introduction, where it says meno mosso, and to occasionally play more quietly than mp (which they had not done in the previous nine performances I had listened to). Then we went on to the Rachmaninov 3rd Concerto, concentrating on all the usual difficult moments – i.e. figures 3, 9, 30, 32, 39, most of the last movement middle section, and in particular 75.
그날은 오케스트라와 함께 하는 리허설로 시작되었는데, 나는 부족한 시간을 토대로 매우 디테일한 계획을 세웠다. 나는 지휘자 블라디미르 페도세예프를 몰랐지만, [17] 우리는 (통역사와 함께) 잘 지냈으며 그는 매우 협조적이었다. 나는 차이코프스키 협주곡에서 줄일 수 있을 만큼 줄일 데가 거의 없었다. - 메노 모소(보다 느리게)라고 적혀 있는 도입부의 끝에서 가속화하지 말라고 부탁했으며, 가끔은 (내가 들었던 이전의 9명의 연주에서 그들이 하지 않았던) 메조피아노(조금 여리게)보다 더 조용히 연주하기도 했다. 그런 다음 우리는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3번으로 넘어가서 모든 어려운 순간들에 집중했다. - 예를 들어 3, 9, 30, 32, 39마디, 마지막 3악장 중간 부분, 그리고 특히 75마디.
In the performance the orchestra played so well, particularly when I compare it to the previous performances of Tchaikovsky. Fedoseev is extremely exciting, and almost always stuck to my performance of the solo part like glue. The Tchaikovsky was a miracle from the orchestra. In the Rachmaninov the conductor lost me at 5 bars after 56 – a place I have always thought had the potential to go wrong horrifically, but it never had done so before. I realised that he had not picked up the tempo as soon as we got to the end of the first bar, and was floundering. 5 bars later he found the tempo, but one beat behind. Fortunately, the pattern of eight 32nd notes that is repeated twice in the same bar gave me something to anchor my memory to. I repeated the pattern three times, instead of twice, thereby playing a 5/4 bar instead of a 4/4, we ended up on the same beat and it was fine after that. That, and a little improvisation of my own during the scherzando waltz towards the end of the second movement, were the two bits that didn't happen in the way I had hoped. Everything else went really well. [Here are links to audio files of the Tchaikovsky and Rachmaninov Concerti: www.peter-donohoe.com/en/music Also there is a link to a video taken from Soviet TV of the last few minutes of the Rachmaninov: http://www.peter-donohoe.com/en/videos] I have a feeling that the jury did not notice any of this.
연주에서 오케스트라는 정말 훌륭하게 반주했는데, 특히 차이코프스키의 이전 연주들과 비교할 때 그렇다. 페도세예프는 매우 흥미진진하며, 거의 항상 접착제 같은 솔로 파트의 내 연주에 충실했다. 차이코프스키는 오케스트라의 기적이었다. 라흐마니노프에서 지휘자는 56번째 마디 이후 5개의 마디들에서 나를 잃어버렸다. - 내가 항상 생각해왔던 곳은 끔찍한 잘못을 범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전에는 그렇게 한 적이 결코 없었다. 나는 우리가 1마디의 끝에 도착하자마자 템포를 잡아내지 못하면서 허둥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5개의 마디가 지난 후에 그는 템포를 발견했으나 한 마디 뒤졌다. 다행스럽게도 동일한 마디에서 두 번 반복되는 8개의 32분음표 패턴이 내게 내 기억을 고정시킬 무언가를 주었다. 나는 그 패턴을 두 번 대신에 세 번 반복했는데, 4/4박자 대신에 5/4박자를 연주했으므로 우리는 같은 비트에서 끝나버렸으며 그 후에는 괜찮았다. 그것과 함께 2악장이 끝나갈 무렵 스케르찬도 왈츠가 나오는 동안의 내 즉흥 연주는 내가 바랐던 방식으로 일어나지 않았던 두 가지 부분이었다. 다른 모든 것은 정말 잘 되었다. [여기 차이코프스키와 라흐마니노프 협주곡에 대한 오디오 파일 링크가 있다. 라흐마니노프의 마지막 몇 분이 나와 있는 소련 TV에서 가져온 비디오 링크도 있다.] 심사위원들이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Imelda Marcos was not there (in fact she wasn't there for anyone else other than Maria Arietta). In her place was Yuri Andropov – head of the Soviet KGB. That was nice…. He looked very smart in a very dark suit, surrounded by bodyguards, and looking very disapproving of the whole event. I did not have the pleasure of meeting him. [18]
