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5일 금요일
Brilliant Classics / Legendary Russian Pianists CD19 Lazar Berman
CD19 Lazar Berman / 라자르 베르만
01 Liszt Sonata 'Apres une lecture de Dante' (from Annees de Pelerinage II: Italie) / 리스트 <단테 소나타>
02 Liszt Mephisto Waltz No. 1 / 리스트 메피스토 왈츠 1번
03 Liszt Etudes d'execution transcendante No. 1 Prelude /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1번 <전주곡>
04 Liszt Etudes d'execution transcendante No. 3 Paysage /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3번 <풍경>
05 Liszt Etudes d'execution transcendante No. 5 Feux follets /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5번 <도깨비불>
06 Liszt Etudes d'execution transcendante No. 6 Vision /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6번 <환영>
07 Liszt Etudes d'execution transcendante No. 10 in f: Appassionata /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10번
08 Liszt Etudes d'execution transcendante No. 11 Harmonies du soir /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11번 <밤의 선율>
09 Liszt Etudes d'execution transcendante No. 12 Chasse-neige /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12번 <눈치우기>
10 Liszt Rhapsodie espagnole / 리스트 스페인 랩소디
Lazar Berman (1930-2005) / 라자르 베르만
Principal teachers: Anna Lazarevna Mahover (mother), Samary Savshinsky, Alexander Goldenweiser / 안나 라자레프나 마호버(어머니), 사마리 사브신스키, 알렉산더 골덴바이저 사사
Prizes:
1951 - Festival of Democratic Youth in East Berlin, 1st / 동베를린 공산주의 청소년 축제 1위
1956 - Queen Elisabeth Competition, 5th / 퀸엘리자베스 콩쿠르 5위
1956 - Liszt Competition in Budapest, 3rd joint with Liu Si-Kun / 부다페스트 제3회 리스트 콩쿠르에서 류시쿤과 공동 3위
'The phenomenon of the musical world' (Emil Gilels). Berman was born in Leningrad, but moved to Moscow in 1939, making his concerto debut the following year, aged ten, playing Mozart's Piano Concerto No. 25, K. 503 with the Moscow Philharmonic under Grigori Stolyarov. The next year Berman made his concerto debut with the Moscow philharmonic under the respected Grigory Stolyarov, playing K. 503 again. In the West his career was an on/off affair. Following Brussels in 1956 and London in 1958, he wasn't to tour outside the USSR for 13 years, not until 1971. 'No one invited me,' he used to say. The truth was that the invitations never got past Goskoncert, the state-run agency. In those intelligence-gathering, KGB-monitored, them-and-us days, crammed into a tiny Moscow apartment with a French wife, his mother and a piano, he was effectively a chained man, ignored by a world readier to chase the latest competition winner than tangle with Red authority.
‘음악세계의 현상(에밀 길렐스).’ 베르만은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났으며 1939년에 모스크바로 이주하여 이듬해(1940년) 10세에 그리고리 스톨리야로프의 지휘로 모스크바 필하모닉과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5번을 연주하여 협주곡 데뷔를 가졌다. 이듬해(1941년)에 베르만은 훌륭한 그리고리 스톨리야로프의 지휘로 모스크바 필하모닉과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5번을 다시 연주하면서 협주곡 데뷔를 가졌다. 서방에서 그의 경력은 계속되다가 끊어졌다가 하는 문제였다. 1956년 브뤼셀과 1958년 런던에 이어 1971년까지 13년 동안 소련 밖을 여행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도 나를 초대하지 않았다’고 말하곤 했다. 그 진실은 소련 연방 콘서트 에이전시인 고스콘서트를 통과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정보 수집에서 KGB가 감시했던 고통의 나날들은 프랑스인 아내, 그의 어머니, 피아노를 좁은 모스크바 아파트로 쑤셔 넣었으며, 그는 사실상 사슬에 묶인 남자였는데, 붉은 권위와의 싸움에 휘말린 것보다 가장 최근의 콩쿠르 입상자를 쫓는 것에 준비된 세계에 의해 무시되었다.
With his third marriage in 1968, his luck changed. Building on successful Italian visits in the early 1970s, the high-profile support of Michelangeli and Richter, and a contract with DG to record the Tchaikovsky B flat minor with Karajan, a tour of the United States was offered to him for early 1976 - packaged and orchestrated by Jacques Leiser to a fanfare of notices in response to HMV/Melodiya's strategic reissue of the 1963 Liszt "Transcendentals" - old session work minted overnight into valuable, suddenly 'famous' currency. His New York debut, playing the Tchaikovsky with Lukas Foss on 17 January, prompted Harold C. Schonberg of the "New York Times" to opine that 'he may be that rarest of musicians - a real, true blue Romantic, one who understands the conventions and has the ability to put them into effect.' American audiences adored him, wanting to re-experience the euphoria they'd gone through with Gilels a couple of decades earlier, and Horowitz 20 years before that - to relive the same battle - charging repertory, thunder-weight division "a la lusse". In London he made a 'spectacular' return with the Rachmaninoff D minor Concerto under Claudio Abbado (30 November), following up five days later with Prokofiev's Eighth Sonata and Liszt's Transcendental Studies before a packed house of three thousand.
