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먹는데 본의 아니게 다 먹은 접시에 수저와 포크를 포개놓지 않고 나란히 놨더니 다 가져가려고 해서 얼른 수저와 포크를 낚아챘다. 4년 전에도 그랬지만 폴란드로 날아와서 유튜브를 켜면 폴란드 광고가 뜬다. 그단스크에서는 주니어 피겨 그랑프리 시리즈가 열리고 있었다. 10시가 지나 공연장으로 걸어갔다. 공연장 오니 주변에 공사 중. 입구가 열렸는데 매표소 맞은편으로 가서 물어보니 공연 시작되기 한 시간이나 두 시간 전에 취소표 나오면 볼 수 있다고 했다. 매표소 앞에 앉아서 기다리니깐 6시에 와달라고 했다. 당시에는 나만 있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진 않았다. 4시 30분이나 5시에는 공연장으로 와야 할 것 같았다. 일단 편의점에서 물이랑 김밥이랑 콜라 샀는데 쫄쫄 굶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취소표가 안 나올 수도 있지만, 이미 산 사람들이 그때까지 취소 가능하다고 했다. 자브카는 폴란드의 대표적인 편의점 체인으로 뭔가 했더니 “작은 개구리”란 뜻. 거기서 귀여운 제로 펩시 250ml 짜리 발견!
호텔로 돌아오니 11시 40분이 지나 누가 똑똑 문을 두드렸다. 청소부일 것 같다 싶었는데, 와서 화장실을 청소했다. 동생이 있을 만하냐고 물어봐서 사실 한 달 전부터인가 막상 때가 되니깐 가고 싶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그런데 비행기를 타는 순간이 다가오니깐 나도 모르게 신나졌다고 말했다. 청소부가 침대도 정리해주고 물 필요하냐고 물어보면서 2병 줬다. 다시 문 두드리고 수건도 작은 것을 하나 줬다. 동생이 막상 가니깐 어떻냐고 물어봐서 괜찮다, 편하게 잘 있다고 답했다. 조식이 지겹지 않냐고 해서 약간 지겨워지려고도 한다고 했다. 생선도 나오고 베트남식인지 뭔지 밥도 나온다고 했다. 여긴 방에 냉장고가 없고 공연장은 찻길을 두 번 건너면 있다고 했다. 가까운 건 좋은데 서비스 같은 건 4년 전에 갔던 데가 더 좋은 듯. 동생이 5년 뒤엔 가지 말라고 해서 그때까지 가고 이후엔 완전히 접을 거라고 했다. 앞으로 티켓팅은 오프닝 콘서트랑 콩쿠르 이렇게 딱 두 가지만 하겠다고 했다. 오페라 극장 갈라 콘서트는 현지에서 하는 게 가장 안전하다. 4년 전에는 냉장고에 음료수도 보관하고 그랬는데 물은 몰라도 콜라 같은 건 제때 안 먹으면 미지근해진다.
여긴 밤에도 사람들이 많이 다닌다. 여럿이 모이기 좋아하고 그런 게 한국과 닮은 듯. 수다도 많고 말이 길다. 이웃나라 우크라이나의 사정이 어떻든지 여기 사람들은 즐겁고 활기차다. 4년 전이랑 똑같은 모습. 알베르토 몬디(일명 알베)가 밤늦게 남는 사람들은 한국과 이탈리아뿐이라고 했는데 여기도 왠지 그런 느낌. 폴란드는 인구 97%가 폴란드계로 옛날에 TV에서 동유럽의 단일민족국가라고 해서 이미 알고 있었다. 아침 먹으러 가면 나만 동양인이다시피 했다. 4년 전에도 아시아계를 식당에서 찾아보기 쉽지 않았다. 공연장 근처로 가야 중국계라든지 일본계가 보이는 편이었다. 어쩌다 영어 쓰는 사람들이 드물게 있었다.
오후 4시가 되어갈 무렵 유튜브에서 차준환 선수의 쇼트 경기를 봤다. 부츠 문제 때문에 테이핑을 했고 점프 실수가 나왔다. 바르샤바로 떠나기 전에 짐을 싸면서 올림픽 시즌 쇼트 곡 <비, 당신의 검은 눈동자에>(Rain, In Your Black Eyes)의 작곡가인 에치오 보소(Ezio Bosso)와 관련된 음반들을 이것저것 찾아서 정리한 다음 짐을 싸면서 들었다.
