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고 있고 이제 거의 끝마무리에 접어든 20세기는 실로 대립과 투쟁, 전환의 세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70년이 넘게 러시아 대륙을 덮고 있었던 사회주의라는 구름은 누구보다도 자유를 먹고 살아가야 할 예술가들에게 원치 않는 시련과 고통을 극복해야만 하게 만들었다. 지금 소개하려는 피아니스트 엘레나 베크만-셰르비나도 어지러웠던 시절, 격동하는 20세기 전반을 살며 치열한 음악적 삶을, 그러나 누구 못지않게 보람 있는 인생을 걸어간 예술가였다. 너무나도 혼란스러웠던 19세기 말 베크만-셰르비나는 모스크바 음악원의 가장 뛰어났던 선생 세 사람과 공부할 수 있었던 행운을 가졌는데 니콜라이 즈베레프, 바실리 사포노프, 파벨 파브스트가 그들이다. 즈베레프는 스크리아빈과 라흐마니노프를 가르쳤고, 모스크바 음악원의 총장을 역임하기도 했던 사포노프는 메트너와 게디케를, 파브스트는 골덴바이저와 이굼노프를 길러낸 명교수들이니 명실 공히 20세기를 수놓은 눈부신 러시아 피아니즘의 역사를 만든 선구자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음악원 졸업 시 금메달(수석졸업) 수상으로 실력을 인정받은 베크만-셰르비나는 그 후 곧바로 콘서트 무대로 뛰어들어 활발한 연주 활동을 시작했다. 그녀는 특히 농업 전문가이자 남편 L. 베크만의 영향을 받아 농업학교의 학생들과 일반인들을 위한 자선 음악회를 기획하는 등 당시 서유럽 문화에 대한 동경과 콤플렉스에 젖어 있던 제정 러시아 말기의 서민들의 계몽에 앞장섰다. 그리고 1917년 10월 사회주의 혁명 직후의 어지럽던 소련 사회에서 그녀는 음악인으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고 끊임없이 무대에 섬으로써 시민 계몽 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무척 힘들었던 시기였습니다. 냉방장치도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콘서트홀에서 리허설과 연주를 해야 했죠. 무대에서 저는 장화와 외투와 손이 건반에서 얼어붙지 않도록 손가락이 뚫린 장갑을 낀 상태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피아노를 쳐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허나 그때의 기억은 제 가슴속에 청중들의 뜨거운 눈빛과 박수소리와 함께, 그 어떤 시절보다도 따뜻했던 느낌과 함께 남아있습니다.” 1962년에 출간된 그녀의 회고록 중의 일부이다.
베크만-셰르비나는 1908년부터 25년간 그네신 음악학교에서 가르쳤고, 1940년에는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로 임명되는 등 교육자로서(특히 아동교육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으나, 역시 그녀의 본령은 50년 이상을 쉬지 않았던 피아니스트로서의 활동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1924년부터 라디오 방송국의 솔리스트로 일했던 그녀의 레퍼토리는 당시 700여 곡에 달했다고 전해지며, 특히 암울했던 레닌-스탈린 시대에 박해받던 자국의 작곡가들(프로코피에프, 글리에르, 알렉산드로프 등)의 소개에 힘썼다. 또한 그녀의 선구자적 업적은 당시 러시아 청중들에게 낯설었던 드뷔시, 라벨, 시벨리우스, 알베니스 등을 처음 소개했고 알린 피아니스트라는 점에서도 찾아볼 수 있겠다.
음악평론가 A. 알렉세예프는 베크만-셰르비나의 연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깊고 신중한 터치의 대가 풍의 번쩍이는 한 폭의 풍경화... 베크만-셰르비나의 연주를 들을 때 느껴지는 것이다. 그녀의 연주는 맑고 깨끗한 동시에 탄탄한 비례를 갖추고 있어, 어떠한 불완전한 형식의 곡이라도 그녀의 손이 닿으면 그런 결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음악에서는 노래하는 멜로딕한 흐름이 항상 첫 번째 플랜을 차지하며, 리리컬한 성격의 곡에서 베크만-셰르비나처럼 물 흐르는 듯한 터치를 구사할 수 있는 피아니스트는 많지 않다.”
