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27일 금요일
Russian Pianist - Vladimir Sofronitsky
https://en.wikipedia.org/wiki/Vladimir_Sofronitsky
https://ru.wikipedia.org/wiki/%D0%A1%D0%BE%D1%84%D1%80%D0%BE%D0%BD%D0%B8%D1%86%D0%BA%D0%B8%D0%B9,_%D0%92%D0%BB%D0%B0%D0%B4%D0%B8%D0%BC%D0%B8%D1%80_%D0%92%D0%BB%D0%B0%D0%B4%D0%B8%D0%BC%D0%B8%D1%80%D0%BE%D0%B2%D0%B8%D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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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osconcert.com/calendar/851.html
http://www.allmusic.com/artist/vladimir-sofronitsky-mn0001725151
http://www.sofronitsky.ru/en/
http://www.naxos.com/person/Vladimir_Sofronitsky/43886.htm
http://www.bach-cantatas.com/Bio/Sofronitsky-Vladimir.htm
http://www.mosconsv.ru/ru/person.aspx?id=130953
http://pianist.web2020.co.kr/bbs/articles/408
Biography
Vladimir Vladimirovich Sofronitsky (or Sofronitzky, Влади́мир Влади́мирович Софрони́цкий, Vladimir Sofronitskij) was born on 8 May [O.S. April 25] 1901 in St. Petersburg. His father Vladimir N. Sofronitsky (1869-1942) was a professor of mathematics and physics of the Smolny Institute for Noble Maidens. His mother was a great-niece of the famous portrait painter Vladimir Borovikovsky (1875-1935) and granddaughter of the poet L. I. Borovikovsky and daughter of a lawyer and poet A. Borovikovsky. Sofronitsky and his twin sister Vera were the youngest of six children.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소프로니츠키는 1901년 5월 8일(러시아 구력으로는 4월 25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블라디미르 N. 소프로니츠키(1869~1942)는 스몰니 노블 메이든스 기관의 수학과 물리학 교수였다. 어머니는 유명한 초상화가 블라디미르 보로비코프스키(1875~1935)의 조카딸이자 시인 L. I. 보로비코프스키의 손녀였으며 변호사이자 시인이었던 A. 보로비코프스키의 딸이었다. 소프로니츠키와 그의 쌍둥이 누이 베라는 6남매 중에서 가장 어렸다.
In 1903, his family moved to Warsaw, where he started piano lessons with Anna Lebedeva-Getcevich (a student of Nikolai Rubinstein) from 1908. Nine-year-old Vladimir made his debut in Warsaw at one of the concerts showcasing Lebedeva-Getsevich's pupils in 1910. As a youth, Sofronitsky was noticed by the director of the St. Petersburg Conservatory, Alexander Glazunov, who sent him to study with Polish pianist Aleksander Michałowski.
1903년 그의 가족은 바르샤바로 이주했고, 1908년부터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의 제자인) 안나 레베데바-게체비치와 함께 피아노 레슨을 시작했다. 9세의 블라디미르는 1910년 바르샤바에서 레베데바-게체비치의 제자 연주회 중 하나로 데뷔했다. 어릴 때 소프로니츠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장 알렉산더 글라주노프에 의해 주목받았고, 글라주노프는 소프로니츠키를 폴란드 피아니스트 알렉산데르 미하워프스키에게 보냈다.
When Sofronitsky's family returned to St Petersburg in September 1913 he continued to study with Michałowski by commuting to Warsaw every month until the outbreak of World War I. He then studied for a year with Leonid Shchedrin before entering the Petrograd (now St. Petersburg) Conservatory in 1915.
소프로니츠키의 가족이 1913년 9월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을 때 그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매달 바르샤바에서 미하워프스키에게 계속 배웠다. 그는 이후 페트로그라드(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기 전인 1915년에 레오니드 셰드린에게 1년 동안 배웠다.
Vladimir Sofronitsky in 1914 / 1914년의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
From 1916 to 1921, Sofronitsky studied in the Petrograd (now St. Petersburg) Conservatory under Leonid Nikolayev, where Dmitri Shostakovich, Maria Yudina, and Elena Scriabina, the eldest daughter of the deceased Alexander Scriabin, were among his classmates. Maria Yudina would report that he was already playing with remarkable interpretive insight and virtuosic skills. Sofronitsky also took classes in composition at the conservatory from Maximilian Steinberg, a pupil of Rimsky-Korsakov. He was best known as an interpreter of the Russian composer Alexander Scriabin, whose daughter he married. He met Elena Alexandrovna Skryabina (1900-1990), the eldest daughter of the composer Alexander Scriabin in 1917 and married her in 1920. While he had already divulged a sympathy for the piano music of the recently deceased mystic composer - as attested by Yudina - he now had a greater intellectual and emotional connection to Scriabin's works through his wife and through the Scriabin in-laws. Sofronitsky was also acclaimed as an outstanding pianist by the composer Alexander Glazunov and the musicologist and critic Alexander Ossovsky. His performances were highly esteemed by Heinrich Neuhaus, Vladimir Horowitz and Egon Petri, as well as by former classmates Maria Yudina and Dmitry Shostakovich. His other pupils at the Conservatory at this time included Vladimir Horowitz and Simon Barere, with whom Sofronitsky played two-piano recitals.
1916~1921년 소프로니츠키는 페트로그라드(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레오니드 니콜라예프를 사사했다. 페트로그라드 음악원에서 그의 급우들 중에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마리아 유디나, 엘레나 스크리아비나(고인이 된 알렉산더 스크리아빈의 장녀)가 있었다. 마리아 유디나는 그가 이미 놀라운 연주의 통찰력과 거장적인 기교로 연주하고 있었다고 보고하곤 했다. 소프로니츠키는 음악원에서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제자였던) 막시밀리안 스타인베르크로부터 작곡 수업을 듣기도 했다. 그는 러시아 작곡가 스크리아빈의 해석자이자 스크리아빈의 딸과 결혼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1917년에 스크리아빈의 맏딸 엘레나 알렉산드로프나 스크리아비나(1900~1990)를 만났고 1920년에 결혼했다. 그가 이미 최근에 고인이 된 신비주의 작곡가의 피아노 음악에 대한 동정을 언급한 동안 - 유디나에 의한 증언으로서 - 그는 현재 스크리아빈의 딸과 장인 스크리아빈을 통하여 스크리아빈의 작품들에 대해서 더 지적이고 감정적인 관계를 가졌다. 소프로니츠키는 작곡가 알렉산더 글라주노프와 음악학자 겸 비평가인 알렉산더 오소프스키에 의해 뛰어난 피아니스트로 찬사 받았다. 그의 연주들은 이전의 급우들이었던 마리아 유디나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뿐만 아니라 겐리흐 네이가우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에곤 페트리에 의해 높이 평가받았다. 당시에 소프로니츠키와 같은 음악원을 다녔던 다른 사람들로는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소프로니츠키와 2대의 피아노를 위한 리사이틀을 가졌던) 시몬 바레레가 있었다.
