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5DOshuIPqHs
https://www.youtube.com/watch?v=P2xhiiqp71A
Scarlatti Sonata in c, Kk. 11 / 스카를라티 소나타 K. 11
Scarlatti Sonata in C, Kk. 159 / 스카를라티 소나타 K. 159
Chopin Mazurka in g#, Op. 33 No. 1 / 쇼팽 마주르카 작품 33-1
Chopin Mazurka in b, Op. 33 No. 4 / 쇼팽 마주르카 작품 33-4
Debussy Images, Book I: II. Hommage à Rameau / 영상 1집 2번 <라모를 찬양하며>
... Filmed in Paris, broadcast (5 January 1965)
Debussy Préludes, Livre I / 드뷔시 전주곡 1권
I. Danseuses de Delphes / 델피의 무희들
II. Voiles / 돛
III. Le vent dans la plaine / 들을 지나는 바람
IV. Les sons et les parfumes tournent dans l'air du soir / 소리와 향기가 저녁 대기 속에 감돈다
V. Les collines d'Anacapri / 아나카프리의 언덕
VI. Des pas sur la neige / 눈 위의 발자국
VII. Ce qu'a vu le vent d'Ouest / 서풍이 본 것
VIII. La fille aux cheveux de lin / 아마빛 머리의 처녀
IX. La sérénade interrompue / 끊어진 세레나데
X. La cathédrale engloutie / 가라앉은 성당
XI. La danse de Puck / 퓌크의 춤
XII. Minstrels / 음유시인
... Filmed in Paris, broadcast (22 & 29 October 1978)
Arturo Benedetti Michelangeli had an aura and mystique on stage that perfectly complemented his effortless pianistic perfection. His personal life was shrouded in mystery often leading to wild rumor and speculation. Stories about his need for perfectly tuned and regulated instruments abound, and one never knew if he would play a scheduled recital or cancel at the last moment being dissatisfied with the instrument provided. All of this, however, was secondary to what he accomplished at the instrument in his recitals and recordings.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는 무대 위에서 자신의 손쉬운, 피아노 연주에 능한 완성도를 완벽하게 보완하는 아우라와 신비로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개인적인 삶은 종종 거친 소문과 추측으로 이어지는 신비에 싸여 있었다. 완벽하게 조율되고 조절된 악기에 대한 그의 필요성에 관한 이야기들이 풍부하며, 그가 예정된 리사이틀을 연주할지 아니면 제공된 악기에 만족하지 못한 마지막 순간에 취소할지 결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가 리사이틀과 녹음에서 악기로 성취한 것에 부차적이었다.
Michelangeli was born on January 5, 1920 in Brescia, Italy. He began studying the violin at age three and the organ the following year. “To begin with, I did not like the piano at all. I found it far too percussive. And so, I studied the organ and the violin.” [New York Times] At the age of ten, health problems forced him to abandon the violin so he began piano studies in earnest at the Milan Conservatory. “I discovered that the sounds made by the organ and the violin could be translated into pianistic terms. If you speak of my tone then you must think not of the piano but of a combination of the violin and the organ.” He graduated from the Milan Conservatory at age 13 and from then on was self-taught. He first came Ysaÿe competition in Brussels (Emil Gilels was awarded the first prize). Though he did not win the top prize he made a deep impression on the jury. The following year he triumphed at the Geneva International Piano Competition, receiving the first prize from a jury that included Alfred Cortot. Thus began a promising international career, but the outbreak of World War II brought a quick halt to his musical activities.
미켈란젤리는 1920년 1월 5일 이탈리아 브레시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세 살 때 바이올린을 배우고 이듬해에는 오르간을 배우기 시작했다. “원래 피아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저는 그게 너무 충격적이라는 걸 알았죠. 그래서 오르간과 바이올린을 공부했어요.” [뉴욕 타임스] 그는 열 살 때 건강 문제로 바이올린을 포기하고 밀라노 음악원에서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저는 오르간과 바이올린이 내는 소리가 피아니스트의 용어로 번역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는데요. 당신이 제 음색에 대해 말한다면 피아노가 아니라 바이올린과 오르간의 조합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는 13세에 밀라노 음악원을 졸업하고 독학으로 공부했다. 그는 먼저 1938년 브뤼셀에서 열린 이자이 콩쿠르(당시 에밀 길렐스가 우승)에 참가했다. 상위 입상에는 실패(당시 7위)했지만, 심사위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듬해에는 제네바 국제피아노콩쿠르에서 우승했는데, 알프레드 코르토를 포함한 심사위원들로부터 1등상을 받았다. 이리하여 유망한 국제적 경력이 시작되었지만,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그의 음악 활동은 급속도로 중단되었다.
