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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26일 목요일

Melodiya / Yekaterina Ervy-Novitskaya - Russian Piano School, Vol. 20



예나 지금이나 청중들은 “천재”라는 단어에 약하다. 아니 이런 단어가 아니라 “비길 데 없는 재능”이나 “신이 내려준 선물”이란 말들에 움직이게 된다는 것이 더욱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천재는 나타났고, 만들어지고, 사라져간다. 확실히 10대 초반의 나이에(심지어는 그 이전에) 성인보다도 더 성숙한 음악성을 나타내고 이미 완성된 음악가로 대접받는 그 어린 신동들은 조물주가 내려준 기적 중의 하나를 체험하는 듯한 감동을 우리에게 전해주어 야릇한 기쁨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볼 때, 천재란 호칭은 정작 본인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일 수밖에 없다. 성인이 되었을 때 천재 출신의 음악가란 경력은 그 자신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오히려 부담이 되는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우연의 일치일지는 모르나, 신동 혹은 천재란 타이틀과 함께 음악가로서의 생활을 시작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성인이 되어 타인들의 기대치에 미달하거나, 자가당착에 빠져 실패하고 마는 사람들을 우리는 목격하게 된다. 예카테리나 에르비-노비츠카야 역시 “천재 소녀 피아니스트”라는 호칭과 함께 나타났던 음악가이다. 앞서 말한 사실들과는 다르지만, 현재의 에르비-노비츠카야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교육자로서 활동하며, 외부로의 연주 활동을 거의 중단한 상태이다. 그녀가 어떤 계기에서 연주를 포기했는지는 정확히 알 길이 없지만, 그녀 역시 어느 누구 못지않은 천재성을 발휘했었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 개운치 못한 뒷맛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예카테리나 에르비-노비츠카야는 1951년 모스크바 근교의 한 소도시에서 태어났다. 인텔리였으며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어머니의 뜻으로 4살 때부터 피아노 레슨을 시작했고 6세 때에 모스크바 음악원 부속 중앙음악학교에 들어가 명교수 레프 오보린을 사사했다. 조숙한 천재성을 보인 카티아(예카테리나의 애칭) 노비츠카야는 10살 때 첫 독주회를 열었는데, 그때부터 어린 소녀는 모스크바 시민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그 후 1968년 벨기에에서 열린 퀸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최초의 여성 우승자가 된 노비츠카야는 모스크바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러시아인들은 그녀를 “나샤(러시아어로 ‘우리의’) 카티아 노비츠카야”라고 불렀는데 이는 러시아식으로 무척 소중하고 사랑받는 존재를 가리킬 때 쓰는 표현이다. 당시 그녀의 천재성에 놀란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은 “머지않아 모두 이 아이에 대한 얘기로 떠들썩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활발한 연주 활동과 함께 10대의 나이에 이미 거장(마에스트로)의 칭호를 받던 노비츠카야는 정말 모든 것을 얻은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그녀가 갑자기 모든 것을 포기하고 브뤼셀로 이주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1974년 그녀의 기량이 절정에 달했을 당시 룩셈부르크의 한 언론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우아하고, 사색적인 동시에 어린아이와도 같이 천진난만하게 보이는 이 피아니스트는 프로그램마다 그 음악이 갖고 있는 에센스를 우리에게 전해 준다. 그녀의 연주는 단순함, 자연스러움, 그리고 테크닉적인 어려움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하는 편안함 그것들 자체이다. 그녀의 터치는 생기 있고 직선적이지만 동시에 윤이 나고 다이내믹하다. 모든 것이 생각을 통해 분석되고 걸러진 듯하다... 카티아 노비츠카야는 ‘어떻게’ 연주하는 것을 아는 것만이 아니고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그녀가 어떻게 프로그램 하나하나마다 모두 고르게 작곡가들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성공시키는가에 대한 답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요령이나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며 연주자의 고유한 퍼스낼리티의 문제이다. 그녀는 항상 자기비판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것이다.”

