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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 piano bachelor, piano music lover, CD collector and classical music information's translator. Also KakaoTalk character Tube mania! Naver Blog: http://blog.naver.com/snowseol Youtube Channel: https://www.youtube.com/channel/UCDPYLTc4mK7dOXYTQEOiPew?view_as=subscriber

2019년 8월 15일 목요일

Heinrich Neuhaus Documentary - Master Heinrich


https://www.youtube.com/watch?v=izCfrtFuYAc

하인리히 네이가우스 다큐멘터리
Vera Gornostayeva: A great deal can be said about the scope of his personality as an artist, philosopher...thinker. Not doubt, he was a genius of a teacher, because first and foremost he immersed one in culture, but only if one wanted it, strove for it. Not everyone wanted it, but those who did so received much from him. He was not a mere teacher of the piano; it was too small a title for one like him. He became a teacher because of the circumstances of his life.

베라 고르노스타예바 : 아티스트, 철학자...사상가로서의 그의 성격의 범위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는 천재적인 교육자였는데, 무엇보다도 그는 문화 분야 중 하나에 몰입했기 때문이지만, 원하는 경우에만 애썼죠. 모든 사람이 그것을 원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한 사람들은 그에게서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그는 피아노를 가르치는 교육자가 아니었습니다. - 그와 같은 사람에게는 직함이 너무 작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상황 때문에 교육자가 되었죠.

Master Heinrich

마스터 하인리히

His life turned out to be both happy and dramatic...the childhood in a family of musicians in the small town of Elisavetgrad; the studies in Berlin and Vienna with Leopold Godowsky and Heinrich Barth (he also received some lessons from Aleksander Michałowski); the fluent knowledge of European languages and the year and a half stay in Florence; the youthful friendship with Arthur Rubinstein and Karol Szymanowski - his second cousin - who later became a great Polish composer; the artistic interactions with Vladimir Horowitz, whose teacher was Felix Blumenfeld, Heinrich's uncle; the fate of the two families so happily and yet so torturously intertwined together - that of Neuhaus and Pasternak; the months of imprisonment and the joy of success; the brilliant concerts and the years-long battle with a serious hand aliment; the triumphs of his pupils and the numerous books he authored, among which was The Art of Piano Playing... "Too small a man for big deeds," he used to say of himself. And here is what Heinrich Gustavovich Neuhaus wrote in his self-interview: "A pianist - mediocre, a musician - good, an artist - excellent, a human being - inclined to good."

그의 삶은 행복하면서도 극적인 것으로 밝혀졌는데...엘리자베트그라드(오늘날 크로피우니츠키, 옛 이름 키로보흐라드)의 작은 마을에 있는 음악가 집안에서 출생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 베를린과 비엔나에서는 레오폴트 고도프스키와 하인리히 바르트를 사사했다. (알렉산데르 미하워프스키에게서도 레슨을 받았다.) 유럽 언어에 대해 유창한 지식을 지녔으며 피렌체에서 1년 반을 보냈다. 아르투르 루빈스타인과 (네이가우스의 육촌이자 나중에 폴란드의 대작곡가가 된) 카롤 시마노프스키와는 젊은 시절에 친하게 지냈다. 하인리히의 외삼촌인 펠릭스 블루멘펠트의 제자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는 예술적 교류가 있었다. 두 가족, 네이가우스와 파스테르나크의 운명은 행복하면서도 고통스럽게 얽혀있었다. 구속된 적도 있었고 성공에 대한 기쁨의 나날들도 있었다. 화려한 콘서트를 가졌으면서도 심각한 손 부상으로 수년간 싸운 적도 있었다. 제자들의 성과가 있었으며 그가 쓴 수많은 책들 중 <피아노 연주기법>에서...자신에 대해 “큰일을 하기에는 사람이 너무 작다”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여기 하인리히 구스타보비치 네이가우스가 자신의 인터뷰에서 쓴 내용이 있다. “피아니스트는 평범하고, 음악가는 좋고, 아티스트는 우수하며, 인간은 좋은 경향이 있다.”

Vera Gornostayeva: My interactions with Heinrich Gustavovich at that time could not, of course, fully reveal the enormity of his personality. Imagine a young girl, who was brought up during Soviet times in a central school, and a man - he was 60 years old at that time - a man, who has already lived such a renowned life; a man who has absorbed all of the European culture; a man who has been exposed to that culture from a very early age. Imagine a man who from his childhood was fluent in both Polish and German - his mother's and father's native tongues. He spoke French, like all (well-educated) Europeans, and Italian, having spent a year and a half in Italy. He first fell in love in Italy; he almost got married there. He always said that Italian was a language of love. Of course, the scope and depth of his culture was not something I could fully comprehend at such an early age. 29. His concerts were always sold out, and the audience was always top-notch the cultural elite. Ossip Mandelstam even wrote a poem after he had attended one of these concerts. It has these lines: "Are my hands like sledgehammers? My ten fingers are my herd! And up he jumped, brushing off his coattails, Master Heinrich - the little humpbacked horse." Just think about the image! "Master Heinrich - the little humpbacked horse." But that is so true - he was a petite man with fluffy hair.

베라 고르노스타예바 : 당시 하인리히 구스타보비치와의 교류는, 물론 그의 성격의 광대함을 완전히 드러낼 수 없었어요. 소련 시대에 중앙음악학교에서 성장한 어린 소녀와 한 남자를 상상해보세요. - 그는 당시에 60세였어요. - 이미 유명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유럽 문화를 모두 흡수한 사람이었죠. 아주 어린 나이부터 그 문화에 노출된 사람이었죠. 어린 시절부터 폴란드어와 독일어에 능통한 사람을 상상해보세요. -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국어이죠. 그는 모든 (잘 교육받은) 유럽인들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어를 구사했으며, 이탈리아어도 썼는데, 이탈리아에서 1년 반을 보냈죠. 그는 이탈리아에서 첫사랑에 빠졌는데, 거의 그곳에서 결혼했죠. 그는 항상 이탈리아어는 사랑의 언어라고 말했어요. 물론 그의 문화의 범위와 깊이는 제가 그렇게 어린 나이에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어요. 29세였죠. 그의 콘서트는 항상 매진되었으며, 청중은 항상 문화 엘리트의 최고 수준이었어요. 오시프 만델스탐은 콘서트 중 하나에 참석한 후 시를 썼어요. 다음과 같은 행이 있습니다. “내 손은 큰 망치 같은가? 내 열 손가락은 나의 무리! 그리고 그는 코트 자락을 털면서 벌떡 일어서는데, 마스터 하인리히 - 작은 곱사등이 망아지.” 이미지만 생각해보세요! “마스터 하인리히 - 작은 곱사등이 망아지.” 그러나 그건 사실입니다. - 그는 솜털 같은 머리카락을 가진 몸집이 작은 사람이었죠.

Militsa Neuhaus, the daughter of Heinrich Neuhaus: Lunacharsky - he was a People's Commissar, but he was not ignorant in the matters of culture. He invited both Blumenfeld and Neuhaus to join the faculty. Neuhaus established himself very quickly - he was a very bright man. His charm could not be compared to anyone else's. At the Moscow Conservatoire, in the Classroom of the Meritorious Worker of Arts: "Tanechka, what would you like to play for us?" "I am going to play the finale of the Polonaise As dur." "Fine, and after that you are going to play the Octave Etude." "Fine."