Although he had played in public in Warsaw as a child, Sofronitsky began his adult concert career in 1919 (He gave the first solo concert in St. Petersburg Music School No. 6 on 26 May 1919.) whilst still a student and the following year married class-mate Elena Scriabina, the daughter of Alexander Scriabin. A son was born a year later, to whom Glazunov became godfather. In the year of his marriage, Sofronitsky gave his first recital solely of the music of Alexander Scriabin to commemorate the fifth anniversary of the composer's death and played his Piano Concerto at his graduation concert. In 1922 Sofronitsky played the piano part in a performance of Scriabin's Prometheus conducted by Nikolai Malko. He gave the first solo concert in the Great Hall of the Petrograd Philharmonic on 24 May 1922.
그는 어린 시절 바르샤바에서 대중 앞에서 연주했지만 1919년에 성인으로서의 연주 경력을 시작했다. (1919년 5월 26일 상트페테르부르크 제6음악학교에서 첫 독주회를 가졌다.) 1920년에는 알렉산더 스크리아빈의 딸인 학교 동기 엘레나 스크리아비나와 결혼했다. 1921년에는 아들이 태어났고, 글라주노프가 아들의 대부가 되었다. 결혼 생활 동안 소프로니츠키는 작곡가 타계 5주기를 추모하기 위해 알렉산더 스크리아빈의 음악으로만 리사이틀에서 연주했고 졸업 연주회에서 스크리아빈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했다. 1922년 소프로니츠키는 니콜라이 말코의 지휘로 스크리아빈의 <프로메테우스>의 피아노 파트를 연주했다. 1022년 5월 24일에는 페트로그라드 필하모닉 대강당에서 첫 독주회를 가졌다.
Vladimir Sofronitsky in 1928, painted by Emil Wiesel /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 1928년 에밀 비젤 그림.
Sofronitsky graduated from the conservatory in 1921, giving, among other works in his recital, a performance of the Liszt Sonata in B minor, which much of the faculty and student body found both thrilling and thought-provoking. Throughout most of the 1920s, Sofronitsky built up a brilliant career as a concert pianist in Russia. His first tour abroad came on 8 March 1928 and after playing in Paris, he decided to stay on. In the end, he remained two years, then returned to his Leningrad. Sofronitsky joined the faculty at the Leningrad Conservatory in 1936 and remained there until the Nazis' infamous siege of the city. In June 1938 he received the scientific degree of Doctor of Music. He escaped by plane to Moscow in 1942 and immediately began teaching at the conservatory there. He gave many performances at the Scriabin Museum in Moscow, especially during the latter part of his career. He gradually developed alcohol and drug addictions, and in his last years his pianistic skills declined noticeably.
소프로니츠키는 그의 졸업 연주회에서 리스트 소나타 외에 다른 작품들을 연주하면서 1921년 음악원을 졸업했는데, 교수진과 학생 대다수는 모두 황홀해했고 진지하게 생각했다. 1920년대에 걸쳐 소프로니츠키는 러시아에서 콘서트 피아니스트로서 화려한 경력을 착수했다. 그의 첫 해외 투어는 1928년 3월 8일부터였고, 이후에도 파리에서 연주하면서 머물기로 결정했다. 결국 그는 2년 동안 머물렀고, 이후 레닌그라드로 돌아왔다. 소프로니츠키는 1936년 레닌그라드 음악원 교수가 되었고 나치의 악명 높은 도시 공격이 발생할 때까지 거기에 남았다. 1938년 6월에 그는 음악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1942년에 비행기로 모스크바로 탈출했고 거기에 있는 음악원에서 곧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는 모스크바의 스크리아빈 박물관에서, 특히 그의 경력의 후반부 동안 많은 연주를 가졌다. 그는 점점 알코올과 약물 중독이 되었고, 말년에 그의 피아니스틱한 기교들은 눈에 띄게 쇠퇴했다.
During the 1920s Sofronitsky gave a large number of concerts in Russia, and in 1928 he and his wife visited Warsaw on their way to Paris where they spent two years, becoming friendly with Sergei Prokofiev and Nikolai Medtner. In Warsaw, Sofronitsky gave a concert and met with his teacher Aleksander Michałowski, then moved to Paris, attending concerts of Rachmaninov, Feodor Chaliapin, Ignacy Jan Paderewski, Walter Gieseking and others.
1920년대 동안 소프로니츠키는 러시아에서 많은 콘서트를 가졌고, 1928년 그와 그의 아내는 파리로 가는 도중에 바르샤바를 방문했다. 그들은 파리에서 2년 동안 보냈고,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와 니콜라이 메트너와 가까워졌다. 바르샤바에서 소프로니츠키는 콘서트를 가졌고 그의 스승 알렉산데르 미하워프스키를 만났고 파리로 이동했는데, 파리에서 가졌던 콘서트에는 라흐마니노프, 오페라 가수 표도르 샬리아핀,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 피아니스트 발터 기제킹 등이 참석했다.
Sofronitsky returned to Leningrad on 27 January 1930 but had by now separated from his wife. The following years were spent broadening his already wide repertoire considerably. Sofronitsky's name would forever be linked with Scriabin, but he was now playing the Viennese classics, Baroque music, works by Schumann and music of the composers he had met in France. He only appeared in the West on one occasion, when he was suddenly put on an airplane and sent by Stalin to play at the Potsdam conference in 1945.
소프로니츠키는 1930년 1월 27일 레닌그라드로 돌아왔지만 그의 아내와 떨어졌다. 1931년에는 그의 이미 폭넓은 레퍼토리를 상당히 넓히는 데에 소비했다. 소프로니츠키의 이름은 스크리아빈과 함께 영원히 연결될 것이었지만, 그는 비엔나 클래식, 바로크 음악, 슈만의 작품들, 프랑스에서 그가 만났던 작곡가들의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가 서방에 유일하게 등장한 적이 딱 한 번 있었는데, 1945년 포츠담 회담에서의 연주를 위해 스탈린에 의해 급히 비행기에 태워 보내졌다.