카티아는 정말로 놀라운 피아니스트였다. 그러나, 한때 “리히터와 같은 반열에 오를 대가 중 한 사람”(겐리흐 네이가우스)으로 평가받던 에르비-노비츠카야는 가정을 갖고, 러시아를 떠나서 벨기에에 정착한 이후부터는 애석하게도 소규모의 비정규적인 콘서트에서만 연주했을 뿐이었다. 이유야 어찌됐든, 한 번 연주 일선에서 물러선 연주가가 다시 컴백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인데, 최근 이런 그녀가 침묵을 깨고 모스크바에서 연주회를 열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과연 러시아의 올드 팬들이 그녀를 기억해 줄 것인가? 아무쪼록 성공리에 연주가 끝나 전 세계 음악인들에게 다시 “우리의 카티아 노비츠카야”로 돌아올 수 있기를 바란다.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는 에르비-노비츠카야가 스크리아빈과 함께 가장 즐겨 연주하던 작곡가였다. 과연 그녀의 날카롭고 생기 있는 터치와 리듬감은 이 건강한 작곡가의 작품에 안성맞춤이다. “사르카즘”(풍자, 비꼼, 빈정댐)은 프로코피에프의 초기 작품 중에서도 특이한 존재이다. 당황스러우리만큼 느닷없는 다성적 요소, 과감한 무조, (마치 버르토크를 연상시킨다.) 불쾌하고 음산한 분위기 등이 그의 초기 피아노 작품의 특징이지만, 이 작품은 그런 요소가 더욱 두드러지며, 제목 그대로 빈정대는 듯한 기분으로 가득 차 있다. 거기에다 예측할 수 없는 루바토 등이 곁들여진다. 노비츠카야는 이 실험적인 요소로 가득한 곡을 지극히 개성적으로, 약간만 더 나서면 인공적이 될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자의적인 모습으로, 그러나 매력 있게 풀어놓고 있다. 소나타 제5번은 프로코피에프의 제2기 즉 망명 시기에 쓰인 것으로, 당시 그는 프랑스에 머무르면서 프랑스 6인조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지는데 과연 이 소나타에도 그런 점이 느껴진다. 비교적 작은 스케일과 단정한 울림, 간결한 구성 등에서 그러하다. 부분적으로 재즈의 냄새마저 풍겨 나오는 2악장에서, 노비츠카야가 들려주는 유머러스한 뉘앙스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덧없는 환영 작품 22는 앞서 언급한 “사르카즘”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곡으로, 작곡가가 느끼는 순간순간의 심상, 감회 등을 짤막한 20개의 소품으로 옮겨 담은 것이다. 거기에는 어떤 심원한 감정 같은 것은 없고, 단지 스쳐가는 환상 같은 것의 스케치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매우 다양한 성격의 피스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우스꽝스러움(제5곡, 제7곡), 멜랑콜릭함(제12곡, 제16곡), 율동적(제4곡, 제14곡, 제15곡), 인상파적(제7곡, 제17곡) 등 여러 기분들이 교차한다. 요컨대 프로코피에프다운 함축된 “음시”라고 할 수 있겠는데, 피아니스트의 연주 역시 작곡가와 같은 환영을 보는 듯 정곡을 찌른 해석이다. 특히 나른하고 허탈하며 지친 듯한 표정을 보이는 부분에서는, 녹음 당시 19세에 불과하던 어린 소녀의 연주임을 상기하고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된다.

프로코피에프의 모든 작품을 통틀어 가장 파퓰러한 곡의 하나인 발레 음악 “로미오와 줄리엣”은 이 앨범에서와 같이 피아노곡으로도 자주 연주되는데, 워낙 피아노적인 이디엄에 능했던 프로코피에프인 만큼 솔로 연주로도 무리가 없이 잘 짜여있다. 셰익스피어의 고색창연한 비극을 20세기의 음악 어법을 통해 건강하고 생기가 흐르는 무용음악으로 바꾸어놓은 작가의 번뜩이는 영감은 여기서 유감없이 발휘되며, 세월이 바뀌고 표현 양식이 바뀌었어도 원작의 감동은 퇴색되는 법 없이 항상 우리에게 서늘하고 신선하게 와 닿는다. 노비츠카야의 연주는 여기서 무척 피아니스틱하다. 이런 편곡 연주에서 볼 수 있는, 섣불리 오케스트라의 음색을 흉내 내지 않는 자세여서 우선 호감이 간다. 거기에 강렬한 터치와 빛나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일종의 스포티한 감동까지 가져다준다. 금방이라도 춤추는 발레리나들이 뛰어나올 듯한 흥겨운 극장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전해주는 노비츠카야의 놀라운 재주를 체험하며, 다시 한 번 그녀의 재기를 기대해보는 마음이다.

