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ZXLn0f438io&list=OLAK5uy_lrVc-IvCjrgEim6IZU1KHYt9saj_n3otc
떠오르는 샛별, 후지타 마오가 연주하는 쇼팽
일본의 피아니스트 후지타 마오는 2019년 제16회 차이코프스키 국제음악콩쿠르 피아노 부분 2위 입상으로 유명하다.
그는 온다 리쿠의 소설을 영화화한 <꿀벌과 천둥>에서 천재 피아니스트 가자마 진의 피아노 대역을 맡기도 했으며, 최근 도쿄에서 열린 차이코프스키 페스티벌에서는 게르기예프로부터 발탁되어 호평을 받는 등 ‘떠오르는 신성’에 어울릴 법한 맹활약을 펼치고 있다.
그가 낙소스 레이블을 통해 선보인 쇼팽의 즉흥곡과 스케르초는 다소 의외의 선택이긴 해도 이딜 비레트의 연주만큼이나 맑고 아름다운 음색을 가지고 있는 자신의 색채를 한껏 고양하고도 남을 만큼 매력적이다.
즉흥곡에서는 여리고 수줍은 터치로 내면의 순수함을, 연주회용 알레그로에서는 리스트를 연상시키는 압도적인 스케일을 드러낸다. 감상할수록 이끌리는 음반, 추천한다.
Track
01 Impromptu No. 1 in Ab, Op. 29
02 Impromptu No. 2 in F#, Op. 36
03 Impromptu No. 3 in Gb, Op. 51
04 Fantaisie-Impromptu in c#, Op. 66
05 Allegro de concert in A, Op. 46
06 Scherzo No. 1 in b, Op. 20
07 Scherzo No. 2 in b flat, Op. 31
08 Scherzo No. 3 in c#, Op. 39
09 Scherzo No. 4 in E, Op. 54
Fryderyk Chopin was born in 1810 at Żelazowa Wola, near Warsaw. His father, Nicolas Chopin, was French by birth but had moved to Poland to work as an accounting clerk, later serving as tutor to the Łączyński family and thereafter to the family of Count Skarbek, one of whose poorer relatives he married. His subsequent career led him to the Warsaw Lyceum as a respected teacher of French, and it was there that his only son, Fryderyk, godson of Count Skarbek, whose Christian name he took, passed his childhood.
프리데릭 쇼팽은 1810년 바르샤바 근교의 젤라조바 볼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니콜라스 쇼팽은 태어날 때부터 프랑스인이었지만, 담배공장 경리로 일하기 위해 폴란드로 이주했으며, 나중에는 와친스키 가문 그리고 나중에는 스카르베크 백작 가문의 가정교사로 일했는데, 니콜라스는 스카르베크 가문의 가난한 친척 중 한 명과 결혼한다. 이후 바르샤바 대학교에서 존경받는 프랑스어 교사로 경력을 쌓았으며, 외아들 프리데리크는 스카르베크 백작의 대자(代子 : 기독교에서 대부나 대모가 세례식 때 입회하여 종교적 가르침을 주기로 약속하는 남자아이)의 세례명을 따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Chopin showed an early talent for music. He learned the piano from his mother and later with the eccentric Adalbert Żywny, a violinist of Bohemian origin, and as fiercely Polish as Chopin’s father. His later training in music was with Józef Elsner, director of the Warsaw Conservatory, at first as a private pupil and then as a student of that institution.
쇼팽은 일찍이 음악에 대한 재능을 보였다. 그는 어머니에게서 피아노를 배웠으며 나중에는 쇼팽의 아버지만큼이나 격렬하게 폴란드적인 보헤미아 출신의 괴짜 바이올리니스트 아달베르트 지브니에게 배웠다. 이후 그의 음악 교육은 바르샤바 음악원장인 유제프 엘스네르와 함께 처음에는 개인 레슨을 받는 학생으로, 그다음에는 해당 학교의 학생으로서 받았다.