밀리차 네이가우스 (하인리히 네이가우스의 딸) :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 - 그는 (구소련의) 인민 위원이었지만, 문화 문제에 대해서 무지하지 않았어요. 그는 블루멘펠트와 네이가우스 모두 교수진에 초빙했죠. 네이가우스는 매우 빨리 자신을 확립했는데, 그는 매우 영리한 사람이었어요. 그의 매력은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었죠.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공훈예술가의 수업은 다음과 같았죠. - “타네치카, 뭘 연주할 거니?” “쇼팽의 영웅 폴로네즈요.” “좋아, 그러고 나서 쇼팽의 옥타브 에튀드를 연주하자.” “좋아요.”

Vera Gornostayeva: The professors - Igumnov, Goldenweiser, Neuhaus, and Feinberg - they all gave open master classes. Igumnov, he was a most brilliant pedagogue, but he did not quite like to interact with the audience during such master classes; he preferred one-on-one communication with his pupils. Neuhaus, on the other hand, loved the audience. His master classes were always full of people. It was his nature. First and foremost, Neuhaus was a performer; he flourished in such an environment.

베라 고르노스타예바 : 이굼노프, 골덴바이저, 네이가우스, 파인베르크 교수님은 모두 공개 마스터클래스를 가졌어요. 이굼노프는 가장 뛰어난 교육자였지만, 이러한 마스터클래스에서 청중과 교류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는데, 제자들과의 일대일 커뮤니케이션을 선호했어요. 반면에 네이가우스는 청중을 사랑했죠. 그의 마스터클래스는 사람들로 가득 찼어요. 그의 성격이었죠. 무엇보다도 네이가우스는 연주자였는데, 그는 그런 환경에서 번창했죠.

Aleksey Nasedkin about Neuhaus' master classes: There were always a lot of people there. These listeners - some of them came from other classes, while some of them came from other cities to listen to him. All in all, the working environment was probably not ideal, but there was always an element of a concert, an element of excitement, an element of tension, so to speak. But maybe it was helpful, because one would probably feel more at ease while performing on stage later. There was no lack of people in the audience at such master classes, but they were all professionals - professors, associate professors, or just teachers from other music schools. It was far more pressure to play before such people than to play on stage in front of the general public.

네이가우스의 마스터클래스에 대한 알렉세이 나세드킨의 인터뷰 : 거기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있었어요. 이 청취자들 - 그들 중에는 다른 클래스에서 온 사람들도 있고, 다른 도시들에서 그를 들으러 온 사람들도 있었죠. 대체로 작업 환경이 어쩌면 이상적인 것은 아니었겠지만, 말하자면 항상 콘서트의 요소, 흥분의 요소, 긴장의 요소가 있었어요. 그러나 나중에 무대에서 연주하는 동안 더 편하게 느끼기 때문에 도움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마스터클래스를 듣는 사람들이 부족하지 않았지만, 그들 모두 교수, 조교수, 또는 다른 음악학교의 교육자 등 전문가였죠. 무대에서 일반 대중 앞에서 연주하는 것보다 그러한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는 것이 훨씬 더 큰 압박이었네요.

Neuhaus is asking Yakov Zak to play something for him (part of Chopin's Third Scherzo).

네이가우스가 야코프 자크에게 뭔가(쇼팽 스케르초 3번 일부)를 연주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Yakov Zak was Neuhaus' first triumph as a pedagogue - he prepared Zak for the Chopin International Piano Competition in Warsaw. Back then, in the mid '30s, there were not so many piano competitions as we have now, and every trip abroad was a rarity. Participation in a piano competition - not to mention a victory - was a matter of honor for the Soviet Union.

야코프 자크는 네이가우스의 교육자로서 첫 성과였다. - 그는 바르샤바에서 열리는 쇼팽 국제피아노콩쿠르를 준비했다. 그 당시 30년대 중반에는 지금과 같이 피아노 대회가 많지 않았으며, 해외여행은 드물었다. 승리는 말할 것도 없이 피아노 콩쿠르에 참여하는 것은 소련을 위한 영광의 문제였다.
"Moscow gives a warm welcome to the winners of the 3rd International Chopin Piano Competition in Warsaw. The concerts of these young Soviet musicians...Yakov Zak...Rosa Tamarkina...Tatiana Goldfarb...and Nina Emelyanova...were very popular in Poland."

“모스크바는 바르샤바에서 열린 제3회 쇼팽 국제피아노콩쿠르 입상자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이 젊은 소련 음악가들...야코프 자크...로자 타마르키나...타티아나 골드파르브...그리고 니나 에멜리아노바...의 콘서트는 폴란드에서 매우 인기가 있었습니다.”

A Member of the Jury of the International Competition, Professor Neuhaus: "Pianist Yakov Zak was the recipient of the 1st prize. Rosa Tamarkina was the recipient of the 2nd prize."

국제 콩쿠르 심사위원인 네이가우스 교수 : “피아니스트 야코프 자크는 1등상을 받았습니다. 로자 타마르키나는 2등상을 받았습니다.”

Tamarkina was not a pupil of Neuhaus; she studied in the class of another distinguished pedagogue - Professor Goldenweiser. She often came to Neuhaus' class, though - its doors were always open. "Rosa, what are you going to play for us?" "Chopin's 'Black Key' Etude."

타마르키나는 네이가우스의 학생이 아니었다. 그녀는 또 다른 저명한 교육자인 골덴바이저 교수를 사사했다. 그녀는 종종 네이가우스의 수업에 왔지만 - 문이 항상 열려 있었다. “로자, 어떤 걸 연주할 거지?” “쇼팽의 흑건 에튀드요.”

Neuhaus' class draws talented pupils like a magnet. The 19 years-old Emil Gilels, a laureate of an all-union competition, a graduate of the Odessa Conservatoire, arrives for his post-graduate studies with Professor Neuhaus.

네이가우스의 수업은 자석처럼 재능 있는 학생들을 끌어들인다. 전소련 콩쿠르 우승자인 19세의 에밀 길렐스는 오데사 음악원을 졸업했으며, 네이가우스 교수와 함께 석사 과정을 공부하기 위해 도착한다.

The year is 1938 - another triumph of the Soviet school of pianism, another triumph of the Neuhaus atelier. Gilels receives a gold medal and international recognition at the International Piano Competition in Brussels. Yakov Flier, a pupil of Igumnov, also became a laureate in the same competition. The victors and their pedagogues were greeted as national heroes.

올해는 1938년 - 소비에트 피아니즘 스쿨의 또 다른 성과, 네이가우스 문하의 또 다른 승리였다. 길렐스가 브뤼셀에서 열린 국제피아노콩쿠르에서 금메달을 받으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는다. 이굼노프의 제자인 야코프 플리에르도 같은 대회에서 3위에 입상했다. 입상자들과 그 교육자들은 국가 영웅으로 환영받았다.

Vera Gornostayeva: There is this rumor that he (Neuhaus) did not quite like Gilels, but that he favored Richter, yet I have come across this article where he writes about Gilels: "Everything he played was permeated with beauty of the sound - his gorgeous, golden sound - like his deep red hair - so full, rich, warm, and deep. I can hardly name another pianist who has so much of this noble metal in their sound." and this was written about Gilels. So why all this talk that he did not like Gilels?

베라 고르노스타예바 : 그가 길렐스를 좋아하지 않고 리히터를 선호한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저는 길렐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쓴 기사를 보았습니다. - “그가 연주한 모든 것은 그의 짙은 붉은 머리처럼 화려한 황금 같은, 아름다운 소리로 가득 차 있었고 정말 충분히 풍부하고 따뜻하며 깊었다. 나는 소리에 이 귀금속을 많이 가지고 있는 다른 피아니스트의 이름을 거의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길렐스에 대한 글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모든 이야기는 그가 길렐스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말할까요?

