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D2 Grigory Ginzberg, Samuil Feinberg & Heinrich Neuhaus / 그리고리 긴즈부르크, 사무일 파인베르크, 하인리히 네이가우스
01 Liszt Fantasy on Beethoven's 'Ruins of Athens' (Grigory Ginzberg) / 리스트 - 베토벤의 <아테네의 폐허>에 의한 환상곡 (그리고리 긴즈부르크)
02 Scriabin Piano concerto in f#, Op. 20: I. Allegro (Samuil Feinberg) / 스크리아빈 피아노 협주곡 (사무일 파인베르크)
03 Scriabin Piano concerto in f#, Op. 20: II. Andante
04 Scriabin Piano concerto in f#, Op. 20: III. Allegro moderato
05 Chopin Piano Concerto No. 1 in e, Op. 11: I. Allegro moderato (Heinrich Neuhaus) /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 (하인리히 네이가우스)
06 Chopin Piano Concerto No. 1 in e, Op. 11: II. Romance. Larghetto
07 Chopin Piano Concerto No. 1 in e, Op. 11: III. Rondo. Vivace
USSR State TV & Radio Symphony Orchestra / 소련 국립 TV-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Alexander Gauk, conductor / 알렉산더 가우크 지휘
Grigory Ginzburg (1904-61) / 그리고리 긴즈부르크
Principal Teacher: Alexander Goldenweiser / 알렉산더 골덴바이저 사사
Prize:
1927 - Chopin Competition, 4th / 쇼팽 콩쿠르 4위
'A poet of pianistic craftsmanship' (Grigory Kogan), Grisha Ginzburg, from Nizhny-Novborod, was appointed to the Moscow Conservatory in 1929, taking up a professorship in 1935, and remaining in post until resigning in 1959. Before that he'd worked at the Scriabin Institute. Honoured Art Worker of the Russian Soviet Federation in 1946, his professional debut in 1922 was with Liszt's E flat Concerto, which he later recorded in concert in 1949 under Nikolai Anosov (father of Gennady Rozhdestvensky), a favourite collaborator. Benefitting from direct contact with Romantic tradition (in the Goldenweiser household he met and heard Scriabin, Rachmaninoff and Medtner), he was one of the fabulous Lisztians of his time, and a dazzling advocate of paraphrase and transcription. But he was also an eminent Mozart and Beethoven player, with a modernist approach towards articulation, phrasing and balance.
‘피아니스틱한 솜씨의 시인’(그리고리 코간)인 그리샤(그리고리의 애칭) 긴즈부르크는 니즈니노브고로드 출신으로 1929년 모스크바 음악원에 임명되어 1935년에 교수직을 맡았으며 1959년 사임할 때까지 지위를 유지했다. 그전에는 스크리아빈 협회에서 일했다. 1946년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의 공훈예술가였던 그의 1922년 프로 데뷔는 리스트 피아노 협주곡 1번이었는데, 나중에 그가 선호하는 협연자인 니콜라이 아노소프(지휘자 겐나디 로제스트벤스키의 아버지)의 지휘로 1949년에 녹음되었다. 낭만주의 전통과의 직접적인 접촉으로 (골덴바이저의 가정에서 스크리아빈, 라흐마니노프, 메트너를 만나고 들었던) 그는 그의 시대의 멋진 리스티안(리스트 전문가) 중 한 명이었으며, 패러프레이즈와 편곡 작품의 눈부신 옹호자였다. 그러나 그도 아티큘레이션, 프레이징, 균형에 대한 근대주의적 접근 방식을 가진 저명한 모차르트와 베토벤 연주자였다.