In the 1820s Chopin had already begun to win for himself a considerable local reputation, but Warsaw offered relatively limited opportunities. In 1830 he set out for Vienna, a city where he had aroused interest on a visit in the previous year and where he now hoped to make a more lasting impression. The time, however, was ill-suited to his purpose. Vienna was not short of pianists, and Thalberg, in particular, had out-played the rest of the field. During the months he spent there Chopin attracted little attention, and resolved to move to Paris.
1820년대에 쇼팽은 이미 지역에서 상당한 명성을 얻기 시작했지만, 바르샤바에서는 상대적으로 기회가 적었다. 1830년에는 전년도에 방문했을 때 관심을 가졌던 도시인 비엔나로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의 목적에 맞지 않았다. 비엔나에서는 피아니스트들이 넘쳐났으며, 특히 탈베르크는 나머지 분야에서 우위를 점했다. 그곳에서 보낸 몇 달 동안 쇼팽은 거의 이목을 끌지 못했고, 파리로 떠날 것을 다짐했다.
The greater part of Chopin’s professional career was to be spent in France, and particularly in Paris, where he established himself as a fashionable teacher and as a performer in the houses of the rich. His playing in the concert hall was of a style less likely to please than that of the more flamboyant Liszt or than the technical virtuosity of Kalkbrenner. It was in the more refined ambience of the fashionable salon that his genius as a composer and as a performer, with its intimacy, elegance and delicacy of nuance, found its place.
쇼팽은 전문 경력의 대부분을 프랑스, 특히 파리에서 보내게 되었고, 그곳에서 그는 세련된 교사이자 부유한 사람들의 집에서 연주자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콘서트홀 연주는 화려한 리스트나 칼크브레너의 기교보다는 덜 만족스러운 스타일이었다. 작곡가이자 연주자로서의 그의 천재성과 친밀함, 우아함, 섬세한 뉘앙스가 그 자리를 찾은 것은 부유층이 애용하는 살롱의 더욱 세련된 분위기였다.
In 1848 political disturbances in Paris made teaching impossible, and Chopin left the city for a tour of England and Scotland. By this time his health had deteriorated considerably. At the end of the year he returned to Paris, now too weak to play or to teach and dependent on the generosity of others for subsistence. He died there on 17 October 1849.
1848년 파리의 정치적 소동으로 교습할 수 없게 된 쇼팽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여행하기 위해 도시를 떠났다. 이때까지 그의 건강은 상당히 나빠졌다. 그해 말에는 파리로 돌아왔는데, 이제 너무 허약해져서 연주하거나 가르칠 수 없게 되었으며 생계를 위해 다른 사람들의 아량에 의존했다. 그는 1849년 10월 17일 그곳에서 사망했다.
The greater part of Chopin’s music was written for his own instrument, the piano. At first it seemed that works for piano and orchestra would be a necessary part of his stock-in-trade, but the position he found for himself in Paris enabled him to write principally for the piano alone, in a characteristic idiom that derives some inspiration from contemporary Italian opera, much from the music of Poland, and still more from his own adventurous approach to harmony and his own sheer technical ability as a player. The ‘Impromptu’, in title at least, was typical of its period in its suggestion of Romantic abandon and freedom. In common with much else in European music, it had its origins in Prague with the publication in 1822 of Impromptus by Jan Vaclav Vorišek, followed five years later by the Bohemian-born composer Marschner. Schubert’s publisher in the 1820s, Tobias Haslinger, found the title commercially attractive, and thereafter the name endured, descriptive of an independent piano piece, lacking the formality of a sonata movement.
쇼팽 음악의 대부분은 자신의 악기인 피아노를 위해 작곡되었다. 처음에는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작품들이 그의 상투적 요소에서 필수품인 것처럼 보였지만, 파리에서 자신에 맞는 위치를 찾은 덕분에 주로 피아노만을 위해 어떤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독특한 표현 양식으로 작곡할 수 있었는데, 이 표현 양식은 현대 이탈리아 오페라, 폴란드 음악, 그리고 더욱 진취적인 화성에 대한 접근 방식과 연주자로서의 순수한 전문적인 능력에서 비롯되었다. <즉흥곡>은 적어도 제목에서 낭만주의의 포기와 자유를 암시하는 그 시대의 전형이었다. 유럽 음악의 다른 많은 음악과 마찬가지로, 이 음악은 1822년 얀 바츨라프 보리셰크가 프라하에서 출판한 즉흥곡으로 시작하여 5년 후에는 보헤미아 태생의 작곡가 마르슈너로 이어졌다. 1820년대에 슈베르트의 출판인인 토비아스 하슬링어는 이 제목이 상업적으로 매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이후로 소나타 악장의 형식이 빠져 있는 독립된 피아노곡을 설명하는 이름이 유지되었다.