이멜다 마르코스는 거기에 없었다. (실제로 마리아 아리에타 이외의 다른 사람들은 없었다). 그녀가 있었던 곳에는 소비에트 KGB의 우두머리인 유리 안드로포프가 있었다. 대단했다…. 매우 어두운 수트를 입은 그는 매우 똑똑해보였고,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였으며, 모든 이벤트를 매우 못마땅해 하는 표정이었다. 내게는 그를 만나는 즐거움이 없었다. [18]
When it was over, I had to allow myself to be locked in the dressing room, along with several others, including the British contingent, and we drank lots of Sovietskaya Champanskaya together. Whilst we waited – which went on for so many hours, I was truly astonished at the shouting and screaming in the Conservatory courtyard below. It was like a dream, and a situation that I knew then I could only experience once in a lifetime. At one point I came to window that looks out onto the Conservatory courtyard, and I could not believe it was really happening; hundreds and hundreds of chanting audience members stretching down the street – so passionate and involved.
콩쿠르가 끝났을 때, 나는 영국인 대표단을 포함하여 몇몇 다른 사람들과 함께 탈의실에 갇혀야 했고, 우리는 소비에츠카야 참판스카야를 많이 마셨다. 우리가 기다리는 동안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 나는 음악원 안뜰에서 외치고 비명을 지르는 것에 정말로 놀랐다. 마치 꿈과도 같았으며, 내가 평생 단 한 번 체험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았다. 한때 나는 음악원 안뜰을 바라보는 창문으로 갔으며,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 수백, 수백 명의 구호를 외치는 청중들이 길을 따라 늘어서있었다. - 매우 열정적이면서 복잡했다.
At 4.00 a.m. they finally announced their decision – that there should be no Gold Medal, but two Silvers – Vladimir Ovchinnikov (USSR) and me. The other prizes were:
오전 4시에 심사위원들이 마침내 결정을 발표했다. - 금메달은 없었지만, 블라디미르 옵치니코프(소련)와 내게 공동 은메달이 주어졌다. 다른 입상자들은 다음과 같다.
Michie Koyama 3rd (Japan) / 3위 미치에 고아먀 (일본)
Dmitry Gaiduk 4th equal (USSR) / 공동 4위 드미트리 가이두크 (소련)
Kalle Randalu 4th equal (USSR) / 공동 4위 칼레 란달루 (소련)
Maria Arrieta 5th (Philippines) / 5위 마리아 아리에타 (필리핀)
Nino Kereselidze 6th equal (USSR) / 공동 6위 니노 케레셀리제 (소련)
Michael Houston 6th equal (New Zealand) / 공동 6위 마이클 휴스턴 (뉴질랜드)
James Barbagallo 7th equal (USA) / 공동 7위 제임스 바바갈로 (미국)
Emma Tahmizyan 7th equal (USSR) / 공동 7위 엠마 타흐미지안 (소련)
I do not know the reason for the refusal to give a Gold Medal, but everyone else seems to think they have the answer, and most of those answers are anti-Soviet. Perhaps one day I will get to know what really happened in that jury meeting. [19] In the meantime, I am speculating that my Liszt Sonata was divisive (I certainly don't think any of the other works I played could be so personal). I also imagine that Ovchinnikov found the pressure of being expected to wipe the floor with any competition from other countries too much and did not play at his best once he got to the second round. He seems like an extremely nice person, and too sensitive to be placed in such an impossible position. From what I heard about his first round, his playing was effortless, but later he began to show signs of strain – I am not surprised. The performance of Liszt 1 I heard in his final was blighted by nervousness. But we may never know the truth. I hope one day to know Ovchinnikov well enough to compare notes. [iv]