1968년 세 번째 결혼으로 그의 운이 바뀌었다. 1970년대 초의 성공적인 이탈리아 방문으로 미켈란젤리와 리히터로부터 세간의 이목을 끄는 지원을 받았으며, 카라얀과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녹음하기 위해 DG와의 계약인 미국 투어가 1976년 초에 그에게 제공되었는데, HMV/멜로디야 레이블의 1963년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음반의 전략적인 재발매에 대한 반응으로 대대적으로 축하하는 것을 알리는 의미로 자크 레이서가 모아서 편곡한 것으로, 소중하게도 갑작스럽게 ‘유명해진’ 인기로 하룻밤 사이에 최근 생겨난 오랜 시간의 작업이었다. 1월 17일 루카스 포스의 지휘로 차이코프스키 협주곡 1번을 연주한 뉴욕 데뷔에 대해 <뉴욕 타임스>의 평론가 해럴드 숀버그는 다음과 같이 견해를 밝혔다. ‘이 세상에 가장 희귀한 음악가이며. 정말 진짜 우울한 낭만주의자이고 무대 위에서 효과적으로 쏟아낼 수 있는 사람이다.’ 미국인 청중들은 그를 그리워하여 20년 전에 길렐스와 함께 했던 행복감을 원했으며, 20년 전에 호로비츠가 같은 전투를 재현하기 위해 연주했던 것처럼 “러시아 풍의” 번개 같은 레퍼토리를 요구했다. 런던에서 그는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3번(클라우디오 아바도 지휘)으로 ‘화려한’ 복귀를 가졌으며 이어서 5일 후에는 3천 명이 운집한 공연장 앞에서 프로코피에프 소나타 8번과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을 연주했다.
By November 1979, however, 'Lazar looked tired, nervous, and even dispirited. In private, he did not hide how hard he took the Soviet officials' refusal to let his wife join him [...] No wonder that his playing was slightly dimmed' (Dmitri Paperno). A few months later, accused of 'anti-Soviet smuggling' with banned American literature discovered in his luggage, the Great Dream was over. By the time he got back on the road, his glory days with DG and Columbia over, the supernova that had so dazzled the seventies was no more. Its ghost, though, the memory of what once had been, helped keep the legend alive. In August 1990, the USSR in free fall, Berman and his family left Moscow via Norway to settle in Florence, taking Italian citizenship four years later. Largely disenchanted with the rigours of concert life, semi-retired, he ended his days teaching (principally in Imola, but also in Weimar), taking master-classes, bringing his weight to the competition jury circuit, playing chamber music, and occasionally dusting off the Tchaikovsky with a provincial or radio orchestra. And he found time to write his memoirs, translated into German in 2003.
그러나 1979년 11월까지 ‘라자르는 피곤해보였고 긴장했으며 심지어 파문을 일으켰다. 사적으로 그는 아내가 그에게 합류하게 하려는 소련 관리의 거부를 얼마나 당했는지 숨기지 않았다. [...] 그의 연주가 약간 어둡게 될 만도 하다(드미트리 파페르노).’ 몇 달 후, 그의 가방에서 발견된 금서로 지정해놓은 ‘반 소련 밀수품’으로 체포되어 그의 ‘큰 꿈’은 끝났다. DG 및 컬럼비아 레이블과 함께 했던 영광의 날들이 끝나갈 무렵, 70년대를 정말 황홀하게 했던 초신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한때 있었던 추억이었지만 그 영혼은 전설이 계속 살아있게 했다. 소련이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면서 이 간섭의 빈도가 줄어들었던 1990년 8월, 베르만과 그의 가족은 모스크바를 떠나 노르웨이를 거쳐 피렌체에 정착했으며 4년 후 이탈리아 시민권을 획득했다. 엄격한 연주 인생에 크게 환멸을 느끼고 반쯤 은퇴한 그는 (특히 이몰라뿐만 아니라 바이마르에서도) 가르치고 마스터클래스를 가지고 콩쿠르 심사위원에 무게를 두고 실내악을 연주하며 가끔 지방 또는 라디오 오케스트라와 차이코프스키를 오랜만에 연주하면서 여생을 마쳤다. 그리고 그는 2003년에 독일어로 번역된 그의 자서전 <순례의 해. 음악가의 꿈>(The Years of Peregrination, A Musician's Reverie)을 쓸 틈을 냈다.
