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도노호의 제7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일기 03 - 1982년 6월 10일
Nina arrived late in her taxi to take me to the practise session at 6.30.am. We arrived at 6.50. There was a military policeman at the door to the conservatory, which was locked. Nina explained to him in Russian why I was there, and that we were expecting the door to be open already. He was the essence and epitome of uncooperation, with a blank emotionless face, and wore full Soviet police uniform, complete with handgun. Eventually, she managed to get through to him that I am English, and what I was there for.
니나는 나를 오전 6시 30분 연습 세션에 그녀의 택시로 데려다줬는데 늦게 도착했다. 우리는 6시 50분에 도착했다. 음악원 입구에는 헌병이 있었는데 문이 잠겨있었다. 니나는 그에게 러시아어로 내가 왜 거기 있었는지 그리고 우리는 문이 열리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감정이 비어있는 얼굴로 비협조의 본질이자 전형이었으며, 권총으로 완성된 완전한 소련 경찰복을 입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그에게 내가 영국인이라는 것과 내가 있어야 하는 것을 알게 하여 간신히 통과했다.
He said to me "Engliskie?" I said, "Da". Then he said "Paul McCartney!" and put both thumbs in the air and grinned. I realised that I was onto a winner here and mentioned Manchester United. That really turned him on, and eventually he decided to go somewhere to get the key, and let me into the building – it was now 7.10, and I had 20 minutes to practise approximately 4 hours' worth of music. I have no idea where all the others who were supposed to practise at 6.30 were. I never saw them and I didn't ask – there is no point, and there is a limit to the number of stroppy shrugs one can take.
그는 내게 “잉글리스키에(영국인이세요)?”라고 물었고, 나는 “다(그렇다)”라고 말했다. 이후 그는 “폴 맥카트니!”를 말했으며, 두 엄지손가락을 공중에 내리고 웃어넘겼다. 나는 여기서 내가 승자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축구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언급했다. 그것은 정말로 그에게 관심을 갖게 했고, 결국 그는 열쇠를 얻기 위해 어딘가로 가기로 결정했으며, 나를 건물로 들여보내려고 했다. - 이제 7시 10분이었고, 약 4시간 분량의 음악을 연습하는 데에 20분이 있었다. 나는 6시 30분에 연습하기로 했던 다른 모든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지 전혀 모른다. 나는 그들을 결코 보지 않았으며 묻지 않았다. - 무의미하며, 취할 수 있는 까다로운 쉬러그(어깨를 으쓱거리는 행위) 횟수에는 제한이 있다.
Opening Ceremony
Later today was the piano competition opening ceremony. We all assembled around the statue of Tchaikovsky at the front of the Conservatory. There were lots of TV cameras and journalists.
오늘 늦게 피아노 콩쿠르 개막식이 있었다. 우리 모두 음악원 앞에 있는 차이코프스키 동상 주위에 모였다. 많은 TV 카메라와 언론인들이 있었다.
Firstly, a welcome from the chairman of the jury and Minister of Culture for Georgia, Otar Taktakishvili – he is also the composer of one of the token Soviet works for the second round – I have chosen the other one; I wonder if it will work against me.
먼저 심사위원장이자 조지아 문화부 장관인 오타르 탁타키쉬빌리의 환영 인사가 있었다. - 그는 2라운드에서 연주해야 하는 소비에트 지정 작곡가들 중 한 명이기도 하다. - 나는 다른 것을 택했는데, 그것이 나한테 불리하게 될지 궁금하다.
Secondly, a speech of welcome to the other pianists by one of the Soviet competitors, Vladimir Ovchinnikov, to the greatest piano competition in the world. One of the American competitors turned to me after the speech and said, "Meet the winner!"
다음으로 소련 참가자들 중 하나인 블라디미르 옵치니코프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피아노 콩쿠르에 온 것을 환영하는 말을 한다. 미국 참가자들 중 한 명이 말을 마치고 나를 향해 말한다. “우승자를 만납시다!”
After that the TV journalists approached a few people randomly, and I got chosen. "How do you feel to be in our great International Tchaikovsky Competition?" I tried to choose my words as politically carefully as I could. You get the feeling that everything is about getting your lines right.
그 후 TV 저널리스트는 무작위로 소수의 사람들에게 다가갔고, 내가 선택받았다. “우리의 위대한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있는 소감이 어떠세요?” 나는 가능한 한 정치적으로 조심스럽게 단어를 선택하려고 했다. 모든 것이 올바르게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Draw
Later we had the draw for the order in which we will play. I drew no. 21 (out of 104). The first round is two weeks long, so No.21 is pretty anonymous.
나중에 우리는 연주 순서를 추첨했다. 나는 (104명 중에서) 21번째가 되었다. 1라운드는 2주일이 걸리므로 21번은 어느 정도 불확실하다.
A New York girl called Lydia Arias was in the last competition in 1978 and drew number 1. She is here again, and again she has drawn number 1. How unlucky can you get? So she has to play tomorrow morning to start the whole competition off. I would hate that. I will play my first round on 13 June.