The four Scherzos explore a new form of piano composition. Originally a musical joke, with Beethoven the scherzo had come to replace the more limited minuet as the third movement of a symphony. Chopin, however, made of it an independent virtuoso form. He completed his Scherzo No. 1 in 1832 and dedicated it to Tomas Albrecht, wine merchant and Saxon consul in Paris and a good friend, who was present at the composer’s death bed in 1849. Two emphatic chords summon attention before the impetuous principal material of the piece makes its appearance, with its contrasting B major trio section, a Polish folk song transformed into a Berceuse. Scherzo No. 2, Op. 31, in B flat minor and D flat major, was written in 1837 and dedicated to a pupil, Countess Adälè von Fürstenstein. Once again the Scherzo opens with a call to attention, this time ominously quiet, until the answering burst of sound, followed by a display of agility, leading to a central oasis of general A major tranquillity that is not without passing excitement. Scherzo No. 3, in the key of C sharp minor, belied in its opening, was written in 1839 and dedicated to Chopin’s favourite pupil, Adolf Gutmann, one of the few professional pupils that he took during a teaching career largely devoted to the interests of rich amateurs. Marked Presto con fuoco, the Scherzo embarks on a series of open octaves with which and with wider intervals Gutmann would be well able to cope and includes a central D flat major passage in contrast. The last of these pieces, the Scherzo in E major, Op. 54, composed in 1842 and published with a dedication to his pupil Countess Jeanne de Caraman, after its introduction, moves into the fairy scherzo territory of Mendelssohn, a delicately nuanced conclusion to the series, ending with an appropriate flourish.
4개의 스케르초는 새로운 형식의 피아노 작품을 탐구한다. 원래 음악적 농담이었던 스케르초는 베토벤과 함께 교향곡에서 세 번째 악장으로 제한된 미뉴에트를 대체하게 되었다. 그러나 쇼팽은 그것을 독립적인 거장 형식으로 만들었다. 그는 1832년 스케르초 1번을 완성하여 1849년 자신의 임종 직전에 있었던 좋은 친구이자 와인 상인이자 파리의 작센 영사인 토마스 알브레히트에게 헌정했다. 두 번의 강렬한 화음은 이 곡의 격렬한 주요 소재가 등장하기 전에 주의를 환기하며, 대조되는 B장조 트리오 섹션과 함께 폴란드 민요(크리스마스 캐럴 <잘 자라 아기 예수>)가 자장가로 변형된다. 스케르초 2번(내림B단조로 시작하여 중간에 내림D장조로 변화)은 1837년 작곡되었으며 제자인 아델 폰 퓌르스텐슈타인 백작 부인에게 헌정되었다. 다시 한번 스케르초는 주의를 환기하면서 시작하는데, 이번에는 응답하는 소리가 폭발할 때까지 불길할 정도로 고요하다가 재빠르게 나타나며, 흥분을 지나치지 않고 중간 부분에 있는 일반적인 평온한 A장조의 오아시스로 이어진다. 올림C단조가 아닌 것처럼 시작하는 스케르초 3번은 1839년에 작곡되었으며 취미로 배우는 부자들을 주로 가르쳤던 시기에 데려온 몇 안 되는 전문 학생 중 한 명으로 쇼팽과 가까운 제자인 아돌프 구트만에게 헌정되었다. 프레스토 콘 푸오코(빠르게 열정을 가지고)로 표시된 스케르초 3번은 더 넓은 간격으로 구트만이 잘 대처할 수 있는 일련의 열린 옥타브로 시작하며 중간 부분에 내림D장조 소절이 대조적으로 나온다. 이 작품에서 마지막으로 나오는 스케르초 4번 E장조는 1842년에 작곡되어 그의 제자인 잔느 드 카라망 백작 부인에게 헌정되었는데, 도입부 다음에는 멘델스존의 요정 스케르초가 나오는 영역으로 이동하며, 연작의 미묘한 뉘앙스가 있는 결말이며, 적절한 번영으로 끝난다.