금메달 수여를 거부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밖의 모든 사람은 대답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으며, 대부분의 답변은 소비에트에 반대하는 것이다. 아마도 언젠가 심사위원 회의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될 것이다. [19] 그동안 나는 내 리스트 소나타 연주에서 호불호가 갈렸다고 추측하고 있다. (나는 분명히 내가 연주했던 다른 작품들 중 어떤 것도 너무 개성적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또한 옵치니코프가 다른 어떤 국가들에서 어떤 콩쿠르든지 납작하게 누를 것으로 기대된다는 압력을 받아서 2라운드에서 그가 최선을 다해 연주하지 않았다고 상상한다. 그는 아주 좋은 사람처럼 보이며, 그렇게 불가능한 위치에 놓이기에는 너무 민감하다. 1라운드에 대해 내가 들었던 그의 연주는 수월해보였지만, 나중에는 긴장의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 나는 놀랍지 않다. 결선에서 들었던 그의 리스트 협주곡 1번 연주는 불안감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진실을 결코 알지 못할 수도 있다. 나는 언젠가 옵치니코프와 의견을 교환할 만큼 충분히 알았으면 한다. [iv]
At the same as this was going on, the violin competition results were already in – joint Gold Medal went to Sergei Stadler (the one who played immediately before Nigel Kennedy in the first round) and Victoria Mullova. In the cello competition, the winner was the Brazilian Antonio Meneses, and my new friend Georg Faust took the third prize. I have had virtually no contact with the vocal competition. [20]
이것이 계속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이올린 콩쿠르 결과가 이미 나왔다. - 세르게이 스타들러(1라운드에서 나이젤 케네디 직전에 연주)와 빅토리아 물로바가 공동 금메달을 받았다. 첼로 콩쿠르에서는 브라질의 안토니우 메네세스가 우승했으며, 나의 새로운 친구 게오르크 파우스트는 3위에 입상했다. 나는 성악 콩쿠르와는 접촉이 거의 없었다. [20]
[16] In fact, over the course of the next nine years – up to the time of the dissolution of the Soviet Union and the chaos that ensued – I returned approximately four times a year to Russia. Almost each time, it was to play multiple concerts in Moscow and Leningrad, and very occasionally in other parts of the Union e.g. Tbilisi in Georgia and Vilnius in Lithuania. All these visits were adventures in themselves, and the atmosphere of the competition in Moscow was recreated each time.
[16] 사실, 다음 9년 동안 - 소련의 해체와 그에 따른 혼돈의 시대까지 - 나는 1년에 4회 정도 러시아로 되돌아왔다. 거의 언제나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그리고 때로는 독립국가연합의 다른 지역, 예를 들어 조지아의 트빌리시와 리투아니아의 빌뉴스에서 여러 차례 콘서트를 가졌다. 이 모든 방문은 그 자체로 모험이었으며, 모스크바에서는 콩쿠르에서의 분위기가 매번 재현되었다.
The love affair I had with the Moscow public remains even now in modern Russia. It was much the same in Leningrad – now St. Petersburg – notwithstanding that the people there have a more reserved personality than Muscovites, and same has happened in provincial parts of Russia, however far away and different they are from Moscow.
모스크바 대중과 함께 했던 열광은 현대 러시아에서도 여전히 남아있다. 레닌그라드(오늘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도 마찬가지였으며 - 모스크바 사람들보다 더 내성적인 성격임에도 - 러시아의 지방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지만, 멀리 떨어져 있으며 모스크바 출신과는 다르다.
I have developed a particular love of Siberia – a place that I am sure rightly conjured up a vision of hell in western minds during the Soviet time. However, the warmth of the people and the level of cultural understanding are beyond compare.
나는 시베리아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키웠다. 나는 분명히 소련에서 지내는 동안 서구인들의 마음속에서 지옥의 비전을 떠올렸다. 그러나 사람들의 애정과 더불어 문화적 이해의 수준은 비할 데 없다.