His sizeable post-war discography included celebrated readings of the Liszt-Busoni "Spanish Rhapsody" and Rubinstein's Fourth Concerto. Surprises abound, such as Liszt's Second Hungarian Rhapsody with interpolated cadenza (1952), Ravel's Sonatine (1954), Gershwin's Preludes (1957). Fast in youth, measured in maturity, he was gifted with massive but impeccably voiced tone, devilish octaves, pinpoint clarity throughout the bass register, powerfully focussed low notes, and an imposing grasp of phrasing, agogics and climax. According to Dmitri Paperno, nothing was left to chance. 'He worked out a plan for every performance, right down to the most minute details.'
그의 상당한 전후 디스코그래피에는 리스트 <스페인 랩소디>(부조니 편곡), 루빈스타인 협주곡 4번의 유명한 해석이 포함되었다. 카덴차가 삽입된 리스트 헝가리 랩소디 2번(1952), 라벨 소나티네(1954), 거슈윈 프렐류드(1957) 등 놀라움이 가득하다. 젊었을 때 빠르고 성숙했을 때 침착했던 그는 거대하지만 흠잡을 데 없는 목소리, 악마 같은 옥타브, 베이스 성부에 걸친 정밀한 명료성, 강력하게 집중된 저음들, 인상적인 프레이징 파악, 아고긱(악보를 연주하거나 노래할 때 템포에 미묘한 변화를 줘서 다양한 느낌을 표현하는 방법), 클라이맥스에 대한 재능이 있었다. 드미트리 파페르노에 의하면, 아무것도 운에 맡겨지지 않았다. ‘그는 모든 연주에 대한 계획을 세웠으며, 가장 세밀한 디테일까지 철저했다.’
'Essentially,' Ginzburg wrote, 'the player's creative work, the agonizing search for correct solutions, the construction of a complete performance and the polishing of details with the help of a performing willpower fill the whole conscious life of the artist [...] Art, just like science, [quoting here the Nobel Prizewinner Ivan Pavlov] "demands the whole of a person's life. And even if you had two lives, that would still not be enough [...] Be passionate in your work and in your searchings".'
긴즈부르크는 다음과 같이 썼다. ‘기본적으로 연주자의 창조적인 작업, 올바른 해결책을 고민하는 탐색, 완전한 연주의 구축, 연주하는 의지에 대한 도움으로 디테일을 연마하는 것은 아티스트의 모든 의식적 삶을 채워준다. [...] 과학과 마찬가지로 예술은 [노벨상 수상자인 러시아의 생리학자 이반 파블로프를 여기에서 인용하면] “개인의 인생 전체를 요구한다. 그리고 두 가지 인생을 살더라도 여전히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 일과 탐색에 열정적이어야 한다”.’
Liszt Fantasy on Beethoven's 'Ruins of Athens' (?1837 rev. 1848-52, 1865) / 리스트 - 베토벤의 <아테네의 폐허>에 의한 환상곡
One of Liszt's less familiar "homages", dedicated to Anton Rubinstein and first performed in Budapest by Hans von Bulow, replete with the famous Turkish March and Chorus of Dervishes.
리스트의 덜 친숙한 “오마주”(예찬) 중의 하나로 안톤 루빈스타인에게 헌정되었으며 부다페스트에서 한스 폰 뷜로프에 의해 초연되었는데, 유명한 터키 행진곡과 데르비시(극도의 금욕 생활을 서약하는 이슬람교 집단의 일원으로, 예배 때 빠른 춤을 춤)의 합창으로 가득하다.
Samuil Feinberg (1894-1962) / 사무일 파인베르크
Principal Teacher: Alexander Goldenweiser / 알렉산더 골덴바이저 사사
Born in Black Sea port of Odessa - 'where the Ukrainian steppes come to an end and European trains set out for abroad' (Faubion Bowers) - Feinberg grew up in Moscow on a diet of Bach, Beethoven and the Classico-Romantics. Making sure he heard the greats of the day - Eugen d'Albert, Alfred Reisenauer, Josef Hofmann - he applied himself with tremendous intensity. 'While studying at the Conservatory [...] I learned very quickly. If [Goldenweiser] assigned me two Preludes & Fugues by Bach on a Tuesday to be ready and memorized for Friday, I was able to. I remember I once needed to learn the Eighth Sonata of Scriabin very fast, which I had never heard or seen the score to. I learned it in four days, a record for me' (23 January 1946, Pianists in Discussion, ed M. Sokolov, Moscow 1984).