여기에 수록된 러시아 살롱 풍의 소품들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러시아 피아니스트들이 즐겨 연주하던 성격의 작품들이다. 소규모의 곡이기는 하나 베크만-셰르비나가 1940년대 이후 추구한 레퍼토리들(보르트니얀스키, 글리에르, 글라주노프 등의 작품들을 재조명했다.)의 중심을 차지하는 진지한 탐구의 결과이며, 연주 자체도 60대 후반에 이루어진 녹음답지 않게 일류급의 솜씨를 간직하고 있어 그냥 흘려버리기에는 아까운 작품들이다.
이 앨범에 실린 러시아 소품들을 듣는데 있어서 세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이 있는데, 첫 번째는 러시아 민요 등 성악곡들의 영향이다. 발라키레프의 “종달새” 편곡(1번 트랙), 알랴비에프의 “나이팅게일”에 의한 리스트의 편곡(5번 트랙) 등 직접적인 가곡의 편곡은 차치하고라도 이런 캐릭터 피스들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아이디어는 대부분 당시 유행하던 노래나 극음악 등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에서 예로 들은 두 개의 트랙 외에 다른 곡에서는 러시아의 “노래 가락”이 또 어떻게 녹아들어 있는지 귀 기울이는 것도 흥미로울 듯하다.
두 번째는 왈츠 등 춤곡의 비중이 크게 차지한다는 점이다. 필자의 경험으로도 슬라브 민족은 왈츠, 마주르카 등의 리듬을 좋아하며, 연주회장이나 무도회장, 심지어 가정에서도 이런 음악들을 즐기고 있다. 그들만의 특징인지는 모르나 이 앨범에 실린 글린카, 루빈스타인, 리아도프, 티토프(육군 소장으로 아마추어 작곡가였다.) 등의 작품들은 실제로 감상과 함께 춤추기에도 용이하며, 당시 러시아 부르주아들의 생활상과 분위기를 느끼기에 안성맞춤이다.
마지막으로 100여 년 이상의 세월의 작곡가와 연주자 사이의 거리를 묶어주는 공통분모인 명인기(비르투오시즘)이다. 러시아인들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작품을 꿰뚫는 선이 굵은 표정 위에 곁들여지는 화려한 옥타브, 반음계, 눈부신 스타카토 등의 효과는 그야말로 매력적이다. 개인적으로 리스트나 쇼팽의 피아니즘에 영향 받은 작곡가나 피아니스트가 가장 효과적으로 그 결실을 거둔 곳이 바로 러시아 음악계가 아닌가 여겨지는데, 지금은 거의 사라져버린 살롱 음악의 전통을(여기서는 스크리아빈이나 라흐마니노프도 포함하여) 느끼면서 당시의 분위기를 상상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 필자 : 김주영 (피아니스트)
서울 출생. 서울 음대 기악과 졸업. 러시아 모스크바 음악원 아스피란트(박사) 과정 졸업.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사무엘 파인베르크의 제자인 지나이다 이그나체바 교수를 사사. 유학 중 모스크바 프로코피에프 콩쿠르, 파리 인터내셔널 그랜드 콩쿠르 등에서 입상.