Vladimir Sofronitsky at the piano, painted by Pyotr Konchalovsky 1932 / 피아노 앞의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 1932년 표트르 콘찰로프스키 그림.
In the 1937–1938 season Sofronitsky gave a series of twelve recitals encompassing the history of keyboard music from Buxtehude to Shostakovich. Nothing had been heard like it in Russia since the great days of Anton Rubinstein's famous Historic Recitals. In 1939 he became a Professor at the Leningrad Conservatory. At the beginning of the Second World War he was trapped in Leningrad in autumn 1941, where on 12 December 1941 he played a concert at the hall of the Pushkin Theater at -3C, wearing gloves with the fingers cut off: "But how I played!" He recalled. In April 1942 he was evacuated via the "Air Bridge" from starving Leningrad, and brought to Moscow where he lived with his estranged wife and children.
1937~1938 시즌에 소프로니츠키는 북스테후데부터 쇼스타코비치까지 건반 음악사를 망라하는 12회의 리사이틀 시리즈를 가졌다. 안톤 루빈스타인의 유명한 <역사적인 리사이틀>의 중요한 날들 이후로 러시아에서 그와 같은 연주는 없었다. 1939년 그는 레닌그라드 음악원 교수가 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했을 때 1941년 가을에 그는 레닌그라드에 갇혔고, 1941년 12월 12일 손가락이 잘린 장갑을 끼고 영하 3도의 날씨에 푸쉬킨 극장에서 콘서트를 가졌다. - “그러나 나는 연주했다!”고 그는 회상했다. 1942년 4월 그는 굶주리는 레닌그라드로부터 <에어 브리지>를 경유하여 대피했고 모스크바에 도착했으며, 그의 별거 중이었던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살았다.
In November 1942 he became a professor at the Moscow conservatory, where he met and later married his student, Valentina Duschinova (Sofronitsky). He played concerts mostly in Moscow, and, after the war, in Leningrad, becoming widely regarded as the best pianist in Russia. In 1949 he gave five recitals of Chopin's works on consecutive nights in the Great Hall of the Moscow Conservatory to mark the centenary year of the Polish composer's death. In 1953, to mark the 125th centenary of Schubert's death, Sofronitsky gave a recital devoted to the Viennese composer's works. Sofronitsky was a highly inspired performer, and each of his performances was regarded as a unique event. His performances at the time were called the fans of his art differently: "musical hypnosis", "poetic nirvana", "spiritual liturgy." He hated recordings and regarded them as "my corpses", nevertheless his live recordings give a sense of his astonishing musical power.
1942년 11월, 그는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가 되었고 나중에 결혼하게 되는 그의 제자 발렌티나 두쉬노바 (소프로니츠키)를 만났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대부분 콘서트를 가졌고, 전쟁 이후 레닌그라드에서 러시아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널리 알려졌다. 1949년 그는 모스크바 음악원 대강당에서 폴란드 작곡가 타계 100주기를 기념하기 위해 모스크바 음악원 대강당에서 연이어 5회의 쇼팽 리사이틀을 가졌다. 1953년에는 슈베르트 타계 125주기를 기념하기 위해 비엔나 작곡가의 작품으로 헌정된 리사이틀을 가졌다. 소프로니츠키는 매우 탁월한 연주자였고, 그의 연주들은 각각 독특한 이벤트로 간주되었다. 당시 그의 연주들은 그의 팬들로부터 “음악적인 최면 상태”, “시적인 해탈”, “성스러운 예배식” 등 다양하게 불렸다. 그는 녹음을 싫어했고 그것들을 “나의 시체들”로 여겼지만, 그럼에도 그의 실황 녹음들은 그의 깜짝 놀랄 만한 음악적인 힘의 감각을 느끼게 한다.
A solitary figure, Vladimir Sofronitsky hated teaching at the Moscow Conservatory and rarely became close to his associates. He lived in a private world of music and avoided intrigues. Simple and sensitive as a child, he spent a secluded life among his closest friends. Audiences at his concerts would often perceive some kind of revelation or magic in his performances, particularly in the music of Scriabin. He was undoubtedly one of the greatest of Russian pianists, and it was only his inability to perform in the West and his death at a comparatively early age that prevented his name gaining the recognition it deserved. Despite his attitude of non-participation - and thus only for his music performances - he was awarded the highest decoration in Russia: The Order of Lenin on 28 December 1946.
고독한 인물 소프로니츠키는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가르치는 것을 싫어했고 그의 동료들과 거의 가깝지 않게 되었다. 소프로니츠키는 개인적인 음악 세계에 빠져 살았고 관심을 피했다. 그는 그의 가까운 친구들 사이에서 남들과 거의 접촉을 하지 않는 단순하고 예민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콘서트에서 청중들은 종종 그의 연주, 특히 스크리아빈의 음악에서 발현 또는 마법의 일종을 목격했다. 그는 의심의 여지없이 러시아의 위대한 피아니스트들 중의 한 명이고, 서방에서 연주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뿐이며, 마땅히 인정받는 것을 방해한 것은 비교적 이른 나이에 사망한 것이었다. 그의 무관심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 그렇게 그의 음악 연주들에 대해서 유일했지만 - 그는 1946년 12월 28일 러시아에서 최고 훈장인 레닌 훈장을 받았다.
Sofronitsky led an active concert life until his last years. His last year of concert activity was 1960. His final performance took place on January 9, 1961, in the Small Hall of the Moscow Conservatory. He died from cancer on 29 August 1961. He was buried at the Novodevichy cemetery (plot number 8) in Moscow on 31 August 1961. He had children from his first marriage - Alexander (born in 1921) and Roxana (born in 1937), the second - Viviana (born in 1960).
소프로니츠키는 그의 말년까지 활발한 연주 인생을 보냈다. 그의 마지막 연주 활동은 1960년이었다. 그의 마지막 연주는 1961년 1월 9일로, 모스크바 음악원 소강당에서였다. 그는 1961년 8월 26일 모스크바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그는 1961년 8월 31일 모스크바 노보데비치 묘지 8번 자리에 묻혔다. 유족으로는 첫 번째 아내에게서 태어난 알렉산더(1921년생)과 록사나(1937년생), 두 번째 아내에게서 태어난 비비아나(1960년생)가 있었다.
His daughter (through his second wife) is the Canadian classical pianist Viviana Sofronitsky. / (두 번째 아내 사이에서 태어난) 그의 딸은 캐나다의 클래식 피아니스트 비비아나 소프로니츠키이다.