‘우크라이나의 대초원이 끝나고 유럽의 기차들이 해외로 향하는 곳’인 오데사의 흑해 항구에서 태어난 파인베르크는 바흐, 베토벤, 고전파-낭만파 레퍼토리를 익히면서 모스크바에서 성장했다. 그는 유진 달베르트, 알프레드 라이제나우어, 유제프 호프만 등 당대의 대음악가들을 듣는 것을 확실히 하면서 엄청난 강도로 자신을 적용했다. ‘음악원에서 공부하는 동안 [...] 나는 매우 빨리 익혔다. [골덴바이저가] 내게 바흐의 두 권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프렐류드와 푸가)을 목요일에 부과해서 금요일에 준비하여 암보했다면, 나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내가 들어봤거나 악보를 본 적이 없었던 스크리아빈 소나타 8번을 매우 빨리 배울 필요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나는 4일 만에 익혔고 내 연주에 대한 녹음이 있다(1946년 1월 23일, M. 소콜로프의 저서 <토론의 피아니스트>, 모스크바 1984).’
His graduation recital in 1911 scaled the awesome. 'The rules then were that the whole programme should be prepared no more than two to three months [in advance] and Goldenweiser adhered to these rules [...my] programme included not only the 48 Preludes and Fugues by Bach [...] but also a Handel Concerto in August Stradal's transcription, an Adagio by Mozart [B minor], Chopin's Nocturne in C minor [from Op. 48], the Fourth Sonata of Scriabin, then Franck's "Prelude, Choral and Fugue", then Rachmaninoff's [new] Third Concerto, all prepared in a very short time.'
1911년 그의 졸업 리사이틀은 대단했다. ‘그 규정은 프로그램 전체가 [사전에] 2~4개월 내에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으며, 골덴바이저는 바흐 48개의 프렐류드와 푸가(평균율 전곡)뿐만 아니라 [...] 아우구스트 스트라달이 편곡한 헨델 협주곡, 모차르트 아다지오 K. 540, 쇼팽 녹턴 13번, 스크리아빈 소나타 4번, 프랑크 <프렐류드와 코랄과 푸가>, 라흐마니노프의 [새로운] 협주곡 3번도 고수했는데, 모두 매우 짧은 시간 안에 준비되었다.’
A musician drawn later in life to the unassailability of Bach and pure polyphony, he gave the first public performance in Russia of the complete "Well-Tempered Clavier" in 1914, repeating the event in 1923, 1938-39 and 1940. In 1941 he embarked on the first of his Beethoven sonata cycles. In 1925 he gave the Soviet premiere of Prokofiev's Third Concerto (22 March), and later the same year went to the ISCM (International Society for Contemporary Music) Festival in Venice, playing his own progressively informed Sixth Sonata. In Berlin in 1927 he became one of the first artists to broadcast 'live' on radio. His ascent in the West ceased with the Stalin terrors of the late '30s, his last permitted excursion abroad, June 1938, being a visit to Brussels to sit on the jury of the second Ysaye Competition.