Track
01 Glinka/Balakirev: Farewell to Petersburg No. 10 The Lark / 글린카 가곡집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이별> 중 10번 <종달새> (발라키레프 편곡)
02 Titov Waltz in f / 티토프 왈츠 f단조
03 Titov Waltz in G / 티토프 왈츠 G장조
04 Titov Waltz in e / 티토프 왈츠 e단조
05 Alyabiev/Liszt: The Nightingale / 알랴비에프 가곡 <나이팅게일> (리스트 편곡)
06 Rubinstein Waltz in Ab, Op. 14 No. 4 / 루빈스타인 왈츠 작품 14-4
07 Rubinstein Waltz in F, Op. 82 No. 5 / 루빈스타인 왈츠 작품 82-5
08 Glinka Souvenir de Mazurka / 글린카 <마주르카의 추억>
09 Rubinstein Barcarolle in a, Op. 93 No. 3 / 루빈스타인 뱃노래 작품 93-3
10 Tchaikovsky Scherzo humoristique in D, Op. 19 No. 2 / 차이코프스키 <유머러스한 스케르초>
11 Balakirev: Au jardin (Etude-Idylle in Db) / 발라키레프 <정원에서> (목가적인 연습곡)
12 Liadov Mazurka in d, Op. 15 No. 2 / 리아도프 마주르카 작품 15-2
13 Liadov Mazurka rustique in G, Op. 31 No. 1 / 리아도프 <시골풍의 마주르카> 작품 31-1
14 Glazunov Etude in E, Op. 31 No. 3 / 글라주노프 에튀드 작품 31-3
15 Arensky: Le ruisseau dans la foret, Op. 36 No. 15 / 아렌스키 <개울과 숲> 작품 36-15
16 Arensky Etude in F#, Op. 36 No. 13 / 아렌스키 에튀드 작품 36-13
17 Scriabin Prelude in A, Op. 15 No. 1 / 스크리아빈 프렐류드 작품 15-1
18 Scriabin Prelude in f#, Op. 15 No. 2 / 스크리아빈 프렐류드 작품 15-2
19 Scriabin Waltz in Ab, Op. 38 / 스크리아빈 왈츠 작품 38
20 Rachmaninov Prelude in G, Op. 32 No. 5 / 라흐마니노프 프렐류드 작품 32-5
21 Rachmaninov Etude-tableau in e flat, Op. 33 No. 6 / 라흐마니노프 회화적 연습곡 작품 33-6
22 Rachmaninov Etude-tableau in Eb, Op. 33 No. 7 / 라흐마니노프 회화적 연습곡 작품 33-7
Moscow Salons of Bygone Days: Yelena Alexandrovna Bekman-Shcherbina (1882-1951) / 옛날의 모스크바 살롱 - 엘레나 알렉산드로프나 베크만-셰르비나
The "grande dame" in our second pianists' gallery as born towards the end of the 19th century, just six months before Stravinsky, and her artistic career spanned the first half of the 20th century. Her playing breathed the elegant, sentimental and patriotic atmosphere of the Russian salon at the turn of the century. This atmosphere was fruitful ground and nourished a unique pianistic culture which blossomed and was admired the world over.
우리의 두 번째 피아니스트 갤러리의 “여성 제1인자”는 19세기말쯤에 스트라빈스키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으며, 그녀의 예술 경력은 20세기 전반에 펼쳐졌다. 그녀의 연주는 세기의 전환기에 러시아 살롱의 우아하고 감성적이며 애국적인 분위기를 불어넣었다. 이 분위기는 유익한 기초였으며, 전 세계적으로 꽃피우고 존경받았던 독특한 피아니스트 문화를 향상시켰다.
Early Years / 어린 시절
Like Alexander Scriabin, the pianist was born at the very end of the year - and so the year of her birth "varies" according to which calendar one goes by. According to the Julian calender (which was valid in Russia up until 1917), she was born on the last day of the year 1881; but according to the Gregorian calendar (which is employed where the orthodox church has no influence), she was born on 12 January 1882. Her mother died shortly after her birth and she was adopted by her mother's sister - for which the pianist was eternally grateful and which she publicly demonstrated by taking their family name, Shcherbina, as her stage-name instead of her real name, Kamentseva. At the age of six she took music lessons in Nikolai Zverev's preparatory class (both Scriabin and Rachmaninov had been prepared by Zverev to enter the Moscow Conservatory). Five years later she studied with Pavel Pabst (pupil of a pupil of Czerny and himself teacher of Goldenweiser among others) and after his death in 1897 with Vasily Safonov, an internationally renowned pianist and conductor who also directed the Conservatory for a number of years. For her final examination (for which she received a gold medal), she not only prepared the set pieces but the whole of Bach's "Well-tempered Clavier"!