Sofronitsky's health had deteriorated as a result of a heart condition and the privations he had experienced during World War II. In 1954 he gave his last performance in Leningrad and the following year his last in the Great Hall of the Moscow Conservatory. During the last few years of his life Sofronitsky gave concerts in the more intimate surroundings of the Scriabin Museum and Small Hall of the Moscow Conservatory. During 1957 he was too ill to perform, but was back on stage the following year; however 1959 saw him bed-ridden again and cancer was diagnosed. Knowing that time was short for him, Sofronitsky played nine recitals in ten weeks from October to December 1959. It is often reported that in his final years Sofronitsky became addicted to drugs and alcohol, but little or no evidence has been supplied to support this. He was only sixty when he died.
소프로니츠키의 건강은 2차 세계대전 동안 경험했던 심장 질환과 궁핍함으로 인해 악화되었다. 1954년 레닌그라드에서 그의 마지막으로 연주했고 1955년 모스크바 음악원 대강당에서 마지막으로 연주했다. 인생의 말년에 소프로니츠키는 스크리아빈 박물관과 모스크바 음악원 소강당의 더 친숙한 환경에서 콘서트를 가졌다. 1957년 동안 그는 너무 아파서 연주할 수 없었지만, 1958년 무대로 복귀했다. - 그러나 1959년 다시 침대에 몸져누웠고 암이 진단되었다. 그 시기가 그에게 짧다는 것을 알면서, 소프로니츠키는 1959년 10월~12월에 10주 동안 9회의 리사이틀을 가졌다. 소프로니츠키가 말년에 약물과 알코올 중독이 되었다고 종종 보고되었지만, 이것을 지지하기 위해 제공된 증거가 적거나 없다. 그는 불과 60세에 사망했다.
Sofronitsky made a fair number of recordings in the last two decades of his life, but a relatively small number overall compared with the titanic efforts of his younger countrymen Sviatoslav Richter and Emil Gilels. Drawn principally to Romantic repertoire, Sofronitsky recorded a large number of Scriabin works and also compositions by Beethoven, Schubert, Chopin, Schumann, Liszt, Lyadov, Rachmaninoff, Medtner, Prokofiev, and others.
소프로니츠키는 그의 인생의 마지막 20년 동안 상당수의 녹음을 남겼지만, 그보다 더 어린, 같은 나라 사람들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와 에밀 길렐스의 엄청난 성과들과 비교해서 전체적으로 소수이다. 낭만파 레퍼토리가 주를 이루는 그는 스크리아빈의 작품들을 많이 녹음했고 베토벤, 슈베르트, 쇼팽, 슈만, 리스트, 리아도프, 라흐마니노프, 메트너, 프로코피에프 등의 작품들도 녹음했다.
Repertoire
Having met Scriabin's daughter only after her father's death, Sofronitsky never met the composer. Nevertheless, his wife vouched that the pianist was the most authentic interpreter of her late father's works. The other composer with whom Sofronitsky had the greatest affinity is Frédéric Chopin. He once told an interviewer: "A love for Chopin has followed me through the course of my entire life." Beyond Chopin and Scriabin, Sofronitsky had a wide repertoire spanning major composers from Johann Sebastian Bach to Nikolai Medtner and reaching as far as the works of Boris Goltz (1913–1942), with a focus on 19th-century Romantic composers and early 20th-century Russians.
스크리아빈의 사후에 스크리아빈의 딸과 만남을 가졌지만, 소프로니츠키는 작곡가를 결코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의 아내는 이 피아니스트가 그녀의 작고한 아버지의 작품들의 가장 믿음직한 해석자라고 인정했다. 소프로니츠키가 가장 좋아했던 다른 작곡가는 쇼팽이다. 그는 인터뷰 진행자에게 한 번 말한 적이 있었다. “쇼팽에 대한 사랑은 제 전체 인생의 과정을 통하여 저를 따라왔습니다.” 쇼팽과 스크리아빈을 넘어, 소프로니츠키는 19세기 낭만파 작곡가들과 20세기 초 러시아 작곡가들에 대한 집중과 함께, 보리스 골츠(1913~1942)의 작품들만큼 먼 것에 도달하면서 바흐부터 메트너까지 주요 작곡가들의 레퍼토리까지 뻗어있었다.
Recognition and recordings / 인정과 녹음들
Sofronitsky was held in the highest esteem by his colleagues, including Sviatoslav Richter, Emil Gilels and Heinrich Neuhaus. He was a friend of Prokofiev and Shostakovich, and had a profound influence upon many Russian musicians, from Vladimir Horowitz to Evgeny Kissin.
소프로니츠키는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에밀 길렐스, 겐리흐 네이가우스를 포함한 그의 동료들로부터 높이 평가받았다. 그는 프로코피에프와 쇼스타코비치의 친구였고,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부터 에프게니 키신까지 많은 러시아 음악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Although little known in the West, never having toured or recorded there, Sofronitsky was held in the highest regard in his native land. Sviatoslav Richter and Emil Gilels looked up to Sofronitsky as their master, and famously, when Sofronitsky once drunkenly proclaimed that Richter was a genius, in return Richter toasted him and proclaimed him a god. Upon hearing of Sofronitsky's death, Gilels was reputed to have said that "the greatest pianist in the world has died."
투어나 녹음을 가지지 않았던 서방에 덜 알려져 있었지만, 소프로니츠키는 그의 조국에서는 높이 여겨졌다.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와 에밀 길렐스는 소프로니츠키를 그들의 참된 스승으로 추앙했고, 유명한 일화로 소프로니츠키가 취해서 리히터가 천재라고 외쳤더니 답례로 리히터가 그에게 건배를 했고, 그를 신이라고 추앙했다. 소프로니츠키의 부고에 대한 소식을 듣고, 길렐스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사망했다”고 평가했다.
Sofronitsky's recordings have not been issued systematically in the West. One noteworthy release, in BMG's "Russian Piano School" series, contains a complete concert, including a mercurial and highly praised account of Schumann's Piano Sonata No. 1, Op. 11. His issue in Philips' Great Pianists of the Twentieth Century features Chopin mazurkas and waltzes on the first CD and some of his legendary Scriabin on the second, including the 2nd (first movement), 3rd, 4th, and 9th sonatas and a performance of Vers la flamme. Denon Classics' (Japan) Vladimir Sofronitsky Edition is a series of 15 CDs, ten of which remain in print. Other Sofronitsky recordings have been issued by such labels as Arkadia, Arlecchino, Chant du Monde, Multisonic, Urania, and, most notably, Vista Vera, which has released seventeen volumes of Sofronitsky recordings as of April, 2010.