Berman was 'A bear of a man with a mane of chestnut hair and a ginger bread [...] like a character actor in a Chekhov play' ("The Times", 10 February 2005); a Leningrader trained under Stalin's flag; a Muscovite who lived through Khrushchev's Thaw, Brezhnev's Cold War, the Gorbachev's years of "glasnost, perestroika" and Chernobyl, and a Jew who incurred the wrath of but survived the Hades of Brezhnev/Andropov anti-semitism, anti-religion and non-detente. Compassionate, good-humoured, wanting to 'give pleasure to people [...] pleasure and joy with my art' (1982), Berman of the chords and octaves was a pianist of incandescent technique, as celebrated for the near-impossible (his famous 1963 "Spanish Rhapsody" recording) as the party-going stunt (playing a Chopin sonata with hands crossed). His bravura and flagrant heart-on-the-sleeve emotions weren't to everyone's taste, though. Many Westerners back in 1976 - the anti-Romantic Revivalists, the Teutonically biased - saw him as a barn-storming charlatan of shadow gesture, careless error and muddy pedalling, a speed-and-strength merchant inclined towards dynamic overkill with a tendency 'to pull out all the stops rather too often' (Joan Chissell). To an extent this was an opinion held even in certain Moscow circles. 'For a long time,' Dmitri Paperno notes, 'Lyalik was underestimated in our homeland, considered basically an outstanding virtuoso pianist without a sufficiently expressed musical personality. It is enough [however] to listen to his Liszt, his Brahms, to much of his Beethoven, to realize that this is not so.' At his most spiritual, however, Berman could be, was often, an eloquent poet, a bard weaving tales, a wandering Slav remembering through smoke-circles. Goldenweiser (for whom he could little wrong), Neuhaus and Sofronitzky (his 'god') all recognized this. 'Berman's passion, tirelessness, endless giving, and love of his art were contagious. He taught us to believe that even if we didn't have, or might never have, great careers we would still end up with the greatest of gifts - the love of music' (Nadejda Vlaeva).
베르만은 ‘체호프의 연극에 나오는 인물처럼 [...] 밤색 머리털과 허약함을 지닌 덩치가 큰 사람이었다(2005년 2월 10일 <더 타임스>).’ - 스탈린의 깃발 아래에서 훈련된 레닌그라드 사람으로, 흐루시초프의 해빙기, 브레즈네프의 냉전, 고르바초프의 “경제구조 개혁(글라스노스트)과 언론 해방(페레스트로이카)”의 해와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해를 겪은 모스크바 사람이었으며, 당국의 노여움을 샀지만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의 하데스(죽은 자들의 나라), 반유대주의, 반 긴장완화에서 살아남은 유태인이었다. 어질고 쾌활하면서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고 [...] 내 예술로 행복과 기쁨을 주길’ 원하는(1982), 화성과 옥타브의 베르만은 (양손이 교차하는 쇼팽 소나타를 연주하면서) 파티를 벌이는 묘기만큼 거의 불가능한 것(그의 유명한 1963년 리스트 <스페인 랩소디> 녹음)으로 유명한 눈부시게 밝은 테크닉을 가진 피아니스트였다. 고도의 예술적 기교를 보여주면서 분명하게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냈지만 모든 사람의 취향은 아니었다. 1976년에 돌아온 많은 서방 사람들, 게르만 민족 특유의 편견을 가진 반낭만주의 복고주의자들은 그를 그림자, 부주의한 오류와 탁한 페달링을 지닌 아주 재밌는 돌팔이, ‘오히려 너무 자주 온갖 노력을 다하는(조안 치셀)’ 경향이 있는 다이내믹 과잉의 성향이 있는 스피드-파워광으로 보았다. 어느 정도 이것은 특정 모스크바 모임에서도 포착되었던 의견이었다. 드미트리 파페르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오랫동안 리알리크(라자르 베르만)는 충분히 뛰어난 음악적 개성이 없이도 두드러지는 거장 피아니스트로 간주되어 본국에서 과소평가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으려면 그의 리스트, 그의 브람스, 그의 중요한 베토벤을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가장 영적일 수도 있었던 베르만은 종종 달변인 시인, 이야기를 짜는 시인, 애연가 집단을 보면 기억나는 방황하는 슬라브인이었다. (약간 돌았을 수도 있는) 골덴바이저, 네이가우스, (그의 ‘신’) 소프로니츠키 모두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베르만의 열정, 지칠 줄 모르는 끝없는 기부, 그의 예술에 대한 사랑은 전염성이 있었다. 그는 우리에게 훌륭한 경력을 갖지 못했거나 결코 가질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최고의 재능으로 끝날 것이라고 믿도록 가르쳤다(나데이다 블라예바).’