리디아 아리아스라는 뉴욕 소녀는 지난 1978년 대회에 있었는데 1번을 뽑았다. 그녀는 여기에 다시 왔는데, 또 1번을 뽑았다. 얼마나 운이 없는 거지? 그래서 그녀는 내일 아침에 콩쿠르에서 가장 먼저 연주해야 한다. 나라면 그게 싫었을 거다. 나는 1라운드에서 6월 13일에 연주한다.
The Sullivans
After returning to the hotel, the phone in the room rang very frequently – usually wrong numbers. Later I answered one call to a very English voice, which surprises me and I must have come across as very suspicious. It was the cultural attaché from the British Embassy, Michael Sullivan, who is a very keen pianist and music lover. He welcomed me to Moscow, and invited me to meet with him and his wife Jenny this evening at their apartment in Kutozovsky Prospect – the road where most diplomats live in secure blocks with guards on the entrance (I think the closest word to describe these collections of apartment blocks would be "compound") – immediately opposite the incredible Hotel Ukraina – one of Stalin's Seven Sisters: http://en.wikipedia.org/wiki/Seven_Sisters_%28Moscow%29
호텔로 돌아온 후 방의 전화가 정말 자주 울렸다. - 보통 잘못된 번호였다. 나중에 나는 정말 영국식인 음성에 대한 한 번의 전화에 대답했는데, 나를 놀라게 했으며 나는 매우 의심스러워했을 것이다. 매우 열렬한 피아니스트이자 음악 애호가인 영국 대사관의 문화 담당관인 마이클 설리번이었다. 그는 나를 모스크바에 맞이했으며, 오늘 저녁 쿠토조프스키 프로스펙트(대부분의 외교관들이 입구에 경비원들과 함께 안전한 블록에 사는 도로)에 있는 그들의 아파트에서 그와 그의 아내 제니와의 만남에 나를 초대했다. (나는 아파트 블록의 이러한 모임을 설명하는 가장 가까운 단어가 “화합물”이라고 생각한다.) - 믿을 수 없는 호텔 우크라이나 바로 맞은편에는 스탈린의 “일곱 자매”(러시아인들이 “스탈린 마천루”라고 부르는 7개의 비슷하게 생긴 건물) 중 하나가 있었다.
It turns out that Michael went to Oxford at the same time as Bryce Morrison [4], who will arrive at the competition later. Michael and Jenny offered me the piano in their apartment for practising should the 6.30 a.m. routine prove impossible. It is an oasis of non-Sovietness. However, every time we have a conversation about the competition or anything remotely sensitive, Michael puts the radio on full belt in order to prevent being listened to and recorded. I don't know how realistic this is, but it certainly gives you a complex.
마이클이 브라이스 모리슨과 동시에 옥스퍼드에 갔는데[4], 브라이스는 콩쿠르에 나중에 도착할 것이다. 마이클과 제니는 아침 6시 30분에 연습하는 일과가 불가능할 때 연습할 수 있도록 내게 그들의 아파트에 있는 피아노를 제공했다. 소련이 아닌 것의 오아시스이다. 그러나 콩쿠르에 대한 대화나 원격으로 민감한 내용이 있을 때마다 마이클은 들리거나 녹음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라디오 소리를 최대치로 틀어놓는다. 이게 얼마나 현실적인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고정관념을 심어준다.
[4] Bryce was a notoriously difficult-to-please London based critic who specialised in piano and pianists, and wrote for many organs including Music and Musicians (sadly now not available). He has an extraordinary command of English (I believe his Oxford degree was in English), and could phrase his reviews very powerfully in whichever direction he wanted – positive or negative. He had reviewed my London debut recital in the Purcell Room in 1979 with vitriol, for which I have since given him large amounts of grief. However, later and up to the present day, I realised that he was and is very passionate about his chosen subject, and has been extremely supportive of my work on many occasions. He became a great friend during the competition in Moscow, having been a member of the jury of the British Liszt Competition in 1976, when the winner was Terence Judd (whom Bryce was extremely supportive of) and the second prize went to Martin Roscoe; I came third. He has since been a great asset on many international competition juries, as well as teaching and giving master-classes.
[4] 브라이스는 피아노와 피아니스트를 전문으로 하는 런던에 기반을 둔 악명 높게 까다로운 비평가로 (슬프게도 현재 이용 가능하지 않은) <음악과 음악가들>을 포함하여 여러 기관에 기고했다. 그는 영어 구사에 뛰어나며(나는 그의 옥스퍼드 학위가 영어라고 믿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리뷰를 매우 강력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그는 1979년 퍼셀 룸에서 가진 나의 런던 데뷔 리사이틀을 독설로 평가했으며, 나는 그 이후로 많은 슬픔을 겪었다. 그러나 나중에 그리고 현재까지 나는 그가 선택한 주제에 대해 매우 열정적이었으며, 여러 번 내 일을 극도로 지지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콩쿠르 동안 좋은 친구가 되었으며, 1976년 영국에서 열린 리스트 콩쿠르에서는 심사위원 중의 한 명이었는데 당시에 우승자는 (브라이스가 매우 지지했던) 테렌스 주드였고 2위는 마틴 로스코, 3위는 나였다. 그는 이후 많은 국제 콩쿠르 심사위원단의 훌륭한 자산이었으며, (교육자로서 학생들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마스터클래스도 지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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