소프로니츠키의 녹음들은 서방에서는 체계적으로 출반되지 않았다. 주목할 만한 발매 음반인, BMG 레이블의 <러시안 피아노 스쿨> 시리즈는 변덕스럽고 극찬 받은 슈만 피아노 소나타 1번 연주를 포함하여 모든 콘서트를 수록한다. 그의 필립스 레이블 <20세기의 위대한 피아니스트들> 시리즈는 첫 CD에서 쇼팽 마주르카와 왈츠, 두 번째 CD에서는 그의 전설적인 스크리아빈 소나타 2번 1악장, 3번 소나타, 4번 소나타, 9번 소나타, <불꽃을 향하여>를 포함한다. 일본 데논 클래식스 레이블의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 에디션은 15장 시리즈이고 인쇄된 것이 10부가 남아 있다. 다른 녹음들은 아르카디아, 아를레키노, 샹 뒤 몽드, 멀티소닉, 우라니아, 비스타 베라(2010년 4월 17개의 볼륨 발매) 레이블에서 나왔다.
He was awarded a Stalin Prize of the first class for a concert and performing activities on 19 March 1943 and proclaimed an Honoured Artist of the RSFSR in 1942.
콘서트와 연주 활동으로 1943년 3월 19일 스탈린 1급 훈장 수상 및 1942년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공훈예술가.
Vladimir Sofronitsky was among the greatest Russian pianists of the twentieth century, and, while he had become a somewhat less prominent figure following his death, he must be still considered in the company of Richter, Gilels, and Yudina. In his time, Sofronitsky became widely recognized as the leading interpreter of and authority on the music of Scriabin in Eastern Europe. He was also highly praised for his interpretations of the piano works of Robert Schumann and he was a highly respected teacher.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는 20세기의 위대한 러시아 피아니스트들 중의 한 명이다. 반면에 그는 사후에 덜 저명한 인물이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리히터, 길렐스, 유디나와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소프로니츠키가 살아있을 당시에 동유럽에서 스크리아빈 음악의 뛰어난 해석자이자 권위자로 널리 인정받았다. 그는 슈만 작품 연주로도 극찬 받았고 높이 존경받는 교육자였다.
Sofronitsky made a fair number of recordings in the last two decades of his life, but a relatively paltry number compared with the efforts of Richter and Gilels. Not surprisingly, Sofronitsky recorded a large number of Scriabin works and also compositions by Chopin, Rachmaninov, Schumann, Prokofiev, and others. His recorded performances from the 1940s are generally more representative than those from the last decade.
소프로니츠키는 그의 인생 후반 20년 동안 상당수의 녹음들을 남겼지만, 리히터와 길렐스의 성과와 비교해서 얼마 안 된다. 놀랄 것도 없이, 소프로니츠키는 스크리아빈의 많은 작품들을 녹음했고 쇼팽, 라흐마니노프, 슈만, 프로코피에프 등의 작품들도 녹음했다. 그의 1940년대 연주 녹음들은 일반적으로 마지막 10년의 녹음들보다 더 대표적이다.
In his time Sofronitsky was considered to be the greatest pianist in Russia, a "living legend". Every Sofronitsky recital was a spiritual event for the public. He was a true poet of the piano, full of improvisatory spirit and inspiration. He had an all-encompassing technique and his playing embodied a wide range of colors and textures, but these things could be said about many first rate pianists. When at his best Sofronitsky's music making seemed to transcend the bounds of normal expression and enter a new realm in which his every emotion would project from within the music and onto his audience. It is this indefinable spirituality of his playing that sets him apart.
소프로니츠키가 살아있을 때 러시아에서 위대한 피아니스트, “살아있는 전설”로 여겨졌다. 소프로니츠키의 모든 리사이틀은 대중에게 성스러운 이벤트였다. 그는 즉흥적인 영혼과 영감으로 가득 찬 피아노의 진정한 시인이었다. 그는 모두를 아우르는 테크닉을 가졌고 그의 연주는 폭넓은 색깔들과 구조들을 표현했지만, 이러한 것들은 많은 일류 피아니스트들에 대해서 말해질 수 있었다. 소프로니츠키가 음악 만들기에 최선을 다할 때는 정상적인 표현의 선을 초월하고 그의 음악과 그의 청중으로부터 구상하는 그의 모든 감정에 있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이것은 그를 돋보이게 만드는 그의 연주의 정의하기 힘든 정신적인 것이다.
Sofronistky made his first commercial recordings in June 1937, but most of his recordings from the 1950s and 1960s come from live performances. As he never performed or recorded outside Russia after his tour in France in 1929, Vladimir Sofronitsky's art remained unknown to the Western public until recent years, when some of his recordings started to appear. Unfortunately, his recordings have not been issued systematically in the West.
소프로니츠키는 1937년 6월 첫 상업 녹음을 했지만, 1950년대와 1960년대 녹음의 대부분은 실황이다. 1929년 프랑스 투어 이후 그가 러시아 외부에서 연주하거나 녹음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의 예술은 그의 녹음 중 일부가 나타날 때까지 서방의 대중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었다. 불행하게도 그의 녹음들은 서방에서 체계적으로 출반되지 않았다.
Interesting facts / 흥미로운 사실들
Sofronitsky was also known as the author of palindromes - phrases-shifters that can be read the same way at the end and the beginning. Some of his findings: "Do not send Chopin", "A Leaf - force", "Hill", thin it, but the spirit of lih", "David, go to hell!", "He's in hell for a long time", "Lesch on the shelf bug found", "he sang about Kiel great", "Argentina beckons Negro", "great is Anna like a lion", "But the invisible angel, frost pattern went to the temple, and Wondrous is he", "great Oborin, he was shy and Leo", and many others.