★ 필자 : 김주영 (피아니스트)
서울 출생. 서울 음대 기악과 졸업. 러시아 모스크바 음악원 아스피란트(박사) 과정 졸업.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사무엘 파인베르크의 제자인 지나이다 이그나체바 교수를 사사. 유학 중 모스크바 프로코피에프 콩쿠르, 파리 인터내셔널 그랜드 콩쿠르 등에서 입상.

Track
01 Prokofiev Sarcasms, Op. 17 No. 1 Tempestoso / 프로코피에프 5개의 <풍자>
02 Prokofiev Sarcasms, Op. 17 No. 2 Allegro rubato
03 Prokofiev Sarcasms, Op. 17 No. 3 Allegro precipitato
04 Prokofiev Sarcasms, Op. 17 No. 4 Smanioso
05 Prokofiev Sarcasms, Op. 17 No. 5 Precipitosissimo - Andantino
06 Prokofiev Sonata No. 5 in C, Op. 38/135: 1. Allegro tranquillo / 프로코피에프 소나타 5번
07 Prokofiev Sonata No. 5 in C, Op. 38/135: 2. Andantino
08 Prokofiev Sonata No. 5 in C, Op. 38/135: 3. Un poco allegretto
09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1 Lentamente / 프로코피에프 <덧없는 환영>
10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2 Andante
11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3 Allegretto
12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4 Aminato
13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5 Molto giocoso
14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6 Con eleganza
15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7 Pittoresco (Arpa)
16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8 Commodo
17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9 Allegretto tranquillo
18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10 Ridicolosamente
19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11 Con vivacita
20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12 Assai moderato
21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13 Allegretto
22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14 Feroce
23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15 Inquieto
24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16 Dolente
25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17 Poetico
26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18 Con una dolce lentezza
27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19 Presto agitatissima e molto accentuato
28 Prokofiev Visions fugitives, Op. 22 No. 20 Lento irrealmente
29 Prokofiev 10 Pieces for piano after ballet, Op. 64 'Romeo & Juliet' No. 1 Folk dance / 프로코피에프 모음곡 <로미오와 줄리엣> 중 1곡 <민속춤>
30 Prokofiev 10 Pieces for piano after ballet, Op. 64 'Romeo & Juliet' No. 2 Scene / 프로코피에프 모음곡 <로미오와 줄리엣> 중 2곡 <장면>
31 Prokofiev 10 Pieces for piano after ballet, Op. 64 'Romeo & Juliet' No. 3 Minuet / 프로코피에프 모음곡 <로미오와 줄리엣> 중 3곡 <미뉴에트>
32 Prokofiev 10 Pieces for piano after ballet, Op. 64 'Romeo & Juliet' No. 4 The young Juliet / 프로코피에프 모음곡 <로미오와 줄리엣> 중 4곡 <젊은 줄리엣>
33 Prokofiev 10 Pieces for piano after ballet, Op. 64 'Romeo & Juliet' No. 5 Masks / 프로코피에프 모음곡 <로미오와 줄리엣> 중 5곡 <무도회>
34 Prokofiev 10 Pieces for piano after ballet, Op. 64 'Romeo & Juliet' No. 6 The Montagues & the Capulets / 프로코피에프 모음곡 <로미오와 줄리엣> 중 6곡 <몬타규 가와 캐퓰렛 가>
35 Prokofiev 10 Pieces for piano after ballet, Op. 64 'Romeo & Juliet' No. 7 Friar Lawrence / 프로코피에프 모음곡 <로미오와 줄리엣> 중 7곡 <로렌스 수사>
36 Prokofiev 10 Pieces for piano after ballet, Op. 64 'Romeo & Juliet' No. 8 Mercutio / 프로코피에프 모음곡 <로미오와 줄리엣> 중 8곡 <머쿠쇼>
37 Prokofiev 10 Pieces for piano after ballet, Op. 64 'Romeo & Juliet' No. 9 Dance of the maids of the lilies / 프로코피에프 모음곡 <로미오와 줄리엣> 중 9곡 <백합을 손에 든 아가씨들의 춤>
38 Prokofiev 10 Pieces for piano after ballet, Op. 64 'Romeo & Juliet' No. 10 Romeo & Juliet before parting / 프로코피에프 모음곡 <로미오와 줄리엣> 중 10곡 <헤어지기 이전의 로미오와 줄리엣> (줄리엣에게 작별을 고하는 로미오)

Moscow's Katya: Yekaterina Georgiyevna Ervy-Novitskaya (born 1951) / 모스크바의 카티아 - 예카테리나 게오르기예프나 에르비-노비츠카야
Although born in the Russian province, in the village of Vishnyaki near Moscow, on 24 October 1951, the future pianist Yekaterina Novitskaya grew up in the pleasant atmosphere of an intellectual and cultured household such as is normally only to be found in a large city. Her father was a professor of history at Moscow University. Her mother too had studied history but had also enjoyed a musical education and was thus able to give her daughter her first piano lessons at the tender age of four. In 1957 she entered the Central School of Music at the Moscow Conservatory where a pupil of Igumnov became her first professional teacher.