Eliso Virsaladze: Envious pupils used to scold Neuhaus a little bit because he used to choose someone in the class to put on a pedestal, I mean, among his students. Richter, when he joined, was one such student. Other students still existed for Neuhaus, but...and I can very well understand that. On the other hand, from a pedagogical point of view, it was probably not quite right, but he was such an emotional person, a person of such an emotional temperament, that I could fully understand him. He couldn't help but fall under Richter's hypnotic spell...

엘리소 비르살라제 : 부러워하는 학생들은 네이가우스를 약간 질책했는데 그가 수업 시간에 받침대를 놓을 사람을 선택했기 때문이죠. 저는 그의 제자들 중에 있었죠. 리히터가 들어왔을 때는 그러한 학생이었어요. 다른 학생들은 여전히 네이가우스를 위해 존재했지만...그리고 저는 그것을 정말 잘 이해할 수 있어요. 반면에 교육적인 관점에서 보면, 아마도 옳지 않았을 것이지만, 그는 그런 감정적인 사람, 그런 감정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인데, 저는 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어요. 그는 도울 수 없었지만 리히터의 최면을 거는 상태에 빠졌어요...

Elena Richter: Heinrich Gustavovich probably felt some sort of fatherly love toward Richter. There was something there, you see, maybe even because they were both of German extract. There was some connection between them that is not quite possible to explain. Yes, Richter was probably more than a son to him. And Richter, in his turn, used to say that he had found a father in Neuhaus - his second father.

엘레나 리히터 : 하인리히 구스타보비치는 어쩌면 리히터에 대해 아버지의 사랑을 느꼈을 것입니다. 아마도 모두 독일계이기 때문에 아시다시피 뭔가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 사이에는 설명이 불가능한 관계가 있었죠. 그래요, 리히터는 어쩌면 그에게 아들 이상이었을 거예요. 그리고 리히터는 자신의 차례에 네이가우스 안에서 아버지 - 제2의 아버지를 찾았다고 말하곤 했죠.

Lyudmila Krenkel, musicologist and employee at Svyatoslav Richter's Memerial Apartment in Moscow: In 1937, Richter arrived from Odessa, where he spent his childhood and youth. He knew one of Neuhaus' female students, so she brought Richter for an audition with Neuhaus. Neuhaus asked Richter to play something - Richter played. After that, Neuhaus asked Richter to improvise on a given theme - Richter did so brilliantly. Then Neuhaus put an orchestral score in front of Richter - Richter sight-read it on the spot. Neuhaus was really surprised and said in a whisper: "I think he is a genius." Then he asked: "Who did you study with?" And it turned out, quite unbelievably, that Richter had not really studied with anyone. Yet, when Richter came to study with Neuhaus, he was already a fully-formed, remarkable musician. Nonetheless, he came from Odessa to learn yet more from Neuhaus. In reality, it was a mutual enrichment of two intellects. This portrait...Richter always had it in this room. It was painted by the famous Georgian painter Magalashvili when Neuhaus was on tour in Georgia, and, while staying at her apartment, was practising on her piano before a concert. The most interesting thing is that Richter, judging by the position of the hands, made an assumption that Neuhaus was playing one of the Intermezzi of Brahms!

류드밀라 크렌켈 (음악학자 겸 모스크바의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기념 아파트 직원) : 1937년 리히터는 자신이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던 오데사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네이가우스의 여제자들 중의 한 명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녀는 리히터를 네이가우스의 오디션에 데려갔죠. 네이가우스는 리히터에게 뭔가를 연주해달라고 요청했어요. - 리히터는 연주했죠. 그 후 네이가우스는 리히터에게 주어진 주제에 즉흥적으로 연주할 것을 요청했는데요. - 따라서 리히터는 멋지게 해냈죠. 그런 다음 네이가우스는 리히터 앞에 오케스트라 총보를 놓았는데요. - 리히터는 그 자리에서 즉흥 연주했죠. 네이가우스는 정말 놀랐으며 다음과 같이 속삭였죠. - “나는 그가 천재라고 생각해.” 그러고 나서 그는 다음과 같이 질문했죠. - “누구랑 공부했니?” 그리고 믿을 수 없게도 리히터가 실제로 다른 누군가를 사사하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났죠. 그러나 리히터가 네이가우스를 사사하게 되었을 때, 그는 이미 완전히 형성된 훌륭한 음악가였어요. 그럼에도 네이가우스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 오데사에서 온 거죠. 실제로 두 지성의 상호 보완이었죠. 이 초상화...리히터는 항상 이 방에서 그것을 가지고 있었어요. 네이가우스가 조지아를 연주 여행할 때 유명한 조지아 화가 케테반 마갈라쉬빌리가 그렸으며, 그녀의 아파트에 머무는 동안 콘서트 전에 그녀의 피아노로 연습하고 있었죠. 가장 흥미로운 게 뭐냐면, 리히터는 손의 위치로 판단하여 네이가우스가 브람스의 인터메조 중 하나를 연주하고 있었다고 가정했다는 것이죠!

Eliso Virsaladze: He (Neuhuas) loved Georgia with a passion. He loved Georgian painters; he was friends with many Georgian musicians, and Georgians of other professions. One could not help but love him. Neuhaus visited Georgia quite often, Tbilisi and its conservatoire in particular. My grandmother - she was a professor at the Tbilisi Conservatoire - once organised a reception in his honor at her home. Neuhaus used to visit Georgia every year; I played for him almost every year from when I turned 9, so I cannot really say that I am not one of his pupils. Not to mention that he was my mentor for the Tchaikovsky Competition.

엘리소 비르살라제 : 그(네이가우스)는 조지아를 정열적으로 사랑했어요. 그는 조지아 화가들을 사랑했어요. 그는 많은 조지아 음악가들과 조지아의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 친구였어요. 그를 도와줄 수는 없었지만 그를 사랑했죠. 네이가우스는 조지아, 특히 트빌리시와 그 음악원을 자주 방문했어요. 트빌리시 음악원 교수이신 저의 할머니는 자택에 그를 초대한 적이 있었죠. 네이가우스는 매년 조지아를 방문했어요. 저는 9세 때부터 거의 매년 그를 위해 연주했으므로, 실제로 그의 제자들 중 한 명이 아니었다고 말할 순 없어요. 말할 것도 없이 그는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를 위한 제 멘토였죠.

"20 year-old student Eliso Virsaladze is performing Prokofiev's second sonata with virtuosity and a deep understanding of the music."

“20세의 학생 엘리소 비르살라제가 고도의 예술적 기교와 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로 프로코피에프 소나타 2번을 연주하고 있습니다.”

Eliso Virsaladze: He (Neuhaus) was very demanding, exacting everything from his students. Yes, that's how he was. But he spared neither him time nor his efforts, that's how involved he was! He was very dedicated. In 1959, I was at his class recital - to this day I can remember everyone who played there and how they played. It was an experience I will never forgot! They were all young people - 17, 18, 19-year olds, but how they played! Their performances were of the highest level!

엘리소 비르살라제 : 그(네이가우스)는 제자들에게서 모든 것을 정확하게 요구하면서, 부담이 매우 컸어요. 정말 그랬어요.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시간이나 노력을 아끼지 않았는데, 정말 몰두했어요! 그는 정말 헌신적이었죠. 1959년, 제가 그의 클래스 리사이틀에 있었는데 - 오늘날까지 그곳에서 연주한 모든 사람들과 그들이 어떻게 연주했는지 기억할 수 있습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어요! 그들은 모두 17, 18, 19세의 젊은이들이었지만, 훌륭하게 연주했어요! 그들의 연주는 최고 수준이었죠!