볼 일을 다 보고 5시 지나 공연장으로 출발. 이미 내 앞에 10명 넘게 줄 섰다. 점심 먹지 말고 쫄쫄 굶을 걸 그랬나? 10명 안에 들어야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4시에 올 걸 그랬나 보다. 내가 대충 15등 밖이었다. 계단에 앉았는데 6시가 지나니 내 뒤에 21명이 줄 섰다. 앉을 데도 없으니 서 있었다. 살면서 공연장에서 취소표 기다리긴 처음이었다. 4년 전 오프닝 콘서트에서 대충 5자리 넘게 비었던 것에서 힌트를 얻자면, 입상자 갈라 콘서트보단 수월할 것 같았다. 6시 30분이 지나니 내 뒤에 32명. 나도 지금 10번 밖이라 불안한데... 동양인 말고 서양인도 마스크 쓴 사람이 보였다. 6시 40분이 지나자 취소표를 판매하기 시작하려는 눈치였다. 콩쿠르는 공연 10분 전에 자리가 나야 판매인데... 1라운드에서 자기가 응원하는 참가자가 탈락하면 2차에 취소표가 풀리기도 한다고 본 것 같다. 이게 내 앞에 보이는 사람들로만 판단하면 안 되고 가족이나 친한 사람들이 합류하면서 내가 뒤로 밀리는 수가 있는데 정말 그랬다. 7시에는 방송국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늦게 온 사람들은 일하다가 와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7시 25분에도 티켓을 배부하지 않았다. 이러면 7시 50분까지 기다려야 하나보다고 생각하던 차에 7시 43분경 발권 시작. 그러다가 내가 3순위가 되었을 때 티켓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앞의 중국 여자-폴란드 남자 커플(?)이 카드 결제가 안 돼서 지체되었다. 결국 현금으로 결제하고 티켓 2장을 가져갔다. 다행히 내 차례가 되어 7시 57분에 극적으로 30즈워티를 카드 결제하고 티켓을 받았다. 앞서 표를 받은 사람들은 신난 표정으로 올라갔다. 매표소에서는 전화를 받느라 분주했다. 시간이 3분밖에 안 남아서 내 뒤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내 뒤에 60명 넘게 줄 선 듯.
표 검사하고 수색 요원이 검사하는데 너무 급한 나머지 가방 검사에 응하지 못했다. 막 뛰어왔는데 아무 데나 빈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내가 가고 나서도 대여섯 자리가 비었다. 한 20석 넘게 비었나 보다. 의자에 앉으니 딱 8시. 8시 3분에도 공연을 시작하지 않았고 다행히 해설자가 설명하는 시간이라 사람들이 들어왔다. 공연 진행자는 코로나19 때 머리를 잠시 기르기도 하셨던 분. 내 옆에도 자리가 비는데? 2층에서 보면 심사위원들을 영접하는 건데... 몇 미터 떨어진 위치에는 위앤판 양(Yuanfan Yang)이 보였다. 무대를 보니 배경이 갈색이라 가을 감성 물씬~
Chopin Polonaise No. 3 in A major, Op. 40 No. 1 “Military” (orchestral version by Grzegorz Fitelberg) / 쇼팽 폴로네즈 3번 <군대> (그제고즈 피텔베르크의 오케스트라 버전)
Warsaw Philharmonic Orchestra / 바르샤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Andrzej Boreyko, conductor / 안제이 보레이코 지휘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악기 튜닝에 들어갔다. 옛날에 TV에서 봤던 관현악 쇼팽... 이따금 심벌즈가 나왔다.
Saint-Saëns Piano Concerto No. 5 in F major, Op. 103 “The Egyptian” / 생상스 피아노 협주곡 5번 <이집트>
I. Allegro animato
II. Andante – Allegretto tranquillo quasi andantino – Andante
III. Molto allegro
... Bruce Liu, Fazioli
파치올리 피아노 설치. 오랜만에 보는 브루스 리우... 무대 바닥의 울림이 느껴진다. 날것 그대로의 느낌. 역시 실황은 다른데 난 주로 음반으로 접하다 보니... 앙코르는 안 해주네...
Intermission
홀 밖으로 나가니 멀리서 디아나 레이첼 쿠퍼(Diana Rachel Cooper)가 보였다. 홀 입구에서는 바로 2m 앞에 알베르토 페로(Alberto Ferro)가 보였다. 이번 대회 참가자 중 일부가 오프닝 콘서트를 보러 온 모양. 쉬는 시간에 공연장 입구로 내려갔다가 딱 걸려서 가방 검사 후 이상이 없으니 통과. 들은 거라곤 샤오미, 휴지, 물병 정도. 혹시 총기 들었을까 봐? 못 가진 카탈로그들을 마저 주웠는데 하늘색 프로그램북은 찾지 못했다. 쉬는 시간에 미스 폴란드 같은 아가씨들이 쟁반에 들고 있는 초콜릿을 하나 먹었다.