나중에 바흐와 순수한 폴리포니(다성음악)의 견고함에 일생을 바친 것으로 그려진 음악가인 그는 1914년에 러시아에서 <바흐 평균율> 전곡으로 첫 공개 연주를 가졌으며, 1923년, 1938~39년, 1940년에 반복했다. 1941년에는 베토벤 소나타 전곡에 처음으로 착수했다. 1925년에는 프로코피에프 협주곡 3번의 소비에트 초연(3월 22일)을 가졌으며, 나중에 같은 해에는 베니스의 ISCM(국제현대음악협회) 페스티벌에 참가하여 혁신적으로 알려진 그의 자작 소나타 6번을 연주했다. 1927년 베를린에서는 라디오에서 ‘생중계’로 방송한 최초의 아티스트들 중 한 명이 되었다. 그의 서방 진출은 1930년대 후반에 스탈린이 감행한 대테러로 중단되었으며, 마지막으로 허용된 해외 이동은 1938년 6월에 브뤼셀을 방문하여 제2회 이자이(현 퀸엘리자베스) 콩쿠르 심사위원으로 참석한 것이었다.
Never a member of the Party, antipathetic to proletarian/social realist order, conscious of his fragility as a Jew in anti-Semitic society (notwithstanding the award of a Stalin Prize in 1946), black-listed with Shostakovich, Prokofiev and Khachaturian in Andrei Zhdanov's 1948 cultural purge, he spent the remainder of his life within Communist confinement, professor of the Moscow Conservatory (1922-62), ceaselessly honing his technique. In 1956 heart trouble forced his retirement from the stage. Photographs show a heavy moustache, Russian goatee, hair swept back, high forehead, not dissimilar to the emigre BBC broadcaster and scholar Hans Keller. Like him, Feinberg was a stern cosmopolitan.
(1946년에 스탈린상을 받았음에도) 반유대주의 사회에서 유대인으로서의 취약성을 의식한 프롤레타리아/사회 현실주의 질서에 반감을 가진 당의 일원이 아니었지만, 안드레이 즈다노프의 1948년 문화와 관련된 숙청에서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에프, 하차투리안과 함께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그는 공산주의 감금 과정에서 여생을 보냈는데, 자신의 테크닉을 끊임없이 연마하면서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1922~62년)를 지냈다. 1956년에는 심장병으로 인해 무대에서 은퇴했다. 사진에는 BBC 방송 진행자이자 학자인 망명자 한스 켈러(오스트리아 출신 음악가)와 닮은 심한 콧수염, 러시아인의 아랫수염, 뒤로 넘긴 머리, 높은 이마가 보인다. 그(한스 켈러)와 마찬가지로, 파인베르크는 엄격한 코스모폴리탄(세계인, 범세계주의자)이었다.
"Pianism as Art" (1965) gathers his keynote writings. 'The calling of a performer, positioned between the realms of imagined sound and real sound, is to penetrate both worlds simultaneously [...] A performer's vision is not translucent to the outside world. It is fogged, as he follows the interior image and his attention concentrates on realizing his ideas. The violinist's head turned toward the instrument expresses symbolically the essence of the performing craft.'
<예술로서의 피아니즘>(파인베르크의 저서, 1965)은 그가 쓴 주안점들을 수집한다. ‘상상의 소리와 실제 소리의 영역 상에 위치한 연주자의 소명은 동시에 두 세계에 침투하는 것이다. [...] 연주자의 비전은 외부 세계에 투명하지 않다. 그가 내부 이미지와 그의 아이디어를 실현에 대한 집중을 따르는 것처럼 잘 보이지 않는다. 악기로 향하는 바이올리니스트의 머리는 연주 기교의 본질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Regarding the creative freedom of a pianist, one should underline the need for a musical image that is nurtured by the mental ear. Reading of the score should come before the production of sound [...] Music lives before and after actual sound, in constant development. Musical memory connects preceding sounds with their later development, joining the future and the past, and creating the image of a whole musical form. The charm and poetry of a solo performance are in the fact that the transition from inner image to real sound is achieved by the individual will of an artist [...] The elastic reality of art and its shadow are synthesized in a united creative process.' 'One should not merely live and feel in art, one has to live through a great deal and endure a great deal.'