I do not fully understand my relationship with the country, and perhaps the Russians don't either. It could be the product of a certain moment in Soviet history whose momentum has continued inexplicably. However, that I do not understand it will never stop me being eternally grateful for it.
나는 나라와 나의 관계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데, 아마 러시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것은 추진력이 불가피하게 계속되는 소련의 역사에서 특정 순간의 산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게 그것에 대한 영원한 고마움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17] Vladimir Fedoseev has since become a massive success, and I have worked with him several times across the years. He has an amazing ability to create visceral excitement, and when we played Tchaikovsky 1 in Italy some years ago it was one of the most exciting concerts I ever did, as indeed was the Shostakovich 2 we did in Brighton when his orchestra was touring the UK. However, he was not yet heard of in the West at the time of the competition, and I was told that he had previously been a major star on the balalaika in Ukraine. So many similar stories abound in Russia that I have never been able to ascertain how he really started. All I do know was that he was terrific every time we have worked together.
[17] 블라디미르 페도세예프는 그 이후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으며 나는 그와 수년에 걸쳐 여러 번 협연했다. 그는 내재적 흥분을 만들어내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가 몇 년 전 이탈리아에서 차이코프스키 협주곡 1번을 협연했을 때는 내가 연주한 가장 흥미진진한 콘서트 중 하나였는데, 실제로 그의 오케스트라가 영국을 순회할 때 우리가 브라이턴에서 협연했던 곡은 쇼스타코비치 피아노 협주곡 2번이었다. 그러나 그는 콩쿠르 당시에 서방에서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던 지휘자였으며, 나는 그가 이전에 우크라이나에서는 발랄라이카라는 민속 악기에서 주요 스타였다고 들었다. 그렇게 러시아에서는 그가 실제로 어떻게 시작했는지 내가 확인할 수 없는 비슷한 이야기가 많이 있다. 내가 아는 전부는 우리가 함께 일할 때마다 그가 매번 대단하다는 것이었다.
[18] Not many months after the competition the General Secretary of the Soviet Union (effectively the President) – Leonid Brezhnev – died and was replaced by Andropov. That the head of such a renowned and frightening organisation as the KGB should be promoted to become the leader of one of the world's two superpowers was, and still is, disconcerting. However, readers above a certain age will recall that Andropov was not in the job for long. For about six weeks during 1984 he was unable to appear publicly because he 'had a bad cold'. It turned out that he had died, and the lie about him having a cold was put out to give them time to find a replacement. Eventually they came up with the brilliant idea of having a very frail man in his 70s as General Secretary – Konstantin Chernenko – who died within a year of taking office. This made way for Mikhail Gorbachev, who was the recently appointed General Secretary at the time of the 1986 Competition – the one Barry Douglas won.
[18] 콩쿠르 이후 몇 달 지나지 않아 소련 공산당 서기장(사실상 대통령)인 레오니드 브레즈네프가 사망하고 안드로포프로 대체되었다. KGB 같은 유명하고 무서운 조직의 대표가 세계의 두 강대국 중 하나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 승진되어야 한다는 것이 여전히 당황스럽다. 그러나 특정 연령 이상의 독자들은 안드로포프가 오랫동안 그 일을 하지 않았음을 기억해낼 것이다. 1984년에 6주일 정도 그는 ‘독감에 걸려서’ 공개적으로 나서지 못했다. 그가 죽었다는 것이 밝혀졌고, 감기에 걸린 것에 대한 거짓말이 그들에게 대체물을 찾을 시간을 주기 위해 내놓아졌다. 결국 그들은 70대에 공산당 서기장으로 매우 약한 사람을 갖는 것에 대한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 콘스탄틴 체르넨코 - 그는 취임한지 1년 안에 사망했다. 이것은 미하일 고르바초프에게 길을 열어줬는데, 그는 1986년 콩쿠르 당시 최근에 공산당 서기장으로 임명되었다. - 이때 배리 더글러스가 단독 우승했다.