알렉산더 스크리아빈과 마찬가지로, 피아니스트는 연말에 태어났다. - 그래서 그녀의 출생연도는 어떤 달력을 따르느냐에 따라 다르다. (1917년까지 러시아에서 유효했던) 율리우스력에 의하면, 그녀는 1881년의 마지막 날에 태어났지만, (정교회가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곳에서 쓰였던) 그레고리력(1582년에 그레고리 13세가 제정한 서력 기원력)에 의하면, 1882년 1월 12일에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가 태어난 직후 사망했으며 그녀는 이모에게 입양되었다. - 그녀는 이모에 대한 영원한 감사로 이모의 가족의 성인 셰르비나를 그녀의 실명 카멘체바 대신에 무대 이름으로 공개적으로 사용했다. 6세에 그녀는 모스크바 음악원 예비학교에서 스크리아빈과 라흐마니노프를 가르쳤던 즈베레프의 클래스에 들어갔다. 5년 후에는 (체르니의 제자의 제자이자 그 자신이 골덴바이저 등의 스승인) 파벨 파브스트를 사사했으며, 1897년 파브스트의 죽음으로 인해 모스크바 음악원의 총장을 역임하기도 했던 국제적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바실리 사노포르를 사사했다. 음악원 졸업 시험을 위해 과제곡들을 준비했을 뿐만 아니라 바흐 평균율 전곡도 준비했는데, 금메달(수석졸업)을 받았다!
Avant-Garde and Children's Song / 아방가르드와 어린이들의 노래
In 1907 the pianist joined the circle around Maria Deysha-Sionitskaya, the Bolshoi Theatre's legendary prima donna, who organized a series of concerts at which Russian composers could present their latest works. Yelena Shcherbina took part in these so-called "Evenings of Contemporary Music" where she got to know Scriabin and consequently gave numerous first performances of his works. A distinguished guest one evening in 1913 was Claude Debussy! It was she who acquainted the Russian public with works by Debussy, Ravel, Roger-Ducasse, Albeniz and Sibelius. Together with the tenor Ivan Alchevsky a tour was planned for 1914/15 but had to be cancelled due to the outbreak of the First World War. Yelena Shcherbina was very fond of young people and published a number of piano pieces for children. Together with her husband, the agriculturalist Leonid Bekman, she wrote the words and music of a little song entitled "A little fir tree grew in the forest" which became so popular that no children's New Year celebration was complete without it.
1907년에 그녀는 러시아 작곡가들이 그들의 후기 작품들을 보여줄 수 있도록 하는 콘서트 시리즈를 조직했던 볼쇼이 극장의 전설적인 프리마돈나 발레리나인 마리아 데이샤-시오니츠카야 주변의 모임에 합류했다. 엘레나 셰르비나는 이른바 <현대음악의 밤>에 참가하여 스크리아빈을 알게 되었으며 그 결과 그의 작품의 첫 연주를 많이 가졌다. 1913년 어느 날 저녁의 유명한 손님이 클로드 드뷔시였다! 러시아 대중이 드뷔시, 라벨, 로제-뒤카스, 알베니스, 시벨리우스의 작품들을 알게 된 것이 그녀를 통해서였다. 테너 이반 알체프스키와 함께 1914/15 투어를 계획했지만 1차 세계대전 발발로 취소해야만 했다. 엘레나 셰르비나는 아동을 매우 좋아해서 어린이들을 위한 많은 피아노곡들을 출판했다. 농업 전문가인 남편 레오니드 베크만과 함께 그녀는 <숲에서 자란 전나무>라는 제목의 어린이 노래의 가사와 음악을 썼는데, 너무 유명해져서 그것 없이 완성된 어린이들의 새해 기념행사가 없을 정도였다.