Marina Neuhaus, the granddaughter of Heinrich Neuhaus: Heinrich Gustavovich was like fireworks, like a fountain. He charmed everyone, everyone used to fall under his spell - women especially, always. There was some aura...it was not some kind of casual, day-to-day attitude toward a grandfather. It was more like a holiday, like a fairy-tale, like something really wonderful. At that time I was a little girl. We lived in the same apartment building, but in different apartment. Sometimes he would come to our place, sometimes I would go to his. Yes, it was a special feeling. I also had my other grandfather, my mother's father, whom we lived with. He was a very different type of a grandfather - a more casual, day-to-day grandfather. So I had two very different grandfathers - one was more 'day-to-day' and the other was more 'holiday'. I loved my 'holiday' grandfather very much, but was also a little bit timid in front of him.

마리나 네이가우스 (하인리히 네이가우스의 손녀) : 하인리히 구스타보비치는 불꽃처럼, 분수처럼 보였어요. 그는 모든 사람들을 매료시켰는데, 모든 사람이 그의 주문에 빠지곤 했죠. - 항상 여성이 특히. 뭔가 아우라가 있었는데...할아버지에 대한 무심한, 일상적인 태도는 아니었어요. 오히려 휴일처럼, 동화처럼, 정말 뭔가 멋진 것 같았죠. 당시에 저는 어린 소녀였어요. 우리는 같은 아파트 건물에 살았지만, 다른 아파트였죠. 때때로 그는 우리 집에 왔고, 때때로 저는 그의 집에 갔죠. 맞아요, 특별한 느낌이었어요. 제게는 함께 살았던 외할아버지도 있었어요. 그는 정말 할아버지랑 달랐는데 - 보다 무심한, 일상적인 할아버지였어요. 그래서 제게는 두 분의 매우 다른 할아버지가 있었어요. - 한 분은 보다 ‘일상적’이고 다른 한 분은 보다 ‘휴일’ 같은 할아버지였죠. 저는 ‘휴일’ 할아버지를 정말 사랑했지만, 그 앞에서는 좀 소심하기도 했어요.

Vera Gornostayeva: In his book - with humility, with modesty, and with self-reproach - he constantly writes that he was never a virtuoso, that he never had the technique to play the Rhapsodies of Liszt, as his father had wanted him to. He used to say to his father: "Papa, let some pianistic stud-horse play those Rhapsodies, not me." But when he played, he did not have to be an pianistic stud-horse. He had something else, and the audience could feel that something else, could hear it in his playing...

베라 고르노스타예바 : 그의 책에서 - 겸손, 겸허, 자책으로 - 그는 항상 아버지가 그에게 원했던 것처럼 리스트의 랩소디를 연주할 테크닉을 가진 비르투오소가 아니었다고 씁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죠. - “파파, 저 말고 일부 피아노 연주에 능한 종마가 랩소디를 연주하게 해줘요.” 하지만 그가 연주했을 때, 그는 피아니스틱한 종마일 필요가 없었죠. 그에게는 뭔가가 있었으며, 청중은 그 밖의 다른 것을 느낄 수 있었고, 그의 연주에서 그것을 들을 수 있었어요...

Militsa Neuhaus, the daughter of Heinrich Neuhaus: But then a big misfortune happened - he fell sick after the 1st all-union competition. He became infected with diphtheria, but it went undiagnosed. He became fully paralyzed. The doctors said he wouldn't be able to play again. That was in 1934. He was sick for almost a year. He recovered, but he couldn't play. He worked really hard to get back in shape and gradually started playing again. But two fingers on his right hand - a pinky and a ring finger - he used to write about them: "Those little rascals, they don't work." No one knew how hard it was for him to play. After that illness, as they write about him, he became...inconsistent, but of course, he had many students - 32 of them at times, and all of them required his attention. He did not have enough time to practice, he definitely needed more time in his condition. It was an entirely different matter with Richter or Gilels - they didn't have to practice as much as he did - he definitely had to play more. Richter would become angry with him and ask: "Heinrich Gustavovich, why are you wasting your time on these pupils? They are not going to play any better, no matter what." He used to say that.

밀리차 네이가우스 (하인리히 네이가우스의 딸) : 그러나 큰 불행이 일어났습니다. - 그는 제1회 전소련 콩쿠르 이후에 아팠죠. 그는 디프테리아에 감염되었지만, 진단되지 않았어요. 그는 완전히 마비되었죠. 의사들은 그가 다신 연주할 수 없을 거라고 말했어요. 1934년이었네요. 그는 거의 1년 동안 아팠죠. 그는 회복했지만, 연주할 수 없었어요. 그는 다시 건강해지려고 정말 열심히 노력했으며 점차 다시 연주하기 시작했죠. 그러나 그의 오른손에서 새끼손가락과 넷째손가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곤 했죠. - “이 꼬마 녀석들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에게 연주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아무도 몰랐죠. 그 병을 앓은 후에, 그는 자신에 대한 글을 쓸 때 일관성이 없어졌지만...물론 그에게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죠. - 당시에 그들 중 32명 그리고 모두 그의 관심을 요구했죠. 그에게는 연습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으며,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상태였죠. 리히터나 길렐스와는 전적으로 다른 문제였죠. - 그들에게는 그만큼 연습할 시간이 많지 않아도 되었으니까요. - 그는 확실히 더 많이 연주해야만 했죠. 리히터는 그에게 화를 내며 질문했어요. - “하인리히 구스타보비치, 왜 이 제자들에게 시간을 낭비하고 계시나요? 무슨 일이 있어도 더 나아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곤 했죠.

Marina Neuhaus, the granddaughter of Heinrich Neuhaus: Heinrich Gustavovich and Zinaida Nikolayevna met in Elisavetgrad. She was a very talented musician and had studied in Saint Petersburg with Blumenfeld, Felix Mikhailovich, who was a relative of Heinrich Gustavovich. She later moved to Elisavetgrad and there she met Heinrich Gustavovich. Once, she attended his concert and was stunned by his playing. So right away she wanted to study with him. She started to take lessons with him and became his pupil. It so happened that they got married and lived in Kiev. They were acquainted with Vladimir Horowitz - they were good friends. They played duets together - Horowitz and Zinaida Nikolayevna. They lived in Kiev for a while and then moved to Moscow. They had two kids - Adik, the elder son, and my father, Stanislav - everyone called him Stasik - who was a year and a half younger. When they moved to Moscow, Heinrich Gustavovich met and became good friends with Boris Leonidovich Pasternak. Heinrich Gustavovich was very fond of his poetry and very fond of him. They were very fond of each other from the very start. It so happened that their families got really close, they were all good friends and used to go on vacations together to Irpen, near Kiev. It was there that Pasternak realized that he had fallen in love with Zinaida Nikolayevna. He fought that falling really hard at first, because Neuhaus was his friend, but after a year or year and a half he confessed his feelings to Zinaida Nikolayevna. She was very fond of Pasternak as a poet, and as a friend. She was smitten by his confession and by strength of his feeling for her. But her love for Heinrich Gustavovich was still strong; she had a very tough time of uncertainty as to how it was all going to turn out. In the end Pasternak's love for her prevailed. Interestingly enough, when the years had passed and the pain had subsided, they were all friends again. Heinrich Gustavovich later married Militsa Sergeyevna Borodkina, with whom he had a daughter, Militsa.