During the war, Michelangeli served as a pilot in the Italian air force and this led to a life-long love of flying. “I prefer to fly even now; as a pilot I get reduced fares.” [Saturday Review] In addition to flying, the pianist was also an accomplished race car driver. He won several races and even completed the Mille Miglia twice. Such stories about his extra-musical accomplishments only added to the Michelangeli legend.
전쟁 중에 미켈란젤리는 이탈리아 공군의 조종사로 복무했으며 이로 인해 평생 비행에 대한 사랑이 시작되었다. “저는 지금도 비행기 타는 걸 선호하는데, 조종사로서 할인된 요금을 받습니다.” [새터데이 리뷰] 비행기를 타는 것 외에도 피아니스트는 뛰어난 경주용 자동차 운전사이기도 했다. 그는 여러 경주에서 우승했으며 심지어 밀레밀리아(1927~1957년 24회에 걸쳐 열렸던, 클래식 자동차만 참가할 수 있는 대회)를 두 번 완주했다. 그의 음악 외적 성취에 대한 그러한 이야기들은 미켈란젤리의 전설에 추가되었다.
Michelangeli guarded his privacy, rarely gave interviews, and seemed to care little about his public or critics. When interviewed by the New York Times he said “I do not play for others – only for myself... It makes no difference to me whether there’s an audience or not.” His attitude towards teaching, however, was completely different. He was quite devoted to teaching for many years. He only accepted the most gifted students and never charged a fee. Martha Argerich, Maurizio Pollini, and Adam Harasiewicz all came to him early in their careers for private study. Lessons could last anywhere from twenty minutes to tree hours during which he often stressed the importance of tone quality. He hated pianists who played too fast and too loud (“electric typewriters”) and he did not like to demonstrate at the keyboard during lessons.
미켈란젤리는 자신의 사생활을 보호했고,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았으며, 대중이나 비평가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 오직 저 자신을 위해... 청중이 있든 말든 상관없어요.” 그러나 가르치는 일에 대한 그의 태도는 완전히 달랐다. 그는 여러 해 동안 가르치는 일에 상당히 헌신했다. 그는 가장 재능 있는 학생들만 받아들였으며 비용을 청구하지 않았다. 마르타 아르헤리치, 마우리치오 폴리니, 아담 하라셰비치 모두 개인적인 공부를 위해 경력 초기에 그에게 왔다. 레슨은 20분에서 3시간 동안 계속될 수 있었으며 그동안 그는 종종 음색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너무 빠르고 큰 소리로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들(“전자 타자기”)을 싫어했으며 레슨을 하는 동안 건반에서 시범 보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Michelangeli has sometimes been criticized for his small repertoire. Looking through Michelangeli’s recital programmes one tends to see the same works appearing over and over again during the course of several decades. It is true that in the earlier part of his career he played some pieces that were later dropped, but even then his repertoire was purposefully quite small. The works he chose to play were mastered completely and to such a degree that even the most difficult passages sounded effortless. He played with a degree of accuracy that would leave even today’s note perfect pianists in envy. Contrary to popular belief, Michelangeli’s interpretations could change from performance to performance depending on his mood. In his later years his playing became more and more poised and refined though some might say at the expense of temperament.
미켈란젤리는 때때로 레퍼토리가 적다는 비판을 받았다. 미켈란젤리의 리사이틀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수십 년 동안 같은 작품들이 계속해서 등장하는 경향이 있다. 경력 초기에는 나중에 삭제된 일부 곡들을 연주했지만, 그의 레퍼토리는 의도적으로 매우 적었다. 그가 연주하기로 한 작품들은 가장 어려운 패시지들도 어렵지 않게 들릴 정도로 완벽하게 숙달되었다. 그는 오늘날 음정이 완벽한 피아니스트들도 부러워할 정도의 정확도로 연주했다. 대중의 믿음과 달리 미켈란젤리의 해석은 기분에 따라 공연마다 바뀔 수 있었다. 말년에 그의 연주는 기질을 희생시켜가면서 말할 수도 있지만, 점점 더 침착하고 세련되어졌다.
Scarlatti may not be the first composer to come to mind when one thinks of Michelangeli, but the Baroque Italian composer played an important role in Michelangeli’s repertoire. Scarlatti is found among the early recordings made by the Italian pianist, and throughout his career he frequently presented groups of Scarlatti Sonatas in recital. Michelangeli’s way with Scarlatti is a personal one that stands apart from romantic or historical traditions. It is immediately recognizable from its refined sound, clarity of touch, perfect articulation, technical precision, and melodic projection.