1951년 10월 24일 모스크바 근교의 비쉬니아키 마을에서 태어났지만, 미래의 피아니스트 예카테리나 에르비-노비츠카야는 일반적으로 대도시에서만 볼 수 있는 지적이고 교양 있는 가정의 쾌적한 분위기에서 자랐다. 그녀의 아버지는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역사학 교수였다. 그녀의 어머니도 역사를 공부했지만 음악 교육도 즐겼으므로 애정 어린 4세에 딸에게 첫 피아노 레슨을 받게 할 수 있었다. 1957년 그녀는 첫 전문 선생님이 되었던 이굼노프의 제자(오보린)가 있는 모스크바 음악원 부속 중앙음악학교에 들어갔다.

Oborin as Mentor / 멘토로서의 오보린
Lev Oborin soon took an interest in the talented young pianist and prepared her to enter the Conservatory. At the age of ten she gave her first public piano recital and immediately won the hearts of the Muscovites who, from this day on, lovingly called her "Katya Novitskaya". On the programme was Rachmaninov, Shostakovich, Kabalevsky, and the almost obligatory Bach, Cantor of St. Thomas' in Leipzig. The highly intelligent girl matriculated as an external pupil at the age of 15 and was even awarded a silver medal! At last she could enter the Moscow Conservatory. After graduating in 1973 she became a post-graduating in 1973 she became a post-graduate assistant to Oborin, "her" professor, and two years later was officially given the position of his assistant and lecturer at the Conservatory.

레프 오보린은 곧 재능 있는 어린 피아니스트에게 관심을 가졌고 그녀에게 음악원에 입학할 준비를 시켰다. 10세에 그녀는 첫 공개 독주회를 열었는데, 그때부터 어린 소녀는 “카티아 노비츠카야”로 사랑스럽게 불리면서 모스크바 시민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라흐마니노프, 쇼스타코비치, 카발레프스키, 거의 의무적인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 교회 성가대장 바흐로 구성되었다. 이 매우 총명한 소녀는 15세에 (학외의) 특별 학위 심사를 받는 학생으로 대학생이 되었고 은메달까지도 받았다! 마침내 그녀는 모스크바 음악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 1973년에 졸업한 후 1973년에 석사가 되었는데, “그녀의” 교수인 오보린의 대학원 조교가 되었으며, 2년 후 공식적으로 음악원에서 그의 조교직과 강사직을 맡았다.

Initial Success in Brussels and Moscow / 브뤼셀과 모스크바에서의 초기 성공
Such sober facts and figures do not, however, disclose the exciting and unique events which took place. As a student in her fourth term Katya Novitskaya made her international breakthrough in 1968 at the legendary Concours Musical Reine Elisabeth held in Brussels. The unexpected actually came true and the 17-years-old Russian was awarded first prize and became the first female ever to win a prize in Brussels. In his presentation of the young artist, Artur Rubinstein prophesied confidently: "Soon everyone will be talking of her". Back home in Moscow she had long been the public's darling, particularly with the younger generation who lovingly talked of "our Katya Novitskaya".

그러나 그런 냉정한 사실과 수치는 다음에 일어난 흥미진진하고 독특한 사건을 드러내지 않는다. 네 번째 학기인 학생으로서 카티아 노비츠카야는 1968년 브뤼셀에서 열린 전설적인 퀸엘리자베스 국제음악콩쿠르에서 국제적인 돌파구를 만들었다. 예기치 못한 사실이 실제로 실현되었고 17세 러시아인이 1등상을 수상했으며 브뤼셀에서 최초로 우승한 여성이 되었다. 당시 그녀의 천재성에 놀란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은 자신 있게 예언했다. - “머지않아 모두 이 아이에 대한 얘기로 떠들썩할 것이다.” 모스크바로 돌아온 그녀는 특히 “우리의 카티아 노비츠카야”라고 사랑스럽게 말했던 더 젊은 세대와 함께, 청중의 사랑을 오랫동안 받았다.