마리나 네이가우스 (하인리히 네이가우스의 손녀) : 하인리히 구스타보비치와 지나이다 니콜라예프나는 엘리자베트그라드에서 만났어요. 그녀는 재능 있는 음악가였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하인리히 구스타보비치의 친척인 펠릭스 미하일로비치 블루멘펠트를 사사했죠. 그녀는 나중에 엘리자베트그라드로 이주했으며 그곳에서 하인리히 구스타보비치를 만났어요. 그녀는 그의 콘서트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의 연주에서 큰 감동을 받았죠. 그래서 그녀는 당장 그와 함께 공부하고 싶어 했어요. 그녀는 그의 레슨을 받기 시작했으며 그의 제자가 되었죠. 그렇게 그들은 결혼하여 키예프에서 살았죠. 그들은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친해졌는데, 좋은 친구들이었죠. 호로비츠와 지나이다 니콜라예프나는 듀오 연주를 가졌죠. 그들은 한동안 키예프에서 살았으며 이후 모스크바로 이주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두 명의 아이들이 있었어요. - 장남인 아딕과 저의 아버지인 스타니슬라프 -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스타식이라고 불렀죠. - 1년 반 어린 나이였어요. 그들이 모스크바로 이주했을 때, 하인리히 구스타보비치는 보리스 레오니도비치 파스테르나크를 만나서 좋은 친구가 되었어요. 하인리히 구스타보비치는 보리스의 시를 정말 좋아했으며 그를 정말 좋아했어요. 그들은 처음부터 서로를 아주 좋아했어요. 그들의 가족이 정말 가까워졌고, 모두 좋은 친구였으며, 키예프 근처의 이르핀으로 함께 휴가를 가곤 했죠. 파스테르나크는 자신이 지나이다 니콜라예프나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는 네이가우스가 자신의 친구였으므로 처음에는 그 느낌과 싸우기 힘들었지만, 1년이나 1년 반이 지난 후에 지나이다 니콜라예프나에게 자신의 감정을 고백했죠. 그녀는 시인이자 친구로서 파스테르나크를 매우 좋아했어요. 그녀는 그의 고백과 그녀를 향한 그의 감정의 힘에 이끌렸죠. 그러나 하인리히 구스타보비치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여전히 ​​강했는데, 그녀는 그것이 어떻게 될지에 대해 매우 불확실한 힘든 시간을 가졌죠. 결국 파스테르나크의 그녀에 대한 사랑이 우세했죠. 흥미롭게도 몇 년이 지나 고통이 가라앉았을 때 그들은 모두 다시 친구였죠. 하인리히 구스타보비치는 나중에 밀리차 세르게예프나 보로드키나와 결혼하여 딸 밀리차를 낳았죠.

Militsa Neuhaus, the daughter of Heinrich Neuhaus: My mother was his (Neuhaus') bride even before World War I. In her memoirs, Zinaida Nikolayevna Pasternak, who moved to Elisavetgrad where they all lived, reminisces that she always saw him walk hard-in-hand with Militsa Sokolova-Borodkina. So it was she who was my mother. Then the war started, they parted ways and met again in Moscow many years later. They lived close to each other. Heinrich Gustavovich lived with his parents on Trubnikovsky Lane along with Zinaida Nikolayevna and their two boys - they all lived together. My mother lived around the corner on Large Molchanovka Street. They probably bumped into each other somewhere and...it should be said that I was born in 1929, but he (Neuhaus) and Zinaida Nikolayevna separated in 1931, I think, when Boris Leonidovich Pasternak so strongly fell in love with her and she left him (Neuhaus) for Boris Leonidovich. I was born in 1929, but they separated in 1931! When Zinaida Nikolayevna and Boris Leonidovich left for the Caucasus. Heinrich Gustavovich wrote very tender letters to her. So tender were those letters that in one of her letters to him Zinaida Nikolayevna asked: "Maybe I should come back to you?" He wrote back right away: "What are you talking about? You probably like him better, so live with Boris, for now." Later he officially married my mother. Initially, my birth certificate didn't have any information about my father; there was a rule to that the father's name should be omitted if the parents were as yet unmarried.

밀리차 네이가우스 (하인리히 네이가우스의 딸) : 저의 어머니는 1차 세계대전 이전에도 그(네이가우스)의 신부였어요. 어머니의 회고록에 의하면, 엘리자베트그라드로 이주하여 살았던 지나이다 니콜라예프나 파스테르나크는 그가 항상 밀리차 소콜로바-보로드키나와 손잡고 걷는 것을 보았다고 회상해요. 따라서 그녀는 저의 어머니였죠. 그런 다음 전쟁이 시작되어, 몇 년 후 그들은 모스크바에서 이별하고 다시 만났죠. 그들은 서로 가까이 살았어요. 하인리히 구스타보비치는 지나이다 니콜라예프나와 그들의 두 아들들을 따라 부모님과 함께 트루브니코프스키 거리에서 살았어요. - 그들 모두 함께 살았어요. 어머니는 큰 몰차노프스카 거리 모퉁이에 살았어요. 그들은 어쩌면 어딘가에서 서로 부딪혔을 것이고...제가 1929년에 태어났다고 말해야 하지만, 그(네이가우스)와 지나이다 니콜라예프나는 1931년에 이혼했는데, 제 생각에 보리스 레오니도비치 파스테르나크가 그녀와 강렬한 사랑에 빠져서 보리스 레오니도비치 때문에 그(네이가우스)를 떠났을 때였죠. 저는 1929년에 태어났지만, 그들은 1931년에 결별했어요! 지나이다 니콜라예프나와 보리스 레오니도비치가 카프카스(코카서스)로 떠났을 때였죠. 하인리히 구스타보비치는 그녀에게 매우 부드러운 편지를 썼어요. 지나이다 니콜라예프나가 그에게 보낸 편지 중 하나에서 매우 부드러운 편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 “어쩌면 제가 당신에게 돌아와야 할까요?” 그는 바로 답장을 썼습니다. - “무슨 소리야? 아마도 당신은 그를 더 좋아하므로 지금을 위해 보리스랑 살 거야.” 나중에 그는 공식적으로 저의 어머니와 결혼했죠. 처음에는 출생증명서에 아버지에 대한 정보가 없었는데, 부모님이 아직 결혼하지 않은 경우 아버지의 이름을 생략해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죠.

Marina Neuhaus, the granddaughter of Heinrich Neuhaus: Papa lived in the vacation house in Peredelkino with the Pasternaks. He was very fond of Boris Leonidovich, and Boris Leonidovich very much valued him as a musician. Heinrich Gustavovich and Militsa Sergeyevna visited Peredelkino very often; they were all very good friends.

마리나 네이가우스 (하인리히 네이가우스의 손녀) : 파파는 파스테르나크 부부와 함께 페레델키노에 있는 별장에서 살았어요. 그는 보리스 레오니도비치를 매우 좋아했으며, 보리스 레오니도비치는 그를 음악가로서 매우 높이 평가했죠. 하인리히 구스타보비치와 밀리차 세르게예프나는 페레델키노를 정말 자주 방문했는데, 그들 모두 아주 좋은 친구였네요.

Vera Gornostayeva: You know very well about the bullying of Pasternak, about this ugly incident with Doctor Zhivago, about what was going on in Peredelkino at that time. As Lidiya Korneyevna Chukovskaya writes in her memoirs, when she and Korney Ivanovich got there (Peredelkino), no one was there, everyone had left...everyone - but Neuhaus. He was there the whole time. And I read about it with so much pride for my teacher, because in spite of his capriciousness, unpredictability, and all the features of a true artist that he possessed, he always remained a decent human being! One had to be very courageous to behave like that...