Years later in 2003, I was told about a book on the history of the KGB https://books.google.ru/books?id=zeYEhcHWjEUC&pg=PA181&lpg=PA181&dq=Kgb+files+tchaikovsky+com#v=onepage&q&f=false I only got to read it about one year ago. In it the author Yevgenia Albats includes a ludicrous episode concerning the Tchaikovsky competition of 1982, as demonstration of how idiotic Soviet paranoia could be: In an otherwise very serious book, the author shows in an almost comic episode that certain KGB agents in the audience (Andropov included, I suspect, and apparently led by one Vitaly Fyodorchuk) believed that I was in collusion with anti-Soviet elements in the Moscow public, which is why the people of Moscow were so supportive of me. I have to say that, however sympathetic one is towards Communism, Soviet policy, and even the KGB itself, this has to be one of the most ludicrous things imaginable. For one thing, I was never anti-Soviet. For another, the KGB surely has better things to do with its time. And finally, all I was doing there was playing the piano in the hope of a better professional future.
2003년이 지난 후, 나는 KGB 역사에 대한 책이 있다고 들었다. 나는 1년 전쯤 그것을 읽어야 했다. 이 책의 저자인 예프게니아 알바츠는 1982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대한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를 포함하는데, 이는 어떻게 멍청한 소비에트 편집증이 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 그렇지 않으면 매우 진지한 책에서 저자는 거의 코믹한 에피소드에서 청중 속에 있는 특정 KGB 요원들(안드로포프가 포함되고, 내가 의심하며, 비탈리 표도르추크가 분명히 이끌었음)이 다음과 같은 것을 믿는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모스크바 사람들이 나를 매우 지지하는 이유는 내가 모스크바 청중 속에서 소비에트에 반대하는 요인들과 담합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공산주의, 소비에트 정책, 심지어 KGB 그 자체에 대해서도 동정심이 있다고 말해야 하지만, 이것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우스꽝스러운 것들 중의 하나여야만 한다. 우선 한 가지 이유는, 내가 소비에트 반대자가 아니었다. 또 하나는, KGB는 분명히 그때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전문적인 미래를 꿈꾸며 거기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던 게 전부였다.
[19] I didn't get the full truth until 2010 when I finally met with one of the original jury and that person was open and honest about it. However, what actually happened was that the furore caused by the jury decision created far more publicity than a Gold Medal would have. The lucky result produced a situation I could never have imagined in my wildest dreams. So – thank you Moscow!!!
[19] 마침내 원래의 심사위원 중 한 명과 만났던 2010년까지 나는 완전한 진리를 얻지 못했으며 그 사람은 개방적이면서 정직했다. 그러나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심사위원 결정으로 인한 소동이 금메달을 갖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홍보를 창출했다. 운 좋은 결과는 꿈에서도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상황을 만들어냈다. 따라서 - 고마워 모스크바!!!
[iv] That hope became realised far more than I expected. The Western world is now very used to interacting with Russians in a way that was impossible and unthinkable before 1991.
[iv] 그 희망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실현되었다. 서방 세계는 1991년 이전에는 불가능하면서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러시아인들과 상호작용하는 데 현재 매우 익숙하다.
In recent years, I have got to know Vladimir Ovchinnikov very well. Away from the tensions of the competition, his playing is even more technically effortless than when we were competing, which reflects the incomparable Soviet training of his youth, as well as his natural talent.
최근에 나는 블라디미르 옵치니코프에 대해 정말 잘 알게 되었다. 콩쿠르의 긴장에서 벗어난 그의 연주는 우리가 경쟁했을 때보다 기술적으로 수월해보였는데, 이는 그의 타고난 재능뿐만 아니라 소련의 비교할 수 없는 그의 어린 시절 훈련을 반영한다.
This interaction is of course as a result of the political change in his country – Modern Russia does not try to prevent contact in the way the Soviet Union did. However, before the political change that took place in his homeland, he was the first prize-winner of the Leeds Competition in 1987, when I was engaged as a commentator for BBC TV, and we got to talk (with a KGB agent in attendance of course). Later, after the Soviet Union was dissolved, and Russians were free to talk with whomever they liked and to travel wherever they wished, he became a member of the full-time teaching staff at the R.N.C.M. for some years. After he had returned to Moscow, he attended several of my concerts in Moscow, and we got to talk briefly then. Finally, he was on the jury of the Tchaikovsky Competition with me in 2011, and we spent quite a long time, together with Mrs. Ovchinnikov (Elvira Shulgina), talking about the old days - like a couple of war-veterans in an old peoples' home. The content of the conversation was very much about the life of a Soviet artist working through Goskonsert – the Soviet State concert agency.