Secrets of a Career / 경력의 비밀들
In 1974 a reviewer writing in the newspaper "Luxemburger Worte" endeavoured to pinpoint the secret of her early success and found the following appropriate words to describe the characteristics of her playing: "Gently, thoughtfully, and almost in a childlike manner this young pianist presents the very essence of the music. Her performance is full of simplicity and is completely natural, technical obstacles are overcome with apparent ease. Her touch is direct and unusually vivid, polished and dynamic. Everything has been well thought through and analysed... Katya Novitskaya does not only give thought to 'how' she should play but also to 'what' she should play. This is the sole explanation for the fact that she has found a highly personal and incomparable tone for each and every one of the composers on her programme. It is not a question of technique but more one of perception and never flagging self-criticism." And the critic went on to assure his readers that "one could perceive more in just one single piece than is usually heard in a whole concert".

1974년 “룩셈부르거 보르테” 신문에 글을 올린 비평가는 그녀의 초기 성공의 비밀을 정확히 보여주고 그녀의 연주에 대한 성격을 표현하기 위해 적절한 말들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 “우아하고, 사색적인 동시에 어린아이와도 같이 천진난만하게 보이는 이 피아니스트는 프로그램마다 그 음악이 갖고 있는 에센스를 우리에게 전해 준다. 그녀의 연주는 단순함, 자연스러움, 그리고 테크닉적인 어려움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하는 편안함 그것들 자체이다. 그녀의 터치는 생기 있고 직선적이지만 동시에 윤이 나고 다이내믹하다. 모든 것이 생각을 통해 분석되고 걸러진 듯하다... 카티아 노비츠카야는 ‘어떻게’ 연주하는 것을 아는 것만이 아니고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그녀가 어떻게 프로그램 하나하나마다 모두 고르게 작곡가들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성공시키는가에 대한 답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요령이나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며 연주자의 고유한 퍼스낼리티의 문제이다. 그녀는 항상 자기비판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비평가는 그의 독자들을 “보통 전체 콘서트에서 들리는 것보다 단 하나의 곡으로 더 많이 인지할 수 있다”고 확신시켰다.

Prokofiev and Nothing but Prokofiev / 프로코피에프와 프로코피에프 외의 작곡가
This recording presents the pianist as an all-round interpreter of Prokofiev. The composer was also on the programme of her path-setting concert in Brussels in 1968, and the Suite from "Romeo and Juliet" was one of the works which led the Luxemburg journalist to write his song of praise. Prokofiev is Katya Novitskaya's "favourite composer" next to Scriabin. And with good reason, - for he unites deep feeling (although this may lie hidden beneath the surface) with strict, even inexorable calculation. Emotion is balanced by rationalism to an equal extent and they demand both a passionate heart and a cool mind.

이 녹음은 피아니스트를 프로코피에프의 만능 해석자로 소개한다. 이 작곡가는 1968년 브뤼셀에서 가졌던 그녀의 경로 설정 콘서트 프로그램에도 있으며, <로미오와 줄리엣> 모음곡은 룩셈부르크 저널리스트가 그의 찬미가를 쓰는 것으로 이끌었던 작품들 중의 하나이다. 프로코피에프는 카티아 노비츠카야가 스크리아빈과 함께 가장 즐겨 연주하던 작곡가였다. 그리고 좋은 이유가 있는데, - 그가 엄격한, 심지어는 거침없는 계산으로 (이것은 표면 아래에 숨겨져 있을 수도 있지만) 깊은 느낌을 결합하기 때문이다. 감정은 합리주의와 동등할 정도로 균형을 이루며 이 곡들은 열정적인 심장과 냉정한 마음을 모두 요구한다.

Short and Mocking / 짤막한 조롱하는 곡
This rebellious young Russian was determined to shock his contemporaries. His "Sarcasms" furthered a European tradition which began with the Wolf's Glen Scene in Weber's "Freischütz", and continued with Berlioz's "Symphonie fantastique" (Finale) and the highly varied "demonic" music of Franz Liszt (who was himself said to possess an aura of devilment, particularly in old age), leading up to Scriabin's "Black Mass" (with its host of evil forces). The tragic and sinister had always held a deeper fascination for the arts than pure goodness...