소프로니츠키는 또한 회문(回文: madam이나 nurses run처럼 앞에서부터 읽으나 뒤에서부터 읽으나 동일한 단어나 구)의 저자로도 유명했다. (러시아어를 번역한 것이라서 예는 생략)
2000년 7월 27일 (목) KBS FM 이미선의 가정음악 - 음악원고 <전설 속의 피아니스트 1>
스크리아빈의 연주의 최고 권위자를 들라면 그 누구보다도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알렉산더 골덴바이저나 겐리크 네이가우스. 그리고 얼마 전 타계한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와 에밀 길렐스의 사이를 잇는 중간세대의 피아니스트로, 마리아 유디나, 그리고 사무일 파인베르그(Feinberg)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피아니스트였지요.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는 주로 활동했던 시기가 러시아에서는 가장 탄압이 심했던 스탈린 체제하였기 때문에 서방세계에는 비교적 덜 알려진 피아니스트이지만 그의 음악이 지닌 가치는 이런 모든 제약을 넘어설 만큼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1901년 5월 8일 러시아의 상트 페쩨르부르그에서 물리학자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소프로니츠키는 그의 가족이 1903년 폴란드 바르샤바로 이주하는 바람에 최초의 피아노 교육을 폴란드의 피아니스트 레베데바-게체비치에게서 받게 됩니다. 이때부터 소프로니츠키는 상트 페쩨르부르그 음악원의 교장을 지내고 있던 작곡가 글라주노프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는데, 글라주노프는 그를 곧 폴란드의 명 피아니스트이자 쇼팽의 해석가로 유명한 알렉산더 미하일로프스키에게 보내어 그에게서 피아노 수업을 받게 하지요. 1913년 다시 상트 페쩨르부르그로 이사한 소프로니츠키는 레오니드 니콜라예프와 막시밀리안 스타인베르그 문하에서 수업을 마치게 됩니다.
1920년에 스크리아빈의 서거 5주년을 기념해서 스크리아빈의 작품만으로 최초의 리사이틀을 개최했고, 졸업 연주 때에도 스크리아빈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했고, 또 독주 피아노 파트가 난해하기로 유명한 스크리아빈의 “불의 시(프로메테우스)”를 니콜라이 말코의 지휘로 협연하여 잊지 못할 연주를 들려주었던 것도 바로 그 시절이었습니다. 1921년 소프로니츠키는 마리아 유디나와 공동으로 안톤 루빈슈타인 상을 수상하며 졸업을 하는데, 당시 모스크바에서 그는 이미 널리 알려진 피아니스트가 되어 버렸지요.
“참된 예술은 일곱 겹으로 된 갑옷으로 억제된, 붉게 끓어오르는 용암과도 같은 것이다”라는 그의 표현처럼, 그의 연주는 낭만적이고 음악적 영감이 풍부하면서도 또 빈틈이 없고 정확하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쓸데없는 과장이나 진부함이 전혀 없어 정확하면서도 자연스럽습니다.
2000년 7월 28일 (금) KBS FM 이미선의 가정음악 음악원고 <전설 속의 피아니스트 2>
러시아 전역을 돌며 정열적인 연주회를 개최하고 글라주노프, 라흐마니노프, 샬리아핀, 코르토, 네이가우스, 니콜라이 메트너, 프로코피에프와 교분을 쌓기 시작한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는 1930년 상트 페쩨르부르그로 돌아옵니다.
상트 페쩨르부르그로 돌아온 소프로니츠키는 독일과 빈의 거장들의 작품은 물론이고, 이탈리아의 바로크 작곡가인 스카를라티로부터, 프랑스의 현대 작곡가인 프란시스 풀랑크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작품들을 그의 연주 레퍼토리로 삼게 됩니다. 1937년부터 1938년 사이 그가 개최했던 열 두 번의 전설적인 연주회에서는 북스테후데에서부터 쇼스타코비치에 이르는 넓은 레퍼토리를 포함하고 있었지요.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소프로니츠키는 상트 페쩨르부르그 음악원에서 교편을 잡고 연주활동도 활발히 하게 됩니다. 하지만 1941년 상트 페쩨르부르그가 독일군에게 포위되면서 그의 연주활동은 크게 위축됩니다. 그는 그 시절의 연주회를 이렇게 회상하지요.
“푸쉬킨 극장의 연주회장은 실내온도가 영하 3도까지 떨어져 있었고, 모든 청중은 두꺼운 털코트를 입고도 덜덜 떨고 있었습니다. 나는 손이 얼어붙어 장갑을 끼고 연주해야만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중들은 얼마나 연주에 도취해 있었는지, 그리고 나도 훌륭히 연주를 할 수 있었지요.”
1942년 요양차 모스크바로 거처를 옮긴 소프로니츠키는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로 정착하게 되고, 1946년 레닌 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1954년부터는 대도시의 큰 공연장을 피해 시골의 작은 공간에서 소수의 청중과의 만남을 위해 모스크바를 떠나 러시아 전역을 여행하게 되지요.
1959년 몇 달 간 몸져누웠으나 다시 레코딩 작업과 연주에 몰두한 소프로니츠키는 1960년 12월 5일 모스크바 음악원 소강당에서, 1961년 1월 7일에는 스크리아빈 탄생 89주년을 맞아 스크리아빈 박물관에서 연주회를 개최합니다. 그러나 1월 9일 모스크바 음악원에서의 연주를 끝으로 다시는 청중 앞에 서지 못했고 1961년 8월 29일 약물 과다 복용으로 60세의 생애를 마감합니다.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는 골덴바이저나 네이가우스와는 달리 활동을 소련 당국으로부터 심하게 규제되고 검열받았습니다. 당대 소비에트 최고의 피아니스트였음에도 불구하고 해외여행은 극히 제한적으로만 허용되었구요, 그리고 그것은 후기로 갈수록 점점 더 심해져서 그의 존재는 서구 음악계에서 완전히 잊히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최근에 와서 그의 음반이 CD로 복각되고 그의 연주의 가치가 높이 인정되면서 수많은 그의 음반들이 전 세계에 소개되고 있지요.
KBS FM 당신의 밤과 음악 - 허원숙의 <피아니스트 플러스> 코너 2007년 7월 7일 원고...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 (1) “피아노의 신”
이 시간에 많은 천재 피아니스트들을 소개해 드렸는데요, 오늘은 천재를 넘어서 피아노의 신이라는 찬사를 받은 피아니스트의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러시아의 피아니스트라면 골덴바이저, 네이가우스의 세대와 그 후의 에밀 길렐스,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 세대가 있는데 그 사이를 잇는 중간세대에 속한 피아니스트입니다.
리히터와 길렐스는 이 사람을 그들의 master, 참된 스승이라고 추앙했고요, 리히터는 특히나 이 분을 신(神)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바로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인데요.
소프로니츠키라면 우선, 스크리아빈의 최고의 해석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호로비츠도 스크리아빈의 연주가 탁월하지만, 특히나 소프로니츠키에게는 호로비츠에게서는 찾기 힘든 어둡고 부서질 것 같은 섬세한 우수가 담겨있지요.