베라 고르노스타예바 : 당신은 파스테르나크의 괴롭힘, <닥터 지바고>에 얽힌 추악한 사건, 그 당시 페레델키노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리디야 코르네예프나 추코프스카야가 그녀의 회고록에 쓰듯이, 그와 코르네이 이바노비치가 거기(페레델키노)에 도착했을 때, 아무도 거기에 없었으며, 모든 사람이 떠났고...모든 사람 - 네이가우스를 제외하고요. 그는 온종일 거기에 있었죠. 그리고 저는 그의 변덕, 예측 불가능함, 그리고 그가 소유한 진정한 아티스트의 모든 특징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괜찮은 인간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제 선생님에 대한 자부심으로 그것에 대해 읽었어요! 그렇게 행동하기 위해서는 매우 용기가 있어야 했죠...

Heinrich and Stanislav Neuhaus, 1958 / 하인리히와 스타니슬라프 네이가우스 부자
"So you going to play that prelude by Rachmaninoff, aren't you?"

“그래서 라흐마니노프 전주곡을 연주하지 않을래?”

"Yes, I am going to play it."

“네, 연주할게요.”

"Go ahead."

“시작해.”

Marina Neuhaus, the granddaughter of Heinrich Neuhaus: My papa, Stanislav Genrikhovich, was a very unique musician and artist. Although he played Chopin and Scriabin and was an embodiment of Neuhaus' school of pianism, he was a unique talent in his own right. They became very close when Papa was finishing his studies at the Conservatoire, when he was already a fully formed musician. Heinrich Gustavovich felt that and made him his assistant right away. He valued him a lot. They were very fond of each other, they concertized together a lot; but he (Stanislav) was very different - he was more introverted, more reserved, more quiet.

마리나 네이가우스 (하인리히 네이가우스의 손녀) : 저의 파파, 스타니슬라프 겐리호비치는 매우 독특한 음악가이자 아티스트였어요. 비록 쇼팽과 스크리아빈을 연주했고 네이가우스 피아니즘 스쿨의 구체화였지만, 자신의 고유한 재능이 있었죠. 파파가 음악원에서 공부를 마쳤을 때, 그가 이미 완전히 형성된 음악가가 되었을 때, 그들은 매우 가까워졌죠. 하인리히 구스타보비치는 그것을 느꼈고 그(스타니슬라프)를 당장 조수로 썼죠. 그는 아들인 저의 파파를 많이 소중히 여겼어요. 서로 아주 좋아했고, 함께 콘서트를 가졌지만, 그(스타니슬라프)는 매우 달랐어요. - 그는 보다 내향적이고, 보다 내성적이며, 보다 조용했죠.

Vera Gornostayeva: Stasik (Stanislav) was immensely talented, with an ever-present fracture in his soul. It was not easy to be the son of two such people. On one hand there was Pasternak, who was hated by the regime, and on the other there was Neuhaus - of course he was a victim of similar attitudes. Stasik experienced that fully when he passed as Number 1 to go to the Chopin Piano Competition in Warsaw. He was literally taken off the plane and wasn't allowed to go. Heinrich understood that it was because of him, so it was obvious how the regime treated Neuhaus.

베라 고르노스타예바 : 스타식(스타니슬라프)은 그의 영혼에 항상 존재하는 분열과 함께, 엄청난 재능을 지녔어요. 그런 두 사람의 아들이 되는 것은 쉽지 않았죠. 한편으로는 정권의 미움을 받은 파스테르나크가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네이가우스가 있었어요. - 물론 그는 비슷한 태도의 희생자였죠. 스타식은 바르샤바에서 열리는 쇼팽 국제피아노콩쿠르에 넘버원으로 통과했을 때 충분히 경험했죠. 그는 말 그대로 비행기에 몸을 실렸지만 가는 게 허락되지 않았어요. 하인리히는 그것이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이해했으므로, 정권이 네이가우스를 어떻게 대했는지는 분명했죠.

Pavel Lobanov, Meritorious Worker of Culture and employee at Scriabin's Museum: Scriabin's Museum - Neuhaus used to play here. There were always many people in the audience. He (Neuhaus) used to say that everything was written in the score - one just had to read it properly. But he taught what was not in the score, you see, because it would be very boring if one followed the score to the letter. He never tried to impose only one way of playing on his students. He used to say: "True pedagogues always tell their students, 'There is only one way to play this.' True pedagogues, but not teacher like me. I think there is more than one way." In music, and in art, there can never be only one best, there can be many bests. Richter, Sofronitsky, Neuhaus - they all played wonderfully, each in their own way.

파벨 로바노프 (공훈예술가이자 스크리아빈 박물관 직원) : 스크리아빈 박물관 - 네이가우스는 여기서 연주하곤 했죠. 항상 청중이 많았어요. 그(네이가우스)는 모든 것이 악보에 적혀 있다고 말하곤 했죠. - 제대로 읽어야만 했죠. 그러나 그는 악보에 없는 것을 가르쳤는데, 아시다시피 글자 그대로 악보를 따랐다면 매우 지루할 것이기 때문이죠. 그는 학생들에게 한 가지 방식으로만 연주할 것을 강요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곤 했죠. - “진정한 교육자들은 학생들에게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을 연주하는 유일한 방법은 없다.’ 진정한 교육자들이지만, 저 같은 선생님은 아닙니다. 저는 한 가지 이상의 방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음악에서, 그리고 예술에서, 단 하나의 최고만 있을 수는 없으며, 많은 최고가 있을 수 있습니다. 리히터, 소프로니츠키, 네이가우스 - 그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훌륭하게 연주했으니까요.

Militsa Neuhaus, the daughter of Heinrich Neuhaus: The war started. Adik, the elder son, was in a tuberculosis sanatorium; Heinrich Gustavovich couldn't leave him there alone, so they had to postpone the evacuation. On November 4th he was arrested. I remember, on that day we...He always wanted me to take refuge in a bomb shelter during bombardments. He himself would go on the rooftop to help remove German 'lighters' (these were dropped from German planes on rooftops to cause fire), but I had to be in a bomb shelter. So, on that day we were in a bomb shelter. It was quite late when we came back home. I was woken up by people who came to conduct a search; by that time Heinrich Gustavovich had already been taken away. The arrest warrant stated 'refusal to evacuate' as the reason for his arrest. Since he was half German and his late name was German the authorities alleged that he hadn't evacuate because he was waiting for the Germans. At his first interrogation, he said: "I oppose Hitler's regime; there is no way I could be waiting for the Germans." The investigation lasted for eight and a half months; transmissions were not allowed for the first six months. He developed scurvy and lost most of his teeth, he was starving. In prison they were mostly fed herring tails soup and a slice of bread - and that was basically it.

밀리차 네이가우스 (하인리히 네이가우스의 딸) :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장남 아딕은 결핵 요양소에 있었는데, 하인리히 구스타보비치는 그를 혼자 내버려둘 수 없었으므로 대피를 연기해야만 했죠. 11월 4일에 그는 체포되었죠. 저는 기억해요, 그날 우리는...그는 항상 제게 폭격 중에 폭탄 대피소에서 피난처를 갖기를 원했어요. 그는 독일의 ‘불쏘시개’를 제거할 수 있도록 옥상으로 갔지만(독일군의 비행기에서 옥상으로 떨어져서 화재를 일으켰는데), 저는 폭탄 대피소에 있어야만 했죠. 그래서 그날 우리는 폭탄 대피소에 있었어요. 우리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꽤 늦었어요. 저는 수색하려고 온 사람들에 의해 깨어났는데, 그때까지 하인리히 구스타보비치는 이미 제거되었죠. 체포 영장은 체포 사유로 ‘피난 거부’를 선언했어요. 그는 독일의 피가 절반이고 성이 독일식(으로 노이하우스)이었기 때문에 당국은 그가 독일군을 기다렸기 때문에 대피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죠. 첫 심문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어요. - “저는 히틀러 정권에 반대합니다. - 제가 독일군을 기다릴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조사는 8개월 반 동안 지속되었는데, 처음 6개월 동안 전송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괴혈병을 앓고 있고 치아의 대부분을 잃었는데, 굶주리고 있었어요. 감옥에서 그들은 주로 청어꼬리수프와 빵 한 조각을 먹었어요. - 그게 기본이었죠.