Chopin wrote his Impromptu No. 1 in 1837, the year of his first liaison with George Sand, dedicating the work, as he so often did, to one of his society pupils, the Countess Caroline de Lobau. Its delicate and lively outer sections enclose a more sustained F minor passage at the heart of the work. Impromptu No. 2 followed two years later, to be issued by Chopin’s new publisher Troupenas, who had temporarily replaced Maurice Schlesinger, whom he suspected of duplicity. The left hand establishes a pattern of chordal accompaniment, before the entry of the well-known principal melody and its elaborate embellishment. There is a lilting D major section and an F major restatement of the main theme before a passage of filigree ornament leads to a conclusion. By 1843 Chopin had returned to Schlesinger, who published his Impromptu No. 3 in that year, with a dedication to Countess Jeanne Esterházy, née Batthyany, a member by birth and by marriage of one of the leading families of the Habsburg Empire. Following a pattern he often used, Chopin frames a more sustained central section in the relative minor key with music of a livelier turn. The Fantaisie-Impromptu, published posthumously in 1855, predates the other three Impromptus and was completed in 1835. Its intense and excited outer sections frame a central Largo in D flat major, in which, as so often, an arpeggio left-hand accompaniment points an upper singing melody.
쇼팽은 조르주 상과 처음 만났던 1837년에 즉흥곡 1번을 썼는데, 종종 그랬던 것처럼 그의 사교계 제자 중 한 명인 카롤린 드 로보 백작 부인에게 이 작품을 헌정했다. 그 섬세하고 활기찬 외부 섹션들은 작품의 중심에서 더 지속된 F단조 소절을 둘러싼다. 즉흥곡 2번은 2년 후 쇼팽의 새로운 출판사인 트루페나에 의해 발행되었는데, 그는 이중성이 의심되었던 모리스 슐레징어를 잠시 대체했다. 왼손은 잘 알려진 주요 멜로디와 정교한 장식이 시작되기 전에 화음 반주의 패턴을 확립한다. 경쾌한 D장조 섹션이 있으며 F장조로 다시 나타나는 주요 주제는 매우 섬세한 장식의 소절이 나오면서 마무리로 이어진다. 1843년까지 쇼팽은 슐레징어에게 돌아와 즉흥곡 3번을 출판했으며, 이 곡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주요 가문 중 한 명과의 출산과 결혼을 통해 태어난 백작 부인 잔느 에스테르하지(결혼 전 성은 바티아니) 백작 부인에게 헌정되었다. 자주 사용했던 패턴에 따라 쇼팽은 더 생동감 있게 돌아가는 음악과 함께 관계조성인 단조(내림G장조와 나란한조인 내림E단조)로 더 지속된 중앙 부분을 구성한다. 1855년 사후에 출판된 즉흥 환상곡은 다른 3개의 즉흥곡보다 앞선 1835년에 완성되었다. 강렬하면서도 들뜬 외부 섹션들은 내림D장조의 중간 부분인 라르고(느리게)를 구성하며, 이 부분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아르페지오 왼손 반주가 상단의 노래하는 멜로디를 가리킨다.
The Allegro de concert, Op. 46 was conceived originally as a movement of a projected piano concerto in 1831, when it seemed Chopin might still have use for such material. It was revised as a solo work and published in 1841, with a dedication to a new pupil, Friederike Müller, who noted in her diary the physical weakness of her teacher, his coughing and remedy of opium drops with sugar and his enormous patience. The Allegro de concert preserves something of the rhetoric expected in a concerto.