그렇게 되기까지, 소프로니츠키는 어린 시절부터 스크리아빈의 추종자였었고, 1920년에는 스크리아빈의 서거 5주년 기념으로 스크리아빈의 곡만으로 그의 첫 독주회를 꾸밀 만큼 스크리아빈을 사랑한 피아니스트였는데, 또한 스크리아빈의 맏딸 엘레나 스크리아비나와 결혼을 해서 명실상부한 스크리아빈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장인의 사위 사랑이 대단했겠구나 하고 생각하시겠지만, 스크리아빈은 소프로니츠키가 14살이었을 때 이미 저 제상으로 떠났으니까 장인과 사위의 직접적인 대면은 없었던 거죠.
소프로니츠키라면 아주 낯선 피아니스트로 여겨지는데, 그 이유는 소프로니츠키가 활동했던 시기가 러시아에서는 가장 탄압이 심했던 스탈린시대였기 때문이었죠. 그런 시대에 연주가로서 활동을 하다보니 거의 러시아 안에만 갇혀서 활동을 해서 서방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태로 생애를 마쳤는데, 이 분이 다시 조명을 받기 시작한 것은 그의 훌륭한 연주를 담은 실황 음반이 서방으로 전해지면서 시작되어서 비로소 사후에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소프로니츠키는 1901년 5월 8일 러시아의 상트 페쩨르부르그에서 태어났는데요, 아버지는 물리학 선생님이셨고, 어머니는 유명한 초상화가인 블라디미르 보로비코프스키의 손녀였다고 합니다. 러시아에서 태어났는데 2살 때 가족이 바르샤바로 이주하는 바람에 바르샤바의 유명한 피아노 교사인 레베데바-게체비치에게서 최초의 피아노 수업을 받았습니다.
어린 소프로니츠키의 재능은 당시 상트 페쩨르부르그 음악원의 교장이면서 작곡가였던 글라주노프의 눈에 띄어서 글라주노프는 소프로니츠키에게 아주 좋은 선생님을 소개했는데, 그 분이 바로 당시 폴란드의 명 피아니스트이자 쇼팽의 해석가로 유명한 알렉산더 미카일로프스키이죠. 9살 때부터 미카일로프스키에게 피아노 수업을 받은 소프로니츠키가 후에 쇼팽의 탁월한 해석가가 된 것은 두말 할 나위가 없겠죠?
하지만 1913년에 가족들이 다시 상트 페쩨르부르그로 이주해서 소프로니츠키는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중의 2년간을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셰드린에게 배운 후에 1916년 상트 페쩨르부르그 음악원에서 명교사 니콜라예프 문하에서 수업을 마치게 됩니다. 당시의 니콜라예프의 클래스에는 얼마 전에 소개해 드린 마리아 유디나도 있었고요, 또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도 같이 있었는데, 선생님의 소프로니츠키에 대한 사랑이 각별해서 쇼스타코비치의 증언이라는 책에 보면, 질투 나는 장면도 있었다고 해요.
예를 들어서 마리아 유디나와 같은 때 졸업 연주회를 했는데, 둘이 다 똑같이 리스트의 소나타 B 단조를 연주했대요. 소프로니츠키가 등장할 때가 되었는데 니콜라예프 선생님이 무대에 등장해서는, 오늘 소프로니츠키가 몸이 안 좋아서 이해해 달라고 하면서 연주회가 시작되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너무 잘했다는 거예요. 섭섭한 쇼스타코비치는 “나는 지난 번에 목에 기부스하고도 연주했는데, 이렇게 하는 법이 어디 있냐”면서, 아프면 연주를 하지 말던지, 아니면 연주할 거면 아프다 말을 하지 말든지, 동정점수를 받으려는 거냐 뭐냐... 그런 식으로 푸념을 늘어놓는 구절이 있어요. 어쨌든 니콜라예프는 이 애제자 소프로니츠키를 블라디미르의 애칭인 보보쉬카라고 부르면서 각별히 아껴주었다고 하죠.
아무튼 1921년 마리아 유디나와 공동으로 안톤 루빈슈타인 상을 수상하며 음악원을 졸업하고는 곧 연주 활동을 시작했는데, 연주 활동을 시작하자마자 인기가 거침없이 폭발해서 이미 모스크바에서 널리 알려진 피아니스트가 되었다고 합니다.
소프로니츠키의 스크리아빈 연주는 비록 스크리아빈에게는 직접적인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1922년 스크리아빈 소나타 3번을 연주하는 것을 본 스크리아빈의 미망인으로부터 최고의 해석이라는 찬사와 인정을 받음으로 더 빛을 발했는데요, 그 이후에 소프로니츠키는 러시아 전역을 돌면서 정열적인 연주회를 개최했고, 그 이후로는 1928년에 잠시 폴란드에 갔다가 파리에서 약 2년간 머무르면서 많은 연주회를 열어 대성공을 거두고, 글라주노프와 다시 재회하고 라흐마니노프, 샬리아핀 같은 거장의 연주를 듣고 감명을 받고, 알프레드 코르토나 겐리크 네이가우스, 니콜라이 메트너,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같은 작곡가들과 깊은 교분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 이후로는 러시아에만 머물면서 평생을 러시아 안에서만 활동하는 피아니스트가 되었지요. 사실 요즘은 인터넷이나 음반 산업이 발달해서 좀 덜 하긴 하지만, 콘서트 피아니스트라는 직업은 모바일, 기동성이 생명인데요, 이렇게 세계적인 인물이 한 나라, 그것도 폐쇄적인 나라에 갇혀서 평생을 지냈다는 것은 엄청난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KBS FM 당신의 밤과 음악 - 허원숙의 <피아니스트 플러스> 코너 2007년 7월 14일 원고...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 (2) “장갑 끼고, 군복입고...”
1930년 파리에서 돌아온 소프로니츠키는 본격적으로 연주활동을 시작했는데요, 그 레퍼토리가 바로크 작곡가 북스데후데에서부터 시작해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낭만 작곡가 전부, 프랑스의 풀랑크 그리고 스크리아빈,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에프의 곡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시대의 작품을 총망라한 것이었죠. 이런 프로그램을 두고 백과사전적인 연주회 프로그램이라고 말하는데, 당시 이런 레퍼토리를 가진 연주자는 안톤 루빈슈타인이 유일했다고 합니다.