Liszt: Apres une lecture du Dante, Fantasia quasi Sonata, S. 161 No. 7 (1839 rev. 1849) / 리스트 <단테를 읽고>
From the second book of "Annees de Pelerinage". Within it, Berman hears an 'inferno, people screaming, crying, suffering in pain, dying.'
<순례의 연보> 2권에 있는 곡. 베르만은 이 곡에서 ‘불바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울며 고통 받으면서 죽어가는 것’을 듣는다.
Liszt Mephisto Waltz No. 1 'Dance at the Village Inn', S. 514 (published 1862) / 리스트 메피스토 왈츠 1번 <마을 술집에서의 춤>
Transcribed by Liszt from the second of his "Two Episodes" from "Lenau's Faust" for orchestra (1859-61), this is one of the uncompromising battle-chargers of the repertory. Dedicated to Karl Tausig, the Mephisto Waltzes encapsulate the essence of Liszt the man for whom the devil and the gypsy sat equally at God's table.
오케스트라를 위한 <레나우의 파우스트>(1859~61년)에서 그의 <2개의 에피소드> 중 두 번째 곡을 리스트가 편곡한 것으로, 이 곡은 레퍼토리의 단호한 군마들(많이 연주되는 곡들) 중의 하나이다. 카를 타우지히에게 헌정된 메피스토 왈츠들은 남자에게 신의 테이블에 대등하게 앉은 악마와 집시에 대한 리스트의 본질을 압축한다.
Liszt Etudes d'execution transcendante, S. 139 (third version, 1851) /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3판
Defining modern piano technique, the Transcendental Studies (dedicated to Czerny) tell a story of infinite selection and metamorphosis, the legend of the double-escapement concert-grand from straight-strung wood frame to cross-strung iron. The following comments were made by Busoni.
현대 피아노 테크닉을 정의하는, (체르니에게 헌정된) 초절기교 연습곡들은 무한한 선택과 변신, 연속하는 현이 달린 나무틀부터 현이 교차하는 철까지 이중 탈진기[脫進機) : 기어의 회전 속도를 고르게 하는 장치] 콘서트그랜드피아노의 전설에 대해 이야기한다. 부조니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Liszt Etudes d'execution transcendante, S. 139 No. 1 Preludio /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1번 <프렐류드>
'A prelude to test the instrument and the disposition of the performer after stepping on to the concert platform.'
‘콘서트 무대를 밟은 후에 악기와 연주자의 기질을 테스트하기 위한 전주곡.’
Liszt Etudes d'execution transcendante, S. 139 No. 3 Paysage /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3번 <풍경>
'A calm renunciation of everything worldly - taking breath during the contemplation of nature, a self-contemplation but not quite without passion.'
‘세상 모든 것의 조용한 포기 - 자연을 사색하는 동안 호흡하면서 명상을 하되 전혀 열정이 없는 것이 아니다.’
Liszt Etudes d'execution transcendante, S. 139 No. 6 Vision /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6번 <환영>
'The funeral of the first Napoleon advancing with solemn and imperial pomp.'
‘엄숙하면서도 황제처럼 화려하게 전진하는 첫 번째 나폴레옹의 장례식.’
Liszt Etudes d'execution transcendante, S. 139 No. 10 in f /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10번
'The title "Appassionata" would well suit.'
‘<열정>이란 제목이 잘 어울릴 것.’
Liszt Etudes d'execution transcendante, S. 139 No. 11 Harmonies du Soir /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11번 <밤의 선율>
'The bell-like magic of the pianoforte [extended] with flattering and impetuous charm.'
‘돋보이게 하는 충동적인 매력으로 확장된 종소리 같은 피아노의 마법.’
Liszt Etudes d'execution transcendante, S. 139 No. 12 Chasse-neige /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12번 <눈치우기>
'The noblest example, perhaps, among all music of a poetizing nature - a sublime and steady fall of snow which gradually buries landscape and people.'
‘점점 풍경과 사람들을 묻어버리는 절묘하면서도 계속 눈이 오는 시 같은 자연의 모든 음악 중에서 아마도 가장 고귀한 예가 될 것이다.’
Liszt Rhapsodie Espagnol, Folies d'Espagne et jota aragonesa, S. 254 (c 1863) / 리스트 스페인 랩소디 <폴리아 데스파뉴와 호타 아라고네사>
Appropriated from Emil Gilels, an adrenalin-racing Berman warhorse - from the early fifties to his US debut in Cleveland, 14 January 1976.
에밀 길렐스에게 적절한, 아드레날린(흥분, 공포, 분노 등의 감정을 느낄 때 분비되는 호르몬)으로 쿵쿵 뛰는, 클리블랜드에서 1976년 1월 14일 미국 데뷔를 가졌던 50대 초반의 베르만 노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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