Education a Priority / 교육에 우선하다
Yelena Bekman-Shcherbina gave lessons from the age of twelve and in 1912 she even founded her own music school which existed until 1918. As early as 1908 she was given a teaching appointment at the popular State Institute for Music Education founded by the three Gnesin sisters, and here she also taught for a quarter of a century after the Russian Revolution. During the uprising she gave so-called "educational" concerts whose programmes covered music going back as far as the 12th century! She played a great deal of chamber music and accompanied famous singers and instrumentalists - such as the cellist Gregor Piatigorsky. It was with Piatigorsky and the violinist Lev Tseytlin that she gave the first Russian performance (in 1921) of Ravel's Piano Trio. In 1924 she discovered her enthusiasm for the new medium of radio, and during the Second World War she gathered a faithful throng of listeners. In 1940 Yelena Bekman-Shcherbina was given a professorship at the Moscow Conservatory where she taught until her death on 30 September 1951.
엘레나 베크만-셰르비나는 12세부터 레슨했으며 1912년에는 음악학교도 설립했는데 1918년까지 존재했다. 1908년 초, 그녀는 3명의 그네신 자매가 설립한 유명한 음악교육기관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여기에서 그녀는 러시아 혁명 이후 25년 동안 가르쳤다. 봉기가 일어나는 동안 그녀는 이른바 “교육적인” 연주회들을 가졌는데, 프로그램들은 12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음악까지 아울렀다! 그녀는 많은 실내악을 연주했으며 유명한 성악가들과 첼리스트 그레고르 피아티고르스키 같은 기악 연주자들을 반주했다. 그녀는 (1921년에) 라벨 피아노 트리오의 첫 러시아 연주를 가졌는데, 피아티고르스키, 바이올리니스트 레프 세이틀린과 함께 했다. 1924년에 그녀는 새로운 라디오 매체에 대한 열정을 가지게 되었고, 2차 세계대전 동안 많은 충실한 청취자들을 모았다. 1940년에 엘레나 베크만-셰르비나는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로 임명되어 1951년 9월 30일 영면할 때까지 가르쳤다.
The pianist was famous not only for her remarkable memory but also for her diligence (she recorded no less than 700 works for radio alone) and her warm, cantabile touch which lent her performances a diaphanous, water colour like character full of lyricism. Her concise autobiography "Reminiscences", already in its second edition, is highly revealing and informative both as to Russian pianism during the first half of the 20th century and her acquaintanceship with Scriabin, Rachmaninov, Debussy, Ravel and Prokofiev.
그녀는 놀라운 암보뿐만 아니라 근면함(라디오만으로도 700여 곡에 달하는 작품 녹음)과 함께 서정적인 성격의 곡에서 물 흐르는 듯한 터치를 구사하는 연주로도 유명했다. 러시아 피아노 스쿨 두 번째 에디션에서 이미 그녀의 간결한 자서전 <추억들>은 20세기 전반의 러시아 피아니즘과 함께 스크리아빈, 라흐마니노프, 드뷔시, 라벨, 프로코피에프와의 친분에 대한 것 모두에서처럼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보여주고 유용한 정보를 준다.
Fin-de-Siecle Flair / 세기말의 재주
This compact disc presents a programme of music which conjures up the musical salon at the turn of the century.
이 음반은 세기의 전환기에 음악 살롱을 연상케 하는 음악 프로그램을 선사한다.