이 반항적인 젊은 러시아인은 그의 동시대인들에게 충격을 주기로 결심했다. 그의 <사르카즘>(풍자)은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에 나오는 “늑대의 협곡 장면”으로 시작했던 유럽의 전통을 키웠고,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피날레)과 (그 자신이 노년기에 특히 악마의 기운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던) 프란츠 리스트의 매우 다양한 “악마적인” 음악과 함께 계속했는데, (다수의 사악한 세력들과 함께) 스크리아빈의 소나타 9번 <흑미사>에 가까이 간다. 비극적이고 사악한 것은 항상 순수한 선량함보다 예술에 대한 더 깊은 매력을 갖고 있었다.

Snapshots / 짤막한 묘사들
Prokofiev's "Visions fugitives" are even more concise than his "Sarcasms", being a sort of psychological snapshot in late-Impressionist - or better said: pointillistic - style. (One might call these pieces the musical counterpart to Charles Baudelaire's symbolistic "Poemes en prose".) Prokofiev fully intended the pieces to be highly varied and contrasting in mood and indeed they range from jocular, elegant, picturesque, and easy-going to ridiculous, vehement, restless, pained, and poetic. The composer even defined the tempo marking of "lento" (slow) in two different ways to make it more precise: "Con una dolce lentezza" (with a sweet slowness) and "Lento irrealmente" (unrealistically slow).

프로코피에프의 <덧없는 환영>은 그의 <사르카즘>보다 훨씬 더 간결한데, 후기 인상파 화가들의 심리에 대한 짤막한 묘사의 일종이다. - 또는 더 낳게 말하자면 - 점묘주의 스타일이다. (이 곡들 중의 하나는 샤를 보들레르의 상징주의적인 <시적인 산문>에 대응한다고 부를 것이다.) 프로코피에프는 충분히 곡들을 매우 다양하고 대조적인 분위기로 만들었으며 실제로 이 곡들은 범위가 유머러스하고, 우아하고, 그림 같고, 느긋한 것에서 우스꽝스럽고, 불안하고, 짜증스럽고, 시적인 것에 이른다. 작곡가는 “렌토”(느리게)의 템포 표시를 더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 두 개의 다른 방식으로 정의했다. - 제18곡 “콘 우나 돌체 렌테차”(완만하게, 우아하게)와 제20곡 “렌토 이레알멘테”(느리고 환상적으로).

Modern Ballet on an Old but ever New Subject / 오래되었지만 새롭기도 한 대상에서의 모던 발레
During his early Russian and middle West European periods, Prokofiev was not in the least interested as to who actually listened to his music, whether anyone understood it, or whether it affected the emotions of the listener. But this changed rapidly when he returned to his native country.

초기 러시아 시기와 중기 서유럽 시기 동안 프로코피에프는 그의 음악을 실제로 누가 들었는지, 누군가가 그것을 이해했는지, 또는 청취자의 감정에 영향을 줬는지에 대해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조국으로 돌아왔을 때 이것은 급격히 변했다.

It would be a mistake, however, to believe that Prokofiev's late Neo-Classicism was a concession to the Soviet powers. This is proved by the very tone of the music: Porkofiev's Neo-Classicism is far more austere than that of Stravinsky or Poulenc for example. He strives to compose something lasting, great, not merely a work but a composition which will move the hearts of all those who hear it, especially that of the common man. But he certainly does not make things easy: Prokofiev never sought popularity and he was certainly no conformist who composed to please a party "aesthete" such as Andrei Zhdanov. His musical interpretation of Shakespeare's two lovers from Verona can rightly join the ranks of Tchaikovsky's symphonic ballets. But first the composer must win over the performer to accept his modern tonal world, must patiently convince him or her of the necessity of his dissonances (which express enmity and mental agony) and the harsh rhythms (depicting the fighting between the Montagues and the Capulets)...