‘피아니스트의 창조적인 자유에 관해서는, 정신적인 귀에 의해 길러지는 음악적 이미지에 대한 필요성을 강조해야 한다. 악보 해석은 소리를 만들기 전에 와야 한다. [...] 음악은 일정한 개발에서 실제 소리의 전후에 나타나야 한다. 음악적인 기억은 미래와 과거를 결합하고 전체 음악 형식의 이미지를 만들면서 나중의 개발에 이전 소리들을 연결한다. 독주의 매력과 우아함은 내부 이미지에서 실제 소리로의 전환이 아티스트 개인의 의지로 달성된다는 사실에 있다. [...] 예술의 탄력적인 현실과 그 그림자는 통합된 창조적인 과정으로 합성된다.’ ‘사람은 단순히 살아가지 말고 예술에서 느껴야 하며, 많은 것을 통해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견뎌야 한다.’
'Refracting' (his word) a composer's 'direction and shadings' was the essence of Feinberg's art. 'A composer's instruction should not become a foreign impulse that simply makes a performer play "sforzando" at a given moment.' He speaks of 'the dreamy images of Chopin, Schumann and Scriabin that sometimes lie outside the boundaries of real sound.' And he asserts, from deep-founded conviction, that 'the score of a composer is not a marching order "to be performer!"'
작곡가의 ‘방향과 음영’을 ‘굴절시키는 것’(그의 말)은 파인베르크의 예술의 본질이었다. ‘작곡가의 도입은 주어진 순간에 그저 연주자가 “스포르찬도”(그 음을 특히 세게)를 연주하게 만드는 외적인 충동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는 ‘때때로 실제 소리의 경계를 벗어나는 쇼팽, 슈만, 스크리아빈의 꿈꾸는 이미지’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그는 충분히 깊은 신념으로부터 ‘작곡가의 악보는 “연주자에게” 행진하는 순서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An artist of contradictions drawn to the re-creative act through individualized rhapsody and quasi-extemporization, Feinberg shaped rhythm and timing with greater reference to context and underlay than bar-lines or stylistic considerations, and his tempi varied between free rein and no licence at all. For him 'conscientious control of the fruits of the imagination' was good. 'Over-analysed art where all the elements are deftly calculated and a theoretician is the sole tsar of the creative process' was bad.
개별화된 랩소디와 즉흥곡에 준하는 곡을 통해 재창조적인 행동으로 이끌어낸 모순의 아티스트인 파인베르크는 마디나 스타일의 고려사항보다 맥락과 밑에 깔린 것에 대한 참고가 더 큰 리듬과 타이밍을 만들었으며, 그의 템포는 무제한의 자유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없는 것 사이에서 다양했다. 그에게는 ‘상상의 열매에 대한 세심한 통제’가 좋았다. ‘모든 요소들이 솜씨 있게 계산되고 이론가가 창조적 과정의 유일한 단점인 과도하게 분석된 예술’은 나빴다.
Scriabin Piano Concerto in f#, Op. 20 (1896-97) / 스크리아빈 피아노 협주곡
This was first heard publicly at a concert in Odessa, 11/23 October 1897, directed by Vasily Safonov with the composer (his student) as soloist. Of a later London performance under Henry Wood (March 1914), the "Musical Times" reported: 'Here there are no harmonic problems to embarrass the uninitiated. Much of the music makes its immediate appeal to anyone sensitive to beauty. To say that much of it is Chopinesque is to give it praise.'
이 곡은 처음으로 1897년 10월 11일/23일 오데사의 콘서트에서 바실리 사포노프의 지휘로 작곡가 자신의 연주와 함께 공개적으로 발표되었다. 나중에 헨리 우드의 런던 연주(1914년 3월)는 <뮤지컬 타임스>에서 다음과 같이 보도되었다. - ‘여기 특별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하는 화성적인 문제는 없다. 음악의 대부분이 아름다움에 민감한 사람에게 즉시 호소한다. 대단히 쇼팽적이라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이 곡에 찬사를 보내는 것이다.’