스카를라티는 미켈란젤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곡가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바로크 이탈리아 작곡가는 미켈란젤리의 레퍼토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스카를라티는 이탈리아 피아니스트의 초기 녹음에서 발견되며, 경력 전반에 걸쳐 그는 리사이틀에서 스카를라티 소나타 몇 곡을 자주 선보였다. 스카를라티에 대한 미켈란젤리의 방식은 낭만적이거나 역사적인 전통과 구별되는 개인적인 것이다. 세련된 소리, 맑은 터치, 완벽한 아티큘레이션, 기술적 정확성, 선율에 대한 계획에서 즉시 알아볼 수 있다.
Michelangeli’s Chopin Mazurkas are unlike any other pianist’s, and are among the most controversial of his interpretations. He treats them not so much as Polish dances but as crystalline miniatures instead. They are miracles of shading and tonal contrast. One hears a myriad of carefully thought out and perfectly executed details that draw the listener into Michelangeli’s universe. He seems uninterested in Mazurka style and its stylistic placement of rhythmic accents, but for those captivated by the playing it matters little that these works no longer sound like Mazurkas.
미켈란젤리의 쇼팽 마주르카는 다른 어떤 피아니스트와도 다르며, 그의 해석에서 가장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는 이 곡들을 폴란드 춤이 아니라 수정 같은 소품으로 다룬다. 미묘한 차이와 음색 대비의 기적이다. 청취자를 미켈란젤리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무한히 신중하고 완벽하게 연주된 디테일을 듣게 된다. 그는 마주르카 스타일과 그 리듬의 악센트의 양식적인 배치에 관심이 없는 것 같지만, 연주에 매료된 사람들에게는 이 작품이 더 이상 마주르카처럼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Many believe that Michelangeli’s performances of Debussy rank among his finest accomplishments. The Italian pianist’s perfect mastery of the keyboard, hammerless sound, and rapt attention to small detail are an ideal match for this music. His ability to separate multiple layers of sound, keeping each distinct, was an area in which Michelangeli was perhaps never equaled. His ability to suddenly change not just dynamics but also touch and articulation was remarkable. A passage could switch from loud and articulate to soft and cushioned within a split second. Few could create such atmosphere and imagery, and the mysterious sounds and effects he created often left listerners wondering in amazement about what they heard.
많은 이들은 미켈란젤리의 드뷔시 연주가 그의 가장 뛰어난 성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탈리아 피아니스트의 완벽한 건반 장악, 해머 없는 사운드, 작은 디테일에 대해 완전히 몰입한 집중이 이 음악에 이상적인 조화를 이룬다. 소리의 여러 층을 분리하고 각각을 구별하는 미켈란젤리의 능력은 아마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영역일 것이다. 다이내믹뿐만 아니라 터치와 아티큘레이션까지 갑자기 바꾸는 그의 능력은 굉장했다. 패시지가 찰나의 순간에 시끄럽고 명료한 것에서 부드럽고 완충적인 것으로 전환될 수 있었다. 그러한 분위기와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그가 만들어낸 신비로운 소리와 효과는 청취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무엇을 들었는지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했다.
Arturo Benedetti Michelangeli remains as much a legend today as he did during his lifetime. In his playing he stressed the importance of tonal quality and tried to eliminate the percussiveness of piano sound. His stage presence, attitude towards the public, and personal eccentricities contributed to his renowned reputation, but ultimately it was his piano playing and artistic integrity that set him apart. “Before an artist can communicate anything, he must first face himself. He must know who he is. Only then can he dare to make music!” [New York Times] He died on June 12, 1995 in Lugano, Switzerland.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는 살아있는 동안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여전히 전설로 남아 있다. 연주에서 그는 음색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피아노 사운드의 타악기 같은 성질을 제거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무대 존재감, 대중에 대한 태도, 개인적인 기벽이 그의 명성에 기여했지만, 궁극적으로 그를 차별화한 것은 피아노 연주와 예술적 성실함이었다. “예술가가 무엇이든 소통하려면 먼저 자신과 마주해야 합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감히 음악을 할 수 있습니다!” [뉴욕 타임스] 그는 1995년 6월 12일 스위스 루가노에서 사망했다.
Farhan Malik © July 2007
2007년 7월 파르한 말리크 글
미켈란젤리가 괴짜인 건 알고 있었지만, 내지에서 이런저런 일화를 소개해서 다시 한번 복습해봤다. 영어로만 번역할 수밖에 없었는데, 다른 언어의 내지도 있는 것처럼 살짝 의역하기도 했다. 내지에서 3명의 제자를 언급했는데 하라셰비치는 1955, 폴리니는 1960, 아르헤리치는 1965 쇼팽 콩쿠르 우승자이다. 아르헤리치는 실질적으로 미켈란젤리에게 별로 배우지 않았다고 했다. 미켈란젤리에게서 요리를, 굴다에게서 담배를 배웠다는 얘기가 있다.
https://rutracker.org/forum/viewtopic.php?t=296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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