Vera Gornostayeva: He (Neuhaus) was in prison when the Germans were on the outskirts of Moscow. He used to say about that period: "Hotel Lubyanka." Well, what can one say about him? Hotel Lubyanka...he was joking. It was Emil Gilels' interference that saved him then. Emil Grigorievich talked to Stalin, not once, but twice at great risk to himself. That helped - he (Neuhaus) was released from prison and sent on a train to the Urals. It was possible for him to get off in Sverdlovsk and to stay there to teach at the Sverdlovsk Conservatoire instead of cutting trees in the Urals.

베라 고르노스타예바 : 독일군이 모스크바 외곽에 있을 때 그(네이가우스)는 감옥에 갇혔어요. 그는 그 시대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죠. - “호텔 루비안카.” 음, 그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 호텔 루비안카...그가 농담하고 있었죠. 그를 구한 것은 에밀 길렐스의 개입이었죠. 에밀 그리고리예비치는 대단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스탈린에게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말했습니다. 그것이 도왔죠. - 그(네이가우스)는 감옥에서 풀려나서 우랄 산맥으로 가는 기차로 보내졌죠. 우랄 산맥에서 나무를 베는 대신 스베르들로프스크 음악원에서 가르치는 것이 가능했죠.

Neuhaus' return from exile was helped by the letter-petition addressed to Kalinin...and signed by Ivan Moskvin, Vasily Kachalov, Militsa Nechkina, Alexey Tolstoi, Sergey Mikhalkov, Konstantin Igumnov, and Dmitri Shostakovich. Here are some lines from that letter: "In spite of his non-Russian last name, Neuhaus, without a doubt, is both a Russian and a Soviet artist...whose teaching methods are in the best traditions of both the Russian and Soviet schools...and who is an outstanding embodiment of both Russian and Soviet culture. His return will be in the best interests of both Russian and Soviet art." Neuhaus returned to Moscow in July, 1944. Now, he taught not only at the Conservatoire, but at the Gnessin Institute as well. The names of distinguished graduates of the Gnessin Institute are added to those of the Conservatoire.

추방당한 네이가우스의 복귀는 미하일 칼리닌에게 보낸 진정서에 의해 도움을 받았으며...이반 모스크빈, 바실리 카찰로프, 밀리차 네치키나, 알렉세이 톨스토이, 세르게이 미할코프, 콘스탄틴 이굼노프,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가 서명했다. 그 편지의 일부 행은 다음과 같다. - “러시아계 성이 아님에도, 의심의 여지없이 네이가우스는 러시아와 소비에트의 아티스트이고...그의 교수법은 러시아와 소비에트 스쿨의 최고 전통에 있으며...러시아와 소비에트 문화의 뛰어난 구체화입니다. 그의 복귀는 러시아와 소비에트 예술 모두에 최선의 이익이 될 것입니다.” 네이가우스는 1944년 7월에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이제 그는 음악원뿐만 아니라 그네신 음대에서도 가르쳤다. 그네신 음대의 저명한 졸업생들의 이름은 음악원 졸업생들의 이름에 추가된다.

Vera Gornostayeva: This photograph is very dear to my heart. It's signed "To my dear, talented, and fervent-fervent is underlined - pupil, Vera Gornostayeva, in memory of her sincerely loving 'so called' teacher." He had the idea that he wasn't a teacher but rather an adviser, that he just gave advice rather than taught. He didn't like being called a teacher. To my question "Heinrich Gustavovich, do you like pedagogics?" He would answer: "No, I don't like pedagogics, but I like music and I like pupils."

베라 고르노스타예바 : 이 사진은 제게 매우 소중합니다. 서명이 있는데 “친애하는 재능 있는 열렬한 열정을 가진 학생에게는 밑줄이 그어져 있는데 - 제자 베라 고르노스타예바, ‘소위’ 선생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그녀를 기억하며.” 그는 자신이 선생님이 아니라 조언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단지 가르치기보다는 조언만 했죠. 그는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하인리히 구스타보비치, 선생님은 교수법을 좋아하시나요?” 하는 제 질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을 것입니다. “아니, 나는 교수법을 좋아하지 않지만, 음악을 좋아하고 제자들을 좋아해.”

"16 year-old Aleksey Nasedkin, a 10th grade student of the Moscow Central Music School at the Moscow Conservatoire, is performing Chopin's Etude in C minor."

“모스크바 음악원 부속 중앙음악학교 10학년 학생인 16세의 알렉세이 나세드킨이 쇼팽의 혁명 에튀드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Aleksey Nasedkin: When I was in school, my teacher, Anna Danilovna Artobolevskaya, used to showcase her students in front of the professors - Neuhaus, Gilels, Yudina, Flier, Zak, Oborin... - I played in front of them all. They were all great musicians, but I am going to single out Neuhaus - he was the first among equals.

알렉세이 나세드킨 : 재학 중일 때 제 스승인 안나 다닐로프나 아르토볼레프스카야는 교수님들 앞에서 학생들을 소개했습니다. - 네이가우스, 길렐스, 유디나, 플리에르, 자크, 오보린... - 저는 그들 앞에서 연주했죠. 그들은 위대한 음악가였지만, 저는 네이가우스를 고를 것입니다. - 그는 동급 중에서도 최고였으니까요.

Vera Gornostayeva: I am often asked how he taught. How did he teach? He was very diverse. One time I called him during the summer: "Hello, Heinrich Gustavovich, it's Vera Gornostayeva. Is it okay if I play Beethoven's 5th Piano Concerto?" A pause...then: "Well, why not, it's a great composition. Remember darling, it doesn't matter what, it matters how." That was Neuhaus' first lesson over the phone.

베라 고르노스타예바 : 저는 그가 어떻게 가르쳤는지 종종 질문을 받습니다. 그가 어떻게 가르쳤을까요? 그는 매우 다양했어요. 여름에 한 번 그에게 전화했을 때였어요. - “안녕하세요, 하인리히 구스타보비치, 베라 고르노스타예바입니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을 연주해도 되나요?” 잠시 멈춘 다음... “글쎄, 거 좋지, 훌륭한 작품이야. 사랑한다는 것을 기억해, 무엇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지가 문제야.” 그것이 전화를 통한 네이가우스의 첫 레슨이었네요.

Elena Richter: Pavel Vasilyevich Lobanov used to make audio and even video recordings of our lessons when we studied here. He was very enthusiastic about it. In order to do a video recording he used to bring some terribly big piece of recording equipment in some huge boxes. We didn't have a power inlet, so we used to put a chair on top of the table and connect that equipment to one of those light bulbs.

엘레나 리히터 : 파벨 바실리예비치 로바노프는 우리가 여기서 공부했을 때 우리 수업의 오디오 녹음 심지어는 비디오 녹화도 만들곤 했죠. 그는 그것에 대해 매우 열정적이었어요. 비디오 녹화를 위해 그는 거대한 상자에 아주 큰 녹화 장비를 가져왔어요. 우리는 전원 콘센트가 없었기 때문에 의자를 탁자 위에 놓고 그 장비를 전구 중 하나에 연결했죠.

Pavel Lobanov: There was not a single power inlet in that Classroom 29. The only way was to somehow reach a chandelier - and it was very small and very close to the ceiling - and to connect the power cord of our recorder.