그러나 프로코피에프의 신고전주의가 소비에트 세력에 대한 양보였다고 믿는 것은 실수임이 틀림없다. 이것은 음악의 굉장한 음색에 의해 증명된다. - 프로코피에프의 신고전주의는 예를 들어 스트라빈스키나 풀랑크의 그것보다 훨씬 더 엄격하다. 그는 단지 작품이 아니라 그것을 듣는 모든 사람들, 특히 일반적인 사람의 것을 감동시킬 지속되는 것, 위대한 작품을 작곡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쉬운 것들을 만들지 않는다. - 프로코피에프는 인기를 얻지 못했고 그는 분명히 러시아 정치인 안드레이 즈다노프 같은 “탐미주의자” 정당을 기쁘게 하기 위해 작곡한 순응주의자가 아니었다. 그의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나오는 베로나 출신의 두 연인(로미오와 줄리엣)에 대한 음악적 해석은 차이코프스키의 교향적 발레단에 바로 합류할 수 있다. 그러나 먼저 작곡가는 그의 현대 음조 세계를 받아들이려면 연주자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어야 하고, 특히 연주자에게 그의 불협화음(적대감과 정신적 고통을 표현함)과 거친 리듬(몬타규 가와 캐퓰렛 가 사이의 싸움을 묘사함)의 필요성을 인내심 있게 납득시켜야 한다...

Sonata-Form Throughout / 인생을 통한 소나타 형식
Initially the composer began in a fairly civilized manner with "old forms and conventions", and these he gladly employed in later works too - even in his epoch-making sonatas. Following in the footsteps of Mozart, Beethoven and Scriabin, Prokofiev is yet another composer of a wealth of sonatas - a genre which occupied him throughout his life.

처음에는 작곡가가 “옛 형식과 전통”으로 상당히 문명화된 방식으로 시작했고, 그의 후기 작품들에서도 기꺼이 사용했다. - 심지어 그의 획기적인 소나타들에서도 그렇다. 모차르트, 베토벤, 스크리아빈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프로코피에프는 그의 생애에 걸쳐 점유한 장르인 풍부한 소나타들의 또 다른 작곡가이다.

In his final piano sonatas Prokofiev mirrored the events which took place during the Second World War. But before this time he had spent approximately two pleasant years in Ettal, a village in the Bavarian Alps, where he was able to put to paper the impressions he had gathered while in Paris. During this time he composed his Fifth Piano Sonata, which, not surprisingly, was strongly influenced by contemporary French music. Prokofiev, who had preserved a boyish touch in his character and enjoyed slipping into the role of "enfant terrible" or disguising himself in one manner of another, was particularly appreciative of Francis Poulenc with his fresh and impudent manner of composing and who revelled in copying past styles. The outer movements of the Fifth Sonata are full of the spirit of "Les Six", displaying Romanic clarity, piquant harmonies and gentle movement. The middle movement, Andantino, is odd and ambiguous: when trying to pinpoint its character, the opinions of Prokofiev's contemporaries waivered between "agony" and "jazz".

그의 후기 피아노 소나타들에서 프로코피에프는 2차 세계대전 동안 일어난 사건들을 반영했다. 그러나 이전에 그는 바이에른 알프스의 한 마을인 에탈에서 약 2년 동안 즐거운 해를 보냈다. 그곳에서 파리에 있는 동안 모았던 인상들을 기록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그는 다섯 번째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했는데, 당연히 현대 프랑스 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자신의 성격에 소년 같은 터치를 유지하고 “앙팡테리블”(무서운 아이라는 뜻으로, 장 콕토의 소설 제목에서 비롯된 말로 깜찍하고 엉뚱한 짓을 잘하는 조숙한 아이들) 역할로 빠져들거나 또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위장하는 것을 즐기는 프로코피에프는 신선하고 뻔뻔스러운 작곡 방식을 지니면서 과거 스타일 복제에 열중했던 프란시스 풀랑크에게 특히 고마워했다. 제5번 소나타의 외부 악장들은 라틴 계통의 명료성, 톡 쏘는 듯한 화성들, 부드러운 악장을 드러내는 <프랑스 6인조>(루이 뒤레, 다리우스 미요, 아르튀르 오네게, 조르주 오리크, 제르맨 타유페르, 프란시스 풀랑크)의 영감으로 가득 차 있다. 중간의 2악장 안단티노(조금 느리게)는 특이하고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 이 곡의 성격을 정확하게 집어내려고 할 때, 프로코피에프와 동시대인 사람들의 의견은 “고뇌”와 “재즈” 사이에서 포기했다.