이 상호작용은 당연히 그의 조국의 정치적 변화의 결과이다. - 현대 러시아는 소련의 방식대로 접촉을 막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고국에서 정치적 변화가 일어나기 전, 내가 BBC TV 해설자로 참여했던 1987 리즈 콩쿠르에서 우승했으며, 우리는 (물론 참석한 KGB 요원과 함께)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나중에 소련이 해체된 후, 러시아인들은 그들이 좋아하는 사람들과 자유롭게 이야기하며 자기네가 원하는 곳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는 몇 년 동안 맨체스터의 영국 북부 왕립 음대(Royal Northern College of Music) 전임 교수진이 되었다. 그는 모스크바로 돌아온 후 모스크바의 여러 콘서트에서 연주했으며, 우리는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침내 그는 2011년에 나와 함께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심사위원을 지냈으며, 우리는 옵치니코프 여사(엘비라 슐기나)와 함께 옛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 마치 늙은 사람들의 집에 있는 몇 명의 참전 용사 같았다. 대화의 내용은 주로 소비에트 국영 콘서트 사업 에이전시인 고스콘체르트를 통해 일하는 소련 예술가의 인생에 대한 것이었다.
He has a very pleasant character, which manifests itself particularly in his work as an educator; he is now in charge of the Moscow Central Music School for young musicians. I have seen him interact with young children, and he is great at it.
그는 매우 유쾌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특히 교육자로서의 일에서 그 자체로 나타난다. 그는 현재 청소년 음악가들을 위한 모스크바 중앙음악학교를 책임지고 있다. 나는 그가 어린 아이들과 상호작용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는 그것에 열중하고 있다.
[20] Later, in the prize-winners' concerts I did get to hear the wonderful bass from Georgia, Paata Burchuladze. Subsequently, Paata and I did a concert together in the Lichfield Festival. He was able to perform in the West – after Karajan had spotted him and invited him to work with him in Verdi opera. I also played a recital in Moscow with him, followed immediately by one in Tbilisi, Georgia, where he was very much a local hero. (I also did a solo recital on that occasion, during which a cat came onto the stage in the middle of Chopin's 4th Ballade and started flirting very suggestively with my left leg. The audience continued listening as if it was normal….) Burchuladze had one of the most characterful voices of anyone I have ever worked with. The power of his presence and the sheer size of his voice were amazing. I will never forget his performances of Mussorgsky's 'Song of the Flea'.
[20] 나중에 입상자 갈라 콘서트에서 나는 조지아 출신의 멋진 베이스인 파아타 부르출라제가 노래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이후 파아타와 나는 리치필드 페스티벌에서 함께 콘서트를 가졌다. 그는 서방에서 공연할 수 있었다. - 카라얀이 그를 발견하여 베르디 오페라에서 그와 함께 일할 것을 요청한 후였다. 나는 모스크바에서도 그와 함께 공연을 가졌으며, 이어서 곧 조지아 트빌리시에서도 한 번 공연을 가졌는데, 트빌리시에서 그는 정말 지역 영웅이었다. (나도 그때 독주회를 가졌는데, 쇼팽 발라드 4번을 연주하는 도중에 고양이가 무대로 올라와서 내 왼쪽 다리를 장난삼아 매우 도발하듯이 추파를 던지면서 시작했다. 청중은 그게 정상인 것처럼 계속 듣고 있었다는….) 부르출라제는 내가 함께 일했던 사람 중 가장 개성이 강한 목소리를 지닌 사람 중 하나였다. 그의 존재의 힘과 엄청난 크기의 목소리는 놀라웠다. 그와 함께 했던 무소르그스키의 가곡 <벼룩의 노래> 공연을 잊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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