파벨 로바노프 : 해당 교실 29에는 전원 콘센트가 하나도 없었어요. 유일한 방법은 어떻게든 샹들리에에 도달하는 것이고 - 매우 작고 천장에 매우 가까웠으며 - 우리의 레코더의 전원 코드를 연결했죠.

Elena Richter: The door opens quietly; the cane appears first, then Heinrich Gustavovich himself. His gestures say, "Keep playing, keep playing." We keep playing. Everyone adored him - women, men, musicians, artists, philosophers. The cleaning ladies - they loved him, too. All those anechkas...everyone loved him, because he could find an approach to everyone, he never put himself above others. There are people, very significant people, who are not very approachable - he was, the same time he did not stoop to other people's level, he somehow elevated those people to his. I got a letter from some woman who wrote that she had been through everything in her life; she had been through war - ...the war had all but destroyed her, she felt that her life was over and that she could not see any point in living on. Then, by chance, she found herself at one of Neuhaus' concerts, where he played Chopin, if I am correct. And she suddenly realized that nothing was over, that she could start a new life. His art had such a strong impact on everyone who came in contact with him!

엘레나 리히터 : 문이 조용히 열리는데, 먼저 지팡이, 다음으로 하인리히 구스타보비치 자신이 나타납니다. 그의 제스처는 “계속 연주해, 계속 연주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계속 연주합니다. 모두가 그를 좋아했어요. - 여자, 남자, 음악가, 아티스트, 철학자. 청소하는 여성들도 그를 정말 좋아했어요. 모든 아네치카들...모든 사람이 그를 사랑했는데, 그는 모든 사람에게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에, 결코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우위에 두지 않았거든요.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들, 매우 중요한 사람들이 있는데 - 그는 다른 사람들의 수준에 맞지 않았을 때, 어떻게든 사람들을 자신의 수준으로 끌어올렸죠. 저는 어떤 여자로부터 그녀의 삶의 모든 것을 겪었다고 쓴 편지를 받았는데, 그녀는 전쟁을 겪었어요. - ...전쟁은 그녀를 거의 모두 파괴했고, 그녀는 자신의 인생이 끝났다고 느꼈으며, 계속 사는 것에서 어떤 점도 볼 수 없었죠. 그때 우연히, 그녀는 네이가우스의 콘서트 중 하나에서 자신을 발견했는데, 제가 정확하다면 그는 쇼팽을 연주했어요. 그리고 그녀는 갑자기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으므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죠. 그의 예술은 그와 접촉한 모든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어요!

Vera Gornostayeva: I come to a lesson; I am a bit early. I am thinking: "I am going to warm up in Classroom 29 and he (Neuhaus) most likely won't be there at nine o'clock in the morning." He was there, alone - he probably wanted to practice, but I came and spoiled it for him. I had a score of Chopin's Mazurkas with me. "What are these?" "Chopin's Mazurkas." "Ah, and how are they moving along?" "Not good." "Really? Why so?" He then takes the book, opens it and starts playing. I stand next to him. He plays for the whole two hours, while I turn pages for him...and listen. Then someone came in. He closed the book, looked at me and said, "So, now you understand?" And I say, "Yes, I understand." But what I really understand is that I shouldn't play those Mazurkas after what I've just heard. Enough years have passed; I am having a concert at the Small Hall...thinking about the program, what to play. I enter the classroom, thinking, "I'll play something." There is a score of Chopin's Mazurkas there, on the piano. The memories of that lesson returned right away. I am thinking: "It's not a coincidence; it's a 'Hi' from Heinrich - Mazurkas, Mazurkas." I opened the score. So I am sitting there alone, playing...and weeping. Of course I was weeping...all those memories. Then I understood, "I am going to play the Mazurkas from now on." He was not with us anymore, but the memories of that lesson were trapped inside me.

베라 고르노스타예바 : 저는 레슨으로 돌아가는데, 약간 일찍이요. 저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어요. “29번 교실에서 손가락을 풀 예정이며 그(네이가우스)는 아침 9시에 없을 거다.” 그는 홀로 거기에 있었어요. - 그는 아마도 연습하고 싶었겠지만, 제가 와서 망쳤죠. 저는 쇼팽 마주르카 악보를 들고 왔어요. “이게 뭐지?” “쇼팽의 마주르카요.” “아, 그러면 어떻게 진행하지?” “좋지 않아요.” “정말? 왜 그래?” 그는 그런 다음 책을 가져와서 악보를 펴고 연주하기 시작합니다. 저는 그 옆에 서있고요. 그는 2시간 동안 연주하며, 저는 페이지를 넘겨주면서...들어요. 그런 다음 누군가가 들어왔어요. 그는 책을 덮고 저를 보면서 말했어요. “그래, 이제 이해했니?” 그러면 저는 말합니다. “네, 이해했어요.” 그러나 제가 정말로 이해한 것은 제가 방금 들은 후에 마주르카를 연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몇 년이 지났습니다. - (모스크바 음악원의) 소강당에서 콘서트를 가지고 있는데...무엇을 연주해야 할지, 프로그램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어요. 교실로 들어가면서 생각하죠. “나는 뭔가를 연주할 것이다.” 피아노에는 쇼팽의 마주르카 악보가 있습니다. 그 레슨에 대한 기억이 즉시 돌아왔죠. 저는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 “우연의 일치가 아니지만, 그건 하인리히로부터의 ‘안녕’이다. - 마주르카, 마주르카.” 저는 악보를 폈습니다. 그래서 저는 홀로 앉아 연주하고 있으며...울고 있습니다. 물론 저는 울고 있었어요...그 모든 기억들. 그런 다음 이해했어요. “지금부터 마주르카를 연주할 거야.” 그는 더 이상 우리와 함께 있지 않았지만, 그 레슨에 대한 기억은 제 안에 남아있었어요.


아들의 다큐멘터리를 먼저 받았는데 유튜브에서 자막을 찾다가 아버지의 것도 나와서 할 수 없이 먼저 번역했다. 자막을 굳이 받아쓰기해서 번역한 이유는 러시안 피아노 스쿨에 대한 공부이기도 하다. 졸지에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열렸던 초창기 쇼팽 콩쿠르 공부까지 했다. 1937년 3회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야코프 자크와 준우승한 로자 타마르키나 모두 유태계이다. 타마르키나에 대해서 찾아보니 16세에 참가했다. 생일은 3월인데 쇼팽 콩쿠르가 열렸던 시기가 2~3월. 당시에는 폴란드에서 예선을 치르는 게 아니라 나라별로 참가자들을 뽑아서 대표로 보내던 시절. 러시아랑 폴란드랑 역사적인 이유로 인해 사이가 안 좋은데 소련이 초창기에 우승을 해먹었다. 초대 우승자는 유태계인 오보린. 타마르키나가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몇 번 연주한 흔적을 보니 결선에서 2번을 연주했나보다. 자크는 나중에 교육자가 되었고 타마르키나는 암으로 인해 30세에 요절했다. 이때는 차이코프스키 콩쿠르가 없던 시절... 길렐스가 우승한 퀸엘리자베스 콩쿠르도 초대 대회의 명칭은 이자이 콩쿠르였다. 이렇게 유태계가 이어준 러시안 피아니즘까지도 들여다보게 되었다. 매번 그렇지만 번역이 처음에는 쉽지 않았는데 몇 번 고비를 넘기다 보니 술술 이어갔다. 뭔가 영어 번역이 문법에 맞지 않는다는 느낌도 있었다. 그래서 구어체려니 하면서 넘어갈 수밖에... 애초에 받으려고 계획했던 동영상이 아니었지만 결국 자막 받아쓰기하면서 편하게 볼 겸 유튜브에서 자막까지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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