Heinrich Neuhaus (1888-1964) / 하인리히 네이가우스
Principal Teachers: Gustav Neuhaus (father), Aleksander Michalowski, Heinrich Barth, Leopold Godowsky / 구스타프 네이가우스(아버지), 알렉산데르 미하워프스키, 하인리히 바르트, 레오폴트 고도프스키 사사
Post-19th century, 'the three pillars of the Russian piano school,' Sviatoslav Richter reminds us, 'were Goldenweiser, Igumnov and Neuhaus. Goldenweiser represented the older tradition, a pianist of the pedantic kind. For him, the important thing was knowing whether to play ta-ri-ra, ti-ra-ri or ti-ra-ra. An academic pianist, with no imagination, Igumnov, for his part, was an excellent musician and an original [...But] it was to Neuhaus that all the pianists in Moscow beat a path.' 'He was so generous by nature, we were all mad about him. I've never met anyone else with so much charm; such a delightful man, so utterly lacking in gravitas! Almost easy-going, and yet...'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가 우리에게 상기시키듯이 19세기 이후 ‘러시안 피아노 스쿨의 세 기둥은 골덴바이저, 이굼노프, 네이가우스였다. 골덴바이저는 보다 오래된 전통, 지나치게 규칙을 찾는(세세한 것에 얽매이는) 피아니스트를 대표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타리라, 티라리 또는 티라라를 연주할 것인지 여부를 아는 것이었다. 상상력이 없는 학자 피아니스트 이굼노프는 뛰어난 음악가이자 독창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모스크바의 모든 피아니스트들이 길을 밟은 것은 네이가우스에게 있었다.’ ‘그는 본질적으로 매우 관대했으므로, 우리 모두 그에게 화났다. 나는 매력이 많은 다른 사람, 그런 쾌활한 남자를 만난 적이 없어서 완전히 진지함이 부족하다! 거의 태평스럽다고 하더라도...’
Of mixed German, Polish and Russian origin, born in the Ukraine, Neuhaus came from a pedigree background. His uncle was Felix Blumenfeld, and Szymanowski was a second cousin. He taught in Tiflis (1916-18) and Kiev (1918-22) before joining the Moscow Conservatory in 1922 - remaining there until his death more than 40 years later, including a short period (1935-37) as director. In 1932 he helped establish the Conservatory's prep-school, the Central Music School. He was made a People's Artist of Russian Soviet Federated Socialist Republic in 1956.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네이가우스는 혈통의 배경이 독일, 폴란드, 러시아이다. 그의 외삼촌은 펠릭스 블루멘펠트였으며 시마노프스키는 육촌이었다. 그는 티플리스[트빌리시](1916~18년)와 키예프(1918~22년)에서 가르쳤으며 1922년에 모스크바 음악원에 합류했는데, 40년 후에 죽을 때까지 남았으며, 잠시 음악원장(1935~37년)을 지내기도 했다. 1932년에는 음악원의 예비학교인 중앙음악학교를 설립하게 했다. 1956년에는 러시아 사회주의 공화국 인민예술가가 되었다.
Neuhaus' book "The Art Piano Playing" (1958) casts fascinating light on his erudition and perceptions. Early on he notes that 'technique' comes from the Greek word meaning 'art'. He talks about 'performance style,' singing out four categories. 'The first - no style at all! Bach is performed "with feeling" a la Chopin or Field [...] Brahms - impetuously and with eroticism a la Scriabin [...] Mozart a la old maid [...] The second - is the "mortuary" style. The performer is so hampered by the "code of laws" that in the end the poor composer dies in front of the sorrowing audience. The third type is the "museum" performance, based on the most accurate and reverent knowledge of how music was performed and how it sounded at the time it was composed. The fourth type ["without contest the best"] is the performance illumined by intuition and inspiration; a contemporary, vivid performance, backed by un-ostentatious erudition'.