It is all here: the classical romance in the form of Glinka's song "The Lark", arranged by Balakirev, leader of the "Russian Five", and the even more frequently performed and legendary work "The Nightingale" composed by the otherwise little known Alyabiev whose melody even caught Franz Liszt's imagination. The Russian people's love of nature is reflected in Balakirev's "idyllic" etude entitled "Au Jardin" (In the Garden) and in the character piece "Le Ruisseau dans la Foret (The Stream in the Forest) by Anton Arensky, a member of the younger generation who was to pass on his love for the salon to his most accomplished pupil Rachmaninov, who in turn also wrote a number of works specifically entitled "Morceaux de Salon". The other pieces presented here have clearly been influenced by Chopin. In "Souvenir de Mazurka" Glinka makes reference to Polish folklore. Arensky's etudes and Rachmaninov's clearly more modern ones take up the most technically demanding genre to which the Frenchman-by-choice Chopin applied himself.
그것은 모두 여기에 있다. - “러시아 5인조”의 리더인 발라키레프가 편곡한 글린카의 가곡 <종달새>와 프란츠 리스트의 상상력을 자극하지 않았다면 거의 알려지지 않았을 알랴비에프가 작곡한 멜로디를 리스트가 편곡한 훨씬 더 자주 연주되는 전설적인 작품 <나이팅게일>에는 고전적인 낭만이 있다. 러시아인들의 자연에 대한 사랑은 발라키레프의 <정원에서>라는 제목이 붙은 “목가적인” 에튀드와 안톤 아렌스키의 성격 소품 <개울과 숲>에 반영되어 있다. 아렌스키는 그의 가장 기량이 뛰어난 제자 라흐마니노프에게 살롱을 대한 그의 사랑을 전했던 더 젊은 세대의 일원으로, 라흐마니노프는 <살롱 풍의 소품>이란 제목의 작품들을 차례차례 많이 쓰기도 했다. 여기에 있는 다른 곡들은 분명히 쇼팽의 영향을 받았다. <마주르카의 추억>에서 글린카는 폴란드의 전통 문화를 참고한다. 아렌스키의 에튀드와 라흐마니노프의 분명히 더 현대적인 에튀드는 선택에 의해 프랑스인이 된 쇼팽이 그 자신에게 적용했던 기술적으로 가장 까다로운 장르를 계속한다.
Rachmaninov furthered Chopin's art of poeticizing study pieces and developed them into "Etudes-tableaux" (picture studies) to which, however, he did not attach a programme: he wanted his music to spring from a sort of "concrete ambiguity" which should inspire the listener's fantasy. A musical form of even greater historical importance was the Prelude which was taken up by Chopin who, following Bach's example in his "Well-tempered Clavier", also wrote a set of preludes in all 24 possible major and minor keys, in a romantic vein. In his opus 15 Scriabin reveals something of his unusual and highly personal tonal colouring and harmony which was to come while the more conservative Rachmaninov in his opus 32 actually sounds more progressive thanks to its later date of composition.
라흐마니노프는 시적인 쇼팽 연습곡들의 예술을 향상시키고 <회화적 연습곡>으로 발전시켰지만, 프로그램에 넣지 않았다. - 그는 청취자의 환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일종의 “사실에 근거한 모호성”으로부터 그의 음악이 나오길 원했다. 더 역사적인 중요성을 가진 음악적 형식은 바흐 평균율 사례를 따르면서 낭만파 스타일에서 24개의 장조와 단조가 모두 가능한 프렐류드도 썼던 쇼팽에 의해 시작된 것이었다. 스크리아빈은 그의 프렐류드 Op. 15에서 그의 특이하고 매우 개성적인 음색의 색깔과 화성을 드러내지만 더 보수적인 라흐마니노프는 사실 나중에 작곡한 덕분에 그의 프렐류드 Op. 32에서 실제로 더 진보적으로 들리는 것이 예상되었다.
As a piece of dance music, the waltz was of even greater importance to the Russian aristocracy and upper classes than to the West Europeans. It could long be heard, often as a piano duet, in the remotest of areas. The composer Titov (1800-1875) was one of the first to write such pieces, followed by Anton Rubinstein, the (somewhat) elder of the two pianist brothers. Anton was later to found the first Russian Conservatory of Music in St. Petersburg; one of his very first students was Tchaikovsky, his most talented but highly rebellious pupil.