소프로니츠키는 1939년에 상트 페쩨르부르그 음악원에 자리를 잡고, 교육과 연주활동을 병행했는데요, 2차 대전이 일어나면서 1941년에 레닌그라드가 독일군에 포위되면서 상황이 힘들게 되면서 연주활동도 많이 위축이 되어버렸어요.
1941년 12월 12일에 있었던 연주회를 회상하던 소프로니츠키의 말을 들어보면, 연주회가 있었던 푸쉬킨 극장의 연주회장은 실내 온도가 영하 3도였다고 해요. 청중들은 두꺼운 털코트를 입고도 떨면서 연주회장에 앉아있었는데, 소프로니츠키는 피아노를 쳐야하는데 손가락이 얼어붙어서, 손가락 끝을 잘라낸 장갑을 끼고서 연주를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해요. 하지만 놀랍게도 그 연주회는 정말 황홀했고 또 훌륭한 연주회가 되었다고 합니다.
전쟁의 나쁜 상황에서 레닌그라드에서는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했고요, 소프로니츠키는 몸이 극도로 약해져서 요양차 모스크바로 거처를 옮겼는데, 1943년부터는 모스크바 음악원에 교수로 임명되어서 음악활동을 계속할 수 있게 되지요.
하지만 아무리 활동을 할 수 있다고 해도, 당시의 러시아는 정말 참담하기 이를 데가 없었지요, 쇼스타코비치의 증언이라는 책을 보면, 예술가라는 사람들은 정치가들이 자기들의 필요에 의해서 평생을 이용당하는 사람들이라고 쓰여 있고요, 또 자신이 마음속에 감춰둔 속내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는지가 잘 나와 있는데, 사실 그 책도 쇼스타코비치가 자신의 사후에 출판하기를 원해서 책의 원고를 스위스 은행 금고에 몰래 감춰두었다가 출판했다는 것을 보면, 얼마나 당시 상황이 힘들었는지 알 수 있죠. 소프로니츠키도 바로 이 시대의 사람이었는데요.
1945년 스탈린은 소프로니츠키에게 명령을 합니다. 포츠담 회의에 참석해서 연주를 하고 오라는 것이었죠. 거역할 수 없는 스탈린의 명령을 받은 소프로니츠키는 군복을 입고 포츠담에 가야만 했구요, 당연히 군인 복장으로 연주를 해야만 했지요. 그리고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와서는 그 일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해요.
사무엘 파인베르그, 마리아 유디나와 더불어 스탈린 시대의 러시아를 대표하는 명피아니스트 소프로니츠키는 1946년 레닌상을 수상했고요, 1954년부터는 대도시의 큰 연주회장을 벗어나서 시골의 작은 공간에서 소수의 청중들을 위해서 연주회를 개최하면서 러시아 전역을 여행하기 시작했고요, 그 때부터 숨지기 직전까지 인기가 절정이었는데요.
이렇게 연주가로서의 삶을 산 소프로니츠키의 인생은 정말 행복했을까...
소프로니츠키는 어떤 돌출행동을 할 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는 점에서 마리아 유디나와 닮았다고들 말을 하죠. 알코올, 마약, 복잡한 남녀관계, 또 그 밖에도 성가신 일들이 그의 삶에 다 들어있었고요, 그러다보니까 어떤 때에는 공연 전에 코냑 한 병을 다 마시고 나가떨어지기도 했다고 해요. 연주회는? 물론, 취소되었죠.
이렇게 무절제한 순간도 있었지만, 소프로니츠키는 겐리흐 네이가우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에곤 페트리,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 같은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존경을 받는 피아니스트였어요. 리히터와 길렐스는 소프로니츠키를 그들의 master라고 추앙했고요, 리히터는 피아노의 신이라고까지 말을 했죠. 그리고 또 소프로니츠키의 제자였던 라자르 베르만은 “소프로니츠키 선생님은 진정함의 극치로서, 나를 음악의 혼에 가까이 다가서게 한 사람”이라는 말을 했고요.
“참된 예술은 일곱 겹의 갑옷으로 억제된, 붉게 끓어오르는 용암과도 같은 것이다”라는 그의 표현처럼, 소프로니츠키의 연주는 낭만적이고 영감에 가득 차 있는 피아니스트이지만, 정확하고 빈틈이 없고, 쓸 데 없이 과장을 하거나 진부한 표현도 없고 자연스럽지요. 그래서 그의 연주를 듣다보면 연주회장이 아니라, 속세를 떠나 제사장이 신탁을 받는 집회에 참석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해요. 그만큼 은밀하고 신비스럽고 섬세하죠.
(저는 개인적으로 처음 소프로니츠키의 연주를 접한 때가 1992년이었는데, 리스트 소나타 실황 음반을 듣고 너무 무서워서 방구석에서 울면서 덜덜 떨었던 기억이 있어요. 시간제약으로 방송은 못 하지만 기회 되면 꼭 들어보세요)
소프로츠키는 즉흥성이 강한 피아니스트답게 “레코딩은 나의 시체이다”라고 말하면서 스튜디오 녹음을 혐오하고 실황을 고집한 피아니스트였죠. 하지만 스튜디오 녹음도 있기는 합니다.
이렇게 활발한 활동을 하던 소프로니츠키는 1959년 초에 몇 달 간을 몸져누웠다가 그 해 가을부터는 주위의 경고를 무시하고 다시 레코딩 작업을 계속했고 또 콘서트홀로 돌아와 1960년 12월 5일 모스크바 음악원 소강당에서 연주회를 개최합니다.
그리고 1961년 1월 9일 스크리아빈 탄생 89주년을 맞아 스크리아빈 박물관에서 연주회를 개최하는데요, 바로 이 연주를 끝으로 다시는 청중 앞에 서지 못했고 그 해 8월 29일 60세를 일기로 타계합니다. 사인은 암이었고요.
소프로니츠키의 사망 소식을 듣고 에밀 길렐스는 “이 세상의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죽었다”고 슬퍼했다고 합니다.
소프로니츠키의 프로필에 쓸 자료들을 모으다가 허원숙 선생님의 사이트를 알게 되었는데, 이분의 사이트 게시판에 나와 있는 글들을 읽는 게 더 간단하고 이해하기 쉽다. 소프로니츠키의 연주는 음침하다고들 하는데, 그게 스크리아빈과 묘하게 어울리는 것 같다. 그 음침한 사운드를 한때 좋아했던 기억이 나기도 한다. 소프로니츠키의 음반들을 정리하는 데에 3일 이상 걸렸는데, 음반 정보들을 찾다가 소프로니츠키가 콩쿠르를 나간 경력이 없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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