네이가우스의 저서 <피아노 연주 기법>(1958)은 그의 학식과 인식들에 대해 매력적인 빛을 발한다. 초기에 그는 ‘테크닉’이 ‘예술’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목한다. 그는 4개의 범주를 부르면서 ‘연주 스타일’에 대해서 말한다. ‘첫 번째는 - 스타일이 전혀 지정되지 않았다! 바흐는 쇼팽 풍이나 필드 풍의 “느낌으로” 연주된다. [...] 브람스는 스크리아빈 풍으로 충동적이고 에로티시즘으로 연주된다. [...] 모차르트는 노처녀처럼 연주된다. [...] 두 번째는 - “죽음의” 스타일이다. 연주자는 “법전”에 너무 방해받아서 마침내 가난한 작곡가가 슬퍼하는 청중 앞에서 죽는다. 세 번째 유형은 음악이 어떻게 연주되고 그것이 작곡되었을 때 어떻게 들리는지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경건한 지식에 기초한 “박물관” 연주이다. [“경쟁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네 번째 유형은 직감과 영감에 의해 조명된 연주로 과시적이지 않은 학식으로 뒷받침되는 현대적인 생생한 연주이다.’
For someone like Gilels this was tough going. 'I was literally "choking" on Neuhaus, and for a long time in these fireworks of aphorisms, comparisons and brilliant examples I couldn't digest what was essential, the thing to catch at in order to stand upon sure ground.' Other students, though - and they were legion - felt otherwise. Richter was grateful that, 'above all', he learnt from Neuhaus 'the meaning of silence and the meaning of singing'.
길렐스 같은 사람에게는 힘든 상황이었다. ‘나는 문자 그대로 네이가우스에 대해 “질식할 지경”이었으며, 오랫동안 이러한 경구, 비교, 훌륭한 예의 불꽃에서 본질적인 것, 자신감에 근거를 두기 위해 와락 움켜쥐는 것을 소화할 수 없었다.’ 다른 학생들일지라도 그들은 아주 많았으며 다르게 느껴졌다. 리히터는 ‘침묵과 노래의 의미’에서 배운 것에 대해 ‘무엇보다도’ 고맙게 여겼다.
Chopin Piano Concerto No. 1 in e, Op. 11 (1830) /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
'It is not meant to be loud', wrote Chopin of the slow movement. 'It's more of romance, quiet, melancholic; it should give the impression of gazing tenderly at a place which brings to mind a thousand dear memories. It's a sort of meditation in beautiful spring weather but by moonlight' (15 May 1830). 'Every time I listen to this recording (and I've lost count of the number of times I've heard it), I feel I'm in the presence of an exemplary, living interpretation of Chopin. An aristocratic reading, in other words, simple and natural. (Sviatoslav Richter, 16 April 1973).
쇼팽은 느린 2악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이 곡은 크게 하는 것이 아니야. 낭만적이고 조용하며, 반쯤 우울한 마음으로 즐거웠던 무수한 추억들을 상기시키는 장소를 바라보는 듯한 인상을 일으키게 하려고 했어. 예를 들면, 아름다운 봄의 달빛이 어려 있는 것처럼(1830년 5월 15일자 편지에서).’ ‘내가 이 녹음을 들을 때마다(그리고 나는 그것을 들은 횟수를 잊어버렸다.) 나는 쇼팽에 대한 모범적이고 생생한 해석이 있다고 느낀다. 귀족적인 해석, 즉 간단하고 자연스러운(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1973년 4월 16일).’
Hans Keller / 한스 켈러
Samuil Feinberg / 사무일 파인베르크
구글 드라이브에 먼저 번역본을 넣고 나서 블로그에 소개하게 되었는데 한스 켈러와 관련해서 잘못된 번역이 있어서 텍스트 파일을 수정한 다음 다시 넣었다.
https://cloud.mail.ru/public/3bzF/bzUJsGjX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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