댄스곡으로서 왈츠는 서유럽 사람들보다 러시아 귀족들과 상류층에게 훨씬 더 중요했다. 가장 먼 지역에서는 피아노 듀오로 오랫동안 들을 수 있었다. 작곡가 티토프(1800~1875)는 이런 곡들을 처음 쓴 사람들 중의 한 명이었고, 이어서 두 명의 피아니스트 형제들 중에서 형인 안톤 루빈스타인이 뒤를 따랐다. 안톤 루빈스타인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러시아 음악원을 처음으로 설립했다. - 그의 가장 첫 제자들 중의 하나가 차이코프스키로, 그의 가장 재능 있으나 반항적인 제자였다.
Humour in music is not easy to achieve: Tchaikovsky reached back to native folk dances which he heard while replenishing his creative powers in the Russian countryside during the summer months. And it is to the countryside that Liadov, 15 years his junior, takes us in his "Mazurkas rustiques", which in return are reminiscent of Chopin but also clearly Russian - thanks to their tonal colouring. This can hardly be said of the "Barcarolle" by Rubinstein, a Jewish-Baltic-German. During his day, Russian national music had not yet firmly established itself which is why Rubinstein was regarded by Glinka and his followers such as Mussorgsky and Borodin as a through and through "Western" musician like Mendelssohn.
음악에서 유머는 쉽게 성취할 수 없다. - 차이코프스키는 여름 시절 러시아 지방에서 자신의 창조력을 보완하면서 들었던 민속춤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5세 소년 리아도프가 차례로 우리에게 <시골풍의 마주르카>를 주는 것은 쇼팽을 연상케 하지만 음색의 색채 때문에 분명히 러시아적인 것이기도 한 것으로 지방에 있다. 이것은 거의 유태계-발트-독일계인 안톤 루빈스타인의 <뱃노래>에 대해서는 거의 말할 수 없다. 그 당시 러시아 국내 음악은 확고하게 자리 잡지 않았기 때문에 루빈스타인은 글린카와 (무소르그스키와 보로딘 같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하나부터 열까지 멘델스존 같은 “서방” 음악가로 여겨졌다.
To put it in a nutshell, we have journeyed through a century of music. Better said: we have travelled through the century of Russian piano music, beginning with the early "European" bourgeois style and leading up to the highly expressive works written shortly before the First World War when Stravinsky created a furore in Paris with his "Sacre du printemps" which shattered the sound world of the late Romantic era.
간단명료하게 말하면, 우리는 한 세기의 음악을 여행해왔다. 더 길게 말하면 - 우리는 초기 “유럽식” 부르주아 양식으로 시작하여 스트라빈스키가 파리에서 그의 작품 <봄의 제전>으로 후기낭만파 시대의 음악 세계를 산산조각 냈던 소동이 있었던 1차 세계대전 직전에 쓴 매우 표현이 풍부한 작품들로 향하는 러시아 음악의 100년을 여행해왔다.
https://www.youtube.com/watch?v=O9IEvXbJPmI
11번째 음반부터는 pdf 파일이 없어서 이미지 파일을 보면서 직접 타이핑했다.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연주자인데 러시안 피아노 스쿨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는 교육자가 더 많다. 11번째 음반부터 표지 디자인 방식이 바뀌었다. 영어 내지도 글의 전개 방식이 바뀌었다. <숲에서 자란 전나무> 노래가 있나 찾아봤더니 유튜브에서 몇 개 나왔다. 영어로 된 내지에서 아렌스키의 곡 제목이 <숲속의 나이팅게일>로 나와서 <숲속의 개울>로 고쳤는데, 한글 제목을 찾아보면 <개울과 숲>으로 나온다. 한글 정보를 영어에 별로 활용하지 않게 되었고 해석이 힘들어졌다.
https://classicalpippo9.com/2017/10/24/russian-pianist-school-vol-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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