<연주회용 알레그로>는 원래 1831년에 계획된 피아노 협주곡의 한 악장으로 창안되었는데, 당시에는 쇼팽이 여전히 그러한 소재를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곡은 독주 작품으로 개정되어 1841년에 출판되었고 새로운 제자인 프리데리케 뮐러에게 헌정되었는데, 그녀는 일기에서 선생님의 신체적 허약함, 기침과 통증을 달래기 위해 아편을 타서 설탕과 먹었던 것과 그의 엄청난 인내를 기록했다. <연주회용 알레그로>는 협주곡에서 기대되는 감정의 표현을 지속한다.
Keith Anderson / 키스 앤더슨 글
Born in Tokyo in 1998, Mao Fujita was awarded Second Prize at the 16th International Tchaikovsky Competition in 2019. In October 2019, Fujita made his UK debut with the Mariinsky Orchestra conducted by Valery Gergiev, which was critically acclaimed by The Times. Immediately following this success, he made his debut in Seoul and Moscow. In 2017, Fujita won the 27th Concours international de piano Clara Haskil in Switzerland, also receiving the Audience Award and Modern Times and Coup de Coeur prizes. Recent highlights include Jolivet’s Concerto for Piano and Orchestra with Kazuyoshi Akiyama and the Tokyo Symphony Orchestra and Rachmaninov’s Piano Concerto No. 3 with Kahchun Wong and the Yomiuri Nippon Symphony Orchestra in 2019, and Tchaikovsky’s Piano Concerto No. 1 with Oleg Caetani and the Tokyo Metropolitan Symphony Orchestra in 2018. Fujita’s 2019–20 season includes solo recitals, chamber music and concerto performances nationwide in Japan, plus concert dates in Germany, Switzerland, the UK, Russia and Latvia among others. In 2020–21, Fujita will extensively appear over the world, across Europe, North America and Asia.
1998년 도쿄에서 태어난 후지타 마오는 2019년 제16회 차이코프스키 국제음악콩쿠르에서 2위를 차지했다. 2019년 10월에는 발레리 게르기에프의 지휘로 마린스키 오케스트라와 함께 영국에서 데뷔했는데, <더 타임스>에서 비평가들의 극찬을 받았다. 이 성공 직후에는 서울과 모스크바에서 데뷔했다. 2017년에는 스위스에서 열린 제27회 클라라 하스킬 국제피아노콩쿠르에서 우승했으며 청중상, 현대음악상 및 청년 비평가상도 받았다. 최근의 하이라이트로는 2019년의 졸리베 피아노 협주곡(도쿄 심포니 오케스트라 및 가즈요시 아키야마 지휘) 및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요미우리 닛폰 심포니 오케스트라 및 카춘 웡 지휘), 2018년의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도쿄 국립 심포니 오케스트라 및 올렉 카에타니 지휘) 등이 있다. 후지타의 2019~20 시즌에는 일본 전역에서의 독주회, 실내악, 협주곡 연주에 더해 독일, 스위스, 영국, 러시아, 라트비아 공연 등이 있다. 2020~21 시즌에는 유럽, 북아메리카, 아시아 전역에 걸쳐 광범위하게 출연한다.
유튜브에서도 전체를 들을 수 있다. 용량이 커서 16비트로 변환했다. 원래 16비트인 음원을 가지고 있는 줄 알았는데 구해서 들어보니 불량이라 24비트로 구하고 나서 변환했다. 내지가 영어만 있어서 번역에 어려움이 좀 있었다. 이런 경우에는 배경 지식이 요구되므로 자료 조사를 해봐야 사실에 근거한 번역을 할 수 있다. 알고 보면 낙소스 음반 내지에 잘못된 정보들이 더러 있다. 레슨 시간에 낙소스 음반사는 돈 주면 녹음할 수 있는 데라는 말도 들었다. 썩 뛰어나지 않은 연주자들의 녹음으로 싸게 판다는 말도 있었고. 오랜만에 상당한 의역이 요구되었는데, 다른 외국어로 번역기를 돌리면 어떻게 나올까 상상해보기도 했다.
https://classicalpippo9.blogspot.com/2022/10/24-96-chopin-impromptus-scherzos-mao.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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