Poulenc Concerto for 2 Pianos & Orchestra in D minor / 풀랑크 2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I. Allegro ma non troppo
II. Larghetto
III. Allegro molto
... Yulianna Avdeeva, Steinway
... Garrick Ohlsson, Kawai
피아노 두 대 설치. 왼쪽은 스타인웨이, 오른쪽은 가와이. 역대 우승자들의 불꽃 튀는 대결?! 율리아나 아브제예바의 제1피아노 연주를 개릭 올슨의 제2피아노가 받쳐주는 것 같았다. 이 음악은 라베크 자매의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2악장이 흘러나왔는데 어떤 곡인지 나중에 알게 되어 이후에도 좋아하게 되었다. 앙~ 행복해~~~ 이 좋은 프로그램을 방에서 노트북으로 볼 순 없었다.
Intermission
J.S. Bach Concerto for 4 Pianos & Orchestra in A minor, BWV 1065 / 바흐 4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I. [Allegro]
II. Largo
III. Allegro
... Yulianna Avdeeva, Steinway
... Garrick Ohlsson, Yamaha
... Bruce Liu, Fazioli
... Dang Thai Son, Kawai
바흐 협주곡은 4년 전 오프닝 콘서트에서도 봤던 레퍼토리. 개릭 올슨이 야마하, 당 타이 손이 가와이. 뒤쪽에 있는 피아노는 어떤 종류인지 찾지 못해서 유튜브로 알아냈다. 이번 콩쿠르에서 사용되는 피아노 4종류를 한데 모았다. 바흐의 마지막 여운을 느끼고 싶은데 외국도 일명 “안다” 박수가 터진다. 마치 축제 같은 분위기였고 한 곡이 끝날 때마다 사람들이 신나게 휴대폰으로 무대를 찍었다. 브루스 리우는 당 타이 손과 나란히 앉아서 연주했다. 우승자 아담 하라셰비치의 제자 잉골프 분더는 2010년 준우승했다. 우승자 당 타이 손의 제자 브루스 리우는 2021년 우승했다. 전 세계에서 베트남 이겨본 나라는 없다고 들었다. 우승자의 제자가 입상한 사례는 있어도 우승자의 제자가 우승한 사례는 처음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프로그램북 1권, 목도리 3개, 이번 대회 에코백 3개를 샀다. 시몬 네링이 작년에 쇼팽 협회에서 낸 음반도 보였으나 당장 사진 않았다. (이미 쇼팽 박물관에서도 봤다.) 급한 것도 아니니 며칠 동안 천천히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만 29세에 루빈스타인 콩쿠르 우승자 자격으로 본선에 직행할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보여줄 게 딱히 없을 것이고 현명한 선택이라 생각. 지난 대회에서 네링의 입상 경력 때문에 할 수 없이 편들었더니 대회 내내 속 터지게 했다. 이후 레코딩 아티스트로 잘되라고 빌어주게 되었다. 쇼팽 박물관에서 본 프리체크 인형은 여기서 안 파나 보다. 목도리는 축구팀 응원용 스카프처럼 생겼다.
호텔로 돌아가니 11시에 가까워졌다. 자정이 되자 동생이 지낼 만하냐고 물어봐서 공연 즐거웠고 보면서 행복했다고 말했다. 다 내가 좋아하는 곡들인데 공연장도 가까운 데다가 집에서 도저히 노트북으로 못 보겠는 거였다. 실제로 본 레퍼토리는 바흐뿐! 이것 때문에 2주일 넘게 걱정하고 기분이 울적했나 보다. 이날 하루는 어떻게 보낼지 고민하고 있었다. 오페라 극장도 잘하면 가능할까? 9월 9일 티켓팅 때문에 PC방 가서 4,000원 날린 건 괜찮은데(동생이 네이버 페이로 지불) 오페라 극장 입상자 갈라 콘서트에 올인했다가 오프닝 콘서트도 못 잡아서 이 고생이다. 씻고 나서 일기가 밀리든 어쩌든 콩쿠르가 시작이니 새벽 1시 되기 전에 뻗었다. 차준환 선수의 데니스 텐 메모리얼 쇼트프로그램 13위 소식을 접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