Life's Turning-Point / 인생의 터닝 포인트
To conclude this introduction let us return once more to the artist herself. The twists and turns of fate which accompany an apparently smooth career are often of greatest interest in a musician's biography. And although a turn of fate can result in a deep fall, it certainly enhances a musician's character, adds to his or her personal experiences and constitutes a further step in the development of his or her art (one only need think of Ashkenazy!). Back in 1968 Katya Novitskaya astonished the world of music with her historic concert in Brussels. And she had achieved almost everything - concert trips abroad, recognition (and thus security) in Moscow and world fame. She was praised by maestros: "She is a great artist - like Sviatoslav Richter" (Heinrich Neuhaus); "To hear her is great fortune indeed" (David Oistrakh). And she perfected her art with a number of maestros - Artur Rubinstein, Wilhelm Kempff and Konstantin Igumnov (through whom she joined the ranks of the Liszt School).

이 소개를 끝내려면 다시 한 번 아티스트 그녀 자신에게 돌아가자. 외관상으로는 매끄러운 경력을 동반하는 운명의 우여곡절은 종종 음악가의 일대기에서 가장 큰 관심거리이다. 그리고 운명의 전환은 깊은 가을을 가져올 수 있지만 확실히 음악가의 성격을 향상시키고 개인적인 경험을 더하며 자신의 예술 발전에 있어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아쉬케나지만 생각하면 된다!) 1968년으로 돌아가 보면, 카티아 노비츠카야는 브뤼셀에서 열린 역사적인 콘서트로 음악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리고 그녀는 거의 모든 것을 달성했다 - 해외 콘서트 여행, 모스크바에서의 인정(과 그러므로 보안)과 세계적인 명성. 그녀는 거장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 “리히터와 같은 반열에 오를 대가 중 한 사람”(겐리흐 네이가우스) - “그녀의 연주를 듣는 것은 정말 행운이다(다비드 오이스트라흐).” 그리고 그녀는 많은 거장들과 그녀의 예술을 완벽히 했다. -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빌헬름 켐프, (그녀가 리스트 악파의 대열에 합류했던 사람을 통한) 콘스탄틴 이굼노프.

Off on a New Path / 새로운 길로
But suddenly she gave up all this, left Moscow, moved to Brussels, started a family, taught and only after quite some time did she give the occasional concert. Sir Yehudi Menuhin said almost angrily, "She ought to be giving concerts and not lessons!". That, however, is more easily said than done. Once contact with the media and the public has been lost, a comeback is extremely hard work. And it is in this situation that the pianist finds herself today. After 20 years absenteeism from the concert platform she will appear in Moscow once again in October 1995, followed by concerts in several Russian cities. Will her fans of old recognize her?

그러나 갑자기 그녀는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모스크바를 떠나 브뤼셀로 이주하여 가정을 갖고 교육자가 되었으며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가끔 콘서트를 열었을 뿐이었다. 예후디 메뉴인 경이 거의 화가 나서 “레슨을 하지 말고 콘서트를 가져야 한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보다 쉽게 말한 것이다. 언론과 대중과의 접촉이 없어지면 복귀는 매우 힘든 일이다. 그리고 피아니스트가 오늘날 그녀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상황이다. 콘서트 무대에서의 20년간의 공백 이후 그녀는 1995년 10월 모스크바에 다시 한 번 등장하고 이어서 러시아의 여러 도시들에서 콘서트를 연다. 과연 러시아의 올드 팬들이 그녀를 기억해 줄 것인가?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69839&cid=59000&categoryId=59000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271190&cid=51211&categoryId=51211

러시아 피아노 스쿨의 모든 독일어 부클릿을 쓴 사람은 크리스토프 뤼거 박사(Prof. Dr. Christoph Rueger)인데, 프랑스어로 번역된 부클릿도 일부 있지만 영어 번역 부클릿은 다 가지고 있다. 여기까지 러시아 피아노 스쿨 음반을 소개했는데, 한글 속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 세 명만 정리하면 나머지는 한글을 영어랑 그대로 쓰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라는 것을 이내 깨닫게 되었다. 물론 번역하면서 잘못된 정보들을 수정해나갔다. 이번에는 한글 정보를 전보다 더 많이 활용할 수 있었다. 이 음반들에 있는 20명 말고도 다른 러시아 스쿨 음반들도 있다.

댓글 1개:

  1. https://classicalpippo9.com/2017/10/24/russian-pianist-school-vol-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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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gle Drive / 2024. 04. Concours International de Piano “Adilia Alieva”

프랑스의 아딜리아 알리예바 국제피아노콩쿠르는 아제르바이잔 피아니스트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대회이다. 2014년까지 가야르에서 열리다가 2016년부터 안마스에서 열린다. 제3회 2002 Gaillard 비르투오시티 특별상 Ekaterina Avdee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